소설방/금병매(金甁梅)

금병매 (180) 흉몽(凶夢) <26~30회>

오늘의 쉼터 2014. 7. 4. 22:19

금병매 (180)

 

 

흉몽(凶夢) 26회 

 

 

 

 이병아는,

“자, 따라오세요”

 




하고는 방을 나선다. 양세걸과 팽씨가 뒤따라 나간다.

본채로 이어진 회랑을 이병아는 말없이 앞장서서 걷고,

그 뒤를 양세걸과 팽씨가 따른다.

삼경이 지난 터라 집안 어디에도 불빛이 보이지가 않는다.

모두 잠든 깊은 밤중에 세 사람은 마치 그림자인 듯 소리도 없이

서문경의 거처로 향해 간다.

하늘 한쪽에 이지러진 달이 싸늘하게 걸려서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지금 회랑을 걷고 있는 사람은 이병아 하나뿐이다.

뒤를 다르고 있는 두 늙은 사람은 이병아의 꿈속에 나타나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이병아는 그런 꿈을 꾸면서 몸뚱어리는 실제로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저쪽 동산의 숲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부엉 부엉 부엉... 들려온다.

그러나 그 소리가 이병아의 귀에는 들리지가 않는다.

그녀의 꿈속에서는 부엉이가 울지 않기 때문이다.

몸은 움직이고 있지만,

몽유(夢遊)를 하는 터이라 그럴 수밖에 없다.

서문경의 거처 앞에 당도한 이병아는 가만히 문을 당긴다.

스르르 열린다. 방안이 훤하다.

실제로는 불이 꺼져서 깜깜한데,

꿈속에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달빛이 방안에 가득 담겨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거실로 들어서며,

“자, 이리 들어오세요”

하고 이병아는 뒤따라온 두 늙은이에게 말한다.

양세걸과 팽씨는 말없이 거실로 발을 들여놓는다.

“자, 이리 좀 앉으세요”

이병아는 의자에 앉으라고 권한다.

“아니야, 빨리 서둘러야 돼. 시간이 없다고 그랬잖아.

닭이 울 때가 됐다니까 그러네”

“알겠어요. 그럼 잠깐 기다리세요”

하고는 혼자서 내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벽장 속에서 보물상자를 꺼내고,

방 한쪽에 놓여있는 장롱의 서랍을 뒤져

열쇠꾸러미를 찾아 들고서 이병아는 도로 거실로 간다.

양세걸과 팽씨는 가만히 서서 이병아가 들고 나오는 보물상자를 눈여겨 바라본다.

보물상자를 이병아는 탁자 위에 갖다 놓는다.

그러자 두 늙은이도 탁자 곁으로 다가와서 선다.

보물상자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이병아는 열쇠 꾸러미에서 열쇠 한 개를 골라낸다.

그러나 얼른 자물쇠를 열지 않고, 좀 머뭇거린다.

 

 

흉몽(凶夢) 27회 

 

 

 

 “뭐하는 거지? 어서 열지 않고. 바쁘다니까 그러네”

팽씨가 재촉을 한다.

 

그러자 이병아는 무척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연다.

 




“저... 미리 말씀을 드려야겠어요. 실은 말이에요.

그동안에 금은보화를 대부분 처분하고, 얼마 남아 있지 않은데... 이 일을 어쩌면 좋죠?”

“뭐라구? 대부분 처분을 했다고?”

팽씨의 표정이 대번에 싸늘하게 이지러진다.

“예,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겨서...”

“야, 이 사람아, 이 금은보화가 누구건데 함부로 처분을 했다는 거야? 이게 자네 건가?”

이병아는 말문이 막히며 절로 고개가 살짝 숙여진다.

그러자 양세걸이 좀 뚝뚝한 목소리로 말한다.

“좌우간 상자를 열어 보라구. 어디 얼마나 남아 있는가”

이병아는 고개를 들고 자물쇠를 딴다.

그리고 보물상자의 뚜껑을 연다.

“여보, 정말 죄송해요. 이것밖에 안 남았다구요”

“어디 보자구”

양세걸이 상자 안을 들여다보자, 팽씨도 고개를 내민다.

“어머나 이렇게 축내 버렸네. 거의 다 팔아먹었잖아”

팽씨가 기가 막힌다는 투로 내뱉는다.

“음-”

양세걸은 굳어진 표정으로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이병아는 무척 죄송한 듯이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변명을 하듯 늘어놓는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보석 한개 축내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 뭐예요.

언젠가 당신을 만나게 되면 도로 돌려 드리려고요. 정말이에요.

그런데 당신의 소식은 알 길이 없고, 엉뚱한 일이 닥쳐왔다구요....”

이렇게 이병아가 보석을 축내게 된 사연을 중얼중얼 늘어놓고 있을 때

건너방에서 자고 있던 서문경의 몸종인 아량이가 잠을 깼다.

거실에서 사람이 지껄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여자가 혼자서 뭐라고 중얼대고 있는 것 같질 않은가.

이 한밤중에 도대체 누굴까 싶어서 아량이는 살그머니 일어나 침상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거실로 통하는 문 쪽으로 다가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짝을 밀고 빼꼼히 거실 안을 엿보았다.

불이 켜져 있지 않아서 누군지  알 수는 없었으나,

희끗한 여자의 모습 같은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흉몽(凶夢) 28회 

 

 

 

 “누구시죠”

아무래도 마님들 가운데 한 분인 것 같아서 아량이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무 대답이 없다.

이쪽을 돌아보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면서 계속 혼자서 중얼중얼 지껄이고 있다.

“누구시냐구요?”

“...”

“예?”

그래도 없자,

아량이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기분이 으스스해진다.

불을 켜 보았다.

뜻밖에도 이병아 마님이 아닌가.

관가가 죽은 뒤로 늘 몸이 안 좋아서 누워 있다는 이병아 마님이

이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이곳 거실에 와서 뭐라고 넋두리를 하듯 지껄여대고 있다니...

얘기를 들으니 이병아 마님이 눈에 헛것이 보이기도 하고,

정신이 좀 이상해진 것 같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싶어 아량이는 놀라 절로 입이 딱 벌어진다.

그런데 더욱 놀랄 일은 어디서 보물상자를 꺼내다가 탁자 위에 놓고

그 뚜껑을 열어젖히고서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머나, 마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그러시죠?”

하면서 아량이는 이병아 곁으로 다가간다.

그래도 이병아는 아량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여전히 혼자서 앞에 누군가가 있어서 그 사람에게 말을 하는 것처럼 지껄여 댄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자세히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서문경이가 보물이란 많이 가지고 있는 법이 아니라면서...’

혹은 ‘그것을 팔아 이용을 하면...’ 또는 ‘서문경이가 전당포를 차리자고...’

이렇게 대고 서문경이를 들먹이고 있질 않은가.

“아니, 마님, 무슨 말이에요? 왜 그러시냐구요? 예?”

“...”

“제말이 안 들리세요? 어머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너무나도 이상해서 아량이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이병아는 꿈을 꾸면서 자기도 모르게 몸이

그대로 행동하는 몽유병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꿈속에 아량이는 나타나 있질 않으니 보일 리도 없고,

말소리가 들릴 턱도 없다.

아량이는 그만 후다닥 거실에서 뛰쳐나가 오월랑 마님의 거처를 향해 달려간다.

그곳에서 자고 있는 대감 어른께 알리는 수밖에 없다 싶었던 것이다.

이병아 마님이 보물상자를 꺼내놓고서 지껄여대고 있으니 말이다.

 

 

흉몽(凶夢) 29회 

 

 

 

 “무슨 일이야? 이 밤중에...”

자다가 깬 서문경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아량이가 깨우는 바람에 먼저 잠을 깬 오월랑도 처음에는 역정을 냈으나,

얘기를 듣고는 아닌 밤중에 무슨 그런 변고가 다 있는가 싶어서 도리 없이

드르릉 드르릉 코까지 골며 깊이 잠들어 있는 서문경을 깨웠던 것이다.

“여보, 이병아가...”

“이병아가 뭘 어쨌다는 거야?

“당신 거실에서 혼자 보물상자를 꺼내놓고서...”

“뭐라구? 보물상자를?”

화들짝 놀라면서 서문경은 벌떡 일어난다.

“그래서 아량이가 뛰어왔는데요”

“아량이가”

그러자 침실 문 밖에 섰던 아량이는 얼른 방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서,

“대감 어른, 제가 자고 있는데 거실 쪽에서 사람 소리가 나지 뭐예요.

그래서 일어나 가봤더니...”

하고 자초지종을 아뢴다.

얘기를 듣고 난 서문경은 벌컥 화를 내듯 내뱉는다.

“그년 돌았군. 인제 완전히 미쳤다니까. 뭐 그런 게 다 있지. 어디 가보자구”

서문경이 침상에서 내려와 잠옷 바람으로 방을 나서자,

오월랑도 아량이와 함께 뒤를 따른다.

서문경이 앞장서서 세 사람이 당도했을 때도 이병아는 거실에 혼자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탁자 둘레에 놓인 의자 하나에 앉아서 여전히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는 것처럼 중얼중얼 지껄이고 있었고, 탁자 위에는 뚜껑이 열린 보물상자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야!”

냅다 서문경이 고함을 질렀다.

그래도 그녀는 들은 척도 안하고 계속 맞은편 의자에 누가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뭐라고 중얼대기만 한다.

“야, 이년아! 너 미쳤어? 왜 이 한밤중에 보물 상자를 꺼내놓고서 이 지랄이야. 응?”

“......”

“안 들려? 내 목소리가...”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자,

서문경은 어이가 없는 듯 곁에 서있는 오월랑을 돌아본다.

오월랑은 두려움에 질린 듯한 싸늘한 표정으로,

“아이고 정말 귀신이 붙은 모양이네. 이일을 어떻게 하면 좋지”

하고 나직이 중얼거린다.

“귀신이 붙었는지, 미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나 참 기가 막혀서...”

서문경은 쩝쩝 입맛을 다신다.

 

 

흉몽(凶夢) 30회 

 

 

 

 서문경과 오월랑이 와서 지켜보고 서있는 줄을 알 턱이 없는 이병아는 꿈속에서

 

탁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양세걸과 팽씨에게 사정을 하듯 말한다.

“일이 그렇게 된 것이니 어떻게 합니까. 도리가 없잖아요.

 

남은 것 이거라도 전부 가지고 가시라구요”

 




“음-”

양세걸은 미간을 약간 찌푸릴 뿐 아무 말이 없는데, 팽씨가 끝내 뻣뻣하게 나온다.

“절반이라도 남아있다면 모르지만, 이것만 가지고 갈수는 없다구. 십분의 일도 안 되잖아”

“그럼 어떻게 하면 되죠? 예? 형님”

“형님이라 그러지 말라구. 형님 아닌지가 벌써 오래잖아”

“아이고- 이일을 어쩌면 좋죠? 여보, 당신이 본 말씀해 봐요”

그러자 팽씨가 쏘아붙이듯 말한다.

“이이한테도 여보, 당신이라고 하지 말어.

헤어진지가 벌써 십년이 다 돼가는데, 무슨 놈의 여보, 당신이란 말이야”

할망구의 그 말에 양세걸은,

“음-”

하면서 곤혹스러운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아 버린다.

이병아는 기분이 좀 언짢아진다.

그래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난 모르겠다구요.

이것밖에 안 남았으니, 가지고 가든지 말지 마음대로 하라구요”

“뭣이 어째? 난 모르겠다구? 이제 보니까 배짱이 시꺼멓군 그래.

남의 금은보화를 훔치듯이 가지고 도망쳐서 거의 다 팔아먹고서,

이것밖에 안 남았으니 가지고 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구?”

팽씨가 매섭게 쏘아본다.

그 눈빛이 별안간 시퍼런 빛을 띠어서 이병아는 섬뜩해진다.

그러나 악을 쓰듯 내뱉는다.

“그럼 도대체 날더러 어쩌라는 거예요?”

“물러 내놓아야지. 전부는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절반이라도 물러내야 된다 그거야”

“난 몰라요. 내가 축낸 게 아니고, 서문경이가 그랬으니까,

서문경이한테 물러내라 그러라구요”

이병아의 입에서 ‘서문경’ 이라는 말이 분명히 두 번이나 마치

아이나 하인 이름 부르듯 함부로 튀어나오자,

서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서문경은 그만 발끈해지고 만다.

“뭐라고? 이 재수 없는 년이....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응?”

한쪽 눈썹을 실룩거리면서 그는 얼른 이병아한테 다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