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43)
불륜(不倫) 6회
그렇게 해서 한이는 병정에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왕육아는 그처럼 애틋한 진정을 지니고 있는 속 깊은 여자였다.
그래서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한도국에게 아까운 여자라고 입을 모았다.
조실부모를 하고 도살업에 종사하는 오라비 밑에서 자랐는데
어쩌면 그런 성품을 지니게 되었을까 하고 모두들 놀라워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시궁창에 피어난 연꽃 같은 여자라고나 할까.
“도련님, 많이 들어요. 배고플 때도 많았을텐데...”
왕육아는 식탁에 와서 함께 앉아 젓가락을 집어 들며 한이에게 말한다.
“배고플 때도 많았지만 배가 불러서 터질 지경으로 먹을 때도 적지 않았다구요”
“그래요?”
그러자 애저가,
“하하하...”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다. 그리고 묻는다.
“삼촌, 어떤 배가 불러서 터지도록 먹나요?”
“비적들을 토벌하러 나갔을 때지.
그들을 쳐서 본거지를 빼앗으면 그때는 우리 세상이거든.
우리 병졸들 맘대로 마을을 짓밟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거지 뭐”
“하하하... 신나겠는데요?”
“입으로만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그럼 뭐로 또 먹어치우는데요?”
“한이는 아차 싶은 듯 형과 형수의 눈치를 힐끗힐끗 보고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얼른 고개를 돌린다.
“삼촌, 입 말고 또 뭐로 먹어치우죠?”
애저는 정말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는 듯이 멀뚱히 한이를 바라본다.
그러자 왕육아가 불쑥 나무라듯이 말한다.
“얘는 어서 밥이나 안 먹고...”
특급주를 마시며 말없이 식사를 하고 있던 한도국이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듯 입을 연다.
“너 인제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냐? 장가를 들 형편은 되니?”
씩 웃을 뿐 한이는 대답이 없다.
“여보, 그런 얘기는 차차 하는 거 아니예요?
왕육아는 좀 민망스러운 듯한 표정을 떠올린다.
“왜? 지금 하면 안되는가?”
“도련님이 숨을 좀 돌려야지요.
병정에 나갔다가 육년 만에 오늘 조금 전에 돌아왔는데
뭣이 그리 급해서 벌써 그런 얘길...”
그러자 한이는 형수의 애틋한 진정을 육년 만에 다시 대하는 듯해서
절로 가슴속이 훈훈해진다.
불륜(不倫) 7회
“그런가...”
한도국은 머쓱해지고 만다.
언제나 이치에 어긋나는 말은 안하는 왕육아인지라,
그는 아내 앞에 노상 수긋해지게 마련이다.
그런 형을 바라보며 한이가 입을 연다.
자기가 뭐라고 한마디 대답을 하는 게 옳겠다 싶었던 것이다.
“형님, 염려 마세요. 이제 나도 고생깨나 하고,
세상이 어떤 것이라는 것도 알고 돌아왔으니까요.
앞으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라구요”
“암, 그래야지”
“그러나 형님, 내가 장가를 들 때까지는 도리 없이 형님 신세를 져야겠어요.
먹고 자는 것만은 좀 봐주세요”
그 말에 왕육아가 살짝 미소를 띠며 얼른 입을 연다.
“그야 말할 필요가 있나요, 당연한 일이죠”
힐끗 마누라를 한 번 거들떠보고 한도국이 또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이에게 묻는다.
“언제 장가를 들 생각인데?”
한이는 좀 망설이다가 히죽 웃으며 대답한다.
“글쎄요. 빨리 들기는 들어야겠는데, 어떻게 될지 나도 아직 잘 알 수가 없군요”
“음-”
한도국은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생각 같아서는,
너 육년 동안에 돈을 얼마나 모아가지고 돌아왔느냐고 까놓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술잔을 들어 애꿎은 술만 꿀컥꿀컥 들이킨다.
그러자 애저가 생글생글 미소를 띠며 입을 연다.
“삼촌, 내가 색시 하나 소개해 드릴까요?
우리 친구 가운데 시집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계집애가 하나 있거든요”
왕육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 참, 이것이 언제 철이 들까... 열다섯 살이나 먹은 것이 뭐 이렇지?
하면서 머리를 한번 살짝 쥐어박아준다.
“아야, 엄마는 왜 이래? 별꼴이야. 삼촌이 장가를 색시가 없어서 고민하는 것 같잖아.
그래서 내가 소개해 드릴까 하는건데...”
애저는 어머니에게 힐끗 눈을 흘긴다.
모두 실소(失笑)를 하고 만다. 한도국이 웃고 나서 묻는다.
“그 처녀가 지금 몇 살인데?”
“나보다 두 살 위니까, 열일곱이죠”
“열일곱이면 결혼할 때도 됐군”
한도국은 그 처녀가 제수(弟嫂)감으로 솔깃한 듯이 말한다.
그러나 한이는 형수를 힐끗 보면서 씁쓰레한 웃음을 떠올렸고,
왕육아는 약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불륜(不倫) 8회
한도국의 집은 우피가의 골목 안에 있는데,
여러 가구가 기다랗게 이어져 있는 목조 건물이었다.
그런 구조이기는 해도 덩치가 큰 편이어서 집집마다 방이 세 개였고,
주방이 따로 있으며, 현관을 들어서면 넓지는 않지만 거실도 있었다.
그러나 옆집과는 판자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큰소리를 내면 들리게 마련이었다.
한밤중이나 낮잠들을 즐기는 호젓한 오후 같은 때는 주고받는 말소리도 귀를 기울이면
훤히 다 들렸다.
한이는 현관 바로 옆에 붙어있는 문간방을 차지하고,
장가를 들어 살림을 날 때까지 그곳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그 방은 그가 병정에 나가기 전에 쓰던 방이기도 했다.
그동안에는 이것저것 구질구질한 가구들을 넣어두는 창고처럼 되어 있었는데,
들어낼 만한 것은 들어내고 방을 정리했던 것이다.
집에 돌아온 이튿날과 그다음 날 이틀 동안을 한이는 줄곧 늘어서 잠을 잤다.
형수가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 밥을 먹기는 했으나, 곧 또 드러누워 잠이 들곤 했다.
마치 병정에 나가서 부족했던 잠의 뿌리를 뽑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사흘 째 되는 날도 그는 아침나절은 늘어져 자고, 점심을 먹고 나서야 밖으로 나갔다.
현관을 나서는 그를 보고 왕육아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도련님, 인제 잠 뿌리를 다 뽑은 모양이죠?
“예, 허허허...”
한이는 형수를 돌아보고 기분 좋게 웃고는 일부러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 보인다.
“호호호... 어디 가나요?”
“친구들을 만나 보려고요. 옛날 친구들이 다 잘 있는지 모르겠어요”
“잘 있겠죠. 친구들 만나면 늦겠네요?”
“글쎄요...”
“너무 늦지 않도록 해요”
“예”
“저녁을 차려놓을 테니까, 집에 와서 먹도록 하고요”
“예, 그러죠”
형수의 마음씀이 따스하게 가슴에 와 닿는 듯해서 한이는 기분이 좋아서
어깨를 활짝 피며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현관을 나선다.
그런 시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왕육아는 이제 아주 늠름한 장정이 되었구나 싶다.
키도 자기 형과는 달리 훤칠한데, 어깨가 쫙 벌어지고, 목도 굵직하며,
팔다리도 이만저만 튼튼해 보이지가 않는다.
병정에 나가기 전과는 사람이 아주 달라진 느낌이다.
겉모습뿐 아니라,
행실까지도 저렇게 달라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녀는 생각해 본다.
불륜(不倫) 9회
그날 밤 한이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을 먹을 때까지도 소식이 없었다.
“이 녀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옛날 그대론 것 같은데...
어디서 자빠져 자고 아직 안 들어오지?”
한도국이 식사를 하면서 혼자 중얼거리듯 볼멘소리를 하자 왕육아는
“오랜만에 옛날 친구들과 만났으니 그럴 수도 있죠 뭐” 하고 두둔을 하듯 말한다.
“아무래도 싹수가 노랗다구. 벌써 또 도박판에 뛰어들었는지도 모른다구”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술을 마시고 친구 집에서 자는 거겠죠 뭐”
“친구 집에서 잤으면 일찍 일어나 집으로 와야 될 거 아니냐 말이야”
“곧 돌아오겠죠. 여보, 벌써부터 너무 그러지 말고 두고 봅시다”
“두고 보나마나 뻔하다니까”
아침부터 공연히 속이 상해 못 견디겠는 듯 한도국은,
“이 반찬은 맛이 왜 이래? 약간 쉰 것 같은데...” 하고 반찬 투정까지 해댄다.
왕육아가 그 반찬을 집어 먹어보고 살짝 웃음을 떠올리며 말한다.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당신 괜히 자꾸 화를 내려고 드니까 입맛도 변덕을 부리는 거라구요”
그러자 애저도 한마디 한다.
“아버지, 아침부터 화내지 마시라구요. 삼촌이 병정에 나갔다가 육년 만에 돌아왔잖아요”
한도국은 도무지 못마땅한 아침이라는 듯이 제대로 식사도 다 안하고 일어나
전당포로 출근을 한다.
한이는 거의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귀가를 했다.
간밤에 술을 너무 마신 듯 얼굴이 좀 부스스해 보였고,
아직도 주기가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은 듯 눈동자가 약간 풀어져 흐릿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웬 복숭아를 잔뜩 사들고 들어왔다.
“도련님, 어디서 잤어요?”
“친구한테서요”
“술을 너무 마신 모양이죠”
“예”
좀 멋쩍은 듯이 웃는다.
“형님이 많이 걱정을 하시더라구요”
“걱정은 무슨... 내가 뭐 어린애인가요”
그리고 한이는
“이거 형수씨 드시라고...”
하면서 복숭아 꾸러미를 왕육아에게 건넨다.
“어머나, 벌써 복숭아가 났네. 웬 걸 이렇게 많이...”
그것을 받아드는 왕육아는 마냥 기분이 좋은 듯
쌍꺼풀진 두 눈에 활짝 고운 미소를 떠올린다.
불륜(不倫) 10회
“형수씨, 아침을 좀 먹었으면...”
“어머, 아직 아침을 안 먹었나요?”
“예”
“점심때가 다 돼가는데, 아직까지 아침을 안 먹다니, 얼마나 시장할까...”
“조금 전에 일어났지 뭐예요. 일어나서 곧바로 오는 길이에요”
“그럼 세수도 안했겠네요?”
“예, 흐흐흐...”
“어서 세수를 해요. 내가 아침을 차릴테니까”
“왕육아는 복숭아 꾸러미를 든 채 얼른 주방으로 간다.
한이는 우물로 세수를 하러 나간다.
세수를 마치고, 한이가 주방으로 가니 왕육아는 식탁에 식사를 차리고 있었다.
한이는 식탁 앞에 앉으며,
“형수씨, 혹시 집에 술 없어요? 속이 쓰려서 해장을 한 잔 해야겠어요”
하고 말한다.
왕육아는 좀 망설이는 듯하다가,
“요전에 먹었던 특급주가 조금 남아 있을 거예요”
찬장에서 술병을 꺼내어 잔과 함께 식탁에 놓아준다.
얼른 술을 잔에 따라가지고 한이는 단숨에 쭉 한잔을 다 비워 버린다.
그리고 그르르- 크게 트림을 하고는,
“아- 살겠다”
하면서 반찬을 안주 삼아 듬뿍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고 불룩불룩 씹는다.
시동생의 그런 모습을 보며 왕육아는 속으로 약간 놀란다.
해장을 하는 폼이 조금도 어설프지가 않고, 의젓했던 것이다.
술을 마시기는 마시되,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닌 남편과 비교하면 어느 모로나 사내다웠다.
같은 뱃속에서 나온 형제인데도 저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해장을 두 잔째 하려고 따르는 것을 보고 왕육아는 말릴까 하다가,
어찌나 의젓한 술꾼 같은지, 그리고 병 기울어지는 걸 보니
수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아서 그냥 내버려 두기도 하고, 주방에서 나가려 했다.
그러자 한이가 불쑥 묻는다.
“애저는 어디 갔나요?”
“친구한테 놀러 갔나봐요.
말 같은 계집애가 한시도 집에 안 붙어있고,
바깥으로만 쏘다닌다니까요”
“키는 멀쑥해도 아직 어린애던데요 뭐”
“글쎄 말이에요. 언제 철이 들지...”
그러면서 왕육아가 주방에서 나가려하자,
“형수씨” 하고 불러 세운다.
“왜요?”
“저... 이리 좀 오세요. 내가 할 말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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