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14) 제14장
유령 1회
송혜련의 자살은 서문경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겉으로는 참 싱거운 여자라고 입맛을 쓰디쓰게 다셨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정통으로 오지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고 아찔하기까지 했었다.
그녀의 시체를 거두어 동산의 숲 속에 묻어준 뒤로 서문경은 우울증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노상 술로 나날을 보냈다.
그것도 밖으로 나가서 친구들과 어울려 이 기방 저 청루를 돌며 마시는 호유(豪遊)가 아니라,
자기 거처에 들어앉아서 자작자음을 하는 그런 청승스러운 음주였다.
서문경으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여자를 가까이하는 일도 없었다.
거의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던 정력절륜의 서문경으로서는 참으로 희한한 이변이었다.
그처럼 서문경이 실의에 빠져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된 것은 물론 송혜련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 대한 슬픔과 자책(自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그를 맥 빠지게 한 것은 최초로 맛본 패배감이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던 것이다.
더구나 여자를 두고서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다니,
창피하기도 하고, 화가 나가도 했다.
서문경은 지금까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은 어떻게든지 다 할 수가 있었고,
또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가질 수가 있었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녀들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처녀든 여염집 아낙이든 눈에 들어서 꼭 맛보고 싶으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범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자기의 아내로 삼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또한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기어이 뜻을 이루고야 말았다.
반금련의 경우와 이병아의 경우는 심지어 같이 살고 있는 남편을 죽여 없애기까지 하고서
기어이 자기 것으로 만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송혜련만은 자기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도대체 송혜련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는지,
서문경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마지막 본 게 잔치 전날 저녁 무렵이었는데,
그 때까지도 그녀는 조금도 얼굴에 그늘 같은 것은 서려있지가 않고,
오히려 밝고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무엇이 어떻게 됐는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어버리다니,
그리고 몇 달 뒤에야 썩은 시체가 되어 나타나다니,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마치 그녀가 자기에게 모욕감을 안겨준 것 같기도 해서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여자를 영원히 잃어버린 허전함과 비애,
그리고 모욕감과 패배감까지 뒤섞여서 말할 수 없이 착잡하고 우울한 심정을
서문경은 혼자서 술로 달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 서문경을 누구보다도 걱정하는 것은 오월랑이었다.
어느 날 밤, 오월랑은 유난히 짙게 화장을 하고,
옷까지 화사한 것으로 갈아입고서 남편을 찾아갔다.
유령 2회
오월랑이 거실로 들어가니 서문경은 술잔을 한 손에 들고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치 살짝 실성한 사람 같았다.
오월랑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 저쪽 석실로 가자구. 여기는 좀 썰렁하단 말이야. 석실 안에 들어가서 히히히...
재미있겠지? 어때? 여보, 어서 가자니까”
창밖 깜깜한 허공에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지껄인다.
아마 취중에 송혜련의 환상이라도 보이는 모양이다.
석실로 들어가자고 애원을 해대는 것을 보니 말이다.
“여보,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오월랑이 다가간다.
그러자 서문경은 돌아보더니 깜짝 놀라듯이 반가운 기색을 떠올린다.
“아이구 이거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응? 여보, 내가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다구”
그러면서 활짝 두 팔을 벌리고 비틀비틀 다가와 그만 오월랑을 덥석 안아버린다.
한 손에 들었던 잔이 방바닥에 떨어지며 술이 쏟아져도 모른다.
“당신 왜 이래요? 정신 차려요”
“당신이 그리워서 내가 미칠 지경이었다구. 알겠어?
이제 됐다구. 당신이 돌아왔으니 이제 됐다니까”
“여보,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거예요. 예?”
“내가 다 안다구. 이제 돌아왔잖아.
사람이 그러는 법이 있느냐 말이야.
목을 매어 죽다니,
뭣이 그렇게 비관이 된 거야?
응? 그럼 나는 어떻게 하라구... 안 그래?
여보, 당신이 잘못했지? 맞지?
잔칫날 아침에 없어져 버리다니,
그건 날 망신시키는 일이라구.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란 말이야.
안 그래? 맞지?”
질질 흘리는 듯한 말씨로 횡설수설 지껄이자
오월랑은 어이가 없어서
그만 서문경의 옆구리를 콱 꼬집으며 냅다 반말로 내뱉는다.
“난 송혜련이가 아니란 말이야. 똑똑히 좀 보라구. 내가 누군지”
“혜련이가 아니라구? 그럼 누구란 말이야. 응? 누구지?”
서문경은 오월랑을 안았던 팔을 풀고 조금 뒤로 물러서며
초점이 흐려버린 듯한 몽롱한 시선으로 애써 누군지 식별하려고 두 눈을 끔벅거린다.
그제야 누군지 알아차린 듯,
“허허허 허허허...”
곧장 웃는다.
“인제 알았수? 송혜련이가 아니라서 실망이 되는 모양이지. 왜 자꾸 웃수?”
“허허허 허허허...”
“웃지 말아요. 기분 나쁘단 말이에요”
“난 기분 좋은데... 당신이었구먼.
그런데 꼭 혜련이 같이 보이더라니까. 허허허...”
“만날 그년 생각만하고 술을 마셔 대니까 그렇죠.
목매 죽은 년을 뭣 때문에 못 잊어 하는 거예요?
재수 없게... 그러면 당신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해요?”
유령 3회
“어떻게 되는데?”
“귀신이 씐단 말이에요. 그년의 넋이 당신한테 달라붙는다 그거예요”
“헤헤헤... 귀신이 어디 있어. 혜련이의 넋이 나한테 달라붙는다구? 히히히...”
“여보, 정신 차려요. 벌써 당신 살짝 귀신이 씐 것 같단 말이에요. 알겠어요?”
“내가 뭐 어떤데?”
“조금 전 당신 창밖을 내다보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잖아요.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모르겠는데... 뭐라고 그랬어?”
“아 글쎄, 석실로 들어가자고 사정을 하고 있지 뭐예요.
송혜련이 그년이 창 밖에 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그랬나? 흐흐흐...”
“자꾸 웃지 말아요. 웃는 것도 꼭 귀신이 씐 사람 같다니까요”
그러면서 오월랑은 남편의 한 손을 잡고,
“자, 인제 가서 자자구요. 푹 자는 게 약이라구요”
하고 침실 쪽으로 이끈다.
“술을 한 잔 더 해야겠어”
“안돼요. 인제 그만해요. 많이 취했다구요. 내일 또 하시구요”
비틀거리는 서문경을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 침상에 눕도록 한다.
옷을 입은 채 서문경은 비실 무너지듯 침상 위에 쓰러진다.
그러자 오월랑은 바짝 침상에 다가서서 남편의 옷을 벗긴다.
“당신이 웬 일이지 내 옷을 다 벗겨주고. 오늘 밤 기분 좋은데... 흐흐흐 흐흐흐...”
누운 채 서문경은 몽롱한 시선으로 멀뚱히 쳐다보며
혀가 곧잘 헛 미끄러지는 그런 소리로 지껄이고는 히들히들 웃는다.
“기분이 좋아요?”
“응, 좋다구. 인제 보니까 당신 예쁜데. 미인인데...”
“호호호... 미인인줄 인제 알았어요?
나도 곱게 화장을 하면 지금도 아무한테도 안 빠진다구요.
새로 시집도 갈 수 있다 그거예요. 알겠어요?”
“맞어, 그런 것 같은데. 흐흐흐...”
남편의 위아래 겉옷만 벗기고 그만둘까 하던 오월랑은 몹시 기분이 좋아져서
그만 내의까지 홀랑홀랑 벗겨낸다.
아랫도리의 마지막 속옷까지 서슴없이 걷어내 버린다.
서문경은 결코 싫지가 않은 듯 팔 다리를 큰 대자로 내던지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으음-”
야릇한 신음소리를 일부러 크게 토하고 나서,
“아, 시원하다”
하고 내뱉는다.
눈을 감고 싱긋이 웃고 있다.
정실인 오월랑이 오늘 밤 웬 일이냐 싶은 듯 마음대로 한번 해보라는 그런 자세다.
유령 4회
오월랑은 남편의 벌거숭이 몸뚱어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고개를 약간 기울인다.
이상하다 싶은 것이다.
아랫도리의 욕망이 힘없이 늘어져 있는데, 너무나 보잘 것이 없었다.
킥 웃으며 손으로 살짝 건드려 본다.
조금 꿈틀거린다.
그러나 여전히 단소(短小)하고 볼품없다.
“여보”
좀 걱정스러운 듯이 입을 연다.
“응?”
“눈을 떠 봐요”
“왜?”
서문경은 멀뚱히 눈을 뜬다.
“왜 이렇죠?”
“뭐가?”
“당신 이거 말이에요”
손으로 또 한 번 툭 건드린다.
“뭐 어떤데?”
“아무 힘이 없잖아요. 못생겼고. 처음 보는데요, 이런 거...”
“아직 때가 안됐으니 그렇잖아. 때가 되면 그놈이 다 알아서...”
“그런가요? 호호호...”
“당신도 어서 벗고 올라오라구”
“예”
오월랑은 조금 쑥스러운 듯 살짝 돌아서서 옷을 벗기 시작한다.
겉옷을 벗고 나서 불을 꺼버린다.
그리고 더듬더듬 침상으로 오른다.
서문경이 한 손으로 아내의 몸뚱이를 만져본다.
“내의는 안 벗나?”
“왜 안 벗어요”
남편의 알몸뚱이 곁에 앉아서 오월랑은 부스럭 부스럭 내의를 벗어낸다.
그리고 서문경의 곁에 누우려 한다.
그러자 서문경은,
“오늘밤은 난 가만히 있을 테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고 말한다.
그 말의 뜻이 뭔지 알아차린 오월랑은 누우려다가 그만두고 그대로 앉아서
남편의 알몸뚱이를 애무하기 시작한다.
잠시 후 애무를 마친 그녀는 후훅 숨을 크게 몰아쉬고 나서 남편의 몸뚱이 위로 오른다.
그리고 서서히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아무 소리 없이 몸뚱이를 내맡기고 번듯이 누워만 있던 서문경이 싱겁게 한마디 한다.
“당신 이제 보니 제법인데...”
“아이, 아무 말도 마시라구요”
“흐흐흐...”
정실인 오월랑은 방사(房事) 때 언제나 수동적이었다.
서문경이 하는 대로 내맡기고, 이끄는 대로 따를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밤은 정반대였다.
그녀가 상위(上位) 자세가 되어 마음껏 남편을 이끌어 나갔다.
그렇게 2회전을 마치고 이부자리 속에 나란히 누운 오월랑은
서문경의 가슴패기를 슬슬 어루만지며,
“여보, 기분이 어때? 좋지?”
하고 애교 어린 반말로 묻는다.
유령 5회
“응, 아주 좋다구, 당신 이제 보니 제법이라니까”
서문경은 비록 수동적으로 가만히 누워 있기는 했지만,
정신 몽롱하도록 술이 취한데다가 두 차례나 욕망을 분출시켜서
노자근한 듯 약간 코가 메인 것 같은 소리로 말한다.
“난 뭐 여자가 아닌가”
“글쎄, 다시 봐야겠다니까”
“호호호... 실은 말이에요, 무척 걱정이 되더라구요”
“뭐가?”
“당신이 몇날며칠 술만 마시고,
여자도 상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말이에요.
술이야 뭐 지금까지 안 마시는 날이 거의 없었으니까 별 걱정이 안 되지만,
여자까지 멀리하다니 이 양반 왜 그러나 싶었다구요.
그래서 오늘밤 내가 일부러 찾아온 거예요”
“잘 왔어. 그런데 말이야 내가, 요새 도무지 여자고 뭐고 살맛이 없지 뭐야”
“왜 살맛이 없어요?
별안간 왜 그래요? 당신답지 않다구요.
송혜련이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글쎄. 혜련이가 자살을 했었다니 정말 모를 일이지 뭐야.
난 언젠가는 나타날 줄 알았다구. 왜 자살을 하지? 자살을 할 아무 까닭이 없는데...”
“자기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겠죠 뭐. 벌써 몇 달 전의 일인데,
자꾸 생각하면 뭘 해요. 살아서 돌아오기라도 하나요? 안 그래요?
여자 하나 때문에 살맛이 없을 것까지는 없잖아요.
물론 당신 심정은 이해하지만,
잊어버리는 게 수라구요.
여자가 뭐 송혜련이 하나뿐인가요”
“내 맘대로 안 된 여자는 혜련이 하나뿐인 셈이지”
“그래서 속이 상한다 그건가요?
그렇다면 원망을 하고 잊어버려야지,
자꾸 생각할 게 뭐 있어요.
말이 났으니 말이지,
그년 우리 집안 망신을 단단히 시켰다구요.
글쎄, 잔칫날 아침에 죽어버리다니
그런 망할 년이 어디 있느냐 말이에요.
그날 아침에 자살을 했는지,
전날 밤에 목을 매달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그년 죽으려면 좀 진작 죽을 일이지,
하필 잔치 준비를 다하고,
손님까지 초대해 놓았는데,
뒈져버릴게 뭐냐 말이에요.
우리 집안하고 무슨 원수라도 진 년 같다니까요”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듯 오월랑은 말소리가 약간 떨리기까지 한다.
“알았다구. 그만...”
“여보, 당신한테 한 가지 분명히 말하겠는데요.
앞으로 또 다시 첩을 들여앉히려고 하면 그 때는
내가 자살을 해버릴 테니까 명심하시라구요.
정말이에요.
입으로만 하는 소리가 아니예요”
서문경은 묵묵부답이다.
“들었어요, 못 들었어요?”
좀 못마땅한 듯 볼멘소리로 대답하고,
서문경은 아내에게 등을 돌리며 돌아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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