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12)
투옥 86회
잔치가 벌어지는 전야(前夜)였다.
그러니까 열닷새, 보름밤이었다.
송혜련은 밤이 이슥토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일이면 서문경에게 정식으로 개가하여
그의 일곱 번째 부인이 된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았다.
사람의 팔자란 알 수가 없다더니,
바로 자기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었다.
잠을 이루려고 이부자리 속에 들었으나 눈이 초롱초롱 더 맑아만 오자,
그녀는 다시 일어나 불을 켜고 경대 앞에 앉았다.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얼굴이 오늘밤 따라 서너 살은 아래로 보일 만큼 화사했다.
두 눈을 반짝 곱게 떠보기도 하고,
가만히 입술을 벌려 하얀 앞니를 가지런히 드러내 보기도 하고,
또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서 이쪽저쪽 옆얼굴을 거울에 비쳐보기도 하며
공연히 혼자 좋아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주무세요?”
밖에서 가만가만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저예요, 월미”
“아니, 월미가 이 밤중에 웬 일이지?”
송혜련은 얼른 경대 앞에서 일어난다.
방문을 열고 월미가 웃음 띤 얼굴로 들여다본다.
“아직 안 주무셨군요.
내일이 잔친데 잠이 올 턱이 없죠”
“그런데 무슨 일이야?”
“저... 주인어른이 말이에요,
좀 나오라고 그러시네요”
“주인어른이 나를?”
“예”
“어디로 나오라는 거야? 이 밤중에...”
그러자 월미는 송혜련에게 다가와서 무슨 비밀이라도 알리는 것처럼
그녀의 한 쪽 귀 가까이로 입을 가져간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동산의 석실로 좀 모시고 오라지 뭐예요.
달도 밝고 하니까, 바람을 좀 쐬자면서...
주인어른도 내일이 잔치라서 잠이 안 오시는 모양이에요.
조금 전에 내가 오줌을 누러 변소엘 가는데 글쎄 주인어른이
지나가다가 부르더니 그러시잖아요.
뭐 주인어른하고 처음 만난 곳이 그곳이라면서요?”
“호호호... 그런 말까지 하셔?”
“예, 달도 맑고 하니까, 무척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먼저 가있을 테니까, 모시고 오라고요”
“알았어”
송혜련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앞장서 방을 나선다.
바깥은 보름밤이라 둥근 달이 중천에 둥실 떠서 휘영청 밝았다.
아직 현청의 북소리가 울리지는 않았으나,
이미 삼경이 가까워 오는 터이라 집안의 불빛은 거의 다 꺼지고,
사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송혜련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오히려 앞장서서 동산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고,
뒤를 월미가 말없이 따랐다.
투옥 87회
동산의 오솔길로 들어서자,
송혜련은 월미를 앞장 세웠다.
달이 밝기는 하지만 어쩐지 좀 기분이 으스스했던 것이다.
월미는 힐끗힐끗 뒤를 돌아보며 시치미를 뚝 떼고 중얼거린다.
“주인어른이 아주 멋있는 분이지 뭐예요”
“왜”
“이런 한밤중에 호젓한 동산으로 애인을 불러내는 걸 보니 말이에요”
“내가 애인인가? 내일이면 그 분의 아내가 되는데...”
“내일부터는 부인이지만, 오늘밤까지는 아직 애인이죠 뭐”
“그런가? 호호호...”
그 말에 송혜련은 매우 기분이 좋은 듯 밝게 웃는다.
그러나 앞장서 걷고 있는 월미가 결코 그녀에게 기분 좋고 마음 편한 계집애는 아니다.
자기의 남편이었던 내왕이와 깊은 관계였고, 또 혼담까지 있었던 터이니 말이다.
대하기가 거북하고, 심정이 꽤나 착잡하기도 한 그런 계집앤데,
그이가 왜 하필 이 계집애에게 심부름을 시켰을까 싶으니 좀 언짢기도 하다.
하지만 송혜련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웃기도 하면서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석실에 당도하니,
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서문경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앞장서서 석실로 들어간 월미는,
“어머나, 돗자리를 깔아놓았네요”
하고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송혜련의 얼굴에 미소가 어린다.
그이가 왜 돗자리를 깔아놓았는지 알겠다는 그런 웃음이다.
“돗자리를 깔아놓고 어디 가셨을까...”
월미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잠깐 앉아 계세요. 내가 나가서 찾아볼게요”
하고는 석실 밖으로 나간다.
송혜련은 머뭇거리다가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돗자리에 궁둥이를 내린다.
참 재미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월미의 말마따나 정말 멋있는 분인 것 같다.
내일이 잔칫날인데 오늘밤에 이 석실에서 만나자고 하다니,
두 사람의 사랑이 뜨겁게 불붙어 오르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으니
마지막으로 기념 삼아 다시 한 번 이 자리에서 사랑을 나누자는 속셈이 아니고 무엇인가.
달도 밝은 밤이고 하니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공연히 기분이 좋아 미소를 짓고 있는데, 월미가 돌아온다.
석실 안으로 들어서며 월미는,
“어디 가셨을까... 바깥에 안 보이시는데요”
약간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다가 그녀는 별안간 활짝 웃음을 떠올리며,
“어머, 저기 계시나 봐요. 숨어있는 것 같은데요”
하고 내뱉는다.
투옥 88회
“뭐? 숨었다구? 어디?”
“저기 저 안쪽에 말이에요. 방금 얼굴이 내다보이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 호호호...”
서문경이 일부러 장난을 치느라 그러는 줄 알고 송혜련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일어선다.
그리고 돌아서서 안쪽으로 가만가만 걸음을 옮긴다.
석실 안쪽 깊숙한 곳에 탁자와 의자 찬장 따위 못쓰게 된 가구가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그 뒤에 서문경이 숨어있는 줄 알고 송혜련이 다가가자,
순간 월미의 두 눈에 묘한 웃음이 번뜩인다.
그리고 월미는 얼른 송혜련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송혜련이 헌 가구 더미 가까이 갔을 때 월미는 재빨리 자기의 치마 속 허리춤에
감추어 지니고 있던 동아줄을 꺼내 들었다.
올가미를 만들어 놓은 동아줄이었다.
가구 더미 뒤편을 살펴보고 나서 송혜련이 월미를 돌아보며,
“아니, 어디 계신단 말이야? 아무도 없는데...”
하고 말한다.
그 순간 월미는 잽싸게 달려들어 그만 동아줄 올가미를 송혜련의 목에 씌운다.
그리고 냅다 낚아채어 발끈 옭아매고 만다.
“으윽-”
제대로 비명을 내지르지도 못하고 송혜련은 두 눈깔을 허옇게 뒤집으며 버둥거린다.
“송혜련 아줌마, 미안해요”
월미는 살짝 사팔뜨기인 눈에 살기와 함께 섬뜩한 웃음까지 떠올리며 말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감쪽같이 사람 죽이는 일에 이골이 난 계집애처럼
올가미를 힘껏 조여 대며 계속 빈정거리듯이 지껄인다.
“아줌마 같은 여자는 미안하지만 죽여야 된다구요.
알겠어요?
남편을 배반해서 생지옥으로 보내고,
자기는 팔자를 고치려고 들다니,
그런 여자를 살려둬서야 말이 되나요?
귀신이 안 잡아가니까,
대신 내가 죽이는 거예요.
아줌마 미안해요”
송혜련은 혓바닥까지 쑥 빼물고서 쓰러져 퍼드덕 퍼드덕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안간힘을 써댄다.
월미는 그 꿈틀대는 몸뚱어리를 타고 앉아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 발끈발끈 올가미를 조인다.
“남편을 배반한 년들은 모조리 죽여야 된다구. 모조리 모조리...”
어느덧 월미도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을 희번덕이며 악을 쓰듯 내뱉고 있다.
마침내 송혜련은 경련을 일으켜 바르르 바르르... 온 몸을 떨어대더니
그만 축 늘어지고 만다.
“이제 끝났군요. 후유- 미안해요,
아줌마. 정말 미안하게 됐지 뭐예요.
땀이 다 나네”
그제야 월미는 축 늘어져버린 송혜련의 고깃덩어리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이마에 내밴 땀을 손등으로 쓱쓱 문지른다.
흡사 처녀 야차(夜叉)같다.
투옥 89회
월미의 몸뚱어리 속에는 자기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이 알 수 없는 어떤 저주(詛呪)의 넋 같은 것이 달리 하나 더 깃들여 있는지도 몰랐다.
평소에도 순박하고 고지식한 성품이면서도 증오를 삭이지 못하고 생것으로
오래오래 간직하고 있는 그런 편향(偏向)된 일면도 없지가 않았으나,
사람의 목에 올가미를 씌워서 죽이는 일을 마치 무슨 신나는 일거리라도 해치우듯이
서슴없이 혼자서 넋두리까지 곁들여 가며 거뜬히 해내는 것을 보니 말이다.
더구나 그런 일이 난생 처음이면서도... 열아홉 살 먹은 처녀가...
그처럼 깨끗이 송혜련의 숨통을 끊어 놓은 월미는
그 뒤처리까지 혼자서 감쪽같이 해냈다.
목을 매어 자살한 것처럼 꾸민 것이다.
먼저 목을 조였던 동아줄의 올가미를 풀었다.
그리고 헌 가구들 뒤편에 미리 숨겨놓았던 기다란 밧줄을 가지고 와서
새로 올가미를 만들어 다시 목에 걸고 조였다.
처음에 치마 속에서 꺼내어 사용한 동아줄은 올가미만 만들어 놓은 짧은 것이어서
자살로 위장하기에는 마땅치가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살인용이었고, 나중의 긴 밧줄은 자살위장용이었다.
위장용 밧줄로 목을 조인 다음 월미는 헌 탁자 하나를 가져다가
석실의 대들보 바로 밑에 놓았다.
그리고 그 탁자 위에 시체를 들어다가 얹었다.
이번에는 월미 자기도 탁자 위로 올라가 발돋움을 하고 서서 대들보에
밧줄 한 가닥을 건 다음 바짝 잡아당겼다.
올가미에 목이 조인 시체가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고,
나중에는 탁자 위에 거의 엉거주춤 일어선 자세가 되었다.
그제야 월미는 잡아당기던 밧줄 가닥을 다른 한 가닥과 발끈 묶었다.
탁자에서 내려온 월미는 시체가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로 얹혀있는
탁자를 앞으로 잡아당겨 치워버렸다.
그러자 시체는 대들보에 매달려 축 늘어지고 말았다.
멋지게 자살을 한 형용이 되고 만 것이다.
탁자를 본래 위치로 갖다 놓고,
월미는 대신 의자를 한 개 가져다가 축 늘어진 시체의 발밑에 옆으로 엎어놓았다.
대들보에 목을 매고서 발로 딛고 서있던 의자를 차 넘겨버린 형국이었다.
송혜련은 말하자면 깨끗이 자살을 해버린 셈이 되고 말았다.
일을 다 마친 월미는 후유- 어깻숨을 내쉬며 축 늘어진 송혜련을 쳐다본다.
‘아줌마 미안해요’라는 말을 하려는데,
그 말이 목구멍에 콱 걸려서 나오지가 않는다.
혓바닥을 길다랗게 빼물고 두 눈깔을 뒤집어 깐 송혜련이
‘너 이년-’하면서 노려보는 듯했던 것이다.
월미는 얼른 바닥에 떨어져있는 동아줄 올가미를 집어서 도로 치마 속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 깔아놓은 돗자리를 말아 옆구리에 끼고,
훅 불어서 불을 끄고는 석실에서 그림자처럼 빠져나간다.
그녀의 머리는 산발해 있었고, 얼굴에는 땀이 내배어 번들거렸다.
영락없는 여귀(女鬼)였다.
투옥 90회
이튿날 아침이었다.
여느 때보다 월등히 이른 시각부터 주방 쪽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서문경이 일곱 번째 아내로 송혜련을 맞아들이는 잔칫날이어서 그 준비 때문이었다.
혼례(婚禮)의 시(時)는 사시(巳時)였다.
그러니까 점심 시각 전에 잔치가 벌어질 판이었다.
날짜와 시를 받으니 그렇게 나왔던 것이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빨리 빨리 준비를 해야 할 참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침 식사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오늘의 여주인공이며 신부인 셈인 송혜련이 방에서 나오질 않는다.
하필 오늘 같은 날 이렇게 늦잠을 자다니...
이상하게 생각한 춘매가 가서 가만가만 방문을 두들겨 본다.
“송혜련 아줌마, 아니, 마님, 송혜련 마님, 아직 주무세요?”
춘매는 아직 혼례 전인데도 ‘아줌마’를 ‘마님’으로 고쳐 부른다.
방 안엔 아무 기척이 없다.
“어서 일어나시라구요. 벌써 아침 먹을 때가 다 됐단 말이에요.
오늘 잔칫날이잖아요. 서둘러야지요. 예?”
그래도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살그머니 방문을 열어 본다.
아무도 없다. 침상 위에 자다가 일어난 듯한 이부자리가 그대로 널려있을 뿐이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이지? 이상하다...”
춘매는 고개를 기울인다.
얼른 반금련 마님한테 가서 알렸다.
그러나 반금련은,
“변소에 갔거나 세수를 하러 갔겠지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춘매는 송혜련 아줌마가 기거하는 방이 바로 자기 방 옆이어서 매일 아침 일어나면
곧 얼굴을 대해온 터인데 오늘 아침은 지금까지 방에서 나오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춘매는 곧 변소로 달려가 보았고, 우물가에도 가 보았다.
그리고 주방으로 찾아가 보기도 했다.
아무데도 송혜련 아줌마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아무도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도 없었다.
오늘이 잔칫날이라 혹시 전에 자기가 내왕이와 함께 살던 살림집을 마지막으로
찾아가 본 게 아닌가 싶어서 그쪽으로 달려가서 하인들이랑 아낙네들에게 물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가 하고 춘매는 헐레벌떡 되돌아가서 반금련에게,
“아무데도 없다구요. 본 사람도 없고요”
하고 아뢰었다.
그제야 반금련도,
“아니, 어떻게 된 일이지?”
약간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짓는다.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반금련은 서문경을 찾아간다.
송혜련이 아마도 거기 가 있겠지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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