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10) 투옥 76회
뭐? 내왕이가 범인이라구?”
“예, 보세요. 여기 꿇어앉았잖아요”
“어디 보자”
서문경은 자기의 발 앞 땅바닥에 꿇어앉아있는 녀석의 머리를 거머쥐고 뒤로 젖혀 본다.
바깥은 칠흑 같은 어둠이지만,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있어서
녀석의 얼굴을 분간할 수가 있다.
얻어터져서 낯바닥이 엉망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아니, 이럴수가...”
서문경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한다.
자기가 놓은 덫에 죄 없이 걸려든 내왕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이병아도 놀라고, 수춘이도 놀란다. 그러자 춘매도,
“어머나, 정말 기가 막힐 일이네”
하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혀까지 내두른다.
저도 덫을 놓은 패거리와 한 통속이면서.
형리들과 기녀들은 내왕이가 누군지를 잘 모르는 터이라
어찌된 영문인가 하고 지켜보고 있다.
“이놈이 누군가요?
불쑥 한 형리가 서문경에게 묻는다.
“우리 집 하인 놈인데, 글쎄 이놈이 범인이라니 놀랬지 뭐요”
그러자 꿇어앉은 내왕이는 벌떡 일어서려 하면서 입을 연다.
“아닙니다. 난 절대로 범인이 아니라구요.
난 불을 끄러 집에서 뛰어 나왔을 뿐이란 말이에요”
“뭣이 어쩌고 어째?”
내흥이가 냅다 내왕이의 무릎을 콱 차서 도로 꿇어앉힌다.
그리고 서문경과 형리들에게 아뢰듯이 말한다.
“글쎄, 이놈이 이걸 들고 정원 쪽으로 도망치지 않겠어요.
이것도 이놈이 손에 쥐고 있던 거라니까요”
“이건 보물 주머니고, 아니 이건 뭐야?”
“식칼이잖아요.
이걸로 이놈이 주인어른을 찔러 죽이려고 방에 들어갔다가 아무도 없으니까
이걸 훔쳐가지고 도망친 겁니다”
그러면서 내흥이는 한 손에 하나씩 든 보물 주머니와 식칼을 쳐들어 보인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건 정원에서 주운 겁니다.
어디서 날아와서 정원에 떨어지더라구요”
“뭣이 어째? 어디서 날아오다니,
보물 주머니와 식칼이 하늘에서 날아와 정원에 떨어졌단 말이야,
뭐야? 말 같은 소리를 하라구. 이 나쁜 놈!”
서문경은 그만 한 쪽 발로 내왕이의 얼굴을 사정없이 차 밀어 버린다.
“아이크!”
비명소리와 함께 내왕이는 벌렁 뒤로 나가뒹군다.
“이놈이 평소에 나한테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더니,
기어이 일을 저질렀어. 불을 질러 놓고서 나를 죽이려고 하다니,
지독한 놈... 오늘 밤 내가 재수 좋았지 뭐야.
내 방에서 술을 마셨더라면 틀림없이 이놈이게 찔려 죽었을 거 아냐”
그러자 알았다는 듯이 형리들이 달려들어 내왕이를 묶는다.
술 잘 얻어먹고, 가만히 앉아서 한 놈 잡아 기분이 매우 좋다는 그런 얼굴들이다.
투옥 77회
내왕이는 그날 밤 형리들에게 끌려서 곧바로 제형소로가 옥에 갇혔다.
계략이 멋지게 들어맞아 내왕이를 감옥에 처넣고 나자,
이튿날 아침 서문경은 평소에 친분이 두터운 제형소의 책임자인
하전옥(夏典獄)에게 서찰을 적었다.
어젯밤에 집에 불이 나고, 보물을 도난당하는 불상사가 있었는데,
하인인 내왕이라는 자의 소행으로,
그자는 평소에 주인인 소생(小生)에게 앙심을 품어 오다가
마침내 그런 범행을 저질렀는데,
심지어 식칼로 소생을 살해하려고까지 한 흉악범이니,
엄히 문초하여 중형에 처해달라는 부탁의 글이었다.
서찰과 함께 일백냥의 은화를 뇌물로 보냈다.
며칠 뒤, 하전옥으로부터 회신이 왔다.
내왕이라는 자가 모든 범행을 자백했기 때문에 엄히 처벌할 생각인데,
어떤 형벌을 내리기를 원하느냐는 문의의 서찰이었다.
그 서찰을 받아 읽은 서문경은 곧 반금련을 불렀다.
“하전옥으로부터 이런 서찰이 왔구먼.
내왕이가 마침내 모든 범행을 자백했다는 거야. 허허허...
제깟 놈이 자백을 안 하고 견뎌낼 수가 있겠어. 그 모진 문초를 말이야”
“주리를 틀기도 한다면서요?”
“주리만 트나. 거꾸로 매달아 놓기도 한다구.
그래도 자백을 안 하면 불로 지지기도 한다잖아”
“어이구 끔찍해”
반금련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난다는 듯이 목을 움츠리면서 두 눈을 찔끔 감았다가 뜬다.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이 어린다.
“자백을 했으니 엄하게 처벌할 생각인데, 어떤 형벌을 내리길 원하느냐고 물어왔구먼”
“참 돈이 좋긴 좋군요. 자기 생각대로 벌을 내리면 될 텐데...”
“돈 좋은 줄 이제 알았나?”
“어떤 형벌이고 뭐고 있나요. 뻔하잖아요. 사형이죠 뭐”
“사형?”
“예”
“너무하지 않을까?”
“너무하다뇨. 무슨 소리예요?
그런 놈은 죽여 없애버려야 후환이 없다구요.
살려두면 나중에 기어이 또 복수를 하려고 든단 말이에요”
서문경은 알았다는 듯이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잠시 생각 한 끝에 정색을 하고서 말한다.
“아무래도 사형은 너무해. 실제로 내왕이가 잘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거든.
그저 술에 취해서 망발을 한 거뿐이잖아.
그런데 사형을 당한다면 너무 억울해. 인생이 불쌍하다구”
“어머나...”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반금련은 서문경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묻는다.
“그럼 어떤 형벌을 바라는 거예요?”
“귀양을 보내는 게 좋겠어”
투옥 78회
“귀양을요?”
“응, 맹주 땅으로 귀양을 보내버리면 사형이나 다름이 없지 뭐.
목숨은 살려주지만, 살아서 돌아오기는 불가능하니, 후환도 없을 것이고...”
“그것도 괜찮네요. 무송이처럼 말이죠?”
“그렇지. 그놈 아마 지금쯤은 바싹 말라서 다 죽어갈 걸.
벌써 죽었는지도 모른다구.
그곳에서는 유배되어 온 죄수들에게 아주 지독한 중노동을 시킨다니까...”
“그래서 맹주 땅을 이승의 지옥이라고 한다면서요?”
“맞어. 말하자면 생지옥인 셈이지”
서문경은 하전옥에게 답신을 보내어 내왕이를 맹주 땅으로 유배를 시켜주면 고맙겠다고 전했다.
그래서 마침내 내왕이는 유배형(流配刑)을 받고,
이승의 지옥이라고 일컬어지는 맹주 땅으로 압송되어 가고 말았다.
내왕이가 몇 해 전 무송이와 마찬가지로 맹주 땅으로 귀양을 갔다는 소식을 들은
집안사람들은 제각기 반응이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로 모두 착잡한 심정들이었다.
반응은 크게 두 갈래라고 할 수 있었다.
아내를 빼앗기고 귀양을 가게 되다니 신세가 가련하다고 동정하는 쪽과,
억울한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지만,
시켜주려는 월미와의 결혼을 기어이 마다하고 방화에 살인 미수,
게다가 보물 주머니까지 훔쳐가지고 달아나려 하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고,
응당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나무라는 쪽으로 나눌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어느 쪽이 됐건 그날 밤 일어났던 불상사를 모두가 곧이곧대로
내왕이의 소행으로 믿는 듯했다.
더러 고개를 기울이며 속으로 의문을 가져보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나
어쨌든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왕이의 그 불행한 소식에 어느 누구보다도 충격을 받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손설아와 월미였다.
이제 다시는 내왕이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두 여자는 눈앞이 아득하고
쓸쓸하며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손설아는 그런 기색을 안으로 감추고 겉으로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제 다 끝난 일을 가지고 공연히 자기의 신세까지 망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월미는 손설아와 달랐다.
월미는 드러내놓고 슬픔과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자기와 내왕이의 관계는 집안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고,
또 혼담까지 있었던 터이라 남의 이목이 조금도 거리낄 게 없어서 말하자면
마음 놓고 비탄에 빠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월미는 몇날 며칠이고 마치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시들시들하며
침상에 누워있기 일쑤였다.
그런 월미를 보다 못해 어느 날 밤 손설아는 자기의 거실에 불러서 탁자에 마주 앉았다.
“월미야, 나하고 오늘밤 조용히 얘기 좀 하자”
“예”
월미는 그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투옥 79회
“월미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지?”
무슨 질문인지 얼른 납득이 안가는 듯 월미는 멀뚱히 손설아를 바라본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느냐 말이야? 대답해 보라구”
“마님이지 누구예요”
“그것 뿐인가?“
월미는 그제야 묻는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리고 약간 표정이 수굿해진다.
“친척 아주머니뻘이 되기도 하고요”
“그렇지? 난 너의 아주머니고, 넌 나의 조카잖아. 맞지?”
“예”
“좀 촌수가 멀기는 하지만 우리는 남남이 아니라구.
같은 조상의 피를 이어받았다 그거야. 고향도 같은 마을이고 말이야”
말없이 월미는 고개를 떨군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은 마님으로서 몸종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아주머니로서 조카한테 하는 말이니, 그렇게 알고 잘 새겨들으라구. 알겠지?”
“예”
들릴 듯 말 듯 대답한다.
“어쩌다가 일이 얄궂게 되어서 너하고 나하고 한 남자를 좋아하게 됐었지 뭐야.
생각하면 참 우습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한 일이지.
그게 말이 되느냐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
“..........”
“왜 대답이 없지?
아주머니가 조카한테 묻는 거니까 속에서 생각하는 대로 솔직하게 대답해 보라구”
그러자 월미는 손설아를 빤히 바라보며 서슴없이 말한다.
“연애는 그렇게 되는 수도 있는 것 아니예요”
“그렇지, 그렇게 될 수도 있지. 한 남자를 두 여자가 사랑하는 일은 흔하지,
그러나 아주머니와 조카가 한 남자를 사랑하며
서로 질투를 하고 미워한다는 게 될 일이냐 그거야”
“..........”
“될 일이 아니지?”
“예”
“그럼 됐어. 난 월미의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구.
될 일이 아닌 줄 알았으면 이제 그 일은 깨끗이 끝내는 거야.
그 남자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몸이라구.
그런데 못 잊어서 자꾸 괴로워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또 그 일 때문에 아주머니와 조카 사이가 계속 틀어져서 서먹서먹하다는 것도 말이 아니라구.
그러니까 오늘밤으로써 그 일은 없었던 걸로 하고,
내일 아침부터는 그 전과 마찬가지로 서로 밝은 얼굴로 대하자 그거야. 어때?”
월미는 손설아 아주머니의 말이 다 옳은 것이어서 ‘예’하고 대답을 하려 했으나,
목이 콱 메이는 듯해서 말이 나오지가 않는다.
두 눈에 핑 눈물이 어린다.
아주머니라는 혈족(血族)으로부터 오는 훈훈한 것이 가슴에 확 와 닿았을 뿐 아니라,
이제 내왕이를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짜릿한 슬픔이 되어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투옥 80회
비록 월미가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눈에 어리는 눈물과 그 표정으로 보아 자기 말에 깊이 승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손설아가 모를 턱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결 부드럽고 정겹기까지 한 그런 목소리로 말한다.
“월미의 나이가 열아홉이나 됐고, 또 이번에 남자가 어떤 것이라는 걸 알았으니,
앞으로 무척 괴로울 거야. 내가 잘 안다구.
그러니까 말이야 곧 시집을 가는 게 좋을 거야.
세상에는 남자가 많고도 많다구. 지나간 일은 다 잊어버리고,
새 남자를 찾아보도록 하라구. 나도 월미에게 알맞은 신랑감을 구해볼 테니까.
그래서 이번 가을에 시집을 가도록 하자구. 내가 시집을 보내줄 거니까. 알았지?”
그 말에 역시 대답은 없이 월미는 그만 흐흐흑... 하고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손설아는 실은 월미가 속으로 몹시 못마땅했다.
내왕이를 두고 벌였던 그 일을 생각하면 당장 내쫓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럴 경우 계집애의 입이 두려웠다.
반드시 자기와 내왕이의 관계를 폭로하여 앙갚음을 할 것 같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그 일이 폭로된다는 것은 손설아로서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속으로는 아니꼽고 더럽지만 꾹 참고, 화해를 하는 척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집을 보내버리면 자기 곁에서 웃으면서 내쫓는 것과 다름없고,
또 앞으로 그녀의 입을 확실하게 다물게 하는 결과도 될 것 같았던 것이다.
월미는 손설아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서 적지 아니 감동하고,
또 묘하게 슬퍼지기도 해서 줄줄 눈물을 흘렸고,
이튿날 아침부터 밝은 얼굴로 마님을 대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내왕이를 쉽사리 잊어버릴 수는 없었다.
말하자면 첫사랑의 남자인 셈인데,
그렇게 간단히 가슴 속에서 지워지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월미는 손설아가 보는 앞에서는 지나간 일은 깨끗이 잊어버린 듯이
애써 명랑하게 처신을 했지만,
자기 방에 혼자 있을 때나 잠자리에 들었을 때는 맹주라는,
돌아올 수 없는 땅으로 귀양을 간 내왕이를 그리며 한숨을 짓기도 했고,
눈물을 머금기도 했다.
세상에 많고도 많은 게 남자라지만,
도무지 다른 남자는 조금도 흥미가 없고,
설사 시집을 보내준다 해도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느 날 밤,
월미는 자기 방의 창가에 앉아 중천에 떠 있는 휘영청 밝은 달을 우러러보기도 하며,
맹주라는 땅이 얼마나 먼 곳인지,
그곳을 찾아가면 내왕이를 만날 수가 있을 것인지,
만약 만난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만나서 둘이 같이 살 수만 있다면 이승의 지옥이라고 하는 그 땅도 살만한 곳이 아닐까...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 때 뜻밖에도 춘매가 쟁반에 포도를 두 송이 담아들고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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