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09) 투옥 71회
그날 밤 내왕이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틀 전 오후에 고량주를 마시고 만취가 되어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큰 실언을 한 뒤로 내왕이는 정신이 허황하고 불안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내왕이가 그처럼 독한 술을 많이 마시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 이튿날은 작취미성(昨醉未醒)의 상태로 거의 온종일 늘어져 누워있었다.
침상에 웅크리고 누워 있으면서도 그는 혹시 취중에 내뱉은 자기의 실언을
내흥이가 고자질해서 당장 서문경이 자기를 불러다가 요절을 낼 것만 같아 종일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이틀째인 오늘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나가서 당장 필요한 식품 몇 가지를 조달해 주고는
일과가 끝나기 전에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일찍 집에 돌아왔다.
밤이 되자 잠도 쉬 안 오고, 이상하게 또 불안감이 짙게 덮쳐 와서 혼자 술을 홀짝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깥은 곧 소낙비라도 쏟아질 듯 후덥지근하고 어두웠다.
술기운이 자르르 온몸에 퍼지니 혼혼해지면서 묘하게도 불안감이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술이란 참 묘한 것이라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면서 내왕이는
이런 때 월미가 살그머니 찾아와 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요 며칠 뭘 하고 있는지 통 안 나타나는 게 안타까웠다.
어느덧 서문경에 대한 두려움이 술기운에 의해서 월미의 몸뚱어리에 대한
욕정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었다.
오늘 밤 월미가 끝내 안 찾아오면 손설아한테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손설아의 몸뚱어리가 월미의 그것보다 싱싱한 맛은 덜하지만,
어느 모로나 잘 무르익어서 감칠맛이 낫다고 내왕이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찾아간다는 것은 이제 커다란 위험일 뿐 아니라,
부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탄로가 날 것만 같고,
또 월미와의 관계 때문에 착잡해서 부담스러웠다.
두 여자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라면 손설아의 그 진미(眞味)를 포기하고,
월미의 풋맛쪽을 택하고 싶었다.
월미와는 서로 신분도 같으니 마음 편하고,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속마음은 그러면서도 몸뚱어리의 욕망이란 제멋대로여서 오늘 밤은 위험이고
부담스러움이고 상관없이 기어이 손설아를 찾아가 실컷 욕정을 풀어야겠다 싶은 것이다.
삼경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이런 경우는 시간이 더딘 법이다.
빨리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으면 싶으면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난데없이,
“불이야! 불! 불났다”
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내왕이는 술잔을 떨어뜨리듯이 놓고는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바깥은 눈앞을 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런데 저쪽 검은 하늘에 벌건 불길이 솟고 있었다.
투옥 72회
얼른 보니 마구간 쪽인 것 같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라 불길은 한결 선명해 보였다.
그러나 불이 붙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아직 기세는 약했다.
희끄무레한 연기와 함께 시뻘건 불꽃이 너울거리며 솟구쳤다가 잦아들곤 했다.
내왕이는 그 쪽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하인들이 사는 살림집 구석에서 마구간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중문(中門)을 지나 화목(花木)이 우거진 정원을 통과해야 했다.
제법 주기가 오른 내왕이가 어서 가서 불을 꺼야겠다는 일념으로 어둠 속에
눈을 굴렁거리며 막 중문을 지났을 때였다.
어디 선가 이번에는
“도둑이야! 도둑! 저 도둑놈 잡아라-”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내왕이는 뜀박질을 멈추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얼떨떨했다.
불이 났는데다가 또 도둑이라니 도대체 오늘밤 이 무슨 변괴인가 싶었다.
“도둑이 정원 쪽으로 도망친다. 잡아라-”
고함소리는 뒤편 어둠 속에서 다급히 다가오고 있는 듯했다.
도둑이 정원 쪽으로 도망치다니...
그럼 먼저 도둑부터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내왕이는
어두운 정원 안을 두리번거리며 다시 내닫기 시작한다.
덩달아 자기도 정신없이,
“도둑이야! 도둑! 도둑놈 잡아라-”
하고 외치면서.
그때 어디선지 어둠 속에서 철커덕!
하고 무엇이 자기 앞으로 날아와 떨어지는 게 아닌가.
“이크! 이게 뭐야?”
내왕이는 깜짝 놀라며 길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든다.
뜻밖에 커다란 칼이었다.
한 자가 넘을 것 같은 식칼이 난데없이 자기 앞에 떨어지다니 도무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런데 또 저만큼 앞에 툭! 하고 무엇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한손에 식칼을 든 채 얼른 가서집어들어 보니 이번에는 가죽 주머니였다.
돈이나 보물을 담는 주머니에 틀림없다.
제법 무거웠다.
소홀찮은 보화가 들어있는 듯했다.
“야 이것 봐라”
내왕이의 입에서 절로 군침이 도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얼른 식칼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정신없이 주머니 주둥이를 열어 한손을 디밀어 보니
손에 잡히는 게 다름 아닌 보석들이었다.
아닌 밤중에 불이 나더니 도둑이 나타나고 또 웬 식칼과 보물주머니가
길바닥에 떨어지다니 도무지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알 수가 없어
꼭 무엇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둠 속에 그 보물주머니를 들고 서서 내왕이는 잠시 망설였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말이다.
얼른 자기 집에 가져다가 깊숙이 감추어 버리면 횡재라도
이만저만한 횡재가 아닌 것이다.
투옥 73회
그때였다.
“도둑놈 여깄다!”
고함소리와 함께 어두운 정원의 숲 속에서 웬 검은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남정네였다.
그 사내는 비호같이 달려들어 다짜고짜 내왕이의 배때기를 냅다 걷어찼다.
보물 주머니를 든 채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서있던 내왕이는 그만,
“으악!”
비명소리와 함께 벌러덩 위로 나가떨어졌다.
그러자 그 사내는 잽싸게 내왕이를 덮치며 주먹으로
대가리고 낯바닥이고 가릴 것 없이 마구 두들겨 댔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도둑놈 잡았다- 도둑놈! 도둑놈 여깄어- 여기!”
그러자 곧 서너 명의 하인들이,
“도둑놈 어딨어?”
“어느 놈이여?”
“어디, 어디?”
하면서 우르르 뛰어들어 왔다.
발길에 차이고 사정없이 얻어맞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그 경황 중에도 내왕이는 자기를 마구 두들기고 있는 사내가
다름 아닌 내흥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아이고, 나 내왕이여, 내왕이, 도둑놈 아니여-”
하고 비명을 지르듯 신음소리 섞인 그런 목소리를 내질렀다.
달려온 하인들이 내흥이에게 깔려서 얻어터지고 있는 녀석을 어둠 속에
유심히 살펴보고는 정말 내왕이에 틀림없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 하고 모두 어리둥절해진다.
그제야 내흥이도 시치미를 뚝 떼고,
“뭐 내왕이라고? 어디 이놈 일어나봐”
하면서 멱살을 잡고 끌어 일으킨다.
내왕이는 그때까지 자기도 모르게 한손에 보물 주머니를 불끈 거머쥐고 있었다.
“야 이것 봐라. 도둑이 누군가 했더니 바로 내왕이구나.
이놈 보라구. 손에 보물 주머니를 들고 있잖아.
이놈이 불을 지르고서 집안사람들이 놀라 모두 그쪽으로 뛰어나가자 주인어른의 방에
침입해서 보물 주머니를 훔쳐가지고 달아나던 참이었다구. 아니, 이건 또 뭐야?”
깜짝 놀라면서 내흥이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식칼을 주워든다.
“식칼 아니야. 오라, 알았다구.
이놈이 식칼을 가지고 주인어른을 죽이려고 했던 게 틀림없어.
그런데 주인어른이 방에 없으니까 보물 주머니만 훔쳐가지고 나온거라구”
그러자 내왕이는 펄쩍 뛰듯이 변명을 해댄다.
“아니여 난 도둑놈이 아니라구. 이 보물 주머니는 여기서 주운 거라구.
불도 절대로 내가 지르지 않았어. 그리고 주인어른을 죽이려고 했다니 말도 안돼”
투옥 74회
“뭐라구? 이놈아, 네 아가리로 며칠 전에 서문경이를 죽여 버리겠다고 했잖아”
“난 그런 소리 한 적이 없다구. 내가 언제 그랬어?”
“뭣이 어째? 나하고 술을 마시고서 그런 말을 안했다는 거야?
서문경이뿐 아니라, 반금련이도 네 손으로 처치해 버리겠다고 했었잖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악을 써놓고서 잡아떼기는...”
“아이구 정말 사람잡네. 이렇게 생사람을 잡으려고 들면 천벌을 받는다구 알겠어?”
“뭐라구? 천벌을 받아? 허허허...
누가 할 소린지 모르겠네. 인제 보니까 이놈이 아주 보통 놈이 아니군. 에잇 이 나쁜놈!”
내흥이는 냅다 또 발길로 내왕이의 아랫배를 걷어차 버린다.
“아이크! 으윽-”
이번에는 내왕이의 비명소리가 아까완 다르다.
아랫배와 함께 사타구니까지 차인 모양이다.
뒤로 벌렁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타구니께를 움켜쥐며 앞으로 풀썩 꼬꾸라지고 만다.
땅바닥에 쓰러져 뒹구는 놈을 내흥이는 한발로 사정없이 대가리와 어깻죽지께를
콱콱 몇 번 짓밟아 놓는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명령을 하듯이 내뱉는다.
“이 나쁜 놈을 어서 주인어른한테 끌고 가자구”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모르고 서있던 하인들도 그제야 내왕이가 불을 지르고,
서문경을 죽이려다가 보물 주머니만 훔쳐 달아나려던 범인에 틀림없다고들 생각한다.
내왕이가 아내를 서문경에게 빼앗긴 처지를 잘 알고 있는 터이니
그가 앙심을 품고 능히 그런 일을 저지를 법 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보복을 하고서 보물을 훔쳐 가지고 멀리 도망가려고 했을 것 같다.
그래서 모두 서슴없이 달려들어 땅바닥에 엎어져 뻗다시피 한 내왕이를 끌어 일으켜서
두 팔을 뒤로 꺾어 틀어쥐고, 멱살을 잡아끌며 서문경한테로 데리고 간다.
보물 주머니와 식칼은 내흥이가 들고 뒤를 따른다.
그 때 서문경은 본채에서 뚝 떨어진 이병아의 거처 깊숙한 내실에 주석을 마련하여
몇몇 제형소(堤刑所)의 형리(刑吏)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형리들을 초대한 것은 범인으로 붙잡은 내왕이를 곧바로 그들에게 넘기기 위한
계략의 일단이었다.
그런 줄을 모르는 형리들은 무척 오래간만에 초대를 해준 서문경에게 감사하며
진수성찬에 특급주를 즐겼다.
그리고 불려온 기녀들의 가무에 함께 어울리기도 하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본채 쪽에 불이 나서 온집안 사람들이 뛰어나가고,
또 도둑을 잡는 소동까지 벌어지고 있었으나 흥겨운 노랫소리와 넘치는
웃음소리 때문에 이곳 주석에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난데없이 수춘이가 방에 뛰어들며,
“주인어른, 큰일 났어요!”
하고 소리를 지른다.
투옥 75회
“큰일 나다니, 무슨 일이야?”
서문경은 시치미를 뚝 떼고 묻는다.
“불이 났어요. 집에...”
“뭐라구?”
서문경이 놀라자,
옆에 앉아있던 이병아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다.
주기가 오른 형리들도 모두 놀라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서고,
기녀들은 호들갑스럽게 비명까지 지르며 방 밖으로 뛰어나가기도 한다.
난데없는 일에 술자리는 그만 중단이 되고 말았다.
일부러 그렇게 일을 꾸민 장본인이면서도 서문경은 정말 당황한 것처럼,
“불이 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응?”
하고 두 눈을 굴렁거리며 다른 사람들에 섞여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 나간다.
바깥에 춘매가 서 있었다.
춘매는 서문경을 보자 시치미를 뚝 떼고 깜찍하게 아뢴다.
“주인어른, 마구간 옆의 헌 창고에서 불이 났지 뭐예요.
도둑놈이 불을 지르고서 주인어른 방에 들어가 보물을 훔쳐 가지고 도망쳤다구요”
“뭐라구? 도둑놈이 불을 지르고, 보물을 훔쳐가?”
그러면서 서문경은 불이 났다는 마구간 옆의 창고 쪽을 바라본다.
“어머나, 이게 무슨 변고지?”
이병아도 놀라 어이가 없는 듯이 그쪽으로 시선을 보낸다.
형리들과 기녀들도 모두 수군덕거리면서 불난 쪽 하늘을 바라본다.
어둡기도 하고, 큼직큼직한 건물들에 가려서 화재의 현장이 보이지는 않으나,
불길은 이미 잡혀가는 듯 그쪽 하늘이 약간 벌겋게 물들어 보이며
희끄무레한 연기가 오르고 있다.
“그래, 도둑놈은 어떻게 됐어? 도망쳐 버렸나?”
서문경이 묻자,
춘매는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이 재빠르게 대답한다.
“내흥이랑 하인들이 뒤쫓아 갔어요.
중문을 지나 도둑놈이 가운데 정원 쪽으로 도망치는 것을 제가 봤지 뭐예요.
아마 지금쯤 붙잡았을지도 몰라요”
그때였다.
어둠 속을 떼를 지어 떠들썩하게 이쪽으로 몰려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 한 놈을 끌고 오는 듯한 기척이었다.
“도둑놈을 잡은 모양인데...”
“그런 것 같은데요”
“야, 잘했다. 어떤 놈이지?”
“오늘 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도둑놈을 하나 잡은 셈이 되잖아. 안 그래? 허허허...”
술기운에 껄껄 웃는 형리도 있었고,
서문경을 비롯해서 모두가 좋아서 한 마디씩 지껄였다.
아니나 다를까,
붙잡은 도둑놈을 끌고 와서 서문경 앞에 꿇어앉힌다.
그리고 내흥이가 아뢴다.
“주인어른, 범인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잡고 보니 내왕이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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