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금병매(金甁梅)

금병매 (98) 투옥 <16~20회>

오늘의 쉼터 2014. 6. 29. 10:46

금병매 (98)

 

 

 

투옥 16회 

 

 

 

 “또 그런 소리 하네요.

 

기분 잡치게... 복수를 각오했으니 계속 복수를 하면 되잖아요.

 

 탄로가 안 난다니까 그러시네. 만약 탄로가 나면 같이 도망을 치자구요”

“뭐? 도망을 쳐?”

 




“예, 어디 멀리로 도망을 가서 같이 살면 되잖아요”

“허허허...”

그만 내왕이는 웃음을 터뜨린다.

“마님, 마님은 아직 세상을 잘 모르시는군요”

무의식중에 내왕이는 하인으로 돌아간다.

“마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난 이제 마님이 아니라구요.

 당신의 여자란 말이에요.

여보, 어서 당신이라고 불러 봐요. 예?”

“좋아, 당신은 아직 세상을 잘 모른다니까.

가난이라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지겨운 것인지 모른다 그거야.

이 대궐 같은 집의 마님으로 호의호식하고 있으니...”

“마님은 무슨 놈의 마님...

말이 좋아 마님이지,

난 부엌데기에 불과하다구요.

 서문경이가 나를 거들떠봐야 마님이지. 안 그래요?”

“그래도 어쨌든 넷째 마님으로 호의호식하고 있잖아”

“호의호식만 하면 뭘 해요? 몸뚱이는 만날 굶주리는데...”

“허허허... 진짜로 배를 좀 굶주려 봐야 세상맛을 안다구.

 배가 너무 불러서 그런 소리가 입에서 나온다 그거야”

“좌우간 나는 배만 불러서는 못산다구요.

그러니까 여보, 날 언제까지나 사랑해 줘요. 예?

날 버리지 말아요. 당신이 날 버리면 난 죽어버릴 거야”

손설아는 내왕이의 가슴패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간절한 어조로 말한다.

“뭐, 죽어버려?”

“예, 정말이라구요”

“허허허... 역시 순진하셔”

단 한 번의 정사를 가지고서 벌써 이렇게 손설아 마님이

 자기에게 매달리듯이 달라붙다니 뜻밖이어서,

내왕이는 얼떨떨하기도 하면서 한편우습기도 하다.

그저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자기를 유혹한 줄 알았는데,

이건 진짜 사랑을 호소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보”

“응”

“오늘 밤은 우리 자지 않기로 해요. 어때요?”

“안자고 밤새도록 뭘 하게?”

“몰라서 물으세요?”

“계속 복수를 하라 그건가?”

“물론이죠. 호호호...”

웃고 나서 손설아는

“아니, 인제 복수가 아니라구요.

복수는 아까 한 번으로 끝났고,

이제부터는 우리 둘이의 진짜 사랑이란 말이에요”

이렇게 말한다.

 

 

 

투옥 17회 

 

 

 

 새벽닭이 울 무렵까지 손설아와 내왕이는 온몸의 진이 다 빠지도록 정사를 나누었다.

 

손설아는 코에서 단내가 솔솔 풍겨 나올 지경으로 정말 오래간만에 포식을 한 셈이었고,

 

내왕이도 넉 달 만에 실컷 욕망을 풀었다.

그리고 기진맥진하여 늘어져서 잠을 청하다가 내왕이는 문득 생각이 나서 입을 열었다.

 




“여보, 참 내가 깜빡 잊고 아직 말을 안했는데,

서문경이가 말이야,

나한테 식품 조달의 책임을 맡겼지 뭐야”

“어머, 그게 정말이에요?”

손설아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이

쏟아져 오는 잠을 애써 떨쳐버리며 귀를 곤두세운다.

“정말이라구. 글쎄 어제 말이야,

어제가 아니라 새벽닭이 울었으니 벌써 그저께군.

그저께 말이야 동경에서 돌아와 인사를 갔더니 그러잖아.

내흥이가 하던 일을 앞으로 내가 맡아서 하라고 말이야.”

“웬 일일까? 그런 선심을 다 쓰다니, 당신에게...”

“뻔하지 뭐야. 이제 보니까 그 뱃속이 뻔히 들여다보인다니까.

그 때는 동경에 진경제 내외를 데리고 무사히 갔다 온 그 공의 치사로

그러는 줄 알고 정말 고맙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까”

“알았어요. 혜련이를 빼앗은 대가인 셈이군요.

미리 당신을 무마할 속셈이기도 하고”

“맞어, 바로 그거라구. 엉큼한 놈...”

“어쨌든 잘됐지 뭐예요. 당신은 식품조달 책임자고,

 나는 주방 책임자니까 매일 만나도 아무도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을게 아녜요.

안 그래요?”

“그건 그렇군”

“그러나 여보, 그럴수록 우리 조심을 하자구요.

밖에서 남들이 볼 때는 당신한테 내가 반말을 쓸 수밖에 없으니까 양해해야 돼요.

당신은 나한테 경어를 쓰고 말이에요”

이번에는 손설아가 슬그머니 조심스러워지는 모양이다.

“그야 물론이지. 내가 어린앤 줄 알아?”

“정말 잘 됐네. 우리 일이 앞으로 잘돼나가려나 봐.

부디 아무 일도 없이 오래오래 사랑을 나누었으면 좋겠어”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하고 나서 손설아는 크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켠다.

내왕이도 잠을 청하다가 잠시 후 안 되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난다.

“여보, 난 가봐야겠어. 곧 날이 샐 텐데 지금 잠이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애”

“어머, 그래요? 그게 안전하기는 하지만... 여보, 같이 못자서 어쩌죠?”

“괜찮다구. 자, 그럼 나는 가”

침상에서 내려선 내왕이는 주섬주섬 옷을 주워입고,

그림자처럼 침실을 빠져나간다.

 

 

 

투옥 18회 

 

 

 

 내왕이가 돌아온 뒤로 서문경은 밤에 이병아한테 가서 잤다.

새로 개축한 이병아의 거처는 본 저택과는 뚝 떨어진 곳에 있어서

 

비록 담은 헐어내고 없었으나 딴 집 같았다.

 

심리적으로 서문경은 그곳에 가 자니 편했다.

 

내왕이가 돌아왔는데 아직 이혼을 하지 않은 그의 아내를 데리고 잔다는 것은

 

아무리 낯가죽이 두껍고 심장에 털이 난 서문경이라고 하지만 불안했던 것이다.

 




이틀 밤을 이병아한테서 자고 사흘 째 되는 날 밤 그는 반금련의 방으로 갔다.

그 동안에 송혜련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는 술이 거나하게 올라 있었다.

해거름에 몇몇 친구와 어울려 기방에 가서 마시고 돌아오는 걸음이었다.

거실에 들어서니 반금련은 춘매와 둘이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으레 송혜련도 함께 어울려 있을 터인데 어찌 된 영문인가 싶었다.

 집에 가 자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서문경은 말없이 의자에 가서 앉는다.

“꽤 취하셨군요. 차를 가져올까요, 꿀물을 가져올까요?”

반금련이 바둑을 중지하고 서문경의 곁으로 와서 앉으며 묻는다.

그에 대한 대답은 없이 서문경은 무뚝뚝하게 딴말을 한다.

“혜련이는 어디 갔어? 벌써 자나, 아니면 집에 갔나?”

“아파서 누워있다구요”

“뭐? 아파서 누워 있어? 어디가 아픈데?”

“내왕이한테 두들겨 맞아 골병이 들었나 봐요.

그저께 밤부터 끙끙 앓으며 누워있는 걸요”

입에서 나오는 대로 과장을 해서 말한다.

“아, 그래? 음-”

술이 거나한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서문경은 벌떡 의자에서 일어선다.

“어디 가보자구”

서문경이 송혜련의 방 쪽으로 걸음을 떼 놓자,

반금련도 후닥닥 일어나 뒤를 따른다.

춘매도 슬금슬금 따라가 본다.

송혜련은 잠이 들어 있었다.

“일어나, 혜련이 주인어른 오셨어”

반금련이 흔들어 깨우자,

송혜련은 아직 깊이 잠이 들지는 않았던 모양으로

얼른 눈을 뜨고 부스스 일어나 앉는다.

그리고 두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어 넘기며,

“인제 오셨군요”

하고 입을 뗀다.

반가우면서도 약간 원망스럽기도 하고 어쩐지 조금 서러운 것도 같은 그런 목소리다.

춘매가 얼른 방에 불을 켠다.

서문경은 침상 곁에 선 채 목이 좀 잠긴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몸을 많이 다쳤다면서?”

송혜련은 아무 대답이 없다.

얼굴에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투옥 19회 

 

 

 

 서문경은 뒤를 돌아보며,

“좀 자리를 비켜주지. 춘매는 네 방에서 가서 어서 자라구”

 

 




하고 이른다.

춘매는 얼른 사라진다.

그러나 반금련은 그 자리에 서서 머뭇거린다.

자기도 자리를 비켜주기 바라는 것 같으나,

주고받는 얘기를 좀 듣고 싶은 것이다.

“어디를 다쳤는지 얘길 해보라구”

서문경이 재촉을 하듯 말하자,

송혜련은 마지못하는 듯 입을 연다.

“별로 다친 데는 없다구요”

“그래? 그런데 왜 아프다고 드러누워 있지?”

그러자 반금련이 재빨리 끼어든다.

“솔직하게 말하라구. 뭐 체면을 차릴 자린가?

속으로 골병이 들었다면서? 맞아서 말이야”

송혜련은 아무 말이 없다.

“누구한테 맞았어?”

술이 거나한 서문경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불쑥 묻는다.

송혜련은 이이가 아직 사실을 모르고 있는가 싶어서 힐끗 쳐다보고

시선을 떨구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남편한테요”

“남편? 남편이 누구지?”

그러자 반금련이 우습다는 듯이,

“혜련이 남편이 누군지 모르세요?”

하고 또 끼어든다.

“당신은 가만 있으라구”

목소리가 좀 뚝뚝하다.

그러자 반금련은,

“알았다구요”

하고는 돌아서서 방을 나가 버린다.

단 둘이가 되자 서문경은 일어나 앉아 있는 송혜련에게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몸이 안 좋은데 누우라구”

그리고 자기는 침상 한쪽에 가서 털썩 걸터앉는다.

송혜련이 그대로 앉아있자,

“누우라니까 그러네”

재차 이른다.

마지못하는 듯 송혜련이 자리에 눕자,

“내왕이란 놈이 손찌검을 했군. 고얀놈”

하고 서문경은 혼자 중얼거리듯이 내뱉는다.

송혜련은 사르르 눈을 감는다.

곤혹스러운 기색이다.

“눈을 감지 말고 좀 얘기를 해 봐.

답답하잖아.

그 녀석한테 얼마나 두들겨 맞았느냐 말이야”

송혜련은 마지 못하는 듯 눈을 뜨고 대답한다.

“많이 맞지는 않았다구요.

뺨을 몇 차례 맞았을 뿐이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병자처럼 누워있지?”

“괴로워서 그래요.

머리도 지근지근 아프고,

온 몸이 몸살이 난 것 같다니까요.

열도 좀 있는 것 같고...”

“뺨을 맞았는데 몸살이 다 나나? 그것 참 희한하군”

 

 

 

투옥 20회 

 

 

 

“그게 아니라, 남편이 나를...”

“아니, 그 녀석을 아직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내 앞에서 자꾸 남편, 남편 하게. 그럼 그 녀석한테 돌아가면 될 거 아니야”

 




술기운 탓인지 서문경은 좀 격한 어조로 내뱉는다.

송혜련은 당황한다.

“여보, 그게 아니예요.

어쩌다가 저도 모르게 그만 말이 그렇게 나왔지 뭐예요.

잘못했다구요.

그 말 취소할게요.

남편이라고 생각하다뇨.

천만의 말씀이에요.

제 얘기를 들어보시라구요.

일이 어떻게 됐는가 하면...”

“그래, 어서 얘길 해보라구”

서문경의 어조가 좀 누그러진다.

송혜련은 그날 밤의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얘기해 나가다가 뺨을 맞은 대목부터

약간 열을 올려 내왕이를 이제 ‘남편’이 아니라

 ‘그 놈’이라고 마구 부르며 지껄여 댄다.

“글쎄 그 놈이 뺨을 두 차례나 갈기고 나서 어디 누구하고 붙었는가 좀 보자면서

남의 아랫도리를 벗기려 들잖아요.

막 악을 쓰며 덤벼드니까 불끈 안아다가 침상에 갖다 눕히고서

이번에는 겁탈을 하려고 들지 뭐예요”

“그래서? 당했나?”

얘기가 그 대목에 이르자 서문경은 재미있다는 듯이 두 눈에 짓궂은 웃음이 내번진다.

“당하다뇨. 어림도 없다구요. 내가 호락호락 당할 것 같애요?

막 사정없이 가슴패기를 물어뜯어 줬지 뭐예요.

그랬더니 그만 죽는 시늉을 하면서 나가떨어지지 않겠어요.

그 틈을 타서 냅다 도망쳐 나왔다구요”

“허허허...”

서문경은 그만 웃음을 터뜨린다.

문득 이병아가 왕파네 찻집 내실에서 자기의 불알을 잡아 당겼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여자들이란 모두 다급할 때는 자위(自衛)의 수단으로

사정 없는 짓을 하는 독한 것들이로구나 싶기도 했다.

“이놈아, 인제 너하고 끝장이다.

다시는 날 만날 생각을 말아라,

하고 마지막 할 말을 내뱉어주고 집을 나와 버렸지 뭐예요.

그러니까 인제 저하고 나하고는 남남이나 다름이 없다구요”

“그럼 됐네. 그런데 괴롭고 어쩌고 할 게 뭐 있어.

왜 누워있는 거야?”

“좌우간 그런 일을 겪고 나니 머리도 아프고,

몸살이 난 것 같다니까요.

 입맛도 뚝 떨어지고...”

“알았어. 그럴 때는 말이야 약이 있다구. 그 약이 직방이지”

“무슨 약인데요”

“무슨 약인지 가르쳐 줄 테니까. 자, 일어나라구”

송혜련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누운 채 서문경을 바라보기만 한다.

“어서 일어나라니까. 저쪽 반금련의 침실로 가자구”

“히히히...”

이제 무슨 약인지 알았다는 듯이 송혜련은 부스스 일어난다.

그녀를 데리고 서문경은 반금련의 거실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