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00)
투옥 26회
썩 내키는 일이 못되고, 오히려 속으로 못마땅하기까지 했으나,
내흥이는 그 뒤로 곧잘 주방과 내왕이의 주변을 슬금슬금 맴돌며
은밀히 그를 감사하기 시작했다.
주방은 식품 조달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전에 그 직책을 맡았던 터이라
그가 주방에 드나들어도 아무도 이상한 눈으로 보질 않았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내왕이는 그를 대할 때마다 미안하고
창피한 생각도 들어서 슬그머니 피하기 일쑤였다.
그의 직책을 자기가 차지하게 되었으니 미안할 수밖에 없고,
또 아내를 서문경에게 빼앗기고 그 대가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 같아서
창피하기도 했던 것이다.
내왕이는 심정이 매우 착잡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손설아 마님과 육체를 나누는 사이가 되기 전에는 외곬으로
서문경과 아내에 대한 증오와 비탄에 휩싸여 있었으나,
이제는 뜻밖에 주인어른의 부인과 내통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심정이 착잡할 수밖에 없었다.
두려우면서도 한편 말할 수 없는 쾌락과 희열을 맛보게 된 터이니 말이다.
손설아 마님과의 관계가 혹시 탄로 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공포심에 가까운 것이었다.
서문경이가 자기는 남의 아내를 빼앗아 가지면서도 자기 아내에게
손을 댔다는 것을 알면 필경 대노(大怒)하여 죽이려고 들 게 뻔하니 말이다.
그런 공포심이 있을수록 몰래 만나는 기쁨은 한결 더한 법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자기가 데리고 살았던 두 여자와는 달리 비록 네 번째이기는 하지만
대부호의 부인이고 보니 냄새부터가 다르고,
살결의 감촉까지가 달라서 사람을 황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자기네 부부가 쓰던 침상과는 천양지차가 있는
그녀의 화려한 침실에서의 정사는 내왕이로서는
그야말로 꿈속에서 노는 듯한 착각을 가지게 하기도 했다.
도원경(桃源境)의 황홀감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서문경이가 이런 기가 막히는 부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송혜련 같은 냄새도 별로고,
살결도 그저 그런 여자가 무엇이 좋다고 빠져서 남의 눈이 있는데도
기어이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고량진미에만 길들여진 입에는 별 맛도 없는 음식이 오히려 별미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내왕이는 씁쓰레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서문경이가 과연 그 별 맛도 없는 음식을 끝내 별미로 여길 것인지,
아니면 결국 뱉어내 버릴지,
내왕이는 두고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착잡한 심정을 달래고 있었다.
손설아 마님과 꿈결 같은 사랑을 나누게 되었으면서도 내왕이는
자기를 배반한 송혜련에 대한 괘씸하고 얄미운 생각과,
그녀를 빼앗아간 서문경에 대한 증오가 때때로 고개를 쳐들곤 했던 것이다.
투옥 27회
내왕이가 손설아의 침실을 찾아가는 것은 집안사람들이 모두 잠들고,
어느 방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은 한밤중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손설아는 거실의 불은 끄고,
안쪽에 있는 침실의 불만 켜놓고서 그를 기다렸다.
거실 문은 물론 고리를 안으로 걸지 않고, 살짝 닫아만 두었다.
정부(情夫)가 소리도 없이 쉽사리 들어설 수 있도록 말이다.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오고,
첫닭이 울 무렵까지 내왕이가 찾아오질 않으면 그제야 손설아는
오늘밤은 무슨 일이 있어서 안 오는 모양이라고 단념을 하고서 혼자 잠들게 마련이었다.
같이 동침을 하고서도 새벽녘이 되기 전에 내왕이는 침실을 빠져나가 자기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것이 그들 사이에 은연중에 정해진 말하자면 밀회의 규칙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심야(深夜)의 사랑도 결국은 비밀의 장막에 가리어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어느 날밤,
두 사람이 벌거숭이가 되어 침상위에서 휘감겨 꿈틀거리고 있을 때
난데없이 거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님, 마님, 주무세요?”
월미가 거실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왕이가 깜박 잊고 방문을 안으로 걸질 않았던 것이다.
깜짝 놀란 손설아가 후닥닥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내왕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일어나려는 그녀를 만류하듯 불끈 힘주어 끌어안고
그대로 가만히 숨을 죽였다.
“마님, 약이 어디 있죠? 배가 아파서 못 견디겠어요”
어둠 속을 더듬듯 하더니 잠시 후에 월미는 거실에 불을 켰다.
“왜 한밤중에 불을 켜고 야단이야!”
그만 손설아는 자기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내뱉고 만다.
침실과 거실 사이에도 문짝이 달려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밖으로 통하는 거실의 문과는 달리 위아래는 공간을 그대로 두고,
가운데 부분만 가린 그런 문이었다.
그러니까 거실에 불이 켜지면 불빛이 문짝의 위아래를 통해서 침실 안으로도
비쳐들게 마련이었다.
“미안해요, 마님. 약을 찾으려고요.
자다가 별안간 배가 아프지 뭐예요. 아이고 배야-”
월미는 침실 쪽을 향해 엄살인지 진짜인지 곧 자지러지는 듯한 소리까지 내뱉는다.
위아래가 비어있기는 하지만 문짝이 달려있고,
또 침상 앞에 망사로 된 장막이 드리워져 있어서 거실에서 이쪽 안이 보일 턱이 없는데도
불빛이 비쳐 들어오자 손설아는 당황하여 후닥닥 몸을 일으킨다.
투옥 28회
벌거숭이가 된 몸뚱이로 침상에서 내려서자 손설아는 벗어서 던져 놓은 잠옷을 주워 입는다.
아랫도리의 속옷을 먼저 찾아서 다리에 꿴 다음 그 위에 잠옷을 걸쳐야 되는 건데,
당황해서 정신없는 터이라 그냥 엷은 천으로 지은 잠옷만을 후닥닥 입고서 거실로 나간다.
“아니 한밤중에 왜 이렇게 시끄럽게 야단이지?”
“배가 아프다니까요. 못 견디겠다구요”
“지랄같이 배가 왜 하필 남 달게 자는데 아프냔 말이야. 응?”
“어머, 마님, 왜 그러세요?
별안간 아픈 걸 어쩌란 말이에요.
마님한테 약이 있잖아요.
그래서 약을 가지러 온 거예요”
“아이구 참 속썩이네.
저기 저 장롱 서랍을 열어 보라구.
거기 어디 영신단(靈神丹)이 들어있을 거야”
월미는 배도 아프고,
기분도 언짢아서 절로 이맛살이 잔뜩 찌푸려진다.
아무리 달게 잠을 자고 있었다 하더라도 남이 아파서 못 견디어 약을 가지러 왔는데
몹시 못마땅한 듯이 신경질을 부리다니 야속하다 싶었다.
평소의 마님과는 어쩐지 달라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장롱 쪽으로 가서 서랍을 빼어 그 속에서 영신단을 찾아내고 있던 월미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뒤통수에 마님의 시선이 와서 꽂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님은 침실로 들어가는 문을 막아서듯이 하고서
자기를 노려보듯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머나”
월미는 약간 놀란다.
마님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서 있는 마님의 몸뚱어리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방금 가까이서 대했을 때는 얼굴을 바라보느라 몰랐는데 좀 떨어진 거리에서 보니
잠옷이 엷은 천으로 된 것이어서 마님의 몸뚱어리가 어렴풋이 내비치질 않는가.
그런데 잠옷 속에 아무것도 속옷을 입고 있지 않은 듯 아랫도리의 사타구니께는
거멓게 비쳐 보이기까지 했다.
잘 때 아랫도리까지 속옷을 홀랑 다 벗고 잠옷만 입고 자는 건지 아니면
알몸으로 자다가 일어나서 잠옷을 걸치고 나온 것인지 알 수 가 없지만
어쨌든 월미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여름철이라고는 하지만,
혼자 자면서 그럴 수가 있는지 여자가 사타구니만은 가리고 자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왜 그래? 뭘 보는 거야? 어서 약이나 꺼내가질 않고...”
손설아는 또 신경질적으로 내뱉고는 그제야 자기의 알몸을 의식한 듯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며 얼른 잠옷 자락을 여민다.
“예, 마님, 곧 나갈게요”
“불 끄고 나가라구”
“예, 알았어요”
투옥 29회
영신단을 꺼내든 월미는 촛불이 켜져 있는 곳으로 가서 훅 불어서 불을 꺼버린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가만가만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거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월미가 문짝을 닫으려 할 때였다.
침실 쪽에서 뭐라고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월미는 깜짝 놀라 주춤 멈추어 섰다.
남자의 목소리 같았던 것이다.
아주 낮은 소리여서 똑똑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마 문을 안으로 걸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그리고,
“알았어요”
하고 나직하게 대답하는 마님의 목소리도 들렸다.
“어머나 어머나...”
월미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얼른 복도를 자기 방 쪽으로 몇 걸음 옮겨가
또 가만히 멈추어 서서 거실 문을 돌아보며 귀를 기울였다.
아니나 다를까,
곧 딸그락 하고 문고리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월미는 뜻밖의 일에 어찌나 놀라고 긴장을 했던지
그만 아프던 배도 얼얼하기만 했다.
그런데 도대체 마님과 같이 자고 있는 남자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주인어른이 와서 동침을 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이
안으로 문을 걸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주인어른이 마님한테 자러 올 턱도 없지만 말이다.
틀림없이 외간 남잔데,
마님이 언제부터 어떤 남자와 눈이 맞아서 남몰래 자기 침실로 끌어들여
함께 밤을 지새우기까지 하는지,
월미로서는 정말 혀가 내둘릴 일이었다.
만약 탄로가 나서 주인어른이 알게 되는 날이면
이번에는 곤장을 맞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터인데,
간뎅이가 부어도 이만저만 부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마님이 바락바락 신경질을 내는 게 어쩐지 여느 때와는 다르다 싶었고
홀랑 벗은 알몸에 잠옷만 걸치고 나온 품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었더니,
침실에 외간 남자를 숨겨두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하고 월미는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이 혼자서 헤죽이 미소를 짓기도 했다.
둘이서 그 짓을 하고 있는데 자기가 들어갔다면 정말 얼마나 질겁을 했을까 생각하니
우습기도 하고 좀 미안하기도 했다.
월미는 자기가 그런 비밀을 알아챘다는 눈치를 절대로 마님에게 안 보이기로 하고서,
마님과 정을 통하는 남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그 정체를 은밀히 밝혀 보기로 마음먹었다.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서 궁리를 거듭한 끝에 월미는
“옳지, 그러면 되겠구나”
하고 탁 무릎을 쳤다.
그러고는 커다랗게 하품을 하는데,
멎은 듯 얼얼하던 배가 다시 아파 왔다.
가지고 온 영신단을 한 알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월미는 침상에 올라 배를 웅크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투옥 30회
주방 한쪽에 평소에는 별로 쓰지 않는 취사용 기구 따위를 넣어두는 다락이 있었다.
다락 위는 그대로 지붕 안쪽, 즉 보꾹의 서까래가 보이는 허공이었다.
월미는 주방 책임자인 손설아 마님의 몸종이기 때문에 자기도 노상 주방엘 드나들었고,
바쁠 때는 부엌 아낙네들과 힘께 일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물건을 꺼내려 다락에도 여러 차례 올라가 본 적이 있었다.
그 다락 위의 공간,
즉 더그매는 건물의 각 방 위로 통한다는 생각이 문들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천장 위에서 침실을 엿보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이튿날 오후,
월미는 주방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살그머니 그 다락 위로 올라가 보았다.
미리 현장 답사를 해보는 셈이었다.
방의 위치를 가늠해 보니 다락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이 마님의 침실일 것 같았다.
월미는 숨을 죽이며 그쪽으로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기어가 보았다.
각 방의 천장들인 반자가 튼튼한 널빤지로 되어 있어서 사람이 하나
그 위를 기어가도 아무런 기척도 일어나질 않았다.
짐작으로 여기쯤이 마님의 침실이 아닐까 싶어서 가만히 멈추고 반자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마침 한 군데 잇대어놓은 널빤지의 틈이 벌어져서 희미한 빛이 아래로부터 솟아오르고 있었다.
옳지 됐다,
하고 월미는 그곳으로 가서 납작 엎드려 그 틈서리에 한쪽 눈을 바싹 갖다 대 보았다.
짐작대로 마님의 침실이었고, 침상이 바로 눈 밑에 훤히 내려다보였다.
월미는 양상군자(梁上君子)처럼 더그매의 어둠 속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날 밤 월미는 잠을 자지 않았다.
불을 끄고 자는 듯이 침상에 누워 있다가 둥둥둥...
삼경을 알리는 현청의 북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한참 뒤에 살그머니 일어나 방문을 소리 없이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발자국 소리가 안 나게 가만가만 마님의 거실 문으로 다가가 살짝 문짝을 당겨 보았다.
안으로 걸려 있어서 문은 움직이질 않았다.
“옳지, 오늘밤에도 찾아왔구나”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월미는 어두운 복도를 그림자처럼 걸어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락문을 조심스레 열고 그 위로 올라갔다.
영락없는 양상군자였다.
낮에 확인 해 둔 그 틈서리로 가느다란 불빛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낮과는 달리 한밤중의 깜깜한 더그매라 그런지 그 불빛이 한결 선명했다.
월미는 공연히 좋아서 혼자 헤죽헤죽 웃으며 그 불빛 쪽으로 조심조심 기어갔다.
납작 엎드리며 그 틈서리로 한쪽 눈을 가져가려고 하는데 밑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놀라면서 월미는 가만히 숨을 죽이고, 우선 귀부터 기울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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