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45)
이병아 부인 16회
“술자리만 좋은가? 저 꽃밭을 좀 보라구”
화자허가 화단을 가리키며 말한다.
서문경은 그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다시 감탄조로 내뱉는다.
“오-국화 일색이로군. 좋은데...”
“우리 마누라 솜씨라구”
화자허는 서슴없이 아내 자랑을 한다.
“호, 그래?”
“국화를 유난히 좋아하지 뭐야. 그래서 저렇게 화단에 온통 국화만을 심어서 가꾼거지”
“취미가 국화 재배인 모양이지?”
“그렇다구”
“고상한 취민데...”
“여간 정성이 아니지”
“오늘 저녁에 자네 마누라 솜씨 자랑하려고 초대했군 그래”
“오늘이 보름이잖아. 달도 밝고 해서...”
“달밤에 국화를 감상하면서 술을 마신다... 시라도 한 수 읊어야 격에 어울리겠는데...”
“우리 마누라가 제안한 것이지 뭐야”
좀 속이 모자라는 사람처럼 화자허는 아내를 한껏 추켜올리듯 말한다.
“흠-자네 마누라 멋있는 여자군 그래”
“그렇다고 할 수 있을거야. 허허허...”
화자허는 기분이 매우 좋은 모양이다.
서문경은 재미있다는 듯이 코 언저리에 좀 묘한 웃음을 살짝 떠올리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다.
짐작했던대로 이병아가 꾸민 일에 틀림없어서 속으로 흐흠, 잘 돼가는군, 싶은 것이다.
그러고 있는데 이병아가 손수 음식을 날라왔다.
요리사를 비롯해서 일하는 아낙네를 두 사람이나 불렀고 수춘이도 있는데
이병아는 손수 걷어붙이고 같이 주연의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고 부인, 수고가 많으십니다”
서문경은 시치미를 뚝 떼고 인사말을 던진다.
그녀가 손수 음식을 나르는 게 대견해 보였던 것이다.
그런 점도 여느 부잣집 정실과는 좀 다르군 싶었다.
“어머, 서문 대관인께서 제일 먼저 오셨군요”
이병아도 어색한 기색을 조금도 내비치질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넘긴다.
“오늘 저녁에 아주 멋있는 술자리를 마련하셨는데요”
“호호호...멋있나요?”
“멋있고 말고요. 곧 보름달도 떠오를것이고,
국화도 저렇게 만발했으니 얼마나 멋있는 술자립니까.
이런 주연을 부인께서 제안하셨다면서요?”
“예, 호호호...”
“부인, 아주 낭만적이십니다. 그리고 취미도 고상하구요.
저 국화를 부인께서 손수 다 가꾸셨다죠? 정말 보통 솜씨가 아니십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병아는 수줍은 듯한 미소가 담긴 눈으로 서문경을 한 번 힐끗 바라본다.
화자허는 자기 아내와 서문경이 스스럼없이 주고받는 대화가 매우 듣기 좋은듯
시종 흐믓한 표정이다.
말하자면 서문경과 이병아의 기막히는 연기에 감쪽같이 속고있는 셈이다.
이병아 부인 17회
서문십걸들이 속속 모여들고,
기녀 세사람과 악사 두 사람도 불려와서 가을 달밤의 국화 감상 노천주연의 막은 올랐다.
때마침 동쪽 먼 산위로 보름달이 벌거스름한 둥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햐-달이 뜨는군”
“오늘이 보름이구나”
“술맛 나겠다니까. 좋아, 좋아”
제각기 한마디씩 감탄들을 해댔다.
실내에서나 정자에서의 주연 때와는 또 다른 정취에 모두들 들떠서 건배로부터 시작하여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가고 환담이 무르익었다.
화제는 주로 이병아 부인에 관해서였다. 국화를 기른 솜씨를 비롯해서 이런 멋있는 술자리를
마련한 그 낭만적인 성품이 겉보기와는 매우 다르다면서 칭찬들을 아끼지 않았다.
이병아는 화제가 너무 자기를 추켜올리는 쪽으로 흐르자 쑥스러워서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보름달이 중천을 향해 서서히 기어오르고 있을 무렵에는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률에 맞추어
세 기녀가 춤을 추어댔고, 십걸들 중에서 흥에 겨워 일어나 함께 우쭐우쭐 추어대는 축도 있었다.
모두들 취해서 흐느적거렸다.
그러나 서문경만은 적당한 취기에서 자제를 하고 있었다.
그는 곧잘 이병아를 힐끗힐끗 바라보며 그녀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로부터 뭔가 은밀한 수작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춤판이 한창 어우러지고 있을 때
그녀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힐끗 시선을 보내왔다.
서문경은 그녀의 그 눈빛에서 어떤 신호를 감지할 수가 있었다.
자기를 따라오라는 눈짓인 것 같았다.
이병아는 술자리를 떠나 집 쪽으로 가더니 슬그머니 정원의 숲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술과 춤, 그리고 노래에 휘말려서 아무도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서문경만이 시치미를 뚝 떼고 취한 체 앉아서 술잔을 조금씩 기울이며
그녀의 모습을 살짝살짝 눈여겨 보고 있다가,
‘흐흥, 알았다구’
속으로 중얼거린다.
숲 속으로 오라는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능청스러운 서문경은 얼른 일어서질 않고 화자허를 찾아본다.
화자허도 일어나 춤판에 어울려 정신없이 흥청거리고 있었다.
됐다는 듯이 서문경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집 변소가 어디 있나? 아무데나 갈겨버려도 되겠지. 정원의 숲 속에다가 갈겨버릴까”
일부러 오줌이 마려운 것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큰소리로 지껄인다.
그리고 취기가 심한 듯 약간 비틀거리기까지 하며 휘청휘청 걸어간다.
제각기 술에 취해서 흥청거리느라 소변보러 가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서문경은 휘청거리며 자연스럽게 숲 속으로 걸음을 들여 놓았다.
이병아 부인 18회
화자허네 집은 서문경의 집에 비해서 그 터전의 넓이나 건물의 수료가 절반도 채 되지 못했다.
그러나 정원의 화초나 수목들은 월등히 잘 가꾸어져 있었고, 무성하기도 했다.
주연이 베풀어지고 있는 곳의 호두나무는 우람한 거목이어서 그 한쪽 가지가
서문경의 집 담 너머까지 뻗어나가 있었고, 이병아가 모습을 감춘 정원의 숲도 넓고 울창해서
그속으로 들어서면 대낮에도 바깥에서 잘 보이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죽은 화태감의 오래된 저택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울창한 숲 속으로 휘청거리며 걸음을 들여놓은 서문경은 정말 아랫배가 뻐근하도록
소변이 마려워서 우선 볼일부터 본다.
좍-뻗어나가 나무 밑둥을 때리고 줄줄줄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호젓한 숲 속에
메아리를 이루듯이 퍼진다.
숲 한가운데쯤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이병아는 서문경의
그 유난히 기운찬 오줌줄기 소리가 그만 왈칵 부끄러워져서 살그미 돌아서 버린다.
볼일을 보고난 서문경은 아랫도리를 잘 여미고서 숲 깊숙이 걸어 들어간다.
달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는 숲 속에 희끗하게 서있는
이병아의 모습이 마치 무슨 달밤의 선녀(仙女)처럼 느껴진다.
“부인”
다가서며 서문경은 그윽한 목소리로 부른다.
이병아는 서문경을 향해 가만히 돌아서며 수줍은 웃음을 살짝 떠올린다.
“드디어 마음의 준비가 되신 모양이죠?”
“예”
서슴없이, 그러나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조금 숙였다가 든다.
그 얼굴에 달빛이 비쳐 섬뜩하도록 아름답다.
서문경은 그만 자기도 모르게 왈칵 다가들어 그녀를 가슴 안에 불끈 안아 버린다.
“어머나, 이러시면 안돼요”
이병아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목소리를 죽여 속삭이듯이 말한다.
“부인, 사랑해요. 음-”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서문경은 못견디겠다는 듯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온몸을 부르르 떤다.
서문경이 이처럼 바짝 열을 올리기는 근래에 처음이다.
이병아에 대한 호기심이 욕정(慾情)을 넘어 진짜 애정에까지 이르러 있었던 모양이다.
화끈거리는 입술을 그녀의 입술로 가져간다.
“어머, 성급하셔. 누가 본다니까요”
“보긴 누가 봐요”
“아이 어쩌나-”
그녀는 고개를 돌리면서도 마지못하는 듯 사르르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받아들여 버린다.
달빛이 그들의 입맞춤 위로 좌르르-쏟아져 내린다.
이병아 부인 19회
잠시 후 이병아는 정신이 번쩍 돌아온 듯 서문경의 품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며,
“안돼요. 그러지 말아요. 여기가 어딘데요. 큰일 나요. 나중에 나중에...”
애원을 하듯 말했다.
서문경의 한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애무하다가 금새 슬금슬금 치맛자락을
말아 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덧 입술은 그녀의 앞가슴으로 내려가 옷섶을 헤치고 있었다.
“괜찮아, 가만히 있으라구”
이미 말투도 반말로 바뀌었다.
“안된다니까요. 이러면 난 싫어요. 정말이에요”
이병아는 싸늘한 목소리로 낮기는 하나 날카롭게 자르듯 내뱉는다.
여느 여자 같았으면 서문경은 싫다거나 말거나 아랑곳없이
마구 어거지로라도 치마를 걷어붙이고 속옷을 벗겨내어 나무에 밀어붙여서
기대세운 채 깨끗이 재미를 보아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병아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녀는 정말 심기(心氣)가 상해서 대번에 등을 돌려버릴지도 몰랐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서 스스로 옷을 벗고 다가오도록 점잖게 순서를
밟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문경은 달아오른 몸뚱어리를,
“음-으음-”
무거운 신음소리로 식히며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서 스르르 힘을 빼버린다.
서문경의 품안에서 벗어난 이병아는 나긋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한다.
“여보, 미안해요”
그녀의 입에서 서슴없이 ‘여보’라는 말이 나오자
서문경은 새삼스럽게 귀가 번쩍 뜨이는 듯 두 눈에 번질거리는 웃음이 떠오른다.
“괜찮아요. 내가 오히려 너무 성급하게 굴어서 부끄럽소. 이제 다음은 어떻게 하는 거죠?
화자허가 외박을 하는 날 밤에 만나면 되는데 그 날을 내가 어떻게 알죠?”
그러자 이병아는 걱정 말라는 듯이 살짝 눈매에 웃음을 띠며 일러준다.
“저... 그이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날 밤에는 말이죠,
우리집 호두나무 가지에 등불을 하나 달아놓을게요.
삼경에 북소리가 울린 다음에 호두나무를 보시라구요.
그이가 그때까지 집에 안 돌아왔으면 그날 밤은 못 돌아오는 거잖아요 통행금지니까”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그날 밤은 대문을 열어두시겠어요?”
“대문으로 들어오시면 혹시 천복이가 알게 될지 모르니까,
담을 넘어오시라구요. 담벼락에다가 사다리를 세워놓을 테니까요”
“담을 넘어서? 허허허... 그거 재미있겠는데요”
“수춘이는 내 편이니까 안심하시고요”
“벌써 구워삶아 놓았나요?”
“그애는 본시 내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곧이듣거든요.
아이가 착할 뿐 아니라 평소에 용돈도 듬뿍듬뿍 주지 뭐예요”
이병아 부인 20회
“그럼 내가 담을 넘어온다는 것도 아나요? 수춘이가”
“그애한테 등불을 달게 할거예요. 사다리도 갖다놓도록 하구요”
“아직은 모르는군요”
“예, 제가 잘 알아서 할테니까요”
“그애 입을 단단히 틀어막아야 돼요. 만약 탄로가 나면 큰일이니까요”
“염려 마세요. 탄로가 나면 제가 더 큰일이잖아요”
“그럼 부인, 하루 속히 호두나무에 등불이 켜지기를 기다리겠어요”
“호호호... 어서 술자리로 먼저 돌아가세요.
저는 조금 뒤에 집안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술자리로 나갈게요”
“알았소”
서문경은 성큼 돌아서서 걸음을 떼어놓는다.
잠시 후 이병아도 살금살금 숲에서 나가 얼른 집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튿날 밤부터 서문경은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고나면 한참 있다가 방문을 열고
화자허네 집 호두나무를 바라보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러니까 서문경은 삼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않을 뿐 아니라,
반금련을 비롯해서 마누라들을 아무도 가까이 하려 들지도 않았다.
만약 그녀들과 관계를 가진 다음에 호두나무에 등불이 켜지면 낭패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정력 절륜의 서문경이지만 한 여자를 즐긴 다음은 아무래도 기력과 흥이 반감되어
담을 뛰어넘어도 별로 재미가 나지 않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서문경은 말하자면 몸속의 양기를 아껴가며 이병아와의 뜨거운 밀회의 밤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 호두나무에 등불은 켜지지가 않았다.
서문경은 초조해지고 말았다.
슬그머니 화가 치밀기도 했다.
아랫도리에 괴어있는 양기를 이제 감내할 수가 없을 지경이기도 했다.
서문경이 그처럼 여러 날을 여자를 상대하지 않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싶었다.
“흠, 그러면 되는 것을... 허허허...”
바보처럼 화자허가 제발로 걸어나가 외박을 해서 호두나무에 등불이 켜지기만을
기다린 게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자 서문경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다음 날 해질 무렵 서문경은 대안이를 시켜 화자허를 가까운 술집으로 불러냈다.
우선 간단히 한잔 나누면서 서문경은 시치미를 뚝 떼고 능청스럽게 말한다.
“오늘밤은 오은아네 집에 가서 한잔 하자구. 내가 살테니까”
“그럴까”
“자네 요즘 오은아한테 가서 자는 일이 없는 모양이지?”
“어떻게 알지?”
“다 아는 수가 있다구. 허허허...”
“은아를 만났었나?”
“아니, 은아를 만난게 아니라, 그집에 있는 누구더라... 이름이...”
일부러 서문경은 그 기녀의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는 듯 말끝을 흐린다.
아무도 만난 적이 없는 새빨간 거짓말이니 연막을 치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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