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44)
이병아 부인 11회
이튿날은 쉬고, 그다음 날 해질 무렵에
서문경은 응백작(應伯爵)과 사희대(謝希大)두 친구를 불러내어 기방에서 술을 마시다가
화자허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놀러 나오도록 했다.
곧 화자허가 와서 동석을 하게 되었다.
실은 화자허를 술집으로 불러내는 게 목적이었다.
그런데 서문경은 일부러 다른 두 친구와 어울린 김에 화자허에게도
나오라고 한 것처럼 꾸몄던 것이다.
그래야 일이 자연스럽고,
또 도중에 자기가 자리를 떠도 화자허가 아무런 의심을 안할 것 같았던 것이다.
여자 사냥꾼의 교활한 계략이었다.
그런 줄을 꿈에도 모르는 화자허는 후래삼배(後來三杯)라고 하면서
연거푸 권해대는 술잔을 받아 서슴없이 비워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서문경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약간 당황하는 표정까지 지으며 말했다.
“아차, 내 이 정신 좀봐.
오늘밤에 집에 손님이 찾아오기로 되어 있는데... 깜박 잊고 있었네”
“누가 찾아오는데?”
“약국 일 때문에 상의할 게 있어서...”
“음, 그럼 가봐야지 뭐”
도리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백작과 사희대도 바야흐로 술자리가 무르익는 판인데
서문경이 일어서다니 흥이 깨지는 일이지만 하는 수 없다는 그런 표정이다.
서문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한다.
“나 때문에 술자리를 파하지 말라구.
얼른 다녀올테니까.
잠깐 만나서 얘기하면 끝나는 일이니 곧 돌아올 수 있다고.
정말이라구”
방에서 나가면서 다시 친구들을 돌아보며,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서면 안된다구. 정말이야”
다짐을 놓는다.
기녀들이 염려 마시라고,
서문대관인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절대로 일어서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웃으며 지껄여댄다.
그렇게 해서 화자허를 응백작과 사희대와 함께 술자리에 묶어두고서 서문경은 말을 타고
이병아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오늘은 대안이에게 말고삐를 잡히지 않고서 집에서부터 자기 혼자 말을 타고 나섰던 것이다.
그것도 다 꿍꿍이 속이 있어서였다.
서문경은 화자허의 집 앞에 이르자 말을 세웠다.
그러나 곧바로 대문으로 들어서질 않고 왈칵 고삐를 낚아채면서 말의 배때기에다가
채찍을 한 번 가한다.
말이 놀라 불끈 앞다리를 쳐들고 대가리를 추켜올리면서 히히힝 히히힝...
하고 냅다 코를 불어댄다.
집안에 있는 이병아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그렇게 요란한 기척을 내는 것이다.
히히힝 히히힝... 곧장 말이 껑충껑충 뛰어오르듯이 하며 코를 불어대자
대문이 살짝 열리며 수춘이가 내다본다.
수춘이는 서문경이라는 것을 알아보자 얼른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이병아 부인 12회
잠시 후 다시 수춘이가 나타나 말했다.
“서문 대관인님, 지금 주인 어른이 집에 안계시는데요”
“응, 그래? 마님은 계시느냐?”
“예”
“마님을 좀 만났으면 해서 왔는데...”
“마님이 저... 주인 어른이 안계신다고 말씀 드리라고 그러시던데요”
수춘이는 좀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럼 돌아가라는 말인가?”
“모르겠어요. 그런 것 같애요”
“그런 것 같애? 허허허...”
서문경은 껄걸 웃고서 말을 탄채 대문을 밀고 들어간다.
“어머나”
수춘이는 꽤 당황하면서 후다닥 다시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서문경은 정원의 나무에 말을 매어두고서 뚜벅뚜벅 서슴없이 집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아무도 안내를 하지 않는데도 유유히 응접실로 들어간다.
잠시 앉아있노라니 수춘이가 차를 내왔다.
마지못해 차를 가지고온 듯한 그런 기색이 수춘이의 얼굴에 역력하다.
서문경은 일부터 약간 화라도 난 것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마시려 하지도 않고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있다.
“서문 대관인님, 차라도 드시라구요”
수춘이가 좀 민망스러운 듯 묘한 시선으로 힐끗 보면서 말한다.
그리고 잰걸음으로 응접실을 나가 안쪽으로 사라진다.
잠시 후 가만가만 복도를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서문경은 속으로
‘제가 안 나타나고 배기여’
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마음을 가다듬듯 아랫배에 지그시 힘을 준다.
이병아는 꽤나 긴장이 되어 있는 듯 약간 굳어보이는
그런 얼굴로 응접실문에서 안으로 들어설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말한다.
“우리집 양반이 집에 안 계신단 말이에요”
“그래서 찾아왔지 뭡니까”
서문경은 두 눈에 은은한 웃음을 담으면서 이병아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녀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살짝 지나간다.
곤혹스러운 듯 가만히 서문경을 마주 바라보고만 있다.
“화자허는 지금 응백작과 사희대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어요.
나도 그 자리에 함께 있다가 이리로 왔다구요”
“어머”
이병아는 놀란다.
약간 어이가 없는 그런 표정이다.
“부인 생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지 뭐예요.
화자허가 집에 없으니 오늘 밤은 깨어 일어날 염려도 없잖아요. 안 그래요?”
서문경은 입 언저리에 살짝 웃음을 떠올리며 거침없이 말해 버린다.
이제 모든 것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툭툭 털어놓고 덤벼야 결판이 난다는 계산인 것이다.
이병아 부인 13회
“부인, 이리 들어오세요. 조용히 얘기나 좀 하자구요”
“안돼요”
“왜 안되나요? 부인”
“불안하다구요”
“무엇이 불안해요?”
“남편이 불쑥 돌아올지 모르잖아요”
서문경은 속으로 ‘흐흥, 이제 다 돼가는군’하고 중얼 거린다.
남편이 돌아올까 불안하다는 말은 그저께 밤에 골아떨어진 남편이
깨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과 똑같은 의미가 아닌가.
남편이 돌아올 염려가 없다면 당신 뜻대로 따르겠다는
의사 표시로 볼 수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이병아를 안심시키려고 서문경은 차분한 어조로 말한다.
“화자허는 곧 돌아오지 않는다구요.
내가 술자리에 돌아갈 때까지는 절대로 일어서서는
안된다고 다짐을 받아 놓고 나왔지 뭡니까.
오늘밤 집에 잠시 손님이 찾아오기로 했는데, 깜박 잊었다고 말입니다.”
“어머나..”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어 이병아는 다시 휘둥그래진 눈으로 서문경을 바라본다.
약간 질렸다는 그런 표정이다.
서문경은 너무 솔직하게 털어놓은 게 아닌가 싶어서
목소리에 한결 열기를 띠고서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부인을 조용히 만날 수가 있어야 말이죠.
나는 이제 부인을 안 만나고는 살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구요.
정말이에요”
그러면서 서문경은 의자에서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다.
“부인, 이리 들어오세요”
“...”
“들어오시라니까요”
이병아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서문경은 그만 뚜벅뚜벅 그녀 쪽으로 다가간다.
“어머, 이일을 어쩌나...”
이병아는 당황하며 재빨리 몸을 돌려 내실 쪽으로 걸음을 떼어놓는다.
그러나 얼른 보아도 여자의 반사작용이다.
결코 싫어서 도망치려는 게 아닌 것이다.
서문경은 뒤쫓듯이 좀 걸음을 빨리하여 응접실 문을 나서
그녀를 뒤따르며 뒤통수에다 대고 뇌까린다.
“피하시면 안방에까지라도 따라들어갈거니까요.
알아서 하세요”
그말에 그녀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만 뒤돌아선다.
“들어갈게요. 어서 들어갑시다”
“진작 그러실 거지...”
싱그레 코 언저리에 짖궂은 웃음을 떠올리며 서문경은 도로 응접실로 들어간다.
“안되는데... 어쩐지 불안하다구요. 어서 돌아가시도록 하세요”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지못하는 듯
이병아는 서문경의 뒤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선다.
탁자위에 놓인 차가 싸늘하게 식었다.
서문경은 그것을 훌쩍 한 모금 마신다.
마주앉은 이병아는 약간 굳어진 표정으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이병아 부인 14회
“부인 이제 그러지 마시고, 우리 솔직하게 얘길 합시다.
나는 부인에게 내 심정을 다 털어놓은 셈이니까,
이제는 부인께서 무슨 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문경은 그윽한 시선으로 이병아를 바라보며 말한다.
결판을 내야겠다는 계산인 것이다.
이병아는 얼른 뭐라고 말이 나오지가 않는 듯 살짝 시선을 내리깐다.
“왜 아무 말이 없죠? 부인. 아무대답이 없는 걸 보니
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인 것 같은데... 맞죠? 무언의 승낙이겠죠?”
그제야 이병아는 가만히 입을 연다.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저는 남편이 있는 몸인걸요”
이렇게 말한다.
“그걸 누가 모르나요? 남편이 화자허잖아요. 내 친구인... 맞죠?”
“호호호...”
그만 이병아는 웃음이 나와버린다.
“지금 그런 걸 얘기할 때가 아니란 말이에요.
내가 오늘 밤 이렇게까지 해서 부인을 찾아왔을 때는 나대로 단단히 각오를 한것이라구요.
아시겠어요? 부인”
어조가 약간 으름장을 놓는 듯한 그런 투다.
“만약 그이가 알면 어쩌실려고요?”
“알면 안되죠. 누가 알도록 하나요. 어린앤가요?”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어요. 언젠가는 탄로가 나고 만다구요. 두려워요”
“걱정 말아요. 절대로 탄로가 나지 않도록 할테니까요”
“...............”
“부인, 그럼 승낙한 걸로 알고, 화자허가 밖에서 자는 날 밤에 찾아오겠어요. 알겠죠?”
“좀 생각해 보고요”
“뭘 또 생각해 본다는 겁니까?”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저도 마음의 준비가 돼야 하잖아요. 준비가 되면 제가 연락을 할게요”
“좋아요”
“그럼 어서 술자리로 돌아가셔야죠”
“예, 그러죠”
서문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이제 결판이 난 것과 다름이 없는 터이라 절로 콧구멍까지 벌름거리는
그런 능글능글한 웃음이 얼굴에 번진다.
이병아는 서문경이 말을 타고 떠난 당장 그때부터 마음이 들떠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청아현에서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갑부이면서 남달리 남자 구실까지 특출하기로 소문이 난
서문경이 자기를 그처럼 좋아하고 있었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어서
그날 밤 잠도 제대로 이루질 못했다.
마음의 준비가 돼야 하지 않느냐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준비가 뭐 따로 있을 턱이 없었다.
이튿날 아침 식탁에 남편과 마주앉아 아침을 먹으면서 이병아는 시치미를 뚝 떼고
문득 생각이 난 듯이 말을 꺼냈다.
“여보, 정원의 국화가 지금 한창이에요”
엉뚱한 얘기였으나, 실은 음흉한 수작의 시작이었다.
이병아 부인 15회
“나도 알고 있다구. 수고했어”
화자허는 무심히 대답한다.
이병아는 국화를 유독 좋아해서 취미삼아 정원 한쪽 널따란 화단에다가
온통 국화를 심어 정성들여 가꾸어 왔는데, 바야흐로 탐스러운 꽃이 활짝활짝 피어서
화단이 하얗고 노란 국화꽃으로 눈부시게 뒤덮인 것이다.
“내일밤이면 달도 만월이에요”
이병아는 이번에는 또 엉뚱하게 달 얘기다.
“그런가?”
“내일이 보름이잖아요”
화자허는 힐끗 아내를 바라본다.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은 모양이다.
“여보”
“응?”
“국화도 활짝 피었고, 달도 밝은데,
내일 저녁에 당신 친구들을 우리 집에 초대하면 어떻겠어요?
국화꽃을 구경하면서 달빛 아래서 한잔하시는 것도 멋있잖아요”
“그거 좋은 생각인데.. 당신 솜씨도 자랑하고 말이야”
“맞아요. 내 솜씨도 당신 친구분들한테 자랑해야죠”
“모두 놀랄걸. 국화가 보통 탐스럽게 피었어야 말이지. 허허허...”
아침부터 매우 기분이 괜찮다는 듯이 화자허는 껄걸 웃는다.
걸핏하면 술을 너무 마시고 외박이 잦다고 바가지를 긁기 일쑤인
아내가 웬일로 제손으로 술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니 좋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달밤에 국화를 감상하면서 마시는 노천주연을 베풀겠다니 말이다.
“그럼 내일 저녁에 친구들을 초대하세요. 난 오늘부터 그 준비를 할테니까요”
“몇이나 초대할까? 우리 서문십걸 전원을 초대해도 되겠어?”
“그러시라구요. 기왕에 한턱 내면서 누구는 초대하고 누구는 안하면 초대를 못 받은 분들이
나중에 알면 섭섭해 하잖아요”
“그렇겠군. 알았어”
화자허의 얼굴에 어린애처럼 희색이 떠오른다.
아내의 앙큼한 수작인 줄을 모르고서 말이다.
이튿날 해질 무렵, 서문십걸이 속속 모여들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찾아온 것은 서문경이었다.
서문경은 화자허의 집에서 저녁에 국화를 감상하면서 노천주연을 베푼다는
기별을 받고 속으로 ‘흐흥, 고것이 드디어 마음의 준비가 된 모양이군’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초대를 받았으니 며칠 전 오은아의 생일 축하연 때와 마찬가지로
좀 일찍 찾아가도 무방하겠지 하고 아직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집을 나섰던 것이다.
뒤뜰 한쪽에 온통 국화가 만발한 넓은 화단이 있고,
그 곁에 우람한 호두나무가 서있었다.
그 호두나무 가지에 등을 여러 개 매달았고,
그 아래에 널찍하게 자리를 깔고 주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햐-이거 일등 술자리로구나”
서문경은 대뜸 이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음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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