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금병매(金甁梅)

금병매 (43) 이병아 부인 <6~10회>

오늘의 쉼터 2014. 6. 26. 12:20

금병매 (43)

 

 

 

이병아 부인 6회 

 

 

 

 서문경이 화자허에게 좀 멋쩍은 듯이 물어본다.

“자네 부인 잔에 내가 술을 따라도 괜찮겠는가?”

 

“허, 괜찮지, 뭐 어때서”

화자허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대답한다.

친구가 속에 고약한 생각을 품고 있는 줄을 전혀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서문경이 술병을 들자, 이병아도 잔을 두 손으로 공손히 들고 약간 앞으로 내민다.

서문경은 조심스레 술을 따르면서 잔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과 손톱을 가만히 바라본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들 끝에 투명할 정도로 맑은 손톱이 마치 무슨 보석처럼 박혀 반질거린다.

유난히 고운 손이다.

술이 잔에 넘치려 하자

“어머, 됐습니다.”

이병아는 고개를 까딱하고서 그 잔을 조심스레 탁자위에 내려놓는다.

“자, 건배를 합시다”

서문경이 매우 흡족한 얼굴로 잔을 들어올리자,

화자허와 이병아도 잔을 든다.

꿀컥꿀컥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서문경은 힐끗 이병아를 바라본다.

그녀도 제법 한 모금 쭉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는다.

얼굴을 조금도 찡그리지 않는다.

“흠, 제법 마시는구먼”

됐다는 듯이 서문경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서문경과 화자허가 제각기 말에 몸을 싣고 집을 나선 것은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땅거미가 자우룩이 깔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화자허가 앞서고, 서문경이 뒤따르고 있었다.

서문경의 말은 대안이가 고삐를 잡고 걸었고,

 화자허의 말은 사내종인 천복(天福)이가 잡고 앞장섰다.

서문경은 말을 타고 앞서가고 있는 화자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약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초청하여 자기의 아내로 하여금 술까지 따르게 하고,

저렇게 기분 좋게 오은아의 집으로 앞장서서 안내해 가고 있는

그 우정이 조금은 가슴 한 귀퉁이를 건드렸던 것이다.

서문경으로서는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한 번 자기 눈에 들어서 그 여자를 사냥질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처녀건 유부녀건

조금도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끼는 법 없이 앞뒤 가리질 않고 덤벼들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목표물이 친구의 마누라이기 때문인지 양심의 한 모서리가

꿈틀거리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런 가책도 잠시뿐이고,

곧 그는 저 녀석을 어떻게든지 만취가 되도록 만들어서 집으로 데려다 주어야지 하는

음흉한 생각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병아의 부탁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지고 있는 것이었다.

오은아가 있는 기방에 도착하니 이미 축하연의 채비가 다 되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은아는 서 너명의 동료 기녀와 함께 화자허와 서문경을 호들갑스럽도록 반가이 맞이했고,

 곧 축하연은 시작되었다. 

 

 

 

이병아 부인 7회 

 

 

 

 서문경은 생일을 축하하는 뜻으로 미리 준비해온 은화 다섯 닢을 싼 것을

 

오은아에게 선물로 건넸다.

펼쳐보고서 오은아는,

 

“어머나, 은화를 다섯 닢이나... 서문 대관인님 정말 고맙습니다.”

좋아 어쩔 줄을 모르며 너붓이 고개를 숙여 새삼스럽게 절까지 한다.

자기의 소실이나 다름없는 오은아의 생일을 그처럼 후한 선물로 축하해 주는

서문경이 무척 고마운 듯 화자허도 흐믓한 표정으로 술잔을 권한다.

“자, 은아, 철철 넘치도록 술을 따라 드리라구”

“예, 그러고 말고요”

오은아는 그 잔에 정말 술이 넘치도록 정성스럽게 따른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가고,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며 축하연은 무르익어 갔다.

여느 주석에서와는 달리 서문경은 술잔을 조심스럽게 비우며 되도록 적게 마시려고 애를 썼다.

그 대신 화자허에게는 많이 마셔서 만취가 되도록 연거푸 권해댔다.

“오늘은 자네가 제일 기쁜 날 아닌가. 자네가 가장 귀여워하는 오은아의 생일이니 말이야.

그러니까 자네가 누구보다도 많이 마셔야 된다구. 안 그런가? 이 사람아”

이런 식으로 슬슬 부추겨 가면서 말이다.

기녀들도 지당한 말씀이라는 듯이 곧잘 잔을 화자허에게 돌리곤 했다.

사람이 무던하고, 술이 들어가면 남달리 헐렁헐렁한 편인 화자허는

서문경의 그 수작에 음흉한 계략이 숨겨져 있는 줄을 모르고 마냥 기분이 좋아서

권하는 술잔들을 사양하는 일 없이 모조리 받아 벌컥벌컥 호기 있게 마셔댔다.

여느 주석에서보다 월등히 들떠있어 보였다.

밤이 꽤 깊어서 주연이 파장에 이르렀을 때는 화자허는 허늘허늘한 상태가 되어

혀도 잘 돌아가질 않았다.

눈동자도 이미 초점을 잃고 희멀겋게 제멋대로 굴렁거렸다.

말하자면 서문경의 계략에 완전히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셈이었다.

“아이구, 이 친구 이거 안되겠는데... 내가 데려다 줘야겠군”

서문경은 화자허를 붙들고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술기운에 얼굴이 발그레 익어 보이는 오은아가 가로막고 나섰다.

“제 방에서 주무시고 가면 된다구요.

그냥 놔두시고, 서문 대관인님은 편히 돌아가시도록 하세요”

“이지경이면 오늘밤엔 재미보기도 틀렸잖아. 안그래?”

“호호호... 재미 안봐도 상관 없다구요”

“안돼. 친구가 이렇게 취했는데, 그냥 내버려두고 나만 혼자 돌아갈 수가 있나.

그건 친구로서 도리가 아니라구”

서문경은 친구에 대한 의리가 남달리 두텁기라도 한 듯이 말하고는,

기어이 화자허를 부축해 나가서 자기의 말에 태웠다.

그리고 자기도 훌떡 올라타 그를 안 듯이 하고서 기방을 나섰다.

대안이가 말고삐를 잡고 앞장서 걷는다.

 

 

 

이병아 부인 8회 

 

 

 

 곤드레만드레가 된 화자허를 그의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준 서문경은 곧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이병아가 만류를 한다.

 

“잠시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 잔 하시고 가시죠”

“밤이 깊었는데 괜찮겠습니까?”

“뭐 어때서요?”

“그럼 그럴까요”

마지 못하는 듯 서문경은 그녀의 뒤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간다.

속으로는 옳지, 기회가 왔구나, 싶으면서도 말이다.

화자허는 이미 비틀비틀 자기 방으로 가서 쓰러져 잠이 들려는 판이었다.

수춘이가 재빨리 차 두 잔을 날라 왔다.

둥근 탁자에 마주앉아서 차를 마시며 이병아는 새삼스럽게 인사조의 말을 한다.

“저렇게 취한 양반을 말에 태우고 오시느라 정말 수고가 많았습니다.

너무 폐를 끼쳐서 어떻게 하죠?”

“폐는 무슨 폐요. 친구 사이에 당연한 일이지요”

“저 양반은 술을 너무 좋아해서 탈이에요. 술에 안 취하는 날이 없거든요”

“술만 좋아합니까?”

서문경은 일부러 시치미를 뚝 떼고 짓궂게 묻는다.

“호호호... 다 아시면서...”

“남자는 누구나 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죠 뭐. 허허허...”

그러자 이병아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들며 그 말은 못 들은 척 딴 얘기를 꺼낸다.

“저 양반이 밤으로 집을 비우면 무서워서 잠을 잘 잘 수가 없지 뭐예요.

수춘이하고 천복이하고 셋이서 이 큰 집에서 자려니 말이에요”

“그렇겠군요”

서문경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묻는다.

“화자허가 밤으로 집을 잘 비우나요?”

“그럼요. 기생집에서 이틀이고 사흘이고 눌어붙어 있는 게 보통이라구요”

“흠, 그렇던가요?”

“서문 대관인, 미안하지만 앞으로 술집에서 저 양반을 만나면 어떻게든지 집에는

 돌아오도록 좀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저렇게 취해 가지고 정신없이 쓰러져 자도 저 양반이 있으면 안심이라구요"

“그래요? 있으나 마나일텐데... 저렇게 만취가 돼서야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잖아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말에 이병아는 약간 묘한 시선으로 힐끗 서문경을 바라본다.

어쩐지 그 말이 풍기는 뜻이 좀 야릇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안그래요? 도둑이 들어도 별 볼일 없을 것이고, 또 부인에게도...”

서문경은 말끝을 흐린다.

그리고 이병아의 표정을 살피듯 똑바로 바라본다.

술기운에 젖은 눈빛이 한결 번들거린다.

이병아는 속으로 약간 당황하며 얼른 찻잔을 들어 공연히 자꾸 차를 홀짝거린다.

 

 

 

이병아 부인 9회 

 

 

 

 여자 사냥질에 이골이 난 서문경은 상대방의 표정만 보아도

 

능히 그녀의 심중을 헤아리고도 남는다.

 

차를 홀짝거리는 이병아를 보자, 서문경은 대번에 기회는 이때다 하고

 

아랫배에 지그시 힘을 주며 불쑥 입을 연다.

“부인”

 

그 목소리가 어쩐지 예사롭지가 않아서 이병아는 찻잔에서 입술을 떼며 힐끗 서문경을 바라본다.

시선이 마주친다.

“이병아 부인”

너무나 그 두 눈이 열기를 머금은 듯 야릇하게 번들거려 이병아는

 절로 귀밑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살짝 시선을 떨군다.

서문경은 약간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이 말한다.

“나는 말이지요, 이렇게 부인과 단둘이 만날 기회를 손꼽아 기다려 왔어요.

 정말입니다. 지난겨울 화태감의 장례 때 먼눈으로 부인을 처음 봤는데,

그때부터 나는 이상하게 부인을 잊을 수가 없었지 뭡니까.

그 뒤로 몇 차례 만났을 때도 가까이서 말을 건네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아십니까?”

“어머나”

너무나 뜻밖의 말을 서문경으로부터 들은 이병아는 초승달같이 가느다란 눈이

그만 휘둥그래지고, 꽃잎처럼 고운 입술까지 살짝 벌어진다.

내친 김에 바짝 들이대야겠다는 듯이 서문경은 한결 열기를 머금은 듯한

야릇한 저음으로 계속 지껄인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여러 여자를 상대해 봤지만, 아직까지 부인처럼

우아하고 매력 있는 여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말은 추호도 거짓이 아닙니다.”

“......”

“그래서 어떻게 하면 부인에게 내 이 심정을 전할 수 있을까 하고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마치 숫총각의 애타는 호소와 같은 그런 애정 고백이었다.

그것은 결코 입에 바른 소리는 아니었다.

표현은 약간 과장되어 있어도 서문경이

그녀를 은근히 그동안 마음속에 두어온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놀라움에 어쩔 줄을 몰라 이병아는 까만 두 속눈썹을 이따금 바르르 떨 듯이

깜짝이며 가만히 굳어져 앉아 있었다.

서문경은 말을 꺼낸 김에 솔직한 심정을 다 털어 놓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말이죠, 부인이 화자허의 아내가 아니었다면 나는 벌써 부인을

내 것으로 만들고 말았을 것입니다.

친구의 아내이기 때문에 그동안 망설여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지경이 됐지 뭡니까”

그 말을 듣자 그만 이병아는 얼른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부인”

서문경도 그녀를 간절한 목소리로 부르며 벌떡 일어선다.

그리고 성큼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이병아 부인 10회 

 

 

 

 이병아는 돌아서서 문 쪽으로 후다닥 걸음을 떼어놓는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그 동작이 남자가 싫어서 도망가려는 여자의 태도가 아닌 것 같다.

 

좋을 때도 여자란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몸을 사리는 법이니까.

서문경은 그녀의 그 동작이 정숙한 유부녀의 본능적인 반사작용(反射作用)이라는 것을

 

대뜸 알아차린다.

 

그녀의 남편을 들먹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여느 여자 같았으면 서문경은 왈칵 달려들어 뒤에서 그만 불끈 껴안아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반 어거지로라도 여자의 입술까지는 빼앗고 말았을 게 틀림없다.

쇠뿔도 단김에 뺀다는 게 그의 엽색(獵色)신조처럼 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병아의 경우는 다르다.

친구의 부인이라는 점도 있고, 또 어느 모로나 함부로 손을 대서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는 그런 정숙한 구석이 엿보이는 여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좀 시일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서 그녀 스스로가 몸이 달아가지고

다가오도록 해야겠다는 계산인 것이다.

말하자면 제법 진지하게 애정도 좀 가지고서 사냥질에 임하는 셈이다.

서문경은 우뚝 멈추어 서서 이병아에게 말한다.

“부인, 내가 너무 실례되는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이병아도 주춤 걸음을 멈추고 말없이 힐끗 뒤를 돌아본다.

“실례가 됐다면 용서하십시오”

“아니예요. 혹시 남편이 깰지도 몰라서...”

그렇게 말하고서 이병아는 해서는 안될 말이라도 한 듯

살짝 묘하게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달리듯이 하여 응접실에서 나가버린다.

서문경의 얼굴에 절로 빙그레 흡족한 웃음이 떠오른다.

멋지게 성공을 거둔 셈이 아닌가 말이다.

그녀의 입에서 “아니예요”라는 말과 “혹시 남편이 깰지도 몰라서”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곧 자기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약 남편이 집에 있질 않아서 깨어 일어날 염려가 없다면 당신의 뜻을 따르겠다는

그런 의미로 새길 수도 있지 않는가.

‘됐어, 됐다니까...’

속으로 기분좋게 뇌면서 서문경도 건들건들 응접실을 나선다.

대기하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수춘이가 쪼르르 달려나와 배웅을 한다.

서문경이 힐끗 한 번 뒤를 돌아보니

내실 쪽 복도에 이병아가 가만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말에 몸을 싣고 바로 이웃인 자기 집으로 가면서

서문경은 말고삐를 잡고 걷는 대안이를 내려다보며 묻는다.

“대안아, 오늘밤은 하늘에 왜 저렇게 별이 많지?”

“하하하... 구름이 안 끼었으니까 많지요”

“그런가? 구름이 안 끼면 하늘에 별이 저렇게 많은가? 허허허...”

공연히 기분이 유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