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42) 제7장
이병아 부인 1회
어느 날 오후,
서문경이 현청에 볼 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용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오월랑이 소옥이를 시켜 한 통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뜯어보니 화자허(花子歔)의 초대장이었다.
서문대형.
오늘은 오은아(吳銀兒)의 생일이외다.
은아의 집으로 형을 모시고 가서 축하연을 베풀까 하니,
저녁을 자시지 말고 우리 집으로 와주시구려. 기다리고 있겠소이다.
제(弟) 화자허 올림.
읽고난 서문경의 얼굴에 절로 빙그레 웃음이 떠오른다.
오은아는 화자허가 좋아하는 기녀였다.
물론 서문경도 익히 아는, 제법 귀여운 데가 있는 계집애였다.
그래서 웃음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화자허가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흠, 기회가 저절로 굴러들어오는군”
서문경은 중얼거리며 방문 밖 정원 건너편의 담벼락 쪽으로 시선을 보낸다.
담 너머가 바로 화자허의 집이고,
화자허의 아내가 바로 올가을 사냥 목표로 점찍은 이병아가 아닌가.
이병아 부인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저절로 굴러 들어온 셈이니
웃음이 떠오를 수 밖에...................
잠시 한눈을 팔 듯 처조카인 계저에게 빠져서 보름이 넘도록
코에서 달큰한 냄새가 날 지경으로 그녀를 즐기고 귀가한 서문경은
며칠 쉬면서 이번 가을의 진짜 목표인 이병아를 어떻게 하면
손에 넣을 수 있을까 하고 그 방법을 궁리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바로 그녀의 남편인 화자허가 초청장을 보내어 말하자면
자기 아내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준 셈이 아닌가.
물론 이쪽의 꿍꿍이속을 알 턱이 만무하지만 말이다.
사람의 일이란 참 알 수 없고, 재미있기도 하다는 듯이 서문경은,
“허허허...”
코를 천장 쪽으로 쳐들며 히들히들 웃는다.
정원의 은행나무에서는 노오란 낙엽들이 기울어지는 오후의 삼삼한 햇살 속에
팔랑팔랑 나부껴 떨어지고 있다.
그 은행나무 이파리들이 서문경의 눈에는 마치 봄날의 노랑나비들처럼 비친다.
오늘따라 낙엽이 유난히 아름답다.
아직 저녁때가 되려면 좀 시간이 있었으나,
서문경은 초청을 받았으니 일찍 찾아가도 아무 허물이 아니겠지 하고
서둘러 다시 의관을 정제했다.
그리고 오은아가 있는 기방은 시가의 변두리에 있기 때문에
꽤 멀어서 말을 타고 집을 나섰다.
마구간에서 일하는 대안(玳安)이에게 말고삐를 잡히고서였다.
바로 이웃인 화자허의 집 대문 앞에서 서문경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중문(中門)의 섬돌 위에 이병아 부인이 서서 맞이한다.
“어서 오십시오. 서문 대관인”
이병아 부인 2회
“부인, 안녕하십니까?”
서문경은 정중히 인사를 한다.
속과 겉이 판이하게 다른 그런 태도이고, 표정이다.
이병아 역시 무척 공손한 어조로 말한다.
“주인은 잠깐 볼 일이 있어서 나갔습니다. 곧 오실 거예요”
“아, 그렇습니까”
“들어가서 기다리시지요”
“그러죠”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살짝 마주친다.
그러자 이병아는 얼른 눈길을 피하며 돌아서서 집안으로 앞장서 들어간다.
서문경이 점잖게 뒤따른다.
친구의 부인인 이병아를 서문경이 이처럼 가까이서 대하기는 처음이다.
지난 겨울 화자허의 백부(伯父)인 화태감(花太監)의 장례 때 먼발치로
처음 본 뒤로 몇 차례 더 대면하기는 했으나 번번이 그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을 뿐,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 얘기를 주고 받기는 처음인 것이다.
뒤따라 집안으로 들어서는 서문경은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그녀는 뒷모습에서도 앞모습 못지않은 우아한 매력이 풍긴다.
반질반질 윤이 흐르는 검은 머리 밑으로 유난히 하얀 목덜미가 눈길을 끌고,
어깨에서 흘러내려 허리로 이어지는 몸매의 선도 알맞게 미끈해서
어딘지 모르게 품위가 있어 보이며 엉덩이도 얌전하게 방방하다.
그저 그만이다.
장례 때 처음 보았을 적부터 남달리 눈길을 끌었고,
그 뒤 몇 차례 대면할 때마다 묘하게 가슴을 설레게까지 하던
그녀의 우아한 매력이 가까이서 대하니 한층 더 짙게 풍겨오는 듯 하다.
서문경은 앞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이병아의 뒷모습을 위 아래로 훑으며,
“이런 여자를 마누라로 가지고 있는 화자허란 놈 얼마나 좋을까”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리고 공연히 침을 한 덩어리 가만히 삼킨다.
이병아는 화자허의 정실이었다.
그러나 화자허가 총각 장가를 들었을 뿐,
그녀는 이미 한 남자를 겪은 몸이었다.
양세걸(梁世傑)이라는 높은 벼슬아치의 소실로 있었는데,
양세걸이 이규(李逵)라는 자의 원한을 사서 그의 손에 의해 가족들이
몰살을 당하는 변이 일어났다.
그때 용케 양세걸은 본처만을 데리고 도주했고,
이병아도 집안에 비장되어 있던 금은보화를 몽땅 가지고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
동경에 있는 친척한테 가서 지내고 있는데,
어전(御前) 관원인 화태감이 중매쟁이를 통해 노총각인 조카 화자허에게
이병아를 정처(正妻)로 맞아들이도록 했다.
그리고 자식이 없는 화태감은 광남(廣南)의 진수(鎭守)로 부임할 때
조카 내외를 함께 데리고 갔고, 그곳에서 병을 얻어 관직을 그만두고
지난해 봄 고향인 이곳 청하현으로 돌아올 때 역시 같이 옮겨왔다.
지난겨울 화태감이 죽자, 그의 막대한 유산을 화자허가 물려받아
두 내외는 아무 하는 일 없이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병아 부인 3회
“이방으로 들어가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예, 그러죠”
이병아는 서문경을 응접실로 안내하고서 자기는 안쪽으로 사라져 버린다.
곧 어린 하녀인 수춘(綉春)이가 차를 내왔다.
“어서오십시오. 서문 대관인님”
수춘이는 나붓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어, 너로구나. 몇 달 전에 우리 집 잔치 때 꽃과 떡을 선물로 가지고 왔었지?”
“예, 맞습니다. 우리 마님의 선물로 옥잠화와 산초떡을 갖다드렸었죠”
아직 몇 달 전 그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눈썹 위에서 가지런히 자르고 있긴 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서서히 계집애로서 익어가는 티가 나타나 보인다.
“너 이름이 뭐지?”
“수춘이라고 해요”
“나이는?”
“몇 살이나 돼 보여요?”
제법 계집애가 살짝 웃으며 되묻는다.
그런 점으로 봐도 안으로 볼그스름하게 익어가기 시작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글세... 열세 살 정도 됐을까?”
“그렇게 밖에 안돼 보여요? 열다섯이에요”
“흠, 그렇구나”
서문경은 공연히 싱그레 웃음을 떠올리며 찻잔을 들어 두어 모금 천천히 마신다.
그러고 있는데 방문밖에 이병아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서질 않고 문밖에 서서 공손히 입을 연다.
“저 서문 대관인, 한가지 부탁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무슨 부탁이신지 어서 말씀해 보세요”
서문경은 속으로 무척 기쁘다. 그녀가 자기에게 부탁이 있다니,
그렇다면 말하자면 한걸음 자기에게 다가선다고 볼 수 있질 않은가 말이다.
“오늘밤에 말이에요.
그이가 오은아한테서 주무시지 않도록 집에 데려다 주셨으면 하는 부탁이에요”
“아, 그래요? 그러죠 뭐"
“귀찮으시지 않을지 모르겠어요”
“귀찮긴요. 부인의 부탁이신데...”
서문경은 서슴없이 말해버린다.
그러자 이병아의 얼굴에 수줍은 듯한 기색이 살짝 떠오른다.
미소를 지으려다가 마는 게 역력하다.
수춘이는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듯 방에서 나가 안쪽으로 사라진다.
서문경은 내친걸음이라는 듯이 불쑥 얘기를 꺼낸다.
“참, 몇 달 전 우리 집 잔치 때 부인께서 선물을 보내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인사가 이렇게 늦었군요”
“아이 별 말씀을 다...”
“그때 보내주신 옥잠화는 너무 고와서 꽃병에 꽂아 내 침실에 갖다놓았었지 뭡니까”
“어머나, 호호호...”
이병아는 그만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한 손으로 살짝 입을 가리며 웃는다.
이병아 부인 4회
“그리고 산초떡도 어찌나 맛이 좋은지 다른 사람은 손도 못 대게 하고서
내 방에 갖다두고 나 혼자 서 먹었다니까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서문경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시치미를 뚝 떼고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그런 어조로 말한다.
말하자면 서서히 사냥질의 첫발을 내딛는 셈이다.
자기가 선물한 꽃과 떡을 칭찬하는 터이니 좀 쑥스럽기는 했으나,
이병아는 결코 싫을 턱이 없어 얼굴에서 수줍은 듯한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 그 산초떡, 부인께서 손수 만드신 겁니까?”
“예”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병아는 어전의 관원이었던 시백부(媤伯父)화태감을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궁중에서 즐겨먹는 음식을 곧잘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산초떡도 주로 황제가 즐기는 진귀한 병과(餅菓)인데,
이병아는 그것도 자기 손으로 잘 빚을 줄 알았다.
“산초떡을 손수 만드시다니, 음식 솜씨가 보통 아니신 모양인데요”
“아이 별말씀을...”
“서문경이 맞바로 칭찬의 말을 하자,
이병아는 멋쩍어져서 그만 살짝 고개를 떨군다.
곧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서문경을 바라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친다.
미소를 머금은 듯 만듯하면서 묘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야릇한 서문경의 시선을
이병아는 감당할 수가 없어서 얼른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슬그머니 그만 그 자리를 피하듯 말없이 안쪽으로 사라져 버린다.
서문경은 혼자서 공연히 흐믓해 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린다.
‘과연 정숙한 데가 있어 보이는군. 흐흠, 그러나 두고 보자구’
코언저리에 히죽이 웃음을 떠올리며 천천히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다.
사냥질에 통달한 사람의 자신만만한 표정인 셈이다.
이미 사냥질의 첫걸음은 성공적이었다고 자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얌전한 개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는 격으로 어쩌면 저런 정숙해 보이는 여자가
의외로 더 수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문득 해본다.
서문경은 아직 그녀의 과거를 모르고 있었다.
화자허의 정실이기 때문에 처녀의 몸으로 그에게 시집온 줄 알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녀가 화자허 이전에 이미 한 번 남자를,
그것도 소실로서 겪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흐흥! 하고 속으로 코방귀를 뀌면서
그처럼 주저하질 않고 진작 사냥질에 나섰을지도 몰랐다.
잔에 남아 있는 차를 마저 훌쩍 마시고 있는데, 화자허가 돌아왔다.
“벌써 오셨네. 아이구 이거 미안하게 됐소.
볼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오느라고... 오래 기다렸소?”
응접실로 들어서며 화자허는 정말 미안한 듯 약간 호들갑스럽게 지껄인다.
이병아 부인 5회
남편이 돌아온 기척을 들었는지 이병아가 다시 슬그머니 모습을 나타낸다.
그녀는 이번에는 응접실로 두어 걸음 들어선다.
서문경이 혼자 있을 때와는 달리 남편이 돌아온 터이라 조금 쑥스러움이 누그러진 셈이다.
그런 점 역시 정실다운 태도다.
“볼일은 잘 보셨나요? 서문 대관인께서 꽤 기다리셨다구요?”
남편에게 말한다.
“당신이 좀 접대를 안해 드리고 왜 혼자서 기다리시게 했어?
화자허는 그저 서문경에 대한 인사치레로 그렇게 말한다.
서문경은 아까 집에서 그의 초청장을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속으로
또 재미있는 일이로군 하고 고소를 금치 못한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가 사냥 목표로 노리고 있는 터인데
그런 줄도 모르고 접대를 안해 드렸느냐고 하니 말이다.
그 말에는 대답이 없이,
“곧 출발하시겠어요?”
남편에게 묻는다.
“우선 가볍게 한잔하고 출발하지 뭐. 어떻소? 서문형”
“그러자구”
서문경은 그저 예사롭게 말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매우 흡족하다.
오은아의 집에 가는 것보다 실은 이곳에서 이병아와 함께 술을 마셨으면 싶은 것이다.
이병아는 곳 안으로 가서 간단하면서도 정성이 담겨보이는 깔끔한 안주 두 가지를
수춘이에게 내보냈다.
그리고 곧 자기가 특급주와 술잔을 들고 나타났다.
둥근 탁자 위에 술과 안주가 놓여지자 화자허가 말한다.
“자, 당신도 여기 앉아서 서문 대관인한테 술을 한 잔 치라구”
“예”
이병아는 남편이 시키는대로 다소곳이 의자를 당겨다가 남편 쪽에 약간 가까이 앉는다.
그리고 서문경의 술잔에 먼저 술을 따른다.
“아이 고맙습니다.”
서문경의 얼굴에 절로 흐믓한 기색이 떠오른다.
친구의 그런 표정을 보고 화자허는 기분이 좋은 듯 싱그레 웃는다.
말하자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그런 웃음인 셈이다.
서문경의 잔에 술이 넘치지 않을만큼 가득 따르고 나서 이병아는 이번에는 남편의 잔을 채운다.
그러자 서문경이 화자허를 바라보며 말한다.
“우리만 마실 게 아니라, 부인도 같이 한잔 하셔야지”
“당신도 한 잔 할거야?”
화자허가 아내를 보며 묻는다.
“조금만 할까요”
그러면서 이병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다.
술잔을 문 밖에 섰던 수춘이가 재빨리 안으로 달려가서
술잔 하나를 가지고 와 이병아 앞에 놓아준다.
'소설방 > 금병매(金甁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병매 (44) 이병아 부인 <11~15회> (0) | 2014.06.26 |
---|---|
금병매 (43) 이병아 부인 <6~10회> (0) | 2014.06.26 |
금병매 (41) 마님과 노복 <46~48회> (0) | 2014.06.26 |
금병매 (40) 마님과 노복 <41~45회> (0) | 2014.06.26 |
금병매 (39) 마님과 노복 <36~40회> (0) | 2014.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