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40)
마님과 노복 41회
금동이가 향낭을 가지러 자기의 숙소로 가려고 회랑에서 정원으로 내려서는데,
“금동이 오빠”
뒤에서 나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량이었다.
아량이는 금동이와 같이 서문경의 몸종으로 있기 때문에 세살 위인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일이 어떻게 되는거야?”
다가온 아량이는 근심스럽게 금동이를 바라본다.
그 말하는 투로 보아 아량이도 이미 반금련 마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는게
틀림없는 것 같아 금동이는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은 없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다짜고짜
아량이를 붙들고 나직한 목소리로 애원을 하듯 말한다.
“아량아, 부탁이다. 얼른 가서 반금련 마님에게 내가 지금 주인 어른의 심문을 받고 있다는 걸
좀 알려줘. 향낭에 대해서 묻길래 정원을 소제하다가 주웠다고 말했으니까
마님도 나중에 추궁을 하거든 정원에서 잃어버렸다고 대답하시라고 말해줘. 알겠지?”
“응, 오빠, 걱정 말어”
“그리고 말이야, 나는 마님을 위해서 목숨이 달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비밀을 지킬테니까
그쯤 아시라는 말도 드려줘”
“응, 알았어”
아량이는 얼른 돌아서서 반금련의 거처 쪽으로 잰걸음을 친다.
아량이로부터 금동이의 말을 전해들은 반금련은 그만 얼굴이 사색(死色)이 되고 말았다.
눈앞이 온통 노오래지며 핑그르르 도는 듯했다.
금련은 그런 사실이 서문경의 귀에 들어간 줄을 모르고 뽀로통한 표정을 하고서
경대 앞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었다.
보름이 넘는 긴 외도에서 돌아온 서문경이 첫날밤을 오월랑의 방에서 자고 아직까지
자기방에 코빼기도 나타내지 않는 게 괘씸하긴 했으나,
그래도 곧 찾아올 터이니 화장을 하고서 기다려야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만 날벼락을 맞은 격이 된 금련은 아찔한 현기증에 풀썩 무너지듯
경대 위에 얼굴을 묻었다.
공포에 휩싸여 와들와들 떨던 금련은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서 춘매를 불렀다.
고향에 다니러 갔던 춘매가 며칠전에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금련은 춘매에게 주인어른의 거처에 가서 금동이가 심문을 받는 것을 엿듣고 오라고 일렀다.
내가 자칫하면 엉뚱한 오해를 받아 큰 변을 당할지도 모르니,
날 좀 살려 달라는 식으로 말했기 때문에 춘매는
“예, 마님, 염려 마세요”
선뜻 응했다.
춘매도 이미 속으로 짐작을 하고 있었다.
별안간 자기에게 열흘 동안이나 말미를 주고 돈까지 쥐어주며 고향에 다녀오라고 했을 때
벌써 눈치를 챘던 것이다.
떠날 때 금동이와 둘이서 특급주를 마시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마님과 노복 42회
향낭을 가지러 자기 숙소로 간 금동이는 우선 웃옷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돈부터 꺼냈다.
그 돈 역시 반금련 마님이 준 것이기 때문에 혹시나 싶은 두려움에서 였다.
그리고 옷보따리 속에 넣어두었던 향낭을 꺼내들고서 금동이는 서문경의 방으로 돌아갔다.
금동이로부터 향낭을 받아든 서문경은 그것을 눈앞에서 이리저리 돌려보며 묻는다.
“이게 누구의 향낭인지 모르나?”
“예, 모릅니다”
금동이는 분명한 어조로 대답한다.
“내 다섯 번째 마누라의 것이라구”
“..........”
“내 다섯 번째 마누라가 누구지?”
“반금련 마님이지요”
여느 때 같으면 절로 웃음이 나올 그런 문답(問答)이었으나 이번에도 금동이는
또렷한 못소리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반금련이가 너한테 준 거지?”
“아닙니다. 반금련 마님이 무엇 때문에 저한테 향낭을 줍니까?”
“정말이야?”
“예, 정말입니다”
“그럼 왜 이 향낭을 옷 속에 차고 있었지?”
“향기가 좋아서 차고 있었습니다”
“정원에서 주웠다면 주인을 찾아서 돌려줘야 되는 거지,
사내 녀석이 향낭을 옷 속에 차고 있다니...”
금동이는 잘못하였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떨어뜨린다.
향낭에 대해서는 금동이의 말이 납득이 간다는 듯이 서문경은
그것을 탁자위에 픽 던져놓고 벌떡 의자에서 일어선다.
두 손을 앞에 모으고 굳어져 서 있는 금동이에게로 바짝 다가간 서문경은
다짜고짜 그의 웃옷 호주머니 속에 쑥 손 하나를 집어넣는다.
요즘 금동이의 호주머니에 용돈이 떨어질 날이 없이 늘 넉넉하게 들어있다는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손에 집히는 것이 없자,
서문경은 역시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너 요새 돈이 많다면서? 남한테 먹을 것도 곧잘 사주고 술도 받아주고 한다는데
그 돈 다 어디서 난 거지?”
“주인어른, 누가 그런 말을 해요? 돈이 있긴 저한테 무슨 돈이 있다는 거예요?
보셨잖아요. 호주머니 속에 먼지밖에 들어있지 않다구요.
아마 누가 저를 모함하는 것 같은데요”
“모함을 해?”
“예”
“누가 너를 모함할만한 사람이 있나?”
“글쎄요...”
“음-”
모함하는 것 같다는 말이 금동이의 입에서 나오자,
서문경은 손설아의 모략이 아닌가 하는 생각 쪽으로 좀 더 기울어진다.
마님과 노복 43회
“끝으로 내가 묻겠는데, 정직하게 대답해야 된다구”
“예”
“내 다섯 번째 마누라를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서문경은 금동이의 허점을 노리듯이 질문을 좀 아리송하게 한다.
향낭과 용돈에 관한 심문만으로는 아무래도 미진한 구석이 있어서
마지막으로 직접 두 사람의 관계를 추궁해 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을 약간 유도신문 투로 시작한다.
맞바로 들이대듯이 물어서는 으레 아니오 하고 부인할 게 뻔하니 말이다.
금동이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새삼스럽게 바짝 긴장이 되어
얼른 뭐라고 대답이 나오지가 않는다.
“반금련을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그말이야”
“어떻게 생각하다니, 뭘 말입니까?”
금동이는 일부러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되묻는다.
무엇을 묻는 질문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말이다.
“이 녀석 머리가 잘 돌아가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까 그게 아니군
그래. 반금련이가 마음에 드느냐 어떠냐 그 말이라구”
“예”
“예는 또 뭐야?”
서문경은 약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질문을 계속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저 그래요”
“그저 그렇다니?”
“마음에 들지도 않고 안 들지도 않고 보통이란 말입니다”
“그래? 그게 정말인가?”
“예, 정말입니다”
“아주 좋아하면서 거짓말을 감쪽같이 하는데... 얼굴에 그렇게 씌어있다구”
“아닙니다. 절대로 안 그렇습니다”
서문경은 슬그머니 재미있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그럼 반금련은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남의 마음 속을...”
“정말 모르나?”
“모릅니다”
“평소에 자주 만날 거 아냐. 만날 때 어떻게 대하는가 보면 알거 아니냔 말이야”
“평소에 자주 만나지도 않습니다요.
제가 반금련 마님의 몸종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자주 만납니까?”
“무엇이 어쩌고 어째? 자주 안 만난다고? 이 놈의 새끼, 끝까지 거짓말을 할거야?”
서문경은 별안간 그만 표정을 싹 바꾸어 버럭 고함을 내지른다.
금동이는 놀라 찔끔 고개를 움츠린다.
“이 놈아, 반금련이가 네 방에서 자고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는데도 끝내 우길거야?”
서문경은 마침내 맞바로 불쑥 들이대듯이 내뱉는다.
마님과 노복 44회
“뭐라구요? 반금련 마님이 제 방에서 자고 나오더라구요?”
“그래, 이놈아. 본 사람이 있다구”
“그게 누군데요?”
“누구라는 것까지는 네가 알 필요가 없고...
좌우간 새벽에 네 방에서 자고 나오는 것을 똑똑히 봤다는데, 시치미를 뗄거야?”
“핫핫하...”
금동이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린다.
말하자면 필사적인 연극을 하고 있는 셈이다.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요.
주인어른, 반금련 마님이 뭣 때문에 누추한 제 방에서 주무십니까?
제 침상은 혼자 누워 자는데도 좁을 지경인 데요.
누군가가 반금련 마님과 저에게 감정이 있어서 모함을 하는 게 틀림없습니다요.
주인어른, 안 그렇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말에 서문경은 잠시 금동이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연다.
“그래, 네 말을 일단 믿기로 하지. 그러나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구.
반금련의 말을 들어보고, 또 봤다는 사람의 말도 다 들어본 다음이라야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가 있으니까, 너는 네 방에 가 있으라구.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방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오면 안된다구. 알겠지?”
“예”
금동이는 일단 서문경의 신문에서 무사히 벗어나게 되어 어쨌든
안도의 숨을 가만히 내쉬며 방에서 물어나간다.
서문경은 곧 아량이에게 반금련을 불러 오도록 일렀다.
방 밖에서 은밀히 엿듣고 있던 춘매는 잽싸게 반금련에게 달려가
서문경이 금동이를 신문한 내용을 들은 대로 알려주었다.
금련이 바짝 긴장이 되어 귀담아 듣고 있는데, 아량이가 부르러 왔다.
“오냐, 알았다. 주인어른한테 곧 간다고 그래라”
아량이를 보내고 나서 금련은 춘매에게 묻는다.
“금동이가 맞지는 않았느냐?
“아니오. 때리지는 않고, 그냥 말로만 캐묻던데요”
“그래?
약간은 마음이 놓이는 듯 금련은 가만히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그시 어금니를 문다.
그러나 속으로 단단히 각오를 하는 것이다.
금련이 들어오자 서문경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채 입을 굳게 다물고
노려보듯 지켜보기만 한다.
그런 서문경이 약간 질리기는 했으나,
금련은 애써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며 예사롭게 먼저 입을 연다.
“여보, 도대체 누구한테 무슨 말을 들었기에 아침부터 이러시는 거예요?
보름이 넘도록 아무 소식이 없어서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알기나 하세요?
돌아오시자마자 엉뚱하게 누굴 잡으시려는 거죠?”
오히려 원망스럽다는 투였다.
마님과 노복 45회
“돌아오자마자 내가 일부러 누굴 잡으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
글쎄 어처구니없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느냐 말이야”
서문경의 말에 금련은 적반하장격(賊反荷杖格)으로 바짝 대들 듯이 묻는다.
“어처구니없는 말이라니, 도대체 누가 무슨 말을 하더란 말입니까?”
금련의 기색을 보니 금동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래도 무고(無辜)한 것만 같아 서문경은
기세가 현저히 누그러진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저렇게 정색을 하고 대들 듯이
나올 수가 있겠는가 싶었다.
그러나 따질 것은 끝까지 따져봐야겠다는 듯이 차분하게 입을 연다.
“거기 의자에 앉으라구.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추호의 거짓도 없이 대답해야 된다구”
“누구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어디 물어 보시라구요”
금련은 보로통하게 내뱉고는 의자에 일부러 불만을 나타내듯
털썩 좀 요란하게 궁둥이를 내린다.
서문경은 탁자 위에 떨어뜨려 놓은 향낭을 집어 든다.
“이 향낭 누구 거지?”
“어머, 그게 어디 있었나요? 내가 정원에서 잃어버린 건데...”
금련은 화들짝 놀라며 서슴없이 말한다.
“정말이야?”
“정말이라구요”
“금동이가 가지고 있더라구. 그 녀석이 옷 속에 차고 있다가 다른 사람한테 들키자
떼어내어 자기 방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거야. 당신이 준 거 아냐?”
“뭐라구요? 내가 줬다구요? 하하하...”
금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한바탕 까르르 웃고서 말을 잇는다.
“향낭을 내가 뭣 때문에 금동이한테 주나요? 미쳤다고 내 향낭을 종 녀석한테 줘요.
그 녀석 정신 나간 놈이지, 향낭을 정원에서 주웠으면 누구 거냐고 임자를 찾아서 돌려줄 일이지,
사내 녀석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니, 더구나 옷 속에 차고 있다가 누구한테 들켰다구요?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이라면 그 녀석 좀 돈 거 아니에요?
사내 녀석이 향낭을 옷 속에 차다니... 맡아보니까 냄새가 괜찮았던 모양이지.
나 참 기가 막혀서... 별 희한한 녀석을 다 본다니까”
정신없이 마구 줄줄 쏟아놓듯 지껄여대는 금련을 서문경은 약간 멀뚱해진 표정으로 지켜본다.
“그 향낭 이리 주세요”
금련이 한손을 내밀자, 서문경은 도리 없이 픽 던져준다.
서문경은 두어 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한다.
용돈 얘기 따위는 꺼내봤자 뻔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것은 아예 묵살해 버리고, 마지막으로 소옥이가 목격했다는
사실을 추궁해 보기로 마음먹는다.
서문경은 다짜고짜 불쑥 들이대는 식으로 묻는다.
“금동이 방에서 자고 나온 일이 있지? 새벽에. 본 사람이 있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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