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금병매(金甁梅)

금병매 (32) 제6장 마님과 노복 <1~5회>

오늘의 쉼터 2014. 6. 25. 18:36

 

금병매 (32) 제6장

 

 

 

마님과 노복 1회 

 

 

 

 바람도 없는 은행나무 이파리가 한잎 두잎 나부껴 떨어지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여느 때보다 한결 엷고 해맑아 보였다.

서문경은 거실의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노랑나비가 팔랑팔랑 날개 짓을 하며

 

낙하(落下)하는 것 같은 은행나무의 낙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이로구나”

서문경은 혼자 중얼거린다.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은행나무 저편의 높다락 담벼락 쪽으로 향한다.

그 담벼락 너머에는 우람하게 자란 호두나무가 솟아있는데,

그 나무에는 어느덧 단풍이 물들었다.

담 너머 그쪽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서문경은 공연히 푹-하고

큰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뿜는다.

가슴이 뿌듯하게 부풀어 오르는 듯했던 것이다.

가을은 서문경으로 하여금 일년 중 가장 살맛나게 하는 계절이었다.

“이번 가을에는 기어이...”

속으로 무슨 결심을 굳히는 듯 그는 지그시 어금니까지 물며

혼자서 야릇한 웃음을 입 언저리에 떠올린다.

이병아, 그녀를 이번 가을에는 기어이 정복하고야 말겠다고 마음을 다지고 있는 것이었다.

무송이 귀양을 떠난 이튿날 축하연 때 옥잠화와 산초떡을 선물로 보냈던 그 여자,

친구인 화자허의 젊은 미모의 아내인 그녀, 옷차림이나 몸가짐

그리고 말씨 같은 것이 다 아주 정숙한 가정부인으로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남자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야릇한 아름다움이 얼굴뿐 아니라

온몸에서 풍기는 그런 매력 있는 이병아를 말하자면

올가을의 사냥 목표물로 점찍은 셈이다.

지금까지 곧잘 군침이 돌면서도 친한 친구의 정실이기 때문에

욕망을 누르며 주저해왔던 것인데,

그런 한 가닥 윤리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망설임을

이번 가을에는 깨끗이 걷어서 내던져 버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담 너머의 저택이 다름 아닌 바로 이병아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이었고,

호두나무가 솟아있는 정원이 곧바로 그녀의 침실이 있는 건물의 내정(內庭)이었다.

그곳을 바라보고 있던 서문경이 가슴이 부풀어 올라 큰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뿜은 것도 바로 그녀의 침실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던 탓이었다.

“그러나 조심해야지. 암, 조심해야 되고 말고”

서문경은 의자에서 일어서며 중얼거린다.

올가을의 사냥은 여느 때의 그것과는 달리 매우 위험한 짓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때렸던 것이다.

친한 친구의 아내를 범했다는 사실이 만약 탄로 날 경우에는

친구들 사이에서 여지없이 매도될 것이고,

또 화자허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자허는 검술(儉術)에 능한 친구였다.

어쩌면 그의 칼에 목이 날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목숨을 걸고서의 사냥질인 셈이니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야 할 수밖에.....

 

 

 

마님과 노복 2회 

 

 

 

 서문경은 최상품으로 의관을 갖추고서 집을 나섰다.

 

오늘은 응백작(應佰爵)의 집에서 월례(月例)주연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서문경에게는 아홉 사람의 가까운 친구가 있었다.

 

그러니까 서문경까지 합해서 열 사람이 한 패거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남자끼리의 친목계라고나 할까.

 

그 패거리의 이름을 서문십걸(西門十傑)이라고 했다.

그중에서 서문경이 가장 부호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를 중심으로 패거리가 이루어져서

명칭을 그렇게 붙였다.

연령은 서문경보다 위인 사람이 많았으나,

그런 것 상관없이 모두가 그를 장형(長兄)처럼 떠받들었다.

십걸은 서문경을 비롯해서 오늘 주연을 베푸는 응백작,

그리고 사희대(謝希大), 오전은(吳典恩), 손천화(孫天化), 운참장(蕓參將),

서문경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이병아의 남편인 화자허(花子虛),

그밖에 축일념(祝日念), 상시절(常蒔節), 백내창(白來槍) 등이었다.

열 사람 중에는 화자허 같은 검술에 능한 사람도 있고,

서문경처럼 권법(拳法)이나 봉술(棒術)에 약간의 솜씨가 있는 사람도 있으며,

공차기에 남다른 재주를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고리대금업자도 있고, 포주(抱主)도 있었다.

거의 모두가 돈푼깨나 있고, 가문깨나 괜찮은 집안의 자식들로서

지금은 한마디로 말하면 반건달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패거리였다.

한 달에 한 번씩 차례차례 돌려가며 부어라 마셔라 하는 술판을 벌일 뿐 아니라,

수시로 몇몇이서 어울려 술집으로 기방으로 혹은 유곽(遊廓)으로 쏘다니기 일쑤였다.

주연에는 기녀가 세 사람 불려와 있었다.

그 가운데 한 계집애가 유난히 서문경의 눈길을 끌었다.

비파도 잘 타고 노래도 잘할 뿐 아니라,

용모도 백합처럼 청초(淸楚)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열일곱 여덟 되어 보이는데, 몸매도 늘씬했다.

서문경은 바로 옆에 앉은 오늘 주연의 주인인 응백작에게

그 기녀를 턱으로 가리켜 보이며 묻는다.

“저 계집애 괜찮은데... 이름이 뭔가?”

그러자 응백작은

“허허허....”

약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는다.

“이 사람아, 저애가 누군지 모르다니, 웃을 수밖에...”

“모르겠는데... 누구란 말인가?”

“바로 자네 처조카 아닌가, 처조카도 못 알아보다니...”

“처조카라고?”

그래도 서문경은 얼른 누군지 머리에 와 닿지가 않는 모양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누라가 다섯이나 되니 말이다.

“이계저(李桂姐)아닌가”

“아니, 저애가 계저야? 계저가 벌써 저렇게...”

서문경은 두 눈이 약간 휘둥그래진다.

 

 

 

마님과 노복 3회 

 

 

 

 이계저는 서문경의 둘째 아내인 이교아의 조카였다.

 

오륙년 전에 보고 처음이어서 처조카도 몰라보았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앞머리를 가지런히 자르고 있던 열두어살짜리 계집애가

 

어느덧 늘씬한 처녀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네가 계저냐? 이리 가까이 와봐”

서문경은 그녀를 자기 곁으로 불렀다.

계저는 서문경의 바로 옆에 와서 앉는다.

별다른 인사말이나 표정의 변화가 없는 것이 그녀 역시 서문경을 못 알아보는 게 틀림없다.

“이 어른 누구신지 모르겠나?”

“예, 모르겠는데요”

“인사 드려. 너의 고모부시다”

“어머, 그래요?”

계저의 눈이 동그래진다.

서문경은 놀라면서도 수줍어하는 계저가 몹시 귀엽다,

“보자... 너를 본 지가 오륙년이 됐구나.

그래서 나도 몰라봤지 뭐냐. 그때는 아직 어린애였는데,

이렇게 예쁘고 늘씬한 처녀가 돼버렸으니 알아볼 수가 있느냐 말이야”

그러면서 서문경은 계저가 더없이 사랑스러운 듯 한손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 준다.

“괜찮다. 피장파장 아니냐? 그래, 너의 어머니랑 언니는 잘 있느냐?”

“어머니는 몇해 전에 중풍으로 쓰러져서 반신불수가 되어 누워 계세요”

“음- 그것 참 안됐구나. 내가 알았더라면 도와줬을건데... 언니는 잘있고?”

“예”

“네가 언제부터 이런 자리에 나오게 됐냐?”

“아직 한달도 채 안됐는걸요.

어머니는 누워 계시고, 언니 혼자서는 벅찬 것 같아서 저도 나서기로 했다구요”

“잘했다. 그래야지. 이만큼 컸으면 집안일 도와야 되고 말고”

기특하다는 듯이 또 등을 토닥거린다.

“고모부님, 앞으로 잘 부탁해요”

계저는 풋내기 기녀답게 고개까지 얌전히 숙이면서 말한다.

“허허허... 그래, 내가 잘 이끌어주지. 한 달도 채 안됐으면 그럼 아직...”

서문경은 말을 얼른 거두며 싱그레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 웃음의 뜻을 얼른 알아차린 계저는 수줍으면서도 좀 야릇한 시선으로

고모부를 힐끗 바라보고는 살짝 고개를 숙인다.

그런 계저가 서문경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오는듯

 매우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앞에 놓인 잔을 단숨에 비운다.

그리고 빈 잔을 내밀며 말한다.

“자, 계저야, 한잔 따라봐라.

네가 따라주는 술을 한번 마셔보자. 각별히 맛이 좋을 거야”

“호호호... 고모부님도...”

계저는 수줍게 웃으며 자세까지 고쳐 앉아 공손히 술을 따른다.

 

 

 

마님과 노복 4회 

 

 

 

 술기운이 오르자 서문경은 계저에게 말했다.

“이차는 너의 집에 가서 할까?

 

오래간만에 처남댁도 한번 만나보고... 아파 누워있다니 문병겸 말이야”

 

 

 

계저는 뜻밖의 말에 활짝 기쁜 빛이 떠오르면서도 약간 당황하기도 한다.

“고모부님 같은 귀하신 어른이 우리 집에 오시다니... 집이 너무 누추해서 어쩌죠?”

“누추하기는... 내가 오륙년 전에는 더러 가봤잖아, 지금도 그 집이지?”

“어머니가 아프신 뒤로 형편이 어려워져서 그 집을 팔고 다른데로 이사를 했다구요.

옛날 집보다 훨씬 작고 누추해요”

“상관없다구. 집에서 여전히 손님을 받고 있긴 하지?”

“그럼요. 손님을 안 받으면 뭘 먹고 살아요.

집에서는 언니가 혼자서 손님을 받죠”

“계저는 아직 햇병아리니까 우선 이렇게 바깥으로 나와서 견습을 하고 있다 그말인가?”

“예, 호호호.....”

“좋지, 오래간만에 네 언니도 한 번 만나보고... 이차를 거기서 하자구”

“그래요, 그런데 미리 연락을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고모부님 같은 귀하신 어른이 오래간만에 저의 집에 오시는데 별 준비가 없거든요.

제가 먼저 갈께요”

“먼저 가면 안되지. 이 술자리가 쓸쓸해지잖아.

걱정말고 너는 내 곁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구”

그러자 응백작이 얼른 알아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자기 집의 하인을 계저의 집으로 보냈다.

주연이 끝나자 서문경은 패거리를 가운데서 응백작과 취기가 덜한 사희대,

오전은 만을 거느리고 계저를 앞세워 그녀네 기방(妓房)으로 갔다.

오륙년 전까지는 기녀를 여러명 둔 기루(妓樓)이던 것이 이제는 기녀라고는

계저의 언니 계경(桂卿) 혼자뿐인 여염집과 별 다름이 없는 기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며 서문경은 측은한 정에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경 일행이 들어서자 이계경은

“아이고, 우리 고모부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십니까?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지도 모르겠는데요.

도대체 몇 해만이세요? 왜 그렇게 걸음이 없으셨죠?”

호들갑스럽게 반겼다.

서문경은 먼저 반시불수가 되어 누워있는 처남댁을 가서 잠깐 문병하고,

 이차 술자리에 앉았다.

함께 왔던 계저는 어디로 잠적해 버렸는지 그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서문경은 다 꿍꿍이속이 있는 터이라 아무 내색을 안 하고,

계경을 상대로 세 친구와 주거니 받거니 두 번째 주연을 즐겼다.

밤이 꽤나 깊어서 세 친구가 돌아간 다음 계경과 단둘이가 되자

비로서 서문경은 말을 꺼냈다.

“계저는 어디 가고 코빼기도 안 내비치지?”

 

 

 

마님과 노복 5회 

 

 

 

 “계저는 집에서는 아직 손님 앞에 안 나타나기로 하고 있어요”

“왜 그러지?”

 

 

 

“제가 싫다는 걸 어떻게 해요”

“바깥 주연에는 나가면서 집에서는 손님을 안 받다니...

바깥에서 계저에게 마음이 간 손님이 집으로 찾아올 수도 있을텐데...”

“바깥 주연에 나간 지도 아직 한 달도 안됐다구요.

그것도 내가 나가게 하느라고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몰라요.

집에서는 나 혼자 할테니까 바깥 주연에라도 나가달라고 말이에요”

“음- 그렇구먼”

서문경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계저의 말과는 달랐던 것이다.

계경은 동생이 꽤나 못마땅한 듯이 고개를 살래살래 내흔들며 말한다.

“애가 콧대가 어찌나 센지...”

“그래? 보기에는 안 그렇던데...”

“겉보기와는 다르다구요”

“지금 몇 살이지?”

“열일곱살이잖아요.

열일곱이나 된 것이 아직 뭘 모른다구요”

“안 그렇던데...

아까 주연에서는 언니가 혼자서 집안을 꾸려나가기가 벅찰 것 같아서

저도 나섰다고 그러던데... 우선 바깥에서 견습을 한다고”

“제 입으로 그래요?”

“집안에서는 언니 혼자서 손님을 받는다기에 그럼 너는 이렇게 바깥으로 나와서

견습을 하고 있느냐 하니까 예, 하고는 웃더라구”

“견습은 또 무슨 놈의 견습... 그 만큼 내가 노래랑 춤이랑 비파를 가르쳐 줬으면 됐지”

“동생을 너무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말라구. 아직 열일곱밖에 안됐잖어”

“열일곱 살이면 시집을 가서 애를 낳고도 남을 나이란 말이에요”

그 말에 서문경은 히죽 웃으며 불쑥 내뱉듯이 묻는다.

“계저가 아직 새것이겠지?”

“그럼요. 깨끗한 처녀라구요. 그것은 제가 절대로 보장해요.

그러니까 집에서는 손님을 안 받겠다고 콧대 세게 나오죠”

“좋아, 그럼 내가 머리를 얹어 주지”

“어머”

계경은 뜻밖의 말에 약간 놀라면서도 기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한 그런

묘한 눈길로 서문경을 바라본다.

아무리 기녀지만 고모부가 처조카의 머리를 얹어 준다는 것이

어쩐지 좀 예사롭게 생각되진 않았던 것이다.

서문경은 벌그레 주기가 오른 얼굴에 번질번질한 웃음을 떠올리며 말한다.

“내가 잘 머리를 얹어 주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집에서도 손님을 받을 게 아니냐 말이야.

안 그래?”

“좋아요. 그렇게 해 주세요. 그 대신 말이에요.

 대가는 톡톡히 내셔야 돼요. 틀림없는 숫처녀니까요. 알겠죠?”

계경은 고모부라는 것을 재빨리 머리에서 싹 씻어버리기라도 한 듯

노골적으로 직업 근성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