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금병매(金甁梅)

금병매 (33) 마님과 노복 <6~10회>

오늘의 쉼터 2014. 6. 25. 19:24

 

 

금병매 (33)

 

 

 

마님과 노복 6회 

 

 

“우선 오십 냥 내놓지”

“오십냥? 어머나 계저 횡재하네”

 

계경의 입이 살짝 벌어진다.

“너무 많은가? 삼십 냥으로 할까?”

“그런 법이 어딨어요.

한번 말씀을 하셨으면 그대로 하셔야죠.

실은 오십 냥도 많은 게 아니라구요.

열일곱 해동안 고이 간직해온 몸을 바치는 판인데,

집 한 채 값은 받아야 된다구요”

“계경이 이제 보니까 배포가 보통 아니군 그래. 좋아,

 틀림없이 오십 냥 내놓을테니까 어서 가서 계저를 데리고 오라구”

“돈은 언제 내놓으시는 거예요?”

“야, 이것 참 지독하군, 너무 그러지 말라구. 이 서문경이를 뭐로 아는 거야?

한번 준다고 했으면 준다구. 호주머니에 오십 냥을 준비해온 건 아니니까 내일 주지.

내일도 안되고, 꼭 선금을 내야 한다면 지금 당장 누굴 시켜 집으로 가지러 보내고...”

서문경은 고모부로서의 체면이고 뭐고 다 내팽개쳐 버리고 처조카이며 기녀인

계경 앞에 쩔쩔 매는 꼴이다.

취기 탓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계저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좋아요. 내일 주세요. 그런데 계저가 순순히 말을 들을지 모르겠어요.

워낙 콧대가 센 애라서...”

“좌우간 이 방으로 데리고 오라구. 내가 오라 그런다고...”

“예”

계경이 방을 나가더니 한참 뒤에 계저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럼 저는 물러갈테니까 둘이서 잘 얘기를 나누어 보시라구요”

묘한 웃음을 살짝 담은 눈으로 서문경을 헬끗 바라보고서 계경은 다시 방을 나간다.

“자, 계저야, 이리 가까이 와서 술을 한잔 따라야지”

“예”

다소곳이 섰던 계저는 술병을 들고 서문경 곁으로 가서 앉으며 잔에 술을 찰찰 넘치도록 따른다.

“아이구 넘치는구나”

기분이 좋은 듯 서문경은 얼른 잔을 입으로 가져가 꿀꺽 한 모금만 마시고는 탁자 위에 놓는다.

그리고 곁에 앉은 계저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꺼낸다.

“계저야, 언니한테 얘기 들었지?”

“예”

계저의 고개가 절로 살짝 숙여진다.

그 표정이나 태도로 보아 승낙을 한 게 틀림없다 싶어서 서문경은 적이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조심스레 묻는다.

“어떠냐? 오십 냥이면 괜찮지?”

“돈이 문제가 아니라구요”

숙였던 얼굴을 들고 계저는 서문경을 빤히 바라본다.

그 눈빛이 깨끗하다.

“그럼 뭣이 문제라는 거냐?”

“.....”

“응? 말해 보라구”

몹시 쑥스럽고 곤혹스럽기도 한 그런 표정으로 바뀌며 계저는 대답한다.

“고모님한테 죄송스러워서 그래요”

 

 

 

마님과 노복 7회 

 

 

 

 “고모한테 죄송스럽다고? 허허허...”

“왜 웃으세요?”

 

“죄송스러울거 하나도 없다구. 고모가 오히려 좋아할거라구”

“좋아해요?”

계저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빡거리며 서문경을 바라본다.

“좋아할 수밖에... 계저는 아직 내가 얼마나 부잔줄을 잘 모르는 모양이지?

알면 입이 딱 벌어질거야. 허허허...”

“얼마나 부잔데요? 부자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만큼...”

서문경은 어린애처럼 장난스럽게 두 손을 들어올려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려 보인다.

“호호호...”

계저는 재미있다는 듯이 까르르 웃는다.

“청하현에서 둘째가라면 섭섭할만큼 부자라니까”

“어머,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이지”

술에 취해서 벌겋게 번들거리는 서문경의 얼굴을 계저는 놀란 듯이 새삼스럽게 바라본다.

“나 같은 부자가 머리를 얹어주는데 싫어할 사람이 있겠느냐 말이야.

자기 조카도 돈도 별로 없는 사람과 인연을 맺는 것보다 얼마나 좋겠어. 안 그래?”

계저는 고모부가 그 처럼 큰 부잔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에

얼떨떨해서 뭐라고 말이 나오지가 않는다.

“그러니까 고모한테 죄송하다는 그런 생각은 아예 말라구”

말없이 계저는 또 살짝 얼굴을 떨군다.

“알겠지?”

“예”

들릴 듯 말 듯 대답한다.

“머리를 얹어준 다음 봐서 내가 계저를 여섯 번째로 집에 들어앉힐지도 모른다구”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여섯 번째 마누라를 삼는다는 말이지”

깨끗한 눈빛으로 좀 묘하게 서문경을 바라보면서 계저는 서슴없이 내뱉는다.

“고모가 둘째 부인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또 여섯 번째 아내가 되다니 말도 안돼요.

그럴 수는 없다구요.

고모과 조카가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법이 어디 있어요.

절대로 그건 싫어요”

“허허허... 그래? 야 - 계저 놀랬는데...”

콧대가 세다더니 과연 맹랑한 계집애로구나 싶으며 서문경은 대고 고개를 끄덕인다.

“머리를 얹어 주시는 데도 한 가지 조건이 있다구요”

“뭔데? 조건이”

“오늘밤에는 안돼요. 이렇게 취하셨고,

또 저도 아무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 잠자리를 같이 할 수는 없어요”

“준비는 무슨 준비?”

“목욕도 좀 하고, 마음도 가다듬고 해야죠.

그러니까 내일 밤으로 연기를 하자는 거예요.

내일 낮에는 간단한 축하연이라도 벌이고요”

 

 

 

마님과 노복 8회 

 

 

 

 “과연 계저가 다르구나. 그래 좋아. 내일로 날을 받지.

 

비록 식은 안 올리지만 계저로서는 일생일대의 대사니까. 허허허...”

서문경은 도리 없이 껄걸 웃으며 동의를 한다.

 

 

 

 

“그럼 고모부님, 내일의 대사를 위해서 오늘밤은 이제 주무시도록 해요.

술을 그만 자시고요.

많이 취하셨다구요.

제가 침상에 이부자리를 새것으로 바꾸어 드릴테니까요”

“여기서 나 혼자 자란 말인가?”

“하룻밤쯤 혼자 주무시면 어때요”

“집에 가서 자고 내일 오지 뭐”

그러자 계저는 싹 자르듯이 말한다.

“안돼요. 여기서 주무셔야 된다구요.

집에 돌아가시면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잖아요.

남자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고 언니가 그러더라구요.

하룻밤 사이에 손바닥 뒤집듯이 싹 달라지기가 일쑤라던데요.”

“허허허...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서문경은 결코 기분이 나쁘지가 않다.

계저가 자기에게 무척 마음이 있어서 혹시나

내일 안 올까 싶어 찰싹 달라붙는 셈이니 말이다.

“그래, 좋아. 여기서 자도록 하지.

내일 밤을 위해서 오늘 밤은 혼자서 푹 쉬어두는 것도 괜찮지”

서문경은 마치 처조카인 열일곱살짜리 처녀 앞에 맥을 못추는 사람처럼

그녀의 말을 고분고분 좇아 그날 밤을 그 곳에서 혼자 잤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둘째 아내인 이교아 앞으로 계저의 머리를 얹어줄까 하니

 돈 칠십냥을 보내라는 서찰을 적었다.

그 서찰을 가지고 이교아를 찾아간 것은 계경이었다.

심부름꾼을 보낼까 하다가 오래간만에 고모도 만나보고,

또 동생인 계저의 머리를 고모부가 얹어주게 된 사실 때문에

혹시 고모가 속을 상해 할까봐

자세한 얘기를 해서 오해가 없도록 하고 싶어 직접 자기가 찾아갔던 것이다.

이교아가 서찰을 받아 읽는 동안 계경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고모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발칵 화라도 내지 않을까 싶어 몹시 불안했다.

그러나 서찰을 다 읽고난 이교아는 뜻밖에도 빙그레 웃음을 떠올렸다.

“아이고 잘됐구나. 너희 집에 경사났네”

조금도 못마땅한 기색이 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계경의 얼굴에도 절로 안도의 미소가 올랐다.

그러나 속으로는 한 가닥 의문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조카의 머리를 자기 남편이 얹어준다는데 조금도 언짢아하질 않다니,

아무리 기녀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그럴 수가 있을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실은 이교아도 서찰을 읽어 내려가면서 속으로는 좀 꺼림칙했다.

그러나 그녀는 반금련이 머리에 떠오르자 그 꺼림칙한 생각이 싹 가셨다.

계저가 서문경의 몸과 마음을 꽉 사로잡아서 그 얄밉고 아니꼬운 반금련을 밀어내고

여섯 번째 부인으로 들어와 주었으면 싶었던 것이다.

 

 

 

마님과 노복 9회

계경이 가지고 온 칠십 냥 중에서 서문경은 오십 냥은 계저의 머리 얹어주는 대가로,

다시 말하면 그녀의 몸값으로 지불하고,

나머지 이십 냥은 그날 축하 잔치의 비용으로 건네주었다.

그리고 아홉 사람의 친구들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그날 오후 서문십걸은 어제에 이어 다시 모여서 서문경과 계저와의 경사를 축하하여

마시고 노래하고 떠들어 댔다.

밤이 되자 그들은 물러가고,

서문경은 계저가 곱게 단장을 하고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방으로 갔다.

말하자면 신방(新房)에 신부를 찾아 들어간 셈이었다.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계저는 서문경이 들어서자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없이 일어섰다.

그 표정이랑 태도가 영락없는 수줍은 신부 같았다.

서문경은 정말 새로 장가를 드는 기분이어서 절로 온 얼굴에 흐믓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서문경이 의자에 앉자 계저도 다시 살포시 자기 의자에 궁둥이를 내렸다.

“계저, 많이 기다렸나?”

계저는 대답 대신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탁자 위에는 술과 몇 가지 고급 안주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다.

야물상(夜物床)인 셈이었다.

“자, 계저의 술을 한잔 받아야지. 오늘 밤은 뜻 깊은 밤인데...”

서문경이 앞에 놓인 잔을 들자,

계저는 술병을 조심스레 두 손으로 들고서 살풋 궁둥이를 들기까지 하며 공손히 술을 따른다.

그 술 따르는 태도도 어딘지 모르게 여느 때와는 다른 듯하다.

조금도 기녀 티가 나질 않고, 얌전하게 자라서 신부가 되어 첫날밤을 맞이한 여염집의 규수같다.

잔을 쭉 비우고 나서 서문경은 그 잔을 계저에게 건네어 술을 따라준다.

계저는 한 모금만 마시고서 잔을 앞에 놓는다.

그리고 깨끗한 시선으로 서문경을 바라보며 그제야 가만히 입을 연다.

“고모부님,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고모부라고 그러지 말라구.

오늘 밤부터는 말하자면 신랑각시가 되는 셈인데,

고모부라고 하면 쑥스럽잖아”

“그럼 뭐라고 부르죠?”

“여보라고 부르라구”

“호호호....”

“왜 웃지? 웃지 말고, 여보라고 불러 보라니까”

“여보라고 부르기가 더 쑥스러운데요 뭐”

“허허. 그것 참...”

“내일 아침부터 그렇게 부를게요”

“하룻밤 같이 자고나면 안 쑥스럽다 그건가?

그래 좋아. 그건 그렇고,,. 부탁이라니 무슨 부탁?”

“꼭 들어주셔야 된다구요”

“무슨 부탁인데? 들어줄만하면 들어주고 말고”

계저는 아랫니로 윗입술을 자그시 당겨 물더니 불쑥 내뱉듯이 말한다.

“앞으로 보름 동안을 저와 함께 계셔 달라는 부탁이에요”

 

 

 

마님과 노복 10회 

 

 

 

 서문경은 약간 어리둥절해진다.

 

앞으로 보름 동안을 같이 있어 달라니, 뜻밖의 부탁이었던 것이다.

계저는 한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하룻밤만 같이 자고서 내일 집으로 돌아가 버리시면 저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말이에요.

너무 허전하고 한스러워서 아마 병이 들어 누워 버릴지도 모른다구요”

“음- 그래?”

서문경은 계저의 간절한 심정이 가슴을 건드리는 듯 그윽한 시선으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본다.

콧대가 세다더니 여자로서의 정감도 과연 남달리 짙은데가 있구나 싶었다.

“저는 철이 들면서부터 첫 남자를 끝까지 섬기는 여자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 뭐예요.

비록 기생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태어났지만,

마음만은 여느 가정집 여자 못지않게 곧고 바르게 가지리라 결심을 한 것이죠”

“흐흠-”

서문경은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고모부님이 저의 첫 남자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이게 다 어떤 인연 탓이 아니겠어요.

어쩌면 전생에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이 있었는지도 모른다구요.

저는 어제 고모부님을 처음 뵜을때 대뜸 저분 같으면...하고 속으로 생각했었지 뭐예요.

어쩐지 어디선가 많이 본 분 같은 그런 친밀감이 들더라니까요”

“허허허.... 그랬었나?”

“그게 어쩌면 전생의 인연 때문이 아닌지 모른다구요.

그렇지 않으면 처음 뵜는데 어디선지 많이 본 분처럼 친밀감이 들 수가 있겠어요.

안그래요?”

“전생의 인연이라”

서문경은 아직 열일곱살밖에 안된 처녀의 입에서 ‘전생’이니 ‘인연’이니 하는 말이

예사롭게 나오는게 신기하기도 해서 새삼스럽게 그녀의 백합 같은 청초한 용모를

눈여겨 바라본다.

“지금까지 저의 머리를 얹어 주겠다는 사람이 많았다구요.

바깥으로 술자리에 불려 다니게 된 뒤는 물론이고,

그전에 집안에 들어앉아 기생 공부를 하고 있을 때도 집에 출입하는 분들 가운데

저에게 눈독을 들인 남자가 많았어요.

그러나 저는 다 거절했지 뭐예요.

그런데 고모부님만은...”

계저는 말끝을 흐리면서 깨끗하고 고운 눈빛으로 수줍은 듯

 헬끗 바라보고는 살짝 고개를 떨군다.

“음- 잘 알았다구”

“그러니까 앞으로 보름 동안은 저와 함께 계셔 주세요.

 그 다음은 고모부님 마음대로 하시고요.

저는 이것이 말하자면 결혼인 셈인데,

신혼의 꿈이 하룻밤으로 끝나는 것은 싫다구요.

견딜 수가 없어요.

적어도 보름 동안은 그 꿈이 이어져야죠. 안 그래요?”

“그래, 좋아. 보름 동안 계저와 함께 지내기로 하지”

가슴이 묘하게 뿌듯해지는 것을 느끼며 서문경은 흔쾌히 응낙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