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26) 제5장
하녀 춘매 1회
무송이 유배지로 귀양을 떠난 그 이튿날,
서문경네 집에서는 잔치가 벌어졌다.
앓던 이가 빠진 것보다도 더 개운하고 기분 좋은 일이어서 서문경은
한바탕 주연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무송이 애초의 판결대로 사형이 집행되지 않고,
감형이 되어 목숨이 붙어있게 된 것은 꺼림칙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맹주 땅으로 귀양을 간다는 것은 곧 지옥으로 유배되어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서
이제 아무 걱정이 없게 된 것이었다.
유형수가 되어 그곳으로 가서 살아 돌아온 자를 아직까지 본 일이 없으니 말이다.
후원(後園)의 한쪽에 연못이 있고, 연못가에 정자가 있었다.
부용정(芙蓉亭)이라는 꽤나 크고 호사스러운 팔각형의 정자였다.
그곳에서 말하자면 무송의 유배 축하연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번의 잔치는 얼마 전 생신 축하연 때와는 달리 일절 바깥손님은 초청하질 않고,
집안 사람들만의 자축연(自祝宴)으로 했다.
지난번의 소동이 서문경은 내심 남사스러워서 또 널리 손님들을 청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정도의 염치는 그의 뻔뻔스럽고 두꺼운 낯가죽 속에 아직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런 염치도 염치지만, 서문경은 아직 남들 앞에 얼굴을 내놓을 형편이 못되었다.
그날 밤 무송의 화끈한 선물이 정통으로 얼굴 한가운데서 작렬하는 바람에
코가 그만 엉망이 되었는데, 아직도 그때의 상처가 완전히 가시질 않고,
콧등이 푸르딩딩하게 멍들어 있었다.
가뜩이나 매부리코인데, 그것이 한쪽으로 살짝 삐딱해지기까지 해서 멍이 들어있으니
체면상 도저히 아직 남들 앞에 드러내 보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연못에는 부용화가 만발해 있었다.
연분홍의 큼직큼직한 꽃송이들이 어찌나 탐스럽게 피었는지 못 주변이
온통 연연한 분홍 빛깔로 물들어 보였다.
그 위로 오후의 햇살이 화사하게 내리비치고,
산들산들 미풍이 불고 있어서 더욱 황홀경(恍惚境)이었다.
주연을 베풀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고, 날씨였다.
주석의 상좌에 서문경과 정부인(正夫人)인 오월랑(吳月浪)이 나란히 앉았고,
그 오른쪽에 둘째 부인인 이교아(李嬌兒)와 셋째 부인 맹옥루(孟玉樓)가,
왼쪽에는 넷째인 손설아(孫雪兒)와 다섯째인 반금련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좌(下座)에는 하인들과 그 아낙들,
그리고 어린 하녀들까지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동석을 했고,
몇 사람의 악사(樂士)를 부르기까지 했다.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그득 차려지고,
특급 미주(美酒)가 마련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자, 오늘은 내가 태어난 날보다도 월등히 기분 좋은 날이니 모두 실컷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기 바란다”
서문경이 환한 얼굴로 술잔을 쳐들자
모두 높이 잔을 들어 무송의 유배를 축하하는 건배를 했다.
하녀 춘매 2회
경쾌하고 감미로운 주악(奏樂)이 울러퍼지는 가운데 주거니 받거니
술잔들이 오가고, 환담과 웃음소리가 넘실거리며 주연이 서서히 무르익어갈 때,
이웃집에서 심부름을 보낸 두 어린 종이 찾아왔다.
하나는 사내아이고 하나는 계집아이인데, 둘 다 열서너살된 듯 머리를 눈썹 위에서
가지런히 자르고 있어서 한결 어리고 귀엽게 보였다.
두 아이는 제각기 상자 한개를 들고 있었다.
서문경과 오월랑 앞으로 와서 나란히 큰절을 하고,
가지고 온 상자를 바치며 사내아이가 말했다.
“저희 집 마님께서 오늘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이 선물을 갖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서문경은 절로 온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떠오른다.
“너희 집 마님께서 선물을... 고마운 일이로구나. 어디 무얼까?”
그러다가 옆에 앉은 오월랑이 얼른 자기가 그 두개의 상자를 열어본다.
“어머나-”
오월랑도 환한 미소를 짓는다.
한 상자에는 궁중에서 황제가 흔히 즐기는 귀한 산초떡이 들어있고,
다른 상자에는 방금 꺾어서 담은 듯한 싱싱하고 향기로운 옥잠화가 들어있었다.
“산초떡과 옥잠화로구나-”
두 가지가 다 여간 귀한 게 아니어서 서문경은 콧구멍까지 벌름거리며 좋아한다.
그러나 그가 그처럼 기뻐하는 것은 비단 선물이 귀한 것이어서만이 아니었다.
그것을 이웃집의 부인 이병아(李甁兒)가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이병아는 서문경의 친구인 화자허(花子虛)의 젊은 미모의 아내였다.
평소에 서문경은 그 이병아를 은근히 색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옷차림이나 몸가짐, 그리고 말씨 같은 것이 다 아주 정숙한 가정부인으로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남자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야릇한 아름다움이 얼굴뿐 아니라
온몸에서 풍기는 그런 매력있는 여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친구의 아내인지라 감히 딴 생각을 먹질 못하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그 여자가 뜻밖에도 오늘의 경사를 축하하여 선물을 보내왔으니,
서문경은 속으로 야, 이것 봐라, 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서문경의 그런 속마음도 모르고 오월랑은 덩달아서 좋아한다.
“아이구 곱기도 해라. 이 옥잠화 좀 봐. 어쩌면 이렇게 탐스럽게 피었을까.
여보, 이 옥잠화는 옆집 부인이 나한테 선물한 걸 거예요. 그렇지요?
산초떡은 당신 잡수라고 선물하고. 하하하.....”
옥잠화를 꺼내들고 코로 향기를 맡으며 혼자서 깔깔 웃기까지 한다.
그러자 술기운에 눈언저리가 발그레 물든 둘째 부인 이교아가 농담조로 한마디 던진다.
“형님, 꽃을 여자가 여자에게 선물하는 수도 있나요?”
“맞어. 맞어. 허허허.....”
서문경은 공연히 좋아서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하녀 춘매 3회
서문경은 심부름 온 두 아이에게 잔돈 몇 푼씩을 주고서,
“너희 마님한테 아주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라. 잊지 말고 꼭.... 알겠지?”
단단히 당부를 하고는 돌려보냈다.
평소에 혼자서 은근히 눈여겨 보아오던 여자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은
서문경은 한결 더 유쾌해져서 거듭 잔을 비웠다.
그리고 잠시 후 불그레해진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노래를 하도록 할까. 누구 자진해서 노래를 부를 사람 없나?
부른 다음에 지명을 하도록.....”
모두들 술기운이 제법 올라있기는 했지만, 역시 선뜻 자진해서 나서는 사람이 없다.
서로 싱글싱글 웃으며 쳐다보고 두리번거리기만 한다.
“아무도 없어?”
“제가 한 곡 불러도 되겠습니까?”
수줍은 듯 살짝 고개를 떨구면서 말한다.
춘매(春梅)였다. 반금련의 곁에서 심부름을 하는 몸종인데,
이제 열여섯 살로 아직 귀밑에 복숭아털이 완전히 가시지 않긴 했으나 바야흐로
물이 오르기 시작하여 어딘지 모르게 몸매에 처녀 티가 서서히 감도는 그런 풋풋한 계집애였다.
엉덩이도 차츰 눈에 띄게 벌어져 가고 있었다.
“오, 춘매로구나. 그래 좋아. 어디 한 곡조 뽑아 보라구. 춘매가 제일이군 그래”
서문경은 매우 흡족하고 대견한 듯이 춘매를 넌지시 건너다본다.
평소에는 그저 예사로 보아 넘기던 계집앤데,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시선이 간 셈이다.
“그럼 제가 오늘 이 경사스러운 날을 축하하는 뜻으로 서투르나마 한 곡 불러 보겠습니다”
제법 사설까지 몇마디 늘어놓고서 노래를 내뽑기 시작한다.
악사들이 노래에 반주를 놓는다.
뜻밖에도 춘매의 노래는 보통 솜씨가 넘었다.
꽤나 매끄럽고 고운 목소리로 제법 유창하게 뽑아나간다.
두 손을 얌전히 앞에 모아쥐고 살랑살랑 가볍게 몸을 흔들며 어떤 대목에서는
간절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가지 한다.
감미로운 첫사랑의 노래였다.
춘매의 노래가 끝나자 온통 떠나갈 듯이 박수가 터진다.
“춘매가 이렇게 노랠 잘하는 줄을 미처 몰랐군”
서문경도 놀라운 듯 크게 손뼉을 치며 곧장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제가 다음 노래할 분을 지명하겠어요”
춘매는 좌중을 한 번 휘둘러보고서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용기를 내어,
“주인어른께서 불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서문경을 지명한다.
“춘매야, 너무 당돌하지 않으냐. 어른께서는 맨 나중에 부르는 것이 법돈 줄을 모르느냐?”
금병매 (123) 제5장 하녀 춘매 4회
서문경은 빙그레 웃으면서 입을 연다.
“반드시 법도를 따를 필요는 없지.
이 자리에 바깥손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안끼리의 잔치니까 잠시 법도를 젖혀두는 것도 무방한 일이라구.
춘매가 나를 지명했으니 그럼 내가 한 곡 불러볼까”
서문경이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자, 요란하게 박수가 터진다.
하인 내외와 하녀들이 앉아있는 하좌 쪽의 박수 소리가 한결 드높다.
그러나 벌써 주인 서문경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몇몇 노비들은 속으로 남몰래 빈정거리고 있다.
싱싱한 새것을 잡수어 보시겠다 이거지, 춘매란 년 어쩌면 팔자 고치겠군,
아직 열여섯밖에 안된 것이 벌써 주인한테 먹히고 싶어서 꼬리를 치다니,
쯧즛쯧..... 이런 식으로 말이다.
서문경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춘매는 남달리 두 눈을 반질거리며 빤히 지켜보고 있었고,
그런 춘매의 얼굴을 못마땅한 듯이 반금련이 힐끗 힐끗 바라보곤했다.
노래판이 끝나자 춤판으로 옮겨졌다. 춤판에서도 춘매는 남달리 열심히 춤을 추었다.
춤 솜씨도 제법이었다.
서문경은 또 한번 춘매를 눈여겨보며 침을 꿀꺽 삼키기도 했다.
주연이 파했을 때는 어느덧 긴 여름 해도 기울어 날이 설핏해져 있었다.
서문경은 반금련과 함께 그녀의 거처로 갔다.
금련을 다섯 번째 아내로 들어앉힌 뒤로 서문경은 밤으로 늘 그녀의 침실에서 자는 터였다.
그녀의 거처에는 방이 세 개 있었다.
한 개는 침실이고, 하나는 거실이며, 다른 하나는 하녀의 방으로 돼 있었다.
금련은 서둘러 방에 향을 피우고, 침상의 이부자리를 손질한다.
“꽤나 덥군. 술을 마셔서 그런지...”
의자에 걸터앉은 서문경이 말하자,
금련은 얼른 부채를 가져다가 몇 번 훨훨 부쳐주고는 부채를 그의 손에 쥐어준다.
잠시 부채질을 하다가 서문경은 일어나 웃옷을 훌렁 벗어 던진다.
“그러세요, 호호호... 아예 아래까지 몽땅 다 벗으시라구요.
어차피 이따가 벗을 것 아니예요. 누가 보나요 뭐”
“그럴까. 좋아”
서슴없이 서문경은 아랫도리까지 죄다 벗어 버린다.
“어이구 시원해. 부채질하는 것보다 훨씬 시원하군 그래”
벌건 알몸으로 의자에 걸터앉으며 서문경이 조금은 멋쩍은 듯한 웃음을 짓자 금련은,
“여름에는 옷을 걸치지 않고 사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그지요? 히히히.....”
“내가 벗었으니까 당신도 벗으라구”
“벌써요?”
“벌써라니, 그게 뭐 정해놓은 시간이 있나?”
“좋아요. 벗을께요”
금련은 살짝 돌아서서 옷을 벗기 시작한다.
하녀 춘매 5회
“자, 그럼 피리부터 불어 달라구”
벌건 알몸인 서문경은 의자에서 일어나 침상으로 간다.
하얀 벌거숭이로 바뀐 금련이 뒤따라 침상으로 오른다.
“당신이 좋아하는 피리, 자, 어서 불라구”
“예, 멋들어지게 불어 드릴께요”
서문경이 내민 피리를 금련은 두 손으로 받들고 불기 시작한다.
그녀는 피리의 명수다.
소리 안나는 피리를 잘도 분다.
서문경은 그녀가 입으로 솜씨 좋게 피리를 불어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스르르 두 눈을 감는다.
마치 간드러지게 넘어가는 피리 소리가 귀에 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곧 서문경은 하녀의 방 쪽을 향해 큰소리로 춘매를 부른다.
“춘매야! 춘매 거기 있느냐?”
“예, 있습니다”
춘매의 대답 소리가 들려온다.
“이 방에 지금 곧 차를 좀 가지고 오너라”
“예, 알겠습니다”
그러자 피리 불기를 멈추고서 금련이 약간 당황 하듯이 말한다.
“아니 여보, 지금 이러고 있는데 춘매한테 차를 가지고 오라면 어떻게 해요”
“목이 마른데 그럼 어쩐단 말이야. 도리가 없잖아”
“아이 망측해. 이런 꼴을 춘매가 보면 얼마나 창피해요”
“창피하기는 뭣이 그렇게 창피하다는 거야.
남이 보아주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라구”
“어머나, 그게 정말이에요?”
금련은 뜻밖의 말에 놀란 듯 묘한 시선으로 서문경을 바라본다.
“정말이라구. 여자는 어떤지 모르지만, 남자는 말이야,
자기의 당당한 모습을 남이 보아주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 없다구.
일종의 자랑이지. 알겠어?”
“이러는 게 당당한 모습인가요?”
“이보다 더 당당한 모습이 어디 있겠어.
한 여자를 뜨겁게 짓이겨서 행복하게 해주는
남자의 모습이야 말로 가장 당당하고 아름답기까지 하지”
“히히히... 그런가요?
여보, 그렇지만 난 쑥스러우니까 휘장을 가리도록 하자구요”
“그럼 그러라구”
금련은 얼른 일어서서 침상을 가리기 위해 마련되어 있는 휘장을 풀어 닫아 버린다.
휘장으로 가리기는 했으나 그것이 워낙 엷은 망사로 된 것이어서 안이 훤히 다 비치고,
안에서 바깥쪽도 훤히 다 보인다.
“이제 피리는 그만 불겠어요.
피리 부는 걸 춘매가 보면 창피하단 말이에요”
“좋아, 그럼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그러자 금련은 얼른 침상에 하얀 알몸을 발랑 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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