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23)
무송의 복수 21회
천만 뜻밖에도 영아가 아닌가.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무송은 놀람과 반가움에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삼촌! 삼촌!”
영아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며 달려온다.
복숭아밭에서 복숭아를 따서 바구니에 담아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던 영아는
저만큼 마을 앞을 지나가는 사냥꾼이 삼촌이라는 것을 알고는 냅다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아이고 영아야, 널 여기서 만나다니.....”
무송은 너무나 반가워서 그만 영아를 끌어안고 번쩍 들어올리기까지 한다.
“삼촌, 아버지가 죽었어요”
“그래, 안다”
“새엄마가 죽였단 말이에요. 알겠어요?”
“뭐라구? 새엄마가 죽여?”
“예, 새엄마 아주 나쁜 년이에요. 마귀 같은 여자라구요. 삼촌, 복수를 해주세요”
그러면서 그만 영아는 울음을 터뜨린다.
삼촌을 만난 반가움이 아버지의 죽음과 연결되어 왈칵 슬픔으로 복바쳐 올랐던 것이다.
“그렇구나. 음-”
무송은 무거운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온몸을 부르르 떤다.
가라앉아 가던 마음속이 대번에 벌떡 뒤집어지고 만 셈이었다.
영아는 곧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열세살짜리 영리한 계집애답게 말한다.
“삼촌, 집으로 가요. 집에 가서 자세히 얘기할께요”
“그러자. 영아 네가 살고 있는 집이 어디야?”
“저기 저 큰집이에요. 이 마을에서 제일 부잣집이라구요”
“응, 그러냐”
영아를 따라 무송은 마을 한가운데에 널찍하게 터전을 잡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삼촌을 집으로 데리고 가면서 영아는 묻지도 않은채 말을 지껄인다.
“마을에서 제일 부잔데, 아이가 하나도 없다구요.
그래서 나를 수양딸로 삼는다고 사왔지 뭐예요”
“음, 그렇구나”
“새엄마가 아버지를 죽이고서 나를 팔았어요. 귀찮으니까요.
그리고 새엄마는 다른 남자한테 시집을 갔지 뭐예요.
그 남자한테 시집을 가려고 아버지를 죽인거라구요.
내가 다 안다구요. 아주 나쁜여자라구요. 새엄마”
“나쁜 여자라는 것을 나도 다 알고 있다. 그렇게 된 일이로구나. 음-”
무송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영아의 양부모와 인사를 나눈 다음,
무송은 울안의 넓은 뜰 한쪽에 있는 정자에서 잠시 앉아 쉬며 영아와 얘기를 나누었다.
“그래 영아야, 새엄마가 아버지를 죽이는 걸 네가 직접 봤니?”
“예, 봤다구요”
“어디 자세히 얘길 해보라구”
무송의 복수 22회
영아는 아버지가 숨을 거둔 그날 밤 본 사실을 얘기해 나가면서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무송은 꾹 입을 다물고 영아의 얘기를 묵묵히 듣고 나서,
“천벌을 받을 년, 세상에 그런 년을 마누라라고 데리고 살았다니....”
죽은 형이 가련해서 못견디겠고, 정말 뭐 그런 마귀 같은 계집이 다 있는가 싶은 듯
온통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쩔쩔 내흔든다.
그리고 영아에게 묻는다.
“그러니까 네 눈으로 본 것은 아버지가 숨을 거둔 뒤부터구나.
새엄마가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은 직접 보지 못했군 그래”
“직접 보진 못했지만 새엄마가 독살을 했다구요.
이웃 찻집 할망구를 데리고 와서 같이 아버지 얼굴의 피를 닦으면서 둘이 주고받는 말을
내가 옆방에서 들었는데, 그때 할망구가 그러더라구요.
혹시 누가 보면 대번에 독살인줄 의심하겠으니 곧 염을 해버리자구요”
“음-독살을 했구나. 죽일년 같으니”
무송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러니까 서문경이란 놈이 두들겨 팬 뒤에 금련이란 년이 독을 먹여 죽였고,
왕파란 할망구가 뒷수습을 했군. 틀림없는 공모 살인이야.
그러니까 묘를 안 쓰고 화장을 했지. 천벌을 받고도 남을 연놈들. 어디 이것들 두고 보자구.
이제 형 무대의 죽음의 수수께끼가 풀린 셈이어서 무송은 후유 크게 한숨을 내쉬고
어금니를 뿌드득 물며 두 주먹에 불끈 힘을 준다.
천만 뜻밖에 영아를 만나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알게 된 무송은 도저히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현지사는 형의 죽음에 대해 자꾸 의심을 가진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
잊어버리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좋은 자리에 발령을 내준다고 까지 선심을 쓰는 듯 말했으나,
무송은 아무래도 그대로 모르는 척 넘겨버릴 수가 없었다.
두들겨 맞고 독살을 당해서 무덤도 없이 감쪽같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형의 원혼을
생각할 때 피와 살을 같이 나눈 동생으로서 모르는 척 넘겨버리다니 될 말이 아니었다.
그 가증스러운 세 연놈을 징벌하지 않고서는 당장 견딜 수가 없었다.
무송은 그날 저녁 다시 지사를 집으로 찾아갔다.
지사의 저택에는 아무나 함부로 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대문의 수문근(守門軍)에게 방문의 목적을 말하고,
지사의 하회를 기다려 들어오라면 들어가게 마련이었다.
전번에 찾아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송은 지사님께
긴히 여쭐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수문근에게 말했다.
전 순포도두 무송을 아는 터라 수문근 한 사람이 두말없이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지사의 하회를 기다리며 무송은 대문 밖에 서있었다.
무송의 복수 23회
잠시 후, 안에 들어갔던 수문근이 돌아와서 말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는데 뭣 때문에 또 찾아왔느냐고,
지사님이 역정을 내시면서 돌아가라고 그러던데요”
“아니, 정말인가?”
무송은 뜻밖이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라니까요. 화를 내시어 벌컥 고함을 지르셨단 말입니다”
“그래? 음-”
무송은 왠지 분해서 견딜 수가 없다.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러나 지그시 눌러 참으며 잠시 대문 밖에 우뚝 선 채 움직일 줄을 모른다.
면회를 사절하는 지사가 원망스러워서 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지사로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형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떨쳐버리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는데,
또 찾아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가슴을 짓눌렀다.
사람이 아무 잘못도 없이 두들겨맞고 독살까지 당했는데,
그 사실을 밝혀 범인들을 징벌할 길이 없다니,
이래서야 어떻게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싶어
답답하고 분통이 터지는 것이었다.
“에잇 빌어먹을 것!”
우두커니 서 있던 무송은 냅다 한발로 쾅! 땅을 꺼져라 하고 내리 구른다.
그리고 홱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음을 떼 놓는다.
무송은 그길로 가향이가 있는 술집을 찾아갔다.
술이라도 진탕 퍼마시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것이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무송을 가향은 수줍게 그러나 진정으로 반겼다.
총각 아닌 총각과 처녀 아닌 처녀가 하룻밤을 뜨겁게 살을 섞으며 덧없기는 하지만
만리장성을 쌓은 사이기 때문이다.
가향과 단둘이 호젓한 방에서 무송은 고량주 중에서도 가장 독한 놈을 시켜 마시기 시작했다.
불을 붙이면 홀홀 불꽃이 나불거리는 그런 맵디매운 놈이 목구멍을 적시고 내려가니
뱃속이 화끈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심정이 조금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독한 것을 마시세요? 혀가 다 얼얼하잖아요”
가향은 찔끔찔끔 두어 모금 마시고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린다.
“울화통이 터져서 그런다구”
“왜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가향이가 알 일은 아니야”
가향은 좀 섭섭한 듯 입을 삐쭉거리고는 귀엽게 투정을 하듯 묻는다.
“왜 그렇게 안 오셨어요?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사냥을 하러 다니느라고....”
“무슨 사냥요? 여자 사냥?”
무송은 비로서 웃음이 나온다.
“허허허.....”
“맞죠? 여자 사냥을 하러 다닌 거죠?”
“내가 가향이를 두고 무슨 다른 여자를 넘보겠나.
내가 누구처럼 여자 사냥꾼인 줄 아나?”
무송의 복수 24회
“누가 여자 사냥꾼인데요?”
가향은 무척 호기심이 동하는 듯 두 눈을 반질거리면서 무송을 빤히 바라본다.
“서문경이란 놈이지”
무송은 서슴없이 대답한다.
“서문경이오? 약국을 한다는 그 부자 말이에요?”
“맞다구”
“어머, 그 사람이 그렇게 여자를 좋아한대요?”
“왜, 가향이도 귀가 번쩍하나? 그놈한테 한번 안기고 싶다 이건가?”
“어머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난 비록 술집에서 술을 따르는 여자지만 이 남자 저 남자 아무남자한테나 안기는
그런 여자는 아니라구요. 알겠어요? 당신 밖에 아무도 소용없다구요”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라구요”
가향은 표정을 조금도 흩트리지 않고 대답한다.
무송은 말없이 독한 술을 거푸 목구멍으로 부어 넣는다.
잠시 후, 독한 고량주 기운에 불그레해진 눈으로 가향을 지그시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연다.
“가향이”
“예?”
“나하고 같이 어디로 도망갈까?”
“어머, 정말이에요?”
“정말이라구”
너무 뜻밖의 말에 가향은 정신이 멍멍한 듯 얼른 뭐라고 대답이 나오지가 않는다.
“왜 대답이 없지?”
“당신이 가자면 나는 어디든지 따라 가겠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시는지 그 뜻을 잘 모르겠다구요.
어디로 도망가야 할 일이라도 생겼나요?”
“아직 생기지는 않았어. 아마도 오늘 밤에 그런 일이 생길 것 같다구”
“오늘밤에요?”
가향은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서
두 눈에 두려운 빛이 떠오르면서도 표정을 애써 가다듬는다.
무송은 잠시 묵묵히 또 몇 잔의 술을 비운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연다.
“가향이,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보라구.
만일 말이야, 가향이에게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가 가향이 어디로 볼일이 있어서 가고 없는 동안에 어떤 나쁜 것들한테
얻어맞고 독살까지 당했다면 어떻게 하겠어?
모르는 척 가만히 있겠어?”
“가만히 있다니 말이 돼요? 복수를 해야지요”
“그렇지? 어떻게든 복수를 해야지요”
“그렇지? 어떻게든지 복수를 해야지?”
“그럼요”
“복수를 어떤 방법으로 하지?”
“관가에 알려서 처벌을 받도록 해야 되겠지요”
“그렇게 했는데도 잘 안될 경우에는?
말하자면 독살을 했다는 증거가 없어서 관가에서 범인들을
처벌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 말이야”
무송의 복수 25회
가향은 얼른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죽였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관가에서 처벌을 안 한다면
힘없는 백성으로서는 도리가 없는 일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고 자기 언니가 두들겨 맞고 독살을 당한 게 확실하다면
동생으로서 가만히 넘겨버릴 수도 없는 일 같았다.
“증거는 없더라도 독살을 당한 게 틀림없고,
그 범인이 누군지 알 경우에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좀 생각한 뒤 가향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지?”
“예”
“그럼 어떤 식으로 복수를 하지? 법으로 안 된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가향이 같으면 어떤 방법으로 복수를 하겠어?”
“글쎄요... 당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왜 그런 말을 묻는거예요?
혹시 무슨 그런 일을 당하시기라도 했나요?”
“응, 바로 내가 그런 일을 당했다구”
“어머나, 무슨 일인지 자세히 얘기를 해보시라구요”
무송은 술잔을 또 쭉 기울이고 나서 안주를 한 젓가락 듬뿍 집어 입에 넣고
불룩불룩 씹으면서 말한다.
“내가 동경에 가고 없는 동안에 글쎄,
우리 형님이 그런 꼴을 당해서 돌아가셨지 뭔가.
원통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다니까”
“그러셨군요. 전번에는 그런 얘기를 안하시더니.....”
“그때는 아직 내막을 잘 몰랐었지.
그저 아파서 돌아가신 줄 알았단 말이야.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구.
얻어맞고 독살을 당했지 뭐야.
게다가 감쪽같이 화장을 해서 재를 강물에 뿌려버렸더라구”
“그 범인이 누군지 아신단 말이에요?”
“알고 말고”
“그럼 잡아들이면 될거 아니예요.
전에 순포도두 나리셨다면서 그것을 못잡아들여요?”
“지금은 순포도두가 아닐 뿐 아니라,
설사 순포도두라 할지라도 잡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그런 굵은 놈이 범인이라구”
“누군데요? 그게...”
“여자 사냥꾼 그놈이지”
“어머, 그럼 서문경 그 사람이”
“그렇다구”
가향은 그만 눈이 휘둥그래지며 입까지 딱 벌어지고 만다.
“그놈이니까 증거가 없다고 잡아들이질 않지,
그렇지 않고 하찮은 백성 같으면 왜 안 잡아들이겠나.
증거가 있든 없든 잡아들여서 심문을 하면 사실이 밝혀질게 아니겠어.
내가 정식으로 청원서를 지사 앞으로 올렸는데도 글쎄 기각 처분을 내리고 말았지 뭐야.
굵은 놈은 죄를 지어도 잘 잡아들이지도 않는 세상이라구.
나도 관원이지만, 더럽고 분해서 못 참겠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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