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22)
무송의 복수 16회
흐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무송은 죽은 형을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몸은 삼척도 안되는 볼품없는 난쟁이였지만,
마음씨는 어리석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었는데,
아직 사십도 안된 한창 나이에 덜컥 그만 병에 걸려 죽고 말다니,
가엾고 허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가 없는 동안에 죽은 것도 원통한데,
더구나 무덤도 남기지 않고 화장을 해서 재를 강물에 뿌려버리고 말다니,
생각할수록 눈물겹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줌 재로 뿌려진 형의 육신을 흔적도 없이 삼켜버린 강물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는 듯 오늘도 변함없이 굽이치며 유유히 흐르고 있고,
하늘에는 흰 구름이 한가로이 떠서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으니,
참 너무나도 보잘 것 없고 덧없는 것이 사람의 목숨이로구나 싶으며
무송은 후유-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멱을 감던 아이들 중에서 한 소년이 물에서 나와 옷을 주워 입고는
무송이 앉아있는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과일 행상을 하는 운가였다.
과일을 팔러 다니다가 더워서 강을 찾아와 잠시 멱을 감던 중이었다.
“저... 무송나리시지요?”
운가는 무송에게 굽신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그렇다. 너는 누구냐?”
“저는 운가라고 하는데, 과일 행상을 하고 있지요”
“응, 그래?”
운가는 무송의 곁에 앉으며 묻는다.
“동경에서 언제 돌아오셨나요?”
“어제 돌아왔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운가는 무송의 표정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뗀다.
“형님이 돌아가셔서 어쩌지요? 무대 아저씨 말이에요”
“너는 우리 형님을 잘 아느냐?”
“잘 알고말고요.
저도 행상을 하기 때문에 평소에 무대 아저씨가 무척 위해 주셨다구요”
“오, 그랬구나”
무송의 얼굴에 조금 반가워하는 기색이 떠오른다.
“무대 아저씨가 왜 돌아가셨는지 알고 계세요?”
“아파서 돌아가셨다고 그러더라”
“누가 그래요?”
“찻집을 하는 왕파도 그러고, 검시관도 그러던데...”
“핫핫하.....”
그만 운가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린다.
“아니, 왜 웃지? 그럼 병으로 돌아가신 게 아닌가? 어서 말해 보라구”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래요? 왕파가....”
“평소에 가슴이 아파서 약을 먹다가 갑자기 악화되어 한밤중에 돌아가셨다
그러던데. 그게 아니란 말인가?”
“맞아서 돌아가셨단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뭐? 맞아서? 누구한테?”
무송의 두 눈이 휘둥그래진다.
무송의 복수 17회
“서문경이한테요”
운가는 서슴없이 대답한다.
무송은 운가의 한쪽 팔을 커다란 손아귀로 덥석 잡으며 묻는다.
“서문경이가 누구지?”
무송은 순포도두로 있다가 오래지 않아 동경으로 현지사의 심부름을 떠났었기 때문에
얼른 그게 누군지 머리에 와 닿지가 않았다.
“약국을 경영하는 부자 말이에요. 모르세요?”
“응, 그 사람.... 말은 들었지.
그 서문경이가 우리 형님을 때려 죽였다 그거야?
그게 틀림없는 말이야?”
“틀림없다구요.
그 자리에서 당장 죽은 것은 아니고, 며칠 뒤에 숨을 거두었지만,
죽은 원인이 맞아서 골병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때리는 걸 네 눈으로 직접 봤어?”
“봤다구요”
“음. 왜 서문경이가 우리 형님을 때렸지? 우리 형님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잘못을 저지르긴요.
무대 아저씨같이 착하신 분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겠어요.
잘못은 오히려 서문경 자기가 저질러 놓고 무대 아저씨를 죽도록 두들겨 팼단 말이에요”
“어떻게 됀 일인가 하면요...”
운가는 꽤나 흥분이 되어 제대로 얼른 잘 나오지가 않는 듯
심호흡을 해서 숨을 가다듬은 다음 차근차근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서문경과 금련이 왕파네 찻집에서 대낮에 간통을 하고 있는 현장을
무대와 운가가 둘이서 습격을 했는데 실패하여 오히려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무대가 서문경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해서 피거품을 입에 물고 뻗어지고 말았다는
얘기를 들은 무송은 주먹을 불끈 쥐고 버르르 떨었다.
“나쁜 연놈들 같으니..... 내가 그것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구”
무송은 내뱉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길로 곧바로 무송은 찻집을 향해 갔다.
늙은 여우같은 왕파를 잡아서 다짜고짜 모가지를 비틀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운가의 얘기에 의하면 모든 농간이 여우같은 할망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게 틀림없었다.
대낮에 자기집 안방에다가 그와 금련을 끌어들여 간통을 시키다니,
더럽고 구역질이 나는 늙은 뚜쟁이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불상사가 일어나 서문경이 무대를 두들겨 패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말았는데,
평소에 가슴이 아파서 약을 복용하다가 갑자기 어느 날 밤 죽었다니,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나불대는 그 늙은 여우의 혓바닥을 쑥 잡아 뽑아놓고 싶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코로 훅훅 거칠게 내뿜으며 무송이 찻집에 당도해 보니
어찌된 셈인지 가게의 문이 온통 닫혀 있었고,
문짝에 (사정에 의하여 당분간 휴업)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무송의 복수 18회
“도망쳤구나. 이 늙은 여우”
무송은 중얼거리며 그 안내문을 닭 쫓던 개 울타리 쳐다보듯
잠시 멀뚱히 바라보고 있다가 그만 주먹으로 쾅! 냅다 한 대 쳐버렸다.
와장창! 문짝 하나가 부서져 보기 좋게 삐닥해 졌다.
무송은 숙소에 돌아가 번듯이 누워서 울분을 삭이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옳을지 생각해 보았다.
결코 그냥 가만히 넘겨버릴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억울하게 죽은 형의 원혼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기 위해서도
세 연놈을 징벌해야 마땅했다.
세 연놈 중에서도 가장 증오스러운 것은 새형수라는 그 백여우 같은 계집이었다.
어느 모로나 형에게 어울리지 않던 그 계집이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지 않았는가 말이다.
시동생을 유혹할 정도였으니 외간 남자와 붙는 것쯤은 예사가 아니겠는가.
동경으로 떠날 때 형에게 일부러 집안 단속을 잘하라고 당부까지 했었는데,
결국 그런 꼴을 당하고 말다니. 생각할수록 형이 측은하고, 그 계집이 얄미웠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서문경인가 뭔가 하는 놈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냅다 사정없이
주먹을 휘둘렀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필경 그 백여우 같은 계집도 그놈의 첩이 되어 그 집안에 있을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무송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비록 동경에서 돌아와 발령을 대기하고 있는 중이지만 관원임에는 틀림없고,
또 한때는 현내의 치안책임자인 순포도두였던 몸이 앞뒤 가리지 않고 주먹부터
휘두른다는 것은 될 말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적법(適法)하게 순서를 밟아서 세 연놈을 징벌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무송은 청원서(請願書)를 현지사 앞으로 제출했다.
형 무대의 죽음이 병사가 아니라,
타살일 가능성이 농후하니 내막을 조사해서
서문경과 반금련 왕파 세 사람을 처벌해 달라는 그런 내용이었다.
운가에게서 들은 대로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적은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청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기각되었다.
지사는 처음에는 그 청원서가 무송이 올린 것이라는 말을 듣고 담당 관원으로부터
그것을 받아 직접 자기가 읽어 보았다.
그러나 읽어 내려가는 도중에 지사의 표정은 묘하게 바뀌었다.
서문경이 조사 대상 인물로 고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사는 생각한 끝에 일단 서문경을 불러들여서 얘기를 들어 보았다.
서문경은 얼토 당토 않은 모략이라고 딱 잡아떼었고,
검시관 하구가 시체를 확인했으니 그가 유일한 증인이 아니냐고,
그에게 물어보라고 말했다. 그 말에 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경을 돌려보내고 나서 지사는 검시관 하구를 불러들여 틀림없는 병사였다는
말을 직접 들은 다음 무송의 그 청원을 기각처분했다.
일을 끝맺은 지사는 만족스러운 듯 표정이 매우 개운해 보였다.
무송의 복수 19회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안 무송은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현지사가 자기의 온당한 청원을 기각처분하다니, 마치 배신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동경까지 심부름을 갔다 온 그 공로를 생각해서라도 의당 청원을
받아들여 사건의 내막을 조사해서 세 연놈을 징벌해주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궁금해서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직접 지사를 만나 얘기를 들어보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것이었다.
무송은 지사를 저녁에 그의 저택으로 찾아갔다.
낮에 현청 집무실로 찾아가는 것보다 집을 방문하여 사적으로 만나보는 게 나을 것 같았던 것이다.
지사는 저녁에 집으로 찾아온 무송을 흔쾌히 만나 주었다.
“웬일로 자네가 저녁에 이렇게 찾아왔는가?”
이미 속으로 무송이 왜 찾아왔는지를 뻔히 다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지사는 짐짓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듣는다.
“지사님께 좀 여쭈어볼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으리으리한 응접실에 지사와 마주앉은 무송은 절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느낌이다.
“무슨 말인데, 어디 해보라구”
“저... 다름이 아니라 지사님, 제가 지사님께 올린 청원서를 받아 보셨는지요?”
“응. 받아보았지”
무송은 가만히 지사의 표정을 살피듯 바라본다.
너무도 담담한 어조로 예사롭게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청원서의 내용을 읽어 보셨는지요?”
“읽어 보았어”
“그런데 왜 제 청원을 받아들여 주시지 않으셨는지요?
그 점이 너무 궁금해서 방자한 짓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렇게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왜 기각 처분을 내리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자네가 오해를 하고 있더군 그래”
“제가 오해를 하고 있다구요? 아닙니다.
지사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의 형은 병사를 한게 아니라,
서문경에게 맞아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자네가 보았는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동경에 지사님이 심부름을 가고 없을 때 일어난 일이니까요”
“보지 못한 일을 어떻게 틀림없다고 장담 할 수 있는가? 안 그런가?”
비로소 지사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진다.
“본 사람이 있습니다. 과일 행상을 하는 운가라는 소년이 직접 목격했다고
저한테 얘길 해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겠습니까.
청원서에 자세히 적어 놓은 대로 서문경이란 놈이 제 형수를 탐내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틀림없습니다.
무송의 복수 20회
“운가라는 아이가 무엇을 목격했다고 그러던가? 어디 얘기해 보라구”
지사는 무송을 위압하는 듯한 그런 눈길로 바라보며 묻는다.
지사의 그 시선 앞에 무송은 절로 목이 움츠러드는 느낌이어서 단전(丹田)에 뿌듯이
힘을 넣으며 대답한다.
“서문경이가 우리 형을 두들겨 패는 장면을 틀림없이 목격했다고 했습니다.
서문경이한테 두들겨 맞아서 형이 피거품을 물고 뻗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그러던가?”
“그건 아닌 것 같고, 며칠 뒤에.....”
“어험! 무송, 내 얘기를 잘 들으라구. 내가 자네의 청원을 기각할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인 것이야.
내가 다 조사를 해보고서 내린 판단이라구. 알겠는가?”
“조사를 해보셨습니까?”
무송은 비로소 수긍한 표정이 되어 좀 두려운 듯이 지사를 바라본다.
“서문경이 불러서 심문해 보았고, 검시관 하구도 불러서 물어보았다구.
문제는 자네 형의 죽음이 병사냐, 타살이냐, 그거 아닌가. 맞지?”
“예”
“검시관 하구가 자네 형의 시체를 직접 검사했는데, 병사에 틀림없었다는 거야.
그렇다면 문제는 끝난 거 아닌가. 안 그런가?”
“.......”
“검시관의 판단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 달리 누구의 말을 믿는단 말인가.
나라에서 검시관 제도를 둔 까닭이 무엇인가.
사람이 죽었을 때는 그 사람의 판단에 의해서 처리를 하라고 둔 거 아닌가.
그런데 검시관의 말을 믿지 않고, 이의를 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더구나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관원이 말일세. 어떤가?
무송, 내 말이 틀렸는가?”
무송은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살짝 떨구며 후유-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쉰다.
지사는 그런 무송을 보고 싱그레 미소를 떠올리며 말한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의심을 떨쳐버리도록 하게.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잊어버리게. 알겠는가?”
“.......”
“왜 대답이 없지?”
‘예, 알겠습니다“
“잊어버리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곧 좋은 자리에 발령을 내줄 터이니”
지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무송도 얼른 따라 일어나며 자기도 모르게 깊숙이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시한다.
지사를 만나본 뒤로 무송은 형의 죽음에 대한 일을 잊으려고 노력하며 사냥을 하러 다녔다.
산에 가서 짐승을 향해서나마 냅다 화살을 쏘아대니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던 것이다.
어느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떤 마을을 지나는데 누군가가,
“삼촌!”
냅다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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