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20) 제4장
무송의 복수 6회
찻집을 나선 무송은 곧바로 술집을 찾아갔다.
술이라도 퍼마시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그런 심정이었다.
동경으로 떠나기 전에 곧잘 드나들던 술집이라 무송이 들어서자
주인 아낙네는 깜짝 놀라듯이 반겼다.
“아이고, 순포도두 나리, 언제 돌아오셨나요?”
“오늘 돌아왔어요”
무송의 얼굴에 어쩐지 침울한 기색이 감돌아 보이자
중년의 주모(酒母)는 좀 조심스럽게 묻는다.
“무슨 기분 안좋으신 일이라도 있는지요?”
“왜요?”
“어쩐지 얼굴에 그늘이.....”
“돌아와보니 형님이 돌아가셨지 뭡니까”
“어머나, 어쩌나.....쯧쯧쯧.....”
주모는 안됐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면서 무송을 조용한 방으로 안내한다.
무송은 가향(可香)이라는 아직 어린티가 가시지 않은 작부와 둘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심기가 울적한 터라,
무송은 가향이 따라주는 술을 거듭 쭉쭉 비워냈다.
그런 무송을 가향은 호감이 가면서도 두렵기도 한 것 같은 눈길로 조심스레 지켜보았다.
처음 대하는 손님인데, 우선 체구가 남달리 커서 대장부 중의 대장부로 보일 뿐 아니라,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아서 일약 순포도두가 된 분이라고 하니
절로 우러러 보이면서도 어쩐지 위압감이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순포도두 나리시라지요?”
술병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 들고 세 번째 잔에 가득 따르면서 가향은
상그레 웃음을 떠올리며 나긋한 목소리로 묻는다.
“아니야”
“주인 아주머니가 그러시던데요”
“전에는 순포도두였는데, 지금은 아니라구”
“어머, 그러세요?”
무송은 약간 술기운이 젖어들기 시작하는 눈으로 가향을 가만히 바라본다.
야들야들해 보이면서도 아직 앳된티가 흐르고 있어서 귀엽다.
무송은 울적한 심정을 털어버리고,
빌어먹을 것이 계집애와 기분이나 낼까하고 생각한다.
잔을 쭉 비우고서,
“자, 아가씨도 한잔해”
불쑥 가향에게 잔을 민다.
가향은 황송한 듯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받는다.
잔에 찰찰 넘치도록 술을 따라주고서 무송은 한결 풀어진 목소리로 농담 섞어 말한다.
“동경에 가서 말이야, 내가 반년을 빈둥빈둥 놀다가 왔다구.
그랬더니 지사가 그만 내 감투를 벗겨버렸지 뭐야. 보라구, 이렇게 맨대가리잖아”
“하하하.....재미있어”
“곧 지사가 더 큰 감투를 씌워주지 않으면 까짓것 지사의 감투를 훌렁 벗겨 가지고
내가 푹 써버릴 작정이라구”
무송의 복수 7회
“그러시라구요. 그러면 나리께서 바로 청하현의 지사가 되시는거죠”
“청하현 지사를 한 번 해버릴까. 까짓놈의 것.....”
“그러시라니까요. 호호호.....”
웃는 가향의 한쪽 볼에 보조개가 한개 살짝 팬다.
그 보조개를 보자 무송의 두 눈에 번질번질한 웃음이 피어난다.
“보조개가 귀엽군. 가향이라 그랬던가?”
“예”
“몇 살이지?”
“몇 살이나 돼 보이나요?”
“글쎄... 열여섯?”
“어머, 그렇게 어려 보여요?”
“그럼 더 먹었나?”
“열여덟이에요”
“열여덟이라... 좋을 때군. 아직 처녀겠지?”
“호호호.....”
“왜 웃지?”
“몰라요”
“그럼 처녀가 아니란 말인가?”
그러자 가향은 살짝 곱게 눈을 흘기며 말한다.
“처녀는 처녀죠. 시집을 안 갔으니까”
“하하 그렇구나.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알겠다니까”
무송은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공연히 자꾸 고개를 끄덕이며 히들히들 웃는다.
그리고 싱겁게 내뱉는다.
“나하고 똑같군 그래. 나도 총각은 총각이지 뭐야. 장가를 안 들었으니까”
“어머, 그래요? 아직 미혼이세요?”
“음, 총각같이 안 보이나?”
“어머나 총각인데 순포도두를 지내시다니.....”
정말 놀랄 일이라는 듯이 가향은 두 눈을 반짝 크게 떠서
애교있게 굴렁거리며 입까지 살짝 벌린다.
“비슷한 처녀하고 총각하고 오늘밤에 우리 한 번 놀아볼까? 어때? 가향이”
“어머, 정말이세요?”
“정말이고 말고. 사내 대장부가 그런말을 함부로 꺼내는 줄 아나?”
“아이 좋아라”
가향은 정말 좋아서 못견디겠는 듯, 그러나 수줍게 살짝 고개를 떨군다.
무송은 술을 또 한 잔 비운다.
그리고 슬그머니 가향의 한쪽 손을 잡아 끌어 바짝 가까이 다가앉도록 해서
한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안으며 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이 말한다.
“가향이, 어때? 남자 맛을 제대로 아는가?”
“호호호..... 글쎄요. 제대로 아는지 모르는지 그것도 잘 모른다구요”
“열여덟이면 그럴거야. 오늘밤에 그 진짜 맛을 보여주지”
“어머, 호호호.....”
그 때였다.
방 바깥 가게 쪽이 떠들썩하더니 냅다 고래고래 고함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향이 어디 갔나? 응? 내가 왔는데 안 나오나? 하구가 왔단 말이야. 하구가...”
무송의 복수 8회
"저게 누구지?“
무송은 묻는다.
“검시관 하구예요”
가향이 대답한다.
“검시관이라구?”
“예”
무송은 잠시 술기운이 도는 머리를 가다듬으며 생각에 잠긴다.
그런 무송을 보고 가향은 나불나불 지껄인다.
“검시관 모르세요?
사람이 죽으면 검시관이 시체를 검사한 다음에 장례를 지내도록 허가하잖아요.
아실텐데..... 관가에 계시는 나리가 검시관을 모르실 턱이 없잖아요”
“알고 말고”
무송은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다.
가향의 허리를 감아 안았던 팔을 풀며 내뱉듯이 말한다.
“저 검시관을 이리 불러”
“예? 이 방으로요? 술이 많이 취한 것 같은데요. 아마 삼차쯤 되나봐요”
“부르라면 어서 불러!”
버럭 소리를 높인다.
“예, 예, 그러죠”
가향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얼른 방문을 열고 나간다.
곧 가향의 뒤를 따라 검시관 하구가 벌겋게 취한 얼굴로 들어선다.
“어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순포도두 아니십니까? 동경에서 언제 돌아오셨는지요?”
하구는 약간 비틀거리면서도 애써 정중히 허리를 꺾는다.
“이리 앉게. 자네가 검시관인가?”
무송은 자리를 권하면서 묻는다.
“예, 그렇습니다. 검시관 하구 올습니다”
하구는 공연히 두려운 듯 그 자리에 뻣뻣이 굳어서 서있다.
“이리 앉으라니까”
“예”
마지못하는 듯 하구는 머리를 굽실거리며 의자에 걸터앉는다.
무송은 가향에게 술잔을 새것으로 한개 가져오도록 이른다.
술잔을 가져오자
그것을 받아 직접 자기가 하구에게 권하고서 가향에게 술을 따르도록 한다.
하구는 내가 왔으니 나오라고 소리치던 그 가향이가 따르는 술인데도
두 손으로 잔을 공손히 받들어서 받는다.
하구는 아랫도리가 덜덜덜 공연히 떨리고 있다.
무송은 가향에게 말한다.
“잠깐 밖에 나가 있으라구. 둘이서 좀 할 얘기가 있으니까.
내가 들어오라고 하면 들어와. 알겠지?”
“예, 예”
가향은 무슨 일인가 싶은 듯 두 사람을 힐끗힐끗 번갈아 보면서 방을 나간다.
무송은 우선 어험!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한다.
그리고 착 가라앉은 무게있는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검시관은 추호도 거짓이 없는 대답을 해야 된다구. 알겠지?”
무송의 복수 9장
“예, 알겠습니다. 추호도 거짓없이 대답하고 말고요”
하구는 두려운 눈길로 무송을 힐끗 바라보고는 머리를 굽실거린다.
무송과 죽은 무대가 형제라는 사실을 하구도 알고 있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하구는 참 기묘한 형제도 다 있구나 싶었다.
동생은 칠척 거구의 장사인데, 형은 삼척도 안되는 난쟁이이니 말이다.
게다가 동생은 순포도두인데, 형은 보잘 것 없는 행상이니,
여러 모로 대조적인 형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하구는 무대의 시체를 검시할 당시는 무송의 생각을 미처 못하고 있었다.
무송이 동경으로 떠난지 몇 개월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동안에 새로 순포도두가 임명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무송은 머리에서 희미해져 갔던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렇게 술집에서 맞닥뜨리다니.
더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가향이를 무송이 데리고 술을 마시고 있는 판에
고함을 지르면서 들어서고 말았으니 재수 더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하구가 두려워하는 것은 물로 가향이 따위 때문이 아니었다.
무대의 시체를 자기가 검시했기 때문이었다.
검시를 해도 제대로 했다면 두려울 게 뭐 있겠는가.
서문경으로부터 뇌물을 받고서 시신을 실제로 눈으로 보지도 않고
슬쩍 눈감아 주어버렸으니 말이다,
“자네 혹시 우리 형님이 누군지 아는가?”
무송이 묻는다.
“예, 압니다. 무대씨지요”
하구는 정신을 바짝 차려 아랫배에 힘을 주며 비교적 침착하게 대답한다.
“그럼 돌아가셨는지도 알고 있겠군”
“물론이죠”
“검시를 자네가 했는가?”
“예, 그렇습니다”
“검시관이 몇 사람 있지? 우리 현청에”
“모두 세 사람이죠”
“그럼 검시를 세 사람이 같이 했는가? 우리 형님의 시신을 말일세”
“아닙니다. 저 혼자 했습니다”
“혼자서 했다구? 왜 혼자서 했지?”
무송은 두 눈을 부릅뜨며 하구를 쏘아본다.
형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꿈틀거리며 머리를 쳐들었던 것이다.
“검시는 혼자서 해도 되고, 둘이나 셋이 같이 해도 됩니다.
그때그때 형편을 보아서 하고 있지요”
“좋아. 그건 그렇다고 해두고....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이 중요하다구.
똑똑히 듣고, 추후도 거짓이 없이 대답해야 된다구. 알겠지?”
“예”
“어험!”
크게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무송은 하구를 똑바로 쏘아보며 묻는다.
“검시를 해보니 죽음의 원인이 무었이었던가? 왜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더냐 그 말일세”
무송의 복수 10회
하구는 노회한 관원답게 취중인데도 자못 진지한 것같은 표정을 애써 지으며
시치미를 뚝 떼고 묻지도 않는 말까지 줄줄이 늘어놓는다.
“병사에 틀림 없습니다.
제 이 두 눈으로 시신을 똑똑히 살펴 보았습죠.
몸에 의심할 만한 다른 아무 상처나 흔적도 없었습니다.
만약 무슨 변사라면 반드시 몸에 그 흔적이 나타나 있는 법입니다.
가령 누구한테 맞아서 죽었다면 맞은 상처가 남아있을 것이고,
독살을 당했다면 얼굴과 몸에 독이 밴 흔적이 분명하게 나타나 보이는 법이지요.
병으로 죽은 사람과 독약 때문에 죽은 사람은 피부 색깔부터가 다르니까요.
그런데 무대씨의 시신은 아주 깨끗했지 뭡니까.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흠, 그래- 병사에 틀림 없다면 그럼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는지 모르는가?”
무송은 현저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묻는다.
그러나 하구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을 그대로 지니고서 대답한다.
상사의 눈치를 보는데 이골이 난 관원답게 아직 긴장을 풀 때가 아니라고
속으로 재빨리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까지는 잘 모르지요.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는 시신을 보고서 알아낼 수가 없는 일이거든요”
“그런가. 음-”
무송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인다.
그러자 하구는 묻지도 않는데 재빨리 지껄인다.
“상주되는 아주머니 얘기를 들으니까
평소에 가슴이 아파서 쭉 약을 복용해 왔다더군요.
그러다가 갑자기 악화되어 그만 한밤중에 돌아가셨다던데요.
돌아가신 그 이튿날 제가 검시를 했습죠”
“검시할 때 곁에 사람은 누가 있었는가?”
“상주되는 아주머니 하고 보자.....”
하구는 좀 기억을 더듬어보는 듯하더니,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한다.
“문상객들이랑 여러 사람이 있었지요. 아마 칠팔명 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요”
“음, 그랬었구만”
그렇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듯이 무송은 크게 끄덕이고는-
“그런데 왜 화장을 했을까? 묘를 쓰지 않고서.....”
형의 묘도 남아있지 않은 게 여전히 허전하고 안타까운 듯한 그런 표정을 짓는다.
“그야 매장을 할 수도 있고, 화장을 할 수도 있는 일이죠.
불교를 믿으면 화장을 할 것이고, 유교를 믿으면 매장을 해서 묘를 쓸 것이고... 안 그렇습니까?”
“그야 그렇지”
이제 무송은 더 뭐라고 물어볼 말도, 할말도 없었다.
“자, 한잔 들게”
그리고 자기도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쭉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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