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금병매(金甁梅)

금병매 (19) 제4장 무송의 복수 <1~5회>

오늘의 쉼터 2014. 6. 23. 20:09

 

금병매 (19)

 

 

제4장 무송의 복수 1회 

 

 

 경양강(景陽岡) 고갯마루에 올라선 말은 히힝 히히힝, 코를 불면서 멈추어 섰다.

 

무송은 말 위에서 가슴을 활짝 펴 커다랗게 숨을 쉬며 멀리 산 아래 펼쳐쳐 있는

 

청하 성내를 바라보았다.

쏟아져 내리는 초여름의 햇살속에 성내는 고즈너기 가라앉아 보였다.

 

산야(山野)는 바야흐로 눈부신 신록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현지사의 분부를 받아 지난해 늦은 가을에 동경으로 떠났다가 이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처음 가본 동경에 한동안 머물다가 반년이 넘어서 청하현으로

돌아오게 되니 무송은 꽤나 감개가 무량했다.

갈 때도 그랬지만, 귀로에도 산적의 패거리를 만나 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넘긴 터이라

더욱 감회가 깊었다.

무송은 훌떡 말에서 뛰어내렸다.

길가에 있는 바위에다가 좍-오줌 줄기를 내뽑았다.

그리고 잠시 앉아 이마에 내밴 땀을 닦으며 사방 경개(景槪)를 휘둘러보고,

아득히 펼쳐진 광활한 들녘과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성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우리 형님은 별고 없이 잘 계시는지,

영아도 잘 있는지, 영아는 이제 열세살이 되었으니 더 숙성해졌겠지,

여우같은 새 형수도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는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무송은 어서 가서 만나봐야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다시 말 위에 성큼 올라앉았다.

말 고삐를 당기면서 경양강 고개를 건들건들 내려가던 무송은 저만큼 앞에 마치

황소가 엎드려 있는 듯한 넓적하고 미끈둥한 검은 바위가 눈에 띄자,

“맞어. 바로 저 바위였지”

혼자 중얼거리면서 빙그레 웃음을 떠올렸다.

지난해 가을의 일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 바위에 누워서 쉬다가 이마에 흰 털이 돋은 식인(食人)호랑이를 만나

맨주먹으로 때려잡았던 그 일 말이다.

그 일 때문에 뜻밖에도 청하현의 순포도두가 되었고, 또 형 무대를 만났으며,

난생 처음으로 이번에 이렇게 동경까지 갔다가 돌아오게 된 것이 아닌가.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란 정말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또 어떤 운명이 자기 앞에 가로놓여 있는 것인지,

무송은 궁금하기도 했다.

이번에 현지사의 심부름을 무사히 잘 해내고 돌아왔으니

어쩌면 더 큰 감투를 쓰게 될지도 모르며,

그렇게 되면 앞길이 더욱 훤하게 열리는 셈이 아닌가.

무송은 가슴이 마냥 뿌듯하게 부풀어오르는 듯해서

가슴을 활짝 펴며 커다랗게 숨을 들이쉬었다.

성내에 당도한 무송은 곧바로 형네 집부터 찾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현청 쪽으로 몰았다.

현지사를 먼저 만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보고부터 하는 게 순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송의 복수 2회 

 

 

 

 무송을 맞이한 현지사는 무척 반가워하면서 무사히 용무를 마치고

 

돌아온 데 대해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주안상을 차려오게 해서 손수 술을 따라주기까지 하며 노고를 치하했다.

그리고 지사는 금화 다섯 개를 상급(賞給)으로 건네주면서 말했다.

“먼 길에 무척 지쳤을 터이니 당분간 편히 쉬도록 하게.

그러면 내가 다시 적당한 자리에 앉혀줄 터이니...”

“예, 그러지요”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무송의 얼굴에 한 가닥 석연치 않은 빛이 떠오른다.

지사가 그 기색을 알아차리고 빙그레 웃는다.

“순포도두는 자네가 없는 동안에 딴사람을 임명했거든.

 순포도두보다 더 나은 자리를 마련해줄 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푹 쉬고 있으라니까”

“예, 예, 잘 알겠습니다”

그제야 무송은 표정이 활짝 밝아진다.

그날 해질 무렵에 무송은 형 무대네 집을 찾아갔다.

현청에서 나와 곧바로 형네 집으로 갈까 했으나,

형이 행상을 나가고 없을 것 같아서 해질녘에 찾아간 것이다.

“뉘신지요”

안에서 낯선 아낙네가 얼굴을 내밀었다. 중년부인이었다.

무송은 어찌된 일인가 싶었다.

혹시 자기가 없는 동안에 새형수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형이 다른 여자를 들어앉힌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나 무송인데요. 형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나요?”

“형님이라뇨?”

아낙네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여기가 무대씨 집 아닙니까?”

“아닌데요”

“아, 그래요. 그럼 무대씨는 어디로 이사를 갔나요?”

“난쟁이 행상 말이죠?”

“예”

“죽었다던데요”

“뭐라구요? 죽다니요, 언제?”

무송의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만다.

“아마 한달보름가량 됐을거예요. 우리가 이사 오기 조금 전에 죽었다니까”

“왜 죽었는데요?”

“잘 모르겠어요. 어디가 아파서 죽은 모양이에요”

“그럼 남은 식구들은 어디로 갔나요?”

“우린 새로 이사를 와서 잘 몰라요.

 이웃 찻집 할머니가 잘 알거예요. 거기가서 물어보세요”

아낙네는 문을 닫아버린다.

무송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형님이 죽다니, 천만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형님은 원래 아무 병도 없을 뿐 아니라,

한겨울에도 감기 한번 드는 일이 없는 그런 강건한 몸인데,

아파서 죽다니.....

어떻게 된 영문인가 싶어 무송은 찻집으로 왕파를 찾아갔다.

 

 

무송의 복수 3회 

 

 

 

 해질 무렵이어서 찻집에는 손님이 꽤 앉아 있었다.

 

무송이 들어서자 모두 바라보았고, 몇몇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기도 했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아 일약 순포도두가 되었던 칠척 거구의 무송이 오랫동안

 

안 보이다가 다시 모습을 나타내어 반갑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그런 표정들이었다.

 

 

주방에서 차판에다가 찻잔을 담아 들고 나오던 왕파는 무송을 보자 질겁을 하듯 놀라며

그만 찻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쨍그랑! 찻잔이 박살이 났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쩌나”

왕파는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깨어진 찻잔 조각을 차판에다가 주워 담는다.

“할머니, 왜 그렇게 놀라시나요?”

무송은 빙그레 웃으며 다가간다.

“나요?”

왕파는 재빨리 늙은 너구리 기질을 발휘하여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서 눈웃음을 치며 지껄인다.

“순포도두 나리께서 오래간만에 우리 집에 오시니까 너무 반가워서 그만...”

“허허허... 난 이제 순포도두가 아니라오. 그동안 동경에 갔다 오느라고 못 들렀지 뭡니까”

“소식은 잘 듣고 있었지요. 언제 돌아오셨어요?”

“오늘 돌아왔어요”

무송과 왕파는 잘 아는 사이였다.

무송이 한동안 형집에 기거할 때 바로 이웃에 있는 찻집이어서

곧잘 들러 차를 마셨던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무송의 말에 왕파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러나 늙은 너구리답게 재빨리 무송을 안쪽으로 데려가 방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얼른 주방으로 되돌아가서 차를 한 잔 받쳐 들고 온다.

“자, 오래간만인데 차라도 한 잔 드세요. 이건 내가 그냥 대접하는 거니까...”

찻잔을 탁자 위에 놓고서 왕파는 무송이 묻기 전에 재빨리 자기가 먼저 말을 꺼낸다.

“형님이 돌아가셔서 얼마나 상심이 되겠어요”

“우리 형님이 병으로 돌아가셨다는게 사실입니까?”

“사실이고말고요. 평소에 가슴이 아파서 약을 먹었는데,

어느 날 밤 갑자기 병이 악화되어 그만 돌아가셨지 뭐예요.

한밤중에 내가 자고 있는데 글쎄, 색시가 와서 문을 쾅쾅 두들기며 깨우지 않겠어요.

그래서 같이 가 봤더니 숨이 넘어갔더라니까요”

무송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한 모금 쭉 마시고 나서 가만히 찻잔을 놓으며 고개를 갸웃이 기울인다.

“평소에 우리 형님은 아픈 데가 없었는데.....

가슴이 아파서 약을 먹었다는 게 사실인가요?”


 

무송의 복수 4회 

 

 

 

 “나는 잘 모르는데 색시가 그러잖아요.

 

평소에 가슴이 아파서 약을 먹어왔다고.... 나리의 형님은 늘 행상을 다니느라 바빠서

 

우리 집에 차를 마시러 온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에 나는 형님에 대해서 잘 모른다구요”

왕파의 말에 무송은 더 추궁하듯 물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없는 동안에 병이 생겼을 수도 있겠지 하고 그 일은 반신반의하면서 넘겼다.

“내 조카와 형수는 어디로 이사를 갔나요?”

“글쎄요.....확실한 건 잘.....”

“아니, 이웃에서 그것도 모른단 말인가요?

우리 형수하고는 가까이 지낸 사이 같은데.

우리 형님이 돌아가시던 날 밤 한밤중에 형수가 할머니를 찾아온 것만 봐도....안 그래요?

그런데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모르다니 말이 돼요?”

왕파는 아랫도리가 바르르 떨린다.

그러나 늙은 너구리답게 얼굴에 떠오르려는 당황하는 기색을 싹 지우고는

오히려 우습다는 듯이 지껄인다.

“이웃이니까 같은 여자끼리 모를수야 있겠어요.

그렇지만 좀 생각해 보세요.

나이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기나 해요?

나는 이미 육십이 넘었는데, 나리의 형수는 이제 겨우 스무 두어살밖에 안됐잖아요.

그런 새파란 색시하고 이렇게 늙은 할미하고 가까이 지낼 수가 있겠어요? 안 그래요?”

“그렇다고 이웃에 살면서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도 모른단 말인가요?

떠날 때 인사를 하러 오지도 않았나요?”

“혼자서 차나 팔고 있는 나 같은 늙은이한테 무엇하러 인사를 하러 오겠어요. 안 왔더라구요”

“음”

무송은 침통한 표정으로 바뀌며 찻잔에 남은 차를 훌쩍 단숨에 마셔 버린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형수는 어디로 갔거나 말거나 상관없다구요.

어차피 딴 데로 개가를 할 여자니까요.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는데, 그 여자가 혼자 살 것 같애요?

 어림도 없어요.

어쩌면 속으로 우리 형님 돌아가신 것을 기뻐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 여자라구요”

“하하하.....”

왕파는 그만 웃음이 나와 버린다. 속으로 참 재미있구나 싶은 것이다.

부지중에 형수에 대해서 너무 했다 싶어 무송도 좀 쑥스럽게 웃음을 짓는다.

“조카가 불쌍해서 그런다구요. 조카를 찾고 싶단 말입니다”

“글쎄요.....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계집애가 참 귀엽고 영리하기도 했는데.....”

무송은 더 뭐라고 캐 물을 건덕지가 없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앉아 있다가 왕파가 가게 쪽으로 가보려는 듯

방을 나가려 하자 다시 불쑥 입을 연다.

“잠깐만 할머니, 한가지만 더 물어 보겠는데요.

우리 형님 묘는 어디다가 썼는지 그것은 알겠지요?”


 

무송의 복수 5회 

 

 

 

 왕파는 속으로 꽤나 당황했다.

 

묘를 어디다가 썼는지 그것도 모른다고 대답하려다가 너무 그러면 무송이

 

벌컥 화라도 낼까 두려워서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한다.

“묘를 쓴게 아니라, 화장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직접 나리의 형수한테 들은게 아니라, 이웃 사람들이 그러더라구요”

“그게 정말인가요?”

무송의 얼굴에 거의 절망적인 그런 표정이 떠오른다.

“내 눈으로 직접 보진 않았지만, 이웃에서 그러니까 정말 아니겠어요”

“화장을 했으면 뼈라도 남아있을텐데.....”

“뼈는 갈아서 재를 만들어 강물에 뿌렸겠지요. 화장을 하면 대개 모두 그렇게 하잖아요”

“뭐라구요?”

무송은 마침내 분통이 터져서 못 참겠는듯 벌컥 고함을 내지르고 만다.

왕파는 놀라 목을 찔끔 움츠린다.

그러나 늙은 너구리답게 재빨리 온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떠올리며 호들갑스럽게 지껄인다.

“아이구 깜짝이야. 나리도 참, 이 늙은 할미한테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렇게 화를 내시유?

물으시길래 이웃 사람들에게 들은대로 대답해 드렸을뿐인데...”

무송은 할말이 없어 좀 머쓱해진다.

그러나 심사는 여전히 뒤틀린 채 풀어지질 않는다.

“나리, 생각을 크게 가지시라구요. 사람이 나면 결국은 누구나 다 죽는거 아닙니까,

조금 일찍 죽고 늦게 죽는 것 뿐이지요. 운명이라구요.

나리가 없으실 때 형님이 아파서 돌아가신 것도 다 운명인걸 어떻게 합니까.

나리의 비통한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지요. 그러나 기왕에 돌아가신분,

슬퍼한다고 살아나기라도 합니까? 다 부질없는 일이지요. 잊으시라구요.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지 뭡니까. 안 그래요? 나리, 아무쪼록 잊도록 하세요”

“듣기 싫어요!”

자기도 모르게 무송은 다시 벌컥 고함을 내지르며 그만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친다.

그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주먹 힘이 어찌나 세었던지 한쪽 다리가 우지끈 꺽어지며

그만 탁자가 삐딱하게 기울어지고 말았다.

“어머나, 우리 탁자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병신을 만들어 놓지요?

아이고 별일도 다 보겠네”

왕파는 놀라 눈을 굴렁거리며 내뱉는다.

그러나 더 악다구니를 쓰지는 않는다.

지은 죄가 엄청나고 보니, 이 악정도는 약과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뚜벅뚜벅 걸어서 방을 나가던 무송이 뒤돌아보며 불쑥 말을 던진다.

“미안하오. 나중에 내가 탁자를 하나 사주겠소.

지금은 공연히 화가 나서 못견디겠으니 할머니, 이해하시구려”

“나중에 꼭 탁자 사줘야 돼요. 하하하.....”

그만 왕파는 웃음이 나와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