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실명대협

제58장 밝혀진 眞面目

오늘의 쉼터 2014. 6. 22. 19:40

 

 

 

제58장 밝혀진 眞面目

 

 

  
주설루가 손을 들고 휘젓자 선반 위에 있던 푸른 옥병 하나가 섭물진기(攝物眞氣)에 의해 

사뿐히 날아들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그것은 합궁만락산(合宮萬樂散)이란 것으로 혈수광마웅이 주설루에게 즐겨 쓰던 최음약이었다.
 
 
그것은 몸을 불덩어리보다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약이었다.
 
 
남자는 여체를 그립게 하고, 여자에게는 남자를 그립게 하는 약이었다.
 
합궁만락산이 능설비의 얼굴에 뿌려졌다.
 
 
능설비는 숨을 멈추려 했으나, 

주설루는 그것을 아는지 왼손을 휘저어 가루약이 진기에 따라 

저절로 그의 허파 속으로 들어가게 했다.
 
"으으음!"
 
능설비는 달콤한 내음을 맡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정신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는 흐려지는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써 눈오는 들판을 기억하려 했다.
 
 
천지간을 뒤덮는 흰 눈꽃송이와 몸을 휩싸는 차가운 바람.
 
 
그러나 그 찬바람이 갑자기 열풍(熱風)이 될 줄이야.
 
불바람이 몸을휘감았다.
 
 
뜨거운 숨결이 얼굴을 핥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주설루, 그녀는 어느틈엔가 금색면구를 벗어던지고 

본래의 얼굴을 능설비의 뺨에다가 부벼대고 있는 것이었다.
 
 
정향(丁香) 같은 입술이 뾰족히 나와 능설비의 뺨에 닿는다.
 
"나, 나를 흐으응!"
 
주설루는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몸을 교태롭게 틀었다.
 
 
그녀는 한 마리 꽃뱀이 되었다.
 
 
혈수광마웅은 그녀에게 너무도 많은 방중술법(房中術法)을 일러 주었다.
 
 
그녀는 몸뚱이를 너무도 잘 사용했다.
 
 
가슴을 출렁이게 하고, 허벅지를 꼬는 동작 하나하나가 방중술법에 따른 것이었다.
 
능설비는 자아최면공(自我催眠功)을 깨뜨리고 말았다.
 
 
그는 곧 현실에 빠져들었다.
 
'으으, 몸이 탄다!'
 
그는 주설루의몸을 부둥켜 안았다.
 
 
꽃뱀은 그의 몸을 칭칭 동여매고,
 
"흐흐윽."
 
격정에 찬 숨소리가 시작되었다.
 
그에 따라 능설비의 몸은 점점 더 격렬히 움직였다.
 
 
최후(最後)의 환락경(歡樂境) 능설비는 이성을 뇌리에 담고 있지 못했다.
 
 
그는 색에 굶주린 한 마리 숫캐에 지나지 않았다.
 
최음제의 힘은너무도 강했다.
 
 
그는 주설루의 몸을 탐하기에 바빴다.
 
 
격정에 찬 뜨거운 숨결이 교차되고, 그것은 더욱 더 뜨거워졌다.
 
능설비는 주설루의 등판에 손가락 자국을 남기며 화로의 더운 김보다 뜨거운 호흡을 토했다.
 
"허어억!"
 
그의 숨결이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지는 순간, 그의 고막을 때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색정(色情)을 단해(丹海)에서 빼내려면 구마루의 술법 중 화운무영심법(化雲無影心法)이 

있어야 한답니다."
 
누구의 목소리일까?
 
그것은 바로 만리총관의 목소리였다.
 
"만화총관 대신 전음을 보내는 것입니다."
 
" !"
 
능설비는 문득정신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어, 어서!"
 
주설루의 뜨거운 목소리가 그의 몸을 다시 격동하게 했다.
 
"으윽!"
 
능설비는 절정의 순간을 향해 돌진해 갔다.
 
 
모든 것을 다 쏟아내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주설루의 몸 가운데에 그가 취해야 할 무엇인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몸 안의 기름이 펄펄 끓어 넘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것을 다 토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쾌락을 찾아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 색정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그와 주설루가하나로 합해지는데,
 
"제발!"
 
만리총관의 간절한 목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화운무영심법으로 이겨내십시오. 원정(元精)을 쏟으면 죽습니다."
 
그는 흐느끼고있었다.
 
 
그는 문 뒤에 있었다.
 
 
문은 한번 닫히면 안에서 기관으로 열어야만 열리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들어서지 못하는 것이었다.
 
"제발 이겨내야만 합니다."
 
그가 또 한번 하소연할 때, 문득 능설비는 어떤 순간을 기억하게 되었다.
 
호수같이 서늘한 눈빛의 한 여인이 그를 노려보고 있다.
 
 
머리를 파랗게 깍은 여인, 비구니가 된 냉월(冷月). 그녀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능설비를 향해 '사악(邪惡)한 영혼이로구나!' 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가을 무서리보다도 차가웠다.
 
" !"
 
능설비는 아주갑자기 맑은 정신을 되찾았다.
 
 
냉월의 눈빛이 준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그것은 최음약의 기운을 모조리 녹여버리는 것이었다.
 
능설비의 사타구니 사이에는 주설루가 눈부신 나신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능설비를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식어버리는 거지?"
 
그녀는 절정 직전에 능설비의 동작이 정지되는 데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으냐?"
 
능설비가 말하자, 주설루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능설비의 맥문을 낚아챘다.
 
"호호, 너는 기회를 잃었다. 나를 죽일 기회를!"
 
그녀가 까르르웃자,
 
"그 이유는 너와는 다른 한 여인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얼굴이 나를 깨우친 것이다."
 
능설비는 차갑게 말한 다음 왼손을 쳐들었다.
 
"그 계집이 누구지?"
 
주설루는 능설비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냉월이다. 지금은 결명이란 법명을 받은 비구니이고."
 
"냉월? 화빙염 말이냐?"
 
주설루가 빤히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
 
"호호홋, 그 천한 계집이 아직 살아있단 말이냐?"
 
주설루는 아주크게 웃었다.
 
 
날카롭고 표독한 웃음소리, 그것이 갑자기 놀람의 외침으로 화했다.
 
"흐윽, 손이?"
 
주설루의 눈동자에는 사람의 모습이 하나 담겨 있었다.
 
 
그녀의 배를 깔고 있는 미남자.
 
능설비는 왼손을 내리치고 있었다.
 
 
그의 왼손은 찬란한 금빛이었다.
 
 
금빛의 손이 빠르게 내리쳐지며 주설루의 눈이 더욱 더 확대되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크으윽!"
 
주설루는 눈을뜬 채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미간(眉間)에 작은 금인(金印) 하나가 아주 선명히 찍혀 있었다.
 
 
능설비가 시전해낸 광음공공수(光陰空空手)는 어떠한 마공도 능가하는 절기였다.
 
주설루의 점혈이 통하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은 너를 좋아했었다."
 
능설비는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는 피를 쏟으며 움직였다.
 
"너는 외롭게 죽은 것은 아니다. 너의 묘를 세워 줄 사형(師兄)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복수도 해 줄."
 
그는 벌거벗은채로 죽어 있는 주설루를 안았다.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죽은 자의 눈빛, 거기에는 살아 생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담겨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주설루는 능설비의 모습을 망막에 담은 채 저승으로 떠난 사람이 된 것이다.
 
문 밖에는 만화총관이 만리총관의 등에 업혀 있었다.
 
 
두 사람은 소리를 듣고 안에서 벌어진 일을 짐작하고 있었다.
 
둘 모두 쫓기는 기색이었다.
 
"공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일단 기관장치를 움직여 막기는 했습니다만, 

나갈 길이 막혔다 할 수 있습니다. 

밖에 있는 자들은 공자가 구마령주라고 정체를 밝히더라도 덤벼들 정도로 

혈수광마웅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자들입니다."
 
둘은 능설비가이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러기에 능설비가 주설루의 시신을 안고 나와도 놀라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혈수광마웅 그놈에게 나의 정체를 발각당해서는 아니 되오."
 
능설비는 담담한 투로 말했다.
 
"운기조식(運氣調息)으로 내상을 치료한 다음 힘으로 뚫고나가는 수밖에 없소. 

두 분은 나를 위해 호법이 되어 주시오."


능설비가 말하자,
 
"빠져나가기만 하는 것이라면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만화총관이 간신히 입을 열며 말을 했다.
 
"간단한 방법이 있다고?"
 
능설비가 의아한 듯 바라보자 만화총관이 설명을 했다.
 
"금조를 잊으셨습니까? 금조가 바로 이 안에 있습니다. 

공자라면 금조를 부리는 재간을 알고 계실 것이니, 

나가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화총관은 능설비와 마찬가지로 몸이 반쯤 으스러진 상태에서도 웃을 수 있는 철석간장이었다.
 
 
이미 사선(死線)을 수없이 넘어본 사람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그리 큰 것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기느냐, 아니면 지느냐 하는 것이리라.
 
숭산(嵩山).
 
그 중의 태실봉(太室峰)은 소실봉(小室峰)보다 높으나 지명도에 있어서는 소실봉만 못하다.
 
 
이유는 소림사가 소실봉에 있기 때문이었다.
 
태실봉 위, 안색이 아주 창백한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그는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죽립 하나가 걸려 있었다.
 
능설비. 그는 두 시진 전 금조를 타고 태실봉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노을의 핏빛마저도 싫을 때가 있다니."
 
능설비가 중얼거릴 때,
 
"아아, 이 일을 어이합니까?"
 
여인 하나가 깊은 탄식과 함께 능설비의 옆으로 불쑥 나타났다.
 
후란(侯蘭). 그녀 역시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아주 아름다웠다.
 
 
마성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능설비가 전수한 광음공공진결(光陰空空眞訣) 덕분이었다.
 
"왜?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지?"
 
능설비가 묻자,
 
"아아, 상공 때문입니다."
 
후란의 아름다운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나 때문이라고?"
 
능설비가 알 수 없다는 듯 후란을 바라보자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이 되어 말했다.
 
"너무 수척해지셨습니다. 

칠주야(七晝夜) 동안 폐관하시어 운기행공만 한다면 모든 상처가 나으실 텐데 

한 시진도 쉬실 짬이 없으니 

아아, 이럴 때 혈수광마웅이 닥치면 어떡하겠습니까?"
 
"핫핫, 나 때문이라면 걱정마라."
 
능설비는 웃다가 손을 내저었다.
 
 
무형의 강기가 뻗어나가며 돌연 파팍!
 
 
십 장 밖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놀랍게도 거석 하나가 반으로 쪼개졌다.
 
 
반은 열에 의해 타고 반은 얼어버린 듯 서릿발이 서려 있었다.
 
 
그 경계선은 붓으로 쭉 그은 듯 또렸했다.
 
"대, 대단하십니다!"
 
후란은 경이로운 듯 무릎을 땅에 댔다.
 
"하핫, 이제 안심이 되느냐?"
 
능설비가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묻자,
 
"예!"
 
후란은 수줍은볼우물 두 개를 만들었다.
 
'나는 이분을 바로 곁에서 모시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앞에 무슨 불행이 있다 해도 나는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사이엔가그녀의 가슴 속은 능설비의 그림자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후란은 난초가꽃잎을 떨구듯 고개를 살포시 떨구며 말했다.
 
"쌍노총관(雙老總官)에게는 거처를 잘 마련해 주었습니다."
 
"잘했다."
 
"그런데 주설루 낭자의 시신은 옥관에 넣어 잘 매장했다고요?"
 
"흠, 언제고 시간이 나면 관을 천기곡(天機谷)으로 옮겨야 한다."
 
능설비는 서늘한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후란이 다소곳이 대답했다.
 
"물론입지요."
 
"외부에서 온 소식 중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냐?"
 
"흥미있는 일이 속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상공의 계략이 뜻하신 바 이상으로 잘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후란은 개방 사람들이 모아 전해온 소식을 능설비에게 낱낱이 말하기 시작했다.
 
첫째, 포달랍궁(包達拉宮)과 소뇌음사(小雷音寺)의 양패구상(兩敗俱傷)이었다.
 
 
그 일은 마도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일이었다.
 
 
일이 그렇게 된 이유는 일호인 후란이 포달랍 궁주 모탁법(牟卓法)의 행세를 하고 

소뇌음사의 탁탁라마(卓托喇麻)를 만인이 보는 앞에서 살해한 때문이었다.
 
둘째, 산동흑마궁(山東黑魔宮)이 봉궁(封宮)했다는 소식이었다.
 
셋째, 하루 사이 십오 개의 문파가 마맹에서 탈퇴했고,
 
넷째, 쏟아져 나왔던 사자(使者)들이 거의 다 제거되었다는 것이었다.
 
후란은 웃으며이야기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가장 흥미있는 일은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능설비를 빤히 바라봤다.
 
 
취해버릴 듯한 눈빛이었다.
 
능설비는 애써그 눈빛을 피했다.
 
"무슨 일이냐? 혈수광마웅의 거처를 알기라도 했느냐?"
 
"아닙니다."
 
"그럼?"
 
"호호, 새로운 무림동의맹주(武林同義盟主)가 곧 탄생(誕生)될 듯합니다."
 
"뭐라고? 어느 누가 새로운 무림동의맹주가 된다더냐?"
 
그것은 정말 놀라운 소식이었다.
 
능설비가 굳은표정으로 후란을 바라보자,
 
"호호, 방금 전 천자(天子)의 명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부마(駙馬)께서 천외신궁을 단신으로 유린하고 개선했다는 소식에 

기뻐하시다가 각파의 명숙(名宿)들에게 친서(親書)를 보내 부마를 

무림맹주로 삼게 하실 작정이라고 무상인마가 슬쩍 귀뜀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신이 난 듯 소상하게 귀뜀해 주었다.
 
"복노인(福老人)의 말이 사실인 듯하냐?"
 
"그야 물론입지요. 

이제 상공은 마도맹주에 이어 정파맹주가 되시는 고금유일의 행운아가 되신 겁니다. 호홋!"
 
후란이 환하게웃자,
 
"웃을 일이 아니다."
 
능설비가 눈쌀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리고는 침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복노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다."
 
"큰일이라뇨? 백도맹주가 되시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그럼 어이해?"
 
후란이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자,
 
"내가 맹주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능설비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후란은 귀를 세우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결국은 네가 짐작하는 이유나 같은 것이지. 

즉 나의 과거가 너무도 피비린내 나는 것이기 때문이지."
 
"방금 아무 것도 두렵지 않으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의 정체가 밝혀져 문책받는 것은 두렵지 않다. 

다만 백도맹이 부서졌다가 세워져 또다시 무너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 !"
 
후란이 말없이바라보자 능설비는 공허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고 나를 밝힐 작정이다."
 
"설, 설마?"
 
후란은 불안한예감에 한 차례 몸을 떨었다.
 
그러나 능설비는 이미 결심이 굳어진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후훗, 미리 각오하고 있던 바다. 

본래 혈수광마웅을 죽이고 밝힐 작정이었는데 그것을 앞당겨야겠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너무 높이 평가해 백도맹주로 추대하게 버려둘 수는 없는 것이다."
 
"지, 지금 정체를 밝히시면 큰 혼란이 일 것입니다. 

특히 능공자를 무성(武聖)으로 숭배하는 일천탕마금강대는 심한 좌절을 맛볼 것입니다."
 
후란이 간곡한어조로 만류하자,
 
"물론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을 것이다. 그일은 걱정 마라."
 
능설비는 말과함께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후란의 눈빛이격정의 떨림을 보였다.
 
'대단하신 분 대의혼(大義魂)의 화신이시다!'
 
그녀는 능설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함몰하는 해가마지막 열기를 뿜듯 서천은 붉은 노을로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산중, 무사들이 열 겹 스무 겹 엄중히 보호하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골짜기 안에 자리하고 있는 한 채의 석옥이었다.
 
석옥 안에서는지금 두 명의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복아(福兒), 수가 왜 이리 약해졌느냐?"
 
기도가 범상치않은 풍모의 노인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헤헤, 최근 다시 검(劍)을 들어, 바둑솜씨가 역(逆)으로 무디어진 듯합니다. 

해량하여 주십시오."
 
"무상인마 시절로 돌아갔단 말이냐?"
 
"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핫핫, 너희 강호인(江湖人)들이 부럽구나."
 
크게 웃는 노인, 그는 연경(燕京)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숨어살고 있는 대명(大明)의 천자였다.
 
 
그와 바둑을 두는 사람은 무상인마였다.
 
 
두 사람이 담화하며 바둑을 두고 있을 때, 석옥의 앞으로 한 사람이 급히 다가왔다.
 
"부마께서 오십니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말하자,
 
"오오, 나의 자랑스러운 부마가 단신(單身)으로 천외신궁을 유린한 다음 

수리를 타고 홀연히 나타났다더니, 

이제야 장인(丈人)을 찾는군!"
 
천자는 얼른 밖으로 나왔다.
 
 
그의 시선에 죽립 쓴 사람 하나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태실봉에서 후란의 영접을 받았던 능설비였다.
 
 
그가 다가오자 소식을 알린 사람은 얼른 물러났다.
 
근처는 매우 조용했다.
 
능설비는 하루종일 죽립을 쓰고 사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는 천자가 버선발로 마중나온 것을 보고는 부복을 했다.
 
"폐하, 취침이 늦으십니다."
 
"헛헛, 자네가 지어 준 약을 먹고 원기왕성해진 탓이네. 

게다가 소림승인(少林僧人)들이 추궁과혈(推宮過穴)이라는 것을 해 줘서 

어제부터는 흑발(黑髮)이 다시 날릴 정도로 건강하다네."
 
천자는 만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능설비를 일으키려 했다.
 
 
한데 능설비는 천근추(千斤鎚)를 써서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간곡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무슨 말인가? 안에 들어가 하세."
 
천자가 의아한표정을 짓자 능설비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땅에 대었다.
 
"이곳에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부디 통촉해 주십시오."
 
"그래, 무슨 일인가?"
 
천자도 더 이상 만류하지 못하고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능설비는 잠시사이를 두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흠, 결국."
 
천자는 다소 침중한 표정이 되더니 말꼬리를 흐렸다.
 
'결국이라니 그럼 벌써 알고 계셨단 말인가?'
 
능설비가 다소놀랄 때,
 
"복아, 귀찮은 일인 듯하니 네가 대신 하거라."
 
천자는 무상인마를 보고 말한 다음 걸음을 옮겼다.
 
"폐, 폐하! 제가 드릴 말은 중대한 것입니다."
 
능설비가 황망히 고개를 들어 말하자,
 
"헤헤, 저쪽으로 가십시다."
 
무상인마가 다가와 능설비의 팔소매를 끌며 작은 소리로 권했다.
 
"아아, 여기서 꼭 해야 할 말이 있소."
 
능설비가 심각히 말하자,
 
"그 말이 그 말일 것이오, 공자."
 
무상인마는 서쪽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능설비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무상인마가 안내한 장소는 토굴(土窟)이었다.
 
 
그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로공주가 기거하던 곳이었다.
 
 
소로공주는 현재 다른 곳에 있었다.
 
 
능설비가 무림고수들과 싸우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던 

소로공주는 시녀들과 더불어 강남(江南)의 모처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천자가 함께 가지 않은 이유는 완전히 달랐다.
 
 
천자는 '부마가 하는 싸움은 짐을 위한 싸움이도다. 

짐은 부마의 진중(陣中)에 있겠다.'라고 말하며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이 

위험하나 의풍(義風)이 일고 풍운이 이는 곳에 남아 있기를 고집했던 것이다.
 
 
그는 평생을 그렇듯 초연하게 산 사람이었다.
 
토굴 안에는 능설비를 놀라게 하는 것이 많았다.
 
그림(畵)과 목각(木刻), 그리고 상당수의 자수가 보관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소로공주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만든 작품들이었는데, 

그 대상은 모두 능설비의 얼굴이었다.
 
 
웃는 모습, 손으로 매화(梅花)를 따는 모습, 

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 등이 매우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이것이 다 뭐요?"
 
능설비가 흠칫놀라워하자,
 
"부마가 바로 구마령주의 화신(化身)이라는 것이 밝혀진 곳은 바로 이곳이었소."
 
무상인마가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했다.
 
순간 능설비의머리카락이 빳빳해졌다.
 
'무상인마가 그것을 알다니!'
 
그의 눈빛이 떨림을 보였다.
 
"천자도 다 알고 계시오. 물론 공주도 알고, 노복도 알고 있는 일이오."
 
무상인마는 그렇게 말하며 방 한 구석을 가리켰다.
 
 
한 사람이 죽은 듯 누워 자고 있었다.
 
무당파(武當派) 삼원신검, 그는 무당파의 장문인 대리 자격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죽은 것은 아니오. 잠시 혼절했을 뿐이오."
 
무상인마가 설명을 하자 능설비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어, 어찌된 일이오?"
 
"삼원신검은 오래 전 구백대항마복룡진에 끼었던 사람이오. 

그는 부마의 얼굴을 잘알고 있었소."
 
" !"
 
"그가 공주께 필요한 물건을 전하기 위해 여기 왔다가 

그만 부마가 바로 구마령주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오. 

공주는 너무 놀라 혼절하셨소. 

그러나 그분은 곧 이성을 되찾으셨고,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오. 

바로 사흘 전의 일이었고 삼원신검을 점혈한 사람은 노복이외다."
 
" !"
 
능설비는 안색을 굳힌 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무상인마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는 없는 것이나 

이 세상에서 천자의 명으로 되지 않는 것 또한 없는 것이오."
 
"나의 과거를 묻겠단 말이오?"
 
능설비도 냉정을 되찾았다.
 
"보시오. 부마가 후란 여협의 말을 듣고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품에 넣어 지니고 있었소."
 
무상인마는 말과 함께 품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냈다.
 
하나는 금패였다.
 
거기엔 '무림맹주령(武林盟主令)'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새로 일어난 백도계의 명숙들이 중지를 모아 만든 것이었다.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물건이기도 했다.
 
백도맹주령과 함께 꺼내진 물건은 얇은 서찰이었다.
 
 
그것은 소로공주가 만삭의 배를 안고 떠나기 이전에 적은 것이었다.
 
능설비가 받아펼쳐보자 거기엔 다음과 같은 글이 총총이 적혀 있었다.
 
<개에게 시집가면 개가 되고, 마(魔)에게 시집가면 마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공자의 여인, 공자가 어떤 분이건 저는 상관없습니다. 

공자가 마도에서 정도로 돌아섰다는 것을 오히려 긍지로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마음인 이상 천하 모든 사람 또한 공자를 용서할 것입니다. 

부디 맹주가 되시어 난을 평정해 주십시오!>
 
소로공주는 작은 글씨로 정성을 다해 서찰을 작성했다.
 
 
그녀가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 !"
 
능설비는 한동안 서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천자께서는 구마령주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시오. 

그분께서는 부마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는 것만 즐거운 일로 받아들이고 계시다오."
 
무상인마는 말과 함께 백도맹주령을 능설비 앞으로 내밀었다.
 
"받을 수 없소."
 
능설비는 고개를 저어 사양했다.
 
"받으셔야 하오. 

실명대협 능공자에게 드리는 전 백도의 정성이기 때문이오. 

이일은 황가(皇家)의 입김과는 거리가 먼 일이오. 

그것만은 분명하오. 무림인들은 본시 천자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니오? 

천자의 명으로 인해 부마이신 공자께 맹주령이 가게 된 것은 절대 아니오."
 
"아니 되오."
 
무상인마가 간곡하게 설득을 했지만 능설비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으음, 심각하군.'
 
무상인마는 내민 손을 어쩌지 못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능설비가 두 번 거절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담스러워서 받지 않는 것은 아니오."
 
"그, 그럼?"
 
"혈수광마웅에게 또다시 역이용당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요."
 
" !"
 
무상인마가 침중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가 죽기 전에 내가 맹주가 되면 새롭게 일어난 백도의 맹(盟)은 

나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여지없이 무너질 것이오."
 
"으음!"
 
무상인마는 능설비의 의중을 듣고 나자 침음성을 발했다.
 
"그렇게 되면 안 되오. 아시겠소?"
 
능설비의 눈빛은 맑았다.
 
무상인마가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맹주가 되실 분은 부마뿐이오."
 
"핫핫, 맹주가 꼭 필요한 일은 아니오."
 
능설비가 호쾌하게 웃으며 말하자,
 
"예에?"
 
무상인마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두머리가 생기면 우두머리의 죽음이나 변고(變故)로 인해 모든 것이 

뿌리째 흔들리기 쉽지 않소? 

백도에 필요한 것은 전 고수의 의기(義氣)와 싸움 잘하는 실명인(失名人) 하나뿐이지 

맹주는 아닌 것이오."
 
"으음!"
 
능설비의 조리있는 말에 무상인마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복노인이 가지시오. 복노인 정도면 잘해낼 것이오."
 
"말도 아니 되는 말씀이오. 

하여간 오늘은 때가 아닌 듯하니 이것은 일단 갈무리하겠소이다."
 
무상인마는 맹주령을 품에 넣었다.
 
그때 능설비는무상인마가 말릴 틈도 없이 격공지력을 발휘해 

삼원신검이란 사람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크으!"
 
삼원신검은 가래침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여, 여기는?"
 
그는 눈을 비비고 몸을 일으키다가 두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있는 무상인마와 그리고 죽립을 손에 들고 있는 미끈한 젊은이 하나.
 
"으아악, 구마령주다!"
 
삼원신검은 능설비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크게 놀라 외치며 밖으로 튀어나갔다.
 
"서라!"
 
무상인마가 얼른 그 앞을 가로막으며 맥문을 움켜 쥐었다.
 
"여기저기 떠들어대면 소란이 난다. 그것도 모른단 말인가?"
 
무상인마의 손에는 만근거석을 깰 만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가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눈을 부라리자 삼원신검은 볼을 실룩이며 외쳤다.
 
"노인이 황제의 시위장(侍衛長)이건 전대의 고수인 무상인마이건 나는 두렵지 않소.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나의 입을 막지는 못할 것이오!"
 
그의 눈빛은 경멸에 찬 것이었다.
 
"퉤에!"
 
그는 누런 가래침을 뱉으며 저주의 눈빛으로 능설비를 쏘아봤다.
 
"구마령주, 우리는 모두 네가 운리신군과 동귀어진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한데 실명대협으로 위장해 백도를 통째로 삼키려 하다니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황제가 구마령주인 네놈과 짜고 벌이는 

무림일통극이 한 시진 안에 소문날 줄 알아라!"
 
그가 이를 갈며 쏘아부칠 때, 능설비의 손이 가볍게 흔들렸다.
 
무형의 지력이 튕겨지며 삼원신검은 어디를 어떻게 점혈당했는지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짚단이 쓰러지듯 바닥에 고꾸라지자 무상인마는 능설비를 다시 본다는 듯 

입을 딱 벌리며 능설비를 바라봤다.
 
능설비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금은 밝힐 수 없는 일이다. 

하늘과 땅이 나를 원망하더라도, 나를 위선자(僞善者)라 하더라도 할 수 없다. 

백도에는 내가 필요하다. 구마령주는 필요 없으나 실명대협은 필요한 상태다."
 
무상인마는 능설비의 처연한 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혈수광마웅이 죽은 다음 그를 해혈해 주시오."
 
능설비는 지나가는 말처럼 말하며 토굴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아주 작고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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