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64. 지옥의 사자<완결>

오늘의 쉼터 2014. 6. 21. 15:36

64. 지옥의 사자

 

 

명명주재의 죽음-.

봉우리 위는 다시 정적으로 가득 메워졌다.

그러나 살기만은 여전히 충만되어 있었다.

옥탑단장인과 한해독부.

두 사람은 마치 같은 하늘을 우러러 살 수 없는 원수들처럼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상대방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지독한 살기를 뿌려댔다.

한동안 긴장한 가운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

 

한해독부가 철괴를 곤두세우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노신은 너같은 요부와 다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옥탑단장인이 냉랭하게 코웃음만 칠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해독부는 이를 부드득 갈더니 재차 크게 소리쳤다.

 

"옛말에도 살인을 한 자는 용서해 줄 수가 있지만

정(情)을 통한 자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했다."

 

"흥!"

 

"오늘 밤 우리 여기에서 생사를 가리자!"

 

한해독부는 철괴로 으스러질 듯이 땅을 꽉 찍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요부같은 년, 네년은 노신의 남편을 빼앗아갔다.

노신은 네년이 명명주재에게 복수를 한 것처럼 너에게서 그 대가를 받아야겠다!"

 

그녀는 즉시 철괴를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허공에다 한 차례 큰 원을 그렸다.

 

돌연-.

 

"쌔앵!"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철괴는 무지막지한 속도로 옥탑단장인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옥탑단장인도 멍청히 서 있지만은 않았다.

 

"어딜!"

 

날카롭게 고함을 지른 그녀는 재빨리 연속 삼 초를 날려 한해독부의 철괴를 막아냈다.

 

"흥! 제법이구나?"

 

한해독부는 코웃음을 치며 재차 신공을 펼쳐냈다.

옥탑단장인도 질세라 살초를 전개하며 휘몰아쳐 갔다.

두 사람의 결투는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동귀어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 광경에 위중평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백공상인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혹시 그가 나서서 중재를 할까 하는 한 가닥 기대 때문이었다.

순간 이런 기대에 대답이라도 하듯 백공상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두 사람에로 다가가면서 가볍게 일 장을 날려 싸움을 중지시켰다.

 

"나무아미타불… 두 분 여시주는 그만 멈추시오!"

 

옥탑단장인은 급히 손을 거두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한해독부는 백공상인이 나서자 더욱 화가 치미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너 이 말라빠진 놈아, 네놈도 저 요부와 합세해 노신에게 덤벼라!"

 

백공상인의 마른 얼굴에 일순 고통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곧 태연함을 회복하고 무게 있게 입을 열었다.

 

"오늘 약속은 명명주재를 상대하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두 분께서 다투실 필요가 어디 있소?"

 

한 마디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귀하는 시종 나를 제거하려고 하지 않았소?

좋소! 내 오늘 당신에게 무슨 실력이 있는지 한 번 구경해 보겠소."

 

백공상인은 격동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이 다시 한 번 불호를 외웠다.

그리고는 침중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살인을 밥먹듯이 하는군요.

비록 엉뚱한 상황이었지만 오늘 원흉이 제거되었으니

마땅히 참회를 하고 과거를 뉘우쳐야만 하오."

 

매우 준엄한 목소리였다.

한편 한해독부는 백공상인이 모든 것을 버리고 이궁으로 들어갔던 것이

바로 옥탑단장인의 꼬임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모든 울분을 옥탑단장인에게 배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옥탑단장인은 백공상인이 자신을 희롱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그녀를 혼자 남겨 놓고 출가를 해버렸기 때문에 그 서러움을 참지못해 그런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들의 삼각관계는 매우 미묘하고 복잡했다.

일이 이쯤 되자 한낱 후배인 위중평은 나서서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이 때 옥탑단장인이 불쑥 앞으로 나서면서 소리쳤다.

 

"이제 그런 시시한 얘기는 꺼내지 마시오."

 

백공상인의 침울한 얼굴에 아연 놀란 빛이 가득했다.

 

"아니, 그 말이 그렇게도 듣기 싫단 말이오?"

 

옥탑단장인은 아랫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래요. 오늘 밤 당신이 있으면 없고 내가 있으면 당신이 없어져야 해요."

 

"그렇다면 오늘 밤 아예 사생결단을 내자는 말이오?"

 

옥탑단장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야멸찬 눈초리를 보냈다.

 

"당연하지요. 빨리 그 빚을 청산하시오!"

 

백공상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정중히 합장을 했다.

 

"빈승은 출가를 한 사람이오.

그러니 두 분께선 지난 일을 자꾸 꺼내지 말아 주시오."

 

한해독부가 대뜸 호통을 내질렀다.

 

"그따위 소리는 하지도 마라!

이 일은 생사가 결판나지 않는 한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백공상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는 품속에서 조그마한 종을 꺼냈다.

그 종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백공상인은 그 종을 들고는 나직하면서도 무게있게 입을 열었다.

 

"좋소. 빈승은 이 작은 종으로 두 분 시주와 좀 겨루어 보고 싶은데 의양이 어떻소?"

 

옥탑단장인은 싸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당신은 자신의 내공이 깊다고 자부하는 모양인데 좋아요!

 내 기꺼이 응해 드리겠어요."

 

옥탑단장인이 승낙한 마당에 한해독부가 반대할 리는 없었다.

 

"좋다! 누가 이기는지 한 번 겨루어 보자."

 

이윽고 두 삶은 제각기 유리한 위치에 조용히 앉아 백공상인이 내공을 시전하기를 기다렸다.

 

"나무아미타불…"

 

백공상인은 무겁게 불호를 외우고 나서 깡마른 손을 흔들자 종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땅땅땅…"

 

순간 청아한 종소리가 정적에 쌓인 밤하늘을 뚫고 메아리쳤다.

옥탑단장인과 한해독부는 움찔하여 재빨리 심신을 가다듬고 운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종소리는 지극히 평화스러워 보통 절간에서 들리는 종소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종소리는 은은하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려 왔다.

그 속에는 삶의 환희와 그리고 화창한 봄날을 맞는 것 같은 기쁨이 연연하게 깃들어 있었다.

그 소리에 두 사람의 표정에는 묘한 변화가 생겼다.

돌연 그들의 뇌리에 과거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기발랄하고 활기차며 행복을 추구하던 그들이 청춘-.

많은 사람들의 찬미와 흠모-.

 

돌연…

 

"땡땡땡!"

 

종소리가 다급해지며 지독한 살기가 그녀들의 귓가에서 소용돌이쳤다.

잇달아 그녀들의 뇌리에는 살벌한 혈전과 비린내나는 참상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시체들은 하나하나 썩어 들어가며 백골로 변하여 결국은 하나의 큰 산더미가 되어

머리 속을 가득 메웠다.

순간, 종소리의 울림이 기묘하게 변했다.

쓰러졌던 백골들이 벌떡벌떡 뛰쳐 일어나며 자기들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으악!"

 

두 사람은 뜻밖의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면서 번쩍 눈을 떴다.

 

정적-.

백골이나 원혼같은 것은 모두가 환상이었다.

이 때 자상하게 생긴 한 명의 여승이 불호를 외우며

그녀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아아…"

 

한해독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철괴를 절벽 밑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봉우리 밑으로 몸을 날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한편 옥탑장단인도 여승의 자애스러운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긴 탄식과 함께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 때-.

하나의 날렵한 인영이 막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봉우리 위로 날아왔다.

이어 옥탑단장인을 향해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님!"

 

금루선연.

옥탑단장인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렇다면 늙은 여승은 누구란 말인가?

그는 다름 아닌 수월암주였다.

수월암주는 나직이 불호를 외우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시주, 우리 수월암은 언제나 여시주를 기다리고 있소."

 

옥탑단장인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월암주는 한 차례 빙긋이 웃더니 앞장 서서 떠나갔다.

옥탑단장인은 지난 과거를 생각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금루선연을 향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얘야! 부디 이 이모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야 한다."

 

금루선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모님…"

 

그녀가 고개를 쳐들었을 때 옥탑단장인은 벌써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옥탑단장인-.

그의 명성답게 불문에 귀의하는 것도 역시 나타날 때처럼 신비로운 것이었다.

이 무렵, 백공상인도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복수도 다 끝나고 골치 아픈 일도 웬만큼 해결된 것이다.

그리고 무림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이쯤 되면 위중평도 당연히 찌푸렸던 미간을 확 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미간을 모으며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추혼천녀-.

그녀는 위중평이 아는 여인들 가운데 자기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여인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주었단 말인가?'

 

그녀는 지금 그녀의 모친 옥탑단장인과 함께 불문에 몸을 담고 있다.

그러니 그녀에게 갚아야 할 빚은 이제 영원히 갚아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부드럽고 달콤한 안미옥은?

지금은 빙염이 그녀를 돌보아 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억지스러운 결합이 꼭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여튼 지금 상황으로서는 모든 것을 운명에다 맡기는 수밖에…

 

"후우…"

 

위중평은 가슴이 답답하여 한 차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한숨을 내쉬다보니 또 은의소녀의 일이 생각났다.

은의소녀와는 비록 오해로 인하여 일이 빚어지기는 했다.

그러나 위중평이 와도까지 직접 찾아가지 않으면 이 일도 결코 마무리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리하여 위중평은 탄식을 금할 수가 없었다.

금루선연이 옆에서 미간을 찌푸리며 궁금한 듯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왜 자꾸만 한숭을 내쉬죠?"

 

위중평은 내키지 않은 기분으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런 일은 얘기해 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오."

 

금루선연은 곱게 눈을 흘겼다.

 

"왜 제가 이해를 못해요?"

 

위중평은 씁쓸하게 웃으며 금루선연을 주시했다.

 

"당신은 지금 내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아시오?"

 

금루선연은 바람에 날리는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소리없이 웃었다.

 

"당신은 지금 추혼언니와 미옥언니,

그리고 벽요언니의 일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

 

위중평은 일시에 대답할 말을 잊었다.

 

한편-.

 

 

"여러분, 조용히 하시오. 이 일은 내가 처리해 주겠소."

 

외침과 함께 군마들 틈에서 나타난 사람은 서생이었다.

이 청년서생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할 수 없도록 얼굴이 하얗고 이목구비가 매우 수려했다.

그는 즉시 군마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앙칼진 호통을 토했다.

 

"자, 와도에서 온 사람들은 듣거라.

너희들은 대체 누구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느냐?"

 

와도에서 온 군마들의 물밀 듯이 밀려오던 기세는 이 소리에 순식간에 싹 가시고

모두들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들은 이 청년서생의 목소리만 알 뿐 얼굴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며 일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청년서생은 크고 둥근 눈에 살기와 위엄을 가득 담고 그들을 하나하나 쓸어 보았다.

한편 대청 밖에서 싸우고 있던 위중평은 이미 소면랑군을 궁지에다 몰아넣고 있었다.

소면랑군은 자기의 그 철통같은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즉시 와도의 고수들을 향해 호통을 날렸다.

 

"너희들 어째서 가만히 있기만 하느냐?"

 

청년서생은 그 목소리를 듣자 즉시 고개를 돌리며 앙칼지게 냉소를 날렸다.

 

"이제 보니 네놈이 바로 내 부친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었구나.

오냐, 이놈 잘 걸렸다."

 

청년서생은 멀뚱멀뚱 서 있는 와도의 고수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자, 어서 저놈을 사로잡아라."

 

와도의 고수들은 그제서야 청년서생이 바로 궁주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소면랑군이 도주의 영부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함부로 출수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그저 안색이 파랗게 변한 채 어쩔 줄을 모를 뿐이었다.

청년서생은 이 광경은 보자 분노를 금치 못하고 외쳤다.

 

"네… 이놈들! 감히 본 궁주의 명령을 거역하다니, 죽고 싶으 냐?"

 

청년서생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능란한 신법으로 두 사람을 쓰러 뜨렸다.

 

"으악!"

 

처절한 두 마디의 비명이 터지자

장내는 즉시 쥐죽은 듯 조용해졌고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석비는 이 광경에 그만 등골이 오싹하여 급히 지붕 위로 몸을 날려 도암을 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지붕 위에서는 원한에 가득찬 폭갈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놈… 쥐새끼처럼 어디를 기어 오르려고 하느냐?"

 

호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영악한 장풍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 왓다.

이어,

 

"퍼억!"

 

둔탁한 음향과 함께 석비의 몸은 그대로 굴러 떨어졌다.

위중평은 재빨리 몸을 날려 석비의 완백을 잡는 동시에 그의 혼혈을 직었다.

이 때 지붕 위에는 와도지왕이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르게 늠름한 모습의

동사삼룡(東沙三龍)을 배후에 두고 우뚝 서 있었다.

청년서생은 와도지왕을 보는 순간 하얀 얼굴이 파랗게 변하여 대청 뒤로 급히 몸을 숨겼다.

와도지왕은 싸늘한 표정으로 장내에 늠름하게 나타났다.

도주가 나타나자 와도의 고수들은 전부 바닥에 꿇어 앉았다.

와도지왕은 그들의 그런 태도에 싸늘한 코웃음을 날리며 호통을 쳤다.

 

"누가 너희들더러 와도를 떠나라고 했느냐?"

 

와도의 고수 중 매우 우람하게 생긴 홍안의 대한이 공손히 대꾸했다.

 

"도주님, 용서하십시오. 소도주께서 도주님의 영부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저희들은 하는 수 없이 따라온 것입니다."

 

와도지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미간을 짙게 찌푸리며 호통을 날렸다.

 

"어서 저 역적놈을 데리고 와도로 돌아가라!

저놈에 대한 처벌은 내가 와도로 돌아간 후에 알아서 하겠다."

 

와도의 고수들은 공손히 대답을 하고는 석비를 향해 다가갔다.

이 때 위중평이 나서며 싸늘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잠깐!"

 

이어 와도지왕을 향해 냉엄한 목소리로 따졌다.

 

"도주께서는 이곳이 장백파의 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요?

도주, 귀하의 제자가 우리 장백파에서 일을 저질렀으니

마땅히 본과의 처분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이 일은 만고의 영웅들을 살해하려고 했던 것이니

엄중히 다스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위중평의 분노에 찬 말을 듣자 와도지왕은 움찔하여 어쩔 줄 몰랐다.

더욱이 조리있게 내뱉은 위중평의 말에 거만한 와도지왕도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귀하의 말에도 일리는 있소. 아무튼 노부가 귀하에게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소."

 

그러더니 정말로 위중평의 앞에 공손히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닌가.

와도지왕의 명성은 이미 바다 밖에도 널리 알려진 만큼 웅후하고

또 곧은 절개가 있는 사람이다.

그런 와도지왕이 손 아래 아득한 후배에게 이처럼 공손히 사과를 하니

위중평이 제아무리 극도로 화가 났다고는 해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위중평은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했다.

바다를 쟁패하던 왕이 일개 문파의 지주에게 그것도 후배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좀 고려를 해봐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때마침 금루선연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금루선연은 와도지왕의 난감한 안색을 흘낏 쳐다보고는

위중평을 향해 애교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상공, 소면랑군 석비는 어디까지나 와도의 반역자이니 그냥 데려가게 해주세요."

 

위중평은 그제야 하는 수 없다는 듯 와도지왕을 향해 공수의 와도지왕은 영문을

예를 올리며 말했다.

 

"그럼 후배는 중독당한 군웅들을 돌봐 주어야 하니

귀하께서는 그만 반역도를 데리고 가십시오.

그러나 아마 엄중히 처벌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위중평의 생각 같아서는 소면랑군 석비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와도지왕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와도지왕도 일개 도주로서 그렇게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때마침 기지가 뛰어난 금루선연이 끼어 들어 어색하던

두 사람 사이를 원만하게 풀어 주었으니-.

 

위중평과 와도지왕은 금루선연의 총명함과 넓은 배려에 대해 탄복과 감사를 금치 못했다.

와도지왕은 굳었던 얼굴을 그제야 활짝 펴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노제, 고맙네. 그리고 낭자께서도…

내 와도로 돌아가면 이 반역도는 꼭 엄벌에 처하고 말 걸세."

 

와도지왕은 몸을 돌려 수하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 너희들은 어서 저 반역도를 섬으로 끌고 가거라!"

 

수하들이 소면랑군을 끌고 밖으로 나가자 와도지왕은 몸을 돌려 이렇게 말했다.

 

"자, 중독당한 군웅들은 노부가 치료해 주겠네."

 

"감사합니…"

 

그러나 위중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청 마루에 쓰러져 있던 근웅들이

잠에서 깨어나듯 부시시 몸을 털고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와도지왕은 영문을 몰라 몹시 얼떨떨한 듯 주위를 훌어보며 물었다.

 

"아… 아니 이것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금루선연이 앞으로 나서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전 백공상인이 선란엽(仙蘭葉)으로 만든 해약을 가지고 와서 군웅들을 구해 주었어요.

그런데 백공상인이 말하기를 어떤 노인의 지시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위중평은 안색이 싹 변한 채 급히 소리쳤다.

 

"백공상인은 지금 어디에 있소?"

 

금루선연은 이상스러운 듯 눈을 깜박거리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벌써 떠나갔어요."

 

순간 위중평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낮게 신음을 토했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었소?"

 

금루선연은 입을 삐죽이며 쌀쌀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위중평의 표정은 금세 어둡게 변했다.

 

 

성대한 피로연은 밤이 깊어서야 끝났다.

강호의 흉험에 시달려온 백산목장도 고요함을 되찾았다.

모든 것이 처음 이 백산목장이 설릴될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간 것이다.

이제는 강호에 맺힌 원(怨)도 그리고 은(恩)도 없다.

다시 강호에는 평화스러움이 찾아오고 강호의 평화가 지속되는 한

이 백산목장의 고요함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고요한 달빛이 백산목장의 둥그런 언덕과 넓은 초원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담담한 달빛 아래 두 개의 그림자가 밀착된 채 나타났다.

위중평과 금루선연은 모든 것이 원상태로 돌아간 뒤라

한가롭게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있었다.

위중평은 그녀가 무슨 금루선연은

그 티없이 깨끗하고 순수한 얼굴을 위중평의 어깨에다 기대며 꿈을 꾸는 듯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 위중평은 그런 금루선연을 포근히 안아주며

그 자신도 모를 행복에 도취되어 있었다.

 

순간-.

 

"흥!"

 

두 사람만의 평화가 등골에 땀이 밸 것 같은 싸늘한 코웃음에 산산조각났다.

위중평은 그 소리에 크게 놀라 거침없이 외쳤다.

 

"누구냐?"

 

이어 코웃음이 들려 온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일까…"

 

금루선연이 깜짝 놀라며 막 위중평의 뒤를 따르려는데 목장 안뜰에서

전신이 다 얼어붙을 듯 싸늘한 코웃음이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그는 위중평을 뒤따르려다 포기하고 몸을 돌려 목장 안으로 뛰 어 들었다.

한편 위중평은 숲 속에서 한 은의소녀를 발견했다.

그 은의소녀의 뒷모습은 너무나 눈에 익은 바로 벽요궁주였다.

위중평은 이상하게도 그 소녀를 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나… 낭자…"

 

갑자기 전신이 마비되는 듯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은의소녀는 빈 허공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은은한 달빛이 나뭇잎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옷 위에 산산이 부서졌다.

눈부신 아름다움…

위중평은 그녀의 이 아름다운 자태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나 뜻밖의 출현에

충격을 받았는지 그저 넋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위중평은 그녀가 무슨 말이라도 해 주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이 질식할 것 같은 침묵에 눌려 그대로 숨이 막혀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나… 낭자… 어떻게…"

 

위중평은 그야말로 전신이 그대로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은의소녀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몸을 홱 돌리며 앙칼진 음성을 뱉아 내었다.

 

"흥, 주제에 도도하기는…"

 

순간 위중평은 다시 한 번 크게 놀라 영기 가득한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잠시 벌인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앞의 소녀는 벽요궁주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 아니…"

 

은의소녀는 위중평이 입을 열지 못하자 초승달같은 눈썹을 치켜 세우며

냉랭하게 따져 묻기 시작했다.

 

"흥, 매우 건방지군요.

그래요. 당신은 제 사매를 왜 그렇게 무시하는 거죠?

당신이라는 인간이 도대체 얼마나 잘났기에…"

 

위중평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위중평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아니, 사매가 도대체 누구길래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러는 거요?

소생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구려."

 

소녀는 독이 서린 싸늘한 눈빛으로 위중평을 쓸어 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그렇게 시치미떼지 말아요.

저의 사매가 누구냐고요?

바로 와도의 벽요궁주라는 것을 당신은 모른다는 말이에요?

당신이 도대체 어디가 그처럼 잘나서 사매를 울리나요?

어서 말을 좀 해보라니까요!"

 

순간 위중평은 얼굴이 핼쓱하게 변했다.

 

벽요궁주-.

이 네 글자가 귓가에 들어오는 순간 위중평은 갑자기 조사축상이 생각났다.

그리고 막연한 불안함에 급히 물었다.

 

"낭자,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소? 내 기필코 그녀를 좀 만나야만 하겠소."

 

그러나 소녀는 그의 말을 싹 무시하며 차갑게 비웃을 뿐이었다.

 

"흥, 그녀를 찾는다고요? 그건 당신의 그 낡은 조사축상을 찾으려는 것이겠지요?

누가 그 음흉한 속마음을 모를 줄 알아요. 이젠 다 필요 없어요."

 

이렇게 되자 위중평은 내심에서 격동하는 다급함과 울분이 한꺼번에 치밀었으나

 억지로 눌러 참고 다시 침중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낭자,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낭자는 지금 나 위모에게 설교를 하러 왔다는 말이오?

자,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두고 어서 내게 당신의 사매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시오."

 

소녀는 위중평의 이 완강한 태도에 더욱 증오심이 치밀었는지

이를 바드득 갈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장난하고 있는 줄 알아요?

당신에게 도대체 무슨 볼일이 있다고 제 사매를 만나려고 하는 거예요?"

 

위중평은 갈수록 더해 가는 그녀의 이 어이없는 반박에 끝내 화가 치밀었다.

그는 그녀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버럭 소리쳤다.

 

"낭자, 정말 얘기하지 못하겠소?"

 

은의소녀는 의외로 위중평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면서 사납게 대들었다.

 

"못하겠어요. 왜 무력이라도 쓰겠다는 얘기인가요?

어리석은 사람같으니라고…"

 

그러나 상대가 엄연히 위중평의 얼굴이 마치 용광로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경우에 따라선 그럴 수도 있소."

 

은의소녀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이 무력이라는 말을 듣자

매우 가소로운 듯 소리 높여 웃었다.

 

"좋아요. 내 그렇지 않아도 당신의 무공이 고강하다는 소리를 듣고

한 번 겨루어 보고 싶었는데 아주 잘 되었군요."

 

그녀는 말의 여운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몸을 교태스럽게 움직이며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실로 믿지 못할 만큼 막강한 공력이었다.

위중평은 그녀의 장세를 막아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피해 서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런데 은의소녀의 초식이 완전히 뻗어 나오기도 전에 갑자기 숲 속에서

창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채아(彩兒)야! 어서 멈추어라."

 

순간 숲에서 노부인이 걸어나왔다.

노부인은 다름아닌 백공상인의 본처 한해독부였다.

위중평은 한해독부를 보자 놀라기에 앞서 재빨리 다가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대노선배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그러나 한해독부는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원한에 가득찬 음성을 토했다.

"만약 노신의 성질이 옛날과 같았다면 아마 네놈은 이 자리에 그냥 서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위중평은 이 말을 듣자 참았던 화가 다시 치밀어올랐다.

그러나 상대가 엄연히 백공상인의 본처라는 명분이 있기에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며 공손히 대답했다.

"노선배님의 말씀이 모두가 맞습니다. 전부 이 후배의 잘못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난 그는 고개를 들어 한해독부의 눈치를 피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벽요궁주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지극히 염려하는 것 같은 이 한 마디에 살기 가득찬 표정을 짓고 있던 한해독부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자네… 진심으로 그 애의 행방을 알고 싶은가?"

위중평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중평의 뇌리에는 다시 지난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벽요궁주, 그녀는 지난날 위중평 자신이 입은 상처 때문에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그 지엄한 옛말에도 아랑곳 없이 알몸으로 자신의 살과 맞대면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이것은 위중평으로 하여금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진정 가슴아픈 추억이었다.

더구나 벽요궁주는 위중평을 위해 지위와 명성까지 아낌없이 내버렸지 않는가.

비록 그녀가 위중평에게서 조사축상을 빼앗아 갔지만

그것 또한 위중평을 위한 순수한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

그는 자신으로 인해 불행해졌던 수많은 여인들이 생각났다.

다시는 사랑하는 여인을 울리지 않으리라

그의 굳게 다문 입술에는 어떤 결의가 나타났다

그는 한 일자로 다물었던 입을 힘겹게 열었다.

 

"선배님, 진심입니다.

저는 그녀에게 아니,

이 세상 그 어떤 여자에게도 이제는 더 이상 죄를 짓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선배님께선 제발 그녀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한해독부는 그제야 위중평의 어깨를 두드리며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오냐, 역시 노신이 사람 하나는 잘 보았구나."

 

한해독부는 위중평의 집요한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 애는 지금… 금루선연과 안채에 있을 거네."

 

위중평은 이 말을 듣자 기쁨과 흥분을 금치 못하고 크게 소리쳤다.

 

"선배님,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면 후배는 지금 당장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몸을 날려 사라졌다.

한해독부는 길게 탄식을 뿜어내었다.

 

"그 역시…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군.

 이제 그 애도 일생 동안 행복하게 살 것이다…"

 

채아라 불리운 소녀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도는 의미있는 미소를 주고받은 후 곧 발길을 돌려 숲을 나갔다.

 

"벽요공주."

 

어느새 동녘에는 뿌연 여명이 터오고 행복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위중평의 외침 소리만이 새벽 공기를 뚫고 멀리멀리 메아리치고 있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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