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신가보의 위기
명명주재의 야심은 일장춘몽으로 변하고 말았다.
구사옥부는 이제 지고상의 권위를 자랑하는 물건이 아니다.
예전과 같이 사람의 생사를 좌우하는 권한도 없다.
칠성, 팔선은 모두 죽고 십삼표묘객도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강호엔 이제 신비의 인물이 출몰하지 않았다.
명명주재 역시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는 자가 없었다.
무림은 이번 살겁을 겪으므로써 비록 많은 선배 인물들이 희생되었지만
새로운 젊은이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오래 전부터 무림의 이목을 집중시켜 왔던 허무대회가
문자 그대로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위중평은 금루선연과 길을 재촉하면서 줄곧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명명주재의 이번 거동은 실로 상상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칠성과 팔선은 모두 무공이 탁월한 고수이며 그의 득의한 조수였는데
왜 그들마저 한꺼번에 폭사시킨 것일까?
그리고 허무궁은 인원수가 많고 세력이 웅후하여 설사 정파의 고수들을
당해 내지 못한다 해도 후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명명주재가 훌쩍 떠나 버리다니…
문득 위중평의 뇌리엔 사형인 청허도장과 구주풍인, 우주광인, 후면협심 풍진객 등이 떠올랐다.
그들은 왜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혹시 변을 당한 게 아닐까?
아니면 다른 곡절이 있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홀연 한 줄기의 인영이 쏜살같이 달려오면서
멀리서부터 목청을 높여 외치는 것이 아닌가.
"위형, 계속 위형을 찾아다녔소."
다름아닌 개방제자 상조화였다.
그는 전신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헐레벌떡 숨을 내쉬었다.
"본방 제자가 얻은 소식에 의하면 신가보의 판도 철적왕손이 이미 신가보에 잠입해
이미 보주의 직위를 접인했을 뿐 아니라 신가보의 힘을 빌려 백산목장을
침범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오.
나의 스승과 우내쌍광 등은 이 소식을 들은 후
이미 밤낮을 가리지 않고 관외로 달려갔소."
상조화의 말에 위중평은 그런대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금루선연은
이미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전신에 심한 경련이 일고 있었다.
"그가 감히!"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한 마디 내뱉더니
즉시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앞으로 달려갔다.
"혜매,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그녀는 위중평의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졌다.
위중평은 지체하지 않고 그녀의 뒤를 쫓아가려 했으나 불원천리 이곳까지 달려와
소식을 전해준 상조화를 그냥 놔주고 떠날 수가 없었다.
상조화는 이내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뿐이니 어서 그녀의 뒤를 쫓아가시오."
위중평은 그제서야 간단히 공수의 예를 취하고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금루선연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는 필시 신가보로 달려갔을 것이다.
얼마동안 달렸을까.
숲 속에서 붉은 인영이 번득였다.
비록 일순간의 일이지만 위중평은 그 몸매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그녀가 아닐까?'
그는 곧 숲 속으로 들어갔다.
과연 고목나무 아래 홍의를 입은 여인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위중평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추혼낭자, 그동안 어디에 있었소?
쌓이고 쌓인 말은 태산 같은데 무슨 얘기부터 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뜻밖에도 여인은 아무 대꾸도 없이 그냥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는 게 아닌가…
위중평은 그녀가 추혼천녀라는 것을 확신하고 다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 날 낭자가 한 말이 옳소.
우리는 절대 함께 있을 수 없는 운명같으니 속히 어머님 곁으로 돌아가시오.
옥탑단장인은 비록 성품이 괴팍하지만 엄연히 따진다면 낭자의 어머님이 아니겠소?"
여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위중평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녀의 몸을 돌리려는데 상대방이 먼저 스스로 몸을 돌렸다.
"저리 비켜요. 그 더러운 손으로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는 추혼천녀가 아니었다.
안미옥,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위중평은 절로 얼굴이 붉어지며 쑥스럽게 웃었다.
"옥누님, 이곳엔 웬일이오?"
"내가 이곳에 있는 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죠? 공연한 일엔 참견 말고 어서 비키세요."
앙칼지고 독기서린 그녀의 음성.
위중평은 그녀의 돌변한 태도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옥누님,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듣기 싫어요. 온낭자와 있었던 일을 부인하지는 않겠죠?"
위중평은 그제서야 어떻게 된 일임을 알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말이오. 옥누님도 그런 헛소문을 듣고 나를 못 미더워하고 있었단 말이오?"
안미옥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미친 듯이 달려갔다.
위중평도 그녀의 뒤를 쫓아 갔으나 워낙 나무가 울창하여 그녀의 모습을 잃었을 뿐 아니라
출로마저 찾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돌연 어디선가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죽림(竹林) 사이에서 한 채의 낡은 절이 시야에 들어왔다.
수월암(水月庵)…
언젠가 추혼천녀와 함께 왔던 곳이다.
그리고 안미옥이 수월암주를 스승으로 삼았다고 한 말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위중평은 그녀가 이곳에 있을 것이라 여기고 암자의 문을 두드렸다.
암자의 문이 열리며 중년 여승이 모습을 나타냈다.
위중평은 얼른 공수의 예를 취하며 정중히 입을 열었다.
"말씀 좀 묻겠는데 혹시 안미옥이란 낭자가 귀암에 오지 않았소?"
여승은 아무 대꾸도 없이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흔들었다.
위중평은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암주께선 안에 계십니까? 수고스럽지만 위중평이란 자가 뵙고자 찾아왔다고 전해 주시오."
여승은 다시 고개를 내두르더니 곧 문을 닫아 버렸다.
위중평은 이패로 물러갈 수 없었다.
'혹여 이곳에 있으면서도 일부러 여승에게 없다고 전하라는 게 아닐까…'
그는 몰래 담을 뛰어넘기로 결심했다.
설사 발각되는 일이 있더라도 수월암주와 안면이 있어 큰 오해는 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곧 붉은 벽돌담을 뛰어넘었다.
안미옥이 전에 뒷뜰에서 연공한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위중평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뒷뜰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 때 한 여승이 모습을 나타내더니 위중평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며 곧 어디론가 사라졌다.
위중평은 엉겁결이라 상대방의 얼굴을 똑똑히 보지 못했지만 몸매는 지극이 눈에 익은 것 같았다.
그러나 여승만이 있는 암자 안에서 경솔한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그 때 맑은 불경 소리가 들리며 한 중년 여승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와 나직이 호통을 쳤다.
"불문성지를 잠입한 자, 그대는 누구요?"
상대방은 다름아닌 수월암주의 수제자 경화였다.
위중평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다가가 정중히 몸을 숙였다.
"암주를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경화는 합장으로 답례하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스승님께선 외유중이니 그냥 돌아가 주세요.
추시 또 다른 일이 있는 게 아닌가요?"
위중평은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솔직하게 대답했다.
"풍문에 의하면 미옥낭자가 속세를 떠날 결심으로 귀암을 찾아왔다기에 만류하러 온 것입니다."
경화는 이해가 간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그녀는 이곳에 오지 않았어요.
만약 시주께서 그녀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왔다면 이미 때는 늦었어요."
위중평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경화는 당황한듯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시주와 무관한 사람이니 더 이상 묻지 마세요."
한 젊은 여승이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경화의 귓전에 대고 몇 마디 소근거렸다.
경화는 안색이 대번에 변하며 불안한 음성으로 말했다.
"암주께서 외유중이니 나중에 찾아오라고 전해라."
그리고는 위중평에게 합장을 했다.
"본암은 바깥 손님을 유숙시키지 않으니 시주도 이제는 그만 돌아가 주세요."
경화가 축객령을 내린 이상 이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가 실망을 안고 떠나려는데 돌연 인영이 번쩍이며 한 복면인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위중평은 상대방을 보는 순간 이내 뜨거운 피가 거꾸로 용솟음쳐 올랐다.
상대방이 제아무리 복면을 하고 있어도 위중평은
그가 명명주재임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명명주재, 네놈이 스스로 이곳에 나타나다니…
백산목장의 그 혈채를 오늘 기필코 받고야 말겠다."
그러나 복면인은 뜻밖에도 아무런 반응도 없이 나직하게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위중평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막 공격을 취하려는데 등 뒤에서 경화의 숙연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은 불문성지이니 경솔한 행동을 삼가해 주세요."
위중평은 주춤거리며 어쩔 수 없이 한쪽으로 물러났다.
복면인은 경화 앞으로 다가가 정중히 공수의 예를 취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오."
경화는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합장을 했다.
"스승님이 암내에 계시지 않는 한 빈니는 누구에게도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어요.
그러니 정녕 묻고 싶은 말이 있으면 스승님이 돌아오신 후 다시 들려 주세요."
경화는 정색을 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오과(午課) 시간이 임박했으니 빈니도 이만 실례해야겠어요.
두 분 시주께선 돌아가 주세요."
말을 끝낸 그녀는 몸을 돌려 안쪽으로 들어갔다.
복면인은 잠시 주춤하더니 돌연 몸을 솟구쳐 담장을 뛰어넘었다.
"악마, 잠깐만 기다려라."
위중평은 싸늘히 외치며 곧장 뒤를 따라 담장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복면인은 이미 연기처럼 사라진 후였다.
수수께끼는 자꾸 늘어만 갔다.
안미옥이 수월암에 오지 않았다면 대관절 어디로 갔을까?
혹시 장산도로 다시 돌아간 게 아닐까?
명명주재는 무엇 때문에 수월암에 나타난 것일까?
아울러 위중평이 암자에 발을 들여 놓은 순간 시야에서 어른거리다가 이내 사라진 여승은 누구일까?
의문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계속 번져 갔다.
그러나 지금의 위중평으로선 그러한 의문에 대해 자세히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는 모든 잡념을 버리고 곧장 신가보로 달렸다.
얼마 동안 달렸을까?
신가보가 멀리 시야에 들어왔다.
신가보, 이곳은 그의 제이(第二) 고향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 모든 일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선량하고 인자하기만 한 할아범, 자존심과 공명심이 강한 노보주,
사납고 거칠기만 했던 장정(壯丁)들 그리고 음흉함과 악랄함의 상징같기만 한 철적왕손…
그는 철적왕손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르자 불덩어리 같은 분노가 치밀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번에 그를 만나면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하핫!"
뾰족한 외침 소리가 그의 귓전에 들려왔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금루선연의 외침이었다.
신가보 왼쪽에 있는 숲 가장자리.
금루선연은 대여섯 명의 고희가 넘은 관인에게 둘러싸여져 있었고 뒷쪽으로는
목마웅풍삼십육기(牧馬雄風三十驥)가 질서정연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금루선연은 새파랗게 질린 채 노인들과 몸짓 발짓을 해가며 무슨 논쟁을 하고 있었다.
위중평은 철적왕손을 제압할 일념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며 섬궁절계(蟾宮折械)의 초식을
전개해 철적왕손의 얼굴을 낚아채 갔다.
철적왕손은 교활한 수단으로 십대 문파의 무공을 터득한 후 공력이 크게 증진된 듯
위중평의 기습을 받자 살짝 옆으로 미끄러지며 석 자 가량이나 피했다.
위중평은 첫번째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재차 경리점화의 초식을 펼쳐 상대방의 가슴을 노렸다.
"이놈, 하늘을 대신해 너를 처단하겠다."
철적왕손은 교묘한 신법을 전개해 몸을 피하며 거침없이 외쳤다.
"보주를 모살(謀殺)한 것이 바로 이놈이다.
어서 이녀석을 잡아라."
일련의 금광이 허공에 수놓아지며 목마웅풍삼십육기는 일제히 위중평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위중평은 일 장을 휘둘러 그들을 저지하면서 다시 철적왕손에게 덮쳐가려 했으나
삼십육기는 도저히 다른 행동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위중평이 생각같아선 그들을 전부 저승으로 보내고 싶었지만 금루선연의 입장을 고려해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한 갈래의 웅후한 장력을 펼쳐 날아오는 금창(金槍)을 저지하고 있을 때
금루선연의 외침이 들려왔다.
"평상공, 손을 거두고 이리 좀 오세요."
위중평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신형을 번득여 그녀 옆으로 달려갔다.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오?"
"이 몇몇 숙부님과 선배님들이 철적왕손의 말에 현혹되어 내가 평상공과 내통해
아버님을 살해한 것이라 하지 않겠어요…"
"당치도 않는 말이오.
이 세상에 자기의 부친을 살해하는 딸도 있단 말이오?
저들이 철적왕손의 일방적인 거짓말만 믿고 낭자를 문책하고 있단 말이오?"
염소 수염을 기른 노인이 냉랭하게 말을 내뱉았다.
"물론 확실한 것은 판명되지 않았지만 연아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남에게 이용당할 가능성은 없지 않다."
"으하하하… 보아하니 모두들 저 판도의 말에 단단히 현혹된 모양이구나?"
위중평은 철적왕손을 가리키며 무섭게 노려보았다.
철적왕손은 그의 눈빛과 접하자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우뢰같이 외첬다.
"무엇을 꾸물대고 있느냐? 저 흉악한 녀석을 냉큼 체포하지 못하겠느냐?"
보주의 직위를 계승한 그의 명령을 목마웅풍삼십육기는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다시 금창을 떨치며 벌떼처럼 위중평에게 덮쳐 갔다.
금루선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금검을 수중에 뽑아들며 앙칼지게 호통을 쳤다.
"모두들 물러가라."
목마웅풍삼십육기는 그녀의 호통을 듣자 절로 신형을 멈추고 말았다.
금루선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은 모두 선친을 다년간 모시던 충복이기 때문에 차마 살수를 전개할 수 없다.
그런데 너희들은 진짜 흉수인 철적왕손의 말만 믿고 나를 의심하다니
섭섭한 마음 이루 형용할 수 없구나.
지금도 늦지 않으니 생각을 달리하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나의 금검이 결코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철적왕손은 사납게 외쳤다.
"그녀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지 말아라. 보주를 살해한 흉수를 눈앞에 두고 왜 망설이느냐?"
목마웅풍삼십육기는 쌍방의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몇몇 노인들 중에서 담뱃대를 쥔 자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심각하게 말했다.
"쌍방의 말을 모두 믿을 수 없으니
일단 보내로 들어가 자초지종을 털어 놓고 결정을 짓도록 하자."
철적왕손은 자기가 애써 이룩해 놓은 모계가 차츰 동요되자 악스럽게 호통을 쳤다.
"네가 감히 본 보주를 의심하느냐?"
우그는 거침없이 반말로 뇌까리며 수중에 들고 있는 철적을 번개처럼 쳐냈다.
한 줄기의 검은 광채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곧장 담뱃대를 쥐고 있는 노인을 향해 덮쳐 갔다.
노인은 기습을 받게 되자 몸을 피할 재간이 없었다.
"으악!"
노인은 두개골이 박살난 채 그 자리에 쓰러졌다.
금루선연은 철적왕손이 이런 흉악한 수법을 전개하는 것을 보자 전신이
한 차례 심하게 떨며 대뜸 앞으로 덮쳐 갔다.
그와 때를 같이 하며 삼십육기는 일제히 위중평에게 공격을 가했으며
몇몇 노인들도 폭갈과 함께 금루선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금루선연은 차마 그들에게까지 출수를 할 수 없어 금검을 내려뜨리며 잡탄식을 했다.
"모두들 미혼약을 복용한 것 같이 왜 그다지도 정신이 흐릿하죠?"
이 때 위중평은 삼십육기를 격퇴시켰다.
철적왕손은 뒷쪽에 버티고 서서 징그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모두들 내 말을 들어라.
보주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꾸물대는 자는 내가 보주의 영혼을 대신해 처단할 것이다."
몇몇 노인들은 그의 말에 위협을 느낀 듯 일제히 쌍장에 공력을 집중시키고
천천히 앞으로 접근해 왔다.
목마웅풍삼십육기 역시 아홉 사람씩 한 조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며
위중평과 금루선연을 완전히 포위했다.
위중평은 무고한 생명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도 어쩔 수 없이 극단적인 수단을 전개할 것이다.
국세는 팽팽하게 고조되어 일촉즉발의 순간에 도달했다.
숲 속으로부터 까치가 울어대는 듯한 괴성이 들려온 것도 바로 이 때였다.
"현질녀, 서둘지 말아라. 내가 왔다."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요상스럽게 생긴 노파들이 연거푸 나타나며
철적왕손을 철통같이 감시했다.
철적왕손은 그들을 보자 대경실색하다 못해 혼비백산하였다.
그가 다음 생각을 이을 여자도 없이 다시 폭갈 소리가 연거푸 일며
숲 속에서 한 무리의 고수가 뛰쳐 나왔다.
갑작스러운 순간에 많은 강적들이 몰려오자 철적왕손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앞서 달려온 노파가 철괴로 땅바닥을 꽝! 황! 내리치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주위가 떠나가라 외쳐 대었다.
"모조음, 너 이 짐승만도 못한 놈! 네놈의 괴변은 비록 쓸개 빠진 흐리멍텅한 놈들을
속일 수 있지만 나 냉면파파는 절대로 어쩌지 못한다."
모조음은 바싹 긴장한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냉면파파는 이어 한 장의 종이 쪽지를 꺼내 신가보의 고수들 앞으로 획 내던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멍텅구리 같은 놈들아! 이것이나 읽어 보아라."
쪽지에는 철적왕손의 죄악과 빗날 신천오가 그를 문파에서 파문시켰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군웅들은 그제서야 대강의 진상을 알아차리고 웅성거렸다.
잠시 후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십대 문파의 고수들은 자세한 내막을 알려고
냉면파파를 응시하였다.
냉면파파는 주위를 응시하다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멍텅구리 같은 놈들아, 철적왕손 모조음은 신가보를 몰살한 흉수일 뿐만 아니라
또 각대 문파의 무공을 몰래 훔쳐 배워 악랄하게도 각 장문인을 살허한 장본인이다."
"후후후후…"
철적왕손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그는 추호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한 줄기 섬광을 뻗어 내며 냉면파파를 공격했다.
"획!"
새파랗게 번득이는 광채가 빛줄기처럼 뻗어 나갔다.
뻗어 오는 기세가 너무나도 강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군웅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쳐라!"
누구의 입에선지 우렁찬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자 군웅들은 일제히 공세를 펴기 시작하였다.
위중평과 금루선연 억시 연기처럼 날렵하게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한편 냉면파파는 막강한 모조음의 공세 앞에서 지극히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위중평이 대뜸 자옥선의 한풍을 일으켜 빗발치는 듯한 모조음의 암기인 칠보추혼검을 몽땅 떨어뜨렸다. 모조음은 흠칫 놀라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금루선연도 허공에 뽀얀 포물선의 검망을 그리며 모조음의 머리를 내리쳐 갔다.
"받아랏!"
그녀의 분노한 장검은 하늘마저 가둬 버릴 듯한 검막으로 주위를 뒤집어 씌웠다.
너무도 위력적인 이 공격은 십대 문파의 고수들로 하여금 함부로 싸움에 끼어들 수 없게 만들었다.
사나운 경기가 휘몰아치고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위중평은 금루선연이 마음껏 출수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냉면파파와 함께
즉시 한쪽으로 물러났다.
철적왕손 모조음-.
그는 금루선연의 전격적인 공격을 받자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끼며
창급히 철적을 뽑아들고는 필사의 힘을 다해 반격을 했다.
그러나 와황금검의 위력은 정녕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머리 위에서 번득이는가 싶으면 어느 틈에 양 발을 휩쓸어 온 것이다.
신법의 능란함에 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창! 창! 창…"
연이어 터지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고막을 갈갈이 찢을 것만 같았다.
철적왕손은 연신 뒤로 물러서며 비지땀을 흘렸다.
그가 금루선연을 곤경에 몰아 넣는다 해도
위중평이 한쪽에 서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생각만 해도 간담히 서늘해졌다.
'안 되겠구나. 이 때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다…'
전력을 다하여 금루선연의 공세를 약간 늦춘 후 그는 재빨리 한 모금의 진기를 들이켰다.
그리고는 그는 철적을 휘둘러 시커먼 흑광을 뿌리며 금루선연의 금색 빛 검막 안을 뚫고 들어갔다.
사실상 그가 속공을 퍼붓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금루선연의 공격을 어느 정도 막은 후에 재빨리 기회를 포착하여 도망을 치려는 것이다.
치열한 격전…
누가 보아도 사생결단을 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위중평은 그의 속셈을 재빨리 간파하고는 코웃음을 쳤다.
"도망을 치려고? 흥, 어림도 없다."
그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하지만 철적왕손 모조음이 위중평의 속뜻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온몸의 진기를 잔뜩 끌어모아 연속적인 삼 초로 금루선연을 공격했다.
갑자기 거센 경기가 휘몰아치자 금루선연은 흠칫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순간 모조음은 번개같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숲 속으로 몸을 숨기려 하였다.
"어딜 도망치느냐?"
섬뜩한 고함 소리와 함께 위중평의 몸은 어느덧 허공으로 팔 장 높이나 떠올라 있었다.
이어 그의 몸은 모조음을 무섭게 짓눌러 갔다.
"엇!"
모조음은 대경실색했다.
하지만 황급히 쌍장을 들어 위중평의 장풍과 맞부딪쳐 갔다.
"파팟!"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철적왕손 모조음은 묵직한 신음 소리를 지르며 뒤로 여섯 걸음이나 비틀비틀 밀려났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으려고 무서운 의지로 버티었다.
"이놈!"
그는 사납게 외치며 필사의 힘을 다하여 일 장을 밀어냈다.
"휘이익!"
마치 채찍을 강하게 휘둘렀을 때 일어나는 음향처럼 허공을 갈라놓을 듯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하하하핫!"
싸늘한 웃음 소리가 위중평의 입에서 뱉아진 순간 철적왕손은 꼿꼿하게 선 채로 일 장을 후려쳤다.
"콰르릉 쾅!"
바위에 떠락이 떨어지듯 예리한 파공음은 주위를 진동시켰다.
모조음이 마지막 진기까지 끌어올려 발출한 일 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역시 위중평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으으윽!"
모조음은 고통에 가득찬 신음 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주루룩 밀려갔다.
"네… 네놈이…"
철적왕손은 눈을 부릅뜨며 욕설을 퍼부으려 했다.
그러나 욕설이 채 입 밖으로 토해져 나오기도 전에 모조음은 울쳐ㄱ 한 모금의
검붉은 설혈을 토하며 곧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장내는 한껏 긴장되어 상대방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비틀거리던 모조음은 끝내 훌떡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져 버렸다.
위중평은 거꾸러진 모조음을 내려다보며 비할 데 없이 싸늘한 냉소를 쳤다.
"모조음! 네놈에게도 오늘 같은 날이 있구나."
그는 쓰러져 있는 모조음의 허리를 발로 거세게 내질렀다.
"으악!"
모조음은 격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금루선연 쪽으로 날아갔다.
"금루선연, 처치하시오."
"알았어요."
그녀는 실이 끊어진 연처럼 날아오고 있는 철적왕손을 향해 수중의 금검으로 마중해 갔다.
"싹! 싹! 싹!"
날카로운 칼부림이 허공에 눈부신 검화를 만들었다.
참혹한 죽음-.
모조음의 몸뚱이는 저주에 서린 금루선연의 와황금검에 의해 고깃덩어리로 변하고 말았다.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던 일세의 마두, 결국 그는 자신이 뿌린 죄악의 씨에 의해
죄많은 일생을 종지부 찍은 것이다.
"으흐흐흐흑!"
금루선연은 자신의 손으로 원수의 목숨을 빼앗게 되자
슬픔이 복받쳐 보검을 내팽개치며 대성통곡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녀의 이 울음을 막지 않았다.
그저 숙연한 심정으로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냉면파파가 그녀를 감싸안으며 위로했다
"얘야, 울지 마라. 이제 원수도 죽었고 복수도 다 끝났으니
이젠 그만 분별을 가지고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
따뜻한 그녀의 위로에 금루선연은 천천히 눈물을 거두었다.
냉면파파는 신가보의 고수들을 향해 외쳤다.
"신가보의 사람들은 들어라."
"분부만 내리십시오."
"신가보는 원래부터 신가의 개인 재산이니
신낭자가 부친의 유업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에 대해 너희들은 물론 반대하지 않겠지?"
"물론입니다."
"좋다!"
냉면파파는 즉시 추악하기 그지없게 생긴 열두 명의 여인들을 데리고 질풍처럼 떠나갔다.
철적왕손이 죽고나자 나머지 사람들은 즉시 하직 인사를 하고는제자들을 이끌고 간미옥은
무엇이 불만스러 신가보의 고수들은 금루선연을 옹호하여 보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위중평은 좀 전에 있었던 불유쾌한 일 때문에 홀연히 몸을 돌려 혈혈단신 떠나갔다.
위중평은 원래 장백파로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비래봉의 일을 생각해낸 것이었다.
철적왕손이 이미 죽었으니 장백파로 가지 않아도 별다른 사고는 없을 것 같았다.
'내 자신의 일을 먼저 해결한 후에 다시 문파를 일으켜 세워야겠다.
그래도 늦을 것은 없지 않겠는가…'
그는 즉시 수월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선 안미옥이 정말 수월암으로 갔는지 안 갔는지를 알고 싶었고
암자에서 얼핏 본 여승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달린 그는 디드어 수월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당도했다.
산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샛길에서 두 줄기의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나 위중평과 같은 방향으로 길을 가는 것이었다.
위중평은 어떤 이상한 예감이 들어 암암리에 그들을 따라가 보았다.
과연 그들은 수월암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위중평은 드디어 두 사람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명은 바로 안미옥이었고, 또 한 명은 빙염이었다.
위중평은 반가움에 급히 신법을 전개하며 뒤쫓아 가다가는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암미옥은 무엇이 불만스러운지 연신 콧방귀를 치면서 앞에서 달리고 있고,
빙염은 무엇인가 실망을 느낀 사람처럼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뒤따르는 게 아닌가.
이 광경에 위중평은 대뜸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는 숲 속에서 바람같이 튀어 나오면서 빙염의 등 뒤 혈도를 찍어 버렸다.
"앗!"
빙염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털썩 쓰러져 버렸다.
한편 안미옥은 앞에서 달리다가 빙염의 갑작스러운 비명 소리에 깜짝 놀라 재빨리 몸을 돌렸다
빙염이 혈도를 찍힌 채 기절해 있는 것이 아닌가.
안미옥은 대경실색하여 급히 자세를 갖추며 고함을 질렀다.
"누구냐?"
그러나 쩌렁쩌렁한 산울림만 뒤풀이 되어 메아리칠 뿐 아무리 살펴보아도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어찌 된 영문인지 알 도리가 없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어 그녀는 급히 빙염의 제압된 혈도를 풀기 위해 그의 쳔도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당혹한 빛이 떠올랐다.
점혈수법이 너무나 교묘하여 그녀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풀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미옥은 도리없이 사형인 빙염의 몸을 안고 수월암 쪽으로 달려 갔다.
위중평이 그녀의 뒤를 따르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밌다.
그러나 안미옥은 이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위중평의 신법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안미옥은 빙염을 암자 문앞에 내려 놓고는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예의 그 중년 여승이 나와서 문을 열었다.
중년여승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빙염을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안미옥이 재빨리 뭐라고 속삭였다.
중년 여승은 아무말 없이 안으로 사라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 수월암주가 안에서 여유있게 걸어 나왔다.
안미옥은 사건의 경과를 간단하게 얘기하는 모양이다.
수월암주는 미흡한 표정을 지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 해답을 얻지 못하였는지 긴 한숨을 토했다.
이어 빙염의 맥을 짚어 보고는 혈도를 풀어 주었다.
돌연 수월암주가 무슨 낌새를 느꼈던지 머리를 번쩍 들면서 소리쳤다.
"숲 속에 있는 분은 나오시오."
과연 그녀의 안목은 안미옥과 판이하게 달랐다.
이쯤 되니 위중평도 하는 수 없었다.
그는 앞으로 나서서 모습을 나타내며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후배 위중평이 암주님을 뵈옵니다."
나타난 사람이 바로 위중평이라는 것을 알자 안미옥과 빙염은 놀란 빛을 금치 못했다.
수월암주는 합장을 하고 나서 안미옥을 흘낏 쳐다보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들어 오시오."
위중평은 수월암주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오만스러운 표정을 짓으며 안미옥과 빙염을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안미옥은 깊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때문에 수월암주에게 부탁하여 정식으로 불문에 귀의를 하려 했었다.
그녀는 뜻밖에도 위중평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자 돌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호호호…"
위중평의 거만한 태도에 참을 수 없는 자극을 받은 것이다.
빙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부드득 이를 갈았다.
"흥!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군. 저따위 건방진 놈을 나 빙모가 의제로 삼았다니…"
안미옥이 별안간 광소를 뚝 멈추고 소리쳤다.
"빙사형, 우리 당잘 장산도로 돌아가요."
그녀는 앞장 서서 몸을 날렸다.
남녀간의 감정이란 지극히 미묘한 것이다.
비애와 회한에 젖어 영원히 불문에 들어가 여생을 마치려 하다가도
위중평의 태도에 그런 마음이 천 리 만 리 달아나니 말이다.
빙염은 원래 장산도주의 명령을 받아 안미옥이 불문에 귀의하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자진해서 뜻을 바꾸자
빙염은 흥분을 금치 못하며 앞서 달려가는 안미옥을 뒤쫓아갔다.
한편 위중평은 암주의 뒤를 따라 선방에 들머가면서도 그들이 따라오는가
따라오지 않는가를 주시했다.
그러나…
'내 계획이 성공을 한 모양이구나…'
이렇게 생각한 위중평은 기쁜 한편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섭섭함.
수월암주는 나이가 많은 고인이라 그런지 위중평의 심정을 이미 간파하고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주께서 두 번씩이나 빈니를 찾아왔는데 대체 무슨 일 때문이오?"
위중평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려 첫째는 바로 안미옥 낭자로 하여금 출가를 못하게 막으려는 것입니다."
수월암주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로는?"
"두 번째는 바로 한 사람의 행방을 알아 보려는 것입니다."
수월암주는 그가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시주… 시주가 찾고자 하는 분은 벌써 불문에 귀의를 하였네."
위중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 그게 사실입니까?"
수월암주는 천천히 위중평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렇다네. 더 이상 그녀의 불심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시주를 위해서나
그녀를 위해서나 피차 좋으리라 생각하네."
"으음…"
위중평의 마음은 폭풍에 휘말린 낙엽처럼 착잡했다.
추혼천녀-.
확실히 그녀는 위중평이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한 것이다.
위중평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한 줄기의 인영이 유령처럼 소리없이 선방에 나타났다.
위중평은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옥탑단장인…
위중평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모님!"
옥탑단장인은 위중평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나서 수월암주를 향했다.
"내 딸을 어디에다 두었느냐?"
수월암주는 담담한 표정으로 불호를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빈니는 얘기를 할 수가 없소."
옥탑단장인은 두 눈을 부릅뜨며 싸늘하게 윽박질렀다.
"뭐라고? 좋다. 얘기를 못하겠다면 이 암자를 당장 불살라 버리겠다."
수월암주는 침울한 표정으로 합장을 했다.
"나무아미타불… 먼저 빈니의 얘기를 들어 주십시오."
옥탑단장인의 눈에서는 새파란 독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따위 지저분한 얘기는 멍청이한테나 해라."
그녀는 대뜸 몸을 날려 암자 뒤로 덮쳐갔다.
아무도 그녀의 앞을 가로막을 수 없을 만큼 그녀의 기세는 흉흉했다.
돌연 회색 인영이 번쩍하는 곳에 한 분의 중년 여승이 나타나 그녀의 앞을 막으며 소리쳤다.
"시주, 여기는 불문의 성지입니다."
그러나 이미 눈이 발칵 뒤집힌 옥탑단장인의 귀에 그런 말이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대뜸 거센 장풍을 밀어내며 야수같이 날뛰었다.
"비켜라!"
위중평의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뒤따라 나왔다.
"휙!"
거센 장풍이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며 중년 여승를 향해 무지막지하게 날아갔다.
이 장력에 맞기만 해도 중년 여승은 살아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안 됩니다."
그는 사납게 외치며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순간 자주빛을 띤 장풍이 날아가 괴이하게도 옥탑단장인의 장풍을
그대로 흡수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실로 귀신도 탄복할 만한 솜씨였다.
"앗!"
옥탑단장인은 뜻밖의 변화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가 놀란 것은 자기의 장풍이 무형화되어서가 아니라
위중평이 지금 발출한 장풍이 바로 무림에서 전설적으로 되어 있던
최상승의 무학인 기신합일(汽神合一)의 수법이기 때문이었다.
위중평의 무공은 일 년 사이에 입신(入神)의 경지에 다다랐다.
옥탑단장인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겉으로는
짐짓 분노를 금치 못하고 사납게 소리쳤다.
"이놈! 무공을 배웠다고 감히 남을 도와 자기의 이모와 상대를 하려 하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위중평은 황급히 허리를 조아렸다.
"이모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무슨 말씀이냐고? 그럼 방금 너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하란 말이냐?"
위중평의 미간은 자신도 모르게 잔뜩 지푸려졌다.
"이모님, 후배가 어찌 이모님에게 해를 끼치겠습니까?"
그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저는 절데로 이모님의 말씀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옥탑단장인은 흠칫 놀란 표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건 무슨 이유냐?"
위중평은 청아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이류는 간단합니다. 추혼낭자는 비록 이모님의 따님이기는 하지만
제가 알기에 이모님께서는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놈! 어디 감히 네 마음대로 지껄여 봐라."
"뿐만 아니라 이모님께서는 젊디 젊은 따님을 데리고 다니며 강호에서
온갖 흉악한 짓을 저지르고 다니셨습니다."
옥탑단장인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위중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위중평의 얘기는 터진 봇물처럼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더구나 이모님께서는 따님을 좋은 길로 인도하지 않고 오히려 죄악의 길로 빠져 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무슨 염치로 또다시 따님의 행복을 빼앗으려는 겁니까?"
옥탑단장인은 입이 얼어붙은 듯 말도 하지 못했다.
만약 평소의 그녀라면 위중평의 분을 참지 못하고 벌써 손을 썼을 것이다.
어찌 된 셈인지 그녀는 출수는 커녕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갑작스레 몸을 돌려 떠나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
위중평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그 자리에서 넋을 잃었다.
이때 선방 안에서 낭랑한 수월암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무아미타불… 여마두에게도 역시 선량한 일면이 있었구려."
수월암주가 천천히 선방에서 걸어나왔다.
위중평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겉모습은 차갑고 잔인하게 보이지만 사리를 자세히 분간할 줄 아는 사람으로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위중평이 이번에는 앞으로 수월암주는 미처 몰라다는 듯이
긍정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위중평은 문득 명명주재와 옥탑단장인 그리고 한해독부를 비래봉으로
요청한 일이 생각나 급히 말을 꺼냈다.
"백골상인께서 벌써 명명주재와 옥탑단장인 그리고 한해독부 등을
비래봉으로 오라고 요청했는데 암주께선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수월암주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백골상인께서는 무림의 기인이시니 빈니가 가건 안 가건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이네."
"알겠습니다. 그럼 후배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기를 바라네."
위중평은 가벼운 마음으로 수월암주와 작별을 고하고 수월암을 떠났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탄식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았다.
거기에는 옥탑단장인이 하나의 오래된 무덤 앞에 멍청히 서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몹시 처량해 보였다.
그는 지체없이 뒤로 다가서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
"이모님!"
옥탑단장인은 약간 몸을 움직였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위중평이 이번에는 앞으로 돌아가 공손하게 말했다.
"이모님, 좀 전에 제가 한 말 때문에 화가 나셨습니까?"
"…"
그래도 옥탑단장인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침묵만 지키는 것이었다.
아마도 마음의 격동을 애써 가라앉히는 모양이었다.
"이모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슬퍼하진 마십시오.
이후 이모님께서는 절대 적적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제서야 옥탑단장인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건 무슨 뜻이냐?"
위중평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희들이 대신 이모님을 친어머니 이상으로 모시겠습니다."
위중평이 말한 우리란 바로 자기와 금루선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옥탑단장인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얘야, 이모는 절대 너를 읜망하지 않겠다.
확실히 이 이모는 과거 어머니가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구나…"
과거 그녀는 남의 충고란 눈꼽만큼도 듣지 않았다.
오직 자기 성질이 내키는 대로 살상과 방화를 저질렀다.
그런 그녀가 위중평의 말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이었다.
비로소 그녀는 자기가 과거 너무 자기 주관대로만 일을 처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옥탑단장인은 장탄식을 하고 있다가 돌연 부드러운 목소리로 뜻밖의 말을 꺼냈다.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 듣기가 좋았다.
"얘야, 너는 전에 네 부친이 해를 당한 경과를 듣고 싶어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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