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무흔검(無痕劍)

10. 살풍

오늘의 쉼터 2014. 6. 20. 15:50

10. 살풍

 

 

한편 위중평은 황량한 밤바람이 불어오는 음산한 만불사에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위중평은 완전히 삼흉을 찾으려다 헛탕을 치고 만 것이었다.

이 때 문득 아까 석룡노괴가 한 말이 생각났다.

위중평은 곰곰이 생각을 굴려보다가 그것은 곧 석룡노괴가 자기에게 삼흉이 강남으로

갔다는 것을 은연 중에 암시해 주는 것이란 짐작이 들었다.

그러나 일단 강남으로 가서는 삼흉을 찾지 못한다면 자기는 홍모음효(紅毛陰梟)가 있는 곳을

 아는 까닭에 그를 이용해 찾으면 될 것이라고 안심을 한 후 결심이 서자

그 밤을 도와 말을 달린 끝에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북경(北京) 그리고 경양(京襄)의 큰길에

들어섰다.

경양에서 아직 몇 십 리를 더 가야 겨우 개봉(開封)이었다.

그러나 이미 날은 어두워져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지만 위중평은 어떻게 하든지 개봉성으로

들어가 복수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것은 일단 개봉성 안으로 들어가면 침식이 편리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나가는

분주한 곳이니만큼 그동안 강호의 소식을 물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정신없이 큰길을 달리고 있는 위중평의 귓전으로 갑자기 여인의 음성이 간간이 섞인 싸움 소리가 들려 왔다.

위중평은 정신없이 달리는 경황 중에도 이 여인의 음성이 몹시 귀에 익다는 것을 생각하고

소리나는 곳으로 말고삐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잡초가 무성히 자란 고분 사이로 일남일녀가 무서운 격투를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옆에는 다른 한 명의 나이 어린 청년이 앉아 재미있다는 듯 박수까지 쳐가면서 응원을

하고 있었다.

위중평은 가까이 다가가 보는 순간 그만 크게 놀라고 말았다.

싸움을 하고 있는 여인은 바로 장산도의 안미옥이었고 안미옥과 싸우고 있는 사람은 일신을

검은색 장삼으로 싼 유생이었는데 그리 험상궂은 얼굴이 아니었지만 창백한 얼굴에 어딘가

모르게 음흉이 엿보이고 있는 것이 결코 좋은 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의 옆에 있는 자는 바로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철적왕손 모조음이 아닌가.

위중평이 현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철적왕손은 이미 그를 발견하고 안색이 백짓장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그러자 공격을 하고 있는 유생을 향해 나직이 소리쳤다.

 

"천형, 빨리 해치워야 하겠소. 누군가가 오고 있소."

 

이 때 안미옥도 위중평이 나타난 것을 발견하고 내심 크게 기뻐 소리쳤다.

 

"상공!"

 

안미옥이 막 검세를 거두고 위중평이 다가오는 곳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음독무비한 흑의수사는 바로 그 순간을 이용하여 그녀의 어깨를 향하여 돌연 일 장을 격출해

내는 것이었다.

이 일 장의 속력은 몹시 빨랐을 뿐 아니라 또 안미옥의 빈틈을 보인 순간이라 꼼짝없이

정통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악!"

 

안미옥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칠팔 자나 나자빠질 듯 뒤로 밀려났다

위중평은 안미옥인 이처럼 갑자기 당할 줄은 정말 몰랐었다.

위중평은 황망히 말에서 내려 비틀거리는 안미옥을 부축하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괜찮겠소?"

 

안미옥은 수중의 검으로 몸을 지탱시키며 두 사람을 가리켰다.

 

"난 괜찮아요. 그러니 우선 저 사악한 두 놈부터 처치해요."

 

위중평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품 속에서 약을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우선 이것을 복용하시오. 내가 그동안 저들을 상대할 테니."

 

말을 끝내기 무섭게 위중평은 맹렬히 몸을 틀어 원독이 번득이는 눈초리로 흑의수사를 노려보았다.

흑의수사는 이런 위중평의 눈초리와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철렁함을 느꼈다.

이어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속으로 크게 중얼거렸다.

 

'아니, 저놈은 대체 어디서 왔길래 두 눈에 번득이는 살기(殺氣)가

이처럼 사람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러나 곧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경멸의 코웃음을 날리며 거만하게 소리쳤다.

 

"야, 네가 뭔데 건방지게 나서는 거냐? 엉!"

 

위중평은 의연히 버티고 서서 말을 꺼냈다.

 

"난 장백파의 위중평이라 한다. 네놈은 또 무엇이길래 연약한 여자가 한눈을 파는 틈을 타서

상처를 입히느냐? 이 비겁한 놈 같으리고…"

 

그러나 흑의수사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가소롭다는 듯 배를 쥐고 웃었다.

 

"야… 정말 기적이로군. 장백파가 다시 강호에 머리를 내밀다니 정말 지나가는 개조차 웃겠다.

아하하하… 하하하…"

 

그러나 옆에 있던 철적왕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도록 크게 놀랐다.

 

"앗, 이제 보니 저놈이 어느새 장백파의 진전을 받았구나.

오늘은 기어코 주저하지 말고 저놈을 죽여 버려야겠다!"

 

철적왕손은 자기는 손을 쓰지 않고 두 사람을 싸움 붙이기로 음흉한 속셈을 품었다.

 

"이 눈알이 먼 놈 같으니라고… 네가 감히 당당한 적발교의 소주에 덤벼들다니

정말 가소롭구나.

너같은 놈은 소교주 흑심수사(黑心秀士)께서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철적왕손은 흑심수사라 불리운 유생을 향해 충동질을 가했다.

 

"소교주, 저렇듯 적발교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놈을 살려 두었다간 적발교의 체면 문제입니다!"

 

그러자 흑심수사는 음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이제 보니 네놈이 바로 봉천분타에서 독비악개를 장풍으로 부상시킨 그 위가 놈이로구나! 오냐 오늘 본 소교주의 흑살장(黑煞掌) 맛을 한 번 보여 주겠다!"

 

말을 끝내기 무섭게 흑심수사의 절초라는 흑살장이 격출되자 휘익 하는 바람을 타고

구토가 날 듯한 악취가 풍기며 노도같이 뻗어 나오는 살장의 위력은 매우 대단했다.

위중평은 격노한 끝에 살장의 경력을 단번에 무형으로 와해시킨 후 바른손으로는 일식의

진령운횡(秦嶺雲橫)으로 맹렬한 반격을 시도했다.

흑심수사는 본래 자기의 웅후한 내력을 믿고 일 장을 격출해 내었던 것인데 쌍방의 장세가

맞붙는 순간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흑심수사는 황급히 신형을 뒤로 날렸으나 신형을 바로잡을 때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흑심수사는 어이 없게 밀려나자 악종다운 기질이 치밀어 올라 살기 가득찬 교성을 터뜨리며

순식간에 흑살장을 아홉 장이나 격출해 내었다.

흑살장은 이름난 독장으로 그 초식이 음독할 뿐 아니라 기독(奇毒)까지 지니고 있어 일단

격중되었다 하면 열두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뼈가 녹아 죽고 마는 무시무시한 장이었다.

위중평은 그처럼 흉악한 초식이 시전되자 정신을 바싹 차리고 황급히 칠 장의 반격을 쳐내었다.

 

"펑!"

 

지축을 흔들 것 같은 광음이 터지자,

 

"으악!"

 

하고 처절한 비명이 뒤를 따르며 흑심수사는 마치 실이 끓긴 연처럼 일 장이나 밀려나

겨우 몸의 중심을 잡았다.

그러나 가슴이 들끓어 한 모금의 시뻘건 선혈을 뿜어내며 급급히 외쳤다.

 

"네 이놈, 어디 두고 보자! 내 네놈을 결코 그냥두지 않겠다."

 

이 말을 끝내고 흑심수사는 곧장 몸을 날려 나는 듯 사라져 버렸다. 위중평은 도주하는

그를 그냥 놔두고 철적왕손을 향해 접근해 들어가며 말을 뱉아내었다.

 

"넌 또 내가 못마땅하겠지. 자, 그렇다면 나의 삼 초를 한 번 받아 보아라!"

 

이것은 일종의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철적왕손은 위중평의 무서움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그와 맞설 실력이 없었기에

가만히 눈치를 보다가 즉시 몸을 돌려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쳐 버렸다.

위중평은 역시 철적왕손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위중평은 두 사람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다가 곧 몸을 돌려 안미옥에게 다가와 그녀의 상세를 살폈다.

이 때 안미옥은 이미 아까 맞은 독장의 발작이 시작되었는지 하얀 얼굴에 한 가닥의 흑기가

은은히 떠오르고 있었고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떨더니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져 들어갔다.

위중평은 그것을 보자 몹시 조급해 황급히 그녀의 입 속에다 용호구환단을 넣어 주고는

그녀를 말에 태우고 개봉성으로 질주해 갔다.

초경 무렵까지 당도할 수 있겠다고 계산을 했던 것이 의외의 일을 만나 이경이 넘어서야

겨우 개봉성에 들어서게 되었다.

위중평은 급급히 객점을 구해 그녀를 방안에다 눕힌 후 상세를 살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님녀가 한 방을 쓴다는 자체부터 불편한 일인데 이제 그녀의 옷을 벗겨 상세를 봐야 할 지경이라

위중평으로서는 정말 난처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위중평은 몇 번이나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옷을 벗기려다가 그만 두고 다시 벗기려다가는

손을 멈추었다.

한참 동안 안미옥의 창백한 얼굴을 들여다보던 위중평은 드디어 이를 악물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 처했는데 내 어떻게 세속의 관습에만 얽매어 주저할 수 있겠는가!

만약 여기서 더 주저하다가는 그녀의 생명도 끝이 나는 것이 아닌가?'

 

위중평은 드디어 용기를 발휘해 그녀의 옷을 한 겹 한 겹 벗기기 시작했다.

 

드디어-.

위중평의 손이 안미옥의 마지막 속옷에 닿자 그의 손은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고

새하얀 속옷에 달려 있는 자그마한 단추만 만지작거릴 뿐 그는 차마 풀지 못했다.

의식을 잃은 여인을 눈앞에 두고 위중평이 다급하고 곤란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였다.

 

"후후훗…"

 

갑자기 창 밖에서 터지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때는 이미 삼경이라 객점의 손님들도 모두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을 텐데 웬 때아닌

웃음 소리란 말인가.

위중평은 마치 무엇을 훔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화끈거려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쳤다.

 

"누구요?"

 

소리치며 위중평은 창 밖으로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라갔다.

위중평은 강호의 경험이 없는 까닭에 무턱대고 지붕 위로 올라갔지만 거기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일 리가 만무였다.

위중평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니 분명히 사람의 소리가 들렸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위중평은 의아스러운 듯 중얼중얼 거리며 한참 살펴보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순간-.

위중평의 가슴은 토끼가슴처럼 마구 뛰었다.

이제 보니 안미옥의 상의는 완전히 벗기워져 백옥같은 흰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막 피어오르는 여인의 풍만하고 탐스러운 두 젖가슴은 위중평의 뇌리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위중평은 이를 악물고 누가 들어와 그녀의 옷을 벗겼는가는 잊어버리고

그녀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이어 위중평은 그녀의 기문혈과 장대혈에 시커먼 장인(掌印)이 찍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장인이 찍힌 부근은 이미 흑색 무늬가 만연되어 있어 곧 전신으로 독기운을 퍼뜨릴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위중평은 그녀의 코 끝에 손을 갖다대었으나 안미옥의 숨은 곧 끊길 듯 바람 앞의 등불모양

연약하기 그지없었다.

위중평은 급급한 나머지 어떻게 할 줄을 몰라 다시 용호구혼단을 한 알 꺼내

그녀의 입에다 넣어 주었다.

워낙 이런 일에 경험이 없는 위중평으로서는 방안만 왔다갔다 할 뿐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다.

문득 정신없이 방안을 배회하던 위중평의 눈이 탁상에 가 닿자 곱게 접은 종이 쪽지가

시야에 들어 오는 것이었다.

위중평이 급히 쪽지를 펴보니 그 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이것은 흑살장에 부상을 입은 것이니 만큼 빨리 손을 써야지 늦으면 큰일납니다.

저는 여자의 몸이라 순음(純陰)의 체질이니 도움을 드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순양(純陽) 선천지기(先天之氣)로 체내의 살독을 밀어내기만 하면 상세는

곧 호전될 것이에요.>

 

글씨는 마구 갈겨 썼으나 제법 예쁜 모양이었고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것을 쓴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다는 말인가…"

 

위중평은 갑자기 창 밖에서 터진 웃음 소리를 생각하고 이 행위의 장본인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위중평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곧 안미옥의 상세를 치료해 줄 생각을 하였다.

 

"내가 연마한 조화현공(造化玄功)이 바로 선천의 순양지기이다.

내 비록 육칠 성 정도밖에 연마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나는 이 위급한 순간을 맞아 시도를 해봐야만 한다."

 

위중평은 마음의 결정이 서자 즉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조화신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점점 시간이 지나자 위중평의 머리 위에는 가물가물 굵은 기체가 피어오르며 전신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순간 위중평의 안색도 적색으로 변했는데 이것은 바로 위중평의 공력이 약간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어 위중평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안미옥의 상처를 입은 곳에 갖다대자 시체가 썩은 듯한

검은 연기가 그녀의 몸에서 발산되어 나왔다.

위중평은 그것을 보자 다시 그녀의 전신 요명대혈을 비호같이 찍고는 잠시 주저하더니

드디어 떨리는 손으로 안미옥의 하의도 완전히 벗겼다.

위중평도 다시 안미옥의 대혈을 누른 후 그녀가 책상다리를 하도록 앉혔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안미옥의 상처에 있던 흑살무늬가 점점 풀어져 흐릿해지더니

호흡도 제대로 돌아왔다.

이 때 안미옥은 마치 보살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위중평은 드디어 그녀의 명문혈을 눌러 한 줄기의 선천순양진기를 서서히 체내로 주입시켰다.

그 진기는 즉시 안미옥의 기해혈을 거쳐 항당(降當)으로 들어가더니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십이 중루(重樓)를 뚫고 체내의 십이 도(道) 경맥(經脈)과 삼맥 칠십 구혈을

휘몰아쳐 갔다.

위중평은 생전 처음 조화신공을 실전해 보는 까닭에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전력을 다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것이 놀랍게도 안미옥의 전신 경맥을 찍게 되어

무림인이 수십 년에 걸쳐 뚫기 힘든 임독 이맥을 관통(貫通)시키고 만 것이었다.

이 때 안미옥의 체내에는 거무죽죽한 빛이 완전히 가시더니 천천히 깨어나기 시작했고

그 때 안미옥은 거대한 기류가 혈맥을 뚫고 타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돌연 체내의

공력이 예전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안미옥은 크게 기뻐 두 눈을 번쩍뜨다가 하마터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자기의 옆에는 얼굴이 불덩어리처럼 시뻘건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안미옥은 경황 속에 온몸이 좀 써늘한 것을 느껴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앗!"

 

낮게 입 속으로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이제 보니 자신의 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아닌가.

안미옥이 급히 옷을 잡아 끌어 몸을 가리며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이 불덩어리처럼 시뻘건 남자는 점차 본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안미옥이 자세히 보니 그 남자는 바로 자신이 밤낮으로 생각해 온 위중평이었다.

안미옥은 부끄럽고 기쁜 마음에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급히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몸을 가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위중평은 두 눈을 뜨더니 입을 떼었다.

 

"미옥낭자, 상세는 좋아지셨소?"

 

안미옥은 크게 기뻐하며 그만 이불을 젖히고 뛰쳐 나오며 소리쳤다.

 

"그럼요. 벌써 다 나았어요. 상공, 정말 고마워요!"

 

그러나 안미옥은 갑자기,

 

"어머나!"

 

하고 소리치며 황급히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알고 보니 그녀는 조식을 하고 있는 위중평에게 방해가 될까봐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옷을 입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안미옥은 눈을 싹 흘기며 그러나 싫지 않은 듯 소리쳤다.

 

"모두가 당신 때문이에요. 어서 나가요. 그래야 옷을 입을 게 아니예요?"

 

"위중평은 그녀가 당황해 하며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매우 우스웠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꾸뻑 숙여보였다.

 

"알겠소."

 

위중평은 그녀를 향해 혀를 쑥 내밀어 보이고는 이내 밖으로 나갔다.

위중평이 한참 방문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성거리고 있으려니까 안미옥이 소리 높여 불렀다.

 

"아니, 그 앞에서 밤새도록 서 있을 작정인가요? 어서 들어오지 않고 무엇 하는 거예요?"

 

위중평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안미옥은 어느새 옷을 단정하게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위중평이 들어서기 무섭게 질문부터 했었다.

 

"그래 두 명의 악도들은 어떻게 했어요?"

 

위중평은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대꾸했다.

 

"흑심수사는 내부에 상처를 입었고 철적왕손은 겁에 질려 도주를 해 버렸소."

 

안미옥은 그 말을 듣자 안타까워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 그 자들을 살려 두지 않았어야 했어요! 당신이 큰 실수를 했군요."

 

이어 안미옥은 그 두 사람을 만나게 된 경위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원래 안미옥은 위중평과 헤어진 후 장산도로 들어가 자기 부친인 안춘휴에게

위중평을 만나게 된 경위를 설명해 주었고 이어 그녀는 자기의 아버지에게서

위중평의 복수를 도와 주겠다는 언약을 받은 후 그 소식을 위중평에게 알려 주려고

달려오던 길이었는데 뜻밖에도 두 악도 흑심수사와 철적왕손을 만나 봉변을 당하던 중에

위중평이 적시에 나타나 구해 주었던 것이었다.

안미옥의 얘기가 끝나자 위중평은 즉시 요동에서 있었던 근래 상황을 안미옥에게 일러 주며

근래 강호에서 어떤 특별한 소식이 없느냐고 물었다.

안미옥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대꾸했다.

 

"우리 강남도 사람들이 얻은 소식에 의하면 적발교주 은대웅은 소협이 봉천분타에서

독비 악개를 없어 버린 소식을 듣고 크게 격노해 모든 교도들을 풀어 소협의 뒤를 쫓게 했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무슨 일인지 몹시 조용하다고 하더군요."

 

위중평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신중하게 말했다.

 

"음, 그것은 바로 이번 삼흉이 실종된 것과 커다란 관련이 있는 것이오."

 

안미옥은 뜻밖의 소리라는 듯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뭐라고요? 삼흉이 실종되었다고요?"

 

위중평은 생각할수록 분한 듯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단불사를 찾아가기 바로 전날 모든 승려들을 데리고 모두 떠났다는구려?"

 

그 때였다.

 

"으하하하… 하하하…"

 

갑자기 문 밖에서 일진의 광소가 터지더니 인영 하나가 안으로 덮쳐 들어왔다.

 

"삼흉은 결코 자네에게 겁을 먹고 도주를 한 게 아닐세."

 

여기서 일단 말을 끊고 나타난 사람은 다시 구체적으로 말을 이었다.

 

"금번 강호에는 마녀의 살풍이 채 멎기도 전에 마군이라는 자가 다시 나타났고

또 자네와 같은 소살성(小煞星)이 나타났으니 이제 이 강호에는 평온할 날이 없겠군…"

 

이 횡설수설하는 말들로 미루어보아 대뜸 상대가 구주풍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미옥은 이 구주풍인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예를 올렸다.

 

"백부님, 이곳엔 언제 오셨나요?"

 

구주풍인은 우선 품 속에서 호로병을 꺼내 입 속으로 벌컥벌컥 쏟아 넣더니

즉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죽이고 죽고 또 죽이고 죽는다…

너희들은 서로 죽이고 죽고… 나는 그저 그 재미를 보고 으하하하하…"

 

구주풍인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입언저리에 묻은 술을 다시 혓바닥으로 핥으며 흥얼거렸다.

안미옥은 그 모습을 그냥 봐줄 수 없는 듯 대뜸 손을 뻗어 그의 호로병을 빼앗으며

앙칼지게 외쳤다.

 

"백부님,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구주풍인은 다시 그녀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들더니 다시 끝까지 벌컥벌컥 들이키고 난 후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냐, 오냐… 알았어. 다시 이 강호엔 일 장의 살겁(殺劫)이 일 것이다…"

 

비록 미친 척하는 말이었지만 그의 말 속에는 무엇인가

세상을 꼬집는 듯한 깊은 뜻이 숨겨져 있었다.

위중평은 그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구주풍인은 술을 다 마시고 나자 침을 꿀꺽 삼키며 위중평과 안미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맨 처음에는 추혼천녀가 나타나 이 무림에 피를 흘리고 다니더니

다시 이번에는 흑도에서 흉신(兇神)으로 이름이 난 자선마군이 다시 강호에 나타났고…"

 

구주풍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짐짓 무엇을 생각하는 듯한 심각한 표정으로 위중평을 쳐다보았다.

 

"음… 그리고 이번에는 복수에 불타는 화신 소살성이 나타나 이미 살겁을 일으키고 있는

이 마당에 다시 또…"

 

구주풍인은 손등으로 입술을 쓱 문지르고 나서 다시 이었다.

또 옥탑장진도(玉塔藏珍圖)와 이궁금시(離宮金匙)가 다시 강호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이 말이 나오는 순간 위중평과 안미옥은 동시에 긴장했다.

 

"어쨌든 이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또 한 번의 살겁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여기서 또 말을 끊은 구주풍인인 천정을 쳐다보며 미친 듯 웃어 젖혔다.

 

"으하하하… 좋아… 좋아, 모두 죽이고 죽는 거다.

대신 난 옆에서 재미있는 구경을 하는 것이지. 하하하하…"

 

위중평과 안미옥은 그제야 말을 할 겨를을 찾고 동시에 경악에 찬 음성으로 물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구주풍인은 다시 미친 듯 웃어 젖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말이고 말고. 네 아버지도 지금 이미 많은 고수들을 거느리고 강호에 뛰어들었단다."

 

말을 끝내고 구주풍인은 목을 길게 뽑아 창 밖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이 때 어느새 날은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구주풍인은 대뜸 안미옥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자, 어서 나를 따라 오너라. 밤새 떠들고 다녔더니 배가 몹시 고프구나.

내 술과 먹을 것을 사줄 테니 어서 따라오너라."

 

그러더니 미처 안미옥의 대답도 듣기 전에 그녀의 손을 잡아 끌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안미옥은 위중평에게 채 무엇이라고 한 마디도 하기 전에 끌려나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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