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은원(恩怨)
이미 그 행공이 절정에 이른 위중평은 주위의 소란에 크게 놀라 진기가 흩어져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위중평은 숨을 헐떡이며 의외로 나타난 자에 의해 죽음의 일보 직전에 처해 버리고 말았다.
막 그 사람의 걸음이 위중평의 머리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였다.
"멈춰라!"
하고 문 밖에서 일성의 교갈이 귓청을 뚫을 듯 터져 나왔다.
위중평은 거듭되는 소란에 마음이 급한 나머지 그만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위중평은 한 줄기 청량하고도 신선한 기류가 체내에 흐르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천천히 의식을 회복했다.
순간 위중평은 자기가 이미 누구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고 느껴 황망히 잃었던
체내의 진기를 운공해 보았다.
하늘의 도움이었을까?
위중평은 죽음 직전에서 살아났을 뿐 아니라 이미 잃어버렸던 기(氣)와 신(神)이
다시 단전으로부터 천천히 모아지는 것이었다.
위중평이 완전히 회복하고 두 눈을 떴을 때에는 그를 도와준 인영은
이미 밖으로 사라진 뒤였고 비록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아직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위중평은 황급히 운기를 하고 나서 체내에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 때 그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옆에서 운공조식을 하고 있는 금루선연이
아무런 침해도 받지 않고 조식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자 매우 마음이 놓였다.
위중평은 천천히 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위중평은 철적왕손 모조음이 혈도가 찍힌 채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위중평을 암습하려던 자였다.
이 때 모조음은 아까의 살기도 싹 가신 채 그저 목숨을 애걸하는 듯한 가련한 눈빛으로
위중평을 바라보고 있었다.
철적왕손 모조음은 이미 오늘뿐 아니라 수차에 걸쳐 위중평을 죽이려고 했던
음독하고 간악한 자였는데 그가 이런 꼴이 되어 버리자 정말 눈뜨고 못 봐줄
치사스런 모습이었다.
지금 위중평이 그를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쉬웠지만
원래 성격이 꼿꼿하고 항상 정의를 위하는 위중평은 결코 이런 치사스런 짓을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의 마음 자세가 또 용납을 해주지 않아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다가가서 혈도를 풀어 주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갑자기 위중평의 등 뒤에서부터 한 줄기 경풍이 소리없이 엄습해 오는 것이 아닌가?
방금 위중평이 혈도를 풀어준 철적왕손은 이처럼 야비하게 암습을 한 것이었다.
위중평은 세상에 이처럼 악랄한 인간이 있었다는 것에 실로 통탄과 의아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위중평은 대번에 주먹같은 울화가 치밀어 당장 일 장의 반격을 가하려고 했지만
묘 안에서 조식을 하고 있는 금루선연에게 어떤 충격을 줄 것이 염려되어 참았다.
위중평은 즉시 공력을 운집해 철적왕손이 쳐낸 장세를 피해 문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철적왕손은 이 일 장으로 위중평을 깨끗이 해치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는데 상태가
예기치 않게 변하자 그만 크게 놀라고 말았으나 놀라움도 잠깐 철적왕손은
즉시 철적을 꺼내들고는 문 밖으로 쫓아나왔다.
묘 밖에는 위중평이 어느새 팔짱을 끼고 그 자리에 비석처럼 꼿꼿하게 선 채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냉랭하고도 엄중하게 말을 꺼냈다.
"아마도 내가 눈에 매우 거슬렸던 모양이구나. 하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줄 테니
썩 내 앞에서 사라지거라. 어서?"
위중평은 워낙 천성이 웅후해 철적왕손이 비록 자기에게 못된 짓을 수차례나 걸쳐 했지만
신가보에 있었던 그 인연 때문에 상대를 죽일 수가 없었다.
철적왕손은 위중평의 관대하고 의연한 모습애 그 잔혹한 생각이 자극을 받았는지
더 이상 무엇이라 하지 않고 고래고래 고함만 질렀다.
"이 겁없이 대담한 종놈 같으니라고 네놈이 본 나으리에게 그따위 못된 언사를 지껄이다니!"
이 말은 위중평이 눌러 참았던 분통을 발작시켜 그로 하여금 처절한 광소를 터뜨리게 만들었다.
"으하하하… 하하하…"
이 광소는 마치 길을 잃어버린 야조(夜鳥)의 울부짖음 같이 듣는 이의 모골이 송연하게 만들었고
격분과 분노가 흥분된 것이었기에 그 웃음을 듣는 순간 철적왕손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위중평은 광소를 멈추더니 두 눈에 새파란 살기를 띠며 소리쳤다.
"네 놈이 기어코 날 해치려고 드는구나.
좋다. 너는 수차례에 걸쳐 내게 야비한 행동을 했지만 내가 네놈을 죽이지 않았던 것은
바로 신가보에서 있었던 인연 때문이다.
그런데도 네놈은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여 그러는 줄 알고 계속 날 자극시키는데
그러면 오늘 기어코 네놈을 죽이고야 말겠다!"
위중평은 이제 이성으로써는 이 격동의 감정을 누를 수가 없어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철적왕손을 향해 다가섰다.
철적왕손은 철장진 건곤의 수제자로써 지금은 이미 그의 진전을 받아
그 실력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고 있었으나 지금은 아까 자신이 내뱉은 종놈이라는
두 글자에 책임을 지지 못하고 전신에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섰지만
본래부터 악의 근성을 지닌 철적왕손이라 결코 그대로 물러서지를 않았고
오히려 악에 바친 채 시퍼렇게 안색이 질려 크게 소리쳤다.
"네 이놈, 까불지 말고 나의 초식이나 한 번 받아보아라!"
철적왕손은 대번에 철적을 휘둘러 일 초 만천풍우(漫天風雨)로 주위 사방을
온통 철적의 그림자 속으로 몰아넣었다.
위중평은 그래도 한 번 더 참자는 마음으로 먼저 손을 쓰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었는데 철적왕손이 먼저 악랄한 초식을 전개해 내자
즉시 냉소를 날리며 장백파의 가전무공을 시전해 내자 철적왕손도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신가보의 절초를 있는대로 시전해 내었다.
불꽃 튕기는 싸움으로 돌입해 들어가 순식간에 십여 초를 교환하였다.
이 때 운공을 끝낸 금루선연이 묘 안에서 뛰쳐 나오며 앙칼지게 외쳤다.
"아니 왜들 이러세요? 어서 싸움을 멈추세요! 빨리 멈추란 말이에요!"
이 음성에는 초조와 어떤 말할 수 없는 당혹이 가득 담겨 있었다.
위중평은 몹시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다보았는데 이것이 그의 불찰이었다.
보통 고수들의 싸움에 있어서는 추호도 허실을 보여서는 안 된다.
철적왕손은 바로 위중평이 금루선연에게 시선을 돌피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일 초의 우주강천(雨酒江天)으로 맹공을 했다.
순간-.
쫙!"
하는 예리한 소리가 들리며 위중평의 왼쪽 어깨 옷자락이 길게 찢어지고 말았다.
이것을 본 위중평은 이제 더할 수 없이 격노했다.
"네 이놈, 내 결코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소리치며 위중평은 번개같이 전력으로 일 장을 쳐내었다.
하지만 철적왕손은 이 무시무시한 일 장을 감히 받아치지 못하고 철적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는 것과 동시에 오른쪽으로 몸을 날려 경도의 중심을 피해 내었다.
그러나-.
철적왕손이 비록 빠르기는 했지만 위중평은 그보다 더욱 빨랐다.
철적왕손이 채 중심을 잡기도 전에 이미 위중평의 제 이 장은 그의 가슴팍에 닿고 있었다.
그것을 본 금루선연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소리쳤다.
"어서 멈춰요! 정말 일 장으로 사형을 죽이려 하나요?"
위중평은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울려 급급히 뻗은 장세를 거두고 뒤로 다섯 자 물러났다.
지금 위중평의 내력은 워낙 심후한 까닭에 이처럼 장력의 힘을 다시 빼냈지만 철적왕손은
나자빠질 듯 서너 보 밀리며 입가에 핏물을 머금었다.
"사형!"
금루선연은 소리치며 달려 나와서 철적왕손을 부축하고는 매우 관심어린 어조로 물었다.
"사형, 괜찮으신가요?"
그러나 철적왕손은 대꾸하지 않고 원한에 번쩍이는 눈으로 위중평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금루선연 신혜연은 본성이 매우 순박했다.
신혜연은 좋건 나쁘건 자기의 사형이 이처럼 부상을 입자 몹시 안타까운 어조로 위안을 하며
위중평을 향해 원망에 가득찬 어조로 외쳤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거예요? 집안 사람들끼리 서로 살생을 할 셈인가요?"
이 착하기만 한 아가씨는 이들 두 사람 사이의 분쟁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었으니
물론 철적왕손이 두 번에 걸쳐 위중평을 죽이려 했던 사실도 까맣게 모를 수밖에 없었다.
철적왕손은 위중평을 향해 이를 갈아붙이며 원한에 사무친 어조로 내뱉았다.
"두고 보아라, 내 기어코 네놈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네놈이 존재하면 내가 없을 것이고, 내가 존재하면
네놈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말을 끝낸 철적왕손은 나는 듯 오던 길로 사라져 버렸고 금루선연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얼떨떨해 하다가 곧 그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쳐 불렀다.
"사형, 잠깐만 기다려요! 도대체 두 분께선 무엇 때문에 서로 잡아 먹지 못해 야단들인가요?"
위중평은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라지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이상했다.
위중평은 철적왕손이 대체 무엇 때문에 시종 자기를 죽이지 못해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어떻게 되었든 어려서부터 커온 신가보의 금지옥엽 금루선연 신혜연의 마음을
결코 아프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참자, 내가 참아야 한다. 혜매를 위해서라도 나는 그런 소인(小人)과 같이 처신을 하면 안 된다.'
위중평은 금루선연에게 원망을 들으면셔도 철적왕손이 자기에게 두 번이나 비열한 암수를
내렸던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것이었다.
다시 살을 에이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위중평은 추운 줄도 모르고 오랫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찢겨져 나가는 듯한 아픔과 고독을 느끼며
그는 겨우 발길을 떼어 객점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그곳은 천산의 백갈애(百蝎崖).
언제부터인가 그 험한 절벽에 한 준미한 소년이 장삼자락을 날리며 서 있었다.
살을 에이는 한풍에도 불구하고 얇은 갈색 장포를 입고 허리에는 고색창연한 장검을 차고 있는
이 소년, 바로 위중평이었다.
지금 위중평은 호기당당하게 용담호혈(龍潭虎穴)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험준한 만불사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예리하고 먼 곳까지 투시할 수 있는 시야에
만불사의 불전이 들어왔다.
선화(祥和)와 평온을 잃은 지 오래인 이 성지(聖地)에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다만 전내를 휩싸고 도는 기운은 음험하고 음산하여 사방에는 공포스러운
기운이 가득 흘렀다.
위중평은 무섭도록 조용한 이 가운데에 무한한 살기와 암계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서서히 만불사로 향해 한 마리의 독수리처럼 허공을 가볍게 날아 절 안에 당도했다.
만불사 안은 여전히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기 때문에 일단 사내의 동정을 대충 살핀 후
다시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한 창노하면서도 음산하고 무게 있는 음성이 들려 왔다.
위중평은 이미 위험한 곳에 들어왔기 때문에 신경을 칼날같이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소리가 난 곳을 재빨리 탐지해 비호같이 몸을 날렸다.
이 때 위중평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커다란 고송(古松) 아래 노괴(老怪)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자 위중평은 급히 천마행(天魔行)의 초식으로 그 노괴의 앞 일 장쯤 떨어진 곳에 사뿐히
내려섰다.
노괴는 마치 신법이 날아오는 것 같은 위중평의 신법을 보자 암암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음, 정말 금세에 보기 드문 공력이로군…'
이 노인은 비록 흑도의 인물이기는 했지만 시비(是非)와 은원(恩怨)은
분명히 따질 줄 아는 위인이었다.
노괴는 즉시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칭찬을 했다.
"꼬마야, 넌 과연 네 아버지의 위풍을 그대로 타고났구나.
그리고 약속한대로 분명히 나타났고 말이다."
위중평은 호탕하게 웃으며 가볍게 예를 취해 보였다.
"하하하… 과분한 칭찬이오.
그보다 지금 삼흉은 어디 있소?
나 위중평은 약속한대로 왔는데 어째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오?"
노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나 석룡수는 개인의 일로 이곳에서 널 만났을 뿐이니 그외의 일은 내게 묻지 마라."
말을 끝내기 무섭게 노괴는 시커먼 윤이 번득이는 한 자 길이의 문창필(文昌筆)을
꺼내 들고는 암연하게 웃었다.
"노부의 이 문창필은 그간 십 년 동안이나 싸움을 하지 못했는데
오늘 비로소 너의 윌륜검법의 초식을 몇 초 받아볼까 한다.
만일 노부가 패했을 경우에는 너의 부친과 있었던 일은 말살시켜 버리고
노부는 황산에 은둔하기로 하겠다."
위중평은 본래 삼흉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왔기 때문에 그와 시간을 끌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위중평은 즉시 찬란한 빛을 발하는 무흔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시다면 어서 출수를 해보기로 하시오!"
석룡수는 옛날 같으면 위중평의 이런 방자한 태도를 대하는 즉시 발작을 했을 것이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다만 수중의 문창필을 가볍게 떨쳐내며 소리쳤다.
"그럼 어디 한 번 받아 보아라!"
문창필은 일 초의 도광처럼 허공을 예리하게 가르며 위중평의 현기(玄機)와 기문,
그리고 장대(長臺) 등 일곱 요혈을 향해 맹공격을 퍼부었다.
위중평은 최대의 강적을 맞이한 마당에서도 추호의 당황함도 보이지 않고
무실루대(霧失樓臺)로서 청색의 은은한 빛을 폭사시키며 받아내었다.
"창!"
맑은 금속성 소리가 터지며 검과 필이 서로 맞부딪쳤다.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손목이 떨어지는 듯 화끈한 아픔을 느꼈다.
성룡수는 평상시에 쌓아온 공력을 이 한순간에 결정지으려는 듯
십이 식의 오룡필법(烏龍筆法)을 동시에 전개해 내었고,
순간 사면팔방이 문창필의 그림자로 가득 메꾸어지며 허공을 가르는
싸늘한 음풍은 삼 장 안팎을 모두 휩싸 버렸다.
석룡노괴가 성명을 떨치며 한 오룡필법은 과연 비범하여 위중평은
그 때 사방에서 산세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압력을 느꼈으나
위중평은 절기를 몸에 지녔기 때문에 결코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이얍!"
맑은 기합을 한 번 터뜨려내는 것과 동시에 위중평은 단전의 진기를 모두 검신에 관주시켰다.
순간-.
예리한 검망이 줄기줄기 폭사되어 나오며 석룡수의 문창필 그림자를 꿰뚫어 나갔다.
두 사람은 모두 신중을 기해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문 채 전력을 다해 대항했다.
음산한 만불사 전내를 뒤덮어 버릴 듯한 경천동지할 초식으로 두 사람은 순식간에
수십여 초를 교환했다.
매서운 한풍은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고 두 사람을 휩쌌고 기합 소리와 주위의 나무를
쓸어 버릴 듯한 검세와 문창필의 그림자는 갈수록 그 위력을 더해갔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르는 가운데 석룡노괴는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그러나 위중평은 갈수록 힘이 더욱 솟구치는 것이었다.
이 때-.
"얍!"
위중평은 그 어떤 허실을 노렸던지 외마디 갈성을 내지르며 드디어 강호를 진동시켰던
월륜검법을 시전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석룡노괴는 오늘날 다시 옛날의 신주검성보다 그 위력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위중평에 의해 그 검법을 다시 맞이하게 되자 더할 수 없이 긴장하며 죽을 힘을 다해
맞받아쳤으나 형세가 완전히 불리해지는 것을 느낀 석룡노괴는 사력을 다해 진기를
양 팔에 운집시켜 일 초의 필부천군(筆掃千軍)을 격출해 내었다.
석룡노괴의 수십 년 간의 수위가 모두 이 일 초식에 집중되어 있는 듯 문창필은
마치 천 근이 넘는 위력을 지닌 듯 습격해 들었다.
순간-.
"챙그랑!"
하는 맑은 금속성이 터져 나오더니 석룡노괴의 모광은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석룡노괴는 급히 몸을 회전시켜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위중 평은
즉시 휘과퇴일(揮戈退日)로써 석룡노괴가 전력을 다해 뻗어낸 일 격을 월륜검법의
신묘한 힘으로 무형화시킨 후 다시 제 이 초인 일월강천으로 천만 줄기의 청망을 그려내어
노괴의 등 뒷쪽을 맹공해 들었다.
"휘익!"
차가운 한풍을 동반시키며 휘둘러낸 위중평의 검초가 곧 석룡노괴의 상체를 동강이 낼 순간이었다.
이 때 위중평은 석룡노괴가 꼭 죽어야 할 그런 악인은 아니라는 생각에 급급히 초식을 거두어
그의 옷자락을 잘라내는 것으로 끝을 내었다.
순간 모든 것이 정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석룡노괴는 한참 동안 멍청하게 위중평을 쏘아보고 있더니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려 내었다.
"으하하하… 하하하…"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며 처절과 절망이 가득 충만된 간장을 끊어내는 듯한 광소로
미친 듯 웃어젖히던 석룡노괴는 웃음을 뚝 끊고 두 눈에 기이한 정망을 번득거렸다.
"자네의 그 인후한 마음씀이 이 노부의 늙은 목숨을 살려 주게 하였군. 노부가 결코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위중평은 그 말을 듣자 문득 출도한 지 오래인 선배들이 후생들에게 밀려야 하는
어떤 서글픈 연륜(年輪)을 느꼈다.
"귀하,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보다 저는 삼흉을 찾으러 왔으니 그들이 어디 있는가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석룡노괴는 그 말에 안색이 싹 흐려져 몇 번인가 무슨 생각을 굴리더니
길게 탄식을 뿜어내었다.
"휴… 그들은 이미 어젯밤에 이곳을 떠났다네."
위중평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라고요? 그럴 리가…"
위중평은 꿈에도 요동을 독배하고 있는 고원삼흉이 자기와의 약속을 어기고
떠날 줄은 미처 몰랐다.
위중평이 잠시 입을 크게 벌린 채 말을 꺼내지 못하자 석룡노괴가 다시 우울하게 말을 꺼냈다.
"삼흉이 모든 절 안의 승려들을 거느리고 이곳을 떠난 것에는 복잡한 이유가 있다네.
그것은 자네가 온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어떤 보물을 손에 넣기 위해
그간 많은 애를 써왔다네."
석룡노괴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리고 자네가 그들을 찾아와 복수를 하는 것 외에도 추혼천녀나 자선마군 같은 명성이
쟁쟁한 마두들이 계속 그들을 괴롭혀 왔기 때문에 잠시 피한 것으로 생각되네."
석룡노괴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암담했고 또 처절했다.
"노부가 만불사의 손님으로 이렇게 그들의 비밀을 털어 놓는 것은 의리에 어긋나는
일이기는 하지만…"
석룡노괴는 다시 고개를 허공으로 올렸다.
"물론 자네가 이 늙은 목숨을 살려 주었다 해서 그것에 대한 보답보다도 노부는
그들의 음독한 수단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네."
석룡노괴는 어떤 괴로움이 있는지 자주 말을 끊었다.
"내 그래서 일러 두는 것인데 지금 만불사 사원 전체는 독물로 가득 채워져 있네.
그러니 자네의 무공이 제아무리 높다 해도 그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독사에게 물리고
말 것이니 일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이 좋을 것일세. 그리고 자넨 지금 속히 강남으로 가보게."
말을 끝내고 석룡노괴는 길게 탄식을 토해 내더니 소매를 펄럭이며 산 밑으로 사라져 갔는데
그런 석룡노괴의 뒷모습은 말할 수 없이 쓸쓸하고 또 안스러웠다.
위중평은 홀로 만불사에 남아 어떤 말로 할 수 없는 처절한 회한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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