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정협지(情俠誌)

제 35장 동병상련(同病相憐)

오늘의 쉼터 2013. 12. 14. 10:26

정협지(情俠誌)

 

35 동병상련(同病相憐)

 

동병상련을 앓는 두 여인 

 

 

 세월을 더듬어 올라가자면.감욱형이 구환암(九環巖)에서 스승 악청용을 따라서

일심전력으로 무예를 연마한 지도 어언 1년이 지났다.

어느날. 악청용은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더니.

감욱형을 불러 앉히고 자못 엄격하고 정중한 표정을 하며 이런 말을 했다.

 

" 네가 여기사 나를 따라 무술을 연마한 지도 어느새 일 년이 넘었다.

내공이건 외공이건 어느 방면의 재간을 막론하고 너는 이제 놀라운 진보를 보여주었다.

네가 처음으로 나를 만나게 됐을 때와는 천양지차로 너의 무술 실력이란 굉장한 경지에 도달했다.

이번에 내가 바위를 내려가 호수 밖에 나갔다가 한 가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숭양파와 회양방 쌍방이 금사보에서 세상에 공개하고 무술 경쟁을 한다 하며.

그날 무림의 모든 인물들이 모여든 앞에서 승부와 존망을 판가름한다고 하더라! "

 

악청용은 여기까지 말하더니.

한참 동안이나 감욱형의 표정을 살피며 둟어져라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감욱형은 스승의 뜻하지 않은 이야기를 시종 긴장된 표정으로 한 마디 한 마디 귀담아듣고 있었다.

악청용은 계속해서 말했다.

 

" 본래 너의 관계로 말하자면.

이 산 밖으로 나가서 숭양파를 도와 주어야 할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일찍이 내가 말해온 것과 같이 한 번 나의 문하에 들어왔으면

모든 과거의 은혜니 원수니 하는 감정은 깨끗이 잊어버려야만 된다.

어떤 파에도 어떤 방에도 가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번의 쌍방의 공개적인 무술 경쟁이라는 것만은 그것이 무림에

미치는 영향이나 관계가 지대한 바 있다.

그것이 쌍방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원한을 해결한다는 단순한 문제만이 아닐 것이다. "

 

스승 악청용은 감욱형에게 마지막으로 딱 잘라서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 ....... 그래서 이번만은 특별히 네가 참가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이니.

너는 모든 일을 신중히 판단하고 ........... 

하지만 너는 언제나 네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

절대로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때만 나서서 싸움을 거들도록 해라!

제일 삼가해야 할 것은 경거망동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내가 부탁하는 것은 너의 종적이나 진면목을 남에게 들키거나 꼬리를 잡히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도 그곳까지 달려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 개인적인 어떤 사건이 아직도 해결을 보지 못한 채로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이번 기회에 여기에 대해서도나는 최후의 결단을 내려버릴까 하고 있다."

 

말을 마치자 악청용은 거의 명령조로 감욱형에게 굴바위 바깥 세상으로 나가서

호수를 건너가라고 분부했다.

감욱형은 스승의 명령대로 짐을 꾸린 뒤 스승과 작별한 후 오랫동안 정든 바위 속 굴을

떠나 호수 저편 세상으로 나와서 곧장 회안 지방에 있는 금사보를 향해 길을 떠난 것이다.

순서를 말하자면.

감욱형은 당연히 제일 먼저 여러 스승과 선배급 인물들을 찾아봐야만 옳은 일이었다.

또 감욱형 자신도 그렇게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스승 악청용의 간곡한 부탁을 배반할 수 없었다.

그것은 감욱형의 얼굴을 세상 사람 앞에 드러내지 말도록 하라는 바로 그것이었고.

또 언제 어디를 오가나 시종 혼자서 행동할 것이며 절대로 지난날의 숭양파 문중의

스승이나 선배급 인물들을 자진해서 찾아가지 말라는 명령적인 부탁이었다.

그러나 감욱형은 감욱형대로 남몰래 정신을 쏟는 것이 있었다.

감욱형은 오래 전부터 암암리에 노영탄과 악중악의 행방을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탐문해 오고 있다.

두서너 달 동안이나 백방으로 연줄을 더듬어 알아본 결과 악중악이 숭양파도

스승도 배반하고『숭양비급』을 훔쳐내 가지고 종적을 감추어버렸으며 지금까지

무림 사람들이 그의 행방을 끊임없이 수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신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감욱형이 탐지한 사실은 거기에 그쳤고 노영탄과 악중악과 연자심 사이에

벌어진 갖가지 우여곡절은 일체 모르고 지냈다.

감욱형은 연자심이 어디까지나 악중악을 따라서

어딘가에 함께 몸을 숨기고 있으리라고만 생각했었다.

 며칠 전에야 감욱형은 날짜를 꼽아보았다.

숭양파와 회양방이 세상에 공개하고 무술 경쟁을 한다는 날짜가

눈앞에 다가들고 있음을 깨달은 감욱형은 허둥지둥 걸음을 빨리하여

일찌감치 회안 지방으로 달려들었다.

며칠 여유를 두고 암암리에 정세를 관망하고 손을 쓰기 좋은 기회를 노리고

있자는 계획에서였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올 때부터 감욱형은 남자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있었다.

스승 악청용의 부탁은 역시 여러 가지 점에서 앞을 내다보고 한 것이었다.

한번 남자로 변장하고 길을 나선 감욱형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마음 편했고

도중에 단 한번도 시끄러운 일들을 당하지 않았다.

이날 날이 저물고 땅거미가 차츰차츰 대지 위에 내리 깔리기 시작할 때.

감욱형은 막 회안성 밖에 이르렀다.

강물 줄기를 한편으로 끼고 강가를 한창 걸어가고 있을 때.

홀연 멀리 한 척의 자그마한 나룻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나룻배 위에는 한 쌍의 남녀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남자는 천만 뜻밖에도 악중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며.

여자는 어디서 꼭 본 듯한 얼굴이기는 자세히 보니

역시 처음 보는 아가씨 같았다.

감욱형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저게 웬일일까? 악중악 오라버니는 이미 강호에서 온갖 사람들이

노리고 있는 화살의 과녘처럼 되어 있는 인물인데 ...........

그리고 그가 훔쳐서 몸에 지니고 있다는『숭양비급』을 손에 넣어보려고

노리지 않은 사람이 없는 판인데 .........

조금도 겁이 나지 않고두려움을 모른다는 걸까?

저렇게 태연자약하게 아가씨까지 거느리고 이 고장에 나타나 있다니?

어쩌면. 이번 회양방과 숭양파의 무술 경쟁과 깊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그러나 이런 생각보다도 더욱 중대한 생각이 이순간에 감욱형의 머리속을

번개처럼 지나갔다.

 이 몇 달 동안 회양지방 일대에서는 한 가지 놀라운 소식이 사람들의

입에서 귀로 귀에서 입으로 전파되어 굉장한 풍문을 일어키고 있었다.

그것은 무술 실력이 누구보다도 무섭고 대단한 신비스러운 인물이

하나 나타났는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출몰하지만.

그가 정통파의 인물인지 사파의 인물인지 분간할 도리도 없으며.

칭호를 신룡검이라고 한다는 것만이 알려졌다는 사실이었다.

감욱형은 처음에 그것이 남자로 변장하고 길을 나온 자기 자신을 두고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소리가 아닌가 하는 일종의 터무니 없는

우월감 까지 가져보기도 했다.

그러나 차츰 알고 보니 그것은 자신의 당치도 않은 착각이었고.

확실히 이런 인물이 따로 실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곰곰 생각해 봐도 그 인물이 과연 누구인지를 추측해 낼 수 없엇다.

한때 감욱형은 이 신비스러운 의문의 인물을 기를 쓰고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결심까지 해봤다.

그러나 바람처럼 어디든지 나타나고 또한 번개처럼 어디론지 사라져버리는

이 신룡검이라는 인물을 어디 가서 찾아낼지 도무지 방향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 홀연 이 고장에 나타나 있는 악중악을 바라보게 된 감욱형은

퍼뜩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놀라우면서도 기쁨을 참을 수 없었다.

 

' 신룡검이란 바로 악중악 오라버니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

 

감욱형은 당장에 나룻배 위로 달려가서 악중악을 불러보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감욱형은 생각을 달리했다.

자기 몸을 저편에 발각되지 않도록 감추고 어둠 속에 숨어 나룻배 위의 정세를

몰래 살피자는 것이었다.

 

'악중악 오라버니는 여기까지 배를 몰고 와서 무엇을 할 작정일까?

 신룡검이란 인물은 바로 ........ '

 

감욱형은 악중악이 바로 신룡검이란 인물이 아닌가 하는

의아한 생각을 언제까지고 버리지 못했다.

 

' 아니. 이게 어떻게 되는 일일까? '

 

또 그 다음 순간에 감욱형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깜짝 놀렀다.

별안간 악중악이 그 아가씨를 인사불성을 만들어서 쓰러뜨리더니

두 팔로 번쩍 쳐들어서 떠메고 선창 안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더니 악중악은 흘쩍 몸을 날려서 강 언덕 위로 올라가 어디론지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 옳지! 잘됐다! '

 

감욱형은 바로 이때라고 생각했다.

얼른 몸을 재빠르게 날려서 배 위로 뛰어올라 다짜고짜로 선창 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선창 안에 들어가본즉 악중악에게 급소를 찔려서 인사불성이 돼버린

그 아가씨는 침상 위에 정신을 잃고 드러누워서 감욱형이 선창 안으로 침입하는 것도

전혀 알지 못하는 듯했다.

감욱형은 그 아가씨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창구멍으로 새어 들어 오는 희미한 빛줄기 아래서.

그 아가씨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감욱형은 유심히 그 아가씨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곤 했다.

심히 낯이 익은 얼굴 같았다.

어디서 꼭 한번 본 일리 있는 아가씨 같았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니 역시 만나본 일이 없는 생소한 얼굴이었다.

이 궁리 저 궁리 한참 동안이나 어리둥절해하던 감욱형은 별안간 선뜻 깨닫는 점이 있었다.

 

' 아! 바로 이 아가씨였구나!

  나와 똑같이 닮았다고 하던 아가씨가 ........

  어디서 꼭 본 일이 있는 아가씨 같더라니 ............... '

 

감욱형은 그제서야 비로소 이 아가씨가 바로 한빙선자 연자심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었다.

 

' 그런데 더욱 이상하지 않은가?

  어째서 악중악 오라버니는 이 아가씨의 혼수혈을 찔러서 인사불성이 되게 만들었을까?

  여기에는 무슨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것일까? '

 

감욱형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보아도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 어차피 여기까지 들어온 바에야! '

 

감욱형은 대담하게도 급히 손을 뻗어서 연자심의 혈도를 풀어 놓아주고

가슴팍을 몇 번 가볍게 문질러주기까지 했다.

얼마 안 되어서 연자심은 슬며시 두 눈을 뜨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두 눈을 떠본 연자심의 놀라움은 감욱형보다 몇 배가 더 컸다.

침상가에는 어떤 생면부지의 사나이가 우뚝 서 있지 않은가!

선창 안에는 창구멍으로 새어들어오는 희미한 광선이 있다고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어두침침함을 면치 못했다.

어떤 사람이 바로 옆에 앉았거나 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면서도

그 얼굴을 똑똑히 알아내기는 힘들었다.

한빙선자 연자심은 몇 번이나 남에게 우롱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때.

가슴속에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비록 몸은 침상 위에 누워 있다 할지라도 그녀의 정신이나 힘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발칵 치미는 앙칼진 마음에 대뜸 두 팔에 힘을 집중시켜 핵 뿌리치는 순간.

맹렬한 손바람을 일어켜서 침상가에 우뚝 서 있는 그 남자에게 공격을 가했다.

감욱형은 이 아가씨가 정신이 드는 모양을 보고 무슨 말을 걸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난데없이 연자심의 손바람이 습격해 들어오는지라.

깜짝 놀라서 선뜻 한 걸음을 주춤하고 뒤로 물러서서 몸을 옆으로 뽑아내서

역시 재빠르네 손바람을 일어켜 연자심의 습격을 막아냈다.

연자심은 한쪽 손을 허공으로 휘젓는 순간 또 다른 한쪽 손으로 맹렬한 손바람을 일어키더니

제2탄을 더욱 야무지게 상대방에게 쏘아 보내면서 벌떡 침상에서 일어키더니

흘쩍 허공으로 날리기까지 하며 감욱형에게 본격적인 공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감욱형은 한빙선자 연자심이 던진 첫번째 공세를 막아내기는 했으나.

그때는 벌써 몸을빼서 결국 선창 문 밖으로 나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어 외부의 사람들 눈에 띄게 되면 심히 수상쩍게 여길 것은 물론

악중악이 공교롭게 돌아온다면 감욱형의 입장은 점점 더 난처해질 것만 같았다.

극도로 초조하고 불안해진 감욱형은 앞뒤를 돌볼 겨를도 없이 재빠르게

오른손을 뻗어서 맹렬히 휘둘러 상당히 억쌘 힘을 뽑아내 가지고 연자심의 제2 탄까지

그자리에서 막아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1년 전만 해도. 연자심의 무술은 감욱형과 우열을 다투기 어려울 만큼 비슷했다.

그러나 이 1년 동안 연자심은 노영탄을 따라 응유산 속에서 은거 생활을 하면서

허구한 날 무술만 연마했다.

따라서 이제는 그 실력이 옛날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손바람을 한번 일어켜서 상대방을 공격하자

그 세기는 심히 무시무시한 위력에 가뜩 차서

웬만한 무술 실력을 지닌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해 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감욱형은 감욱형대로 절대 만만한 적수가 아니었다.

기이한 인연으로 이 세상을 등지고 사는 고명한 악청용을 스승으로 삼은 뒤.

1년이 넘는 동안을 두고 전심전력으로 무술을 연마한 감욱형의 장족의 진보는

연자심보다 그 수가 높으면 높았지 결코 떨어질 리 없었다.

연자심의 제2탄의 손바람이 습격해 왔을 때.

감욱형도 어쩔 수 없이 급히 손을 써서 손바람에 손바람으로 대적한 것이었다.

애초부터 감욱형에게. 연자심과 무술로 대적해하고 싸워볼 생각이 있을 리 없었다.

그 보다 한시바삐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진상을 구명해 보고 싶은 생각만이 간절했다.

그러나 두 아가씨들의 손바람과 손바람이 정면으로 맹렬하게 맞닥뜨렸을 때.

선창 안에는 홀연 일진의 선풍이 용솟음쳐 올랐고 자그마한 배에는 강물 위에서

바람에 떨리듯 급격한 동요를 일어키며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연자심이 손바람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상대방의 압력이 너무나 매섭고 앙칼지다는 것을

느끼는 찰나에 이 아가씨는 벌써 두 발을 단단히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었으며.

전신이 흔들흔들 주춤주춤 그대로 침상 위에 쓰러지고 마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감욱형은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연자심이란 아가씨가

이렇게 놀라운 솜씨의 매서운 손바람을 지니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연자심이 재차 손을 쓰고 덤벼들기를 기다릴 새도 없이 감욱형은 재빠르게 소리치며 불렸다.

 

" 언니! 손을 좀 멈추세요! 내 말씀드릴 일이 있으니 ........ "

 

연자심은 이 긴장되고 급박한 순간에 상대방의 손바람의 힘을 당해 내기 어려울 것만 같아서

두 번째 손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데에만 온갖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지.

상대방인 감욱형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다.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상대방이 남자임에는 틀림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고 공격을

가해 보려는 판이었다.

그런데 이제 상대방 남자가 홀연 내뱉는 말소리가 여자의 음성이라니?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 '

 

연자심은 대경질색을 했다.

또 상대방의 말하는 투를 들어보면 자기에게 그다지

특별한 악의를 품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지라.

그제서야 나지막한 음성으로 깔끔하게 호통을 쳤다.

 

" 그대는 대체 누구이기에 .......... ?"

 

감욱형은 씽긋 웃어 보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언니의 쟁쟁하신 대명은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어요!

 언니는 나를 그렇게도 못 알아보시나요? "

 

말을 하면서 머리와 얼굴을 싸매고 있던 수건을 벗어버리고 앞으로

걸어가며 여전히 미소를 띤 눈초리로 연자심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연자심은 선창 밖으로부터 새어 들어오는 한 줄기 희미한 광선 앞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감욱형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뚫어져라 쏘아보고만 있었다.

별안간 숨이 맛힐 것만같이 긴장된 음성으로 소리쳤다.

 

" 이건 ......... 이건 바로 감욱형 ? "

 

감욱형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아래턱을 까딱까딱했다.

 

" 언니. 이상하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우리들이 한 판에 찍어낸 것처럼 똑같이 닮았다고 하기에 .........

벌써부터 언니를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

도무지 만날 만한 인연이 없다가 오늘 이렇게 공교로운 장소에서 만나뵙게 될 줄이야!

나도 너무나 뜻밖이었어요! "

 

' 노영탄의 말로는. 감욱형이 앵무주에서 실종된 채로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지금 이 장소에 나타났을까 ?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이냐? '

 

연자심은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감욱형의 말하는 태도를 보면 천진하고 명랑하기 이를 데 없으며.

자기에 대해서 지극히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다정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연자심은 왜 그런지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고 또 몹시 귀엽게도 여겨져서

서슴치 않고 선뜻 말했다.

 

"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만

사실인즉 나도 오래 전부터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서! "

 

감욱형은 연자심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더니.

갑자기 정이 가고 호감이 생기는 모양이었고

연자심의 그 보드랍고 얌전한 모습에 심히 마음이 끌리는 것 같았다.

연자심 또한 당연히 그리하리라고 예측했다는 듯.

감욱형은 여전히 쌩긋쌩긋 미소를 띠어가며 또 말했다.

 

"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 보고 똑같이 닮았다고 한다니.

  언니만 꺼리시지 않는다면 우리 자매지간을 맺는 게 어때요?

  우리 자심 언니 하고 부를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어요! "

 

감욱형의 말하는 품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았다.

연자심도 그것을 보면 볼수록 어린 동생같이만 생각되었고

거기다 또 이렇게 대견한 소리까지 먼저 꺼내니

한없이 사랑스럽고 기쁘게만 생각되어서 선뜻 대답했다.

 

" 내가 언니 될 자격이 있을까?  호호호 ...........

  나를 언니로 대해 준다면 나 역시 어떻게 기뻐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

 

이리하여 두 아가씨들은 땅에 나란히 무릎을 끓고 앉았다.

이마를 땅에 닿도록 조아리며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고 당장에 자매의 인연을 맺었다.

 

" 자심 언니! "

 

" 욱형이! "

 

얼굴이 똑같이 닮은 두 아가씨들이 이렇게 서로 한번씩 불러보니.

그것은 갈데없이 친언니 친동생과 같았다.

서로 불러놓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서로 미소를 금치 못했다.

 

" 내가 내가 한두 살 더 먹었데서 언니라고!  호호호 ............ "

 

" 그럼. 한달을 먼저 세상에 태어났어도 언니는 언니지 뭐 ........... "

 

두 아가씨들은 공교로운 운명 속에서도 한없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한바탕 깔깔거리고 같이 웃었다.

이렇게 기적적인 기쁨에 싸여서 떠들면서도 두 아가씨들의 가슴 속에는

서로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감욱형이 재빠르게 선수를 쳐서 연자심에게 대뜸 물었다.

 

" 자심 언니!  언니는 어떻게 해서 여길 오시게 되셨수?

 조금 전에 우리 오빠는 뭣 때문에 언니의 혼수혈을 찔러서 정신 못 차리게 한 거죠?"

 

연자심은 묵묵히 한참 동안이나 깊은 생각에 젖더니.

서글픈 표정을 지어면서 사이란 놈에게 납치됐던 일 도중에 악중악에게 구함을 받아

여기까지 끌려오게 된 경과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연자심의 말을 다 듣고 난 감욱형의 얼굴에는 지금보다 한층 놀라운 빛이 떠올랐다.

연자심도 감욱형이 노영탄의 행방을 알지 못하여 애절히 가슴 태우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보니

일이 어차피 이 지경에 이른 바에야 말해 주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연자심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자못 부끄러워서 견디기 어렵다는 표정을 하고 입을 열었다.

 

" 욱형아! 말을 하자면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고 ................

나는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 지를 모르겠어!

욱형이가 실종 되어서 자취를 감춰버린 뒤에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사건들이

연거푸  발생 되어서 ..........

이야기를 꺼내면 어디서부터 해야 좋을지 몇 마디로는 도저히 다 할 수는 없고 .......... "

 

이리하여 연자심은 마침내 지극히 침착하게 음성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히 이야기를 꺼냈다.

악중악이 반교자가 되어서 도망친 일 『숭양비급』을 훔쳐낸 일 적화주로부터 연자심을 속여서

끌고 나온 일 노영탄이 금모사왕을 주살해 버린 일 서천목산까지 쫓아갔다가 악중악과

한빙선자를 찾게 된 일 노영탄과 악중악이 결투를 한 뒤에 악중악을 황산 절정에 남겨두게 된 일

두 사람이 남해어부를 만났던 일 며칠 전에 또다시 강호에 발을 들여놓게 된 형편을 일일이

 감욱형에게 설명해 주었다.

한빙선자 연자심의 설명을 자세히 듣고 난 감욱형은

그 심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다.

놀라움과 안타까움과 .........

불과 1년 남짓한 동안에 이렇게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얼이 다 빠진 사람같이 어리둥절해서 두 눈을 멍하니 뜨고 연자심의 얼굴을

언제까지고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연자심도 감욱형의 표정을 살피자.

감욱형의 심정이 얼마나 어지러우리라는 것을 추척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더군다나 노영탄과 자기가 지내온 일에 대해서 형언할 수 없도록 감욱형의 가슴이

아프리라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음 순간.

연자심은 두 볼이 화끈 달라올라서 새빨개졌다.

고개를 푹 스그렸다.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이 가볍게 떨렸다.

 

" 욱형아!  욱형이와 노영탄 사이의 정이란 것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어!

 그렇지만 ............ "

 

감욱형이 선뜻 연자심의 말을 중단시켜 버리고 입을 열었다.

 

" 언니!  그런 말씀은 내게 하지 않아도 좋아요!

나와 노영탄과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단지 피차간에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의미에서

서로 일종의 정다움과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었을 따름이었지! "

 

여기까지 말하는 감욱형의 입가에는 유난히 명랑하고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 언니! 진심으로 축복해요! 언니와 그이의 정이 영원히 변함없기를 ........... "

 

감욱형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상냥스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봄 눈이 녹는 것만 같은 그 간드러진 미소도 유난히 귀여워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미소를 띤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음성만은 가볍게 떨려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이랴.

그 새카만 두 눈동자 깊숙한 곳이 눈물에 촉촉히 젖어 있지 않은가.

입으로는 피차간에 생명을 구해준 은혜 이외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하지만.

노영탄을 생각할 때 감욱형의 가슴속은 미어질 것만 같아 괴로움을 참을 길이 없었다.

 이런 눈치를 알아챈 연자심의 감격 또한 무엇이라 형언하기 어려웠다.

연자심은 덥석 감욱형의 두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는 단지 한마디를 역시 떨려 나오는 음성으로 말을 했을 뿐이다.

 

" 욱형이! 미안해! "

 

그 이상 말을 계속하지 못하고 연자심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려서 볼을 적셨다.

그러나 감욱형은 깔끔한 음성으로 말했다.

 

" 언니! 우리 이제부터 지나간 일은 두번 다시 입 밖에 내지 않기로  .............

  그보다도언니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지? "

 

이렇게 묻는 감욱형의 말에. 연자심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 하도 창졸간에 질문을 받고 보니.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얼른 나지 않았다.

감욱형은 곧 말을 계속했다.

 

" 언니. 악중악 오라버니가 두 번째나 산에서 바깥 세상으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저 『숭양비급』이란 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그 무술 실력이

그야말로 천하무적일 거예요.

지난날의 원한을 지금까지 가슴속 깊이 간직해 두고 반드시 노영탄에게 보복을 하려 든다면.

그의 무술 실력 앞에는 노영탄이란 청년도 만만히 대적하지는 못할 거예요.

어째든 우리 둘의 입장에서는 이 두 청년들이 목숨을 내걸고 결투하는 꼴을

두 눈을 똑바로 뜨고서 그대로 볼 수 없는 일이고 ..............

우리는 일각을 다투어 이것을 사전에 막아낼 방법을 강구해야만 .............. "

 

여기까지 말하는 감욱형의 얼굴에는 여태까지와는 딴판으로.

극도의 불안과 초조와 근심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무엇을 생각함인지 일시 중단하고 곰곰 생각하더니 다시 하는 말이.

 

" 우리 둘의 힘만 가지고는 이것을 사전에 막아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고.

하물며 악중악 오라버니는 벌써 노영탄과 금사보에서 만나자는 약속까지 해놓았으니 ........

오라버니의 배짱은 무림의 무슨 명수니 고수니 하는 따위들을 모조리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혼을 내주고 싶은 모양인데 지금의 금사보 안에는 소위 고수급 인물들이 운집해 있으니

이들을 해산시킬 방법이란 절대로 없고 악중악 오라버니가 한번 얼굴을 나타내기만 하면

비단 노영탄과 결투가 벌어질 뿐만 아니라.

숭양파의 모든 선배급 인물들이 그를 만만히 놓아주려 들지 않을 것이고.

또 이파의 고수라는 자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라버니를 놓치지 않고.

저『숭양비급』을 뺏으려고 결사적인 싸움을 벌일 테니 이일을 장차 어떻게 ........... "

 

두 여인 사이에는 꽤 오랜 침묵이 흘렀다.

앞으로 벌어질 무시무시한 사태를 눈앞에 놓고.

어떠한 방법을 강구해야 좋을지 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연자심의 입장에서는 진실하게 두 청년의 앞날을 걱정하고 가슴 태우는

감욱형의 태도나 정신에 감격했을 뿐 무엇이라 선뜻 할 말이 없었다.

감욱형은 음성을 한층 더 가라앉히면서 차근차근히 말을 계속했다.

 

" 언니.이렇게 하기로 합시다.

때를 맞추어서 우리 악청용 스승께서 그 자리에 왕림해 주신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지만

이 노인께서 꼭 오실지 지금 그것을 나로서는 확약할 수 없어니까.

또 한 걸음이라도 늦어서 때를 맞추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에는 모든 일이 낭패로 돌아가고

말 것이니 내 생각 같아서는 제일좋은 방법이 언니께서 시급히 적화주로 달려가시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거기가서 오매천녀께 청을 드리면 그 노인께서는 남해어부 상관학 선배님께 연락해 주실

방법이 있으실 터이니 이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것만 같아요. "

 

연자심은 선뜻 대답했다.

 

" 욱형이! 욱형이 생각이 정말 용의주도해 그것이제일 좋은 방법일 것만 같아. "

 

이리하여 두 아가씨들은 좀더 구체적인 방법까지 상의한 끝에.

즉각 행동을 개시하기로 했던 것이다.

감욱형은 자기가 입고 있던 남자의 의상을 벗어서 연자심에게 바꾸어 입히고

당장에 적화주로 달려가게 했으며 자기는 연자심이 입고 있던 의상을 그대로 갈아입고

선창 안에서 악중악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악중악은 감욱형이 설명하는 자초지종을 자세히 듣고 나서야.

꿈에서 깨어난 사람같이 모든 점을 석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악중악과 감욱형 사이에는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제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보니 둘이 똑같이 실의의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서로 헤어진 후의 이야기를 자세히 주고받고 할수록 그들의 마음 속에는

똑같이 일종의 동병상련의 감정만이 북바쳐올랐다.

그들은 부지중 서로 처다보고 씽끗 미소를 띠었다.

둘이 다 똑같이 서글프고 처참한 미소였다.

악중악이 감욱형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하는 말이.

 

" 우리들이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러고 보니 너와 나는 누구를 위해서 생명의 위협까지 무럽쓰며 온갖 고생을 했으며.

또 누구를 위해서 여태까지 동분서주하여 천하를 헤매고 돌아다녔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돼버렸구나!

이번에 일이 끝나면 나는 강호에서 종적을 감추고 두번 다시 이 더러운 세상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 "

 

감욱형은 그렇지 않아도 괴로운 심정이 악중악의 이런 말을 듣고보니

북받쳐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서 급히 얼굴을 저편으로 돌리고

강물만 바라다보며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악중악도 그것을 보니 서글픔과 괴로움을 참을 길이 없어서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 욱형아! 과거지사를 자꾸 생각해서 뭘 하겠니! "

 

악중악은 천천히 걸어서 감욱형의 겯으로 갔다.

팔을 뻗어서 감욱형의 어깨를 어루만져주며 자기 자신도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긴 한숨을 땅이 꺼지도록 내쉬었다.

 

" 애. 욱형아! 잊어버리는 거다!  지나간 일들은 ............ "

 

이런 말을 또 듣고 보니 감욱형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왈칵 참고 참던 울음이 일시에 터져 나오고 말았다.

몸을 홱 돌리더니 악중악의 가슴속에 머리를 파묻고 방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가슴속에 오랫동안 서리고 쌓여던 미묘한 감정을 이 울음으로 발산시키고

씻어버리려는 것만 같았다.

감욱형은 이때야 비로소 자기와 정말 친한 사람을 찾은 것 같았다.

사나운 파도 속을 정처없이 표류해서 떠돌아다니던 의지할 곳 없는 조그마한 배 한 척이

우연히 바람과 물결을 피할 수 있는 항구를 발견하고 다짜고짜 뱃머리를 그리로 돌리고

돌진해 들어가는 심정과도 같았다.

악중악은 감욱형을 달래고 구슬리면서 이렇게 물어봤다.

 

"욱형아! 여기서 일이 다 끝나면 너는 어디로 갈 작정이냐?"

 

악중악이 하도 달래는 바람에.

감욱형의 마음을 진정하고 울음소리도 차차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 아가씨의 음성은 처참하리만큼 슬픔에 가득 찬 것이었다.

 

" 나도 모르겠어!  어디로 가야 좋을 지를 ............. "

 

악중악이 묻는 말에. 내키는 대로 대답한 말이기는 했으나.

사실 곰곰 생각해 보자면 감욱형은 이 넓은 천지에 이렇다 하고

갈 만한 곳이 없는 딱한 신세 였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악중악인지라

대뜸 이렇게 말했다.

 

" 욱형아 !  나는 갈 곳이 있다! 너 웬만하면 나하고 같이 가지 않으련? "

 

감욱형은 그제서야 얼굴을 쳐들고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악중악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 오빠가 어디로 갈 곳이 있단 말이예요?

금방 세상을 등지고 혼자서만 숨어서 산다고 하더니 ............ "

 

" 그야 그렇지만. 네가 편안히 어띠든지 자리 잡는 것을 보지 않고서

내가 어찌 나 혼자만 숨어버릴 수 있겠느냐? "

 

말을 마치자.

악중악은 고개를 수그리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때까지도 감욱형의 상반신은 악중악의 품속에 있었다.

감욱형은 자기의 몸이 악중악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별안간 두 볼이 새빨개지며 선뜻 악중악의 가슴을 뿌리치고 멀찌감치 물러서서 물어보았다.

 

" 오빠가  갈 곳이라는 데가 대체 어디란 말이예요?"

 

악중악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 그곳으로 말하자면 역시 노영탄이란 녀석이 나에게 찾아내 준 곳이다.

바로 황산 절정에 천년적으로 매달려 있는 널찍한 평지인데 풍경이 기막히게 아름답고.

기화요초. 맛있는 과일들이 사철을 두고 끊일 사이가 없다.

나는 거기서 일년을 살았다.

그 편안한 품이 만일에 옛날 원한을 보복해 볼 생각만 없었다면

두 번 다시 속세에 내려오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

 

과거의 원한에 대해 보복할 의사가 없었던들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으리라는 악중악의 말에

감욱형은 가슴이 뜨끔하면서 대뜸 다음 말을 막아버릴 듯이 입을 열었다.

 

" 오빠!  이번에 금사보에서 열리는 무술대회는 결코 어린아이들의 장난이 아니에요?

감히 무림의 수많은 고수라는 자들을 모조리 적을 삼고 싸울 수 있겠다는 거예요?

오빠!  제발 그 보복이란 소리는 그만둬 줘요.

무슨 불구대천지 원수가 졌다고  ..........

내 생각 같아서는 오빠는 역시 표면에 나서지 말고 슬슬 돼가는 꼴이나 구경하며 몸을 사렸다가 .

숭양파가 힘이 모자라게 되거든 한번 도와주고 .............

그걸로 일이 끝나면 곧 황산으로 다시 돌아가서 은거 생활을 하는게 좋을 것 같아. "

 

그러나 악중악에게는 그런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호탕하게 웃어젖힐 뿐이었다.

 

" 허허허 ...........원한이 없다고?  불구대천지 원수가 졌느냐구?

좋아 !  아무튼 나는 숭양파를 돕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 어떤 놈들에게나 이 악중악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야 말 것이다!

숭양파 위인들도 내 맛을 톡톡히 봐야만 되거든! "

 

감욱형의 다음 말은 꾸지람으로 변했다.

 

" 오빠는 미쳤서!  오빠는 인정도 의리도 헌신짝같이 돌보지 않겠다는 거야?

그리고 또 오빠에겐 그런 자신이나 힘이 정말 있다는 거냐?"

 

악중악은 갑작스레 음성을 나지막하게 가라앉히면서 위엄 있게 가만가만 말했다.

 

" 너도 한번 봐라! 내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너에게도 한번 보여줄 터이니 ......... "

 

말을 마치자 악중악은 무슨 까닭인지 선뜻 품안에서 시커먼 수건을 꺼내더니 얼굴을 싸맸다.

그리고는 비호같이 몸을 날려 등덜미에 나타난 한 척의 큼직한 배 위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감욱형과 악중악이 타고 있던 배 뒤로 한 척의 큼직한 배가 어디선가

난데없이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감욱형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큰 배 위에는 등불이 훤하게 밝혀져 있었으며 선창 안의 창문이란 창문이 모조리

열어젖혀져 있었고 갑판 위에는 꽤 많은 장정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감욱형이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바라보니.

그 큰 배의 선창 안에는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거기 둘러앉은 것은 단 세 사람 하나는 바로 회양방의 마귀 두목 해남인마였고.

그밖에 두 사람은생소한 얼굴들인데 나이는 모두 50전후 같아 보였다.

이때 그 큰 배와 감욱형이 타고 있는 작은 배의 거리는 한 10여장 떨어져 있었다.

악중악은 하늘을 나는 새와도 같이 가볍고 빠르게 쉭 하는 찰나에.

그 큰 배의 뱃머리로 날아들었다.

갑판 위에서 서성거리던 회양방의 방도 녀석들은 단지 한 줄기 시커먼 그림자가

그들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쳐가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회양방의 방도 녀석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쳐가는 시커먼 그림자가 무엇인지 분간하기도 전에.

선창 안에서는 별안간 폭탄이라도 터지는 듯 요란스런 굉음이 일어났다.

그렇게 불빛이 밝던 선창 안이 일시에 칠흑같은 어둠으로 변했고

그 밖의 모든 등불들도 갑자기 삽시간에 꺼져버렸으며

접시 대접 적가락들이 쨍그랑 퉁탕 하고 요란스런 소리를 냈다.

 

' 이크!  이게 무슨 일이냐? '

 

선창 바깥 앞뒤 갑판에서 서성거리던 방도 녀석들도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하고 있는 판에.

난데없이 걸걸하고 늙수그레한 음성이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 친구!  이 영여석(英如石)은 그렇지 않아도 일찍부터 그대를 한번만나보기를 원하고 있었소!

나타나면 점잖게 나타날 것이지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하다니! "

 

말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선창 안으로부터 쉭쉭하는 무서운 소리가 연거푸 일어나더니.

하나는 앞장을 서고 또 하나는 바로 그 뒤를 따라서 쏜살같이 뛰쳐나오는 두 줄기 시커먼

그림자가 있었다.

앞장을 선 한 줄기 그림자는 선창 창문으로 뛰쳐 내달았고 .

또 한 줄기는 선창 출입구로부터 달려 나왔다.

큰 배가 머물러 있는 지점의 한쪽은 강변에서 불과 1장 남짓한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다른 한쪽은 바로 강물에 임해 있었다.

강의 폭은 14. 5장쯤 되어 보였으며 선창 창문으로부터 뛰쳐나온다고 해도

저편 강 언덕에 다다르려면 12. 3장의 거리는 가야 했다.

또 배가 멈추어 있는 강 언덕 위는 바로 높은 성벽 밑에 접근해 있었고.

그 앞으로는 넓은 길이 뻗어져 나가서 회안성으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다른 한쪽 언덕으로 띄엄띄엄 자자분하게 작은 나무들이 서 있는 숲속에 군데군데 보리밭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앞장을 서서 내달은 그 시커먼 그림자는 창문으로 날아 나오기는 했으나 사방을 휘둘러보아야

발을 붙이고 설 만한 곳이 없었다.

강물 속으로 떨어지는 도리밖에 더 갈 길이 없는 판이었다.

그러나 어찌 상상인들 할 수 있었으랴.

앞장을 선 시커먼 그림자는 선창 문으로 뛰쳐나오자마자.

한 발로 뱃전을 탁 치는가 싶더니.

몸을 솟구쳐 올려 강물 위로 평평하게 몸을 깔고 마치 한 마리 제비가 물결 위를 스치고 날아들듯

그 12. 3장이나 되는 넓은 강폭을 단숨에 훌쩍 뛰어 넘어서 저편 강변 언덕 위에 우뚝 섰다.

그리고 머리를 돌려 큰 배를 바라다보며 통쾌하게 광소하는 것이다.

 

" 핫.핫.핫.   모두 몇 놈이나 된다는 거냐?

 한두 놈은 귀찬으니 몇 놈이고 모조리 한꺼번에 덤벼라! "

 

그 뒤를 쫓아 나온 영여석 자도 경각을 지체치 않고 두 발로 펄쩍 뛰어서 몸을 배로부터 날렸다.

그러나 강물 한복판에 와서는 물 속으로 떨어져 내려가는 것이었다.

비록 몸이 강물 위로 내려앉으려고 한다지만 영여석이란 자도 무술이 이만 저만한 놈이 아니었다.

그대로 강물 속으로 쳐박혀서 떨어져버릴 리 만무했다.

이놈은 몸이 강물로 떨어져 들어가려는 아슬아슬한 찰나에 두 눈을 부럽뜨고 정신을 바싹 차리더니

발끝으로 물결을 슬쩍슬쩍 몇 번인지 찼다.

그러자 어떤 불가사이한 힘이 몸을 위로 잡아당겨 주는 모양이었다.

거뜬히 몸을 날려서 맞은편 언덕 위로 달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영여석이라는 회양방의 방도가 앞장 서 달아난 그 시커먼 그림자에게 육박해 들어가는 순간.

뒤편에 있는 큰 배에서는 또 다른 두 줄기 시커먼 그림자가 등평도수(登萍渡水)의 기묘한

재간을 부려서 흘쩍 강물을 건너뛰더니 언덕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니까 세 놈의 회양방도들이 한 개의 시커먼 그림자를 둘러싸고 덤벼드는 판이었다.

그제서야 큰 배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회양방의 방도들은 그 시커먼 그림자의 주인공이

복면한 사나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순간 여러 놈의 입에서 부지중 이구동성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있었다.

 

" 이크! 저자가 나타났구나! "

 

" 바로 신룡검이란 자가 여길 나타났구나! "

 

앞장을 서서 선창 창문으로 뛰쳐나온 것은 바로 악중악이였다.

악중악은 감욱형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순간에 무심코 눈초리를 뒤로 돌려서 힐끗 바라다보았다.

 

' 이게 웬일이냐?  어디서 오는 배란 말이냐?'

 

악중악은 혼자서 깜짝 놀랐다.

난데없이 한 척의 큼직한 배가 이편을 향해서 저어오고 있는 것을 재빠르게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악중악은 그 큰배 선창 안에 앉아 있는 것이 바로 회양방의 해남인마라는

것을 확인하고 아무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띠었던 것이다.

 

' 잘됐다!  이놈. 잘 걸려들었다. 바로 욱형이 앞에서 내 한번 이놈에게 본떼를 보여주리라! '

 

이렇게 결심을 하자. 악중악은 감욱형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게.

 

" 어디로 가는 배냐? 감히 내 앞으로 다가들다니! 꼼짝말고 게 있거라! "

 

이렇게 무서운 음성으로 추상같이 호통을 치면서 당장에 그 큰 배위로 날아 들어갔던 것이다.

이때. 선창 안에서는 해남인마가 마침 멀리서 온 귀빈 두 사람과 자리를 같이하고.

술잔을 들어가며 바닷바람을 쐬고 기분 좋게 유유자적 하고 있는 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상한 인물 ........

신룡검에 관해서 이러궁 저러궁 이야기가 분분하던 참이었다.

귀빈이라는 두 놈 중의 하나는 이름을 영여석 호를천령장이라 했고

또 한 놈은 음면산군 상당이라 했으며 두 놈이 다 같이 무림 변두리에서 나쁜 짓을 하기로

유명한 마귀 두목 같은 놈들이었다.

이 두 놈들은 무술 실력이 어지간히 대단한 놈들이었다.

오래 전부터 무림에서는 깨끗이 손을 씻고 산 속에 파묻혀서 세월을 보내며 바깥 세상에

나오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회양방의 대표자인 흑지상인 고비란 자가 재삼 초청하는지라.

못 이기는 체하고 회안 방면으로 나온 것이었다.

해남인마는 흑지상인 고비를 대신하여 이두 놈들과 선창 안에서 주연을 베풀고

기분 좋게 마셔가면서 금사보로 배를 저어 갈 채비를 하고 있는 판이었다.

세 놈이 막 신룡검에 관한 일을 화제에 올리고 있을 때 난데없이 선창 꼭데기 장막으로부터

일진의 억센 바람이 일어났다.

그 억센 바람은 바로 세놈의 얼굴 앞에 놓인 술잔을 뒤집어 엎어 버리고  전신에 술벼락을

때려서 흠뼉 뒤집어쓰게 만들었다.

그뿐이랴. 등불까지 모조리 꺼뜨려버렸다.

천령장  여여석이란 자는 성미가 난폭하고 조급하기로 유명한 놈이었다.

번개 같은 눈초리로 선창 꼭데기를 흘끗 한번 더듬더니.

한 줄기 시커먼 그림자가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대뜸 손에 잡고 있던 두 가닥 젖가락 짝을 흘쩍 집어 화살처럼 쏘아버렸다.

 

" 어떤 놈의 괘심한 장난이냐! "

 

벽력같이 호통을 치면서 몸을 재빨리 날려 선창 밖으로 달려 나간 것이다.

 악중악은 배 위로 날아들자 선창 뒤편으로 침입하여 선창 안으로 뚫고 들어간 다음

꼭대기에 가로질러 있는 들보 위로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세 놈들은 술을 마시며 자못 상쾌한 기분으로 웃고 떠들고 도무지

배 안에 침입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악중악은 오른손을 가볍게 쳐들어서 술상 아래로 손바람을 한번 쏘아봤다.

손바람이 한번 스치자 등불이 모조리 꺼져버리고 술잔이 춤을 추며 휘날리고

술상이 뒤집어엎어졌다.

이쯤 해놓고몸을 뛰쳐서 물러날까하고 있을 때.

홀연 영여석이란 자의 호통 치는 소리가 들렸으며 또 다른 두 줄기 시커먼 광채가

날아드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악중악은 선창 안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세 놈쯤은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무술 실력을 한번 통쾌하게 발휘해서 감욱형을 놀라게 해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몸을 앞으로 살짝 피하면서 영여석이란 놈이 화살처럼 쏘아 보낸 두 가락의 젖가락 짝을

문제없이 받아 넘겼다.

그리고는 경각을 지체치 않고 몸을 아래로 떨어뜨려서 세 놈의 얼굴 앞을 새가 날아 달아나듯

흘쩍 스쳐서 선창 밖으로 빠져나와 단숨에 강을 껑충 뛰어넘어 맞은편 언덕 위로 올라갔다.

 

' 이에. 어디서 날아든 귀신 같은 놈이냐? '

 

해남인마도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 아하하하............ 핫! 핫!  시로 가소로운 놈들이로다! "

 

강 저편 언덕 위에 우뚝 선 악중악은 통쾌하게 웃어젖히며 몸을이편으로 흘쩍 돌리더니.

추격해 오는 세 놈을 태연자약하게 자신만만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태도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었고 마치 이따위 세 놈들쯤은.

아무리 무림에서 한때 쟁쟁한 명성을 떨쳤던 고수급 인물이라 하더라도.

자기로서는 그런 것쯤 안중에도 없다는 거만하고 대담한 태도였다.

감욱형은. 아중악이몸을 날쌔게 쓰는 재간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기 자신도 잊어버릴 정도로

이만저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불과 1년 동안에 악중악의 무술이 이렇게까지 절세난득 (絶世難得)의 놀라운 경지에

도달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감욱형은 놀라우면서도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커다랗게 뜬 시원스런 두 눈을 한번 깜빡이는 법도 없이 강 건너 언덕 위의 신바람 나는

황활한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해남인마 청령장 영여석과 음면산군 상당 세 놈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언덕 위로 달려들더니

악중악의 재치 있고 날랜 품을 보자.

비록 제편의 수효가많은지라 그것을 믿고 대담해지기는 하는 모양이지만.

저마다 마음속으로는 적지 않게 떨리는 모양이었다.천령장 영여석이란 놈이

맨 가운데 떡 버티고 서서 제법 위신을 뽐내며 호통을 쳤다.

 

" 친구!  자네가 바로 신룡검이란 말인가?

이 영여석과 어찌 됐든 만날 만한 공교로운 인연이었군!

세상 밖에 나오자마자이렇게 맞닥뜨리게 됐으니 ...............

좋아!  왈가왈부할 것 없이 우리 한번 자웅을 겨루어보는 도리밖에 ............ "

 

이렇게 기고만장한 체를 하면서 영여석이란 놈은 불쑥 오른손을 홱 뿌렸다.

그래가지고 가슴 앞에서 몇 번인지 슬쩍슬쩍둥글둥글 휘두르더니.

팍 하고불똥이 튀듯이 맹렬한 손바람을 내뿜어 악중악의 흉복부에 무시무시한 습격을 가했다.

그러나 악중악은 태연할 뿐이었다.

 

" 치!  세상에 별 우스광스런 놈을 다 보겠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수작을 뉘 앞이라고. 헤헤헤 ............... "

 

악중악은 영여석이란 놈이 손을 쓰고 덤벼드는 것을 보고도 이렇게 냉소할 뿐.

그 손바람이 분명히 자기 앞가슴으로 습격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도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마치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는 거만한 태도였다.

해남인마와 음면산군 두 놈은 하나는 오른쪽으로  또 하나는 왼쪽으로.

천령장 영여석의 옆으로 갈라서더니 영여석이 선수를 써서 손바람으로 습격을 가하는 것을 보자

두 놈도 암암리에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악중악에게 덤벼들며 양쪽 측면을 가로막고

틈만 엿보이면 도습을 하겠다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악중악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천령장 영여석은 신바람 나게 뿌려놓더니 두 어깨가 우쭐하는 것 같았다.

이놈은 악중악이 자기의 무서운 천령장 손바람의 놀라운 위력을 당해 보지 못했는지라.

멋도 모르고 감히 그 앞에서 몸을 피하려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남몰래 가소로워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이놈! 내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지만 어디 내 천령장 손바람을 한번 톡톡히 봐라."

 

영여석이란 놈은 이렇게 자신이 만만했다.

아닌게 아니라 이놈의 천령장이란 손바람은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서 일어나는 힘은 순전히 일종의 음유지기가 한데 엉켜서 이루어진 것이며.

처음에 손바람을 뿌리는 순간에는 아주 맥이 없고 흔들흔들 급하지도 않고

맹렬하지도 않은 바람이기 때문에 상대방은 왕왕 이것을 대단케 생각지 않고

소흘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바람이 한번 몸에 휘감겨들 때에도 상대방은 단지 일종의 사늘하고 음산한

기운을 느끼는 데 불과하지만 이때에는 벌써 이 무서운 바람은 피부와 살을 뚫고 속으로

깊숙히 침투해 버리는 것이었다.

만약에 내공이 정순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해서 몸 속에 흐르고 있는 순양진기를 이용해서

혈도를 봉쇄 버리는 특출한 재간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라면 세 시간을 넘지 못해서

몸 속에 오한을 일어켜 와들와들 떨리고 머리가 빠개질 듯이 아파지며 이런 증상을

그대로방치하고 풀어버리지 못한다면 중상자는 생명을 빼앗기기 일쑤요.

경상자라야 불구자가 되고 말거나 혹은 몸에 제아무리 절묘한 무술을 지녔다 해도.

그것을 발휘해 볼 수는 없는 산송장이나 페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악중악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가 저 무림에거 둘도 없는 지보라는『숭양비급』의

기술을 투철히 자기 것을 만드는데 비범한 수련을 쌓았는지라.

그는 완전히 태(胎)에서부터 탈피를 하고 뼈까지 바뀌어진 사람같이 .

하나의 신비스러운 육체로 변하여 무술의 외공 내공을 막론하고 변화무쌍 신출귀몰.

불가사이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여하한 종류의 손바람이든 제아무리 억센 힘이든 음양강유를 막론하고 꿰뚫고 들여다 보듯이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네놈이 고작해야 그 따위 손버릇을 ............. '

 

악중악은 영여석이 송을 쓰는 품을 한번 보자마자 내뜸 그것이 음유의 힘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게 버틸 만한 힘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속공법으로 단판에 해치우리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영여석이란 놈의 공세를 정확히 인식하고 손바람이 몸에 휘감겨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끼는 찰나  악중악은  살짝 몸을 굽혀 전광석화와 같이 영여석의 손바람 권외로 몸을 빼더니.

어느 틈엔지 영여석의 신변 가까이 대들어 장난이라도 하듯이 가볍게 왼손을 슬쩍 쳐들었다.

천령장 영여석이란 놈은 고개를 돌려 악중악을 바라볼 만한 겨를도 없었다.

악중악의왼손이 슬쩍 가볍게 일어키는 손바람이 너무나 지독하게 이놈의 허리께를 습격했기

때문이었다.

 

" 팽! "

 

쇳소리같이 매서운 소리가 들리고 그 뒤를 이어서.

 

" 으아아악! "

 

하는 처참한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천령장이란 손바람을 뽐내보려던 영여석이란 놈은 단지 구슬픈 외마디 소리를 남기며.

어질어질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악중악의 이 날쌔고 빠른 품은 비단 그것을 당하는 천령장 영여석 자신이 똑바로 볼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옆에 서 있는 해남인마와 음면산군도 그것이 어떻게 손을 쓰는 술법인지 눈으로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단지 영여석이란 놈이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나가떨어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대경질색하며.

주춤하고 양쪽으로 물러서며 두 눈이 휘둥그레졌을 뿐이었다.

악중악이 손을 쓰는 술법은 바로 구궁착위대섬야법이라는 독특한 술법으로서.

이 세 놈들이 눈으로 그것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고.

당시의 무림을 통틀어 보더라도 이것을 똑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으니.

악중악이 이 술법을 한번 쓰자마자 .

즉각 승부가 결정되고 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 이크!  이놈은 천하에 드물게 보는 놀라운 술법을 쓰는 놈이로구나! '

 

' 손을 쓰는 품이 무슨 술법인지 알 수도 없어니 .........

  이만 저만한 놈이 아닌데. '

 

해남인마와 음면산군은 악중악이 손을 한번 휘두러자마자

영여석이란 놈을 티검불이나 다루듯 쓰러뜨리는 광경를 보자.

가슴이 섬뜩해서 속으로는 여간 겁을 집어먹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 두 놈들도 다년간 무림에서 쟁쟁한 명성을 떨쳤던 늙은 마귀 같은 존재들이다.

그대로 항복을 하고 주저앉는다는 것은 체면이나 위신상 도저히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억지로라도 버터 보는 수밖에 없었다.

두 놈은 있는 힘을 다하여 울렁거리는 가슴속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그래도 걸걸하고 위엄 있는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 네.  이놈!  감히 우리들 앞에서 .............. "

 

" 천령장 영여석을 쓰러뜨리다니!  괘씸한 놈!  어디 견뎌보아라! "

 

그러나 그것은 두 놈의 어쩔 수 없는 허세에 불과했다.

입으로는 이렇게 체통을 유지하려고 애쓰지만 마음 속으로는 두 놈이

똑같이 악중악을 이겨낼 만한 자신이란 손톱만큼도 없는 것이었다.

두 놈은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다.

악중악을 향해 몸을 내동댕이치듯이 동시에 육박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악중악은 그 꼴을 보자.

즉각 몸을 한쪽으로 쓰러뜨리는 체하더니.

발을 여전히 든든히 땅에 붙인 채로 멀지감치 떨어진 거리에서 두 손을 한꺼번에

맹렬히 휘들렀다.

손끝에서 일어나는 두 줄기 질풍 그것은 앞으로 쳐들어 오는  두 놈의 힘을

똑 자르듯이 간단히 가로막아 버렸다.

두 놈의 쳐들어오던 힘이 해볼 나위도 없이 꺾여지는 것을 보자. 

악중악은 몸을 허공으로 불끈 솟구쳐 올랐다.

해남인마와 음면산군이 한 사람의 그림자가 획 하니 허공으로 나는 것을 느끼는 순간

앞으로 왈칵 달려들어 그것을 쫓아가보려고 몸을 움직였을 때에는.

그 그림자는 벌써 어디론지 종적을 감춰버리고 말았다.

두 놈은 그제서야 똑바로 알아차렸다

이복면한 사나이의 날쌔고 재빠른 경공법이란 그것을 확인하려 해도 해볼 수 조차 없고.

쫓아간댔자 때려 눕힐 수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두 놈은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손을 대볼 도리도 없이 고개를 푹 스그리고 천령장 영여석의 나둥거려진 품이 걱정스러워서

땅을 내려다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감욱형은 작은 나룻배 위에서 멀리 바라다보고 있었지만 강 언덕 위에 전개된 광경을

일일이 놓치지 않고 목격했다.

악중악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장난질이나 치듯이 영여석이란 놈을 티검불처럼

쓰러뜨리는 광경을 본 감욱형은 감탄해 마지않을 뿐이었다.

 

' 악중악 오라버니의 무술 솜씨란 보지 않은 사람이면 도저히 믿을 수도 없을 만큼 놀라운 것인데!

분명히 저『숭양비급』속의 온갖 술법과 재간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음이 틀림없구나!

해남인마의 일당이 타고온 큰 배는 이제 어디로 어떻게 방향을 잡을 작정일까? '

 

감욱형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편을 무심코 건너다보고 있을 때.

난데없이 등들미에서 통쾌한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핫핫핫! 재까짓 놈들이 감히 내 앞에 ..............

욱형아!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내가 한바탕 장난질을 치는 광경이 멋들어지다고 생각하지 않니? "

 

감욱형은 그제서야 머리를홱 돌리고 바라다보았다.

어디서 어느 틈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악중악이 벌써 바람처럼 나룻배 위로 돌아와서 감욱형의 등 뒤에 우뚝 서서

만면에 통쾌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었다.

 배 위로 날아드는 모습을 남에게 알리지도 않는 신출귀몰한 재간이었다.

감욱형의 놀라움은 점점 더 커질 뿐이어서 대뜸 이렇게 대답했다.

 

" 멋지군요! 그렇지만 오빠.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뻐기는 버릇은 조금도 변함이 없군요.

어쨌든 오빠의 재간이 놀라운 것만은 사실이야!

한편으로 생각하면 든든하고 기쁘기도 하고 ..................... "

 

악중악은 한 가지 일을 거뜬히 해치웠다는 듯 다시 정색을 하며 물었다.

 

" 욱형아! 너는 밤에 어디서 묵을 작정이냐?

나는 산에서 내려오던 날부터 이 작은 나룻배를 집으로 삼고 닥치는 대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는지라.

이렇다 할 만한 잠자리를 정해놓은 곳이없다."

 

" 그렇게 대단한 재간을 몸에 지닌 오빠가 무슨 잠자리가 필요하겠수?  호호호 .............

그런데 나는 성 안의 어떤 여인숙에 묵고 있는데 .................

내 물건들을 아직도 거기 맡겨두었고  .............. "

 

감욱형은 잠시 말을 중단하고 악중악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표정이 자못 심각해지면서 간곡히 부탁하는 말이 있었다.

 

" 오빠! 잠자리보다도 나는 오빠에게 한 가지 간절히 권고하고 싶은 말이 있어.

오빠! 제발. 지남날의 사제지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오빠가 있었던 문하라는

인정과 의리를 생각하고 너무 지나친 처사는 하지 말아줘요! "

 

악중악은 냉정하게 딱 잘라서 대답했다.

 

" 그런 말을 자꾸 나한테 할 필요는 없어!

나는 나대로 계획리 서 있고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으니까 ...........

그보다도 너는 성 안에 묵고 있다면 이제 그만 빨리 돌아가서 몸이나 푹 쉬도록 해야 할 게 아니냐!"

무술 경쟁이 있는 날 저 금사보 안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자! "

 

감욱형으로서는 악중악이 한번 고집하는 바를 꺾을 도리는 없었다.

그 이상 권고해 봤댔자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지라

감욱형은 두번 다시 이 말 저 말 하지 않고 단지 옷 한벌 을 얻어서 몸차림을 단정히 하고

다시 남자로 변장을 했다.

 

" 그럼. 나는 성 안으로 가요!  그날 금사보에서 꼭 ............ "

 

간단히 인사 몇 마디를 남겨놓고 감욱형은 악중악과 작별하자

즉시 배를 저어서 성 안으로 되돌아갔다.

회안성 큰 길로 들어서니 주루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감욱형은 그렇지 않아도 시장기를 참을 길 없어서 쩔쩔매던 판인지라.

 대뜸 주루 안으로 들어가서 간단히 요기를 하려고 했다.

주루의 한쪽 문으로 들어서서 자리를 잡고 앉으며 홀연 머리를 쳐들었을 때 .

감욱형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전혀 뜻하지 않은 사람을 보게 되었다.

놀라움과 기쁨과 극도로 긴장된 심정에서 벌컥 악이라도 써서 불러보고 싶은 충동을

입술을 깨물면서 꾹 참았다.

멀찌감치 떨어진 저편 자리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자작 자음 하는 사나이.

그는 혼자만의 가슴속에 서린 무슨 심사 때문에 그 생각에만 정신을 쏟느라.

곁에서 누가 자기를 주의해 보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 사나이는 바로 노영탄이었다.

노영탄은 연자심이 어디론지 행방도 알 수 없게 실종돼 버린 사실을 확인하게 되자.

초조하고 우울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신룡검이라는 괴상한 사나이가 남겨준 종이 쪽지를 유일한 실마리로 삼고 .

곧장 회안으로 달려와서 마침 혼자서 주루에 들어 따분한 심정으로 내키지도 않은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참이었다.

노영탄의 모습을 발견한 감욱형의 심정이야 무엇이라고 말로써 표현 할 수 있으랴!

기쁨인지 슬픔인지 미움인지 혹은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감정인지 ?

갑자기 무엇에 얻어맞은 것같이 멍해지고 혼란해지는 머릿속으로는.

그 어떤 것이라고 분간해 보고 싶은 힘조차 없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넋을 잃고 한참 동안이나 멀거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감욱형과 노영탄 사이에는 1년이라는 세월이 가로 막혔었다.

그러나 1년 만에 만나보는 노영탄의 모습에서 감욱형이 보기에는 털끝만한 변화도

찾아낼 수 없었다.

단지 그 만면에 수심이 가득 차 있는 표정이 다르다면 달라진 것일까?

 

' 연자심이란 아가씨의 행방을 몰라서 저렇게 안타깝게 가슴 태우고 있는 것이겠지! '

 

이렇게 생각했을 때.

감욱형의 가슴 속에서는 뭉클하고 치밀어 오르는 불덩어리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이 쓰디쓴 것인지 맵디매운 것인지 그맛을 무엇이라 형언할 수는 없었지만.

한 덩어리의 가슴속 깊이 엉키고 서리었던 원망스러운 감정의 뭉치가

툭 터져 나올 것만 같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 노영탄이란. 이미 옛날과는 다른 청년이다!

  이제는 연자심이라는 아가씨가 ............... "

 

감욱형은 자신을 억제하느라고 몹시 애를 썼다.

아래층으로 통하는 계단 옆으로 나와서 실성한 사람처럼

멀거니 주루 안을 바라보고 서 있노라니.

가슴 속에서 출렁거리는 갖가지의 파도는 .

지난날의 기구한 운명의 추억을 조수처럼 밀렸다가 감욱형의 눈앞에 벌려놓어며.

쓰라린 가슴을 미어질 것만같이 엉클어뜨릴 뿐이었다.

그러나 파도가 물거품이 되어서 잔잔히 꺼져버리듯이.

 

' 이제.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 '

 

감욱형은 물거품처럼. 이 주루에서 조용히 물러나가고 말리라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번개처럼 머릿속에 번쩍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악중악이 끝끝내 노영탄을 찾아내서 목숨을 내걸고 싸워보겠다는.

바로 그 사실이 퍼득 머리에 떠오른 것이었다.

감욱형은 꽤 오랫동안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라서 망설였다.

그러다가는 또 곰곰 기구한 자기와의 관계를 생각해보고.

 

' 나는 결국 끝까지 어리석은 계집아이지?

무정한 사람에게 또 정을 베풀어 주어서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걸까? '

 

이런 결심을 하면서도. 감욱형은 아랫입술을 잘강잘강 깨물면서.

자기 자신의 다음 행동을 결심한 것이었다. 

감욱형은 셈 치르는 유리창 문 앞으로 점잖게 걸어가서 손에 집히는 대로 은전을

한 웅큼 집어내서 회계를 보는 주점 점원에게 주면서 이런 부탁을 했다.

 

" 저기. 저편 자리에서 음식을 드시고 계신 젊은 분의 음식 값은 내가 셈을 치르고 갈 것이나.

음식을다 드시기 전까지는 아무 말씀도 드리지 말고무엇이든지 드시겠다는 것을 올려주시오.

이 은전 중에서 셈을 치러고 남은 것은 심부름 값으로 그대로 남겨둘 터이니.

종이 한 장과 붓 한 자루만 빌려주시오.

내 여기 몇 자 적어 놓고 갈 것이니.

저분께서 음식을 다 드시고 나거든 이것을 전해 주시기 바라오! "

 

점원이 앞에 내놓은 은전을 바라보니 열냥도 더 돼 보였고.

음식 값이라야  3분의 1이면 족할 것 같은지라.

싱글싱글 좋아서 어쩔줄 모르며 이 남자로 변장한 청년 감욱형이 말하는 대로 굽실굽실했다.

 

" 네. 분부하신 대로 어김없이 이행해 드립죠! "

 

주루 점원은 즉각 심부름꾼 녀석에게 명령하여 종이와 붓과 벼루를 가져오게 하여

선선히 감욱형에게 빌려주었다.

감욱형은 일핍휘지 몇 자를 간단히 적어서 회계 보는 점원에게 단단히 부탁해 놓고.

주루 문 밖으로 물거품이 꺼지듯 조용히 나오고 말았다.

감욱형은 회안 지방에서 보낸 며칠 동안 이 일대의 지세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한 바가 있었다.

저 봉황파란 지범이 제일 조용하고 깊숙하고 무덤만이 즐비하게 깔려 있는 곳이어서.

인적이 드물다는 판단을 내리자.

거기서 노영탄과 만나자는 약속을 해놓고 그 종이 쪽지에는 신룡검이라는 석 자를

아무도 모르게 한번 이용했던 것이다.

주루에서 나오는 길로 감욱형은 곧 여인숙으로 돌아갔다.

밤이 이경이 되기를 기다려서 먼저 봉황파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노영탄이 약속한 시각을 어기지 않고 나타났다.

감욱형은 조용한 곳에서 단둘이서만 한번 노영탄을 만나보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처음 생각으로는 노영탄이 나타나기만 하면 서슴치 않고 대면하여 쌓이고 쌓인

과거지사를 탁 털어놓고 이야기해 보리라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으나.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에 이런 생각은 깨끗이 단념해 버렸다.

 

'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해 봤댔자.

 그것은 이미 쑥스럽게 어색하기만 한 일일 게다!

흘러간 옛날이 다시 되돌아오지 못하는 이상 그것이 무슨 소용 있는 일이며

굳이 쓰라린 상쳐를 다시 어루만지며 슬퍼해서 무엇하랴! '

 

이렇게 생각을 달리하자.

감욱형은 얼굴을 내놓지 않기로 결심하고 급히 품속에서 미리 써두었던

종이장을 꺼내어서 똘똘뭉쳐 노영탄에게 던져주고 절대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신룡검이란 인물을 특별히 경계하도록 깨우쳐 주려고 했다.

그리고 한편 이런 생각이 문득 일어났다.

 

' 이번 기회에 노영탄의 무술이 얼마나 단련되었나.

악중악 오라버니와 비교해서 어느 정도나 되나 한번 시험해 볼리라! '

 

이리하여감욱형은 고의로 인기척을 내서 노영탄의 주의력을 집중시켜 놓고.

봉황파의 지세를 이용하여 도깨비처럼 숨바꼭질을 하듯 노영탄이 갈피를 못 잡도록

얼을 빼놓았던 것이다.

감욱형은 한번 몸을 드러냈을 때 노영탄이 추격해 오는 품을 보자

과연 그의 무술이나 몸을 날리는 솜씨가 절묘한 견지에 도달했음을 확인하고

그와 동시에 우물쭈물 하다가는 그의 손아귀에 빠져나가기 힘들다는 판단을 내리자.

종이 쪽지로 지탄을 만들어 노영탄에게 쏘아 보내고 노영탄이 주춤하는 틈을 주는 찰나에

스승에게 배운 경공법의 절기를 발휘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노영탄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어리둥절한 노영탄은 신룡검이 두 사람이 있는가 하는 의문까지 품게 되었고.

감욱형 이외에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매정한 사람에게 인정을 베푸는 일.

그러나 감욱형은 어떤 하나의 큰 책임을 완수한 것같이 개운했고.

어느 정도의 안도감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악중악의  보복의 화살 앞에 노영탄이 쓰러진다거나.

혹은 어떤 처참한 결과를 보지 않도록 애써보자는 가륵한 마음에서 였다.

이 일을 마치고 나서 감욱형이 곧 성 안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 사경이나 되도록 깊었다.

아무도 모르게 살며시 여인숙으로 돌아온 감욱형은 잠이 올리 없었다.

잊어버릴 수 없는 감회와 현제 자기가 처해 있는 위치나 혈혈단신 외로운 신세를 생각했을 때

흥분하기 쉬운 가슴속을 진정시켜야만 하는 쓰라림은 무엇에 비길 수도 없었다.

이런 모든 감정을 억누러는 데는 역시 무술에서 얻은 정신 단련의 힘이 컸다.

내공의 정신적인 수양이 오묘한 경지에 도달해 있는 감욱형은.

역시 그 힘으로써 두 눈을 꼭 감고 단정히 자리에 앉아 좌선으로 도를 터득하려는 도사와 같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흐트러진 정신을 진정시켜서 모든 시끄러운 감정에서.

자기를초연히 지켰으며 거기 따라서 여태까지의 피로도 씻은 듯이 회복했다.

날이 훤히 밝아올 무렵.

감욱형은 자리에서 벌떡 튀어 일어나서 행장을 간단히 수습해 가지고 곧 성 밖으로 달려 나갔다.

강가로 다시 찿아가서 악중악을 또 한번 만나보고 제발 몸을 삼가하고 상대방도 잘 생각해서

처신헤 달라고 끝까지 권고해 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강가에는 인기척이라곤 통 찿아볼 수 없었다.

악중악이 타고 다니던 자그마한 나룻배도 자취를 감췄으며.

해남인마의 큰 배도 어디로 달아났는지 찿아볼 도리가 없었다.

그들이 다같이 목적지인 금사보로 달려갔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뻔한 노릇이었다.

시간을 따저보니 아직도 꽤 여유가 있었다.

감욱형은 다시 성 안으로 돌아와서 좀더 몸을 쉬고 이튿날 금사보로 쫓아갈 작정을 하고 있었다.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