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51. 공산당과 미군정의 대립

오늘의 쉼터 2013. 3. 27. 23:25

  51. 공산당과 미군정의 대립

 

 

해방 직후 한반도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의지와 열기로 가득 찼다.

제일 먼저 활동을 시작한 것은 사회주의세력이다.

1945년 9월 11일 박헌영 이하 사회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선언했다.

  뒤이어 한국민주당(송진우, 김성수), 국민당(안재홍), 인민당(여운형)이 만들어지고,

10월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했다.

김구를 위시한 임시정부 세력은 11월 23일 개인 자격으로 입국했다.

38도선 이북에서도 조선민주당(조만식), 천도교청우당, 북조선 신민당(김두봉)이

결성되었다.

  대중단체도 속속 생겨났다.

공장마다 농촌마다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이 만들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1945년 11월 5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가,

12월 8일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하 전농)이 만들어졌다.

  전평은 결성 당시 출석 대의원 505명, 참가한 산별노조와 합동노조 16개,

노동조합 분회 1,194개, 조합원 50만 명이고, 전농은 결성 당시 출석 대의원 556명,

조합원 330만 명이었다.


그밖에 조선부녀총동맹, 조선청년총동맹, 협동조합 전국연합회, 실업자 동맹등도

탄생했다.

이들 대중조직에서 중심적으로 활동을 벌인 것은 대부분 사회주의자들이었다.

  해방 직후 한반도는 좌익에게 매우 유리한 분위기였다.

1946년 8월 미군정청이 조사한 여론조사를 보면,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라는 설문에 8,453명중 자본주의14%(1,189), 사회주의 70%(6,037), 공산주의 7%(574), 모른다 8%(653)로 대답하고 있다.

이 조사는 신탁통치 문제로 좌우익의 대립이 심각해진 후에 실시된 것인데도

좌익 지지가 77%에 달한다.

미군정은 이러한 분위기를 매우 우려,

‘점화되기만 하면 즉각 폭발할 화약통’이라고 보았다.

  민중은 미군정을 좋아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친일파를 대거 등용했고, 일제 식민통치의 대명사 등

동양척식회사를 신한공사(新韓公社) 바꾸어 귀속농지를 불하,

민중의 불만을 산데다가 부족한 식량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곡물 수집령을

공포해 쌀을 강제 공출했다.

공출에 동원된 경찰은 바로 일제하에서도 경찰이었던 자들이다.

  “당시 미군의 강제적 미곡수집과 미곡반입 금지령 그리고 호열자의 전염을

방지한다고 통행금지까지 시켜 식량반입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대구시의

기아상태는 극에 달해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인가하면 전매청의 연초공장에서는 담배 잎을 마는 종이에 바르는 풀이

나오면 직공들이 그 풀을 거의 다 먹어 치워버릴 정도였지요.

그리고 굶어서 힘이 없어 누워있는 사람들을 미군과 경찰은 호열자에 감염되었다고

실어가 환자들만 격리수용한 곳으로 데려가는 데,

그러면 그 사람은 영락없이 죽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10월 대구 민중항쟁에 직접 참가한 이일재(李一宰)의 증언이다.

  1946년 8월 20일 미군정청 운수부는 적자타개와 노동자 관리합리화를 이유로

25% 감원,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꾼다는 조치를 발표했다.

아울러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했다. 이미 조선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대거 검거된 데다, 9월7일에는 박헌영 체포령이 내리고 조선공산당이

불법화되었다.

  9월 15일 철도노동조합은 미군정청 운수과장과 철도국장에게 6개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일주일 내에 ‘성의 있는 회답’을 요청했다.

요구조건은 쌀을 노동자 4홉, 가족 3홉씩 배급할 것, 일급제 반대,

임금인상(물가수당 월2천원, 가족수당 1인당 6백 원), 해고 감원절대 반대,

급식을 계속할 것, 민주주의 노동법령 즉시 실시할 것이었다.

  미군정으로부터 아무런 회답이 없자 23일 0시, 부산의 철도노동자

7천명의 파업을 시발로, 2일 철도총파업이 시작되었다.

25일에는 출판노조가 파업에 돌입하고 연이어 금속, 화학, 섬유, 운수, 체신, 식료 등

 전평 산하 노조가 총파업에 참여했다. 학생들도 동맹휴학을 했다.

  30일 새벽, 미군정은 무장경찰 2천명과 대한독립촉성노동총동맹,

대한 민주청년동맹, 독립촉성국민회 청년 회원 1천여 명을 동원하여 철도 파업단을

강제 해산시켰다.

사망자 3명, 중상자 수백 명, 1천 7백 명이 검거되었다.


  10월 1일 대구 시청 앞에서 1만여 명의 시민이 모여 식량요구 시위를 벌였다.

저녁 7시,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다음날 학생들은 사망자의 시체를 들것에 싣고 학교와 시내를 행진한 뒤

경찰서로 몰려갔다. 당황한 경찰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대구역 부근에서는 1천여 명의 군중과 20여명의 경찰이 대치,

경찰의 발포로 22명(시위대 18명, 경찰 4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분노한 민중은 경찰과 관리의 집을 습격했다.

상가는 모두 철시하고 시청 · 도청 직원들도 결근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군정은 군대를 출동시켰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와 좌익세력 총검거가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총파업과 대구사태가 ‘남조선에 거주하지 않는 선동자들이 일으킨 사건’

이라고 발표했다.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가리킨 말이다.

그 무렵 박헌영은 비밀리에 북한으로 탈출한 뒤였다. 그리고 북한의 공작이

작용했다고 생각했다.

  11월 2중순, 항쟁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미군정과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

우익단체의 테러, 그리고 폭발된 민중의 투쟁력을 따라잡지 못한 항쟁 지도부의

지도력의 한계 때문이었다.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은 신 전술로 전환한 조선공산당의 주도로 시작,

미군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민중이 가세하여 전국으로 확산된 사건이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은 좌우합작 우동을 추진,

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고자 했다. 조선공산당은 보다 적극적인 투쟁으로 입법의원

설치를 저지하고 미소 공동위원회를 재개시키고자 했다.

신 전술은 그를 위해 수립된 방침이며 그 일환으로 9얼 총파업이 단행된 것이다.


  조선공산당의 노선은 1947년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넘겨지는 시기를 기점으로

변화한다. 8·15부터 1947년까지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기초하여 미소

공동위원회 실현으로 민족독립국가 선설 47년 이후부터 50년까지는 단정 반대,

미소 양군 철수, 인민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아무튼 1946년 가을 미군정과 그에 반대하는 세력의 충돌로 전국에 유혈이

낭자했고, 결국 이후의 정국은 미군정의 의도대로 이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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