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백두대간

50. 해방직후의 사회상 10

오늘의 쉼터 2013. 3. 27. 22:46

50. 해방직후의 사회상 10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머리기사다.

‘워싱턴 25일발 합동지급보(至急報)’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기사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하는

관측이 농후해 가고 있다....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성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12월 16일부터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의 외무장관 회의는 모스크바 협정을 체결하고

27일 끝났다.

<동아일보> 기사는 회담 진행 중에 미국 발 통신을 받아 나온 것이다.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발행되던 〈동아일보〉는 28일부터 30일까지 연 사흘간 신탁통치 기사로

가득 메워졌다.

특히 30일자는 4면을 발행, ‘탁치반대!! 독립전취!!’ ‘임정지휘로 국민총동원위원회 설치’

‘최후의 1인까지 혈투하자’ ‘3천만아 살았느냐?

독립전선에 생혈을 뿌리자!’ 등등 반탁투쟁을 촉구했다.

〈동아일보〉는 신탁통치 논쟁의 불을 지르고 반탁운동의 선봉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런데 신탁통치 논쟁에 불씨를 댕긴 12월 27일자 보도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명백한 왜곡보도였다.

첫째, 한반도 신탁통치를 제안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1943년 3월 영국의 이든 외상에게 한반도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11월 테헤란 회담에서는 ‘한국민은 40년의 훈련기간이 필요하다’고 스탈린에게 제의했다.

스탈린은 ‘기간이 짧을수록 좋다’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12월 1일 1발표된 카이로 선언에는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에 조선독립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미국이 제시한 신탁통치 안은 얄타회담, 포츠담 회담을 거치며 기정사실 화 되었다.

둘째,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미국안을 상당부분 후퇴시킨 소련이 수정안이었다.

미국은 미·영·중·소 4개국 대표로 구성된 집행위원회를 두고 1인의 고등판무관이 집행위원회를 통해

시정권을 행사하며, 신탁통치 기한은 5년으로 하되 시정권자와의 협약에 따라 5년이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요컨대 최고 10년간의 신탁통치를 상정한 것이다.

 

소련은 한국의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한 다음 이를 통해 4개국이

원조한다는 안을 제시했다. 미국은 소련 안에 문구 수정을 한 뒤 동의했다.

모스크바 시간으로 12월 28일 아침 6시, 3상회의 조약문이 발표되었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의 산업, 교통, 농업, 민족문화 발전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임시적인

조선민주정부를 수립한다.

 

2. 임시적인 조선정부의 구성을 위해 미소 양군 사령부 대표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설립한다.

 

3. 임시적인 조선민주정부와 민주단체들의 참여하에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진보와 민주적

자치정부의 발전 및 조선의 민족적 독립달성을 위해 협력, 원조(후견, 신탁통치)할 수 있는 방책을

작성하는 것이 공동위원회의 임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조선임시정부와의 협의를 거친 후, 4개국 공동심의에 회부된다.

 

4. 미소 공동위원회를 2주일 내로 소집한다.

 

조약문은 12원 30일 언론에 보도되었다.

하지만 3상회의 결정= 신탁통치= 조선의 적화야욕이라는 인식은 이미 널리 퍼진 뒤였다.

반탁운동의 열기는 드높았다. 김구를 위시한 임시정부 세력이 앞장을 섰다.

28일 임시정부 세력은 반탁 결의문을 채택하고,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했다.

국민총동원위원회는 '찬탁= 반역'자로 규정하면서 임시정부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데 주력했다.

29일 우익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신탁관리 배격 각 정당 각 계층 대표회의를 열고 임시정부 봉대를

주장했다.

서울시내 경찰서장들도 반탁을 결의했다.

 

사회주의 세력은 처음에는 조심스런 태도를 보이다가, 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이

3상회의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이들에게는 소련 공산당의 지령을 받은 매국노, 사대주의자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테러가 가해졌다.

1월 12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회원 3명이 삼상회의지지 책자를 배포하다가 납치되었으며,

2월 8일에는 전주 인민위원회회원 한 사람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 주변에는 ‘신탁통치를  찬성하거나 우리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반역자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죽음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는 유인물이 뿌려져 있었다.

 

1월 15일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과 〈뉴욕타임스〉기자 존스턴의 기자회견 내용이 보도되었다.

보도 자료는 미군정이 각 신문사에 제공한 것이었다.

내용인즉, 박헌영은 1개국의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10~20년 내에 조선이 소련에 합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명백한 왜곡보도였다.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기자들이 공동성명을 내 진상을 밝혔지만,

이 사건은 반탁운동을 반공반소운동으로 전화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렇듯 신탁통치 문제는 좌익과 우익간의 골을 깊이하고 대립을 극단화 시켰다.

본래 신탁통치는 전후 미국의 대외정책의 일환이다.

미국 또는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가 수십 년 동안 신탁통치를 함으로써 미국적인

혹은 미국에 종속된 정치·경제구조를 만드는 것이 신탁통치의 목적이다.

루스벨트가 처음 이든 외상에게 한반도 신탁통치를 제의했을 때,

이든이 ‘너무 미국의 이익에 충실’한 것이라며 반대한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국은 한반도에 대해 신탁통치 또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란 두 개의 안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미국의 이익에 가장 충실한 안을 택해 추진했다.

그 이익의 핵심은 ‘한반도 어딘가에 사회주의체제 또는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련 역시 자기 나라에 우호적인 정부를 한반도에 세우는 데 목표를 두었다.

하지만 3상회의의 결정에는 전 조선임시정부 수립이 보다 우선의 과제로 되어 있었다.

신탁통치는 전조선임시정부의 역량에 따라 실시될 수도 안 될 수도 있었다.

전 민족이 단합하여 ‘빠른 시일안의 전조선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더라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반탁과 찬탁(정확히는 3상안에 대한 총체적 지지)은 그런 의미에서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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