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512호 경주 대릉원 일원

오늘의 쉼터 2011. 8. 7. 21:50


종     목

사적  제512

명     칭

경주 대릉원 일원(慶州 大陵園 一圓)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수량/면적

602,314㎡

지 정 일

2011.07.28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노동동 261 등
시     대

삼국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경주시

일반설명


경주시 노동동 261, 노서동 104, 황남동 6-1, 황오동 102-3, 인왕동 669-1    

경주 노동리 고분군은 경주분지 중심부인 노동동에 분포되어 있는 고분은 대형분으로 사적 125호 봉황대(鳳凰臺)고분·126호 식리총(飾履塚)·127호 금령총(金鈴塚) 등이 포함되어 있다. 봉황대(鳳凰臺)는 높이 22m, 지름 82m로 황남대총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무덤이다. 

봉황대(鳳凰臺)고분은 단일고분으로서는 황남대총 다음으로 규모가 큰 고분인데, 분구의 저경 82m·높이 22m이다.

이외에 1924년 발굴된 금령총·식리총 등은 발굴 후 분구는 남아 있지 않으나, 초기에 발굴된 고분으로서 금제품 등 다양한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유명하다.

여기 고분들의 분구형태는 원형봉토분 형식이고, 내부의 매장주체시설은 적석목곽분의 구조형식이다. 봉황대(鳳凰臺) 남쪽에 있는 식리총(飾履塚)은 봉분 높이 6.5m, 지름 30m로 1924년에 조사한 결과 덧널(곽)을 설치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임이 밝혀졌다.

내부에서는 귀고리, 유리옥의 가슴장식과 은제허리띠, 은팔찌,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 쌍룡 고리자루큰칼, 말갖춤(마구), 옷칠그릇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금관이나 금동관이 없는 대신 금동제신발(식리)이 발견되었는데, 문양이 독특하고 매우 우수하여 이 무덤의 이름을 식리총(飾履塚)이라 하였다. 봉황대의 남쪽에 있는 금령총(金鈴塚) 역시 1924년에 조사된 무덤으로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바닥에 냇돌과 자갈을 깐 높이 4∼5m, 지름 약 18∼20m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금관·금제이식·금제팔지·금제요대·동제신발·철제솟·칠기·유리제완·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유물로는 백화수피제채화관모(白樺樹皮製彩畵冠帽) 7개·배형(주형(舟形))토기·기마인물상(騎馬人物像)토기·방제백유경(倣製白乳鏡) 등이다.

금관의 규모가 작고 소형 방울이 있으며, 또 시신자리가 1m 정도밖에 안되는 소형인 점 등으로 미루어 무덤의 주인공은 신라 왕자의 무덤으로 추측된다. 경주 노서리 고분군은 경주시 서북쪽 노서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의 무덤들로 현재 10여 기의 크고 작은 무덤이 남아있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원형분(圓形墳)인 제130호분은 노동동 고분군의 봉황대(鳳凰臺)(제125호분)에 대한 대칭으로 서봉황대(西鳳凰臺)라 불리고 있으며, 황남동 고분군의 황남대총(皇南大塚)(제98호분)과 함께 경주시내 고분군 가운데 최대형 고분에 속한다.

이 고분군에서 발굴된 고분들의 내부구조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지는데 금관총(金冠塚)(제128호분), 서봉총(瑞鳳塚)(제129호분), 호우총(壺塚)과 은령총(銀鈴塚)(제140호분), 제138호분 등은 고신라(古新羅) 특유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었고, 쌍상총(雙床塚)(제137호분), 마총(馬塚)(제133호분), 우총(牛塚) 등은 통일신라기(統一新羅基)의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었다. 

노서리 고분군의 내부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금관총·서봉총·호우총·은령총·제138호 무덤들은 신라 때의 것으로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곽)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로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쌍상총·마총·우총 등은 내부에 깬돌로 사각형의 널방(석실)을 만들고 널길(연도)을 둔 굴식돌방무덤으로 통일신라 때의 것이다.

금관총(金冠塚)은 1921년 우연히 유물층이 노출되어 수습조사되었는데, 최초로 금관(金冠)과 금제과대(金製과帶)를 비롯한 각종 호화 유물이 출토되어 경주(慶州)와 신라고분(新羅古墳)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서봉총(瑞鳳塚)은 1926년에 발굴조사로 표형쌍분(瓢形雙墳)의 북분(北墳)으로 봉황형 장식(鳳凰形 裝飾)을 얹은 금관(金冠)이 출토되었고, 마침 발굴 당시 내방한 스웨덴 황태자;서전 황태자(瑞典 皇太子)를 기념하여 서봉총(瑞鳳塚)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서봉총(瑞鳳塚)에서는[연수원년신묘(延壽元年辛卯)]명문(銘文)이 있는 은합(銀盒)이 출토되었는데, 신묘(辛卯)는 서기 391년 또는 451년으로 추정된다.

은령총과 쌍무덤을 이루는 호우총(壺塚)은 광복 후 최초의 유적발굴로 고구려(高句麗)에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기념하여 을묘년(乙卯年)(서기 415년)에 만들었다는 명문(銘文)이 있는 동합(銅盒)이 출토되어 유명하다. 

쌍상총(雙床塚), 마총(馬塚), 우총(牛塚) 등은 통일신라 초기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대부분 도굴되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봉토(封土) 내부에 깬돌로 평면 사각형의 석실(石室)을 축조한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으로 연도(羨道)는 남쪽으로 두었고 석실의 천정은 궁륭상(穹隆狀, 반구형 또는 아치형)으로 만들어졌다.

이들은 경주분지 주변의 산지에 주로 축조된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 경주시내 고분군에도 일부 존재함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쌍쌍총(雙床塚)에는 합장용(合葬用)의 시상(屍床) 위에 인형(人形)을 음각(陰刻)한 석제시대(石製屍臺)와 석침 족좌(石枕 足座)가 놓여 있었고, 완전 도굴분이나 내부에서 말뼈가 나왔다 하여 이름이 붙여진 마총(馬塚)에는 연문(羨門)에 석비(石扉)가 아니라 목비(木扉)를 세웠던 흔적이 있었다.

경주 황남리 고분군은 경주시내 평지 무덤들 가운데 서남쪽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이다.

크고 작은 무덤 20여 기가 남아 있는데, 1973년 ‘대릉원(大陵園)’이란 고분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이 안에는 천마총(天馬塚)·황남대총·검총 등과 미추왕릉(味鄒王陵)이라고 전하는 무덤이 포함되어 있다.

내부구조는 대부분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보인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곽)을 설치하고 자갈과 냇돌로 덮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마무리하는 것이다. 

천마총(天馬塚)은 1973년에 발굴되어 천마총(天馬塚)(제155호분)에서는 금관(金冠)과 금제과대(金製과帶)를 비롯하여 무기(武器), 마구(馬具), 금속용기(金屬容器), 칠기(漆器)등 각종의 호화로운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채색 천마도(彩色 天馬圖)를 그린 백화수피제(白樺樹皮製) 말다래[장니(障泥)]가 나와 최고(最古)의 고신라 회화(古新羅 繪畵)자료를 제공하였다. 

황남대총(皇南大塚)(제98호분)은 1973~5년에 발굴조사되어 원형분 2기(圓形墳 2基)가 남북으로 연접된 표형쌍분(瓢形雙墳)으로 남북길이 120m, 동서직경 80m, 높이 23m인 경주 최대의 고분이다.

조사 결과 남분(南墳)이 먼저 축조된 남자무덤이고 북분(北墳)이 뒤에 추가된 여자무덤이었음이 밝혀졌는데, 남북분에서는 모두 먼저 통나무로 가구(架構)를 설치하고 냇돌을 쌓은 적석부(積石部)가 발견되어 고신라 적석목곽분(古新羅 積石木槨墳) 초기 대형분의 구조를 알게 되었다.

또한 먼저 축조된 남분에는 주곽(主槨)과 부곽(副槨)이 동서로 배치되어 있었으나 뒤에 추가된 북분에는 부곽(副槨)이 생략되어 있어 적석목곽분의 내부구조 변화도 알려주었다. 남분(南墳)에서는 금관(金冠)은 출토되지 않았으나 금제과대(金製과帶)를 비롯한 각종 호화로운 유물이 출토되었고 특히 여러 벌의 마구(馬具) 중 한 벌은 안장(鞍裝), 등자(등子), 재갈, 각종 장식구(裝飾具) 등 모두가 비단 벌레 날개로 장식되어 호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북분(北墳)의 피장자(被葬者)는 금관과 금제과대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조사된 신라고분 가운데 가장 많은 금제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었으며 부장품(副葬品) 중에는 부인대(夫人帶)라는 침각명(針刻銘)이 있는 은제대구(銀製帶具)가 있어 피장자(被葬者)가 여자였음을 증명하였다. 151호분은 1966년도에 조사되어 횡구식석곽(橫口式石槨)이 발견되었고, 경주 황남리 무덤들은 현재 땅 위로 봉분이 남아있는 것은 20여 기이지만, 땅 속에 작은 무덤들이 무수히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일부이지만 독무덤(옹관묘) 등 여러 가지 형식의 무덤이 섞여 있어 신라 무덤 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경주 황오리 고분군은 경주시내에 있는 평지 무덤들 가운데 동남쪽 황오동 일대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이다.

일제시대에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70여기의 크고 작은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대부분 파괴되고 지금은 10여기의 무덤이 흩어져 남아있다.

그러나 최근에도 건물을 지을 때 자주 무덤 흔적이나 유물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땅 속에 많은 무덤들이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된 무덤은 1호분·4호분·5호분·16호분·33호분 등으로, 신라의 일반적인 무덤형식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구덩이를 판 뒤 덧널(곽)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을 덮고 흙으로 쌓은 것이다. 

황오동 고분군은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무덤들보다 규모가 작고, 출토유물도 적은편이다.

그러나 돌무지덧널무덤의 전 단계인 덧널무덤(토광목곽묘)를 비롯 다양한 무덤형식들이 조사되어 경주 무덤들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경주 인왕리 고분군은 경주시내 평지 무덤들의 동쪽 인왕동 일대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이다. 일제시대의 자료에 의하면 10여 기의 무덤들이 모여 있었는데, 황남동이나 노동동·노서동 일대의 무덤들에 비해 규모가 휠씬 작았다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 파괴되거나 도굴되었고, 땅 위에 봉분이 남은 것은 1기에 불과하다.

19호·20호·149호 무덤들이 발굴되었는데, 모두 신라의 일반적인 형태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이란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곽)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을 덮은 후 흙을 쌓은 것을 말한다.

조사에 의하면 지하에서는 독무덤(옹관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등 작은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내부에서 금동관·금귀고리·은제허리띠·유리구슬 목걸이·굽은 옥 등의 장신구와 말갖춤(마구)·투겁창·은제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 등 무기류가 출토되었는데, 신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경주노동리고분군

경주노동리고분군

경주노동리고분군

경주노동리고분군 전경

경주노동리고분군 전경

봉황대고분

식리총(제126호분)

제125호분전경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

경주노서리고분군

금관총

마총

서봉총

쌍상총

호우총

경주황남리고분군

경주황남리고분군전경

경주황남리고분군전경

경주황남리고분군전경

발굴장면

새날개형관장식(황남대총남분출토)

유리잔(황남대총북분출토)

천마총금제장신구출토장면

3호전경

5,6호전경

11호유물노출상태

경주황오리고분군전경

경주인왕리고분군전경

경주인왕리고분군전경

경주인왕리고분군전경

대릉원 일원

대릉원 일원

천마총 목곽내부

천마총 발굴 유물 기마인물도

천마총 발굴 유물

천마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