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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의 민들레꽃 - 박완서

오늘의 쉼터 2011. 5. 23. 11:58


옥상의 민들레꽃 - 박완서 
우리 아파트 칠 층 베란다에서 할머니가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실수로 떨어지신 게 아니라 일부러 떨어지셨다니까 할머니는 자살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두 번째입니다.. 
그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할머니의 며느리가 놀라서 악을 쓰는 소리를 듣고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베란다로 뛰어나갔습니다. 
나도 뛰어나갔습니다. 
다만 엄마가 뒤에서 내 눈을 가렸기 때문에 
칠 층에서 떨어진 할머니가 어떻게 망그러졌는지 보지는 못했습니다. 
"오오, 끔찍한 일이다." 
딴 어른들도 끔찍한 일이야, 오오, 끔찍한 일이야 하면서 
아이들의 눈을 가려서 얼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우리 궁전 아파트는 살기가 편하고 시설이 고급이고 
환경이 이름답기로 이름이 난 아파트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나는 물건은 물론 외국에서 들어온 물건까지 
없는 거 없이 갖추어 놓은 슈퍼마켓도 있고, 
어린이를 위한 널찍한 놀이터로 있고 아름다운 공원도 있고, 
노인들을 위한 정자도 있고, 사람의 힘으로 만든 푸른 연못도 있습니다. 
누가 너 어디 사냐? 하고 물었을 때 
궁전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물은 사람의 얼굴에 담빡 부러워하는 빛이 역력해집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말합니다. 
"참 좋겠다. 우린 언제 그런데 살아 보누." 
그러니까 궁전 아파트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궁전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걸 아무도 의심하지 않나 봅니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궁전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모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벌써 두 사람 째나 살기가 싫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얼마나 사는 게 행복하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지나 궁전 아파트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궁전 아파트 사람이 알 수 있는 건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된다는 겁니다.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 소문이 퍼져 보십시오. 
사람들은 궁전 아파트 사람들의 행복이 가짜일거라고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큰일입니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궁전 아파트 사람들은 담빡 불행해지고 맙니다. 
궁전 아파트 사람들이 여태껏 행복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알아 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엄마의 보석반지가 엄마를 행복하게 하는 게 보석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보석이 진짜라는 보석 장수의 보증 때문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태껏 굳게 믿고 있던 행복이 흔들리자 
궁전 아파트 사람들은 그 불안을 견디다 못해 한자리에 모여 의논을 하기로 했습니다. 
모이는 장소는 칠십 평짜리를 두 개 터서 쓰는 사장님 댁으로 정해졌습니다. 
나는 엄마의 치마꼬리에 바싹 다가붙었습니다. 
나는 막내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마냥 어린앤줄 압니다. 
대개의 어리광은 오냐오냐하고 잘 들어줍니다. 
넓은 사장님 댁은 벌써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반상회 날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반상회 날은 더러 아이들도 섞여 있었는데 오늘은 한 명도 아이들은 안 보입니다. 
어른들만 모여 있으니까 회의의 분위기가 한층 엄숙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엄마도 그제야 내가 따라간 게 창피한 지 눈짓을 하며 나를 등뒤로 숨기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엄마 등뒤에 숨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아이가 아닙니다. 
나는 나타나 있고 싶고 참견도 하고 싶었습니다. 
딴 일이라면 모를까 이번 일은 내가 꼭 참견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할머니가 왜 살고 싶지 않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전의 그 할머니와 사귄 적도, 본 적도 없었지만 그것만은 자신 있게 알고 있었습니다. 
"에에또 이렇게 여러 귀빈들을 한자리에 모셔서 영광입니다. 
오늘은 저희 집에 모신 만큼 제가 임시 회장이 돼서 이 회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아참, 회장이 있으려면 회 이름도 있어야겠군요. 
명함에 박히려면 무슨 무슨 회 회장이라고 해야지 
그냥 회장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옳습니다." 
여러 사람이 다 찬성을 했습니다. 
"서로 돕기회가 어떻겠습니까?" 
어떤 젊은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안 됩니다,그건. 서로 돕다니요?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서로 돕습니까? 
이웃 돕기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끼리 하는 겁니다." 
"옳소, 옳소." 
여러 사람이 찬성했기 때문에 서로 돕기회는 부결이 됐습니다. 
"그, 그렇지만 우리가 여기 이렇게 모인 건 서로 돕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서로 돕기회를 주장한 아저씨가 외롭게 대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이번 사고를 수습할 대책을 마련하려고 모인 겁니다." 
"아, 됐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수습 대책 협의회가 좋겠군요. 
궁전 아파트 사고 수습 대책 협의회.....적당히 어렵고 적당히 길고....그걸로 정할까요?" 
"사장님, 아니 회장님, 그럼 그 명의로 명함을 박으실 건가요?" 
"그러문요. 썩 마음에 드는 명칭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다. 
그건 마치 우리 궁전 아파트가 사고만 나는 아파트란 인상을 퍼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아파트 값이 뚝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아파트 값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일제히 와글와글 들고일어나 그 이름도 부결이 됐습니다. 
"여러분, 지금 급한 건 회의 이름 짓기가 아닙니다. 
어떡하면 그런 사고가 다시는 안 일어나게 하나 하는 겁니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입니다. 이 소문이 퍼져 보십시오. 
제일 먼저 영향을 받는 건 우리 아파트 값일 겁니다. 
아마 한 번만 더 사고가 나면 우리 아파트 값은 당장 똥값이 될걸요." 
회 이름을 서로 돕기회로 하자던 아저씨가 이렇게 말하자 
장내는 조용해지고 사람들의 얼굴을 사색이 됐습니다. 
"여러분, 우리 아파트 값을 똥값을 만들지 않기 위해 머리를 짭시다. 
좋은 의견이 있으신 분은 기탄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젊은 사람, 그것은 회장의 권한입니다. 
좋은 의견이 있으신 분 기탄 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회장이 젊은 아저씨로부터 말끝을 빼앗았습니다. 
"저요, 저요."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시켜 달라고 조를 때처럼 
손 먼저 들면서 벌떡 일어서려는데 엄마한테 세차게 붙잡혔습니다. 
"아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네가 나서려고 해, 아이 창피해." 
엄마의 얼굴이 홍당무가 됩니다.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아이를 끌고다녀? 쯧쯧,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도 들립니다. 
엄마는 얼굴이 더 빨개지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뚱뚱한 아줌마가 몸을 일으키는 데 하도 오래 걸리니까 
뒤에 앉은 사람이 영치기 하고 큰 소리로 외치며 엉덩이를 들어주었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 여러분, 이건 웃을 일이 아닙니다." 
뚱뚱한 아줌마가 엄숙한 얼굴로 말을 시작했습니다. 
"나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엔 노인네가 안 계시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누구 못지 않게 심각합니다. 
다들 그래야만 됩니다. 
노인네를 지키는 것은 노인네를 모신 집만의 골칫거리지만 
아파트 값의 최고 자리를 지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아시겠어요?"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 제일 처음 우리가 할 일은 절대로 이번 사고를 입밖에 내지 않는 겁니다. 
소문만 안 나면 그런 일은 없었던 거나 마찬가집니다. 
다음은 그런 일이 다시는 안 일어나게 하는 겁니다. 
감쪽같이 감추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주 계속되면 소문이 안 날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사 가는 사람이 생기거든요. 
나부터도 그런 사고가 한번만 더 나면 아파트 값이 
뚝 떨어지기 전에 제일 먼저 팔고 이사를 갈 테니까요. 
이사만 가 보세요. 뭐가 무서워 소문을 안 냅니까? 아시겠죠? 
소문을 안 내는 것보다는 그런 사고가 또 다시 안 일어나게 하는 게 더 중요한 까닭을...." 
모두들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뚱뚱한 여자는 더욱 의기양양해서 연설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연구한 사고 방지책을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어요. 
조용히 하세요. 조용히....우리 아파트 베란다는 너무 허술해요. 
노인네 아니라도 아이들이 장난치다 떨어지지 말란 법도 없잖아요." 
"아유 끔찍해라." 
엄마가 나를 꼭 껴안았습니다. 
딴 엄마들도 아이들도 떨어질 수 있다는 새로운 근심에 안절부절을 못합니다. 
아이들한테만 집을 맡기고 온 엄마는 뒤로 몰래 빠져나갈 눈치를 보이기도 합니다. 
" 그래서 베란다에서 일제히 쇠창살을 달면 어떨까 하는 의견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바람은 통하되 사람은 빠져나갈 수는 없는 쇠창살 말입니다." 
"옳소. 옳소." 
"옳은 말씀이에요.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이제부터 발뻗고 자게 됐지 뭐예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근심이 걷히면서 
뚱뚱한 여자의 의견에 대한 칭찬의 소리가 자자했습니다. 
"옳은 일은 서두르는 게 좋아요. 곧 쇠창살을 해 달도록 하세요. 
회장의 권한으로 명령합니다." 
회장님이 주먹으로 탁탁 응접 탁자를 치면서 말했습니다. 
"쇠창살 주문은 내가 받겠어요. 우리 아기 아빠가 쇠붙이 회사 사장이니까요. 
누구보다도 값싸게, 누구보다도 빨리 해 드릴 수가 있어요. 
품질은 보증하겠느냐고요? 여부가 있나요." 
뚱뚱한 여자가 신이 나서 소리쳤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먼저 쇠창살 신청을 하려고 밀치고 아우성 쳤습니다. 
" 여러분 침착하세요. 
이런 때일수록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을 되찾아 침착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쇠창살이 가장 좋은 방법일까요?" 
젊은 아저씨가 아우성 치는 사람들을 향해 팔을 휘두르며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젊은 아저씨의 다음 말을 기다리느라 잠깐 조용해졌습니다. 
그 때 나는 내가 다시 나서야 할 것처럼 느꼈습니다. 
나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란다에서 떨어져서 그만 살고 싶은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건 쇠창살이 아니라 
민들레꽃이라는 걸 나만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어른들처럼 갑자기 떠오른 날림 생각이 아니라 
겪어서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자신이 있습니다. 
" 베란다에 있어야 할 것은 쇠창살이 아니라 민들레꽃이에요. 정말이에요." 
그 소리를 소리 높이 외치고 싶어 목구멍이 간질간질하고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오줌을 쌀 것처럼 아랫도리가 뿌듯하기도 합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몸부림을 치면서 엄마의 품을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 얘가, 누구 망신을 시키려고 또 이러지?" 
엄마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쇠사슬처럼 꽁꽁 나를 껴안았습니다. 
젊은 아저씨가 말을 계속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아파트가 가장 값이 비싼 것은 
내부의 시설과 부대 시설이 잘된 때문만은 아니란 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아파트는 겉모양이 아름답기로 소문 난 아파트입니다. 
지나가던 사람도 우리 아파트를 보면 
담빡 살고 싶은 생각이 들만큼 아름다운 겉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옛 궁전이나 성을 연상하고 그 속에 들어가 살면 
왕족이나 귀족이 될 것 같은 희망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아파트의 베란다마다 쇠창살을 달아보세요? 사람들이 뭘 연상하겠습니까?" 
"감옥소요, 감옥소." 
"세상에 끔찍해라. 감옥소라니." 
"아파트 값이 똥값이 되고 말 거예요." 
"나라면 거저 줘도 안 살 거예요." 
이렇게 해서 베란다에 쇠창살을 달자는 의견은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뚱뚱한 여자는 기가 꺾이지 않고 새로운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젊은 양반이 좋은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그 생각을 못한 건 큰 실수였어요.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어요. 
베란다 쪽으로 난 유리창에 새로운 자물쇠를 달면요. 
우리 쇠붙이 회사에서 요새 발명해서 특허를 낸 자물쇤데 
한번 잠갔다 열려면 열쇠 가지고도 반나절은 넘게 걸리고 
그 동안에는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된다니 
노인네나 아이들이 몰래 열고 나갈 가망은 절대 없잖아요." 
"그렇지만 엄마들이 집을 비우는 시간이 어디 반나절만 되나요"" 
구석에 앉은 젊은 엄마가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시끄러운 소리를 나게 한 거 아닙니까?
시끄러운 소리가 반나절이나 나면 이웃끼리 서로 연락을 해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으니까." 
"참 그렇겠군요." 
젊은 엄마가 고개를 움츠렸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여태껏 잠자코 있던 노교수님이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어섰습니다. 
" 창을 열기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궁전 아파트의 특징은 여름엔 창문을 꼭꼭 닫고 살다가 
겨울엔 활짝 열어 놓고 사는 건데 겨울에 창이 닫혀 있어 보세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이건 우리 아파트의 품위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젭니다. 
물론 아파트 값과도 상관이 있는 문제입니다만....." 
노교수님이 품위 있게 슬쩍 말끝을 흐렸습니다. 
그러나 아파트 값을 들먹였다는 걸로 
노교수님의 말씀은 담빡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뚱뚱한 여자는 두 가지 쇠붙이를 다 팔아먹을 수 없게 되자 
풀이 죽어 제자리에 앉아 버렸습니다. 
노교수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이 노교수님의 우물거리는 입가로 모였습니다. 
" 제 생각으로는 할머니가 두 분씩이나 왜 갑자기 살고 싶지 않아졌나, 
그걸 먼저 우리는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그 분들이 목숨을 끊고 싶어서 끊었지, 
베란다가 있기 때문에 끊은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목숨을 꼭 끊고 싶으면 베란다 아니라도 끊을 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옳소, 옳소." 
젊은 아저씨가 눈을 빛내면서 큰 소리로 동의했습니다. 
" 그 분이 왜 목숨을 끊고 싶었을까 아는 대로 대답해 주십시오. 
먼저 돌아간 할머니의 따님과 며느님." 
교수님은 교수님답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지적을 합니다. 
저번에 돌아간 할머니는 따님하고 같이 사셨고, 
이번에 돌아간 할머니는 아드님하고 같이 사셨답니다. 
할머니의 따님과 며느리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을 뿐 대답을 못합니다. 
" 무엇을 부족하게 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교수님은 울고 있는 아주머니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따지듯이 말했습니다. 
" 아니오, 그런 일 없습니다. 
저의 어머니의 방 냉장고는 늘 그 분이 즐기시는 음식으로 가득 채워 드렸고, 
옷장엔 사시장철 충분히 갈아입을 수 있는 비단옷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신 후 그걸 다 양로원에 기부했는데 
열 사람의 노인네가 돌아갈 때까지 입을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그 분들을 증거인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이번엔 며느님에게 변명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그 분의 방이 그대로 증거로 보존돼 있습니다만 부족한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 방과 똑같은 크기의 방에 제 방에 있는 건 그 분의 방에도 다 있습니다. 
그 분이 한 번도 듣지 않은 전축이나 녹음기도
 제 방에 있는 거기 때문에 그 분 방에도 들여놓았습니다. 
그랬건만 그 분은 늘 불만이셨습니다. 
" 바로 그겁니다. 그걸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교수님이 마침내 유도 신문에 성공한 형사처럼 좋아하며 
그 아주머니 앞으로 한 발 다가갔습니다. 
" 그 분은 손자를 업어서 기르고 싶어하셨습니다." 
" 그건 안 되죠. 안짱다리가 되니까." 
" 그 분은 바느질을 좋아해서 뭐든지 깁고 싶어하셨어요. 특히 버선을 깁고 싶어하셨죠." 
" 점점 더 어렵군요. 요새 버선이라니? 더군다나 기워서 신는 버선을 어데 가서 구하겠소?" 
" 그 분은 또 흙에다 뭘 심고, 거름을 주고 김을 매고 싶어하셨어요. 
그 분은 시골에서 자란 분이거든요." 
"참으로 참으로 어려운 분이셨군요." 
교수님이 낙담을 합니다. 이 때 젊은 아저씨가 또 나섭니다. 
"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 분은 고향이 그리워서 돌아가셨군요." 
" 저희 어머니는 이 도시가 고향인데도 어느 날 베란다에서 떨어지셨어요." 
먼저 돌아가신 할머니의 딸이 젊은 아저씨에게 대들었습니다. 
" 고향이 시골이 아니어도 마찬가질 겁니다. 
도시에서도 사람 사는 모습이 그리워서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제 아무리 효자라도 세월을 거꾸로 흐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문명된 세상에 돈 가지고 안되는 일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젊은 아저씨가 이렇게 결론을 내리자 장내가 숙연해졌습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내가 나설 차례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목구멍이 간질간질하고 가슴이 울렁거리고 오줌이 마려웠습니다. 
나는 베란다에서 떨어져 목숨을 끊고 싶은 생각을 
맨 마지막으로 막아 줄 수 있는 게 쇠창살이 아니라 
민들레꽃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할머니가 살고 싶지 않아진 게 
세월을 거꾸로 흐르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둘 다 상상이나 남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겪어서 알고 있는 거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나는 어른이 되려면 아직 먼 어린 사람인데도 살고 싶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나는 그것을 말하고 싶은 걸 참을 수가 없어서 
쇠사슬처럼 단단하게 나를 껴안은 엄마의 팔에서 드디어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회장석이 있는 앞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꼭꼭 끼어 낮은 어른들을 헤치려니 어떤 아저씨는 어깨를 짚었다고 눈을 부라리고 
어떤 아줌마는 발가락을 밟았다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러건 말건 나는 반장도 모르는 어려운 문제의 답을 나만이 알고 있을 때처럼 
의기양양 신이 나서 사람들을 마구 밀치고 드디어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회장이 탁자를 탁 치며 호령을 했습니다. 
"누굽니까? 도대체 누굽니까? 이런 중대한 모임에 어린이를 데리고 온 분이 누굽니까?"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얘가 막내라서 버릇이 없어서."
어느 틈에 엄마가 따라 나와 나를 치마폭에 싸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 아이를 데리고 먼저 퇴장할 것을 회장의 권한으로 허락합니다. 
여러분 이의가 없으시겠죠?" 
회장이 말했습니다. 모두 이의 없다고, 엄마와 나의 퇴장을 찬성했습니다. 
" 이 회의에서 앞으로 결정된 일은 서면으로 통지할 테니 빨리 그 애를 데리고 돌아가시오." 
저도요, 저도요, 딴 엄마들도 퇴장할 것을 회장한테 허락맞고자 손을 들었습니다. 
이유는 집에 놓고 온 아이가 베란다에서 떨어질까 봐 불안해서 
더 이상 회의를 지켜 볼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회장은 그런 엄마에게도 퇴장을 허락했습니다. 
엄마와 나를 선두로 여러 엄마들이 회의장을 물러났습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엄마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나는 꾸지람을 들은 것보다도 내가 알고 있는 걸
 발표하지 못한 것이 억울하고 슬펐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걸 어른들이 귀담아 들어만 주었어도 
베란다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은 일을 미리 막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입니다. 
학교에도 가기 전이었으니까요. 
어느 날 누나와 형이 학교에서 만든 꽃을 한 송이씩 들고 왔습니다. 
내일이 어버이날이라나요. 
누나와 형은 또 조그만 선물 꾸러미도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내일 아침 꽃과 함께 엄마 아빠께 드릴 거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 나도 꽃을 만들었습니다. 
누나가 쓰던 색종이를 오려서 만든 꽃은 보기에도 
누나나 형 것만 훨씬 못해 보였습니다만 힘들이고 정성 들여 만든 거기 때문에 
엄마 아빠가 신통해 하실 것을 믿고 가슴이 잔뜩 부풀어 있었습니다. 
선물은 장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학교를 들어가기 전이라 용돈이 없으니까 
그걸로 엄마 아빠가 섭섭해 할 리는 없었습니다. 
어버이날 아침이 됐습니다. 
아침상에서 누나가 먼저 선물과 꽃을 아빠 앞에 내놓았습니다. 
아빠는 누나에게 뽀뽀하고 선물을 끌렀습니다. 넥타이핀이 나왔습니다. 
아빠는 입이 귀까지 가 닿게 크게 웃으시면서 
그 자리에서 넥타이핀을 넥타이에 꽂고, 꽃은 양복 깃에 달았습니다. 
아빠의 얼굴이 예식장의 신랑처럼 행복하고 젊어 보였습니다. 
다음엔 형이 꽃과 선물을 엄마한테 드렸습니다. 
엄마가 형한테 뽀뽀하고 선물을 끌렀습니다. 오색 찬란한 브로치가 나왔습니다. 
엄마는 꺄악 소리를 내면서 좋아하시더니 
브로치를 당장 블라우스에 달고 꽃은 단추 구멍에 끼우셨습니다. 
다음은 내 꽃을 드릴 차례입니다. 
그러나 형과 누나는 내 차례는 주지도 않고 어버이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노래를 모르기 때문에 따라 하지 못했습니다. 
형과 누나의 노래를 들으며 부끄러워하고 좋아하시는 엄마 아빠가 
아무쪼록 오래오래 아름답고 젊기를 마음속으로부터 바랐습니다. 
그런 마음속의 바람을 전하는 마음으로 
점잖고 조용히 내 꽃을 엄마와 아빠 사이에 놓았습니다. 
꽃을 두 송이 준비할 걸 하고 후회도 했습니다만 
어느 분이 가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분이 함께 쓰는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분께 꽃을 드리고 나자 나는 뽐내고 싶은 마음보다는 
부끄러운 마음이 더해서 고개를 숙이고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누나와 형은 학교에 갔습니다. 아빠는 꽃을 단 채 출근했습니다. 
엄마도 꽃을 단 채 노래를 부르면서 집안 일을 했습니다. 
나는 놀이터에 나가 놀았습니다. 
놀이에 싫증도 나고 배도 고프기도 해 
집에 들어와 냉장고를 열려다 말고 나는 내 꽃을 보았습니다. 
내 꽃은 식당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 속에 
과일 껍질과 밥 찌꺼기와 함께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 때 엄마는 거실에서 전화를 걸고 있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소식을 알게 된 친구로부터 온 전화인가 봅니다. 
아이는 몇이나 되나 친구가 물어 본 모양입니다. 
엄마는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습니다. 
"글쎄 셋이란다. 창피해 죽겠지 뭐니, 
우리 동창이나 우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아무리 살펴봐도 
하나 아니면 둘이지 셋씩 낳은 사람은 하나도 없더구나. 
창피해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단다. 
어쩌다 군더더기로 막내를 하나 더 낳아 가지고 이 고생인지, 
막내만 아니면 내가 지금쯤 얼마나 홀가분하겠니? 
막내만 아니면 내가 남부러울 게 뭐가 있니?"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에겐 내 가족이 필요한데 내 가족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건 
나에겐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었습니다. 
엄마는 늘 나를 막내, 우리 귀여운 막내 하면서 끼고 돌았기 때문에 
나는 한번도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의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사랑은 거짓이었습니다. 
나는 엄마를 진짜로 사랑했는데 엄마는 나를 거짓으로 사랑했던 것입니다. 
나는 말없이 집을 나왔습니다.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마침내 옥상까지 올랐습니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니까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습니다. 
나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없어져 줬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데 
무슨 재미로 살아가겠습니까. 
나는 옥상에서 떨어지기 위해 밤이 되길 기다렸습니다. 
낮에 떨어지면 사람들이 금방 보게 되고 
병원에 데리고 가서 살려 놀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말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밤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밤을 기다리는 동안 춥지도 않았고 배고프지도 않았습니다. 
아파트 광장에 차와 사람의 움직임이 멎자 
둥근 달이 하늘 한가운데 와서 옥상을 대낮같이 비춰 주었습니다. 
마치 세상에 달하고 나하고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때 나는 민들레꽃을 보았습니다. 
옥상은 시멘트로 빤빤하게 발라 놓아 흙이라곤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 송이의 민들레꽃이 노랗게 피어 있었습니다. 
봄에 엄마 아빠와 함께 야외로 소풍 가서 본 민들레꽃보다 
훨씬 작아 꼭 내 양복의 단추만 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민들레꽃이었습니다. 
나는 하도 이상해서 톱니 같은 이파리를 들치고 밑동을 살펴보았습니다. 
옥상의 시멘트 바닥이 조금 패인곳에 한 숟갈도 안 되게 흙이 조금 모여 있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흙이 아니라 먼지일지도 모릅니다. 
하늘을 날던 먼지가 축축한 날, 몸이 무거워 옥상에 내려앉았다가 
비를 맞고 떠내려가면서 움푹한 그 곳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그 먼지 중에 민들레 씨앗이 있었나 봅니다. 
싹이 나고 잎이 돋고 꽃이 피게 하기에는 너무 적은 흙이어서 
잎은 시들시들하고 꽃은 작은 단추만 했습니다. 
그러나 흙을 찾아 공중을 날던 수많은 씨앗 중에서 
그래도 뿌릴 내릴 수 있는 한줌의 흙을 만난게 고맙다는 듯이 
꽃은 샛노랗게 피어서 달빛 속에서 곱게 웃고 있었습니다. 
도시로 부는 바람을 탄 민들레 씨앗들은 모두 
시멘트로 포장한 딱딱한 땅을 만나 싹 트지 못하고 죽어 버렸으련만 
단 하나의 민들레 씨앗은 옹색하나마 흙을 만난 것입니다. 
흙이랄 것도 없는 한 줌의 먼지에 허겁지겁 뿌리 내리고 
눈물겹도록 노랗게 핀 민들레꽃을 보자 나는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고 싶지 않아 하던 게 큰 잘못같이 생각되었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온 가족이 나를 찾아 헤매다 돌아와서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나를 껴안고 엉엉 울면서 말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구나, 막내야. 
만일 너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나도 살아 있지 않으려고 했다." 
엄마는 내가 무사히 돌아온 것만 반가워서 
말없이 집을 나간 잘못에 대해선 나무라지도 않았습니다. 
나 역시 엄마의 잘못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고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일도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해 사람은 언제 살고 싶지 않아지나를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없어져 줬으면 할 때 살고 싶지가 않아집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가족들도 말이나 눈치로 
할머니가 안 계셨으면 하고 바랐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살고 싶지 않아 베란다나 옥상에서 떨어지려고 할 때 막아 주는 게 
쇠창살이 아니라 민들레꽃이라는 것도 틀림없습니다. 
그것도 내가 겪어서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어른들은 끝내 나에게 그 말을 할 기회를 안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