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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박완서

오늘의 쉼터 2011. 5. 23. 11:46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박완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내가 젖먹이 때 돌아가셨다니까.

시골집 안방 미닫이문 위에는 액자에 넣은 흑백 사진들이 현판처럼 걸려 있었는데

그걸 우리 집 사람들은 ‘사진가꾸’ 라고 불렀다.

사진이 귀한 시절의 시골구석이라 독사진이나 가족사진 같은 건 없었다.

물론 흑백사진이었다.

그래도 그 사진가꾸는 이십여 호 남짓한 동네에서 우리 집밖에 없는 귀물이었다.

아버지와 삼촌들이 소학교 졸업할 때 찍은 단체사진들이었다.

소년들이 제복처럼 입은 검정두루마기의 흰 동정과 무릎위에 얌전히 놓은 두 손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뿐, 얼굴을 개별적으로 식별 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어린 나에게 그 액자는 너무 높았다.

고모가 뒤에서 나를 들어 올려주면서 그 녹두알만 한 얼굴 중에 하나가 아버지라고 알려 주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졸업사진 말고도 양복 입고 친구들 하고 박연폭포에 놀러가서 찍은

또 다른 기념사진이 있었지만 폭포의 흰 물줄기를 한가운데 두어 강조하고,

잔뜩 폼 잡은 사람들은 가생이로 밀어 내어 누가 누군지 식별할 수 없긴 마찬가지 였다.

그래도 고모는 다섯 사람 중 맨 가운데가 아버지라는 걸 나에게 애타게 주입시키려 하였다.

내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다는 게 불쌍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획 90도로 돌려서 그 사진을 주목하기를 거부했다.

눈 여겨 봤댔자 그 단체 사진 중에서 한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건 불가능 하다는 걸

어린 마음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모가 시집가고 내 키가 더 커진 후에도 나는 의식적으로 사진가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걸 쳐다본다는 건 청승을 떠는 것처럼 보일 테고 내가 청승을 떨면 식구들이

나를 불쌍해할 것 같아 싫었다.

나의 최초의 자의식 이었다.

  내 기억 속엔 없는 아버지의 공백을 채워준 건 엄마였다.

아버지가 아파서 자리에 누워있을 때 나는 아버지 주위를 앙금앙금 기어 다니면서

소리 없이 잘 놀았다고 한다.

어린 딸을 눈으로 쫓던 아버지가 귀여움에 겨워 ‘뽀뽀’하면서 입술을 내밀면 얼른 기어가

아버지처럼 뾰족하게 만든 입술을 갖다 대면 아버지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는 얘기였다.

그때 어린 딸의  뽀뽀로 잠시 고통을 잊은 병이 아버지의 마지막 병, 죽을병 이었는지

 감기모살 같은 금방털고 일어날 병이었는지는 물어 보지 않았다.

그건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젊은 아버지가 딸을 사랑했다는 게 중요했다.

나 역시 그 장면을 사진가꾸보다 더 좋아했다.

  고모가 시집간 후에는 작은엄마가 나를 업고 다니기를 좋아했다.

숙모는 시집 온지 십년이 지난 후에 첫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그 전에는 나를 장난감처럼 갖고 놀지 않았나 싶다.

숙모가 마루 끝에서 ‘어부바’ 하고 등을 들이대면 나는 업히기 싫다고 마루구석까지

도망가던 생각이 어렴풋이 나는걸 보면 꽤 클 때까지 숙모에게 업혀 다녔던 것 같다.

숙모가 나중에 술회하기로는 이웃에 마실을 가고 싶어도 맨몸으로 가기가 멋쩍어서

나를 달고 가려고 꼬셔도 내가 막무가내 그렇게 비싸게 굴었다는 것 이었다.

숙모를 애먹인 얘기가 또 하나 있는데 그때도 나는 숙모 등에 업혀 있었다고 한다.

곧잘 업혀 있던 아이가 별안간 하늘을 가리키면서 무섭다고 몹시 울었다고 한다.

아이가 가리키는 쪽 하늘을 보니 마침 노을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날의 노을이 좀 유별나게 낭자하긴 했어도 울 정도로 무섭진 않았다고 한다.

천둥번개라면 모를까, 하늘이 어떻게 아이를 무섭게 할 수 있겠는가.

숙모가 그 사건을 못잊는 건 너무 오래도록 까무라칠듯 격렬한 울음을 그치지 암ㅎ으니까

그대로 업고 들어 갔다간 마치 아이를 떨어트리거나 꼬집은 꼴이 될 것 같아 어떡하던지

달래 보려고 깡충깡충 뛰고 흔들고, 온갖 곡예를 다 부리면서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사이에

노을은 사위고 아이는 잠든 것으로 그 이야기는 끝난다.

이야기는 끝났지만 나에게는 영원히 결론 없는 이야기로 남아있다.

아이에게 그렇게 크게 겁을 준 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 후 나이를 많이 먹은 오늘날에도 유난히 곱고 낭자한 저녁노을을 볼 때면

내 의식이 기억 이전의 슬픔이나  무서움증에  가 닿을 듯 닿을 듯한 안타까움에 헛되이

긴긴 시간의 심연 속으로 자맥질 할 때가 있다.

  내 위로 오빠가 있었지만 나보다 열 살이나 위였고 아버지를 여윈 종손의 책임감 때문인지

점잖고 과묵하여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 같은걸 갖추고 있어 동기간이라기보다는

숙부들과 동격의 어른으로 보였다.

온 집안의 기대가 소년을 그런 애늙은이로 만들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장남인 우리 아버지뿐 아니라 둘째 셋째까지 장가들인 후에도 세간을 내지 않고

한집안에 데리고 사신 것도 내가 아버지에 대한 결핍감을 모르고 자랄 수 있는 환경요인이었을 것이다.

집안의 우두머리인 할아버지가 나를 편애 한다는 걸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린 날의 온갖 행복했던 추억은 할아버지의 편애와 관계가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편애는 맞지 않는 말이다.

나눌 상대가 있는 사랑이 한쪽으로만 치우쳤을 때 그걸 편애라고 하는 것이지

여러 식구 중 어린것이란 달랑 나 혼자뿐이었으니 하는 짓 마다 어른 들이 재롱으로 봐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나 어릴 적인 그 옛날은 점잖은 남자들이 자식이나 손자들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놓고

표현 하는걸 군자답지 못한 경박한 짓으로 여길 때였으니까

할아버지처럼 동네 사람까지 어렵게 아는 양반이 손녀에게 드러내놓고

사족을 못쓰는 것처럼 보인 것은 편애라기보다는 파격 이었고,

애비 얼굴도 모르는 손녀에 대한 애달픈 연민이었을 것이다.

  나도 할아버지를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송도나 서울 등 대처 나들이가 잦았다.

대처 나들이에서 돌아온 할아버지의 두루마리 자락에 매달리는 걸

할머니나 엄마의 치맛자락에 매달리는 것 보다 더 좋아했다.

할아버지의 두루마리 자락에선 거나한 약주 냄새와 함께 달콤하고도 상큼한 대처의 냄새가 났다.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던 상큼한 대처의 냄새는 아마도 내가 최초로 감지한 세련의 예감이 아니었을까.

할아버지는 대처 나들이 아니라도 출타시는 사철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셨다.

모시, 무명, 명주 등 다 손 가는 옷감들이었다. 대처에서 돌아온 할아버지의 옷자락에서

술 냄새가 안 나는 적은 있어도 두루마기 주머니에서 미라사탕이 안 나온 적은 없었다.

미라사탕 아니면 잔칫집에 굈던 색색아지 꽃사탕이라도 나왔다.

한번은 꽃사탕의 물감이 옷에 번져서 할아버지가 할머니한테 된통 야단을 맞는 민망한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다.

훗날 서울 와서 알게 된 건데 우리가 미라사탕이라고 부르던 것을 서울선 눈깔사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미라사탕이 훨씬 더 예쁜데. 추측컨대 미라는 아마도 호박의 그쪽 말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 마고자 단추를 우리는 미라단추라고 불렀는데 미라사탕처럼 반투명한 갈색단추였다.

  늘 옷자락에 타관의 냄새를 묻혀오던 할아버지가 어느 날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그때 일이 아직까지도 내 머릿속에 선명한 영상으로 남아 있는걸 보면 그때 적어도 내 나이가

여섯 살은 되지 않았나 싶다.

사랑채에서 뒷간으로 가려면 뽕나무 그늘을 지나 개울을 건너야 했다.

어른들은 껑충 뛰어 넘을 수 있는 작은 개울 이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징검다리가 놓여 있엇고

징검다리 건너에는 재를 모아두는 잿간과 뒷간을 겸한 큼지막한 초가집이 서 있었다.

초가지붕에서 달덩이 같은 박이 자라면 그 뒷간은 운치까지 있어졌다.

할아버지가 뒷간에 갔다 오다가 미처 사랑마루에 올라서기 전에 비틀비틀 넘어진 후

왼쪽을 못 쓰는 반신불수가 되셨다.

한동안은 침쟁이도 불러오고 탕약도 드시면서 치료에 힘써 지팡이 짚고 뒷간 출입도 하고,

사랑 높은 마루를 붙들고 오르내릴 수 있도록 추녀 끝에 늘어트려 놓은 삼으로 꼬은

동아줄을 붙들고 힘겹게 사랑마루를 오르내리셨다.

내 눈엔 영원히 펄펄 날아 다닐것만 같던 할아버지가 동아줄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안간힘을  쓰는 걸 본다는 것은 환멸과 비애의 극치였다.

그나마 의 거동의 자유도 오래 가지 않았다.

이 차 중풍이 오고 할아버지는 사랑채에서 꼼짝을 못하고 할머니 한테 지청구를 맞아가며

요강에다 똥오줌을 눠야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일 년에 몇 번 떼를 지어 마을에 나타나는 각설이 떼를 할아버지는 전에 없이 반기셨다. 전에는 각설이타령 듣기 싫다고 얼른 찬밥이건  쌀이건 주어 보내라고 호령을 치시던 할아버지가

실컷 놀고 난 후에 주라고 바가지를 들고 나가는 식구들을 만류하고 그들의 신바람을 끝까지 즐기셨다.

중이 동냥을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세히 들어 보면 다 덕담이니 중툭을 자르지 말고 끝까지 들어 주라고 이르는 할아버지의 음성은,

그 까탈스  러운 쇳소리는 온데간데없고 바람 든 무처럼 퍼석했다.

  불쌍한 할아버지, 그때 할아버지에게 위로가 된 건 그들의 신바람이나 덕담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끼쳐오는 타관의 냄새가 아니었을까.

내가 할아버지 두루마기 자락에서 대처의 냄새를 즐겼듯이.

  집안에 병자가 생기면 곧 경제적 궁핍이 따르게 돼 있는 건

그때나 이때나 피할 수 없는 수순인 것 같다.

형님대신 부모 봉양에 책임을 떠맡게 된 큰삼촌 내외만 시골집에 남고

막냇삼촌 내외가 시골집을 등지고 서울로 가고

뒤다라 엄마도 오빠를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시키고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시골을 떠났다. 내가 명실공히 할아버지의 수족 노릇을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도 사랑에 서당을 열었다.

우리 집에 높이 걸린 소학교 졸업사진이 든 사진가꾸가 자랑스러운 가보인 까닭은

삼형제를 다 신식 교육을 시켰다는 증거물 같은 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홍 씨들의 씨족 마을 이었고 다들 일년 계량을 할 정도의 농토를 가진 자작농 들이고

여자들이 부지런하여 집치장을 번듯하게 하고 넉넉하게 사는 편 이었는데도

신식교육에는 등한 했다.

학교가 있는 읍네 까지는 이십릿길이나 되는 궁벽한 고장 이어서 일고여덟 살 적령기에 보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오빠도 열 살에 입학을 했고 삼촌들은 더 늦게 갔을 것이다.

열 살이 넘으면 일손이 딸리는 농촌에서는 부려먹기 딱 좋은 나이다.

학교 간답시고 왕복 사십릿 길에서 체력을 소모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여자들은 언문이나 깨치면 되고 남자들은 천자문이나 떼면 관공서에 가서 볼일 보는데

지장이 없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소일거리로 연 서당은 고개 넘어 이웃마을로 다니던 우리 동네 사내아이들을

다 흡수해 적막하던 사랑채가 시끌시끌 활기 있어졌다.

할아버지 음성도 카랑카랑한 쇳소리를 회복했다.

나는 그때 언문을 깨친 뒤였다.

그때 우린 한글을 언문이라고 했던가.

언제 깨쳤는지 확실치 않고 누가 가르쳐준 것 같지도 않은데 저절로 읽을 수가 있었다.

집에 읽을거리라고는 오빠의 교과서가 전부였지만 꼼꼼히 모아두었기 때문에 제법됐다.

오빠가 학교 다닐 때 까지만 해도 일본말을 가르치는 국어 말고 조선어 교과서가 따로 있었다.

오바의 육학년 교과서까지 술술 읽는걸 알게된 할아버지가 나를 사랑으로 볼러들여

맨 앞에 앉히고 천자문을 가르치셨다.

서당에 오는 학동들 수준은 천자문에서 공자 왈 맹자 왈 까지 일정치가 않았다.

지금으로 치면 일학년에서 육학년까지 같은 반에서 수업을 하는것과 마찬가지 였다.

읽을대는 각기 제 책을 목청껏 읽기 때문에 보통사람 귀로는 아가사리 끓듯 시끄럽기만한데

할아버지는 틀리게 읽거나 대충 얼벼무려 넘어가는건 영낙없이 가려내어

그아이 정수리에 장죽을 날렸다.

책 한 권을 떼면 그 아이 집에선 책거리로 떡을 해 보내 아이들이 넉넉하게 나눠 먹게 했다.

나도 천자문을 뗀 날 숙모가 떡을 해서 사랑으로 내왔다.

할아버지는 서당에서 제일 어린 내가 그렇게 천자문을 빨리 뗀 걸 신통해 하신 나머지

지나치게 소명하여 단명할까 걱정이라는 말씀까지 하셔서 할머니한테 구박을 받으셨다.

  돌이켜 보면 기억의 가장 밑바닥, 취학 전 시골에서 보낸 유년기는 온통 칭찬 받고 사랑받은 

 기억밖에 없는데 그건 내가 특별히 귀염성 있거나 출중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밑에 동생이 없고 생길 가망도 없는데다가 오빠와 나의 십년이라는 나이 차이 사이에는

삼 남매가 더 있었고 그 아이들이 다 어려서 죽는걸 봐온 어른들의 놀란 가슴 때문이었을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만 해도 자식농사는 수적으로 으레 반타작이라는 당시의 상식을 받아들이는

쪽이었지만 엄마는 안 그랬다.

엄마는 서울근교 출신이었고 서울에서 여고까지 다니는 사촌들과의 교류도 잦아서

신식병원이 있는 도시에서만 살았어도 그렇게 어이 없이 남편과 자식을 잃지는 않았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툭하면 집안 식구나 동네 사람들에게 남발하는 약방문을 우습게 여기는

유일한 사림이었고 무꾸리와 푸닥거리를 증오했다.

잃은 남편과 자식들이 적절한 치료를 놓치게 한 원흉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정식한의사는 아니었지만 젊었을 적에 선비 교양의 일환으로

익혀둔 보약이나 급한 병을 위한 응급처방 같은걸 써먹고 싶어 하셨고,

당신 자손들에만 안 통했다뿐 동네사람들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경우가 많았다.

아래 윗방으로 나누워져 있는 사랑방 윗방 천정에는 약초 말린 것들과 누런 봉투들이

매달려 있었고 거기서 나는 냄새는 아랫방에 쌓인 한적에서 나는 냄새하고 섞여

할아버지만의 독특한 품격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엄마도 할아버지의 보약 처방만은 무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서울에 와서 알게 된 건데 계절이 바뀔 때 마다

할아버지는 우편물로 오빠를 위한 보약 처방을 부쳐 왔다.

가미지황탕이라나, 지황탕 처방 원본에다가 오빠체질을 감안한 약제를 가미한 것일 듯했다.

이 손녀를 위해 보약 처방을 내주신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게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는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일한 남녀 차별이다.

  여덟 살 되던 해 엄마가 나를 데리러 왔다.

서울서 소학교에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엄마하고 할아버지 사이에 약간의 다툼이 있었지만 계집애도 학교에 보내야하는

시대의 변화를 할아버지도 인정하는 선으로 잘 마무리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격노한 건 엄마가 가위로 내 꽁지머리를 자르고 급조한 단발머리 때문이었다.

뒤통수가 허옇게 드러나도록 올려 깍고, 이발소에서 라면 면도질로 마무리해야 할 그 자리를

가위로 싹뚝싹뚝 잘라놨으니 쥐 뜯어 먹은 자리 같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인사하러 들어간 나에게 해괴한지고, 해괴한지고를 연발하며 고개를 돌리셨을까.

오십 전짜리 은전 한 잎도 다정하게 손에 쥐어주지 않고 던져주셨다.

할아버지의 이런 박대로 나는 가뜩이나 뒤통수가 서늘하고 허전한 단발머리에 자신을 잃고

잔뜩 위축한 채로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에 입성을 했다.

엄마도 내 머리 모양의 해괴한 것은 인정을 한 듯 내 머리통을 옆구리에 끼고

당신 팔을 돌려 가려주면서 집까지 왔고 다음날 당장 이발소에 가서 정리를 했다.

삐뚤삐뚤한 앞머리를 일자로 깍으니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한결 나아 보였다.

이발사는 머리가 금방 자란다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너무 높이 깍은 뒤통수는 면도질을 해봤댔자 더 허전하고 추워졌을 뿐이어서

보이지 않는 곳이 오래도록 신경이 쓰였다.

그건 단발이 아니라 폭력이었다. 딸에 대한 폭력이라기 보다는 시아버지에 대한 폭력이 아니었을까.

무력해진 노인이 의지하고 끼고 도는 딸을 빼내기 위한 무자비한 폭력.

  머리 모양 말고도 내가 적응해야할 새로운 환경은 무궁무진 했다.

엄마가 서울 사람 행세를 하며 그렇게 으스대던 데가 고작 이거였나.

엄마는 인왕산 밑, 깍아지른듯한 산동네 에서도 눈에 띄게 허름한 초가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경사가 심한 좁은 골목들은 거미줄처럼 엉켜 있었다.

집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집을 찿아올 것 같지 않은 딸을 위해 엄마는 나에게 주소를 외우게 했다.

백단위의 번지와 백 단위의 호수를 합하니까 여섯 자리나 되는 무의한 숫자를 어떻게 왼단 말인가.

물건을 세기 위해 하나, 둘, 셋, 넷은 백까지도 셀 수 있었지만 일이삼사는 미쳐 못 배웠다.

배웠다고 해도 집을 번지수가 있어야 찿을 수 있다는 걸 납득할 수 없었다.

시골 우리 마을의 집은 서로 멀찍멀찍 떨어져 있었고 한눈에 누구네 집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영희네 집은 영희네 집같이 생겼고 수돌이네 집은 수돌이네 집같이 생겼다.

우리집에 오는 편지는 할아버지의 성함만으로도 우리집을 잘만 찿아왔다.

아무리 가르쳐도 주소를 제대로 못외는 딸은 엄마를 실망시켰고 아둔하다는 탄식을 자아냈다.

소명하다는 칭찬을 듣던 아이가 환경이 바뀌자 하루 아침에 아둔한 아이로 변했다.

  엄마가 나를 부담스러워한다고는 느낀 후의 모욕감, 엄마의 시선을 벗어날 길 없는 답답함,

그 집이 그 집 같은 집을 이어붙인 사이로 꼬불꼬불한 골목길에서 길을 잃으면 영영 집으로

못 돌아올 것 같은 공포감은 도저히 외지지 않는 길고 긴 번지수와 함께 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었다. 나는 꿈 없이 잘 자는 편이고 그래서 이 나이까지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믿는데

간혹 너무 일찍 눈뜨면 일어나기 싫어 이불 속에서 뭉그적대다가 다시 잠이 들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똑같은 꿈을 꾼다. 집을 못 찾는 꿈이다.

어릴 적의 그 궁핍한 산동네는 아니고 인가라고는 없는 경사진 산비탈 속에 난 꼬불꼬불한 길이

마치 이란 영화 「내 친구 집은 어디인가」에 나오는 길 같다.

내가 꿈속에서 찾는 건 친구네 집도 아니고 우리 집도 아니고 다만 사람 사는 동네다.

저 등성이만 넘으면 동네가 보이겠지, 혹은 인가로 통하는 찻길이나 교통편이라도,

그러나 길은 점점 더 험해지고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협곡이나 직각으로 선 단애를 만나게 된다. 차라리 단애에서 추락을 하자.

그래야 꿈을 깰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고비만 넘으면 사람 사는 세상으로 통하는

길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미련을 못 버리고 계속 허우적대다가 깬다.

  꿈 아닌 생시에도 유사한 체험을 반복하는데 호텔이나 큰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가 있다.

식당 안에 화장실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나가서 우측으로 쭉 가다가 좌측으로

돌아서 우측이라는 식으로 가르쳐준다.

물어볼 것도 없었다 싶게 화장실 표시는 곧 눈에 들어온다.

돌아올 때를 대비해 처음엔 우측 다음은 좌측을 속으로 복창을 하면서 간다.

그래도 돌아올 때는 헷갈리고 무사히 돌아와서도 내가 식사하던 자리나 방을 웨이터한테

다시 물어 보고 안내를 받아야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외국여행 중의 일이었다고 기억되는데 혼자서 화장실을 갔다가 볼일을 보고나서

복도로 나가려고 눈앞에 보이는 문을 열었다.

그러나 밖이 아니고 남자 화장실 이었다.

질겁을 해서 다시 화장실로 돌아와 밖으로 나가는 문을 찿아 나간다는 게 또다시 남자 화장실을

문을 열고 말았다.

보는 사람 없이도 자신이 너무 창피하고,

솔직히 이게 치매구나 겁도 났다.

정신을 가다듬고 딴 사람이 들어 왔다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따라나갔다.

 여자 화장실로 들어오는 문은 처음부터 열린 채로 있어서 따로 열고 나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집을 안 잊어버리려면 외야 하는 번지수나, 집 안 잊어버리기나 나에게는 막상막하로 어렵기만 했다.

그러나 집에서 뒷간에만 가려 해도 개울까지 건너야 하는 너른 터전에 살면서

동네방네와 넓은 들판을 천방지축 뛰어다니던 촌년을 어둠침침한 문간방에 가둬 키울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엄마는 바느질품을 팔고 있었다.

주로 기생 바느질을 했는데 기생들이 일거리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엄마가 갖다 주고 새로운 일거리를 맡아 오곤 했다.

대문 밖 골목길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석필로 땅바닥에 그림도 그리고 언문 글씨도 쓰면서

노는 사이에 자연히 동네 아이들을 사귀게 되고, 그 아이가 잘 가는 재미있는 놀이터도 알게 되었다.

길을 잘 아는 동무들을 따라다니는 것에 일단 안심을 한 엄마도 내가 미끄럼 타고 논 데가 감옥소 앞이었다는 걸 알고는 망연자실 했다.

우리가 처음 정착한 산동네에서 고불고불착한 산동을 지나 아찔한 층층다리를 내려가면 전찻길이

나오고 그 건너가 바로 서대문 형무소였다.

거기서 놀다가 용수를 쓴 전중이가 차에 실려 오는걸 보고 놀라고 난 나도 그 놀이터가

뜨악하던 차에 딴 동무가 인왕산 중턱에 있는 굿당에 놀러가보고꼬셨다.

인왕산엔 국사당이라는 큰 굿당이 있었다.

굿이 매끼가될는 건 아니었다.

우리 집은 그 산동네 에서도 제끼가꼭대기라 덩덕궁 덩덕궁 굿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무들과 덩달아 엉덩이를 흔들며 산으로 치달으면 굿 구경뜨악하나서 떡 같은 것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길길이 뛰는 무당춤과 굿당 벽에 걸린 무서운 것도 같고 인자한 것 같은 온갖 신령님들의 화상은

산동네 에서의 나의 이중생활이었다.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이 딸의 이중생활을 묵인할 리 만무했다.

굿당에서 전물 부스러기나 얻어먹고 다닌다는걸 알게 된 엄마는 싹싹 빌어야 할 정도로

혹독하게 야단을 치면서 시골로 쫓아 보내야겠다고 위협했다.

그때 나는 시골로 쫓아 보내야 겠다는 엄마의 공갈을 왜 그렇게 겁냈던가.

그때 이미 나의 어린 영혼은 도시의 활기와 썩은 냄새에 깊이 매료당한 뒤였던 것이다.

  딸의 잘못을 전적으로 산동네의 열악한 환경 탓으로 돌린 엄마는 당연히 ‘맹모삼천지교’를

생각했을 법하다.

그래서 엄마가 궁리해낸게 학교라도 학군이 다른 딴 동네 학교로 보내서

우리 동네 아이들과 떼어놓은 것이었다.

그 시절에도 학군이라는 말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소학교도 시험치고 들어갈 때였다.

지금의 주민등록에 해당하는 기류계라는 게 있어서 공립학교 마다 지원할 수 있는 해당지역이

정해져 있었다.

같은 인왕산 자락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엄마가 동경해 마지않는 문안이고 젊잖은 중산층 주택가가

학군인 매동학교가 내가 갈 학교로 정해 졌다.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 학교였다.

그 학군 지역인 사직동에 가까운 친척집이 있었다.

즉각 그 집으로 기류계를 옮겼다. 통학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다.

도리어 그동네 학군의 학교로 가려면 거쳐야하는 시궁창을 겸한 꼬불꼬불한 골목길과 곤두선 듯

경사가 급한 층층다리를 지나서 전찻길을 건너야 하는 위험부담에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왕산 넘어 사직동으로 가는 길은 산길이지만 평탄한 외길 이었다.

엄마도 나도 시골뜨기 답게 산길을 혼자 넘어 통학 한다는 걸 조금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에게 닥친 난관은 그것보다도 도 다른 주소를 외야 하는 일이었다.

무거건 외야 하는 무의미한 숫자가 여섯 자리에서 열 한자리로 늘어났다.

엄마는 입시를 며칠 안 남겨놓고 집요하게 집 잃어버렸을 때 대야하는 번지수와 입학시험 때

선생님한테 대야하는 주소가 헷갈리지 않도록 반복 연습을 시켰다.

입학시험 때 주소는 물어 보지 않았다. 합격통지서가 오기로 예정된 날 엄마 손잡고

사직동 친척집으로 갔다.

행랑어멈이 우리를 맞으면서 아가씨가 붙었다고 일러주었다.

안채에서는 친척어른들한테도 축하인사를 받았다.

엄마는  신동 딸이라도 둔 것처럼 의기양양해했다.

그렇게 해서 엄마가 원하는 문안의 좋은 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아무도 주소 같은 건 물어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끝까지 엄마가 꾸민 거짓말에 철두철미하려고 했다.

  일학년 처음 가정방문날 엄마는 사직동 친척집 대청마루에서 안방마님 행세를 하면서

정중하게 선생님을 맞았다.

4월 입학이었으니 가정방문은 6월 달쯤이었던가,

행랑어멈이 미숫가루를 타서 선생님을 대접하던 생각이 난다.

딸을 위해 그런 정성을 다하면서 엄마는 딸이 공부를 잘하리라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언문을 저절로 깨친 아이, 천자문을 애아범 같은 사내녀석들보다도 빨리 뗀 아이라는 건

엄마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일학년을 마치고 이학년으로 진학할 때까지 공부를 지지리도 못하는 열등생이었다.

아마도 낙제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진급을 시켜주었을 것이다.

걱정하던 산수는 도리어 쉬웠다.

무의미한 숫자를 외야 할 필요는 없었고 고장 10 미만의 더하기 빼기였다.

난관을 국어였다.

식민지하에서 우리는 일본어를 국어라고 했고 중점과목이었다.

상급학교 입시도 국어 산수 두 과목에 한정돼 있었다.

말하기는 곧 익혔지만 읽고 쓰기가 도무지 되질 않았다.

금방 반에서 지진아로 전락했다.

요새 애들이 웬만한 집에선 한글 정도는 읽혀서 학교에 보내는 것처럼

그때도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는 취학 전에 일본어의 ‘가타가나’ 정도는 읽혀서 보냈다.

아무리 교육열이 유별난 엄마라지만 엄마자신이 일본어에 까막눈인데 어쩔 것인가.

미리 언문을 외우고 있었다는 게 오히려 장애가 되었다.

저절로 깨쳤다고 어른들이 믿는 것처럼 음과 기호가 동시에 입력이 돼 ‘가’자는 ‘가’라고

발음할 수밖에 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가에다 ㄱ을 한 게 각이라면 아에다 ‘ㄱ’'을 하면 당연히 ‘악’이라고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새로 배운 일본어의 ‘가타가나’는 왜 그 글씨를 가로 발음해야 하는지

아로 발음해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식민지 백성에게 가장 중점을 두어 가르치는 국어가 제대로 안되니 지진아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공부도 못하는데다가 산동네 아이 티가 더덕더덕 나는 촌스러운 옷차림을 한 아이는

자연히 외톨이 신세였다.

그러나 그걸 그닥 고통스러워 한 것 같지는 않다.

동네 아이들과 다른 학교를 다니니까 으슥한 인왕산 길을 혼자서 등하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걸 즐기면 즐겼지 무섬을 탄 것 같지도 않다.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마음껏 공상을 할 수 있었다.

그 길은 어린 날의 나의 꿈길 이었다. 구질구질한 산동네와 나보다 잘난 아이만 있는

교실로부터의 해방구였다. 어려운 환경에서 나를 서울 까지 데려다 공부 시키면서

엄마가 나에게 건 꿈은 장차 선생님이 되는 거였다.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직업 중에서 엄마가 가장 우러러 보는 직업이었다.

좋은 데로 시집가서 걱정 없이 살았으면 하는 것 이상의 기대를  걸머진 열등생이

일탈할 수 있는 유일한 샛길이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여름 겨울 두 차례의 긴 방학에 돌아갈 수 있는

고향집이 있다는 것처럼 도시와 학교에서의 소외감과 열등감을 위로 받을 수 있는 큰 힘은 없었다.

방학을 앞두고 시작되는 더위 추위가 다 반가웠다.

시골집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 가슴 울렁거림은 나만의 것이다.

아무도 이 기분을 모르리라는 건 촌뜨기의 유일한 자부심이기도 했다.

서울 아이들은 이 긴긴 여름과 겨울을 석탄가루 분분한 불모지에서 보낼 생각을 하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똘망똘망 잘난 서울 아이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때만 해도 보통으로 사는 일반 사람들에게 바캉스니 여름휴가니 하는 개념이 생겨나기 전이었다.

방학은 아이들에게 학교를 안가는 날들일 뿐이고 부모에게는 아이들이 거치적대는 동안일 뿐이었다.

엄마는 귀향을 앞두고 내 새 옷을 장만했다.

서울서 딸이 시골뜨기 티 나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에 거의 신경을 안 쓰는 엄마가 시골 가서는 딸이

서울 사람처럼 보이길 바랐다.

엄마의 소박한 금의환향의 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골집에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사랑에서 나를 학수고대하는.

나는 할아버지 품에 왈칵 안기면서 내가 돌아올 고향이 있어서

서울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처럼 할아버지도 서울 손녀를 기다리는 낙으로

앉은뱅이의 나날을 견딜 수 있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내가 할아버지 두루마기 자락에서 대처의 냄새를 맡은 것처럼

할아버지도 내 단발머리 정수리에 당신 코를 파묻고 도시의 냄새를 맡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고향집을 지키던 숙부네한테서도 아이가생겨 내가 언니노릇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귀향해서

맛볼 수 있는 새로운 기쁨이었다.

  바닥을 기던 성적이 4학년 때부터 오르기 시작해 6학년 때는 상위권에 들어

엄마가 원하는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지진아를 면하게 된 것은 집안 형편이 나아진 것 하고도 관계가 있을 것 같다.

공립의 상업학교를 졸업한 오빠는 졸업과 동시에 취직이 돼 월급쟁이가 됐고

서울서 장사에 손을 댄 막냇삼촌도 장사가 잘돼 삼촌과 오빠가 합쳐서 내 집을 장만할 수가 있었다.

처음 집은 같은 산동네였지만 훨씬 입지적 조건이 좋은, 방이 세 개나 있는 기와집이었다.

막냇삼촌은 그때까지도 자식을 두지 못해 우리 남매를 친자식처럼 애지중지 했다.

  따로 집들이 잔치 같은 건 없었지만 서울 사는 친척들이 우리가 새로 장만한 집에

성냥 한 갑씩을 사들고 찾아 와서는 자식 끌고 서울 온지 단시일 내에 성공했다고

치하의 말을 해주고 갔다.

엄마는 장롱 위에다 그 성냥으로 성을 쌓았고,

그 성냥을 다 쓰기도 전에 조금 더 집을 늘려 이사를 다녔다.

  내 생애에 다시는 셋방살이는 없었다.

자수성가한 한 남자에게 시집가서 국민소득이 오르는 것만큼 살림을 향상시켜가며 풍파 없이

평균치의 삶을 유지해 왔다.

아이를 다섯이나 낳났는데 내가 다산성 체질인 탓도 있지만

전쟁 중에 결혼해서 전후에 첫애를 낳고 막내를 낳은 것이 63년이었으니

정확하게 베이비붐 세대에 해당한다.

피임법도 모르고 중절도 안하고 생기는 대로 낳은 결과였다.

그것 가지도 자연의 섭리에 맡긴 평균치의 삶이었다.

남편은 가부장적인 책임감이 강한 남자였다.

작은 사업이었지만 집안 식구 먹여 살리는 것과 아이들 교육비에 모자람 없을 만큼의 돈을 벌어왔다.

나는 돈 계산도 잘 못하고 재테크라는 것에도 소질이 없어서 식구가 느는 것에 맞추어

집을 늘리는 것도 남편이 알아서 했다. 이만하면 족하다 싶게 널찍한 한옥에서

이십년이나 넘어 살다가 연탄 때는 집이 불편해지자 아파트 청약예금에 들고 당첨되기 위해  

수시로 변하는 절차를 밟고 뭔가를 써내는 일도 그의 몫이지 내일이 아니었다.

난 그런 일들을 남의일 보는듯했다.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집에 잔손 갈일이 없어지자 비로소

이제 부터라도 엄두를 내야 할 것 같은 엄청난 욕구가 내 안에 있다는 걸 느꼈다.

그 걷잡을 수 없는 욕구는 증언의 욕구였다. 육이오 때 오빠하고, 끝내 자기 자식을 두지 못해

나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었던 삼촌이 비참하게 죽었다.

남들이 다 남쪽으로 피난 가 있는 동안 남아 있던 우리 식구들은 강제로 찢기고

일부는 북으로 끌려가야 하는 고난을 겪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슨일 인들 안 당했겠는가.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저자들을 악인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다.

왜 하필 소설 이었을까. 소설로 어떻게 복수를 한단 말인가.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기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다.

  세상도 나도 그때로부터 멀리 와 있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를 다독이고 가난을 딛고 살림을 일으키기 위해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현실에만 충실했다.

육이오 때 얘기만 나오면 아이들 까지도 궁상떨지 말라고 핀잔을 줄 정도로

잊고 싶은 과거가 된지 오래였다.

잘 살아보자는 구호가 동회 옥상에서 온 동네로 울려 퍼지던 경제제일주의시대였다.

그런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중간쯤을 달려온 중산층적인

삶에 안주해 있던 나에게 느닷없이 엄습해온 그  엄청남 욕구는 신선한 충격이자 이물감이었다.

내가 누려온 안일이 한없이 누추하게 느껴졌다.

사람이란 고통 받을 때만 의지할 힘이나 위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안일에도 위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증언의 욕구가 이십 년 동안이나 뜸을 들였다가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아마도 최초의 욕구가 증오와

복수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었을 것 이다.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글리 써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만 당한 것 같은 인명피해, 나만 만난 것 같은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나만 겪은 것 같은 극빈의 고통이 실은 동족상잔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훗날 나타난 통계숫자만 봐도 그렇다. 우린 특별히 운이 나빳던 것도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 끔직한 전쟁에서 평균치의 화를 입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이 복수나 고발을 위한 글쓰기의 욕망을 식혀 주었다.

러나 세월이 지나도 식지 않고 날로 깊어지는 건 사랑이었다.

내 붙이의 죽음을 몇 백만 명의 희생자 중의 하나,

곧 몇 백만분의 일로 마들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나 바꿔치기 할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 였다는 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그게 보인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내 집 창밖을 지나는 무수한 발자국 소리 중에서도 내 식구가 귀가하는 발자국 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몇백, 몇천 명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운동장에 모여 있어도

그 안에서 내 자식을 가려 낼 수 있는 것처럼. 내 자식이 딴 애들 보다 덜 똘망똘망하고

어리숙해 보일수록 사무치게 사랑스러운 것처럼.

  마흔 살이란 늦은 나이답게 수줍게 문단을 두드린 게

처녀작 『나목』이었다.

사적인 경험을 우려낸 작품이니 유니크 하지만 등단작으로 끝나는 일회적인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한 심사위원의 조심스러운 전망이 기억에 남는다.

그분의 우려가 격려가 되어 그 후 나는 글을 열심히 썼고 문단과 독자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아

종종 인기 작가 소리도 듣게 되었다. 초기에 쏟아낸 6.25를 소재로 한 작품들에 대해선 비극적인

가족사를 반복적으로 울궈먹었다는 평도 들었지만 나는 반전 소설로 읽히길 바라고 있다.

유연하게 성공적로 가정주부에서 작가로 변신 할 수 있었고, 그 후의 작가생활도 결혼처럼 풍파 없이

순탄했다.

  88올림픽으로 온 국민이 활기와 환희, 새로운 희망과 자신감으로 의기충천해 있을 때,

그 한 해 동안에 나는 남편과 아들을 석 달 간격으로 잃었다.

남편이 먼저였다.

우린 남들이 부러워한 금슬 좋은 부부였고 특히,

나는 생활인으로 결격사유가 많은 사람이라 전적으로 의존적이었다.

다행히 네 딸을 다 시집보낸 뒤였고, 막내로 아들 하나만 미혼이었지만

그 아들도 제 앞가림은 하고도 남을 만한 전문직으로 키워놨겠다.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혼자서 살 자신도 없었다.

극도의 무력감은 슬픔보다 나빴다. 아들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전혀 신경 안 쓰고 남편의 영정을 머리맡에 두고 여보 나 좀 데려가줘요,

하는 소리만 주문처럼 외고 살았다.

그런지 석 달 만에 남편이 데려간 건 내가 아니라 아들이었다.

나는 겁 없이 그런 주문을 왼 내 입술을 짓찢어도 시원치가 않았고

내 소원에 그런 어깃장으로 답한 남편이 꼴도 보기 싫어 당장 영정사진을 치워버렸다.

이럴 리가 없다, 제발 꿈이어라,

방을 헤매며 온몸을 벽에 부딪치는 난동도 부려 보았지만 악몽은 깨어나지지 않았다.

슬픔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건 수치심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벌을 받습니까,

라는 신에 대한 원망은 곧 사람들이 저 여자는 뭘 잘못했기에

그 외아들 하나 지니지 못했나 하는 수근거림이 되어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친지들의 정중한 조문의 말도 그 그런 비아냥거림을 포장한 말로 들렸다.

사람을 만나기 싫어 딸네 집에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숨어 있어도 부끄러움을 면할 길이 없었다.

혼자 있으면 하늘이 부끄럽고 땅이 부끄러웠다.

차라리 하느님과 정면 대결을 하려고 수녀원에 들어가 독방 차지를 하고 있어도 보았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벌을 주셨나 항의도 해보고,

나도 아들 곁으로 데려다 달라고 처절하게 기도도 해 보았다.

그러나 내 절규는 하느님의 견고한 침묵의 변죽도 울리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 하느님과의 일대일의 대결에서 깨달은 게 있다면 피조물은 길든 짧든

창조주가 정해준 수명에서 일초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깨달음은 질책보다 더 엄혹했다.

  딸들의 도움으로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 애들을 위해서라도 늠름해져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들이 부재하는 일상은 가시방석처럼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나도 내 집의 일상과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부재하고 싶었다. 집에 온지 한 달도 안 돼

그때 마침 미국에 나가있던 막내네로 여행을 떠났다.

부재를 위한 여행에는 설렘도 계획도 없었다.

내가 부재하는 집을 헛되게 울릴 전화벨소리, 쌓여있는 우편물 생각을 하면 누구에게랄 것 없이

고소한 생각이 드는 것 정도가 여행의 즐거움이었다.

아무런 의미를 못 느끼고 빠져 나온 관계망이라고 해도 그 관계망은

나를 유의미한 존재로 유지시켜주길 바랐던 것 같다.

결국은 그 관계망을 아주 끊어버릴 수 없다는 책임감 때문에 석 달 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일상의 편안함은 돌아오지 않아 아들이 부재하는 집은 곧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어디이든 상관없었다. 어디로든 떠나 이 집의 일상으로부터 나를 부재하게 만들고 싶었다.

단지 부재를 위한 여행에는 꿈도 설렘도 없었다.

기회만 닿으면 따라나섰고 내 돈 들이는 여행,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따르는 돈 안 드는 여행, 가리지 않았다.

 일 년에 서너 번 정도는 해외여행을 하지 않았나 싶다.

유니세프 일로 재난에 시달리는 나라도 많이 봤고, 멋모르고 따라나서다 보니

같은 나라를 여러 번 가기도 하고, 험한 곳에서 내 나이의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모험과

고행을 감행한 적도 있다.

그런 경우라 해도 성취감 같은 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리 신기한 나라를 다녀와도

식구에게도 누구에게도 여행담을 늘어놓는 일이 거의 없는데 사물을 건성으로 보는

무감각증 때문에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을 것이다.

  재작년에 다녀온 이태리여행도 그런 설렘도 목적도 없는 여행이었다.

여행의 기쁨에 대한 기대를 안 한 지 오래됐다고 해도 괴로운 것을 참을 각오까지

하긴 싫었음으로 동행이 누구누구 대한건 신경을 쓰대한편이었다.

평소 존경해온 신부님이 이끄대한문화탐방이어서 그 점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았지만

강행군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긴 했다.

 마음 착하고 체력 든든한 룸메이트도 정해졌다.

떠날 때부터 몸상태가 어째 으스스했다. 몸살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푹 쉬고 싶었지만 비첉을 서 한잠도 못 자는 버릇은 여전해서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눕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것도 따끈한 온돌방에, 서울은 쾌적한 가을 날씨였는데 로마의 가을은 뜻밖에 음습했다.

간간히 비도 뿌될 것 습기와 챜을오래정없이 몸으로 스몄 것 신열이 느껴지고 현지 음Ý기대구역질이 났다. 감긴 감긴데 내가 앓아본 어떤 감기하고도 달랐다.

불덩이 같은 신열과 아무리 껴입는 버뎁혀지지 않는 챜을의 이중성이 객지 서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깽대먹고 하루만 푹 쉬면 살 것 같은데 하루 버같은 호텔기대묵지 않고 옮겨 다니는 강행군이니

나만 처곈 앓는 없는 일이었다.

나 만 떼어놓고 갈까봐버겁이 나서라도 아프다는 걸 감춰야 했다.

병뎁혀지그게 지 힘들었다. 룸메이트에게까지는 감춰지지 않아서

그가 일행 중 의사 선생님이 있다는 걸 알아내 착감기약을 얻 착왔다.

나대한타이레놀이나 소화제 등 최소한의 상비뉽 버飆즷못 자지 않았다.

의사씀, 방한 감기약을 먹고 숙면은 했지만 진흙탕버같은 잠이었다.

내답 눕안 갖고 와서 입고 꺔 펈딩한 점퍼가 흠박 잦을 정도의 땀을 흘리고 탈진상태에 빠졌다.

룸메이트가 캐나다 서 온 또 다른 여의사에 도청해서 당장 기운이 나대한주사 대한걸 배꼽 밑에 놔주었다. 나대한별안간 기운 나대한주사버같은 건 믿지 않았지만 주사버기운이 들은 척이라 버할 수밖에 없었다.

이태리 의사에 도내 이 기분 나쁜버증상을 어떻 도퐩현한단 말인가.

설사버그가 영어를 안다고 해도 내가 영어로 지껄일 수 있는 병명이 고삑버기통, 두통, 열이 있다,

정도인데 무슨 소용인가.

나대한차가운 의료기을 각맡겨곈 테고 의사횔지그 각따라, 방을 할 수이다.

나대한오슬오슬 춥다가 오싹오싹 떨린다고 말껄일 수다.

 내 몸은 지금 불화로를 얼음조각도 따걱정해놓은 것 같다고 말껄일 수다.

삭신이 쑤신다고 말껄일 수다. 입맛이 소태 같다고 말껄일 수다.

죽는 버이 나라 섁 죽일 수지 않다고 말껄일 수다. 아무 버통역할 수 없을 것 같은 말만 생각났다.

그걸 참고 따라 다니자니 하루가 여삼추였다.

  일정의 반을 소화하고 카프리섬으로 가기 위해 나폴리를 떠나 해안도로를 따라 소렌토로 가는 길이었다. 일행에게 폐 안 끼치고 일정의 반을 소화했다는 게 힘겹게 정상에 올라 내리막길을 굽어보는 것 같은

안도감을 주었다. 유난히 아름다운 해안도로였다.

고고학이나 미술을 전공했는지 잠시도 쉬지 않고 뭔가를 설명하고 싶어하던 가이드도

그때만은 조용히 입 다물고 파바로티의 노래를 틀어주는 것이었다.

그 버스의 음향기기 성능이 그렇게 좋은 줄은 몰랐다.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행복감이라고 해야 할까, 슬픔이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황홀경이었었다. 파파로티의 기름진 고음이 절정에 달했을 때 목 놓아 울고 싶은

격정에 사로잡혔다.

내 무감각을 울린 건 그러나 파바로티가 아니라 아들이었다.

  아들이 인턴 때던가, 전공의 시절이던가.

출장 갔다 온 날 밤 축 처진 쓸쓸한 모습으로 내 방에 들어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언짢은 표정이었다. 가망 없는 환자를 제주도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고

병원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고 했다.

호흡기만 떼면 숨이 멎을,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환자였지만

가족들은 집에서 임종과 잘례를 치르기를 바랐다.

제주도까지 가는 동안 환자의 숨이 끊어지지 않도록 생명연장장치를 붙들고 갔다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떼어주고 온 것이었다.

말단 의사에게 시킬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목숨을 살리기를 꿈꾸고 들어선 의학도의 길에서 맡겨진 일이 임종을 도와 주는

일이었다는 게 아들을 우울하게 한 것 같았다.

  아들은 아쉬운 듯이 한마디 더 했다.

‘엄마, 내가 처음 타본 비행기였는데⋯⋯.’

그때는 그냥 웃어넘기고 만 일이 이제 와서 이 아름다운 아말피 해안도로 상에서

오열을 참을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스물여섯 살까지 비행기 안 번 못 타보다니.

못살지도 잘살지도 않는 보통 집이었고,

자식을 특별히 검약하게 기르고자 하는 교육방침을 가진 집이었던 것도 아니다.

시대가 그랬던 것이다.

조기유학 붐도 없었고 어학연수 같은 풍조도 생겨나기 전이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들쑤성거려 해외여행 같은 걸 시킬 생각을 뭣 하러 하겠는가.

그게 그리 먼 옛날도 아닌데 그동안 먼 나라 이웃나라 가리지 않고 주책없이 싸돌아다닌 어미는

어찌 그런 세상이 다 있었을까,

원시시대의 일처럼 믿어지지 않다가,

그때가 현실이고 낯선 곳에서의 이 시간이 비현실 같은 착란이 왔다.

  뱃길로 바람 찬 카프리섬 관광을 마치고 다시 나폴리로 돌아와 시칠리섬의 시라쿠사로 가기 위해

로마 중앙역에서 밤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다.

가장 빡빡하고 고된 하루를 보내고 호텔에도 들지 못하고 밤기차를 타야 하다니,

죽을 것 같았다. 몸이 와들와들 떨리고 손발은 얼음장 같은데 눈동자만 뜨거웠다.

안에 있는 고열이 곧 얼음조각을 뚫고 폭발할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일행 중 나이 많은 쪽 의사 선생님한테 내가 암만해고 폐렴이 될 것 같으니

항생제를 처방해줄 것을 부탁했다.

자정 가까운 중앙역의 찬바람 속에서 찬물로 여러 알의 알약을 삼켰다.

시칠리섬은 기차에서 내리지 않고 갈 수 있다고 했다. 큰 배가 기차를 통째로 싣고 밤새도록 바다를 건넌다는 것이었다. 승용차나 트럭을 태우고 해협을 건너는 배는 더러 봐왔지만 기차를 태우는 배는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이 안 됐다.

그러나 가이드가 일러주지 않았으면 배 안이라는 것도 모를 정도로

기차는 요동 없이 고요하게 플랫폼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지금 기차가 배 안에 있는 거라면 배를 볼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나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나를 삼킨 큰 물고리를 상상했다.

사람을 삼킨 게 큰 물고기였다면 기차를 삼킨 건 고래뱃속일 것이다.

고래뱃속의 환상은 기차가 다음 날 아침 시칠리섬 시라쿠사에 도착할 때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계속됐다. 그 모든 새로운 풍경이 고래뱃속의 일로만 여겨졌다.

시칠리섬에서 3박이나 하는 동안도 열은 내리지 않아 혼미한 상태에서 환상도 계속됐다.

어떤 항구에선지는 거대한 배에서 내린 많은 관광객들과도 마주쳤고

그 안에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여럿 있어서 우리 일행과 만나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르면서 같이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행히 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말로만 듣던 크루즈여행을 온 사람들이었다.

항구에 정박해있는 빌딩만 한 배를 보고도 내 혼미한 의식은 여전히 그

 모든 것이 고래뱃속의 일처럼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인천행 아시아나 항공은 다행히 빈자리가 많았다.

그동안 걱정 많이 한 내 룸메이트가  연달아 비어 있는 자석을 잡아주어서  편안히 누워서 올 수 있었다.

 기내식은 여전히 땡기지 않았지만 심한 공복감을 느꼈다.

그 공복감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길게 누워 있다고 잠이 오는 건 아니었다.

집에 가서 이것저것 먹을 걸 상상하고, 식구들에게 투정 부릴 궁리를 했다.

딸들이 만일 잣죽이나 전복죽을 쒀온다면 냄새만 맡고도,

꼬라지만 보고도 죽집에서 사 왔다는 걸 알아맞히고 호통을 치리라.

콩나물죽이 먹고 싶다고 할까, 호박죽이 먹고 싶다고 할까,

아니 흰죽이 먹고 싶다고 해야지.

장조림 간장은 싫고, 장산적, 아니지 강된장에 맵지 않은 풋고추를 꼭꼭 찍어 먹고 싶다고 해야지,

상상 만으로도 입안에 군침이 돌고 살맛이 났다.

감기는 어지간히 물러간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그동안 얼마나 독한 감기를 앓았는지는 꼭 티를 내야지,

하고 별렀다.

  드디어 인천공항에 내렸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짐 찾는 아래층에  안전하게 발을 디디자 비로소 고래 뱃속을 빠져 나왔구나,

하는 현실감이 왔다.

이번 여행길을 통틀어 방금 내린 비행기까지가 다 고래뱃속의 일로 여겨졌다.

어쩌면 지난 이십년 동안의 설렘도 목적도 없는 여행이 다 고래뱃속 안에서의 헤맴이 아니었을까,

오랜만에 내 땅에 첫발을 디딘 착지감은 눈감고도 느낄 수 있는 첫사랑과의 터치처럼

에로틱하기 조차 했다. 죽어서도 당신에게 스미고 싶어, 그런 황홀경 이었다.

  재작년에 그러고 나서 지난 일 년 동안 한 번도 해외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궁굼하거나 답답하지 않았다. 가장 평화로운 한해였다.

신종풀룬가 뭔가 하는 독감이 유행할 때도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해마다 맞던 독감예방주사도 맞지 않았다.

유럽에서 그 정도로 독하게 감기를 앓았으니

적어도 몇 년은 갈 면역이 생겼으려니 믿고 있다.

남이야 믿거나 말거나. 설렘도 볼일도 없는 여행은 다시는 안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