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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인간의 대지 - 쌩 떽쥐뻬리

오늘의 쉼터 2011. 5. 18. 21:30

인간의 대지 - 쌩 떽쥐뻬리


[8] 인간들의 모순

(1)
나는 또 한번 하나의 진리에 접근했으면서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는 모든 것이 파멸되어 절망의 밑바닥에 닿은 것으로 믿었는데,

일단 단념을 하고 나자 평화를 알게 됐다.

그런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자신의 유일한 친구가 되는 것 같다.

우리 속에서 우리 자신도 알지 못했던 그 어떤

본질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충만감보다 나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각건대 바람을 쫓아 가느라고 자신을 망가뜨렸던

보나프는 이런 고요한 편안함을 알았으리라.

기요메도 또한 눈 속에서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나 자신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모래 속에 목까지 파묻히고,

서서히 갈증으로 목이 졸리면서,

그 별들의 외투 아래서 마음이 그다지도 포근했던 때의 일을.

우리 마음 속의 이러한 일종의 해방감을 어떻게 하면 복돋아줄 수 있을까?
인간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모순 투성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마음껏 창작할 수 있도록 생활을 보장해 주면 그는 잠들고 만다.

승리를 거둔 정복자는 연약해지고,

인심 좋은 사람도 부자가 되면 수전노가 되고 만다.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주장하는 정치상의 주의라는 것도,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인간들을 행복하게 할 것인가를

우선 알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무슨 중요성이 있겠는가?

누가 태어나려는가?

우리는 살만 찌우면 되는 가축이 아니며,

가난한 한 사람의 파스칼의 출현이

어느 이름 없는 부호의 출현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다.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제각기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가장 흐뭇한 기쁨들을 맛보았다.

이러한 기쁨들이 우리에게 그다지도 사무치는 노스탤지어를 남겨 주었기에

우리의 비참함까지도 그리워하게 된다.

동료들과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모두가 쓰라린 추억들의 기쁨을 맛보았던 것이다.
우리를 윤택하게 해주는 미지의 조건이 있다는 것 이외에 우리가 무엇을 안단 말인가?

인간의 진실은 어디에 깃들이고 있는가?

진리란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곳이 아닌 이 땅에서만 오렌지 나무들이 튼튼한 뿌리를 뻗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면 이 땅이 바로 오렌지 나무의 진리이다.

다른 어느 것이 아닌 이 종교가, 이 문화가, 이 가치의 기준이,

이 활동 형태가, 인간 속에 이러한 충만감을 주고,

그의 마음속에 알지 못하던 하나의 왕자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가치 기준, 그 문화, 그 활동 형태가 바로 인간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논리는? 논리가 인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좀더 고생을 겪어내어야 한다.

이 책에서 나는 내내 어떤 지상의 천성에 따라,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이 수도원 택하듯이 사막이나

항공로를 택한 사람들 중의 몇 사람의 이야기를 해왔다.

그러나 내가 당신들에게 이 사람들을 찬양해야 할 것은

그들의 바탕이 되어 준 대지이다.

천품도 물론 어떤 작용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네 가게 안에 틀어박혀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필요한 방향을 향해 감연히 그들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우리는 사람들의 어린 시절의 역사 속에서

그들의 운명을 설명해 줄 힘의 싹을 발견한다.

그런데 사후에 읽혀지는 역사는 눈을 석이는 법이다.

이러한 힘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 볼 수 있다.

난파나 화재가 일어난 밤에 그들 자신 이상의

위대한 활동을 보인 상인들을 우리는 다들 알고 있다.

물론 그들은 자기네가 발휘한 푸진 힘의 특질에 대해 과대 평가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화재는 그들의 생애에서 예외적인 하룻밤일 테니까.

다만 새로운 기화나, 알맞은 대지나, 또는 엄격한 종교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간직한 위대함을 알지 못한 채 다시 잠이 들고 만다.

분명히 천성은 해방되고자 하는 인간들을 도와준다.

그러나 그러한 천성을 해방시키는 일도 똑같이 필요하다.

하늘에서의 밤들이며, 서막에서의 밤들...

이런 것도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드문 기회이다.

그러나 사태가 그들을 부추길 때, 그들은 모두 똑같은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내게 많은 교훈을 준

스페인에서의 하룻밤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 주제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다.

나눈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대해서 너무 많이 이야기했으니,

이제는 보통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은 내가 통신원으로서 방문했던 마드리드 전선에서의 일이었다.

그날 밤 나는 지하 대피소 안에서

한 젊은 대위의 식탁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2)
전화 벨이 울렸을 때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긴 대화가 시작됐다.

사령부에 명령한 국지 공격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것은 이 교외의 노동자 거리에 있는 콩크리이트 요새로 바뀐

몇 채의 건물을 점거하라는, 터무니없고 절망적인 공격 명령이었다.

대위는 어깨를 흠칫하고는 우리 있는 데로 돌아온다.
"우리 중에서 먼저 나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거기 함께 있던 한 상자와 내게 꼬냑잔을 2개 내민다.
"자네 나하고 제1차 출발일세. 마시고 가서 자게."

상사에게 말한다.
상사는 자러 갔다.

이 식탁에 둘러 앉은 우리 여남은 명은 불침번이다.

완전히 빛을 차단시켜서 어떠한 빛도 새지 않는 이 방에서

불빛이 너무 부셔 나는 눈을 깜박인다.

5분 전에 나는 총구로 밖을 내다보았다.

창구를 가린 헝겊을 제자리에 가렸을 때,

그것이 기름이 흐르듯이 달빛을 지워버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도 내 눈에는 암록색 요새의 영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 병사들은 아마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수줍게 침묵을 지킨다.
이 돌격은 명령이다. 인간의 저장 속에서 퍼내는 것이다.

곡물 창고에서 퍼내는 것이다.

씨뿌리기 위해서 한줌의 낟알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는 꼬냑을 마신다.

내 오른쪽에서 장기를 두고 있다.

왼쪽에서는 농담들을 하고 있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반쯤 취한 한 남자가 들어온다.

텁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우리에게 정다운 시선을 굴린다.

그의 시선이 꼬냑 위로 미끄러졌다가는 돌리고서

다시 꼬냑으로 되돌아 와서 애원하듯 대위 위로 돌린다.

대위는 나지막하게 웃는다.

희망을 얻은 그 사나이도 웃는다.

가벼운 웃음이 구경꾼들 사이에 번진다.

대위가 술병을 슬며시 끌어당기자 사나이의 시선이 절망의 빛을 띠고,

이래서 어린애 같은 장난이 시작된다.

이 일종의 말없는 발레가 몽롱한 담배 연기와,

철야의 피로와, 임박한 공격 등과 어울려 마치 꿈속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밖에서는 바다의 파도 소리와 같은 폭발음이 심해져 가는데도

우리는 우리 배의 훈훈한 선창 속에 갇혀서 장난을 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이제 곧 그들의 땀과,

알코올과 기다림에 찌든 때들을 전투의 밤의 왕수 속에서 씻게 될 것이다.

나는 이들이 정화될 시간이 임박했음을 느낀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정꾼과 술병의 발레를 출 수 있는 데까지는 아직도 추고 있다.
그들은 이 장기를 둘 수 있는 데까지는 두고 있다.

그들은 생명을 될 수 있는 데까지 끌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선반 위에 버티고 있는 자명종을 맞추어 놓았다.

그러니 그 종이 오래지 않아 울릴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고 혁대를 졸라맬 것이다.

그러면 대위는 걸린 권총을 벗길 것이다.

그땐 주정꾼도 술이 깰 것이다.

그러면 모두들 달빛으로 푸른 장방형을 이룬 입구까지

비스듬히 경사진 복도를 서두르지 않고 않고 올라 갈 것이다.

그들은 이런 하찮은 말들을 하리라.

"빌어먹을 놈의 공격...."이라든지,

"어유, 춥다!"느니 하는. 그리고 그들을 뛰어 들어갈 것이다.

시간이 되어 나는 상사가 잠을 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뒤죽박죽이 된 지하실에서 쇠침대 위에 뻗어 자고 있었다.

나는 그가 자는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불안하기는커녕 몹시도 행복스러운 그 잠의 맛을 나도 알 것 같았다.

그의 자고 있는 모습이 리비아에서 첫날의 생각을 나게 했다.

그날 쁘레보와 나는 물도 없이 조난 당해 죽음의 선고를 받고서도

아주 심한 갈증을 겪기 전에 한 번, 꼭 한 번 2시간 동안을 잘 수 있었다.

그때 자면서 나는 현실 세계를 거부하는

놀라운 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맛보았었다.

그때, 아직은 평화로울 수 있는 몸의 소유자였던 나는,

얼굴을 팔에 파묻고 나니 그 밤을 행복한 밤과 구별지을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상사는 공처럼 뭉쳐서 사람 같지 않은 모양으로 잠자고 있었다.
깨우러 온 병사들이 촛불을 켜서 병에 꽂았을 때,

그 두루뭉수리의 덩어리에서 내가 처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군화밖에 없었다.

징을 박고 편저를 낀 엄청나게 큰 군화,

날품팔이나 부두노동자들이 신는 군화였다.

이 사내는 자기의 작업 도구를 신고 있었고,

그의 몸에 있는 것은 연장이 아닌 것이 없었다.

탄약 함도, 권총도, 가죽 멜빵도, 혁대도.

그는 길마니, 목띠니 하는 밭갈이 말의 마구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모로코에서는 지하실 속에서 눈먼 말이 끄는 연자매를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흔들리고 불그스레한 촛불 속에서,

연자매를 끌리기 위해서 역시 눈먼 말을 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봐, 상자!"
그는 아직 잠에 취한 얼굴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꾸물거렸다.

그리고는 잠을 깰 생각은 통 하지 않고 벽 쪽으로 돌아눕는다.

포근한 엄마 뱃속인양, 깊은 잠 속으로 다시 빠져 들어가며,

깊은 물 속에서처럼 오므렸다 폈다 하는 두 주먹으로

무언지 모를 시커먼 해초를 붙잡곤 하면서 그의 손가락들을 펴주어야만 한다.

 

우리는 그의 침대에 걸터앉아 한 사람이 그의 목 밑으로 팔을 살며시 넣고,

웃으면서 그 무거운 머리를 쳐들었다.

그것은 마치 훈훈한 외양간에서 서로 목을 비벼대는 말들의 다정함 같았다.

"이봐, 친구!"
나는 평생에 이보다 더 다정한 광경을 본 적이 없다.

상사는 행복한 잠 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다이너마이트와, 피로와,

얼어붙은 밤으로 된 우리의 세계를 거부하려고

마지막 노력을 다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밖에서 오는 그 어떤 것이 그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일요일에 학교의 종도 이와 같이 벌받은 아이를 슬며시 깨운다.

아이는 책상도, 칠판도 벌로 낸 숙제도 잊고 있었다.

그는 벌판에서 놀이하는 꿈은 꾸고 있었으나 헛일이었다.

종은 줄곧 울려 인간들의 부정 속으로 악착같이 그 아이를 다시 끌고 가는 것이다.

이 아이를 닮아 이 상사도 피로에 지쳐빠진 이 육체도,

그도 원치 않는 이 육체를 차츰차츰 의식하는 것이었다.

잠이 깰 때의 추위 속에서 이내 저 뼈 마디마디의 쓰라린 아픔을,

또 마구의 무게를, 또 저 무거운 달음박질을,

그리고는 죽음 알게 될 그 육체를.

죽음 자체보다도 몸을 일으키기 위해 손을 담그는 저 피의 끈끈이와,

그 힘든 호흡과, 그를 둘러싼 빙판, 죽음 자체보다도 죽어갈 때의 그 불편함.

그래서 나는 그를 쳐다보면서 줄 곧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나 자신이 잠이 깨었을 때의 허전함과, 엄습해 오던 갈증과,

태양과, 사막과, 사람이 어쩌지 못할 꿈인 생명의 엄습 등을 생각하며.
그런데 상사는 일어나서 우리를 똑바로 쳐다본다.
"벌써 시간인가?"

 

여기서 인간이 나타난다.

여기서 인간이 논리의 예측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상사는 웃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이 유혹은 무엇인가?

메르모즈와 내가 몇몇 친구들과 함께 축배를 들던 파리에서의 어느 밤이 생각난다.

무슨 기념일 이었는지는 모르나 우리는 너무 많이 지껄이고,

너무 많이 마시고, 공연히 피로해진 데 진저리가 나서

새벽녘에 어느 바의 문간에 서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벌써 희끔해져 있어, 갑자기 메르모즈가 내 팔을 움켜잡았다.

그것도 그의 손톱이 느껴질 정도로 억세게.

"이봐, 지금쯤 다까르에서는...."

그것은 정비공들이 눈들을 비비며 프로펠러의 커버를 벗기는 시각이며,

조종사가 기상 통보를 알아보러 갈 시각이며,

땅 위의 온통 동료들만으로 가득 찰 시각이었다.

벌써 하늘은 붉게 물들고, 벌써 사람들은 잔치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잔치를 준비하고,

벌써 우리는 참석하지 못 할 연회의 식탁보를 펼치고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위험을 무릅쓰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긴 얼마나 불결한가...."

메르보즈가 말을 맺는다.
그런데 자네, 상사여,

자네는 죽음에 값할만한 어떤 연회에 초대를 받았던 말인가?

나는 이미 자네의 속내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다.

자네는 내게 신상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네는 바르셀로나 어느 곳의 보잘 것 없는 경리사원으로서

전에는 숫자를 늘어놓고 있었다.

자네 나라가 갈라져 있다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이,

그런데 한 동료가 지원 입대했다.

이어 또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

그리하여 자네는 어리둥절해서 어떤 야릇한 변화를 받아들였다.

자네의 하는 일이 점점 시시하게 여겨졌다.

자네의 기쁨들도, 걱정들도,

하찮은 일상의 안락함도 모두가 예 시대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지 않았다.

마침내 자네 동료의 한 사람이 말라가 근처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왔다.

자네가 그 복수를 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를 그 친구 하나가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란 것도 일찍이 자네의 마음을 어지럽힌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죽음 소식이 바다의 돌풍처럼 자네 위를,

자네의 좁다란 운명 위를 스쳐 갔다.

그날 아침 한 동료가 자네를 쳐다보며 말했다.

"갈까?"
"가자."
그래서 자네들은 "갔던" 것이다.

자네가 말로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그 명백한 사실을 자네를 지배했던 그 진리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몇 가지 일들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이주기에 기러기가 날아갈 때, 그들이 굽어보는 지역 위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것은 집오리들이 그 거창한 삼각형의 날개에 끌리듯이

서투른 날개짓을 시작하는 것이다.

야성의 부름 소리가 그들 속에 있는 무엇인지 모를 어떤 야성의 흔적을 잠깨운 것이다.

즉, 농가의 오리들이 잠시 철새로 바뀐 것이다.

웅덩이니, 벌레니, 오리집이니 하는 하찮은 영상만이 내왕하던

그 작은 무긴 머리 속에, 대륙의 드넓음과,

큰 바닷바람의 맛과, 해양의 진리가 전개된 것이다.

이 짐은 제 골이 이렇듯 놀라운 것들을

간직할 수 있을 만큼 넓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 날개를 치고,

 낟알과 벌레들을 깔보며, 오직 기러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내 영양들이다.

나는 쥐비에 있을 때 영양들을 길렀었다.

거기서는 모두들 영양을 길렀다.

우리는 그것들을 창살 달린 우리 속에 가두어 한데다 두었다.

영양에게는 유동하는 공기가 필요하고, 또 그들만큼 허약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붙잡혀서라도 자라고, 시림 손에서 풀을 먹게 된다.

쓰다듬어 주면 가만히 있고, 그 촉촉한 콧잔등을 손바닥에 파묻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놈들이 길이 든 줄로 안다.

사람들은 소리도 없이 영양의 씨를 없애고,

살그머니 그들을 죽이는 알지 못할 괴로움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놈들이 조그만 뿔로 사막 쪽을 향해

울타리를 떠받는 것을 발견하는 날이 온다.

그놈들은 자석에 이끌린 것이다.

그놈들은 사람들에게서 도망친다는 것도 모른다.

조금 전에도 당신이 갖다준 우유를 막 먹고 난 참이다.

그것들은 아직도 쓰다듬어 주면 가만히 있고,

콧잔등을 손바닥에 더 다정스레 파묻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놓아주기가 무섭게 기뻐서 껑충거리는 듯이 보이다가는

다시 창살 있는 데로 돌아가는 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간섭하지 않으면,

그냥 거기 서서 울타리와 싸워볼 생각은 없어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작은 뿔로 죽어라 하고 울타리를 떠받는 것이다.

발정기라서 그런가? 아니면 숨이 차도록 뛰놀고 싶은 단순한 욕구 때문일까?


그놈들은 그것을 모른다.

사람들이 붙잡아 왔을 때는 아직 눈도 뜨지 않았었다.
그놈들은 수컷의 냄새를 모르듯이 사막에서의 자유도 전혀 모른다.

그러나 그대들은 그 양들보다 더 영리하다.

그놈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그대들은 안다.

그것은 그놈들의 소원을 채워 줄 넓은 들판이다.

그놈들은 영양이 되어 저희들의 불꽃을 피하려는 듯이 갑작스런 도약을 섞어 가며,

시속 1백 30킬로 미터의 줄달음질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두려움을 맛보는 것이 영양들의 진리이고,

그 두려움만이 그들에게 제 힘 이상을 해내게 하고,

가장 높은 재주를 끌어내게 하는 것이라면, 샤깔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폭양 밑에서 맹수의 발톱에 찢겨 죽는 것이 영양들의 진리라면,

사자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대들은 그들을 들여다보며 생각할 것이다.

그놈들이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고 향수,

그것은 알지 못할 그 무엇인가에 대한 동경이다.

동경의 대상이 있기는 하다.

다만 그것을 표현할 말들이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무엇이 그립단 말인가?

상사여, 자네는 여기서 자네의 운명을 저버려서는 안된다는

결심을 할만한 그 무엇을 발견했단 말인가?

어쩌면 그것은 자네의 잠든 머리를 쳐들어준 그 우애로운 팔이거나,

또는 동정은 아니나, 나누어주는 그 정다운 미소가 아닐까?

"이봐, 친구!"

동정한다는 것은 아직도 둘로 있다는 뜻이다.

아직도 갈라져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감사도 연민도 똑같이 의미를 잃게 되는 인간 관계의 높이가 있다.

사람이 해방된 포로처럼 숨을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2대의 비행편대로 아직 귀순하지 않은 리오 데 오로 지방을 날아 넘었을 때,

우리는 이러한 결합을 맛보았었다.

나는 조난자가 구조자에게 감사하는 말을 일찍이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흔히 우리는 이 비행기에서 저 비행기로

우편 행낭을 옮겨 싣느라고 애를 쓰는 동안에도 서로 욕지거리를 하곤 했었다.

"망할 자식! 내가 고장이 난 건 네 탓이야.

미쳤다고 그 역풍 속을 고도 2천으로 날아!

좀더 낮게 날 따라 왔더라면 우린 벌써 뽀르 에띠엔에 가있을 게 아냐!"

그러면 목숨을 내맡기고 따라 왔던 상대편은

망할 자식이 된 부끄러움을 깨닫게 된다.

하기야 무엇에 대한 감사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도 역시 우리 생명에 대한 감사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도 역시 우리 생명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나무의 가지들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구해준 자네가 자랑스러웠다!

상사여, 죽음을 위해 자네에게 준비를 시켜주던 그 병사가 왜 자네를 동정했겠는가?

자네들은 서로를 위해 이 위험을 택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사람들은 이미 언어가 필요치 않은 일치감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자네의 출발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자네가 바르셀로나에서 가난했고,

일이 끝난 후에는 외로웠고, 자네 몸을 편히 쉴 곳조차 없었을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자네 자신이 완성되는 느낌을 맛보게 되었고,

또 우주적인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따돌림받던 자네가 사랑으로써 맞아 들여졌던 것이다.

어쩌면 자네를 충동질했을지도 모르는 저 정치가들의 호언장담이 진정했고 안했고,

또 이치에 맞지 않고를 나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씨앗들이 싹을 틔우듯이 그 말들이 자네를 붙들었다면,

그것은 그 말들이 자네의 욕구와 합치됐기 때문이다.

자네만이 심판관이다. 밀을 알아 볼 줄 아는 것은 대지이다.

 

 

(3)
우리는 어떤 곳에 있으면서 우리에게 공통된 목적에 의해

형제들과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숨을 쉬는 것이며,

또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임을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들이 같이 도달할 같은 봉우리를 향해

같은 로프에 묶여져 있지 않으면 동료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야 바로 이 안락한 세계에,

왜 사막 한가운데서 마지막 식량을 나누는 것에 그렇게도 넘치는 기쁨을 느끼겠는가?

이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억측 따위에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우리들 중에서 사하라 사막에서의 그 구조작업의 큰 기쁨을 맛본 모든 사람에게는

다른 기쁨들이란 모두 하찮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가 우리 주위에서 와지끈거리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기에게 이러한 충만감을 약속해 주는 종교에 열광한다.

모순된 말들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똑같은 정열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들은 제각기 이성의 열매인 방법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만 목적은 다르지 않다.

목적은 다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자기 속에 잠자고 있는 미지의 것을 짐작조차 못했던 사람이,

바르셀로나의 어느 아나키스트들의 지하실에서

희생이니, 상호 원조니, 정의의 준엄한 영상이니 하는 것에 감동되어

단 한 번이라도 그것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고 나면 ,

그 사람은 이제 하나의 진리, 아나키스트의 진리밖에는 알지 못하게 되더라도

또 스페인의 수녀원에서 겁을 먹고 꿇어앉아 있는

어린 수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한번 보초를 선 사람은 끝내 그 교회를 위해 죽을 것이다.

가슴에 승리감을 안고 안데스 산맥의 칠레 쪽 비탈을 향해

빠져 들어가는 메르모즈더러 잘못이라고,

상인의 편지 한 장이 목숨을 걸만한 가치는 없을 것이라고 당신이 반대했다면,

메르모즈는 당신을 비웃었을 것이다.

안데스 산맥을 넘었을 때 그의 속에서 태어나던 인간,

그것이 바로 그의 진리인 것이다.

전쟁을 불사하는 사람에게 전쟁의 무서움을 납득시키려거든

그를 야만인 취급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를 비판하기에 앞서 그를 이해하도록 힘써라.
리프 전쟁 당시, 두 불귀순 고지 사이의 쐐기 모양으로 설치된

전초 진지를 지휘하던 남방지구의 그 장교를 생각해 보라.

그는 어느 날 저녁, 서쪽 산악에서 내려온 군사들을 맞았다.

격식대로 함께 차를 들고 있는데 총격이 벌어졌다.

동쪽 산악 지대의 부족들이 이 초소를 공격해 온 것이다.

전투를 위해 물러갈 것을 요구하는 대위에게 적의 군사들은 이렇게 응답했다.

"오늘 우리는 귀관의 손님이오.

신은 귀관을 내버려 두고 떠나는 것은 허락지 않소...."

그래서 그들은 대위의 군대와 합세해서 그 진지를 구해주고는

그들의 독수리 집으로 다시 기어 올라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이 이 진지를 습격할 준비를 하는 전 날,

그들은 대위에게 사자들을 보냈다.

"저번 밤에 우리는 귀관을 도왔다."
"그랬소."
"우리는 귀관을 위해 소총탄 3백을 쏘았다."
"그랬소."
"그것을 우리에게 돌려 줘야 옳지 않소?"

기품 있는 대위는 그네들의 고귀함에서 얻어낼 수 있었을 이익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들을 향해 쓰여질 소총탄을 돌려 주었다.

인간의 진리란 자기를 하나의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와 적군과의 이러한 관계의 어엿함, 승부에 있어서의 성실함,

목숨을 건 상호간의 경의의 주고 받음을 이해한 그 대위가,

자기에게 주어진 이 고귀함을, 같은 아랍인에게

어깨를 툭 치며 자기의 우애를 보이고, 그들에게 아첨도 하나 동시에

창피하게도 하는 저 선동 정치가들의 비열한 친절과 비교할 때,

만일 당신이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늘어 놓는다면,

대위는 당신에 대하여 약간 멸시 섞인 연민밖에는 느끼지 못 할 것이다.

그런데 옳은 것은 바로 그다.

그러나 당신들이 전쟁을 증오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인간과 그 갖가지 욕망을 이해하고,

그가 가진 본질적인 것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려면,

당신들의 진리의 명백한 사실을 서로 대립시켜서는 안된다. 그렇다.

당신들은 옳다. 당신들은 모두 옳다.

논리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

세계의 불행을 꼽추에게 전가시키는 자에게도 일리는 있다.

만약 우리가 꼽추들에게 선전포고를 한다면,

우리는 이내 흥분할 이유를 찾아 낼 것이다.

우리는 꼽추들의 죄악에 보복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물론 꼽추들도 죄악을 범한다.

이 본질적인 것을 끌어내어 보려면, 잠시 이들의 차이를 잊어야만 한다.

차이란 한 번 인정받게 되면 온통 코란 한 권만큼의 요지부동의 진리와,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광신까지도 끌어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을 좌익과 우익, 꼽추와 꼽추 아닌 사람,

파시스트와 민주주의자로 구분할 수 있고,

또 이러한 구분은 비난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란 여러분도 알다시피

세계를 단순화하는 것이지 혼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진리란 보편성을 끌어내는 언어이다.

뉴턴은 결코 퀴즈 풀이처럼 오랫동안 숨어 있던 법칙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뉴턴은 하나의 창조적인 실험을 행한 것이다.

그는 풀밭에 사과가 떨어지는 것과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동시에 표시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를 창조했던 것이다.

진리란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이데올르기를 논쟁한들 무슨 소용인가?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들을 또한 반증될 수 있으며,

이러한 논쟁은 인간의 구원을 절망으로 이끌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우리 주위 어디서고 똑같은 요구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우리는 해방되고 싶어하다.

곡괭이질을 하는 사람은 그 곡괭이질의 의미를 알고 싶어한다.

그런데 형량을 선고 받은 사람을 모욕하는 수형자의 곡괭이질은

탐험가를 위대하게 하는 곡괭이가 박힌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행위 속에 추악이 있는 것이 아니다.

도형장은 의미를 갖지 않은 곡괭이가 박힌 곳,

그 사람을 인간의 공동체와 맺어 주지 않는 곡괭이가 박힌 곳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도형장을 탈출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현재 유럽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아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 2억의 인간이 있다.

공업이 그들을 농민으로서의 전통에서 끌어내어

시커먼 열차들로 혼잡한 역과도 같은 거대한

게토(유태인 지정 거주 지역) 속에 가두어 버렸다.

노동자 도시의 밑창에서 그들은 깨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개척자의 기쁨도, 종교적인 기쁨도,

학자로서의 기쁨도 금지된 온갖 직업의 톱니바퀴 틈에 끼어 들어가 있다.

그들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옷을 입히고, 먹이고,

그들의 모든 욕망을 만족시켜 주기만 하면 된다고 사람들은 믿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츰 차츰 자기 속에 꾸르뜰린 같은 소시민이나, 촌뜨기 정치가,

내면 생활에 관심이 없는 기술자를 만들어 놓고 말았다.
그들에게 교육은 잘 시킨다 하더라도 정신을 북돋주어줄 생각은 이미 없다.

문화에 대해서도 정말 보잘것 없는 의견을 갖게 되어,

그것이 단지 공식의 암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있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전문학교의 열등생이라도 자연이나 그 법칙에 관해서는

데카르트나 파스칼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가 정신에 있어서도 같은 걸음걸이가 가능할까?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막연히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그 해결 방법이 잘못되어 있다.

물론 사람들에게 군복을 입힘으로써 활기를 줄 수는 있다.

그러면 그들은 군가를 부르고 전우들과 더불어 빵을 뜯어 먹을 것이다.

그들은 또 자기들이 찾는 보편적인 것의 맛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빵으로 인해 그들은 죽어 가는 것이다.

 

땅 속에서 나무 우상을 파내어 그럭저럭 무엇을 증거 세운 신화를 부활시킬 수도 있고,

또 범게르만주의나 로마제국의 신비론자들을 부활시킬 수도 있다.

독일 사람들로 하여금, 독일 사람이며,

베에토벤과 동국인이라는 도취감에 취하게 할 수도 있다.

그것으로 부두 노동자까지 만취시킬 수도 있다.

그것은 분명히 부두 노동자로부터 하나의 베에토벤을 끌어내기보다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상들은 사람 잡아먹는 우상들이다.

지식의 진보나 질병의 치유를 위해 죽는 사람은,

그가 죽는 것과 동시에 생명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이다.

영토 확장을 위해 죽는 것도 갸륵한 일인지는 모르나,

오늘날의 전쟁은 그것이 조장시켜 준다고 주장하는 그것 자체를 파괴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민족 전체를 살리기 위해 약간의 피를 희생시킨다는 것도 문제가 안된다.

전쟁이 비행기와 이페리트가스를 쓰게 된 이래로

그것은 이제 피투성이 외과 수술에 지나지 않는다.

저마다 콘크리트 벽으로 된 방공호에 의지하고,

서로가 밤마다 비행 편대를 보내어 상대편의 오장육부를 폭격하여

그 치명적인 중심부를 파괴하고, 그 생산과 교역을 마비시킨다.

승리는 맨 나중에 썩는 자에게 돌아간다.

그런데 두 적수들은 대개 같이 썩어 가는 것이다.

무인지경이 된 세상에서 우리는 동료들을 찾느라고 목이 탔었다.

동료들과 나누어 먹는 빵 맛은 우리에게 전쟁의 가치를 인정하게 했다.

그러나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옆 사람들 어깨의 따스함을 찾기 위해 전쟁이 필요한 건 아니다.

전쟁은 우리를 속인다.

증오가 달음박질의 흥분에 보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 우리는 증오하는가?

우리는 같은 떠돌이 별을 타고 있는 한 배의 선원으로서 연대 책임이 있는 것이다.

새로운 종합을 북돋우기 위해 문명들이 서로 대립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들이 서로 잡아먹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우리를 해방시키려면, 우리 서로를 맺어주는 하나의 목표를 인식하도록 도와주면 되는 것이니 만큼,

우리 모두를 결합시켜 주는 바로 거기에서 그것을 찾아야 할 일이다.

진찰하는 의사는 그 환자의 하소연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것이다.

의사는 보편적인 언어를 말한다.

원자와 성운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신과도 같은 방정식을 생각해낼 때의 물리학자도 마찬가지다.

순박한 양치기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다.

왜냐하면 별 아래서 몇 마리의 양들을 조심성 있게 지키고 있는 그가

자기의 역할을 자각한다면, 자기가 한낱 종이 아님을 깨달을 테니까.

그는 보초인 것이다.

그리고 보초 하나하나는 나라 전체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양치기가 자기의 역할을 자각하고자 원하지 않는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나는 마드리드 전선에서, 참호에서 5백 미터쯤 떨어진 언덕 위의

조그마한 돌담 뒤에 자리잡은 학교를 찾아가본 일이 있다.

한 사람의 하사가 거기서 식물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손 끝으로 개양귀비 꽃의 연약한 기관을 분해해 가면서 그는 수염 난 순례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는데,

그들은 둘러싸여 있는 진창을 빠져 나와 포탄을 무릅쓰고 그가 있는 곳으로 순례하러 기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하사를 둘러싸고 그들은 책상다리를 하고 주먹으로 턱을 괴고 앉아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눈썹을 찌푸리기도 하고, 이를 악물기도 했다.

그들은 수업에 대해서는 대단한 것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이런 말은 알아들었다.

"당신들은 짐승이다.

당신들은 이제 겨우 동굴에서 기어나왔다.

인간성을 따라잡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따라잡으려고 무거운 발걸음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자각할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그때라야 우리는 평화롭게 살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를 주는 것은 죽음에도 의미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그것이 자연의 질서 안에 있을 때 지극히 다사로운 것이다.

가령 프로방스의 늙은 농부가 자기 대의 끝에 임박해서,

자기 몫의 염소와 올리브 나무들을 아들에게 물려 주고,

그 아들들도 차례로 그 아들들에게 물려 줄 수 있게 하려는 그런 때 그러한 것이다.

농부의 가계에서는 사람은 반밖에 죽지 않는다.

각기의 생명은 자기 차례가 오면 깍지처럼 터져 씨앗을 넘겨 주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어머니의 임종의 자리에 임한 세 사람의 농부를 곁에서 본 일이 있다.

물론 그것은 비통한 일이었다.

두 번째로 그들의 탯줄이 끊어진 셈이다.

두 번째로 매듭이, 한 대와 다음 대를 잇는 매듭이 풀어진 것이다.

이 세 아들들은, 이제부터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하고, 명절날 모여, 앉을 단란한 식탁도 없어지고,

 의지해야 할 중심을 잃어버린 외로운 자신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와 함께 이런 것도 발견했다.

이 끊어짐 속에서 또한 생명이 두 번째로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아들들도 역시 차례가 되면 줄의 선두가 되고, 집합 점이 되고, 가장이 될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차례가 와서, 지금 안마당에서 놀고 있는

저 한 배의 자식들에게 지휘권을 넘겨 줄 그때까지.

나는 그 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평화롭고도 굳은 얼굴에 입술을 꽉 다문 늙은 농사꾼 아낙네,

돌의 가면으로 바뀐 그 얼굴을, 나는 그 얼굴에서 아들들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이 가면은 그들의 얼굴을 찍어내는데 소용되었던 것이다.

그 몸은 그들의 몸,

그 아름다운 인간의 원형들을 찍어내는데 소용됐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어머니는 찌그러져서, 열매를 꺼낸 깍지처럼 쉬고 있는 것이다.

아들과 딸들도 그들의 차례가 오면 자기들의 몸으로 작은 인간들을 찍어낼 것이다.

농가에서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어머니는 죽었다.

어머니 만세!

비통하기는 하다.

그렇다. 그러나 또한 얼마나 순박한가.

백발의 아름다운 껍질을 가는 길에 하나하나 버리면서,

자기의 변신을 통해서 알지 못할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이 혈통의 모습은...

그러기에 그날 저녁, 그 시골 작은 마을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절망이 아닌

조심스럽고도 다정한 기쁨을 실은 것처럼 내 귀에 들린 것도 이 때문이다.

장례와 세례를 한 목소리로 엄숙한 그 종소리는

또다시 한 세대가 다른 세대로 옮아감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엾은 한 노파와 대지와의 약혼식 노래를 들으면서

크나큰 평화밖에는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한 그루의 나무의 성장처럼 유유한 걸음으로

전해져 가는 것은 생명이기도 하지만 또한 의식이기도 하다.

얼마나 신비스러운 올라감인가!

녹아 흐르는 용암에서,

별의 반죽에서 기적적으로 싹튼 생명 있는 세포에서 태어난 우리는,

차츰차츰 칸타타 노래를 쓰고, 은하수를 계측하는 데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 어머니는 결코 생명만을 전해준 것이 아니다.

아들에게 말을 가르쳐 주었고, 여러 세기에 걸쳐 차츰차츰 쌓여진 짐짝을,

자기가 맡아 왔던 정신적인 유산인, 뉴턴과 세익스피어를

동굴 속의 짐승들과 구별지어주는 전통과 개념과 신화 등의 조그만 몫을 그들에게 맡겨준 것이다.

우리가 배고플 때 느끼는 것,

저 스페인의 병사들을 포격을 무릅쓰고 식물학 수업으로 이끌어 가고,

메르모즈를 남대서양 쪽으로 몰아가고,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시로 본

그 굶주림에서 깨닫는 것은  천지의 생성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하여 자각해야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두운 밤에 타랍을 걸쳐 놓아야 한다.

자신들을 이기적인 것이라고 믿는 무관심으로써 자기들의 지혜로 삼는 자들만이 굶주림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러한 지혜와는 모순된다!

동료들, 나의 동료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증인으로 세운다.

그래, 어떤 때에 우리는 행복을 느꼈던가?


이제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생각나는 것은,

조종사로서 지명된 행운을 얻어, 우리가 인간으로 탈피할 준비를 하고 있던 그때,

그 첫 우편 비행을 떠나던 새벽에 우리를 배웅해 주던 늙은 사무원들이다.

그들도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기는 하나,

자기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잠자게 내버려 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몇 해 전에 기 기차 여행 도중에,

나는 사흘 동안이나 그 바닷물에 굴리는 조약돌 같은 소리의 포로가 되어

갇혀 있던 기차의 이 진행중인 고장이 보고 싶어서 몸을 일으켰었다.

새벽 1시경이었는데, 나는 열차 전부를 종단해서 걸어갔다.

침대 차는 비어 있었다. 1등 찻간도 비어 있었다.

그런데 3등 차는, 프랑스에서 해고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수백 명의 폴란드 노동자들을 태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타넘으면서 복도를 지나갔다.
나는 둘러보기 위해 발을 멈추었다.

희미한 등불 아래 서서, 나는 이 병영이나 유치장 같은

냄새를 풍기는 공동 숙사 비슷한 칸막이 없는 객차 안에서,

열차의 동요로 흔들리고 있는 혼잡한 군중을 보았다.

그것은 악몽 속에 파묻혀 그들의 비참함 속으로 되돌아가려는 군중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빡빡 깍은 카다란 머리들이 나무 걸상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들의 망각 속에서

그들을 위협하는 이 모든 소음과 동요에 시달리듯이 좌우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단잠의 후대를 받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들, 경제의 조류에 밀려 유럽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쫓겨다니고,

내가 전에 폴란드 광부들의 창가에서 본 적이 있는

제라늄 화분 3개와 손바닥만한 마당이 달린 그 노르 지방(프랑스 북부지방)의

작은 집에서도 떨려 난 이 사람들은 인간의 자격도 태반은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엉성하게 묶어 탈장처럼 터진 봇짐 속에는 부엌 세간과, 담요와, 커튼밖에는 챙겨 넣지 못했다.

그들이 쓰다듬고 귀여워하던 모든 것,

프랑스에서 지낸 4~5년 동안에 길들였던 모든 것들,

고양이며, 개며, 제라늄 따위는 단념해야만 했고, 이 부엌 세간만을 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아기 하나가, 하도 지쳐서 잠든 것처럼 보이는 엄마의 젖을 빨고 있었다.

이 여행의 부조리와 무질서 속에서 생명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돌덩이처럼 무겁고 까까중인 머리통, 작업복 속에 갇혀

불편한 잠 속에 빠져 오그린 울퉁불퉁한 육체, 그는 마치 진흙덩어리 같았다.

밤이면 이와 닮은 이미 형체도 없는 표류물들이 시장의 벤치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문제는 이 비참함 속에, 이 불결함 속에 이 추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긴 커녕 바로 이 남자와 이 여자가 어느 날 서로 알게 되어,

아마도 남자 쪽에서 여자에게 미소를 던졌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하루 일이 끝나면 그녀에게 꽃도 가져다 주었겠지.

수줍고 서투른 그는 어쩌면 업신여김 당할까봐 떨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타고난 아양과 매력에 자신을 가지고 그를 골려주며 즐거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제는 곡괭이질이나 망치질을 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게 된

이 남자는 마음 속에 달콤한 번민을 느꼈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지금 그들이 진흙 덩어리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어떤 지독한 거푸집을 거쳐 나왔기에

이처럼 판박이 기계에 눌린 것처럼 이렇게 찍혀졌단 말인가?

늙은 짐승도 아직 제 매력을 간직하는 법이다.

어째서 이 아름다운 인간의 진흙은 망가진 것일까?

나는 잠자리가 사창굴처럼 어지러운 군중들 사이에서 여행을 계속했다.

거친 코고는 소리와, 알아듣지 못할 한탄과,

어느 한편이 견딜 수 없어 다른 쪽으로 뒤채는 사람들이

바닥을 긁는 헌 구두 소리 등이 뒤범벅이 된 야릇한 소리가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바닷물에 뒹구는 조약돌 소리 같은 그칠 줄 모르는 반주가 여전히 나지막이 들리고 있었다.

나는 어느 부부 맞은편에 앉는다.

그 남자와 여자 사이에 어린 아이가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잠들고 있었다.

그런데 잠자면서 돌아 눕는 바람에 그 얼굴이 희미한 등불 밑에 드러났다.

오오! 얼마나 사랑스러운 얼굴인가!

이 부부에게서 일종의 황금 과실이 태어났던 것이다.

이 둔중한 암수 남, 녀에게서 이 아름답고 매력 있는 걸작이 생겨나온 것이다.

나는 그 반듯한 이마, 그 귀엽게 내민 입술 위에 몸을 굽혀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음악가의 얼굴, 어린 모짜르트,

생명의 아름다운 약속이다라고 전설 속의 어린 왕자인들이 아이와 다를 바 없다.

보호받고, 귀염받고, 교양 받는다면 이 아이도 무엇인들 못될 것인가!

정원에 돌연변이로 새로운 장미꽃이 피어나면 정원사들은 모두 법석을 떤다.

그 꽃을 따로 옮겨 심고, 가꾸고 우대를 한다.

그런데 사람을 위한 정원사는 없다.

어린 모짜르트도 다른 아이들처럼 판박이 기계에 찍히게 될 것이다.

모짜르트는 카바레의 악취 속에서 썩어빠진 음악으로 자기의 가장 높은 기쁨으로 삼을 것이다.

모처럼의 모짜르트도 마지막이다.

나는 내 찻간으로 돌아왔다. 나는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의 운명을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자비심이 아니다.

영원히 터지기를 계속하는 상처를 연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상처를 입은 피해자는 개인이 아니고 인류라고나 할 그 무엇이다.

나는 연민을 믿지 않는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정원사의 관점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결코 이 비참함이 아니다.

비참함 속에서라면 인간은 나태 속에서 그렇듯이 그 속에 안주해 버릴 수도 있다.

유럽에 가까운 동방의 여러 나라 사람들은

대대로 신분이 낮은 천함 속에 살면서도 그것을 낙으로 삼아 왔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묽은 수프(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무료 급식)만으로는 고칠 수 없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 울퉁불퉁함도 누추함도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 인간들 하나 하나 속에서 학살당한 모짜르트인 것이다.

오직 "정신"만이 진흙 위로 불면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