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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패밀리 어페어 - 무라카미 하루키

오늘의 쉼터 2011. 5. 18. 12:09

 

패밀리 어페어 - 무라카미 하루키


얼굴 생김새는 그런 대로 나쁘진 않았지만, 머리가 텅 빈 억지스런 남자였다.
더구나 코끼리 처럼 기억력이 좋아서, 별 하찮은 일도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가 텅 빈 부분을 기억력으로 보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했니?"하고 나는 물었다.
"엉터리 소리 그만해. 자기 척도로 세상을 재는 짓은 그만두라구요.
세상 사람이 누구나 다 오빠 같은 인간은 아니니까요."하고
얼굴이 빨개지면서 여동생이 말했다.

두 장째 사진은 일본에 돌아와서 찍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컴퓨터 엔지니어 혼자 찍혀 있었다.
그는 사이가 붙은 옷을 입고 대형 오토바이에 기대 서 있었다.
시트 위에는 헬멧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와 완전히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밖의 다른 표정이 없는 모양이다.

"오토바이를 좋아해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보면 알아. 오토바이를 싫어하는 인간이
뭐가 좋다고 아래위가 붙은 가죽옷을 입겠니?"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이것도 물론 편협한 성격이 부리는 심술이겠지만-
아무리 해도 오토바이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인간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모양새가 요란하고 자기 선전만 너무 늘어놓았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잠자코 사진을 여동생에게 돌려주었다.

"그런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뭐예요?"하고 여동생이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될 것이냐, 그 말이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결혼하게 될지도 몰라요."
"결혼 신청을 받았다, 그 말이니?"
"글쎄 뭐, 아직 대답한 건 아니지만."
"흐음.."
"솔직히 말해서 난 취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좀더 혼자서 편안하게 즐기고 싶거든요.
오빠만큼 분방하게는 아니더라도."
"하기야 건전한 사고 방식이긴 하지."하고 나는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고, 결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생각중이에요."하고 동생이 말했다.

나는 식탁 위의 사진을 집어들어 다시 한 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맙소사, 하고 생각했다.
그것이 크리스마스 전의 일이다.

해가 바뀌고 나서 얼마후, 어머니가 아침 9시에 전화를 걸어 왔다.
나는 블루스 스프링스턴의 <본 인 더 USA>를 들으면서 칫솔질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여동생이 교제하고 있는 남자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했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여동생이 2주일 후 주말에
그 남자와 함께 집에 가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왔다고 했다.

"결혼한 거 아닐까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냐고 묻고 있잖니.
얼굴을 대하기 전에 이것저것 알아두고 싶어서."하고 어머니는 말했다.

"글쎄 만난 적은 없어요. 한 살 위에다 컴퓨터 엔지니어래요.
IBM이래나 뭐래나 그런 곳에 근무하고 있구요.
알파벳이 3개에요. NEC라든가 NTT라든가.
사진으로 보기엔 별로 유별난 데는 없는 얼굴이었어요.
제 취향은 아니지만, 뭐 제가 결혼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느 대학을 나왔으며, 집안은 어떤지 모르니?"
"알 길이 없잖아요. 그런 건."하고 나는 쏘아붙였다.
"한 번 만나서 이모저모 좀 물어 보아 주지 않겠니?"하고 어머니가 부탁했다.
"싫어요, 전 바쁘단 말이에요. 2주일 뒤에 직접 물어 보면 되잖아요."

하지만 결국 나는 그 컴퓨터 엔지니어와 만나게 되었다.
다음 일요일에 여동생이 그의 집으로 정식 인사차 가는데 함께 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는 하얀 셔츠에 넥타이를 메고
가장 수수한 양복을 입고, 메구로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오래된 주택가 한복판에 있는 상당히 훌륭한 집이었다.
차고 앞에는 언젠가 사진에서 본 '혼다 500cc'가 세워져 있었다.
"제법 멋진 청다랑어군."하고 나는 말했다.
"있잖아, 부탁이니 오빠, 그 쓰잘 데 없는 농담은 안하기에요.
오늘 하루면 되니까."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알았어."하고 나는 말했다.

그의 부모님은 제법 점잖고
-약간 점잔이 지나쳐서 못마땅한 점은 있었지만-훌륭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석유 회사의 중역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시즈오카에서 주유소 체인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동떨어진 혼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고상한 쟁반에다 홍차 잔을 받쳐서 들여 왔다.
나는 점잖게 인사를 하고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쪽에서도 나에게 명함을 주었다.

"원래는 저희 부모님이 찾아뵐 예정이었지만,
오늘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제가 대신 오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 다시 날을 잡아 정식으로 찾아뵈었으면 하십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여러모로 아들한테서는 이야기는 듣고 있었지만
지금 만나 보니 아들한테는 과분할 정도로 얌전한 아가씨며,
집안도 좋다고 들었고, 해서 자기네 쪽에서는
이 혼사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고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필시 이것저것 알아봤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열 여섯 살까지 초경이 없어서
만성적 변비로 고민했던 사실까지야 알지 못하겠지.
일단 형식적인 이야기가 큰 문제없이 끝나자
그의 아버지는 나에게 브랜디를 따라주었다.
상당히 맛이 좋은 브랜디였다.
우리는 그걸 마시면서 각자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여동생의 슬리퍼 끝으로 나의 말을 차서, 너무 지나치게 마시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 동안 아들인 컴퓨터 엔지니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긴장된 얼굴로 아버지 곁에 앉아 있었다.
그가 적어도, 이 집 지붕밑에서는
아버지 권력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옳거니,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그때까지 내가 본 적도 없는 기묘한 무늬의 스웨터를 입고,
그 속에다 색깔도 맞지 않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급해서 좀더 진지하고 똑똑한 남자를 고르지 못했단 말인가?
이야기가 일단락되고 4시가 되어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컴퓨터 엔지니어가 우리 두 사람을 역까지 바래다주었다.

"어디 가서 함께 차라도 한 잔하지 않으시겠습니까?"하고
그가 나와 여동생에게 말했다.
나는 차 같은 것도 마시고 싶지 않았고,
그런 요상한 무늬의 스웨터를 입은 남자와 동석한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하면 어색해질 것 같아서 셋이서 가까운 다방에 들르기로 했다.
그와 여동생은 커피를 주문하고, 나는 맥주를 주문했는데, 맥주는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커피를 마셨다.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하고
그는 나에게 인사 치레를 했다.
"뭐 별로, 당연한 일이니까"하고 나는 점잖게 말했다.
나에게는 더 이상 농담을 할 만한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동생을 통해 형님 이야기는 늘 들었습니다."하고 그가 말했다.
'형님?'
나는 커피 스푼의 손잡이로 귓볼을 긁고 나서 그것을 도로 접시에 놓았다.
여동생은 또 나의 발끝을 걷어찼지만,
컴퓨터 엔지니어 쪽은 그 동작의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마 '이진법'의 농담이란 것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나 보다.

"아주 사이가 좋아 보여서 저는 정말 부럽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기쁜 일이 있으면 서로 발 걷어차기를 한다네."하고 나는 말했다.
컴퓨터 엔지니어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생각하는 어정쩡한 얼굴을 했다.
"농담을 한 거예요. 그러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하고 여동생이 정나미 떨어졌다는 듯이 말했다.
"농담일세. 가사를 분담하고 있지.
동생은 빨래를 하고 나는 농담을 하고"하며 나도 말했다.
컴퓨터 엔지니어-와타나베 노보루가 정확한 이름이다-는
그 말을 듣고 다소 안심했다는 듯이 웃었다.

"명랑해서 좋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가정을 갖고 싶군요. 밝은 것이 첫째입니다."
"보라구, 밝은 것이 첫째잖아. 네 신경질은 너무 지나쳐."
하고 나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재미난 농담이라구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되도록이면 가을에는 결혼하고 싶습니다."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말했다.
"결혼식이야 역시 가을이 좋겠지. 그러면 다람쥐도 곰도 부를 수 있을테고."

컴퓨터 엔지니어는 웃었고 여동생은 웃지 않았다.
동생은 정말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볼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파트에 돌아온 후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대충의 상황을 설명했다.

"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하고 나는 귀를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별로 나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제대로 됐다는 말이죠, 적어도 저보다는 나아 보였어요."
"네가 뭐 어디가 어때서?"
"좋아라, 고마워요."하고 나는 천장을 보면서 말했다.
"그래, 대학은 어느 대학?"
"대학?"
"어느 대학을 나왔대, 그 사람?"
"그런 거야 본인한테 물어 보시죠."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한심한 기분으로 혼자서 마셨다.

스파게티 건으로 해서 여동생과 말다툼을 한 그 다음날,
나는 오전 8시 반에 잠에서 깼다.
전날이나 다름없이 구름 한 점 없는 좋은 날씨였다.
꼭 어제 같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밤 동안 일시 중단하고 있던 인생이 다시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땀으로 축축해진 파자마와 속옷을 세탁물 바구니 속에 던져 넣고,
샤워를 하고 수염을 깎았다.
그리고 수염을 깎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서
재미 보기에 실패하고 만 어제 저녁 여자아이에 대해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불가항력이었고,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기회는 또 얼마든지 있다. 아마 다음 일요일에는 잘 되겠지.

나는 주방에서 토스트 두 개를 굽고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나서 FM방송을 들으려 했지만, 오디오가 고장이란 생각이 떠올라 단념하고,
신문의 독서란을 읽으면서 빵을 먹었다.

독서란에는 흥미를 끌 만한 종류의 책은 한 권도 소개되어 있지 않았다.
거기 있는 것은 늙은 유태인의 공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성생활에 대한 소설이라든가,
분열증 치료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라든가,
아시오 총독 사건의 전모라든가 그런 것들뿐이었다.

그 따위 책을 읽을 거라면 차라리
여자 소프트볼 부의 주장과 자는 편이 훨씬 즐거울 것이다.
신문사는 분명 우리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려고 이런 책을 선정했나 보다.

바삭바삭하게 구운 빵을 한 개 먹고, 신문을 식탁 위에다 도로 놓으려는데
잼 병 밑에 메모 용지가 끼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여동생이 평소나 다름없는 작은 글씨로
이번 일요일 저녁 식사에 와타나베 노보루를 초청했으니,
나도 꼭 집에 있다가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적어 놓은 것이었다.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셔츠 위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털고,
그릇을 싱크대의 설거지통에 처넣고 나서,
여동생이 근무하고 있는 여행사에다 전화를 걸었다.
여동생이 나와 '지금 바빠서 틈이 없으니, 10분 후에 내가 다시 걸게요.'라고 했다.

전화는 20분 후에 걸려 왔다.
그 20분 동안 나는 43회나 팔굽혀펴기를 하고,
손발을 합쳐서 20개의 손톱과 발톱을 깎고,
셔츠와 넥타이, 웃옷, 그리고 바지를 골라 놓았다.
그리고 이를 닦고, 빗질을 하고, 하품을 두 번했다.

"메모 읽어 봤어요?"하고 여동생이 물었다.
"읽었어. 그런데 안 됐지만 이번 일요일에는 선약이 있어서 안되겠어.
좀더 빨리 알았다면 비워놓을 수도 있었는데, 정말 유감천만이다."

"뻔뻔스런 소리 좀 작작하라구요.
어차피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아이하고,
어디론가 가서 무슨 짓을 하려는 그런 약속일 테지 뭐.
그거 토요일로 돌리면 안돼요?"하고 여동생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스튜디오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구.
전기 담요 CF를 만들어야 하거든. 요즘 좀 바빠서."
"그럼 그 데이트 취소해요."
"반환 요금을 빼앗기는 걸. 지금 비교적 미묘한 단계야."
"내 일은 미묘하지 않아요?"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야."하고
나는 의자에 걸어 놓은 셔츠에 넥타이를 맞추면서 말했다.

"서로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게 규칙 아니었어?
너는 네 약혼자하고 밥을 먹고... 나는 내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그럼 됐잖아."

"된 게 아니라니까요. 오빠는 줄곧 그를 안 만났잖아요?
여태까지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어요. 그것도 4개월 전의 일이에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몇 번이나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도, 오빠는 줄창 도망만 다녔잖아요.
굉장한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빠 여동생의 약혼자라구요.
한 번쯤 함께 식사 좀 하는 것이 뭐가 어때요."

 

여동생이 하는 말에도 일리는 있었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나는 확실히 아주 자연스럽게 와타나베 노보루와 동석할 기회를 피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와타나베 노보루와 나 사이에는
그다지 공통된 화제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고,
동시 통역을 대동하고 농담을 하는 것도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부탁이에요. 하루면 되니까 그렇게 해줘요.
그렇게만 해준다면 여름이 끝날 때까지 오빠의 성생활에 대해 훼방놓지 않을 테니까."
"내 성생활이란 아주 사소한 거야. 여름을 넘기지 못할지도 모를 정도라구."
"아무튼 이번 일요일에는 집에 있어 주는 거죠?"
"별 수 없군."하고 나는 체념하면서 말했다.
"모르긴 해도 그가 오디오를 수리해 줄 수 있을 거예요.
그 사람 그런 거 정말 특기라니까요."
"손가락 놀림이 특기겠지."
"이상한 생각좀 작작하라구요."하고 여동생은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나는 넥타이를 매고 회사로 나갔다.

그 주일 동안 줄창 맑은 날씨였다. 매일매일이 한결같았다.
수요일 저녁에 나는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일이 바빠서 이번 주말에도 만나기 어렵겠다고 했다.
내가 벌써 3주일 동안이나 그녀와 만나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일요일에 데이트했던 여대생 집에 전화를 돌렸는데,
그녀는 없었다. 목요일에도 금요일에도 그녀는 집에 없었다.
일요일 아침, 나는 8시에 여동생 등쌀에 일어났다.

"시트를 빨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예요."하고 동생이 말했다.
그리고 시트와 베갯잇을 벗기고 파자마를 벗겼다.
나는 갈 것이 없어서 샤워장으로 들어가 수염을 깎았다.
저것도 차츰 어머니를 닮아 가는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여자란 마치 연어와 같다.
뭐니뭐니해도 다들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샤워실에서 나온 후 나는 반바지를 입고,
색이 바래서 거의 글씨가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린 티셔츠를 뒤집어써서 입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오렌지 쥬스를 마셨다.
몸속에는 아직도 어젯밤의 알코올이 얼마만큼 남아 있었다.
신문을 펼쳐 보고 싶지도 않았다.
식탁 위에 크래커 상자가 있기에,
나는 그것을 서너 개 먹고는 아침 식사 대용으로 때웠다.

여동생은 시트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고, 그 동안에 내 방과 자기 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걸 끝내자 세제를 풀어 거실과 주방의 바닥과 벽을 걸레로 닦아 내기 시작했다.

나는 줄곧 거실 소파에 누워서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 보내 준
'허슬러'의 누드 사진을 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여성의 성기는 참으로 여러 가지 크기와 형태가 있다.
키의 크기랑 지능 지수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있잖아요, 거기서 뒹굴지 말고 시장 좀 봐다 줄래요?"하고
여동생이 가득 적어 놓은 메모지를 내게로 건네주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책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감춰 두라구요. 깔끔한 사람이니까."
나는 '허슬러'를 탁자 위에 놓고 메모지를 노려보았다.

레터스, 토마토, 샐러리, 프렌치 드레싱, 스모크 서먼,
마스터드, 양파, 수프 스톡, 감자, 파슬리, 스테이크 고기 세 조각...
"스테이크 고기? 난 어제도 스테이크를 먹었다구.
스테이크는 싫어. 크로켓으로 하는 게 좋아."

"오빠는 어제 스테이크를 먹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먹지 않았어요. 고집 좀 부리지 마세요.
손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놓고, 크로켓을 내놓을 수는 없잖아요?"
"난 여자아이 집에 초대받아 가서 금새 튀긴 크로켓이 나온다면 감동하고 말텐데 말이야.
가늘게 채썰은 하얀 양배추를 수북하게 담아 곁들이고
바지락 조개 된장국이 있고... 생활이란 그런 거라구."

"하지만 오늘은 아무튼 스테이크로 정했어요.
크로켓 정도야 앞으로 죽도록 먹여 줄 테니까,
오늘은 군소리 작작하고 꾹 참고 스테이크를 먹으라구요. 제발 부탁이에요."
"좋습니다요."하고 나는 순순히 따라 주었다.
나는 이러고저러고 군소리는 하지만 결국엔 말 잘 듣는 착한 사람이다.

나는 가까운 슈퍼마켓으로 가서 메모되어 있는 모든 물건을 하고,
술 가게에 들로 4,500엔 짜리 샤브리를 샀다.
나는 약혼한 두 사람의 젊은이들을 위하여 샤브리를 선물할 셈이었다.
그런 것으로나 친절한 사람이 될 수밖에.
집에 돌아오자 침대 위에는 랄프 로렌의
블루 폴로셔츠와 얼룩하나 없는 베이지색 면바지가 놓여 있었다.
"그걸로 갈아 입어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아이고 맙소사, 하고 생각했지만 군소리 않고 갈아입었다.
뭐라고 말해 봤자, 평소의 따스하고 지저분하고 평화로운 휴일이
쟁반 위에 담겨져 돌아올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와타나베 노보루는 3시에 찾아왔다.
물론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산들바람과 함께 찾아왔다.
그의 혼다 500cc의 퍽퍽 거리는 불길한 배기음은
5백미터 앞에서부터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베란다에서 머리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가 아파트 현관 앞에다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헬멧을 벗는 것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STP의 스티커가 붙어 있는 헬멧만 빼놓고,
오늘은 지극히 보통 사람에 가까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풀을 빳빳하게 먹인 체크 무늬의 앞 트인 셔츠에다,
통 넓은 하얀 바지, 술 장식이 붙어 있는 갈색 로퍼 슈즈의 모양새였다.
구두와 벨트색이 어울리지 않았을 뿐이다.

"낚시 전시회의 친구가 온 것 같애."하고
나는 부엌에서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그럼 잠시만 오빠가 얘기를 나눠줄래요?
나는 저녁을 준비할 테니까."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별로 내키지 않는걸. 무슨 말을 할지 모르잖아.
내가 식사 준비를 해줄게. 너의 둘이서 이야기하면 어때?"
"바보 소리 좀 그만해요.
그런 짓을 했다가는 꼴이 말이 아니잖아요. 오빠가 앉아 있어야 해요."

벨이 울려 문을 열자, 거기 와타나베 노보루가 서 있었다.
나는 그를 거실로 맞아 들이고, 소파에 앉게 했다.
그는 선물로 서틴원 아이스크림을 들고 왔는데,
우리 냉장고에는 좁은데다가 냉동 식품이 가득 채워져 있어서,
그것을 집어넣는데 몹시 애를 먹었다.
정말로 귀찮게 구는 녀석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고많은 중에 아이스크림 따위를 사들고 오냐 말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에게 맥주를 마시지 않겠냐고 권했다.
안 마신다고 그는 대답했다.
"체질상 술을 못합니다.
맥주 한잔만 마셔도 기분이 좋지 않을 정도라서요."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학생 시절에 친구들하고 내기를 해서
큰 사발 가득하게 맥주를 마신 적이 있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물었다.
"꼬박 이틀동안 소변이 맥주였어. 덕분에 트림이..."
"저어. 이럴 때 오디오 수리를 부탁하면 어떨까요?"하고
여동생이 불길한 연기 냄새라도 맡듯이 다가와
오렌지 쥬스 두 잔을 탁자 위에 놓으면서 말참견을 했다.
"좋지요."하고 그가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