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문학관

1. 패밀리 어페어 - 무라카미 하루키.

오늘의 쉼터 2011. 5. 18. 12:04

 

 

 

 패밀리 어페어 - 무라카미 하루키.


그런 건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여동생의 약혼자가 애당초 그다지 마음에 들지 패밀리 어페어 - 무라카미 하루키.않았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그런 남자와 결혼할 결심을 하기에 이른
여동생 자체에 대해서도 적잖은 의문을 품기에 이르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주 낙담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은 나의 편협한 성격 탓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여동생은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드러내어 그 화제를 입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 약혼자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건
여동생 쪽에서도 똑똑히 짐작하고 있었으며,
그런 나에 대해 그녀는 신경질을 부렸다.
"오빠는 사물을 보는 눈이 너무 좁아."하고 여동생은 나에게 말했다.

그때 우리는 스파게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스파게티에 대한 나의 생각이 너무 좁다고 지적한 셈이었다.
그러나 물론 여동생은 스파게티 그것만을 문제로 삼았던 건 아니다.
스파게티 얘기를 하기에 앞서 그녀의 약혼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고,
그녀는 어느 쪽이냐 하면 약혼자 쪽을 더 문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대리 전쟁이나 같은 것이었다.

애당초 발단은 일요일 낮에 여동생이 같이 스파게티라도 먹으로 나가자고
나에게 말을 꺼낸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도 마침 스파게티가 먹고 싶던 참이라 '좋지.'하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역전에 새로 생긴 아담한 스파게티 전문점으로 갔다.

나는 가지와 마늘을 넣은 스파게티를 주문했고,
여동생은 바지리코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요리가 나올 때까지 나는 맥주를 마셨다.
거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5월의 일요일이고, 게다가 좋은 날씨였다.

문제는 가져온 스파게티 맛이 '재앙'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형편없었다는 점이다.
면은 겉이 설익어 몹시 깔깔하고 속에 심줄이 남아 있었으며,
버터는 강아지라도 먹다 말 것 같은 '물건'이었다.
나는 어떻게 어떻게 절반쯤만 먹고서 단념하고,
웨이트리스에게 나머지는 치워 달라고 했다.

여동생은 그런 나를 흘깃흘깃 보고 있었는데,
그땐 아무 말 않고 자기 접시의 스파게티를
마지막 한 가닥까지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먹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창 밖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두 병째 맥주를 마셨다.

"오빠, 뭐 그렇게 보란 듯이 남길 건 없잖아요."하고
자기 접시가 치워진 다음 여동생이 말했다.
"맛없군."하고 나는 간단하게 말했다.
"절반이나 남길 만큼 맛없진 않았어요. 좀 참으면 될텐데."
"먹고 싶을 땐 먹고, 먹고 싶지 않을 땐 안 먹는다.
이건 내 위장의 문제지, 임마 네 위장의 문제는 아니야,"

"'임마'란 말 쓰지 마세요. 부탁이니까. ...
'임마'란 말을 하면 꼭 어디서 굴러먹은 건달처럼 보인단 말이에요."
"내 위장의 문제지, 네 위장의 문제는 아니야."하고 나는 정정을 했다.

스무 살이 지나면서, 동생은 자신은 '임마'하고 부르는 걸 질색하면서
점잖게 부르도록 나를 훈련시켜 왔던 것이다.
그 둘의 차이가 어디 있는지 나로선 잘 모르겠다.

"이 가게는 갓 개점한 참이라서 틀림없이 조리장이 아직 익숙하지 못한 거예요.
조금쯤은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져도 되잖아요?"
하고 여동생은 아까 나온 스파게티처럼
보기만 해도 맛없는 싱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맛없는 요리를 남긴다는 것도 하나의 식견이 아닐까"하고 나는 설명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도도해졌죠?"
"더럽게 트집잡네. 생리중이냐 뭐냐?"
"시끄러워요. 웃기지 말아요. 오빠한테 그런 소리들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별로 신경 쑬 건 없다구,
'너'의 맨 처음 생리가 언제였던가도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퍽도 늦어서 어머니하고 함께 의사한테 갔었잖아?"

"입 다물지 않으면 백을 던질 거예요!"
동생이 정말 화내고 있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가 말예요, 사물에 대한 오빠의 견해는 너무나 편협하다구요."
동생은 커피에다 크림을 추가로 넣으면서-필시 맛이 없나 보다-말했다.

"...오빠는 사물의 결점만 끄집어내어 비판하지,
좋은 점을 보려고 들지 않는단 말이에요.
무언가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다 싶으면 일절 손도 대려 하지 않는다구요.
그런 걸 곁에서 보고 있자면 굉장히 신경에 거슬린단 말이에요"

"하지만 그건 내 인생이지, 네 인생은 아니야."
"그래서 남을 다치게 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곤 하나 보군요.
...마스터베이션만 해도 그렇죠."

"마스터베이션? 무슨 소리냐, 그게?"하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오빠는 고교 시절에 툭하면 마스터베이션을 해서 시트를 더럽혔잖아요.
다 알고 있다고요. ...그걸 빠는 게 얼마나 힘들다구요.
마스터베이션쯤 시트 더럽히지 않게 하면 어때요?
그런 걸로 남에게 폐를 끼친 말이에요."

"명심하겠어. 그 점에 대해선 말야. ...하지만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나에게 내 인생이 있고, 좋아하는 것도 있고 싫어하는 것도 있어. 별수 없잖아."
"하지만 사람을 다치게 해요. 어째서 노력하려 하지 않죠?
어째서 사물의 좋은 면을 보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어째서 조금이라도 참으려 들지 않고, 어째서 성장하지 않는 거죠?"
"성장하고 있어."하고 나는 좀 기분이 상해서 말했다.
"참기도 하고, 사물의 좋은 면도 보고 있어. 너와 같은 데를 보고 있지 않을 뿐이야."

"그게 오만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물 일곱 살이나 되어서도 제대로 된 애인도 생기지 않는 거라구요."
"여자 친구는 있다구."
"잘 때만 필요한 여자 말이겠죠. 그렇죠?
1년마다 자는 상대를 갈아대면서, 그래도 즐거워요?
이해심이라든지 애정이라든지 헤아려 줌이라든지 그런 거 없이는,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마스터베이션이나 다를 바 없죠."

"1년마다 갈아대지는 않았어."하고 나는 맥없이 말했다.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조금쯤은 건전한 생각을 갖고,
건전한 생활을 하는 게 어때요? 조금만 어른스러워진다면?"

그것이 우리 대화의 끝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동생은 거의 대꾸를 하지 않았다.
어째서 동생이 나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나로선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바로 일년 전쯤만 해도 동생은 나의 확고한 '되는 대로의 생활'을 함께 즐겨왔으며,
나에 대해-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면-어떤 의미에선 동경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조금씩 비난하게 된 건 그 약혼자와 사귀게 되면서부터였다.

 

그건 공정하지가 못해,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와 동생은 이제까지 23년이나 사귀어 왔단 말이다.
우리는 온갖 것을 정직하게 서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사이 좋은 남매였으며,
싸움도 거의 해 본 적이 없었다.
동생은 나의 마스터베이션 같은 걸 알고 있으며,
나는 동생의 초경 같은 걸 알고 있다.
동생은 내가 처음으로 콘돔을 샀을 때-나는 그때 열 일곱 살이었다-의 일을 알고 있고,
나는 동생이 처음으로 레이스 속옷을 샀을 때
-동생은 그때 열 아홉 살이었다-의 일을 알고 있다.

나는 동생의 친구와 데이트 한 일-물론 자지는 않았다-도 있으며,
동생은 내 친구와 데이트한 일-물론 자지 않았었다고 믿는다-도 있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자라왔단 말이다.
그런 우호적인 관계가 단 1년 사이에 후딱 변하다니.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차츰 분한 생각이 치밀었다.

역전의 백화점에서 구두를 구경하겠다는 여동생을 남겨 놓고,
나는 혼자서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녀는 집에 없었다. 이건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일요일 오후 2시에 갑작스레 전화를 걸어 여자아이를 꼬여 봤자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나는 수화기를 놓고, 수첩의 페이지를 넘겨 딴 여자아이 집에 전화를 돌려 보았다.
어느 디스코장에서 알게 된 여대생이다.
그녀는 집에 있었다.

"뭐 마시러 가지 않을래?"하고 하는 유혹했다.
"아직 오후 2신걸요"하고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시간이 무슨 문제야. 마시다 보면 저물걸. 실은 석양 보는 게 제격인 좋은 바가 있어.
오후 3시까지 가지 않으면 좋은 자리를 못 잡아."
"싱거운 사람 같으니라구"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도 그녀는 나와 주었다. 필경 친절한 성격일게다.
나는 차를 운전해 해안을 끼고 달려 약속대로 요코하마 해변에 있는 바에 들어갔다.
나는 거기서 IW하퍼의 온 더 록을 네 잔 마시고,
그녀는 바나나 데이키리-'바나나 데이키리'다!-를 두 잔 마셨다.
그리고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술 마시고 차 운전할 수 있어요?"하고 그 아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염려 마. 난 알코올에 관해선 언더파(표준이상)란 말야."
"언더파?"
"네 잔 정도는 보통이야. 그러니까 무슨 걱정이야. 문제 없다구."
"아휴."
그러고 나서 우리는 요코하마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차 안에서 키스를 했다.
나는 그녀에게 호텔로 가자고 유혹했지만, 그녀는 안된다고 했다.
"글쎄, 탐폰이 들어 있다구요."
"빼면 되잖아."
"농담 마세요. 아직 이틀째인걸."

어이쿠,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 이게 뭐냐. 이럴 바엔 애당초 여자 친구하고 데이트를 했더라면 좋았을걸,
오랜만에 여동생과 여유있게 하루를 지내려고 하는 이번 일요일에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꼴이란 말이다.

"미안해요, 하지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하고 그 여자아이가 말했다.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 탓은 아니야, 내 탓이지."
"내 '생리'가 당신 탓이에요?"
하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 여자아이가 말했다.
"아니야, 무슨 운명이냔 말이야."하고 나는 말했다.
당연한 말이 아닌가.
어째서 내 탓으로 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아이가 '생리'를 하게 되냔 말이다.

나는 그녀를 세타가야의 집까지 차로 바래다주었다.
도중에 클러치가 달깍달깍, 작기는 했지만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이러다가는 수리 공장으로 가야겠군, 하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나가 제대로 안되면, 연쇄적으로 무엇이나 다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전형적인 하루였다.

"가까운 시일 안에 다시 만나자고 해도 되겠어?"하고 나는 물었다.
"데이트하러? 아니면 호텔로"
"양쪽 다"하고 나는 명랑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건, 그렇지, 표리일체 그거야. 칫솔과 치약처럼..."
"그렇군요, 생각해 보겠어요."
"그래, 생각한다는 거 머리가 늙지 않아서 좋지."
"당신 집은 어때요? 놀러 가도 돼요?"
"안 되겠는걸. 여동생하고 살고 있거든. 규칙이 있단 말야.
난 여자를 끌어들이지 않고 여동생은 남자를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진짜 여동생?"
"진짜구말구, 다음 번에 주민등록 등본을 갖다 줄까?"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웃었다.
그 여자아이가 자기 집 대문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
나는 차에 엔진은 넣어, 크러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파트 안은 캄캄하기만 했다.
나는 열쇠로 문을 열고 전등을 켠 후 여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동생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밤 10시에 어디에 갔단 말이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동안 석간 신문을 찾았는데, 신문은 없었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잔과 같이 거실로 가져와
오디오 스위치를 넣고, 턴테이블에 허비 핸콕의 새 레코드를 얹었다.
그리곤 맥주를 마시면서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오디오가 사흘 전부터 고장 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전원은 들어오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텔레비전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갖고 있는 건 모니터용 텔레비전 수신기로,
오디오를 통하지 않고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장치가 돼 있었던 것이다.

별수 없이 나는 소리없는 텔레비전 화면을 노려보면서, 맥주나 마시기로 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오래 된 전쟁 영화를 하고 있었다.
론멜의 전차대가 나오는 아프리카 전쟁물이었다.
전차포가 소리없는 포탄을 쏘고,
자동소총이 침묵의 탄환을 흩뿌리고, 사람들은 말없이 죽어 갔다.
"으휴"하고 나는 그날 열 여섯 번째-아마도 그만큼 됐을 것이다-의 한숨을 쉬었다.

 

내가 여동생과 함께 살게 된 건 5년전 봄이었다.
그 당시 나는 스물 두 살이었고, 여동생은 열여덟 살이었다.
즉, 내가 대학을 나와 취업을 하고,
그녀가 고등학교를 마치면 대학에 들어간 해다.
부모님은 나와 함께 산다는 조건하에
여동생이 도쿄의 대학에 다니는 것을 허락했던 것이다.
동생은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나도 좋다고 했다.

부모님은 우리를 위해 제법 그럴싸한 방이 두 개 있는 넓은 아파트를 세 내 주었다.
집세의 절반은 내가 부담하기로 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나와 여동생은 사이가 좋았으며,
둘이서 산다는 것에 나는 거의 불편을 느끼지 않았었다.
나는 전자 제품 회사의 광고부에 근무하고 있었던 탓으로,
아침엔 비교적 일찍 출근했으며, 밤에는 늦게 돌아오곤 했다.
여동생은 아침 일찍 학교에 가고, 대개 저녁에 돌아왔다.

그래서 내가 눈을 떴을 때 동생은 이미 없었고,
내가 돌아왔을 때엔 동생은 벌써 잠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뿐더러 나는 거의 대부분의 토요일과 일요일에 데이트를 했으므로,
동생과 제대로 말을 주고받는 건, 일주일에 한 두 번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우리는 싸울 틈조차 없었으며,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 간섭하지도 않았다.

동생에게도 아마 여러 가지 일들이 있겠지 싶었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서 일절 참견하지 않았다.
열여덟 살이 넘은 여자아이가 누구하고 자건 말건 그런 건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꼭 한 번, 한밤중 1시부터 3시까지 동생의 손을 잡아 준 적이 있다.
내가 직장에서 돌아와 보니, 부엌 식탁에서 동생이 울고 있었다.
식탁에서 울고 있다는 건 필시 나더러 뭔가 알아 달라는 뜻이 아닐까 하고 짐작했다.
왜냐하면 간섭하는 게 싫었다면 자기 방 침대에서 울면 그뿐인 것이다.
나는 편협하고 고집스런 인간일지 모르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옆에 앉아 여동생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여동생 손을 잡아 본 건, 국민학교 때 잠자리 잡으러 갔을 때 말고는 처음이었다.
여동생의 손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그야 당연한 일이겠지만-훨씬 크고 따뜻했다.

동생은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2시간이나 울었다.
어쩌면 그렇게 많은 눈물이 몸속에 들어 있나 싶어 나는 감탄했다.
나 같으면 단 2분만 울어도 몸이 바삭바삭 말라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3식 되자 아닌게 아니라 나도 피곤해져서 그럭저럭 끝맺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쯤에서 오빠로서 뭔가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건 질색이지만 하는 수 없지. 그래서 나는 말했다.

"나는 너의 생활에 일절 간섭하고 싶지 않아.
네 인생이니까 좋을 대로 살면 돼."
여동생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하지만 한마디만 충고하고 싶은데,
백 속에다 콘돔을 넣고 다니는 일만은 그만 두는 게 좋겠어,
매춘부로 착각하기 쉬우니까."
그 말을 듣자 동생은 식탁 위의 전하번호부를 집어들어, 나에게로 힘껏 내던졌다.

"왜 남의 백 속을 뒤지는 거야!'하고 동생은 소리쳤다.
동생은 화를 낼 때면 으레 뭐든지 내던지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동생의 백 속을 뒤진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식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그것을 계기로 동생은 울음을 그쳤고,
나는 내 침대 속으로 쑤시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여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여행사에 근무하게 되고 나서도,
우리의 그러한 생활 방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동생의 회사는 9시부터 5시까지 규칙적으로 근무하는 곳이었고,
내 쪽의 생활은 갈수록 게을러졌다.
점심 전에 출근하여, 데스크에서 신문을 읽고,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2시경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서 광고 대행사와 약속을 해놓고,
술을 마시고 한밤중에 귀가하는 일과가 계속되었다.

여행사에 근무하던 첫해의 여름 휴가 때,
동생은 여자 친구와 둘이서 아메리카의 서해안에 갔다가-물론 할인요금이었다-
그 여행단에서 만나게 된 한 살 위의 컴퓨터 엔지니어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돌아와서도 툭하면 그와 데이트를 했다.
글쎄, 흔히 있는 일이긴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은 딱 질색이었다.
우선 단체 여행이라는 것이 맘에 안 들었고,
그런 곳에서 누구를 만나 사귀다니 생각만 해도 역겨워졌다.

그런데 그 컴퓨터 엔지니어와 교제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동생은 이전보다도 훨씬 더 명랑해진 것 같았다.
집안 일도 차분하게 처리하게 되었고, 옷에도 신경을 쓰게끔 되었다.
그때까지 동생은 워크셔츠와 색바랜 블루진과
운동화를 신은 모양새로 어디나 갈 수 있는 여자였다.
옷차림에 집착하기 시작한 덕분에 신발장은 온통 동생의 구두로 들어찼고,
집안은 세탁소의 철사 옷걸이 투성이였다.

동생은 열심히 빨래-그때까지는 욕실에
아마존 개미둑 모양으로 더러워진 것들을 쌓아 놓고 있었다-를 했고,
열심히 다림질을 했으며, 열심히 요리를 만들었고, 열심히 청소를 하게 되었다.

나도 약간의 체험은 있었지만, 그런 것은 위험한 징후였다.
여자아이가 그런 징후를 보이기 시작하면
남자는 줄행랑을 놓든지 아니면 결혼하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여동생은 나에게 그 컴퓨터 엔지니어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여동생이 나에게 그 사진을 보여 준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위험한 징후였다.
사진은 두 장인데, 한 장은 샌프란시스코의 낚시 전시회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청다랑어 앞에 여동생과 그 컴퓨터 엔지니어가 나란히 서서 생긋이 웃고 있었다.

"청다랑어가 멋있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농담 좀 작작해요, 난 진지하다구요."
"무슨 말을 했으면 좋겠니?"
"아무 말 안해도 좋아요, 그런 사람이에요."

나는 다시 한 번 그 사진을 손에 들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 세상에서 첫눈에 역겨워지는 얼굴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런 얼굴이었다.
한 술 더떠서 그 컴퓨터 엔지니어는
내가 고교 시절에 가장 싫어하던 클럽 선배와 분위기가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