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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 2

오늘의 쉼터 2011. 5. 14. 23:42

 

제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 2


그 음악가는 바하의 곡 다음에 곡목을 알 수 없는 현대 음악을 연주했다.
레거의 곡인지도 몰랐다.
교회는 완전히 어두워졌고 아주 희미한 빛이 옆 창문으로 흘러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연주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고 풍금을 치던 사람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볼 때까지 교회 앞을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아직 젊었으나 적어도 나보다는 좀더 나이가 많아 보였고
억세고 체구가 오동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힘차게, 마치 기분이 나쁜 사람처럼 성급한 발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그 이후 나는 때때로 저녁 무렵에 그 교회 앞에 앉아 있거나 서성거리곤 했다.
언젠가는 교회 문이 열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반시간 동안이나 풍금 연주자가 위층에서 가물거리는 가스등 밑에서 연주하는 것을
추위에 떨면서, 그러나 행복한 심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가 연주하는 음악에서 나는 그 사람 자신만을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연주하는 모든 곡들은 서로 인연이 닿아 있고
남모르는 관계를 맞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가 연주하는 모든 곡은 종교적이었고 헌신적이었으며 경건했지만
교회의 신자나 목사들처럼 경건한 것이 아니라
중세의 순례자나 탁발승들처럼 경건했고,
모든 종파를 넘어서 존재하는 세계 감정을 향한 물불을 가리지 않는 헌신으로 경건했다.

바하 이전의 거장들의 곡과 옛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곡이 자주 연주되었다.
그 곡들은 모두가 똑같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연주자 자신의 마음속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엇다.
그것은 동경과 세계의 가장 내면적인 파악,
그리고 세계로부터의 가장 난폭스러운 분리와
자기 자신의 어두운 영혼에 대한 타는 듯한 심취,
헌신에의 도취와 불가사의한 것에 대한 깊은 호기심 같은 것들이었다.

언젠가 나는 그 풍금 연주자가 교회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것을 몰래 따라갔었는데
그가 시내의 변두리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조그만 술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나 자신을 억제치 못하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여기에서 나는 비로소 그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검정 펠트 모자를 쓴 채 포도주 한 병을 앞에 놓고
조그만 홀의 구석에 있는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내가 상상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그는 못생겼고 다소 야성적으로 보였으며, 탐구적이고 굳어버린 것 같은 표정에
집요하고 의지에 차 있어 보였지만 입 가장자리에는 부드러운,
아이와 같은 느낌이 남아 있었다.
남성적이고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모두 눈과 이마에 모여 있었고
섬세하고도 미숙해 보이는 안정감 없는 하관과
부분적인 연약함이 함께 깃든 얼굴이었는데 우유부단해 보이는 턱은
눈초리에 대한 이율배반인 양 소년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특히 내마음에 든 것은 긍지와 적의에 가득 찬 암갈색 눈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술집 안에는 우리 두 사람 외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나를 쫓아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앞에 버티고 앉아서
그가 성이 나서 투덜거릴 때까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당신은 뭘 그리 기분나쁘게 사람을 노려보고 있소?
내게 무슨 용건이 있는 거요?”

”당신에게 무슨 용건이 있는 건 아닙니다.”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난 당신에 관해 많은 걸 알고 있어요.”
그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럼 당신도 음악광이오?
음악에 미친다는 건 내가 보기엔 구역질 나는 짓이오.”
나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나는 벌써 여러 번 교회 밖에서 당신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나는 계속 말했다.
“나는 당신을 귀찮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나는 당신에게서 뭔가를,
뭔가 색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할 순 없지만 말입니다.
내가 하는 소리 같은 건 귀담아 듣지 마삽시오!
나는 교회에서 당신의 연주를 듣는 것으로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난 언제나 교회 문을 잠가두는데요.”
”최근에는 그것을 잊으신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교회 안에 들어가서 들을 수가 있었지요.
그렇지 않을 때는 밖에 서서 듣거나 길가의 돌에 앉아 듣기도 했답니다.”

”그래요? 다음번엔 들어와도 좋소. 그게 훨씬 따뜻할 거요.
그저 문만 두드리이오. 그러나 힘차게 두드려야 할 거요.
내가 연주하고 있지 않을 때 말이오.
그럼 이제 자---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소?
아주 젊은 분이군, 아마 고등학생 아니면 대학생이겠지. 음악을 하시오?”
”아닙니다. 전 그저 음악을 듣기를 좋아할 뿐입니다.
당신이 연주하시는 것 같은 그런 구속이 없는 음악,
그것을 듣고 있자면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잡아 흔드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음악 말입니다.
저는 음악을 대단히 좋아하는데 아마 음악은
그렇게 도덕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온갖 것들은 다 도덕적이지요.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은 것을 찾고 있는 거예요.
저는 언제나 도덕적인 것에 억눌려 괴로움을 받아왔어요.
잘 표현할 순 없지만---
당신도 신인 동시에 악마인 하나의 신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십니까?
전 그러한 신이 존재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는 넓다란 모자를 조금 젖히고 이마로 내려온 검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식탁 너머로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었다.
나직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그는 물었다.
“당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신의 이름이 무엇이오?”
”유감스럽지만 저는 그 신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어요.
단지 이름을 알고 있을 뿐이에요.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랍니다.”
그는 누군가가 우리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다는 듯이 조심스레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내게 한층 더 바짝 다가앉으면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내 그럴 줄 알았소. 당신은 누구시오?”
”저는 김나지움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어디서 아프락사스를 알게 되었소?”
”우연이지요.”

그는 식탁을 쳤다. 포도주 잔이 넘쳐흘렀다.
”우연이라니! 이것 보시오. 쓸데없는 소리 작작해요!
아프락사스에 관해서 우연으로 알게 되는 법은 없소.
그것을 명심하시오. 내가 그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주리다.
난 그에 관해 아는 것이 좀 있으니까.”

그는 말을 멈추고 걸상을 다시 뒤로 밀었다.
내가 기대에 가득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서가 아니오! 다음번에 이야기하리다.
---자, 이거나 좀 드시오.”

그러면서 그는 입고 있던 외투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더니
군밤 몇 개를 꺼내서는 내게 던져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집어먹으며 지극히 만족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그래!” 그는 잠시 후에 소곤거리듯 말했다.
“어디서 당신은 그 --- 그것에 대해 알게 되었소?”
나는 주저없이 이야기했다.
”전 고독했었고 방황하고 있었지요.”
나는 말을 계속했다.
“그때 저는 옛시절의 친구가 생각났는데
전 그가 무척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것을, 지구에서 나오려고 하는 한 마리의 새를 그렸습니다.
그것을 그에게 보냈지요.
제법 시간이 지나서 그것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을 무렵에
뜻밖에도 종이쪽지 한 장이 제 손에 들어오게 되었느느데
거기엔 이런 귀절이 적혀 있었어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밤을 까서 술안주로 먹었다.
”한 병 더 하겠소?” 그가 물었다.
”고맙지만 더는 못합니다. 전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그는 다소 실망했다는 듯이 웃었다.

”좋을 대로 하시오. 난 다르니까. 난 여기 더 있겠소만. 이제 그만 가 보시오.”
다음번에 그의 연주를 들은 후 그 사람과 함께 걷게 되었을 때는 그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는 나를 옛날 골목에 있는 낡고 거창한 집의
크고 음산하며 잔손이 가지 않은 방으로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는 피아노를 제외하면 음악에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커다란 책장과 책상이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었다.
”참 책이 많군요.” 나는 감탄하여 말했다.

”그 일부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갖고 온 거요.
나는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으니까---이봐요.
나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긴 하지만 그들에게 당신을 소개할 순 없소.
이 집안에서는 내 친구가 그리 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처지가 못되니까.
나는 소위 탈선한 자식이지요.
아버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존경할 만한 분으로
이 시에서 손꼽히는 목사이자 설교가라오.
당신이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나는 재능이 있고 전도가 유망한
그의 후계자였는데 탈선을 하고 얼마간 정신이 돌아버린 것이오.
나는 신학생이었는데 국가 시험 직전에 이 신성한 신학부를 팽개쳐버린 거요.
내 개인적인 공부로 말하자면 나는 여전히 이 학과를 전공하고 있는 셈이오.
사람들이 때론 어떤 신을 생각해냈는가 하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여전히 내게는 최고로 중요하고 흥미있는 일이라오.
그건 그렇고 나는 현재 음악을 하고 있는데 머지않아
하찮은 풍금 연주자 자리를 얻게 되겠지요.
그러면 나는 다시 교회에서 일하게 되는 거요.”

나는 서가에 꽂힌 책을 대충 훑어보았다.
조그만 탁상 램프의 희미한 불빛으로 볼 수 있는 한에서 그것은
그리스어, 라틴어, 헤브라이어의 표제를 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컴컴한 속에서 벽 쪽의 방바닥에 엎드려 무언가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이리 오시오.” 얼마 후에 그가 나를 불렀다.
“이제 철학 시간을 조금 가집시다.
다시 말하면 입은 다물고 엎드려 생각을 좀 해보잔 말이오.”

그는 성냥을 한 개비 켜서는 앞에 있는 난로에 종이와 나무를 살라 불을 피웠다.
불꽃은 곧 높이 피어오랐는데 그는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불을 긁어 일으키기도 하고 장작을 집어넣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서 너덜너덜한 융단 위에 엎드렸다.
그는 물끄러미 불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불은 곧 내 마음을 끌어
우리는 거의 한 시간쯤이나 널름거리는 장작불 앞에
아무 말 없이 엎드려서는 불꽃이 훨훨 타오르고 바지직거리고
꺾여지고 휘어지고 가물가물 사그라들다 경련하듯 파닥거리며
마침내는 조용히 사위어들어 밑바닥에서 부화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화도 온갖 발명 중에서 제일 미련스런 발명은 아닌 것 같군.”
그는 혼잣말로 한 번 이렇게 중어러렸을 뿐이었다.
그 말 외에 우리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중된 시선으로 나는 불을 들여다보았고 꿈과 정적 속에 잠겨들었으며
연기 속에서 어떤 자태와 재 속에서 무엇인가의 형상을 보았다.
갑자기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관솔을 불 속에 던져 넣자 조그맣고 가느다란 불꽃이 솟구쳐 올라왔는데
그 속에서 나는 황금빛 새매의 머리를 가진 새를 볼 수 있었다.
사그라져가는 난로의 불 속에서 황금빛으로 불에 단 실이 그물 모양으로 엉겨들고,
문자와 갖가지 형상과 얼굴, 짐승, 식물, 벌레 그리고 뱀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왔다.
문득 정신이 들어 옆에 있는 그를 보니

그는 턱을 괴고 엎드려 정신없이, 마치 꿈꾸는 것처럼 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