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문학관

세상에 홀로 서는 너를 위하여3. / 켄트 너번

오늘의 쉼터 2011. 5. 8. 16:17

세상에 홀로 서는 너를 위하여3. / 켄트 너번

 

 

6. 베푸는 일의 경이로움

내가 이 글을 쓸 때는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이 때는 일년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기란다.
이 짧은 시즌 때문에 사람들은 돈을 헤아린다.
단지 자기 자신의 안녕을 위한 척도로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측정하기 위해서.
이 시즌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찾고,
다른 사람들이 받는 행복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이렇게 간단한 교훈을, 우리는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그날이 끝남과 동시에 사람들은 다시
자기 자신을 위해 얻을 수 있는 가치로써 행복을 측정하는,
주는 사람이 아닌 가지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불과 며칠전만 해도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즐거움에 의해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했었다.
그러나 갑자기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이득을 줄 것인가 아닌가에 의해
모든 활동을 평가하는 실용적인 관점으로 복귀한다.

그건 슬픈 변화란다.
어떻게 사람들은 그렇게 빨리 베푸는 즐거움을 잊을 수 있을까?
베푸는 일은 우리의 가장 놀랍고도 자애로운 활동이다.
온정과 즐거움이 마음의 커다란 무게를
가볍게 변형시킬 수 있다는 것은 무척 경이로운 일이다.
진실한 자선은 그것이 돈이든 시간이든 관계든,
또는 그밖의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리게 한다.
그것은 베푸는 사람을 기쁨으로 채워주고
베품을 받는 사람을 온정으로 따뜻하게 한다.
전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작은 실천으로 인해 새롭게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우리가 어려웠을 때를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주위로부터 우리의 삶을 다른 사람의 삶과 구분되도록 벽을 만들어왔다.
우리는 지위와 돈과 인정받기에 몰두하는 자신을 본다.
우리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는 방편으로써
혹은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고 여김으로써 더욱더 그것에 몰두한다.
차근차근 우리 자신의 주변에 안전이라는 보호막을 세우고
우리 삶을 마치 잃어버릴 수 있는 물건인 것처럼 이해하기 시작한다.

베푸는 일은 경제적 거래가
- 현재의 자신에게서 필요없는 것을 줌으로써 생색을 내는 - 되어버리고,
그래서 어떤 때는 가장 작은 선물조차도
자신의 관심의 크기에서는 무거운 부담으로 느껴지게 된다.
심지어 자의적으로 손을 뻗치고 베풀 때 조차도
우리는 주위의 관심과 칭찬이 되돌아오길 바라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는 사실상 다른 사람의 요구에 응답하는
순수한 즐거움에서가 아니라 이후에 받게 될칭찬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된다.
우리는 소유에 대한 지나친 자기 관심이라는 감옥에 갇힌 채,
우리의 실제적인 성장과 행복이 우리 스스로 방해하고 있는
베푸는 활동들에 의해 더 많이 주어진다는 사실에 그만 눈을 감아버린다.

이 감옥을 부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오로지 베푸는 것뿐이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나는 산타클로스 장비를 빌려 입고서 거리에 나선단다.
단지 그런 교훈을 나 자신에게 새롭게 일깨우기 위해서 말이다.
산타의 위치에서 축하나 은혜를 나누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도 내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모른다.
나는 쉽게 산타가 되고 쉽게 베푸는 사람이 된다.

나는 가까운 요양원을 찾아가고, 국민학교를 방문하고, 병원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잠시 멈추어 서서 모여든 아이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작은 선물을 나누어준다.
양친들은 그런 모습을 옆에서 구경하거나 이런 저런 질문을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아이들에게
나를 틀림없는 산타라고 믿도록 말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단지 자기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여줄 것을 요청한다.

한번은 어느 유태인 가족이 내 옆에 다가와
그들의 어린 소년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해 왔었다.
그 소년은 자기가 다니던 유치원에서 단 한 명뿐인 유태인이었단다.
그 아이는 자기가 유태인이기 때문에
산타가 자신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산타가 자기 방에 나타났을 때에도 앞에 나서서 맞이하길 두려워했다.
나는 그 소년과 그의 양친과 함께 둘러앉았다.
그리고 우리는 하누카(유태교의 성전 헌당 기념일)와 베푸는 일에 대해 얘기했다.
마지막엔 그 소년이 나를 꼭 껴안았고, 더 이상 아무런 두려움도 없다고 말했다.
그 일은 내게 신비스러운 무엇인가를 느끼게 했다.
그건 단지 인간의 착한 본성만이 아니었다.

산타는 내게 금전적 시간적 비용이 들게 하는 것이고,
또한 여러번의 실패를 안겨주는 일이었다.

한번은 두 명의 젊은이가 차를 몰다가
우선 멈춤 표지판을 넘어와서 나를 들이받은 적이 있었단다.
그래도 나는 그들의 과격한 행위에 소송을 걸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떻게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산타가 다른 사람을 고소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 일을 비롯한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 때문에도 나는 산타가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일로 인해 내가 너무나 많은 것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얻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베품을 통하여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 내가 남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그런 일을 한다고 생각할게다.
그들은 심지어 이렇게 말 할런지도 모른다.
그일이 당신으로 하여금 선을 느끼게 만든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일이 선을 느끼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점이다.
그 일은 선을 창조한다.
그리고 또한 그일은 아무것도 없었던 세계에 선을 가져온다.

베푸는 일은 평상적인 활동이다.
네가 너 스스로를 베풀 때, 어떤 것이 새롭게 존재하게 된다.
바로 조금전까지 사적인 이해의 세계로 분리되어 있던 두 사람이
갑자기 나눔이라는 간단한 활동으로 서로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따뜻함과 즐거움이 창조된다.
세계는 더욱 확장되고, 물질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작은 경이로움이 생긴다.

너는 결코 이 경이로움을 과소평가해선 안된다.
세상엔 자신이 반드시 머더 테레사나 알버트 아인쉬타인,
혹은 슈바이쳐, 심지어는 산타클로스처럼 인류애를 가진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선량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만약 그런 사람들 모두가 조금씩만 베푸는 사람이 된다면,
아마 커다란 일을 수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의 대다수는 어떤 장소 어떤 위치에서든
쉽게 행할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여는 간단한 실천을 발견하지 못한다.

너는 네 자신을 위해 그러한 시도를 해보거라.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방법은 간단하다.
누구든 모르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나눠보아라.
이웃집에 가서 잔디를 깎아주거라.
힘들고 지친 사람을 잠시 멈추어 쉬게 하고 도와주거라.

또는 너보다 약한 사람에게 손을 뻗어보거라.
향기로운 꽃을 사들고 근처의 요양원을 방문하거라.
네 호주머니에서 10달러를 꺼내 거리의 부랑자에게 나눠 주고
미소를 지으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 가보렴.
그것은 동정도, 대단한 아량을 베푸는 듯한 태도로 행하는 자선이어서도 안된다.
단지 네가 가진 것을 그냥 주고 웃으면서 걸어가보려므나.

그렇게 함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너는 그 경이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너는 벽 속에 갇혀 있지 않은 인간의 진실한 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행복해 하는 사람의 정직한 웃음을 보게 되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인간애를 느끼게 될것이다.
천천히, 눈에 보이게 너는 우리 사람들 사이의
보편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분리와 차이점이 아니라 합치와 공통점이란다.

오래지 않아 너는 즐거움과 행복함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이
다른 사람을 돌보고 동정하는 단순한 행위를 통하여
창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너는 선을 나누어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
선을 심어줄 수 있는 경이로운 힘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너 이외의
다른 베푸는 사람을 발견하게될 것이라는 점이다.
네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나 여행하고 있는 곳이나 어디서든,
네가 그들의 언어를 말하든 못하든, 그들의 이름을 알든 모르든,
너는 그들을 알게 될 것이며 그들과 하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이미 다른 각각의 사람을 이해하고 승인한 것이기 때문이란다.

너는 그들의 작은 활동에서 쉽게 그들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활동들은 네가 이미 알고 있고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그들도 역시 너의 작은 활동속에서 너를 발견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각각 서로를 알게 되고 포용하게 된다.
너는 진실과 나눔과 친근함이 마음속에서
부드럽게 우러나오는 인간 공동체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네가 일단 베푸는 사람이 되고 나면, 너는 이미 혼자가 아니란다.

 

 

 

7. 돈과 부유함

삶은 돈에 의해 지배된다.
너는 물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돈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을 수도 있다.
너는 또한 돈에 초연하다거나 무관심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게 너는 돈의 몹쓸 병폐에 대해 가능한한
모든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지적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돈은 항상 생존을 위해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의 중심에 있게 된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말하는 건아니다.
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네 생활의 가운데에
꼭 필요한 것으로 존재하는 이것을 다른 것들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겠느냐?

나는 지금까지 돈을 취급하는 방법에 있어서
여러가지 측면의 사람들을 보아왔다.
예전에 나는 기름때로 찌든 바지주머니 안에 얼마 안되는 돈을 쑤셔넣은
뜨내기 노동자들과 함께 싸구려 술집에서 술을 마시곤 했었다.
그리고 엄청난 부를 다루면서도 자선은 단 1페니의 현찰이나 동전을
만질 수 없는 증권중개인과 밤늦게까지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나는 가난해질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몇푼의 돈조차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부자들과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항상 다른 이들과 나눔으로써
충분히 부유해 보이는 현명한 가난한 사람들을 보아왔다.
그런가 하면 자비로운 부자와 범죄를 저지르는 가난뱅이,
그리고 사기꾼과 성자를 보아왔단다.

그들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한 가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돈을 다루는 방법은,
얼마나 많은 돈을 소유했는가의 결과가 아니라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결과였단다.
이 결과는 매우 중요하다.
가장 기본적인단계에서 돈은 항상 현실이다.
즉 너는 돈이란 물건을 소유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거란다.
그러나 경제적, 철학적 단계에서의 돈은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된다.
여기서 돈의 가치와 역할은 네가 만들기 나름의 어떤 것이 된단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을 생각해 보자꾸나.
첫번째 사람은 텔레비젼 광고에서 우연히 봤거나,
혹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끼는
욕망을 중심으로 삶을 꾸려나간다.
그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돈이
얼마나 되는 가를 계산하고 모으는 방법을 추구한다.
그리고는 자기 계획보다 더 많은 돈을 갖지 않는 한,
자신이 항상 가난하다고 느낀다.

그 사람은 살아가면서 느끼는 그런 욕망들이 채워진다면
확실히 예전보다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 사람은, 현재의 삶의 객관적인 위치와
그가 가진 욕망이라는 환상 사이에서 돈이 그 거리를
충분히 메꾸어 주지 않는 이상, 항상 자신이 가난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가령, 그는 현재 백만장자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의 환상이 억만장자에 가있다면,
그의 마음은 항상 가난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돈을 단지 생활을 꾸려나가는 간단한 도구로써 바라보는 두번째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주머니 속에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보다
단지 1달러만 더 가지고 있어도 편안함을 느끼고,
만약 필요로하는 양보다 10달러를 더 가졌다면, 
사실상 자신이 부유하다고까지 느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삶에서 욕망을 중심에 놓고 행복을 만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돈을 헤아리거나 모으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자기가 필요로 할때 쓸 수 있는 여분의 돈을 조금 소유할 뿐이다.
비록 작지만 그가 가진 여분의 돈은
친근한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사는데 쓰여질 수도 있고,
혹은 생활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전혀 쓸데없는 곳에 써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소유한 약간의 돈만으로도 항상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감동시킬 수 있는 그 무엇에 든지 여유있게 남는 돈을 쓸 수 있는 거란다.

너도 알겠지만 이들 두 사람의 차이는
그들이 소유한 현실적인 부에 있는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가진 돈에 대한 철학과 관계된 문제란다.
그들은 정확하게 똑같은 양의 돈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생활상의 욕망에 이끌려서 자신이 지닌 돈의 가치를 측정하는 사람은,
그를 유혹하는 또 다른 욕망들이 끊임없이
계속 나타나고 존재하기 때문에 일시적인 행복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결코 완전히 행복해 질 수은 없다.
그렇지만 필요에 따라 자신이 지닌 돈의 가치를 측정하는 사람은
언제나 필요한 것들을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생활을 전반적으로 규제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렇게 해서 남은 돈은 미래를 위하여 저축을 할 수도 있고.

그러나 이런 간단한 공식에도 어두운 측면이 있단다.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갖추어야만 하는 필수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의식주, 그리고 더 말한다면,
이따금씩 생활에서의 약간의 즐거움과
기쁨의 순간들을 추구하기 위한 것들 말이다.
만약 너에게 꼭 있어야만 하는 이 생활의 필요들을
채우기 위한 돈을 넉넉히 얻을 수 없다면,
너는 결국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가 없을 게다.
더욱이 절대적인 최소한의 재정적 요구를 무시해온 사람들은
자기가 먹을 것조차도 소유하지 못했다는
혹은 그의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다는
무능력에 대한 주위로부터의 학대의 무게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네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들을 마련하기 위한
적당한 돈을 소유하지 못했을 때는, 그로 인해
실망과 분노가 급속히 발생하기 때문에 오히려 돈에 대한 관심이
네 생활의 중심부를 장악하게 되는 거란다.

네가 그렇게 되길 바라지는 않지만 만약 그런 사태가 발생한다면,
너는 가능한대로 빨리 좌절과 분노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소수의 사람만이 그런 실망과 분노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고,
더 적은 수의 사람만이 실망과 분노를 지혜롭게 삭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진 사람들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라도
한때 그들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었다면,
그들은 어려웠던 순간들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예전의 그런
암울한 절망과 격분의 느낌을 또 다시 겪지는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었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힘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가장 하찮은 생각조차도 가질 수 없다.
그들이 보는 건 가난에 빠진 사람들이
분노하고 절망하는 한 인간이라는 게 전부일뿐이다.
그리고 분노하고 좌절하는 사람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도우려고 생각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런 사람과는 부딪치지 않고 피해가려고 한다.

네가 숨막힐 듯한 가난으로 인해 실망과 분노로 채워진 자신을 발견한다면,
너의 희망과 대화함으로써 하루 빨리
실망과 분노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만 한다.
스스로를 통찰해야 하고 자기 가치에 대한
네 스스로의 긍정적인 감정을 발견해야 하며,
네가 할 수 있고, 아마  전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밖으로 나가 기쁘게 너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찾아 그 믿음을 전해야만 한다.

세계는 실망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거라.
또한 세상에는 수적으로는 적으나 도움을 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에게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는 반응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배고픈 사람을 본다면 그들은 단지 그를 먹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좌절을 딛고 일어설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들은 그의 가능성에 따라 그를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파산하여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너는 분노하거나 배고픈 사람이 아니라
실의를 극복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단지 실망하고 배를 채울 필요를 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너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뿐이다.
그리고 그때 네가 얻을 수 있는 도움이란 단지 그들이
너무 많이 가졌다는 죄의식을 벗기에 충분한 정도뿐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보여 준다면,
사람들이 너를 돕는 일을 훨씬 더 좋아하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허약하거나 좌절하는 사람을 돕기보다는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자신감에 찬
강인한 사람을 돕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가난에 대한 실망을 물리치기 위해서 누군가로부터 도움의 손길이 찾아올 때,
너의 유일한 친구는 일이라는 걸 명심하거라.
거지에게 주는 식의 기부는 단지 순간적인 육신의 감각을 위해 돕는 것이다.
그런 기부로는 네가 느끼는 분노와 무기력을 다스릴 수 없다.
일은 - 어떤 일이든 - 실망이 몰아냈던 내적 가치의 감각을 다시 살려준다.
대단치는 않을지라도 일은 성장을 위한 골격을 세우며,
네가 어떤 더 나은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의 설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어떤 가난의 짐이 너에게 지워진다면,
돈을 찾지 말거라. 일을 찾거라.
돈이란 일을 함으로써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고,
너를 질식시키던 분노와 좌절은 일을 통해 점차 지배력을 잃어갈 것이다.
그때 너는 다시금 네 생활의 중심부 밖에서 돈을 다루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너는 네가 의미있는 삶을 살도록 돕는 도구로써,
돈을 올바른 위치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압도적인 가난과 결핍만 이 돈을 네 생활의 중심에서
밀어 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거라.
가난의 학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돈을 헤아리는 사람들은,
돈이 가난한 사람의 목을 조르는 만큼
부자들의 목도 조른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돈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 네가 단순히 돈 그 자체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다면 -
어떤 면에서 돈은 추상적 원칙들에 의해 조절되는 추상적 개념이 된다.

돈은 이익과 이자를 계산한다.
너는 어디에 어떻게 돈을 투자할 것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너는 얼마나 많이 벌었는가 하는 양에 따라 세금을 내야한다.
그러한 돈은 주인의 생활과 함께 하는 소유물이 된다.
돈은, 보통사람은 결코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는
경제적 폭력의 비바람에 맞서 싸우는
가지들과 뿌리들과 씨앗들을 성장시킨다.
너는 마치 정원사처럼 돈을 돌보아야 한다.
그리고 비록 네가 돈이 있기 때문에
돈에 대한 걱정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더라도,
돈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일은
네 마음에서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너는 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가난의 폭력을 극복하는 것과
부의 폭력을 극복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과연 어떻게 맞출 것인가?
이에 대한 확고하고 고정된 원리들은 없단다.
그러나 네가 기억해야만 하는 약간의 기본적인 지침은 몇 가지 있다.

첫째는 부자가 되는 게 어떤 것인가를 배우는 만큼
가난하게 된다는 게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한다는 점이다.
넓은 의미에서, 재정적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변화되는 환경의 영향에 따라 그때그때 균형잡힌 행동을 취하고 있는 사람이다.
너는 언제든지 몰락할 수 있다.
몰락했을 때 너는 필시 가난에 봉착하게 된다.
만약 네가 가난하게 되는게 어떤 것인지를 미리 알고 있다면,
너는 예전과 다름없는 품위와 너그러움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어떤 큰 재정적 재난이라도 흔들리지 않는
네 마음의 평안을 깨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가난하게 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은, 생활에서 필수적인 것은 무엇이고,
단지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를
구별하는 정확한 직관을 개발한다는 걸 의미한다.
가난하게 되는게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은
네 생활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를 안다는 걸 의미한다.
예를 들면 네 주위의 물건들을 어떻게 수리하고 유지시킬 것인가?
어떻게 현명한 구입을 할 것인가?
구입할 수단이 없다면 전혀 구입하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생활 속에서 돈이 없어도 간단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등등....

가난하게 되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안다는 것은,
소유물 속에서 부족한 걸 더 채운다는 것이 아니라
네가 현재 소유한 것의 정확한 용도와 의미가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네 생활을 돈에 근거하지 않고도
어떻게 독창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를 안다는 걸 의미한다.

 

이러한 것들은 언제든지 배워둘 가치가 있는 교훈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가난이 왔을 때
네가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교훈이다.
가난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지 않았던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여전히 가난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길 계속 고집한다.
그들을 부자인 것처럼 가장하고, 가장하기 위해 돈을 빌리고,
잘못된 허영심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가난을 결핍으로 본다.
그들은 가난의 미덕들과 지혜를 결코 볼 수 없다.
그들은 나눔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는 일이나,
혹은 자기 삶에서 의미있는 것과 필요없는 것을
가려내기 위한 기회로써 가난을 이용하지 못한다.
그들의 삶에 가난이 찾아왔을 때
그들은 가난으로부터 숨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 주위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난을 숨기기 위한 일을 행한다.
그들에게는 돈이 곧 자존심이다.
그래서 돈을 잃는다는 것은 곧바로
그들의 인격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만약에 가난이 찾아왔들 때 가난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운다면,
가난은 너를 더 현명하게,더 강하게,
그리고 네 자신을 더 믿을 수 있게 만들 것이다.
가난은 너의 단순한 생활상의 재능들에 대해
더 많이 감사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가난은 이 감사들을 네 가슴속에 잘 새겨둘 것이다.
만약 아직 그렇지 않다면, 너는 가난의 규율에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는 가난이 네게 강요하는 삶의 제약과 구속들을 포용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언제든지 배워두지 않는다면,
네가 아무리 많은 돈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영원히 가난의 범주 내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가난하게 사는 게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돈의 결핍이 결코 너의 삶을 파멸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돈에 대한 두번째 지침은, 재
정적 행복의 가장 큰 적은 가난이 아니라 빚이라는 점이다.
세상에는 빚이 가져다 주는 많은 이점들에 대해 말하는
그럴듯 하게 치장된 큰 폭력이 있다.
너로 하여금 돈을 빌리도록 하기 위해서,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그런 행위를 합리화 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매력있고 신빙성 있는 논거와 권유들을 제시할 것이다.
그들은 오늘의 대가가 내일의 만족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잘못은 거기서 유래한다.
즉 네가 현재를 변상하기 위해 미래를 저당잡히는 것에서
커다란 오류가 발생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네 스스로도 결코 원치 않았던 일일 것이다.

너로부터 이동의 자유와 선택의 창조성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빚은 너의 적이 된다.
그렇다,
빚은 너를 투자할 것을 허락한 것이기 때문에 너를 돈으로 바꿔줄 수 있다.
그렇다,
빚이 현재의 너를 도울 수는 있다.
그리고 빚은 네가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거라고 희망하는것 때문에
현재 네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수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빚은 분명히 너의 미래를 구속할 것이다.
그리고 네 미래가 제한되었을 때, 그때부터 너의 희망은 죽어가기 시작한다.
너는 네 과거를 지불하기 위해, 네 생활을 돈을 버는 일에 위탁했다.
그리고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는 네 정신은 그로 인해 멈춰버리게 된다.
네 삶을 빚으로부터 멀리 물러나게 하거라.
끝없는 지평선을 향하여 빚이라는 무거운 바퀴를 밀며
살아가는 꿈과 가능성을 상실한 사람보다 더 슬픈 모습은 없다.

빚이 없어진다는 것, 그래서 주머니 안에 필요로 하는 것보다
단지 1 달러를 더 가졌기 때문에 발걸음이
가벼워지는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이냐?
네가 빚이 없을 때, 그리고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환상들에 의해
이끌려 살지 않을 때, 돈은 너를 지배할수 없게 된다.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탐색에 있어서, 너는 돈에서 자유롭게 된다.

돈에 대한 세번째 지침은, 돈은 돈을 축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로부터는 멀어지고
돈을 나누는 사람들에는 다가가는 성질이 있다는것이다.
만약 네가 축재자 중의 한사람이라면,
너는 마음속에 잠겨진 금고를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금고에서는 아무 것도 나갈 수 없듯이 아무것도 들어올 수 없다.
너는 돈을 빼내거나 집어넣어야 할 때,
금고를 빠르게 열고 닫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할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자유롭게 소통되는 신선한 공기는 기회와 필요,
그리고 우리 인간의 모든 복잡한 상호작용의 요소들이
혼합된 곳에서는 점차 숨막히는 태도로 변화된다.
부유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의미없는 통제로 대체되게 된다.
너는 네가 갖고자 희망하는 것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해 네생활은 끊임없이 돈을 헤아리는 계산의 과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너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보이지 않고 뜻하지 않은 일들이 네가 보호하고자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던 돈을 서서히 빼내가기 시작할 것이다.

만약 네가 나누는 사람이라면, 돈은 자유롭게 움직일 것이다.
나누는 것이 낭비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낭비는 단지 돈이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보는 흥미 이외의
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고 돈을 아무 거리낌 없이 마구 쓰는 것일 뿐이다.
나눈다는 건 너에게 돌아오는 것이 있을 건가에 대한 기대없이도
다른 사람이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너의 돈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네가 그렇게할 수 있다면, 너는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과
서로 돕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상호작용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사람들은 네가 보여준 친절에 대해
자신들의 친절을 되돌려 주기를 원할 것이다.

나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매개로 하여
서로 교감을 소통하는 또 다른 언어와도 같다.
같은 말을하는 사람은 서로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만약 네가 돈의 보호와 축재를 말하는 사람이라면,
돈이 보호와 축재의 언어라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 포함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색안경을 낀 눈으로,
그리고 주먹 쥔 손을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의심이 그들의 일반적인 가치가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돈은 나누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너는 자신들의 돈이 나눔의 언어라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나눔의 언어가 소통될 것이고,
세계는 가능성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으로, 네가 축재자라면
행복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축재자들은 상실의 고통을 결코 참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돈은 돌고 도는 것이며, 사람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교환을 위한 기본적 수단으로서의 돈의 본질이다.
축재자들은 돈이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반면에 나누는 사람들은 가난할 때조차 돈이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는 것에서 선을 보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항상 부자이다.
모두는 아니지만 대개 나눔의 친절은 나눔의 정신이 된다.
그리고 돈의 자유로운 통행은 모든 관계를 풍요롭게 하는 상호간의 선물이 된다.
자신들의 주머니로부터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기꺼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돈이 멀리 가는 것을 이해하는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도울 수 있는데,
이것이 돈에 대한 또 하나의 지침이다.

어떤 거래에서든 단 한푼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달려드는 사람들은 그들의 승리에 대한 필요 때문에 폭력적이게 된다.
어떤 거래에서든 그들은 자기가 판단한 가치보다
물건을 너무 비싸게 구입했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물건을 팔 때 똑같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현재의 이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미래를 위해 돈을 쓸 수 없다.
때로는 미래를 위해 돈을 쓸 필요가
마지막 한 푼을 남길 필요보다 훨씬 중요한 데도 말이다.

나는 옛날에 우리집 근처에 살고 있던 한 노인을 기억한다.
그는 거의 가난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매우 인색한 사람이었다.
그의 생계수단은 개집을 만들어 파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사람집을 위해서도 거의 돈을 쓸 수 없는 형편이었고,
개집을 위해서는 더더욱 돈을쓸 수 없는 매우 가난한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개집을 85달러는 받아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었고,
85달러는 근처에 살던 사람들
이 개집을 사기 위해 지불하기에는 너무나 큰 액수였다.
한 때 나는 개집이 필요했었고
그래서 개집의 가격을 알아보기 위해 노인을 찾아갔다.
나는7 0달러를 지불할 수 있다고 노인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 노인은 퉁명스럽게
"85달러가  내 가격이요"라고 말하고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꽝 닫아버렸다.

그 집에서 쫓겨나듯이 나온 나는 개집이 잔뜩 쌓여있는 그 집의 마당을 보았다.
그집은 낡아서 거의 쓰러져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점점 더 가난하게 살게 될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는 개집의 가격을 내리지 않았다.
노인의 삶은 자신의 마음속에 정한 가치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전까지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 개집의 노예였고,
자신의 주위에 가난이라는 단단한 벽을 세우고 있었다.
결국 그는 개집에 둘러싸여 죽었고,
개집들은 경매에 붙여져 노인이 불렀던 가격과는
엄청난 차이가 나는 한 개당 5달러에 팔리게 되었다.

그 노인의 삶에서 교훈을 얻거라.
개집들이 그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개집에 자신을 묶어 둔 것이다.
그 노인은  본래의 가치에 대한 자신의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자신의 개집이 사람들이 매긴 가치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지내왔다.
너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너에게 부여해 주는 가치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
만약 네가 과거로부터, 특히 손해본 과거에서 기꺼이 벗어날 수만 있다면,
너는 자유로와지고 너의 세계는 성장을 계속할 것이다.
만약 네가 어떤 방해되는 가치를 붙잡을 것을 고집한다면,
너는 그 물건의 소유에 의해 포박될 것이다.

선의 실행은 노인이 믿는 가치대로 지불함으로써
그가 개집을 사간 사람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일 게다.
그때 그 노인은 개집의 진정한 가치가 얼마인가를 새삼 발견하고
개집에 대한 그의 가격이 얼마나 독단적이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네가 돈에 대한 명확성을 갖는 것에 대해 크게 염려하지는 않는다.
나는 단순히 돈이 공기처럼 유동적으로
왔다갔다 한다는 걸 알게 되기를 원할 뿐이다.
네가 만약 돈은 항상 위로 올라갈 뿐이며 결코 내려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너는 지상에서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특징짓는 들여마시고 내쉬는,
그리고 왔다갔다 하는 자연의 리듬에 대항하여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일게다.
너의 손을 통하여 빠져나가고 있는 돈은
너에게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네 삶의 진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인간성의 성장과 주위 세상에 대한 관심이 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네가 항상
가장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할 것을 주장한다면,
돈을 얻는 방법에 대해 알아야만 하는 마지막 원리가 한가지 남아있다.
나는 돈이 '인지의 속성'을 가진다고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은 돈이 주인을 알아본다는 말이다.
1센트짜리 동전들 사이에서 일하는 사람은
1센트짜리 동전을 얻거나 잃거나 한다.
지폐들 사이에서 일하는 사람은 지폐를 얻거나 잃는다.
백 만달러 사이에서 일하는 사람은 백만달러를 얻거나 잃는다.
만약 정말로 돈을 벌기를 원한다면,
너는 네가 원하는 등급에서 돈이 교환되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한다.
1센트짜리나 10센트짜리 동전을 모아
백만장자가 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 옛날 끼니를 때우는 생존조차 힘겨웠던 시절의
'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강박관념 속에서 먹지도 쓰지도 않고
오직 모으는 일로만 삶을 지내왔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삶은 지금에 있어서는 전혀 살만한 가치가 없는 삶이다.
만약 네가 백만장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너는 백만장자들과 함께 교제하기 위해
필수적인 규율들과 기술들을 더 잘 배워야 한다.
그리고, 너의 재능을 백만장자들 사이에서 발휘하기 위해 사용하거라
몇달러를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백만달러를 벌고 있는 사람들이 재능이더 많은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백만장자들은 돈이 큰 규모로 움직이는 곳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재능은 그들이 받아들인 교환의 등급에서 보상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네가 돈을 벌기를 원한다면, 너는돈 근처에 있어야 한다.
돈은 돈이 모이는 곳으로 간다.
돈이 너에게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돈이 모이는 장소로 찾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비록 네가 돈과 친숙할 것을 선택했을지라도,
너는 언제든지 빛나는 진실을 유지할 필요가있다.
중요한 것은, 돈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돈이 너를 통과하여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잘 건너가게 하는가이다.
돈은 단지 일용품이며 교환을인정하는 추상적 개념일 뿐이다.
돈에게 생명을 주고 의미를 주는 것은 바로 교환의 정신이다.

위대한 자선가는 - 부자든 가난뱅이는 -
세계에 빛을 가져 오기위해 돈을 사용한다.
위대한 축재자는 - 부자든 가난뱅이든 -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문을 닫기 위해서 돈을 사용한다.
주는 사람, 그리고 나누는 사람이 되거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예기치 않았던 어떤 방식으로
그밖의 다른 일들은 모두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