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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다시 만나리 / 이외수

오늘의 쉼터 2011. 5. 5. 00:54

 

언젠가는 다시 만나리 / 이외수

 

 


When I Am Dead, My Dearest by christina Rossetti
When I am dead, My dearest, I shall not see the shadows,
Sing no sad songs for me; I shall not feel the rain;
Plant thou no roses at my head, I shall not hear the nightnggale
Nor shady cypress tree; Sing on, as if in pain;
Be the green grass above me And dreaming through the twilight
With Showers and dew drops wet; that doth not rise nor set,
And if thou wilt, remember, Haply I may remember,
And if thou wilt, forget. And haply may forget.


 

"형씨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한 번 더 성냥 불좀 빌립시다."

 

이윽고 사내가 다시 청년 곁으로 다가섰다.

30대 중반정도의 사내였다.

황토색 세무잠바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황토색 세무잠바는 이제 적당히 낡아 있었다.

그래서 군데군데엔 버짐처럼 털이 빠져 있었고

황토색도 약간의 그을음이 끼인 상태로 퇴색해 있었다.

바지엔 전혀 주름이 잡혀 있지 않았고 구두도 완전히 무광택 상태였다.

얼굴엔 턱수염이 약간 자라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딘지 모를게 초췌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의외로 사내의 행동이나 말투는 자연스럽고 안정감 있는 분위기를 풍겨 주고 있었다.

청년은 스물 대여섯 살 정도,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 이었다.

우유에다 커피를 아주 조금만 타서 말들어낸 듯 한 색깔의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 바바리코트는 아주 잘 손질되어져 있었다.

 

사내는 청년에게 벌써 일곱 번이나 똑같은 부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청년에게 처음으로 성냥불을 부탁했을 때 사내의 담뱃갑도 처음 개봉되어졌었다.

따라서 그 담뱃갑에는 아직도 열 세 번이나 청년에게 성냥불을 빌어야 할 담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지금까지 전혀 귀찮아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었다.

태연히 사내에게 성냥을 켜 주었었다.

물론 사내는 그 때마다 고맙다는 인사말을 잊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맙습니다. 한대 하시죠."

 

사내는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버릇처럼 청년에게 담뱃갑을 내밀었다.

 

"정말 못 피웁니다."

 

그리고 역시 청년은 그 담배를 사양했다.

여기까지는 일곱 번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장면이 되풀이였다.

마치 똑같은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담배는 충분히 있는 데 성냥이 없다는 것은てててててて"

 

여기서 부터가 언제나 조금씩 달라지는 부분이었다.

 

"제게 있어서는 가장 절망적인 사건입니다."

 

이제 대합실 안은 완전히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사내와 청년 외에는 쥐새끼 한 마리도 얼씬 거리지 않았다.

대합실 벽에 붙어 있는 안내판에 의하면 여름이 끝나고부터

이역은 하루에 네 번밖에는 열차를 운행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네 시간 간격으로 네 번이었다.

앞으로 도착 예정인 열차는 세 번째의 열차였고 세 시간 정도는 더 기다려야만 될 것 같았다.

그 때까지 역은 완전히 폐쇄 상태에 놓이게 되는 모양이었다.

매표구도 개찰구도 폐쇄되어져 있었다. 매점도 난로도 폐쇄되어져 있었다.

모든 것은 춥고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열차가 피난민들을 모조리 싣고 떠나버린 전쟁 중의 텅 빈 역 같았다.

앞으로 영영 열차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형씨. 이 대합실은 이상하게도 시체실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군요, 안 그렇습니까?"

 

사내가 동의를 구하는 듯한 어투로 청년에게 말했다.

그러나 청년은 그저 묵묵히 대합실 유리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는 한 여자가 죽어 있는 시체실에서 밤을 꼬박 세워 본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시체실에서 느낀 것은 공포입니다.

시체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공허에 대한 공포입니다."

 

유리문 밖에는 우중충한 건물 하나가 녹슨 폐선처럼 정박해 있었다.

화물 창고였다.

그리고 그 화물 창고 뒤로는 몇 그루의 낙엽송들이 펜화처럼

앙상한 가지를 뻗고 회색 하늘로 자라올라 있었다.

 

흐린 날씨였다.

 아직 한 번도 눈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오늘 오후 한때쯤에는

잠시만이라도 희끗희끗 눈발이 흩날릴 것 같은 예감이었다.

화물 창고 곁으로는 멀리 시가지로 통하는 도로 하나가 뚫려 있었다.

그것은 비포장 도로였다.

그리고 비포장 도로는 주변의 건물들이 한결같이 우중충해 보였으므로 더욱 선명해 보였다.

도로변 공터 한 군데를 자리잡아 며칠 동안 애환의 깃발들을 나부끼고 있던

뜨내기 서커스단 하나가 이제 그만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천막이 걷히고 깃발들이 뽑히고 앙상한 뼈대들만 남아 있었다.

 

"형씨. 이 대합실에서도 바다가 보입니까?"

 

함께 유리문 밖을 내다보고 있던 사내가 느닷없이 청년에게 물어보았다.

 바람이 심한 모양인지 역 주변의 우중충한 풍경 위로 맥없이 날아 올랐다가 떨어지는

휴지조각들. 마치 빈 껍질만 남은 새들 같았다.

 

"바다는 저쪽 언덕 너머에 있어요.

이 대합실에서는 보이지 않아요.

벌써 오래 전에 문을 닫았지요."

 

청년은 대답해 주고 나서 유리문 앞을 천천히 떠났다.

이제는 사내 혼자 유리문 앞에 붙어 서서 망연히 바깥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몹시 추운 모양이었다.

간헐적으로 어깨를 떨고 있었다.

청년은 대합실 한복판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난로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끄집어내어 난로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따뜻합니까? 나는 불이 없는 줄 알았는데ててててててて"

 

어느새 사내가 곁으로 와서 놀랍다는 표정으로 청년에게 말했다.

 

"절명했어요."

 

청년은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다.

청년은 이제 자주 대합실 벽에 부착되어 있는 시계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바로 거기서 거기였다.

시간조차도 추위에 굳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춰서 미치겠군. 뭔가를 좀 태웠으면 좋겠는데."

 

사내는 대합실 안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만약 사내가 뜻한 바 있어 단 몇 시간만의 따뜻함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겠다고

결심만 하면 땔감이 될만한 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유료 화장실의 문짝이며 기다란 나무 의자, 벽에 붙어 있는 각종 선전 포스터며 안내판,

그것들은 적어도 두세 시간 정도는 충분히 훈훈함을 포식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형씨, 형씨께서는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 같은데

이미 약속 시간이 지나버린 것은 아닌지요?"

 

사내가 말했다.

 

"상관 없어요. 아직 한 번도 제 시간에 나타나 준 적이 없었으니까"

 

청년은 다시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아까 열차에서 내려 잠시 이 대합실에서 저는 형씨를 유심히 관찰해 보았지요.

형씨는 분명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음에 틀림없어요.

미친 듯 사람들을 헤집고 다니면서 누군가를 찾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읍니다.

하지만 제가 타고 왔던 열차에는 형씨가 기다리던 사람이 없었읍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두번의 열차가 더 남아 있어요."

 

청년은 자신없는 어투로 대답했다.

 

"다음 열차는 앞으로 무려 세 시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할겁니다.

 이건 너무 무모한 것이 아닐까요?"

 

"하는 수 없어요. 열차가 도착하든 안하든 저는 여기 있어야만 안심이 되니까요."

 

"이해할 수 없군요."

 

"그러시겠죠. 단지 저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니까."

 

"기다린다는 것은 떠난다는 것보다는 한결 피가 마르는 일입니다.

형씨 우리 어디 가서 술이라도 왕창 퍼마십시다.

색시집이 좋겠어요.

 거시서 언 살이나 풀면서 한 잔 캬아 하는 게 어떻겠소.

내가 사지요.

 더 이상 추위 때문에 견딜 수가 없구만."

 

"고맙습니다만 저는 마지막 열차가 도착할 때까지는 절대로 이 역을 떠날 수가 없어요.

혼자 갔다 오세요."

 

청년은 말해 놓고 나서 힘없이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약간의 자조가 서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직도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물론이지요.

하지만 저는 어제도 여기서 기다렸고 지난달에도 여기서 기다렸고 작년에도 여기서 기다렸어요."

 

"그럼 아무런 확신도 없이 기다리고 있단 말이오?"

 

"아니죠.

오늘은 확신이라는 게 생겼어요.

새벽에 전보를 받았으니까요.

버릇대로 차임벨 소리를 들으며 역으로 나가 보려고 하는 데

하숙집 아줌마가 전보를 받아두었다가 전해 준 거죠.

오늘 두 번째 열차 편으로 오겠다는 내용이었어요."

 

"그건 내가 타고 온 열차 아니오.

그 열차에 형씨가 기다리던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알았는데."

 

"없었어요."

 

"참 몹쓸 사람이로군. 이렇게 추운 날 난롯불도 없는 대합실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게 하다니."

 

사내는 무심코 난로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난로 속에는 꽁초와 휴지와 깡통 따위가 가득 들어 있었다.

올 들어 한 번도 불 맛을 보지 못한 난로 같았다.

그것은 차라리 쓰레기를 위한 냉동실이었다.

"형씨가 기다리는 것은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여자ててててててて."

"만약 다음 열차로 오게 된다면 나도 곁에서 그 표정을 한 번 보고 싶어지는군."

 

"미인이죠.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지만."

 

그리고 한참 동안 사내와 약속이나 한 듯이 침묵속에 빠져버렸다.

그 침묵 속에서 이따금 바람의 발길질에 걷어채인 대합실 문이 비명을 지르곤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대합실에서 왜 떨고 계시는 지 모르겠군요."

 

한참 후 청년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추운데 그럼 땀을 흘릴 수가 있겠소."

 

"그게 아니라 누구를 기다리고 계시느냐는 거죠."

 

"뭐 누구를 기다린다기보다 좀 색다른 볼일이 있어서 이 대합실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색다른 볼일이라뇨. 그럼 혹시 수사기관에서 나오신 분이신가요?"

 

"아무렇게나 생각하시오.

 아직은 형씨한테 솔직히 말해 주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으니까.

 그보다도 형씨 이제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구만,

어디 가까운 식당에라도 가서 훈훈한 국물이나 좀 훌훌 들이키고 옵시다.

이제는 내장까지 다 떨리고 있군요. 도저히 안 되겠어요"

 

"정말 죄송한데요.

하지만 저는 마지막 열차가 도착할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하겠어요.

이건 제 병입니다. 혼자 갔다오세요."

 

"하는 수 없군. 그럼 나혼자라도 갔다 와야지."

 

사내는 잔뜩 몸을 움추리고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나갔다.

 어딘지 모르게 착잡해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거의 문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문득 무엇인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사내가 홱 등을 돌렸다.

그리고 뚜벅뚜벅 되돌아 왔다.

 

"저어 형씨. 거듭 죄송합니다만 성냥불을 한 번 더 빌릴 수 없겠읍니까?"


 

사내는 시내로 뻗어져 있는 도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이 부근 어디에 바다가 있는 것일까. 맵고 쓰린 바람 속에는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

사내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더욱 걸음을 빨리 하고 있었다.

서커스가 있던 공터는 이제 황량하게 비어 있었다.

어느새 완전히 떠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공터 바닥 가득히 에는 그들이 남기고 간 애환의 잔해들처럼 찢긴 입장권이며

신문지 조각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 다니고 있었다.

 

"이런 날씨는 정말 미치겠군.

 꼭 바람이 뼛속에서 분단 말씀이야.

역시 여자가 하나 있어야 겠어 "

 

사내는 혼자 소리내어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치 스스로를 위로해 주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사내는 얼마 더 걷지 않아서 식당 하나를 발견했다.

비교적 허름한 식당이었다.

처마 및 붉은 휘장에는 설렁탕, 곰탕, 백반들이 곤두박질치고 있었고

벽을 뚫고 나와 있는 연통에서는 아른아른 불 기운이 어리고 있었다.

식당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그러나 난로만은 벌겋게 익어 있어서 홀 안에 훈기가 넉넉했다.

톱밥난로였다. 날로 곁에 놓여 있는 나무상자 가득히 톱밥이 하얗게 건조되고 있었다.

난로 가까이의 탁자위에 엎드려 낮잠을 자고 있던 중년 여자 하나가 인기척을 느꼈음인지

흠칫 고개를 한 번 쳐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잠 속에서도 먹이가 가까이에 와 있음을 육감으로 느낀 들짐승이

마침내 퍼뜩 눈을 뜨는 모습과 흡사해 보였다.

여자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먹이를 게슴츠레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방금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일까.

 여자는 파헤쳐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풍만해 보였고 육감적이었고 난로에 따뜻하게 덮혀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졸음이 덜 가신 목소리로 여자는 난로 가까이의 탁자 하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다음 상체를 서서히 뒤로 젖혔다.

뒤로 젖히면서 인간으로 태어나 비로소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릴수 있는 데까지

한 번 벌려 볼 기회가 왔다는 듯 숨관과 허파를 활짝 열어 젖히고

네 활개를 최대한 넓게 펼치며 거대한 하품을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사내는 설렁탕 하나를 주문했다.

 

"김씨, 설렁탕 하나 있어."

 

여자는 주방을 향해 소리질렀다.

 

"알았어."

 

퉁명스러운 남자 목소리.

 

"또 무슨 심통이 났네."

 

여자는 입을 비죽거렸다.

 

"장사 참 잘 된다.

오늘 겨우 설렁탕 두 그릇에 백반이 하나. 빨리 서방을 하나 들여 앉혀야지.

도대체가 한 가지도 되는 일이 없다니까."

 

누구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린 듯 목소리가 필요 이상 커져 있었다.

 

"못 살겠네. 이년의 팔자라니."

 

여자는 노래하듯 읊조리며 의자 하나를 난로 앞에다 끌어다 놓고

몸 전체로 톱밥을 푸스스 부어 넣었다.

 

"바깥 어른께서 댁에 계시지 않는 모양이지요."

 

사내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바다가 잡아 먹었지요."

 

여자는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다.

고양이가 생선을 잡아 먹었지요라는 말처럼 그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말 같았다.

속수무책의 일인 것이다.

체념밖에는 없는 것이다.

 

"살아가시기가 무척 힘드시겠습니다."

 

역시 사내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이 바닥에 어디 과부가 나 하나뿐 인가요.

온 동네가 반이 과부밭이죠.

과부가 한 집 건너 한 사람씩 열리다시피 했어요."

 

"모두 식당을 차리지는 않았을 테고, 그래 그분들은 또 어떻게들 사십니까."

 

"어라 이 손님 좀 봐.

 하나 따 갈 욕심이 생기는 가부지. 어떻게 살긴 어떻게 살아요.

 과부처럼 살지. 허벅지에 바늘 자국이나 내면서 말이우.

짓궂기는. 아, 남자 생각 날 때마다 미운 살 바늘로 찌르면서 견디는 거지."

 

옷차림이나 말씨로 보아 도시 물을 많이 먹은 여자 같았다.

 때가 완전히 벗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름에는 바닷가에서 싱싱한 애들 수영복 차림으로 갖다 앉히고는 술장사를 해요.

한 철 벌어서 일년을 사는 거죠. 이까짓 식당 전봇대 밑에서 개미 한다리 들고 오줌싸기지."

 

사내가 어디 다른 곳에서 많이 본 것 같다고 넘겨짚듯 말하자,

아마 거기서 보았을 거라며 쉽게 껍질 하나를 벗어 던졌다.

 

"설렁타앙--"

 

주방에서 신경질적인 남자 목소리가 설렁탕 그릇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꼴에 남자랍시고."

 

여자가 입을 비죽거리며 일어나서는 몇 가지의 반찬과 설렁탕 그릇을 날라다 놓았다.

사내는 잘 먹겠노라고 건성을 말해주고는 숟갈질을 시작했다.

 

"아줌마, 나 좀 봐요."

 

주방 창구에서 얼굴을 내밀고 김씨라는 남자가 여자를 부르고 있었다.

여자보다 열 살 정도나 나이가 적어보이는 얼굴이었다.

 

"뭘 그까짓 걸 가지고."

 

"남자 손님만 오면 꼬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와 불만조의 남자 목소리가

꼬리를 불확실하게 지우면서 주방 밖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 식당 아니면 어디 먹고 살 데가 없는 줄 아는 모양이지만."

 

"툭하면 그놈의 나간다 소리, 이그 이젠 듣기조차 지겨워."

 

"손님한테 고부 타령하는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고."

 

"그래 맘대로 해봐, 나가든지 말든지."

 

말다툼은 설렁탕의 반 정도가 줄어들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여자가 깐죽깐죽 약을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좋아 박살내 보자구."

 

남자가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우악스럽게 주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주방옆에는 통로가 하나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힐끔 통로 쪽을 한 번 곁눈질해 보고는 흥 하는 코웃음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설렁탕을 먹고 있는 사내 쪽으로 걸어 왔다.

 

"손님 오해 하시겠네."

 

월급을 좀 늦게 줬더니 별 당치도 않은 걸 가지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다는 거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난로에서 톱밥 타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여자는 다시 톱밥 한 부삽을 난로 속에 퍼 넣었다.

그리고 자꾸만 통로 쪽에다 신경을 쓰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지가 가면 어디까지 갈 거야, 다람쥐 쳇바퀴 돌리기지."

 

쇠꼬챙이로 난로의 통기 구명을 뚫어주며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가,

 

"이 바닥에 과부가 너 하나뿐이더냐 이거지만 세상 과부 다 만나봐라. 나 같은 년 있는가."

 

문가 속 있는 말로 자위를 해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 몸을 일으키며 이렇게 말했다.

 

"왜 잠잠하지, 정말로 짐을 싸는 모양이구나."

 

여자는 마치 짐 싸는 걸 거들어 주기라도 해야겠다는 듯,

 

"좋다구, 얼마든지 싸보라구."

 

쇠꼬챙이를 놓고 통로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내는 침착하게 그리고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도 모두 깨끗이 비우고는

만족한 얼굴로 빈 설렁탕 그릇을 옆으로 밀어내었다.

그리고 난로 위에서 허연 김을 내뿜으며 헐떡거리고 있는

주전자를 들어다가 물 컵에 따르었다.

사내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물을 식혀 마시고 있었다.

포만감에 처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후 사내는 빈 컵을 식탁 위에다 내려놓고 실내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요의라도 느낀 모양이었다.

아까 사내와 여자가 차례로 사라져 들어간 통로를 향해 빨강색 페인트의 화살표

하나와 함께 <화장실>이라는 세 글자가 오줌을 흘리면서 엉거주춤 걸어가고 있었다.

사내는 일어섰다. 그리고 그리로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화장실은 통로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통로 속에는 두개의 방문만 발견되어졌고

그 방문 위에는 4호실과 5호실이라는 방 번호가 적혀 있었다.

통로를 다 빠져나가니 안채가 나왔다.

화장실은 안채의 마당 한켠에 제법 당당하게 지어져 있었다.

소변을 보는 것은 따로 칸막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변기는 없었다.

소변기 대신 PVC파이프 하나가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사내는 칸막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소변을 똑바로 누시오>라는 경고문을 읽었다.

그리고 그 경고문대로 이행하기 위해 약간 긴장하며 지퍼를 내리는 것 같았다.

곧 소변을 똑바로 누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볼 일을 무사히 끝내고 안채의 마당을 건너오면서였다.

사내는 내실쯤 되어 보이는 댓돌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두 남녀의 신발들을 보았다.

공교롭게도 여자의 구두 한짝이 옆으로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고

그 위에 남자의 구두 한 짝이 엎어져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방 안에서는 여자의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짐작이 갈 만한 일이었다.

이제 그 신음소리는 구름 속 높은 곳에까지 떠오른 여자의 몸이 떨어질 듯 떨어질 듯

현기증을 느끼며 위태롭고 절박하게 몇 번을 거듭해서 발하는 비명소리로 변해 있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구름속으로 깝북 자맥질을 해들어간 듯 잠잠해지더니

이윽고는 아뜩하게 떨어져내리고 있는 듯 절망적인 탄성으로 풀어져내리고 있었다.

사내는 떨어져 내리고 있는 여자를 떨어져 내리고 있는 대로 내버려 두고 홀 안으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벽에 붙어 있는 가격표들 중에서 <설렁탕 7백 원>을 확인했다.

사내는 호주머니에서 5백원 지폐 한 장과 두 개의 백동전을 끄집어내어

빈 설렁탕 그릇 밑에다 물려 놓았다.

그리고 주인 여자가 주방장하고 구름잡이를 떠나고 없는 식당 난롯불에다

충분히 전신을 구운 다음 톱밥 한 부삽을 퍼 넣어주었다.

 그 때까지도 주인 여자나 주방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구름 속에서 떨어지던 주인 여자가 다시 떠오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별이라도 한 개 따가지고 내려올 계획일까.

사내는 그만 식당을 나서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천천히 식당문을 열었다.

갑자기 맵고 차디찬 바람이 왈칵 사내의 몸에 덮쳐들고 있었다.

사내의 머리카락이 부스스 일어섰다.

멀리 역사가 보였다.

역사 주변은 썰렁해 보였다.

차들도 사람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폐사 같았다.

 사내는 잠깐 그쪽을 한 번 바라다보고는

이윽고 시내를 향해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선생님, 혹시 저를 기억하실 수 있으신지요?"

 

사내는 꽃집 주인에게 물었다.

마치 반가운 사람과의 해후 직전처럼 사내의 표정은 어떤 기대감에 차 있는 것 같았다.

 

"글쎄요. 원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그러나 꽃집 주인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옛날에 한 삼 년 전 쯤의 여름에 한 달 내내 이 집에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꽃을 사갔었는데요."

 

한 번 더 잘 기억을 더듬어 보시라는 듯 사내는 말했다.

꽃집 주인은 고개를 쳐들고 잠시 생각해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잘 모르겠군요."

 

그러다가 사내를 향해 다시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집에 와서 일년 내내 꽃을 사가시는 분들도 허다하니까."

 

사내는 약간 실망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꽃집 특유의 화분용 흙 냄새와 후끈거리는 열기 속에서 사내는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유리창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꽃들만 맑게 씻긴 모습으로 무더기져 있었다.

"꽃을 살 때는 언제나 여자 하나를 데리고 왔었어요.

머리카락이 탐스럽고 몸매가 아름다운 여자였읍니다.

 선생님께서 꽃을 어디다 쓰실 거냐고 물었을 때 백사장에 가서

모래로 두사람의 나체를 만들어 놓고 거기다 꽃을 장식해 줄 거라고 대답했었는데요."

그래도 모르시겠느냐는 듯 사내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허허 이거 죄송합니다.

기억이 날 듯도 하고 하여튼 반갑습니다.

그래 어떻게 다시 찾아오셨는지요."

 

꽃집 주인은 그러나 반가와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건성으로 그렇게 말했을 뿐인 듯한 표정이었다.

사내도 그것을 느꼈음인지 그만 입을 다물어버린 채 꽃들만 한 바퀴 휘둘러보았다.

그리고 동백꽃만 한 아름 사들고는 황망히 그 집을 나와버렸다.

사내는 다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그 한산한 거리에 사내만 한 아름의 동백꽃이 되어 떠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사내는 다방 하나를 찾아들었다.

거기서 사내는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이 다방에서 제일 고참 아가씨 하나를 옆자리에 불러 앉혔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비싼 차 한 잔을 시켜 준 뒤

한참 동안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마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여긴 D.J가 일년 열두 달에 도합 열두 번은 바뀌니까요.

그리고 주인조차도 바뀌었거든요."

 

설명을 다 듣고 나서 고참여자가 말했다.

사내는 다시 실망하는 표정으로 묵묵히 차를 마셨다.

 

"그런데 왜 그 D.J를 찾으시는 거죠."

 

"옛날에 내가 연애하던 여자와 이 다방엘 들어서면 즉시 우리가 좋아했던 노래를 틀어주었지.

그 며칠 동안에 그 D.J도 내가 사랑하던 여자를 자기도 모르게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했었는데てててててて. 만나서 할 얘기도 있고 또 문득 보고 싶어져서 들렀더니 없어졌군."

 

"이 꽃은?"

 

"쓸데가 있어서 샀지."

 

"한 송이만 줘요."

 

"나체한체만 주는 꽃인데 나체가 될 자신이 있다면 모두 다 드리지."

 

"돈 앞에서라면 몰라도 이까짓 꽃앞에서 나체가 되긴 싫어요."

 

"솔직해서 좋아요. 자 한 송이만."

 

사내는 그 고참 여자에게 꽃 한 송이를 꺾어 주고 다방을 나섰다.

한참 동안 사내는 더 거리를 헤매였다.

총포사에 들러 공기총을 쏘아보기도 하고 횟집에 들러 맥주도 한 잔 마셨다.

그러나 그 아무도 사내를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내는 이미 완전히 이 거리에서 잊혀져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겠지. 겨우 한 달 동안밖에는 머물러 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내 여자의 모습을 쉽게 잊어버린다는 건 이상하군.

그때는 모두들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이었는데."

 

사내는 중얼거리면서 홀로 거리를 다시 걷고 있었다.

바람이 아까보다 좀 심해져 있는 것 같았다. 사내는 포옹하듯 꽃을 감싸안고 있었다.

 

"따스해지고 싶군."

 

사내는 다시 중얼거렸다.

 

"가장 따스한 것은 역시 여자다.

그리고 내게 격이 맞는 여자는 물론 창녀라고 해야겠지."

 

사내는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택시 한대가 오고 있었다.

사내는 꽃을 안고 있었으므로 몸 전체로 그 택시를 세우는 시늉을 했다.

 

"여자네 집으로 갑시다."

 

택시에 오르자마자 사내는 추위에 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바다가 떼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몰려 와서는 허옇게 거품을 게우며 백사장 기슭에 엎어져 실신하고 있었다.

이따금 미세한 물방울 가루들이 바람을 타고 흩뿌려져 오기도 했다.

갈매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백사장은 텅 비어 있었다.

모든 흔적들이 지워져버리고 이제는 흰 모래만 남아 있었다.

멀리 껍질만 남아 있는 해수욕장 변두리 몇 채의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 따위들이

낡은 목선들처럼 방치되어져 있었다.

사내는 천천히 백사장으로 걷고 있었다.

사내의 한쪽 손에는 2홉들이 소줏병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사내는 이따금 고개를 젖혀 소주를 한 모금씩 삼키곤 했다.

이제 사낸에게는 꽃이 없었다.

끊임없이 바다의 등가죽을 칼질하는 바람,

한 겹씩 바다의 비늘이 일어서고,

바다의 신음이 뒤채이고,

 더욱 쓰라린 기억의 백사장,

 사내는 일체를 체념한 듯한 모습으로 혼자 펄럭거리면서 걷고 있었다.

한참 동안을 걷고 있었다.

이제 소줏병은 거의 다 비어 있었다.

바람의 어는 부분인가에가 닿을 때마다.

거의 다 비어 나간 소줏병이 낮은 모음으로 울음 소리를 흘리곤 했다.

잠시 후 사내는 남은 소주를 단숨에 모두 마셔 버리고 빈 병을 백사장 위에다 내버렸다.

그 빈 병은 작고 귀여운 여자처럼 버려져서 알몸으로 낮게 울고 있었다.

사내는 무너지듯 그 곁에 주저앉았다.

모래가 너무도 깨끗해 보였다.

그 깨끗한 모래 위에 한참 동안 주저앉아 사내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수평선이 있어야 할 자리는 마치 비눗물을 짙게 풀어놓은 듯이 흐려 있었다.

하늘의 끝은 바다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바다를 끝까지 걸어나가며 모르는 사이 하늘로 들어가 버릴 듯한 느낌이었다.

사내는 잠시 후 다시 시선을 가까이로 떨구었다.

모래가 너무 깨끗해 보였다.

사내는 그 깨끗한 모래 위에다 손가락을 움직여 무언인가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모래 속을 헤집고 들어갔던 손가락이 견딜 수 없게 시렸기 때문인지

사내는 이따금 손가락을 오무려 입김을 쐬곤 했는데 마치 그 모습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고 있는 사람을 연상케 했다.

절망.

절망.

그리고, 다시 절망.

다 써놓고 나서 사내는 잠시 물끄러미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것들은 모래 속을 깊이 파고든 상처 같았다.

아니 상처 끝에 생겨난 흉터 같았다.

 사내는 그러나 곧 손바닥으로 그 흉터들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자기 앞에다 모래 언덕 하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내는 조금씩 열중해 가고 있었다.

이제 손이 시린 것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래 언덕은 어느새 차츰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팔이 생기고 다리가 생기고 얼굴이 생기고 젖가슴이 생기고ててててててて

그것은 아름다운 형태의 여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체였다.

모래로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여자의 나체를 조각해 낼 수 있을까.

그러나 사내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손을 놀리고 있었다.

사내의 손은 마치 음악 같았다.

때로는 부드럽게 또 때로는 경쾌하고도 경쾌하게 한 여자의 머리카락이며

어깨 위며 팔 다리를 넘나들고 있었다.

이제 여자는 거의 완성되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파도 소리를 듣고 있는 모습이었다.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조형으로 모래 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꽃을 가져왔으며 좋았을 걸. 하지만 어차피 이제 천지가 삭막해져 버렸으니까てててててて"

 

사내는 잠시 손을 멈추고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참, 성냥을 한 통 사온다는 걸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군요.

 형씨, 죄송합니다만 한 번 더 성냥불을 빌려주시면 고맙겠읍니다. "

 

다시 대합실로 사내는 들어와 있었다.

이제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

 

담뱃불을 붙인 사내가 머리를 조아리는 시늉으로 청년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남을 위해 준비한 성냥이니까요."

 

청년은 힘없이 말했다. 기다림에 완전히 지쳐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남이라뇨?"

 

"제가 기다리는 여자 말이예요. 골초였어요."

 

"저는 세 번째 열차에도 그 여자가 오지 않으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읍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갑자기 청년은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았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례를 범했군요.

이제 마지막 열차가 남아 있읍니다.

함께 기다려 봅시다."

 

사내는 사과했다.

곧 청년의 표정은 누그러져버렸다.

 

"그런데 형씨, 하루종일 굶고 어떻게 견디시오.

 저 아래 식당에서 설렁탕이라도 배달해다 먹읍시다 우리."

 

"일 년 내내 저는 정말 좀처럼 제대로 식사를 할 수가 없었어요.

하루 한 끼면 족해요.

기다리다가 마지막 열차에도 그 여자가 오지 않으면

그때야 하숙집에 가서 저녁을 먹곤 했었어요.

 그것도 아주 조금. 배가 고프시면 아까처럼 혼자 갔다 오세요."

 

"그럼 나도 함께 굶어 봅시다."

 

"정말로 이상한 분이시로군요.

무엇때문에 쓸데없이 이 대합실에 붙어 계시는 거죠?"

 

"이제 곧 알게 됩니다."

 

"혹시てててててて"

 

"뭡니까, 말씀하십시오."

 

"아니예요. 제 생각이 틀릴 거예요."

 

청년은 강하게 부정하고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형광등이 켜져 있었기 때문에 대합실 안의 모든 것은

 더욱 차갑게 얼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아까는 동백꽃을 한 아름 샀었읍니다.

 그것을 안고 창녀촌엘 갔었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여자의 따스한 살을 찾아서 말입니다."

 

"생각보다는 점잖치 못하시군요."

 

청년은 약간 경멸하는 듯한 어투가 되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청년은 언제인가부터 사내의 말에

필요 이상의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았다.

마치 신경쇠약증 환자처럼.

 

"형씨께서는 여자의 육체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신가요?"

 

사내가 물었다.

 

"정신이 한결 중요하지요."

 

청년이 대답했다.

 

"육체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저는 아직 이해 할 수 없어요."

 

"만약 형씨께서 지금 기다리고 있는 여자가 인간의 육체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청년은 다시 벌컥 화를 내고 있었다.

 이제 청년은 기다림에 지치고, 지친 나머지 신경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돌아버리기 직전의 상태일는지도 모를 일었다.

 

"그 여자를 제 앞에서 모욕하지 말아요. 그 여자는 성녀 같은 여자예요."

 

청년은 분노를 억누르는 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몰아쉬며 말했다.

 

"아, 또 제가 실수를 했군요. 이건 제 아내 탓입니다.

제 아내는 제가 요양원에 일 년 동안 입원해 있는 사이에 집을 뛰쳐 나갔었읍니다.

제 아내는 육체도 정신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제가 기다리고 있는 여자는 달라요.

저보다 다섯 살이나 위였었지만 저 이외의 남자라면

손목조차도 잡아 본적이 없다고 말했어요."

 

"그렇겠지요."

 

사내는 크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긍정해 주었다.

이제 사람들이 하나 둘 대합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네 번째의 열차가 도착할 시간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형씨, 형씨께서는 일 년 동안을 대합실에서

그 여자를 기다려 왔었다고 했는데 그 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는지요?"

 

"없었어요."

 

"이상하군요.

형씨는 왜 그 여자를 직접 찾아가지 않으셨읍니까.

주소를 모르셨던가요?"

 

"주소는 알고 있었읍니다.

하지만 외국에 공부하러 떠난다고 했어요..

일체를 잊고 일 년 동안 공부에만 몰두하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 여자의 집에다 편지를 띄웠어요.

그리고 오늘 비로소 답장을 받았지요.

보세요. 아직도 그 여자는 저를 잊지 않고 있었어요."

 

청년은 약간 흥분해 있는 듯한 목소리로 단숨에 말해 놓고는

사내에게 전보 용지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사내는 그것을 건성으로 한 번 들여다보는 듯했다.

이제 대합실 안은 꽤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몸을 웅크린 채 턱을 떨고 있었다.

어느새 마술처럼 매점도 유료 화장실도 출찰구도 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죽어 있던 대합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 술렁거리고 있었다.

다만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것은 난로 뿐인 것 같았다.

 

"형씨, 형씨께서는 아직 그 여자의 손목 한 번도 잡아 보지 않으셨단 말씀이죠."

 

사내가 다짐을 받듯 청년에게 물었다. 청년은 약간 당황하는 빛을 띠었다.

그러나 이제 뭐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그 여자와 저는 두 달 동안 동거생활을 했었어요.

하지만 정신을 더 중시한 사랑의 결합이었죠.

적어도 저와 그 여자는 순결해요. 우리는 서로 첫사랑이었으니까요."

 

몇 번의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청년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출찰구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텅 빈 대합실. 청년은 한참 동안 길고 딱딱한 나무의자에 엎드려 있었다.

이제 오늘 이 역에 도착할 열차는 운행 시간표에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떠나는 열차 하나가 남아 있었다.

채 10분도 못 되어 다시 떠나기 위한 사람들이 하나 둘 대합실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매표구에서 표들이 끓고 있었다.

거기엔 사내도 끼여 있었다. 아마 떠날 작정인 모양이었다.

 

"형씨, 잠깐 저하고 얘기좀 하실까요.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표를 끊은 사내는 다시 청년에게로 다가섰다.

그리고 아주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 여자는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진작 알려드리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는지 알 수가 없었읍니다."

 

그리고 잠바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그 다음 놀랍게도 여유 있는 동작으로 어디선가 라이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청년은 사내가 말을 붙이자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으나 미처 사내가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청년은 거의 실성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제가 떠난 다음 이것을 읽어 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여기 그 여자가 당신에게 드리는 마지막 선물이 있읍니다. 받으시죠."

 

사내는 잠바의 지퍼를 내리고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청년에게 내밀었다.

 

"당신은 그 여자의 오빠이지요?"

 

청년은 말했다.

사내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청년의 창백한 손은 가늘게 떨면서 사내가 내미는 것을 받아 들었다.

사내는 표연히 개찰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담배연기 한 모금이 사내의 어깨 너머로 흩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대합실을 텅 비어 있었다.

청년은 여전히 실성한 듯한 모습으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출입구를 향해 맥없이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등뒤에서 역의 고용원인 듯한 사내가 열쇠를 철컥거리며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도 안 오신 모양이구만. 지성이면 감천이라 언젠가는 오겠지."

 

청년은 역 대합실 문 밖에서 흠칫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반지를 넣어두는 작은 통만한 상자와 메모 한장이 들려져 있었다.

청년은 허겁지겁 그 메모지를 펼쳐 보았다.

형씨.

이미 알고 계셨겠지만 내 아내는 두 달 전에 죽었읍니다.

난산 때문이지요.

나와 그 여자는 대학에서 함께 조각가의 꿈을 키우다가 만났었읍니다.

내가 결핵 환자 요양원에 있을 당시 이곳의 바다를 찾아 왔었던 모양이었읍니다.

그리고 우연히 형씨를 만났었던 모양이었읍니다.

그때 그 여자는 담배를 물고 모래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는데

형씨께서 담뱃불을 붙여 주셨다구요.

여자란 정말 알 수 없는 환상의 눈을 가진 동물이어서 그때 그 여자는

형씨의 가느다랗고 창백한 손가락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손가락이더라는 겁니다.

나는 성냥불을 빌 때마다.

형씨의 손가락을 유심히 보았지만 번번이 내 아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읍니다.

 

형씨.

이제 여기 내 아내의 마지막 모습을 아주 조금만 형씨에게 드리고 갑니다.

나는 지금 이것을 미리 준비해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보시고 형씨에게 여러 가지 꿈을 꾸게 만들었던

내 아내의 천진난만한 거짓말들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당시 내 아내가 얼마나 외로웠던 가도 조금은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안녕을.

깨알 같은 글씨들이었다.

다 읽고 나서도 한참 동안 청년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미친듯이 그 작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거기엔 무슨 회색의 가루 같은 게 가득 들어 있었다.

 

아!

그때였다.

공교롭게 한 무리의 드센 바람이 후욱 청년곁으로 스쳐 갔고 일순간에

그 가루들은 모조리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탄식하듯 청년은 허공에다 한 번 손을 추어 보는 듯하였으나

이미 작은 상자 안은 거짓말처럼 텅 비어 있었다.

마침내 어두운 저 하늘 어딘 가로부터 희끗희끗 작은 눈방울들이 비켜 날리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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