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창녀의 죽음 3
13부
「네. 그저…….」
「그런데 아직까지 모르고 계셨던가요?」
「네. 어디 좀 다녀오느라고…….」
「바로 요 앞에서. 점심을 먹고 오다가 자동차 사고로 그렇게 되었죠. 똑똑한 친구였는데…….」
오 형사는 은행 직원과 헤어질 때 일부러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서 잠이나 자고 싶었다.
정말 극도로 피로했기 때문에 그는 다섯 번째 사나이까지 찾아볼 마음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더구나 명함을 보니 그 사나이의 소재는 인천이었다.
길목에 서서 잠시 머뭇거리던 오 형사는 머리를 설설 흔들고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배가 고파 눈을 뜨긴 했지만. 몇 번 몸을 뒤챈 다음 그는 다시 잠들어 버렸다.
토요일은 아침부터 바람이 불었다.
찌푸린 하늘에서는 조금씩 눈발까지 날리고 있었다.
아홉시쯤 출근한 오 형사는 직속 계장의 핏발선 눈초리와 부딪쳤다.
알고 보니 어제 오후 대규모 마약 사건이 터진 모양이었다.
결국 하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마약 냄새를 쫓아 몇몇 호텔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그 바쁜 중에서도 어제 내팽개쳐 버린 그 일이 줄곧 마음에 걸려 왔다.
저녁 무렵이 되자 그는 자신이 그 일을 포기할 수 없음을 명확히 깨달았다.
겨우 틈을 낸 그는 서둘러 역으로 나가 막 출발하는 열차에 뛰어올랐다.
인천에 내렸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바닷가라 그런지 눈보라가 거세여지고 있었다.
그는 택시를 타고 바로 하역장으로 찾아갔다.
명함에 따르면
다섯 번째의 사나이는 어느 운수 창고주식회사 인천 지점 관리부장이라는 자였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자는 하역 인부들을 감독하는 십장(什長)이었다.
「백인탄(白仁灘) 씨요?
아. 십장님 말이군요.
저어기 불빛 보이죠?
그 집에 가서 물어 보세요.
거기서 술을 마시고 있을 겁니다.」
창고 옆에서 모닥불을 쬐고 있던 인부들 중의 하나가 십장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부두에는 선박들이 험한 날씨에 대비해서인지 일제히 닻을 내리고 있었다.
파도 소리는 높아지고 있었고, 소금기를 실은 바닷바람은 차고 날카로웠다.
조금 벗어나자 거기로부터는 배도 없었고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어슴푸레한 시야 속으로 개펄을 막은 긴 둑이 나타났는데.
바로 그 곁에 판자로 지은 술집이 하나 서 있었다.
오 형사는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전기를 끌어들이지 못했는지 여기저기 남포등을 켜 놓은 실내는 어둠침침했다.
확 끼쳐 오는 술 냄새에 그는 약간 현기증을 느끼면서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서 너 평쯤 되는 흙바닥 위에는 판자와 각목으로 어설프게 짜 놓은
탁자와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고, 모두 부두 노동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거기에 띄엄띄엄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의 말소리는 분명하지 않으면서도 크고 우렁우렁했다.
오 형사는 주모에게 십장이 누구냐고 물었다.
주모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턱으로 한 쪽 구석을 가리켰다.
오 형사는 세 명의 청년이 앉아 있는 구석 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첫눈에 십장이라는 자를 알아 볼 수가 있었다.
포주가 말한 대로 십장은 몸집이 큰 미남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청년은 오 형사가 제시한 신분증을 흘끗 바라보면서 물었다.
술기운 탓인지 가슴을 벌리는 것이 매우 자신만만한 투였다.
「물어 볼게 있어서 그러는데.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오 형사는 사내들의 시선이 차가움을 느꼈다.
「여기서 물어 보면 안 됩니까?」
하고 청년은 물었다.
「네. 좋습니다.」
오 형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십장의 명함을 꺼내 놓으면서,
「지난 일요일 밤에 종3에 갔었지요?」
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의외의 공격에 상대는 확 얼굴을 붉혔다.
그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동석하고 있던 친구들을 모두 밖으로 내쫓았다.
그러고는 하나 감출 것도 없다는 듯이,
「네. 종3에 갔었습니다 그런데요?」
하고 반문했다.
「어떻게 서울까지 원정을 가게 됐지요?」
「네. 사실은 친구한테 돈 좀 빌리러 갔다가…….」
「돈을 빌렸습니까?」
「못 빌렸습니다.」
「그 길로 종3에 간 건가요?」
「네. 전 아직 총각입니다.」
「거기 가서 누굴 만나 무엇을 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 보시오.」
「왜…… 무슨 일 때문에 그럽니까?」
부둣가에서 굴러먹는 사나이답게 백인탄은 좀 버티어 볼 모양이었다.
「차차 이야기할 테니까 우선 그것부터 말해 봐!」
오 형사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청년은 풀이 꺾이며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오 형사는 술과 안주를 더 시킨 다음,
「자 술도 마시면서 천천히. 마음놓고 말해 봐요.」
하고 말했다.
[백인탄의 진술]
술에 얼큰히 취한 십장은 남근이 불끈 솟구치는 것을 느끼면서 종로를 걷고 있었다.
그는 여자가 그리워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최근의 그의 가장 심각한 고민은 성욕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정 견딜 수 없을 때 그는 사창가로 달려가는 수 밖에 없었지만.
그것도 적잖은 돈이 들기 때문에 마음대로 갈 수가 없었다.
사실 정력이 왕성한 노총각으로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그대로 눌러 버린다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기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없다는 데
대해서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결국 그는 종3으로 기어들었다.
아무튼 오늘밤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여자를 하나 사야 한다.
여자는 살찐 것보다는 약간 마른 듯 한게 품기에 좋다.
약간 마른 듯한 여자다.
그러나 현재 그의 수중에는 여자를 살 만한 돈이 없었다.
14부
그는 달려드는 여자들을 밀어 제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창녀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살벌하고 처참해 보였다
창녀들이 모두 남성의 육체를 그리워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넥타이를 움켜잡는 창녀의 따귀를 철썩하고 갈겼다.
「야, 이 개새끼야, 점잔 빼지 마!」
여자는 울화통이 터지는지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술기운이 머리끝으로 몰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그가 백발의 어느 군고구마 장수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노인 옆에는 검정 바지에 빨간 털 셔츠를 받쳐 입은 창녀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처녀가 하나서 있었는데, 멍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고구마를 먹고 있는 모습이 행인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불빛에 드러난 그녀의 선명한 윤곽은 유난히 돋보이는 데가 있었다.
그러나 저러나 밤의 종3 골목에 나와 있는 여자라면 일단 창녀라고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노인 앞으로 다가가서 고구마를 하나 집어 들고 껍질을 벗겼다.
도중에 그는 그것을 땅바닥위로 떨어뜨렸는데, 그러자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처녀가 킥킥하고 웃었다.
「야. 왜 웃어?」
그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킥킥거렸다.
「하하. 이 짜아식 봐라.」
그가 처녀의 팔을 나꿔채면서 보니
노인은 두 눈을 디룩디룩 굴리고 있었다.
「야. 너 손님 안 받아?」
「놀다 가실려구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그래. 임마.」
「주무시고 갈 거예요?」
「아니야, 놀다가 갈 거야.」
그는 처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녀의 허리는 가늘고 유연했다.
팔에 힘을 주자 여자의 전신이 허물어지듯이 안겨 왔다.
입 속에서 부드럽게 흘러 넘치는 팥죽 같은 여자구나.
그는 기쁨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야, 빨리빨리 안내해.」
「어머. 눈이 와요.」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팔을 휘저었다.
어느새 밤하늘로부터 눈송이가 반짝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안내한 방은 훈훈했다.
난로 위에서는 물주전자가 김을 내뿜으면서 한창 끓고 있었다.
「야. 나 돈이 없는데 어떡하지?」
인탄은 아랫목에 풀썩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안돼요. 돈이 없으면 안돼요.」
창녀는 완강하게 말했다.
「안되긴, 임마. 내일 돈 갖다 줄 테니까 외상으로 하면 되지 않아.」
「그래도 안돼요. 돈 안 받고 하면 주인 아저씨한테 혼나요.」
「이런 병신 새끼. 난 그런 돈 떼먹을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도 안돼요. 외상은 안돼요. 종3이 곧 철거되기 때문에…….」
붉은 전등 빛을 받고 서있는 그녀의 모습에는 꿈 같은 데가 있었다.
이런 애를 만져 보지 못하고 쫓겨날 것을 생각하니 그는 초조했다.
「이런 빌어먹을 년. 이거 맡아 둬.」
그는 최후 수단으로 손목시계를 풀었다.
그것은 초침이 따로 붙어 있고 누렇게 변색까지 된 아주 낡은 것이지만
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계였다.
「이거 얼마짜리예요?」
그녀는 시계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물었다.
그는 벌컥 화를 냈다.
「이 병신아. 그건 돈으로 따질 시계가 아니야. 그거 없으면 난 죽는 거야.」
「이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이런 건 누가 사 가지도 않을텐데…….」
「이 병신아. 무식한 소리 작작해! 그건 내 생명하고도 안 바꾸는 시계야!」
그의 말에 여자는 씨익하고 웃었다.
「그렇게도 하고 싶으세요?」
「그래. 죽을 지경이다.」
「제가 좋으세요?」
인탄은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좋고말고. 널 그대로 두고는 절대 갈 수 없어. 네가 좋아서 미치겠다.」
「시계 찾으러 꼭 오셔야 해요?」
「그럼. 그럼. 네 돈 내가 떼어먹을 줄 아니.」
그의 취기는 한층 고조되어 갔다.
그는 옷을 벗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아이. 이 술 냄새…… 꼭 짐승 같네.」
그녀는 몇 번 몸을 빼다가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녀의 육체는 조금씩 열려 나갔다.
그녀는 긴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다가 아기를 품듯이 그를 껴안았다.
겉보기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힘과 열정이 있었고,
육체는 마른 듯하면서도 완숙된 풍만감을 느끼게 했다.
그는 완전히 기막힌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는 다시 달려들곤 했다.
숨이 가빠지고 그것이 더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녀는 높고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길게 신음 소리를 끌면서 몸을 늘어뜨렸다.
15부
「야아. 너 굉장하구나, 굉장해.」
그가 헐떡거리면서 땀을 닦자 창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들은 나란히 누워서 한참 동안 천장을 응시했다.
「그렇게 힘드세요?」
하고 그녀가 나직이 물었다.
「그래. 힘들어 죽갔다, 이 간나야.」
그는 창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숱이 많은 머리칼은 그 결이 곱고 부드러웠다.
「이북이 고향이 세요?」
「그래. 너 눈치 빠르구나.」
「사투리를 쓰시기에 알았어요. 결혼하셨지요?」
그녀는 궁금한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아니. 아직 못했어. 결혼한 것처럼 보여?」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왜 아직까지 결혼도 안하셨어요?」
「애인이 없어서.」
「아이. 거짓말 말아요. 이렇게 미남이면서 애인이 없어요?」
창녀는 그의 매끄럽게 생긴 코를 어루만졌다.
「넌 있니?」
「저두 없어요.」
「그것 봐라. 잘생겼다고 해서 애인이 있는 건 아니야.
이 바보야.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줄 아니.」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요. 전 돈 버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던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넌 노동자니까.」
「뭐라고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돈 벌어서 너 뭐할래?」
창녀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투로 말했다.
「시집갈래요.」
그는 천장 바로 밑에 달려 있는 조그만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둠이 더욱 층층이 쌓여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웃었다.
「하하. 이년……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고, 그래도 시집은 가고 싶은 모양이구나.」
「저라고 시집 못 가란 법 있나요?」
「하긴 그래. 너도 언젠가는 시집가야겠지. 지금 몇 살이니?」
「스물 셋이에요.」
「더 돼 보이는데…….」
「고생을 많이 해서 그래요. 선생님은 몇이세요?」
「서른하고도 둘이 다.」
「참, 이북 어디가 고향이에요?」
「이북 어디냐고?」
그는 다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문제가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의주다. 압록강 끝에 있는 평안북도 의주가…….」
「의주 어디 예요?」
하고 창녀가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이거 왜 이래? 또 하고 싶어서 그러니?」
그의 말에 그녀는 손을 풀면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의주군 의주면 의주리가 내 고향이야. 거긴 강 건너가 바로 만주 벌판이야.
겨울이면 강이 두껍게 얼기 때문에 썰매를 타고 넘나들지.
어떻게나 추운지 오줌을 누면 거기에 고드름이 다 언다구, 하하.」
그러나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이불을 턱밑으로 끌어당기며 돌아누웠다.
「내 말 재미없는 모양이구나.」
그는 창녀의 유방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재미있어요. 월남은 언제 하셨어요?」
「나한테 묻지만 말구 너도 좀 말해 봐. 난 네 이름도 모른다구.」
「그냥 춘이라고 불러요.」
「춘이, 춘이…… 거 이름 참 좋은데…… 허지만
이런 데 있는 여자가 진짜 이름을 댈 리가 있나. 고향은 어디야?」
「저. 전라도예요.」
「전라도라. 그런데 사투리를 토옹 안 쓰네.」
「네. 어릴 때 나왔기 때문에…….」
16부
그가 꺼억하고 길게 트림을 하자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야. 소주 한 병만 사 올래?」
「아이. 그렇게 취하셨는데…….」
「아니야. 난 취하려면 아직 멀었어, 이런 자리에서 벌거벗구 술 마시는 것도 괜찮지.
야, 소주 한 병 사 오라구. 돈 없다구 너 날 괄시하니? 술 살 돈은 있어.」
그는 벌거벗은 몸으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가로막았다.
「아이. 저한테 돈 있으니까 앉아 계세요.」
그녀는 옷을 입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한참 후 그녀는 술과 함께 과자며 과일 같은 것들을 잔뜩 사들고 들어왔다.
「야, 이거 미안한데.」
「드세요.」
그는 비스듬히 누운 채로 그녀가 깍아 주는 사과를 받아먹었다.
그리고 술을 마실 때는 대단히 기분이 좋고 만족한 표정이었다.
「제가 묻는 말에 대답은 잘 안하시네요.」
그녀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무슨 말을 물었는데? 아무 거나 다 물어 봐. 척척 대답해 줄 테니까.」
그는 벌건 얼굴로 씨근덕거리면서 말했다.
「제가 아까 언제 남하했느냐고 묻지 않았어요?」
「아. 그렇지. 그러니까 1951년인가…… 1․4후퇴 때 남하했지.
사실 그때 이야기를 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진다.
파란곡절이 많았지. 우리 집안은 그때 없어진 거나 다름없었어.」
청년은 잠시 어두운 얼굴로 천장을 응시했다.
그녀는 사내 옆에 바싹 다가앉으며 치마폭으로 그의 손을 가만히 감싸주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 왔는데. 아버지 대(代)에 와서 좀 차질이 생겼어.
우리 아버지라는 사람이 가만히 앉아서 농사만 짓는 데 만족하지를 않은 거지.
아버지는 자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장사에도 손을 뻗쳤는데,
그 중에는 국경을 넘나들면서 아편 장사를 한 것도 끼어 있지.
그렇다고 우리아버지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그 당시 국경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거의가 아편에 손을 대고 있었다니까
그렇게 대수로운 건 못돼.
좌우간 아버지는 이런 식으로 돌아다니면서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어.
아버지가 1․4후퇴 때 우리들을 데리고 남하한 것도 순전히 이러한 방랑벽 때문이었지.
남쪽에 대한 강한 호기심. 남쪽에서의 새로운 희망……
그거니까 아버지는 이민 가는 기분으로 남하했던 거야.」
「누구누구 월남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그는 술 한 잔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하아. 이거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누가누가 월남했느냐 하면
아버지하고 나하고 내 누이동생. 이렇게 셋이었지.」
「엄마는요?」
「엄마? 그 여자는 버얼써 죽은 뒤였어.
내 누이동생을 낳고 그 이듬해엔가 승천했으니까.
오래된 이야기지. 살아 있을 때는 별로 몰랐었는데…… 몇 년 지나서
어머니 사진을 보니까
상당히 미인이었어. 아버지가 재혼하지 않고동짓달 긴긴 밤을 홀로 지낸 이유를 알 만하지 자. 너도 한 잔 해.」
그가 웃으면서 술잔을 내밀자 춘이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흩어진 머리채 속에 얼굴을 묻은 채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몸은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온몸이 늘어지고 눈꺼풀이 잔뜩 무거워진 그로서는 이제 한숨 푹 자고 싶을 뿐
그녀에게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흐응. 이제 내 이야기가 재미없는 모양이구나.
빨리 나가 달라 이거지…… 그래에. 이년아. 나간다. 나가.」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푹 고꾸라졌다.
그래도 그녀는 앉은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야. 이 간나 새끼야. 내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재미있다구.
넌 아무것도 몰라. 너 같은 똥치가 알게 뭐야.」
청년은 주먹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한 대 쥐어박은 다음 술병을 입 속에 거꾸로 박아 넣었다.
「남하하다가 말이야…… 우리 세 식구는 뿔뿔이 헤어진 거야.
헤어졌다는 여기에 재미가 있는 거야. 흐흐. 어떻게 헤어졌는지 알아?
삼팔선을 넘어 서울에 들어왔을 땐데…… 그만 아버지가 검문에 걸린 거야.
헌병 나리가 하시는 말씀이 잠깐 가자는 거야. 아버지는 완전히 당황했지.
하지만 아버지는 별일 없을 거라고 하면서 우리한테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어.
그러면서 필요할 거라고 하면서…… 자기가 차고 있던
그 고물 시계를 나한테 주고는…… 간 거야.
자꾸 우리 쪽을 돌아보면서 가더군.
그때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곳은 길가에 있는 어느 빈 벽돌집 앞이었는데.
그 집은 반쯤 허물어져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어.
이때 내가 잘못을 저지른 거지. 아주 큰 실수였어.
난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여서 누이동생을 그 집 마루에 앉혀놓고…… 아버지를 찾아 나섰어.
얼마 후에 아버지가 어느 초등학교에 수용되어 있는 것을 알았어.
거기엔 아버지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입구 헌병이 하시는 말씀이 모두 징용에 나가야 한다는 거야. 나는…… 사정을 했지.
이북에서 오는 길이니 한번만 봐 달라.
그게 어려우면 잠깐 면회라도 허락해 달라.
하지만…… 나 같은 꼬마는 통하지가 않았어.
한참 후퇴할 때라 모두가 살기등등해 있었지.
반시간쯤 뒤에 하는 수 없이 되돌아왔는데……
이번엔 거기 꼼짝 말고 앉아있으라고 한 여동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거야.
난 반미치광이가 되어 날뛰었지만 홍수같이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어.
그 앤 아마 날 찾느라고 나섰겠지만 다섯 살짜리 애가 어디가 어딘 줄 분간이나 했겠어.
벌써 20년이 가까워 오지만 아직까지 아버지도 누이동생도 만나지 못했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봤지만 감감소식이야.
내 생각엔 영영…… 못 만날 것 같아 아버지는 징용에 나가서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는데.
아마…… 돌아가셨을 거야. 지금 살아 있다면…… 쉰 아홉…… 한창 나이지.
아버지는 몰라도 누이동생은 살아있을 거야.
좋은 양부모(養父母) 만나서 제대로 학교에 다닌다면 지금 대학(大學) 4학년쯤 되었겠지.
막상 만난다 해도 서로 얼굴을 못 알아볼 거야.
처음 몇 년 간은 누이 생각에 미칠 것 같더니…… 세월이 흐르니까
그것도 만성이 되더군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힘들게 말을 마친 그는 한참 동안 꼼짝없이 엎드려 있었다.
넓은 어깨 위로 흐르는 땀이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만이 유난스레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결국 혼자 남아 부두 노동자로 밖에 전락할 수 없었던
자신의 신세가 새삼 가슴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하고 그녀는 기어들 듯이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 허물어지지 않을 듯이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완강하고 고집스러워 보였다.
「어서 가 보세요.」
갑자기 그녀는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인탄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녀를 다시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그는 벌떡 일어서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
다리가 몇 번 휘청거렸다.
「빌어먹을. 쓸데없는 이야기만 지껄였군 오늘 실례 많았다.
다시 말하자면…… 그 시계는 중요한 거니까 잘 간직해 둬.
내일 아니면 모레 돈을 가지고 올 테니까.」
그러자 그녀가 시계를 내밀었다.
「괜찮아요. 가져가세요.」
인탄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춘이는 피했다.
「정말 가져가도 되겠어?」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감사하군 내 돈은 떼먹지 않을 테니까 염려 마.
이자까지 쳐서 갖다 주지. 앞으로 우리 잘 사귀어 보자구.」
그는 신뢰를 보이기 위하여 그녀에게 그 잘난 명함까지 한 장 내주었다.
그로서는 정말 재수 좋은 날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을 외상으로 했을 뿐만 아니라 담보까지 잡히지 않아도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더구나 이 계집애는 나한테 단단히 반한 모양이다.
아마 내 남근의 위력에 녹아 버린 모양이지.
그는 가슴이 잔뜩 부풀어 오른 채 귀중한 시계를 팔목에 단단히 비끄러매었다.
그런 다음 대단히 취한 체하면서 비틀비틀 밖으로 나갔다.
대문을 벗어나서 몇 발자국 걷다가 뒤돌아보니 춘이가 문설주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춘이는 얼굴을 휙 돌려 버렸는데.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그는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저년이 나한테…… 반해도 단단히 반한 모양이구나.」
그는 씁쓰레한 기분을 털어 버리기라도 할 듯이 침을 탁 뱉은 다음 걸음을 빨리했다.
눈은 아까보다 더 거세게 덩이가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춘이한테 돈은 같았소?」
「아직 못 갚았습니다. 내일 서울 올라가는 길에 갖다 줄 참 입니다.」
청년은 춘이에게 아직 외상값을 갚지 못한 것을 변명할 기색인 것 같았다.
오 형사는 술 한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 잔에 그는 다시 자작 술을 따랐다.
「춘이는 죽었소.」
「네?」
「멀리 갔단 말이오.」
「정말입니까?」
「정말이오.」
오 형사가 시체를 찍은 사진을 내보이자 청년의 얼굴이 뻣뻣이 굳어졌다.
「이런!」
거센 바닷바람에 판자집은 통째로 들썩거리고 있었다.
실내에는 손님으로 그들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주모는 구석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는 바람 소리에 놀란 눈을 뜨곤 했다.
「타살입니까?」
하고 백인탄은 물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상당히 겁먹은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범인은 잡혔습니까? 도대체 누가 죽였습니까?」
그는 확실히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이 범인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공포인 것 같았다.
「모두가 범인이오. 당신도 춘이를 죽였고 나도 춘이를 죽였소.」
「네? 뭐라구요? 제가 춘이를 죽였다고요? 하하하.
생사람 잡지 마십시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허허허.」
청년은 기묘하게 웃음을 흘리면서 안주도 없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쌍놈의 계집애. 어쩐지 그 날도 질질 우는 게 이상하더라니.
난 나한테 반해서 그러는 줄 알았지. 처녀 귀신은…….」
「개 같은 자식!」
오 형사는 벌떡 일어서면서 청년의 얼굴을 후려쳤다.
탁자와 함께 뒤로 쿵 떨어진 청년은 코피를 쏟으면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 형사는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주모에게 술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한 걸음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어둠은 대지와 하늘을 온통 삼킨 채 끝없이 퍼져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눈보라 속을 그는 바다 쪽으로 주춤거리며 걸어갔다.
그리고 개펄을 막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둑 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지난 일요일 밤.
백인탄이 일을 치르고 떠나가 버린 뒤 춘이는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으리라.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로 고무신을 끌면서…… 그렇지. 약방으로 갔겠지.
그녀는 이 약방, 저 약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수면제를 사 모은 다음 아마
그것을 하나하나 삼키면서 눈 오는 밤거리를 헤매었으리라.
밤이 깊어감에 따라 정신이 흐려지고 몸이 얼어 버린 그녀는 마침내 길 위에 쓰러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비밀을 자기의 몸과 함께 눈 속에 묻어 버렸으리라.
그것이 그녀가 취할 수 있었던 마지막 예의(禮儀)였겠지.
오 형사는 춘이의 주검이 하얗게,
아주 하얗게 변해가고 있는 것을 보는 듯했다.
이제 남은 것은 종3의 진이 엄마나 포주로부터 춘이의 성이 백가(白哥)라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밝혀진 지금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방파제를 두드리는 성난 바다의 물결이 썩어 가는 대지를 깨끗이 쓸어가 버리기를
실로 간절히 기원하면서 그녀를 죽인 조국을 증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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