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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김만중

오늘의 쉼터 2011. 5. 1. 15:46

 

사씨남정기사씨남정기 / 김만중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 금릉 순천부 땅에 유명한 인사가 있었는데,

성은 유(劉)요 이름은 현(炫)이라고 하였다.

그는 개국공신인 유기(劉琦)의 자손이라,

사람됨이 현명하고 문장과 풍채가 일세의 추앙을 받았다.

나이 십오 세 때 시랑 최모의 딸을 아내로 맞아서,

부부의 덕행과 금실이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소년 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부시랑참지정사에 이르매,

명망이 조야에 진동하였다.

그러나 당시 간신이 조정에서 국권을 제멋대로 농간하였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물러가려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유현은 부인 최씨와 금실은 좋았으나

자녀의 소생이 없어서 근심으로 지내다가 늦게서 아들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서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부인을 잃은 그는 인생의 무상을 느끼고 더욱 벼슬에 뜻이 없어져서

병을 빙자하고 사직한 뒤에 집으로 돌아와서 한가로이 세월을 보냈다.

 

그 뒤로 국사에는 비록 참여치 않았으나

일세의 명사로서 그의 청덕을 모두 앙망하였다.

그에게 매제가 있었는데 성행이 유순하고 정숙하여

일찍이 선비 두홍(杜洪)의 아내가 되었는데,

초년 고생을 하다가 두홍이 늦게서야 벼슬을 하였다.

유공의 아들 이름은 연수(延壽)라 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숙성하였고

나이 차차 자람에 따라 얼굴이 관옥 같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십 세 때 이미 문장이 놀라웠다.

유공이 기특히 여겨서 사랑하였으나

그 재롱을 죽은 부인에게 보이고 함께 즐기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유연수 소년은 십 세 때 이미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뽑혔고,

십오 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즉시 한림학사를 제수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십 년 동안 더 학업에 힘쓴 뒤에

출사할 것을 청하매 황제께서 그 뜻을 기특히 여기시고

특히 본직을 띤 채 오 년 간의 수학 말미를 주셨다.

이에 대하여 유한림이 천은을 감축하고

부친 유공이 더욱 충의를 다하여 국은에 보답하려고 맹세하였다.


유한림이 급제 후에 성혼하려고 하매,

구혼하는 규수가 많으나 좀처럼 허하지 않고

유공이 매제 두부인과 함께 성중의 모든 매파를 청하여

현철한 소저가 있는 집안을 물었으나

마땅한 상대가 없어서 좀체로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 중의 주파라는 매파가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모든 매파들의 천거가 끝난 뒤에 입을 열었다.


"모든 말이 공변되지 못하니 제가 바른대로 소견을 말하겠습니다.

대감의 말씀이 부귀한 곳을 구하면 엄승상댁만한 곳이 없고,

규수 낭자의 현철한 분을 구하려면 신성현의 사급사(謝給事)댁 소저밖에 없으니

이 두 댁 가운데 택하십시오."


"부귀는 본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요, 어진 규수를 택하려고 하오.

 사급사는 본디 대간벼슬을 하다가 적소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라

진실로 강직한 인물인데, 그 집에 소저가 있는 줄은 몰랐소."
"그 소저의 용모와 덕행이 일세에 뛰어나니 더 여쭐 말씀이 없습니다.

저는 중매 일을 본 지가 삼십 여 년에

왕공재열의 모든 재상댁을 다니며 신부를 많이 보았으나

이같이 요조현철한 소저를 보기는 처음이니 두 번 묻지 마십시오."
"우리는 색을 취함이 아니니, 현숙한 덕행이 있는 소저라야 하오."
"사소저는 덕행과 용모가 출중합니다.

대감이 제 말씀을 못 믿으시겠거든 사소저의 현불현(賢不賢)을 다시 알아 보십시오."
하고 그 매파는 사소저를 극력 찬양하고 다짐하였다.

 

매파가 돌아간 뒤에 유공은 매파의 말을 생각하고 두부인에게 상의하였다.

그러자 부인이 묘한 제안을 하였다.
"사람의 덕행과 성질은 필법에 나타나니 사소저의 필체를 얻어 봅시다.

우화암(羽化庵)의 묘혜니(妙慧尼)를 불러서

우화암에 기진하려던 관음화상에 관음찬을 사소저에게 짓도록 청탁하게 합시다.

사소저의 그 친필을 보면 재덕을 짐작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청하러 갔을 때 사소저의 선을 보고 올 것이니

묘혜니는 매파처럼 좋은 말로만 우리를 속이지는 않을 줄로 압니다."


"그거 참 묘안이다.

그러나 관음찬은 매우 어려울 텐데 여자의 글재주로 어찌 감당할까?"
"어려운 글을 짓지 못하면 어찌 재원이라 하겠습니까?"
유공이 매제의 말이 옳다 하고 빨리 사소저의 선볼 것을 재촉하였다.

두부인이 사람을 우화암으로 보내서 묘혜 스님을 불러왔다.
"사가(謝家)와 결친하려고 하나 신부의 재덕과 용모를 알 길이 없으니

묘혜 암자에 기진하려던 이 관음화상을 가지고 가서,

사소저에게 관음찬을 받아서 보내주시오."


하고 화상을 내주면서 간곡히 부탁하였다.

묘혜가 그 화상을 받아 가지고 곧 자기 암자의 일처럼 간청하려고 사급사 집으로 갔다.

소저의 모친은 본디 불법을 신앙하였기 때문에

전부터 출입하던 묘혜가 왔으므로 곧 불러들였다.

묘혜가 안부인사를 하자 부인이 반겨 하면서,
"오래 보지 못하였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우리 집에 왔소?"
"아시는 바와 같이 소승의 암자가 퇴락하여

금년에 정재를 얻어서 중수하느라고 댁에도 와 보일 틈이 없었습니다.

이제 역사가 끝났으매 부인께 한 가지 청이 있어서 왔습니다."
"불사(佛事)를 위한 일이라면 어찌 시주를 아끼겠소마는

빈한한 집에 재물이 없어서 크게는 시주하지 못하겠지만 청이라 함은 무엇이오?"
"소승이 청하려는 것은 재물 시주가 아니옵고

소승에게는 금은 이상으로 귀중한 일입니다."
"궁금하니 어서 말해 보시오."
부인은 묘혜의 말이 의아스러워서 재촉하였다.

 

 

"소승의 암자를 중수한 뒤에 어떤 시주댁에서 관음화상을 보내 주셨는데

이 화상은 당인(唐人)의 명화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 뒤에 제명(題名)과 찬미의 글이 없는 것이 큰 흠이니,

댁의 소저가 금석 같은 친필로 찬문을 지어 주십사 하고 청하러 왔습니다.

찬문은 산문의 보배라 그 공덕이 칠보를 시주하는 것보다도

더 중하고 찬문을 써 주신 소저의 수명이 장원하실 것입니다."
"스님의 말이 고맙소.

우리 집 아이가 비록 고금시문에 통하나

이런 글을 지을 수 있을지 좌우간 시험삼아 물어봅시다."


하고 시녀에게 소저를 불러오라고 명하였다.

이윽고 소저가 나와서 모친에게 무슨 말씀이냐고 대령하였다.

묘혜가 한번 소저를 본즉 용모가 쇄락 기이하고 우아 자비함이

실로 관음보살이 강림한 듯이 황홀하였다.

 묘혜는 심중으로 놀라며 생각하되,
'진세 속에 어찌 이런 아름다운 소저가 있으랴.'
감탄하면서 합장배례하고 물었다.
"소승이 사 년 전에 소저께 뵈온 일이 있었는데 기억하고 계십니까?"
"스님을 어찌 잊었겠소?"
소저와 묘혜의 인사가 끝난 뒤에 부인이 소저에게 물었다.
"스님이 멀리 찾아와서 네 필체로 관음찬을 구하는데 네가 그 글을 지을 수 있겠느냐?"
"소녀에게 지으라고 하시더라도 노둔한 제 재주로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더구나 시부 짓는 것은 여자로서 경계할 일이라 하였으니

스님의 청일지라도 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승이 구하는 것은 원래 시부가 아니고

관음보살님의 그 높으신 공덕을 찬양코자 할 따름입니다.

관음보살님은 본디 여자의 몸이신 고로 여자의 글을 받아야 더욱 좋습니다.

그러니 요즘 여자 중에서 소저가 아니면 누가 이 글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소승의 간청을 소저는 물리치지 마시오."
부인 또한 은근히 딸에게 권하고 싶어하는 눈치로,
"네 재주가 미치지 못하면 하는 수 없지만

그 글은 보통의 무익지문(無益之文)과는 다르니

웬만하면 지어 보는 것이 어떠냐, 나도 보고 싶다."


이에 반가워하는 묘혜가 얼른 족자 싸 가지고 온 책보를 풀어서

관음보살의 화상을 펼치매, 화폭 위에 바다 물결이 끝이 없다.

그 가운데 외로운 정자가 서 있는데 관음보살이 흰 옷을 입고

머리도 빗지 않은 채 어린 사내 아이를 품에 안고

물결을 헤치고 앉아 있는 장면이었다.

그 화법이 정묘하여 관음보살과 동자가 살아서 움직일 듯이 보였다.

그 그림을 본 사소저가 머리를 한 번 갸웃하고,
"내가 배운 것은 오직 유가의 글이요,

불서(佛書)는 모르니 비록 찬사를 시작(試作)하더라도

스님의 마음에 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소승이 듣건대, 푸른 연잎과 흰 연근은 한 생명이요,

석씨(釋氏)의 자비가 공씨(孔氏)의 인(仁)과 한 가지라 하니,

소저 비록 불서를 애송하지 않더라도

선비의 글로 보살을 칭송하면 더욱 좋을까 합니다."


사소저는 그제야 더 사양하지 않고 손을 정결히 씻은 뒤에

관음화상의 족자를 벽에 걸어 모시고 분향 배례하였다.

그리고 채필을 들고 앞으로 가서 관음찬 일백 이십 자를 족자 밑 여백에 가늘게 쓰고,

다시 그 아래에 연월일과 <정옥은사 배작서(精屋隱士 拜作書)>라고 서명하였다.
묘혜가 그 글의 뜻과 글씨의 모양을 극구 칭찬하고 유공댁으로 돌아왔다.

묘혜의 회답을 기다리고 있던 유공과 두부인은

묘혜가 돌려주는 관음화상의 족자를 받으면서 물었다.
"그 소저를 자세히 보았소?"
"족자 속에 그린 관음님 얼굴과 같은 용모였습니다."
하고 사급사 댁의 모녀와 수작한 이야기를 자세히 보고하였다.

 

유공이 묘혜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고,
"이 관음찬의 글과 글씨를 보니 그 재주와 덕행이 범인이 아니다."
하고 족자를 걸고 다시 보매,

글이 청아쇄락하고 필법이 정묘하여 한 곳도 구차한 데가 없었다.

온화하고 유순한 성품이 글에 나타났을 것이라고 칭찬하여 마지 않았다.

그 글에는,
'관음경은 필경 옛날의 성녀(聖女)일지니, 주나라의 임사(任思)와 같도다.

그런데 외롭게 공산(空山)에 있음이 본뜻이 아닐지언정

직설은 세상이 돕고 백이숙제는 주려 죽었으니,

처지가 다름이 아니라 의취가 다름이로다.

화상을 보니 흰 옷을 입고 아이를 데리고 있으매,

이 그림으로 생각컨대 오직 뜻을 취하도다.

슬프도다. 서녘의 풀이 잔결하고 세속이 괴이하니 글을 좋아하는도다.

신지(神地)를 전희(專戱)하면 윤기(輪機)의 해로움이 있는데, 관음님은 왜 여기 계심이뇨.

죽림에 하강하시니 상운오채(祥雲五彩)가 임중(林中)을 둘렀도다.

그 덕이 세상에 비치니 억만창생이 뉘 아니 공경 흠탄하리오.

극진한 공부의 거룩함이 윤회에 벗어나니, 목이 숨 잃음 같아서 불생불멸하리로다.

지공무사한 덕이 천추에 유연하니 그 덕을 한 붓으로 찬양하기 어렵도다.'


유공과 두부인이 관음찬을 보고 칭찬하여 마지 않고,
"문자와 필법이 이처럼 기묘하여 재덕이 겸비함을 알겠다.

매파의 말이 허언이 아니었으니 곧 예를 갖추어 다시 통혼하자."
남매가 합의하고 다시 매파를 사가(謝家)로 보내서 통혼하려고 부탁하였다.
"사소저의 덕행을 알았으니 잘 부탁하오.

그 댁의 허혼을 받아 오면 후하게 상을 주겠소."


매파가 기뻐하며 장담을 하고 사급사의 집으로 갔다.

사소저는 개국공신 사일청(謝逸淸)의 후예요,

사후영(謝厚英)의 딸이었다.

후영이 본디 청렴 강직하매 조정의 소인배가 꺼려하였다.

마침 소인배가 반란을 음모할 적에 사후영이 대간의 언관으로 있었으므로

간신들의 작당농권을 분하게 여기고 여러 번 상소하다가

도리어 간신의 모해를 받고 소주로 귀양갔다가 거기서 죽었다.

부인이 비분을 참고 소저를 데리고 고향 본집에 돌아와서

슬픈 세월을 보내며 소저를 애지중지 길렀다.

 

소저가 점점 크면서 모친을 모시고 지냈는데

그 용모와 재덕이 기이함은 말할 것도 없이 증자(曾子)와 같이

편모를 지성으로 받들어 봉양하며 모녀가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다.

딸이 성장하여 혼기가 되었으나

주혼될 사람과 방도가 없어서 근심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하루는 매파가 찾아와서 용광색덕을 칭찬하면서
"제가 유씨 문중의 명을 받자와 귀댁 소저와 혼인하겠다는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신랑되실 유한림으로 말하면 소년 등과하여 벼슬이 한림학사에 이르고

소년 풍채와 문장재화가 일세에 압두하니

귀 소저의 용색과 일대가연인가 하옵니다."


부인은 이미 유한림의 풍채가 범류에서 뛰어난 소문을 들은 지 오래였으나

인륜의 대사를 매파의 말만 듣고 가볍게 허혼할 수가 없었으므로

소저가 아직 유약하다는 핑계로 시원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매파가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와서 사실대로 자세히 유공과 두부인에게 보고하였다.

유공은 실망하고 오랜 생각 끝에 매파에게 물었다.
"그 댁에 가서 할멈은 무어라고 말하였나?"
매파가 처음 인사부터 하직하고 오던 인삿말까지 자세히 되풀이하여 말하였다.

유공이 그 매파의 교섭 경과를 듣고 문득 깨닫고,
"내가 소홀하게 할멈에게 잘못 가르쳐 보냈었구나."
하고 매파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이튿날 유공이 직접 신성현으로 가서

지현(知縣)을 찾아보고 정중한 중매를 부탁하였다.
"아들의 호사로 사가(謝家)에 매파를 보냈더니

규수의 모친이 규수의 유약을 핑계로 허혼하지 않으니

귀관이 나를 위하여 사가에 가 주시는 수고를 아끼지 마시오."
"노 선생님의 말씀을 어찌 범연히 듣겠습니까?"
"가시거든 다른 말은 하지 마시고 다만

고(故) 사급사의 청덕을 흠모하여 구혼한다는 말만 전해 주시오.

그러면 반드시 허혼할 줄로 믿습니다."


유공이 부탁하고 돌아간 뒤에 지현이 사가로 찾아가서

부인에게 만나기를 청하자 다른 일로는 찾아올 리가 없는 지현의 방문이라

요전에 매파가 와서 청하던 혼사인 줄 짐작하고

객당을 깨끗이 치우고 손님을 청해 들일 준비를 하였다.

부인은 딸을 미리 객당의 옆방에 깊이 숨겨 두고,

노복을 시켜서 지현을 객당 안으로 인도하여 들였다.

우선 주과를 잘 차려서 대접한 뒤에 부인은 시비에게 전언(傳言)하여,
"성주께서 친히 누지에 왕림하셔서

한가의 외로움을 위로하여 주시니 저의 집의 영광이옵니다."


지현이 부인의 인사 전언을 공손하게 다 들은 뒤에 시녀에게 전언하여,
"소관이 귀댁을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귀댁 소저의 혼사를 꼭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뜻에서입니다.

전임 이부시랑참지정사 유공 현이

귀 소저가 재덕을 겸비하고 자색이 비상함을 듣고 기특히 여길 뿐 아니라

사급사의 청명 정직함을 항상 흠앙하오매

그 여아의 재덕은 불문가지라 하여 귀댁 소저로 며느리를 삼고자 하옵니다.

유공의 아들은 금방 장원하여 벼슬이 한림학사에 이르옵고

상총(上寵)이 극하오매 사람마다 사위를 삼고자 하는 바이나,

유공은 그 많은 구혼을 모두 물리치고

귀댁 소저에게만 나를 통하여 청혼함이니 이 좋은 때를 잃지 마시고

허락하시면 내가 돌아가서 유공을 뵈올 낯이 있을까 합니다."
부인이 다시 전언하여 대답하되,
"용우(庸愚)한 여식이 재덕이 부족하고 용모 또한 취할 것이 없는데

성주께서 이처럼 친히 오셨으니 어찌 사양하오리까.

성주께서는 돌아가셔서 쾌히 통혼하겠다는 비가의 뜻을 전해 주십시오."


지현이 크게 기뻐하고 돌아와서 유공에게 그 경과를 상세히 알렸다.

유공은 기뻐하면서 지현의 수고를 치하하였다.

곧 택일하고 혼례 준비를 시작하는 한편 사급사의 청렴결백으로

집에 유산이 없어서 가세가 빈한함을 알기 때문에 납폐를 후하게 보내었다.

그러나 유공은 아들의 성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부인 최씨를 생각하고 비회를 금하지 못하였다.


어느덧 길일이 되매 양가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예식을 이루매

남풍여모(男風女貌)가 발월하여 봉황의 쌍을 이루었다.

신부의 모친이 신랑의 신선 같은 풍채를 사랑하여

딸과 아름다운 쌍을 이룬 것을 즐기면서도 남편 급사가

그 모양을 보지 못함을 슬퍼하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었다.

신랑이 신부와 함께 빨리 집으로 돌아와서 신부가 폐백을 드리자

유공과 두부인의 남매 양위가 눈을 들어서 비로소 신부의 모습을 보니

용모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 현숙한 덕성이 나타나서

주가(周家) 팔백 년을 이루던 임사의 덕이 전해 남은 듯하였다.


날이 서산에 지매 잔치 손님들이 돌아가고 신부 또한 숙소로 돌아가매

유한림이 이 첫날밤에 신부와 더불어 운우지락을 이루어서 남녀의 정이 흡연하였다.
이튿날부터 소저는 시부를 효성으로 받들고 남편을 즐겁게 섬기더니

유공이 우연히 병을 얻어서 백약이 무효하매

유공이 소생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 매제 두부인에게 길이 탄식하고 유언하였다.
"현매(賢妹)는 나 죽은 후에 자주 왕래하여 가사를 주관하고 잘못이 없게 하라."
또 아들 한림의 손을 잡고,
"너는 앞으로 가사를 고모와 상의하여 가헌을 빛내도록 하라.

네 아내는 덕행과 식견이 높으니

가부를 불의로 섬기지 않을 것이니 공경하고 화락하라."고 유언하고,

며느리 사씨에게도,
"너의 현부(賢婦)로서의 요조 성행을 탄복하니, 안심하고 세상을 떠날 수 있다."
하고 마지막까지 칭찬하고 신임하였다.

유족들에게 일일이 유언한 유공은 그날 엄연한 자세로 별세하자

한림 부부의 호천애통은 비할 데 없었고 매제 두부인의 애통이 또한 극진하였다.

상일(喪日)에 임하여 영구를 선영에 안장하고

한림부부가 집상하매 애회(哀懷)가 뼈에 사무쳐서 통곡하는 정상이

모든 사람의 눈물을 자아내어서 효성에 탄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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