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생전 / 박지원.
곧장 남산(南山) 밑에 닿으면, 은행나무를 향하여 사립문이 열렸는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였다. “밤낮으로 글일 읽더니 기껏 ‘어떻게 하겠소?’ 장사도 못 한다면, 도둑질이라도 못 하시나요?” “내가 집이 가난해서 무얼 좀 해 보려고 하니,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몇 해 지나면 나라 안의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지 못할 것이다.” 사공이 그러기로 승낙을 했다.
허생은 묵적골〔墨積洞〕에 살았다.
우물 위에 오래 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
그러나 허생은 글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남의 바느질 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하루는 그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과거(科擧)를 보지 않으니, 글을 읽어 무엇합니까?”
허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독서를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그럼 장사는 못 하시나요?”
“장사는 밑천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소?”
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장인바치 일도 못 한다,
허생은 읽던 책을 덮어 놓고 일어나면서,
“아깝다. 내가 당초 글읽기로 십 년을 기약했는데, 인제 칠 년인걸…….”
하고 휙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생은 거리에 서로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운종가(雲從街)로 나가서 시중의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누가 서울 성중에서 제일 부자요?”
변씨(卞氏)를 말해 주는 이가 있어서, 허생이 곧 변씨의 집을 찾아갔다.
허생은 변씨를 대하여 길게 읍(揖)하고 말했다.
만 냥(兩)을 뀌어 주시기 바랍니다.”
변씨는
“그러시오.”
하고 당장 만 냥을 내주었다.
허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변씨 집의 자제와 손들이 허생을 보니 거지였다.
실띠의 술이 빠져 너덜너덜하고, 갖신의 뒷굽이 자빠졌으며,
쭈그러진 갓에 허름한 도포를 걸치고, 코에서 맑은 콧물이 흘렀다.
허생이 나가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저이를 아시나요?”
“모르지”
“아니, 이제 하루 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만 냥을 그냥 내던져 버리고 성명도 묻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요?”
변씨가 말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으레 자기 뜻을 대단히 선전하고,
신용을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을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을 오만하게 뜨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재물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해 보겠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 주면 모르되, 이왕 만 냥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물어 무엇을 하겠느냐?”
허생은 만 냥을 입수하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앟고 바로 안성(安城)으로 내려갔다.
안성은 경기도, 충청도 사람들이 마주치는 곳이요,
삼남(三南)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대추, 밤, 감, 배며 석류, 귤, 유자 등속의 과일을 모조리 두 배의 값으로 사들였다.
허생이 과일을 몽땅 쓸었기 때문에 온 나라가 잔치나 제사를 못 지낼 형편에 이르렀다.
얼마 안 가서, 허생에게 두 배의 값으로 과일을 팔았던 상인들이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주고 사 가게 되었다.
허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 냥으로 온갖 과일의 값을 좌우했으니,
우리 나라의 형편을 알 만하구나.”
그는 다시 칼, 호미, 포목 따위를 가지고 제주도(濟州島)에 건너가서
말총을 죄다 사들이면서 말했다.
허생이 이렇게 말하고 얼마 안 가서 과연 망건 갑이 열 배로 뛰어올랐다.
허생은 늙은 사공을 만나 말을 물었다.
“바다 밖에 혹시 사람이 살 만한 빈 섬이 없던가?”
“있습지요. 언젠가 풍파를 만나 서쪽으로 줄곧
사흘 동안을 흘러가서 어떤 빈 섬에 닿았습지요.
아마 사문(沙門)과 장기(長崎)의 중간쯤 될 겁니다.
꽃과 나무는 제멋대로 무성하여 과일 열매가 절로 익어 있고,
짐승들이 떼지어 놀며, 물고기들이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습디다.”
그는 대단히 기뻐하며,
“자네가 만약 나를 그 곳에 데려다 준다면 함게 부귀를 누릴 걸세.”
라고 말하니,
드디어 바람을 타고 동남쪽으로 가서 그 섬에 이르렀다.
허생은 높은 곳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고 실망하여 말했다.
“땅이 천 리도 못 되니 무엇을 해 보겠는가?
토지가 비옥하고 물이 좋으니 단지 부가옹(富家翁)은 될 수 있겠구나.”
“텅 빈 섬에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대체 누구와 더불어 사신단 말씀이오?”
사공의 말이었다.
“덕(德)이 있으면 사람이 절로 모인다네. 덕이 없을까 두렵지,
사람이 없는 것이야 근심할 것이 있겠나?”
이 때, 변산(邊山)에 수천의 군도(群盜)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각 지방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수색을 벌였으나 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군도들도 감히 나가 활동을 못해서 배고프고 곤란한 판이었다.
허생이 군도의 산채를 찾아가서 우두머리를 달래었다.
“천 명이 천 냥을 빼앗아 와서 나누면 하나 앞에 얼마씩 돌아가지요?”
“일 인당 한 냥이지요.”
“모두 아내가 있소?”
“없소.”
“논밭은 있소?”
군도들이 어이없어 웃었다.
“땅이 있고 처자식이 있는 놈이 무엇 때문에 괴롭게 도둑이 된단 말이오?”
“정말 그렇다면, 왜 아내를 얻고, 집을 짓고,
소를 사서 논밭을 갈고 지내려 하지 않는가?
그럼 도둑놈 소리도 안 듣고 살면서, 집에는 부부의 낙(樂)이 있을 것이요,
돌아다녀도 잡힐까 걱정을 않고 길이 의식의 요족을 누릴 텐데.”
“아니, 왜 바라지 않겠소?
다만 돈이 없어 못 할 뿐이지요.”
허생은 웃으며 말했다.
“도둑질을 하면서 어찌 돈을 걱정할까?
내가 능히 당신들을 위해서 마련할 수 있소. 내일 바다에 나와 보오.
붉은 깃발을 단 것이 모두 돈을 싫은 배이니, 마음대로 가져가구려.”
허생이 군도와 언약하고 내려가자, 군도들은 모두 그를 미친 놈이라고 비웃었다.
이튿날, 군도들이 바닷가에 나가 보았더니,
과연 허생이 삼십만 냥의 돈을 싣도 온 것이었다.
모두들 대경(大驚)해서 허생 앞에 줄지어 절했다.
“오직 장군의 명령을 따르겠소이다.”
“너희들, 힘껏 짊어지고 가거라.”
이에, 군도들이 다투어 돈을 짊어졌으나, 한 사람이 백 냥 이상을 지지 못했다.
“너희들, 힘이 한껏 백 냥도 못 지면서 무슨 도둑질을 하겠느냐?
인제 너희들이 양민(良民)이 되려고 해도,
이름이 두둑의 장부에 올랐으니, 갈 곳이 없다.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기다릴 것이니,
한 사람이 백 냥씩 가지고 가서 여자 하나, 소 한필을 거느리고 오너라.”
허생의 말에 군도들은 모두 좋다고 흩어져 갔다.
허생은 몸소 이천 명이 1년 먹을 양식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군도들이 빠짐없이 모두 돌아왔다.
드디어 다들 배에 싣고 그 빈 섬으로 들어갔다.
허생이 도둑을 몽땅 쓸어 가서나라 안에 시끄러운 일이 없었다.
그들은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대[竹]를 엮어울을 만들었다.
땅기운이 온전하기 때문에 백곡이 잘 자라서,
한 해나 세 해만큼 걸러 짓지 않아도 한 줄기에 아홉 이삭이 달렸다.
3년 동안의 양식을 비축해 두고, 나머지를 모두 배에 싣고
장기도(長崎島)로 가져가서 팔았다.
장기라는 곳은 삼십만여 호나 되는 일본(日本)의 속주(屬州)이다.
그 지방이 한참 흉년이 들어서 구휼하고 은백만 냥을 얻게 되었다.
허생이 탄식하면서,
“이제 나의 조그만 시험이 끝났구나.”
하고, 이에 남녀 이천 명을 모아 놓고 말했다.
“내가 처음에 너희들과 이 섬에 들어올 때엔 먼저 부(富)하게 한 연후에
따로 문자를 만들고 의관(衣冠)을 새로 정하려 하였더니라.
그런데 땅이 좁고 덕이 엷으니, 나는 이제 여기를 떠나련다.
다만, 아이들을 낳거들랑 오른손에 숟가락을 쥐고,
하루라도 먼저 난 사람이 먼저 먹도록 양보케 하여라.”
다른 배들을 모조리 불사르면서,
“가지 안으면 오는 이도 없으렸다.”
하고 돈 오십만 냥을 바다 가운데 던지며,
“바다가 마르면 주워 갈 사람이 있겠지.
백만 냥은 우리 나라에도 용납할 곳이 없거늘,
하물며 이런 작은 섬에서랴!”했다.
그리고 글을 아는 자들을 골라 모조리 함께 배에 태우면서,
“이 섬에 화근을 없애야 되지.”했다.
허생은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의지 없는 사람들을 구제했다.
그러고도 은이 십만 냥이 남았다.
“이건 변씨에게 갚을 것이다.”
허생이 가서 변씨를 보고
“나를 알아보시겠소?”
하고 묻자, 변씨는 놀라 말했다.
“그대의 안색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니,
혹시 만 냥을 실패 보지 않았소?”
허생이 웃으며,
“재물에 의해서 얼굴에 기름이 도는 것은 당신들 일이오.
만 냥이 어찌 도(道)를 살찌게 하겠소?”하고,
십만 냥을 변씨에게 내놓았다.
“내가 하루 아침이 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글읽기를 중도에 폐하고 말았으니,
당신에게 만 냥을 빌렸던 것이 부끄럽소.”
변씨는 대경해서 일어나 절하여 사양하고,
십분의 일로 이자를 쳐서 받겠노라 했다.
허생이 잔뜩 역정을 내어,
“당신은 나를 장사치로 보는가?”
하고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버렸다.
변씨는 가만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허생이 남산 밑으로 가서 조그만 초가로 들어가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한 늙은 할미가 우물 터에서 빨래하는 것을 보고 변씨가 말을 걸었다.
“저 조그만 초가가 누구의 집이오?”
“허 생원 댁입지오. 가난한 형편에 글공부만 좋아하더니,
하루 아침에 집을 나가서 5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시고,
시방 부인이 혼자 사는데, 집을 나간 날로 제사를 지냅지요.”
변씨는 비로소 그의 성이 허씨라는 것을 알고, 탄식하며 돌아갔다.
이튿날, 변씨는 받은 돈을 모두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가서 돌려 주려 했으나,
허생은 받지 않고 거절하였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백만 냥을 버리고 십만 냥을 받겠소?
이제부터는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가겠소.
당신은 가끔 나를 와서 보고 양식이나 떨어지지 않고 옷이나 입도록 하여 주오.
일생을 그러면 족하지요.
왜 재물 때문에 정신을 괴롭힐 것이오?”
변씨가 허생을 여러 가지로 권유하였으나, 끝끝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변씨는 그 때부터 허생의 집에
양식이나 옷이 떨어질 때쯤 되면 몸소 찾아가 도와 주었다.
허생은 그것을 흔연히 받아들였으나,
혹 많이 가지고 가면 좋지 않은 기색으로,
“나에게 재앙을 갖다 맡기면 어찌하오?”하였고,
혹 술병을 들고 찾아가면 아주 반가워하며
서로 술잔을 기울여 취하도록 마셨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나는 동안에 두 사람 사이의 정의 가 날로 두터워 갔다.
어느 날, 변씨가 5년 동안에 어떻게
백만 냥이나 되는 돈을 벌었던가를 조용히 물어 보았다.
허생이 대답하기를,
“그야 가장 알기 쉬운 일이지요.
조선이란 나라는 배가 외국에 통하질 않고,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질 못해서,
온갖 물화가 제자리에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지지요.
무릇, 천냥은 적은 돈이라 한 가지 물종(物種)을 독점할 수 없지만,
그것을 열로 쪼개면 백 냥이 열이라, 또한 열 가지 물건을 살 수 있겠지요.
단위가 작으면 굴리기가 쉬운 까닭에,
한 물건에서 실패를 보더라도
다른 아홉 가지의 물건에서 재미를 볼 수 있으니,
이것은 보통 이(利)를 취하는 방법으로 조그만 장사치들이 하는 짓 아니오?
대개 만 냥을 가지면 족히 한가지 물종을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수레면 수레 전부, 배면 배를 전부, 한 고을이면 한 고을을 전부,
마치 총총한 그물로 흝어 내듯 할 수 있지요.
뭍에서 나는 만가지 중에 한 가지를 슬그머니 독점하고,
물에서 나는 만가지 중에 한 가지를 독점하고
의원의 만 가지 약재 중에 슬그머니 하나를 독점하면,
한 가지 물종이 한 곳에 묶여 있는 동안 모든 장사치들이 고갈될 것이매,
이는 백성을 해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후세에 당국자들이 만약 나의 이 방법을 쓴다면
반드시 나라를 병들게 만들 것이오.”
“처음에 내가 선뜻 만냥을 꾸어 줄 줄 알고 찾아와 청하였습니까?”
허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만이 내게 꼭 빌려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능히 만 냥을 지닌 사람치고는 누구나 다 주었을 것이오.
내 스스로 나의 재주가 족히 백만 냥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운명은 하늘에 매인 것이니, 낸들 그것을 어찌 알겠소?
그러므로 능해 나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
반드시 더욱 더 큰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은
하늘이 지키는 일일 텐데 어찌 주지 않았겠소?
이미 만 냥을 빌린 다음에는 그의 복력에 의지해서 일을 한 까닭으로,
하는 일마다 곧 성공했던 것이고,
만약 내가 사사로이 했었다면 성패는 알 수 없었겠지요.”
변씨가 이번에는 딴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 사대부들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오랑캐에게 당했던 치욕을 씻어 보고자하니,
지금이야말로 지혜로운 선비가 팔뚝을 뽐내고 일어설 때가 아니겠소?
선생의 그 재주로 어찌 괴롭게 파묻혀 지내려 하십니까?”
“어허, 자고로 묻혀 지낸 사람이 한둘이었겠소?
우선,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 같은 분은
적국(敵國)에 사신으로 보낼 만한 인물이었건만 베잠방이로 늙어 죽었고,
반계 거사(磻溪居士) 유형원(柳馨遠) 같은 분은
군량(軍糧)을 조달할 만한 재능이 있었건만
저 바닷가에서 소요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집정자들은 가히 알만한 것들이지요.
나는 장사를 잘 하는 사람이라,
내가 번 돈이 족히 구왕(九王)의 머리를 살 만하였으되
바닷속에 던져 버리고 돌아온 것은, 도대체 쓸 곳이 없기 대문이었지요.”
변씨는 한숨만 내쉬고 돌아갔다.
변씨는 본래 이완(李浣) 이 정승과 잘 아는 사이였다.
이완이 당시 어영 대장이 되어서 변씨에게 위항(委巷)이나
여염(閭閻)에 혹시 쓸 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변씨가 허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 대장은 깜짝 놀라면서,
“기이하다. 그게 정말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던가?”하고 묻는 것이었다.
“소인은 그분과 상종해서 3년이 지나도록 여태껏 이름도 모르옵니다.”
“그인 이인(異人)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
밤에 이 대장은 구종들도 다 물리치고 변씨만 데리고 걸어서 허생을 찾아갔다.
변씨는 이 대장을 문 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허생을 보고 이 대장이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허생은 못 들은 체하고,
“당신 차고 온 술병이나 어서 이리 내 놓으시오.”했다.
그리하여 즐겁게 술을 들이켜는 것이었다.
변씨는 이 대장을 밖에 오래 서 있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허생은 대꾸도 않다가 야심해서 비로소 손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 대장이 방에 들어와도 허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이 대장은 몸둘 곳을 몰라하며 나라에서 어진 인재를 구하는 뜻을 설명하자,
허생은 손을 저으며 막았다.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느냐?”
“대장이오.”
“그렇다면 너는 나라의 신임받는 신하로군.
내가 와룡 선생(臥龍先生) 같은 이를 천거하겠으니,
네가 임금께 아뢰어서 삼고 초려(三顧草廬)를 하게 할 수 있겠느냐?”
이 대장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제이(第二)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했다.
“나는 원래 ‘제이’라는 것은 모른다.”하고
허생은 외면하다가, 이 대장의 간청에 못 이겨 말을 이었다.
“명(明)나라 장졸들이 조선은 옛 은혜가 있다고 하여,
그 자손들이 많이 우리 나라로 망명해 와서 정처없이 떠돌고 있으니,
너는 조정에 청하여 종실(宗室)의 딸들을 내어 모두 그들에게 시집 보내고,
훈척(勳戚)의 집을 빼앗아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게 할 수 있겠느냐?”
이 대장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무릇, 천하에 대의(大義)를 외치려면
먼저 천하의 호걸들과 접촉하여 결탁하지 않고는 안 되고,
남의 나라를 치려면 먼저 첩자를 보내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만주 정부가 갑자기 천하의 주인이 되어서
중국 민족과는 친근해지지 못하는 판에,
조선이 다른 나라보다 먼저 섬기게 되어 저들이 우리를 가장 믿는 터이다.
진실로 당(唐)나라, 원(元)나라 때처럼 우리 자제들이
유학 가서 벼슬까지 하도록 허용해 줄 것과,
상인의 출입을 금하지 말도록 할 것을 간청하면,
저들도 반드시 자기네에게 친근하려 함을 보고 기뻐 승낙할 것이다.
국중의 자제들을 가려뽑아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혀서,
그 중 선비는 가서 빈공과(貧貢科)에 응시하고,
또 서민은 멀리 강남(江南)에 건너가서 장사를 하면서,
저 나라의 실정을 정탐하는 한편,
저 땅의 호걸들과 결탁한다면 한번 천하를 뒤집고
국치(國恥)를 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명나라 황족에서 구해도 사람을 얻지 못할 경우,
천하의 제후(諸侯)를 거느리고 적당한 사람을 하늘에 천거한다면,
잘 되면 대국(大國)의 스승이 될 것이고,
못 되어도 백구지국(伯舅之國)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다. ”
이 대장은 힘없이 말했다.
“사대부들이 모두 조심스럽게 예법(禮法)을 지키는데,
누가 변발(辨髮)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으려 하겠습니까?”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소위 사대부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오랑캐 땅에서 태어나 자칭 사대부라 뽐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의복은 흰옷을 입으니 그것이야말로 상인(喪人)이나 입는 것이고,
머리털을 한데 묶어 송곳같이 만드는 것은
남쪽 오랑캐의 습속에 지나지 못한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예법이라 한단 말인가?
번오기(樊於期)는 원수를 갚기 위해서 자신의 머리를 아끼지 않았고,
무령왕(武靈王)은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되놈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제 대명(大明)을 위해 원수를 갚겠다 하면서,
그까짓 머리털 하나를 아끼고,
또 장차 말을 달리고 칼을 쓰고 창을 던지며
활을 당기고 돌을 던져야 할 판국에
넓은 소매의 옷을 고쳐 입지 않고 딴에 예법이라고 한단 말이냐?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신임받는 신하라 하겠는가?
신임받는 신하라는 게 참으 로 이렇단 말이냐?
너 같은 자는 칼로 목을 잘라야 할 것이다.”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칼을 찾아서 찌르려 했다.
이 대장은 놀라서 일어나 급히 뒷문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집이 텅 비어 있고, 허생은 간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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