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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黃眞伊]

오늘의 쉼터 2009. 5. 6. 21:37

 

 

  황진이[黃眞伊]

 

  송도에 진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여자치고는 뜻이 크고 기개가 높아 사내 대장부에 못지 않았다.

  진이는 일찍이 화담처사 서경덕이 고답적인 인사로서 벼슬에 뜻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학문의 깊이와 정통함이 뛰어났다는 말을 듣고 한 번 시험해 볼 생각이 일어났다.

  그래서 선비처럼 끈으로 허리를 졸라매고 《대학(大學)》을 옆에 끼고 서경덕을 찾아갔다.

 첩이 듣자오니,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남자는 가죽띠를 두르고 여자는 실끈으로 띠를 한다고 합니다.

  첩도 배우에 뜻이 있어 실로 띠를 두르고 찾아왔습니다.』선생은 웃고 받아들여 가르쳤다.

  진이는 밤만 되면 몸을 가까이 기대는 등 교태를 부리면서, 마치 옛날 마등가의 음탕한 여인이

  아란을 유혹 하듯 며칠을 두고 수작을 걸어 보았다.

  그러나 서화담은 끝내 동요하지 않았다.

  진이는 천성이 놀기 좋아하는 성미이다.

  금강산이 천하 제일의 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또 한 번 놀아 보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어울려 짝될 사람을 구하던 중에 마침 장안에 이생이란 사람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재상의 아들로서 사람이 칠칠하지 못해서 명예나 재물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그래서 함께 멀리 놀이를 가도 탈이 없을 것 같았다.

  

   진이는 조용히 이생을 구슬렸다.

  『제가 들으니, 중국인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친히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라는데,

    황차 우리 나라 사람으로 이 나라에 태어나서, 그것도 신선이 산다는 금강산을 지척에 두고 있으면서

    구경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이제 이 몸이 우연히 선랑(仙郞)을 따르게되었으니

    같이 신선처럼 놀기에 마침 잘 되었습니다.

    산과 들을 거닐 간편한 옷차림으로 그 그윽하고 뛰어난 경치를 구경하고 돌아온다면

    또한 기쁜 일이 아닙니까?』

 

   이생이 하락하자,

   사내로 하여금 일체의 시동이나 종도 따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무명옷에 초립을 쓰고 양식 주머니까지도 몸소 젊어지게 하였다.

   진이는 여승처럼 댕댕이 덩굴로 고깔을 만들어 쓰고, 몸에는 갈포로 지은 장삼, 무명 치마에 짚신,

   거기에 죽장까지 들었다.

   두 사람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깊은 골짜기와 절벽을 오르내리는 동안 양식도 다 떨어졌다.

   이 때부터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절간마다 찾아다니며 비렁뱅이질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진이는 절간의 땡땡이 중에게 몸까지 팔았다.

   그래도 이생은 못 본 척해 두었다.

   이렇게 하여 산 속을 헤매다 보니 못은 다 떨어지고, 주린 배를 참아 가면 굶기를 밥먹듯,

   두 사람의 몰골은 전날의 호사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은 한 송림 속의 시냇가에 이르렀다.

   마침 시골 선비 여남은 사람이 둘러 앉아서 주연을 베풀면서 술이 거나해 있었다.

   진이가 지나치면서 그 앞에 가서 절을 하자,

   선비 하나가 말을 걸어 왔다.

  『여사장도 술을 마실 줄 아오? 한 잔 드시오.』

   진이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허기진 배에 술이 들어가니 곧 취했다.

   진이는 술잔을 들고 옛날의 가락을 한 곡조 읊었다.

   고운 목소리 맑은 노래가 숲 속의 구석구석에 퍼져 울렸다.

   모든 선비들은 이상하게 여기면서 다투어 술을 권하고 안주를 먹여 주었다.

  『첩에게 하인 녀석이 하나 있는데 몹시 주린 모양이니, 청컨대 남은 음식이 있으면 먹여 주십시오.』

   진이는 이렇게 해서, 다시 이생을 불러 배불리 먹였다.

   두 집안에서는 이들이 간 곳을 알 까닭이 없었다.

   팔도에 수소문을 해 보아도 그림자조차 찾지 못했다.

   이렇게 한 해가 거의 다할 무렵,

   다 떨어진 옷에 얼굴은 시꺼멓게 말라 가지고, 파리한 거지꼴로 두 사람이 나타났다.

   두 집안은 물론, 이웃에서도 크게 놀라 마지않았다.

   선전관 이사종은 노래를 잘 불렀다.

   일찍이 사신으로 가는 길에 송도를 지나다가 천수원 냇가에서 말을 쉬게 되었다.

   갓을 벗어서 배 위에 덮고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다가 저절로 흥이 솟구쳐 두어 가락 큰 소리를 읊었다.

   때마침 진이도 그곳을 지나치면서 천수원 밖에서 말을 쉬게 하다가,

   청아한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한참 동안 듣고 나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이 노래 곡조가 참으로 이상하다.

   보통 시골 구석에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듣자 하니 서울에 이 사종이라는 유명한 풍류객이 있다. 하던데, 당대의 절창이라, 아마 그 사람일게다.』

   사람을 시켜 알아 보았더니 과연 이 사종이 틀림없었다.

   진이는 자리를 옮겨 가서 이 사종에게 접근하였다.

   그리고 서로 자기의 심정을 이야기한 끝에 사종을 집으로 모셔 왔다.

   며칠 동안 사종은 진이의 집에서 유숙했다. 하루는 진이가 말했다.

  『당신과는 마땅히 6년을 같이 살아야 하겠습니다. 』

   그리고는 다음 날 자기 집 재산 가운데에서 3년 동안 먹고 지낼 재산들을 사종의 집으로 옮겼다.

   이렇게 그 부모와 처사 등 집안 살림 일체를 돌볼 경비를 마련한 뒤,

   진이는 손수 혼수를 지어 입고 첩며느리의 예식을 다하였다.

   사종의 집에서는 조금도 돕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3년이 흘렀다. 사종이 진이 일가를 먹여 살릴 차례가 된 것이다.

   사종은 진이가 한 것처럼 정성을 다하여 갚았다.

   다시 3년이 흘렀다.

  『이제 마침내 약속의 만기가 되었나 봅니다. 』

   진이는 이렇게 말하는 미련도 없이 떠나갔다.

   뒤에 진이는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집안 사람들을 불러 놓고 유언처럼 한 마디 했다.

  『내 평생 성품이 분방한 것을 좋아했으니, 죽거든 산속에다 장사지내지 말고 큰 길가에 묻어 다오. 』

   송도의 큰 길가에는 진이의 무덤이 있다.

   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송도를 지나는 길에 제문을 지어 진이의 묘에 바쳤다.

   이 일에 해서 그는 조정의 말썽거리가 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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