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여자

5. 수배자 (1)

오늘의 쉼터 2010. 10. 5. 16:17

5. 수배자 (1)

 

 

강안여자 수배자 1~5

 1.

 

 

라이트에 비친 별장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숲에 둘러싸인 붉은색 2층 벽돌 건물 뒤쪽이 암반으로 이루어진 산이어서 별장은 산성 같았다.

불을 환하게 밝힌 별장은 차가 현관 앞에 도착했어도 조용했다.
엔진이 꺼지자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내리시죠."

 

앞자리의 사내가 먼저 내리면서 장미에게 말했다.

장미는 잠자코 차에서 내렸다.

이곳은 용인 근처에 위치한 백동그룹 명예회장 조홍인의 별장이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시 사내가 외면한 채 말했으므로 장미는 발을 떼었다.

시내에서 만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사내는 지금까지 딱 세 마디 말을 했다.

방금 두 마디까지 포함해서 그렇다.

계단을 오른 장미가 현관문의 손잡이를 쥐고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검정색 승용차는 마악 출발하고 있었다.

 앞좌석에 앉은 두 사내의 옆모습이 보였다가 곧 지나갔다.

현관문을 연 장미는 숨을 삼켰다.

불을 환하게 켜놓은 응접실은 넓었다.

그러나 비어 있었으므로 장미는 주춤했다.

 

"들어오세요."

 

그때 옆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놀란 장미가 머리를 돌리자 단정한 차림의 중년 여자가 옆쪽 문에서 나왔다.

 

"이층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자가 안쪽의 계단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도 장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는 장미가 든 가방을 본 모양이었다.

 

"가방은 놓고 가시지요. 아가씨, 제가 방에 갖다 두겠습니다."

 

그러더니 덧붙였다.

 

"아가씨 방은 이층 복도 왼쪽 방입니다.

방문 앞에 꽃병이 놓여 있어서 찾기 쉬우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옷가방을 그 자리에 내려놓은 장미가 인사를 했지만 여자는 시선을 들지 않았다.

장미는 계단으로 다가갔다.

조홍인은 6000만원에 한 달 계약을 한 것이다.

그리고는 김희선에게 선금으로 3000만원을 보내왔다.

잔금은 한 달 후에 준다는 것이다.

계단을 하나씩 오르면서 장미는 등에 닿는 여자의 시선을 느꼈다.

한달 동안 이곳에서 생활해야 되는 것이다.

조홍인은 별장에서 일절 바깥 출입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한달, 30일, 720시간이다. 잠자는 시간은 8시간씩 240시간, 밥 먹고, 씻고, 화장하고,

노는 시간을 하루 10시간 잡으면 300시간,

그리고 조홍인이 하루에 한번씩 찝쩍거린다면 그걸 한 시간씩 잡고 30시간이다.

그동안 별 계산을 다했지만 역시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이 그 30시간일 것이었다.

그러나 30시간에 6000만원이다. 시간당 200만원이라는 생각을 하면 조금 위안이 되었다.

계단을 오르자 바로 이층 응접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있는 조홍인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조홍인이 웃었다.

곧 얼굴이 주름살 투성이가 되었다.

그리고 반듯하지만 생기가 없는 틀니. 저 틀니를 볼 때마다 장미는 구역질이 났다.


"오, 왔구나."

 

조홍인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셨어요? 회장님."

 

장미가 웃음띤 얼굴로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어, 여기 앉아라."

 

옆쪽 소파를 손으로 가리켜보인 조홍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동안 더 예뻐졌구나."

 

"고맙습니다, 회장님."

 

"너하고 같이 지내려고 이 별장에 오랜만에 들렀다."

 

"너무 좋아요, 회장님."

 

"아래층에서 아줌마 보았지? 그사람 음식 솜씨가 아주 좋다."

 

조홍인이 흡족한 듯 다시 얼굴을 펴고 웃었다.

 

"나도 만사를 젖혀두고 너하고 둘이서만 여기서 지낼란다. 흐흐흐."

 

"저도 좋아요."

 

남은 돈은 3000만원이다.

선금 3000만원은 김희선이 먼저 주었으니 잔금은 챙기지 않을까?

 

 

2.

 

   발인 전날 저녁에 장례식장으로 들어선 박용수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상주석에 서 있는 강한을 보더니 눈을 치켜 떴다가 내리고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도 말았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린듯이 예의 바르게 절을 했고 분향도 했다.

강한은 박용수에게 아버지 사고 소식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회사 직원한테도 마찬가지여서 황택수만 어쩔 수 없이 알게 된 터라

그냥 두었는데 다 문상을 왔다.

사장 고동표도 어제 다녀갔고 일이 바쁜 때였지만 팀장들도 얼굴은 보이고 돌아갔다.

김양희도 어제 종일 일하다가 오늘 새벽에 갔는데 최지현은 지금도 남아있다.

유경 사장한테 어떻게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최지현이 음식 시중은

혼자 맡아 하고 있는 것이다.

장례식장 안은 한산했다.

친척과 친지 대여섯이 둘러앉아 고스톱을 쳤고 팀원 셋도 반대쪽 구석에서

역시 고스톱을 치고 있을 뿐이다.

최지현이 서둘러 차린 음식상 앞에 앉았을 때 박용수가 앞에 앉은 강한에게 말했다.

 

"내가 네 회사에다 전화하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갈 뻔했어, 그럼 못써, 임마."

 

"죄송합니다, 형님."

 

시선을 내린 강한이 박용수의 술잔에 소주를 채웠다.

 

"그냥 조용히 보내 드리고 싶어요."

 

"이해는 한다, 하지만."

 

한 모금에 술을 삼킨 박용수가 빈잔을 내밀었다.

강한이 잔을 받자 박용수는 술을 따르고는 말을 이었다.

 

"내 입장이 되면 서운하지. 그래도 널 동생으로 여겼는데 연락을 안하다니.

얀마, 난 배신감까지 느꼈다."

 

강한이 잠자코 술을 삼켰다.

박용수가 길게 숨을 뱉더니 이제는 목소리를 낮췄다.

 

"좋은데 가셨을거다. 편한 세상으로. 가신 분은 걱정없어,

남은 인연들이 걱정이지, 인간사가 다 그래."

 

도통한 인간처럼 말하고난 박용수가 문득 물었다.

 

"장지는 어디여?"

 

"화장하고 그냥 집으로 모시려고."

 

"그것도 좋지."

 

머리를 끄덕인 박용수가 주방에서 일하는 최지현을 눈으로 가리켰다.

 

"누구냐?"

 

"그냥 직원요. 옆 회사."

 

"옆 회사?"

 

했다가 시선을 돌린 박용수가 정색하고 강한을 보았다.

 

"초상집에서 상주한테 사건 이야기 늘어놓는 것이 좀 뭣하지만 할 수 없지."

 

제 잔에 술을 따른 박용수가 말을 이었다.

 

"전에 네가 부탁했던 그 날치기 말야.

각 경찰서에다 인상착의를 띄우고 유사 사건 조회를 했더니."

 

말을 그친 박용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17건이다. 신고된 것만 그래. 비행기, 열차, 고속버스,

하다못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그 기집애가 설친거야."

 

"……."

 

"남대문 경찰서에서는 아예 그 기집애 별명을 붙여 놓았더구만. 원더우먼이라고."

 

"……."

 

"쪽 빠지고 얼굴도 비슷하다는 거야."

 

"……."

 

"그런데 네가 그 기집애 이름이 이장미라고 그랬지?"

 

"네."

 

"그 기집애 가명이 다 틀려. 조미화, 안해영, 윤머시기. 같은 이름이 하나도 없어. 그런데."

 

한 모금 소주를 삼킨 박용수가 붉어진 얼굴로 강한을 보았다.

 

"내가 그 이름을 훑어보다가 갑자기 너한테 말했다는 이장미가 떠오르길래 컴퓨터 조회를 했지."

 

강한은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박용수의 눈이 점점 더 번들거렸다.

 

"이장미란 이름이 만 명은 되더라,

 

그 나이에 그 용모의 여자는 천 명쯤, 그렇지만 원더우먼은 없었어."

 

그러더니 박용수가 정색했다.

 

"그래서 그만 덮으려다가 문득 이씨를 빼고 '장미'라고 쳐 보았지. 그랬더니."

 

 

3.

 

이장미는 본명이 장미였다.

인터넷 사기로 이미 수배된 인물. 나이는 24세. 명문 삼화여대 영문과 졸업 후

1년쯤 지난 작년 초에 인터넷 사기로 수배자가 되었다.

그리고는 원더우먼으로 변신한 것이다.

박용수는 장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살고있는 집 주소에다 장미 사진까지 가져왔다.

박용수는 장미가 원더우먼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최초의 경찰관인 것이다.

아버지의 유골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강한은 바로 다음 날 출근했다.

경제가 불황이면 강한의 일거리는 많아진다.

바로 지금이 그렇다. 출근하자마자 일이다.


"형, 집 주인이 곧 올거야."

 

하고 봉천동의 다세대주택 앞에 섰을 때 황택수가 말했다.

오늘은 일이 많아서 팀원이 2개 조로 나뉘었다.

백용철과 천상태는 지금 신설동에 가 있다.

황택수가 잠자코 발을 떼는 강한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오늘 보증금 돌려주면 내일 전세 입주자를 받을 수 있다는 거야.

집주인 한테는 우리가 은인이야."

 

강한은 앞장서서 골목으로 들어섰다.

채무자 윤명심. 34세. 현재 채무 500만원. 각서, 현금 보관증등

자료가 완벽해서 500만 원만 가져가면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침 지하실방의 월세 보증금 500만원이 살아 있는데다

집 주인은 방만 빼주면 보증금은 당장이라고 준다는 것이다.

주인은 지하방을 2000만원 전세로 내놓을 작정이었다.
 
따라서 주인과 3자대면을 하고 보증금을 그 자리에서 대신 받은 후에

서비스로 지하방의 세간을 골목 밖으로 내놓아주면 된다.

다세대주택이어서 철제 대문은 항상 열려 있었으므로 그들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계단을 내려가 지하방의 현관문을 밀자 현관문도 열렸다.

 

"누구세요?"

 

안에서 묻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자가 나왔다.

창백한 얼굴, 낡은 스웨터에 치마를 걸친 마른 체격의 여자가 먼저 황택수를 보더니

얼굴이 굳어졌다.

 

"아줌마, 오늘은 끝내야겠는데."

 

그냥 좁은 거실 겸 주방으로 밀고 들어선 황택수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집 주인이 곧 올거요. 보증금 갖고. 무슨 말인지 아시겠져? "

강한은 벽에 붙여 놓여진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고 황택수의 말이 이어졌다.

"우린 두 달 이자도 계산 안했어. 그만 하면 크게 봐준거여. 아시겠져?"

그때 옆족 방에서 10세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나왔다.

 

"엄마."

 

겁에 질린 아이가 여자의 다리 한 쪽을 감아 안았다.

그때 여자가 아이를 안으며 말했다.

 

"그러세요."

 

여자의 시선이 강한에게로 옮겨져 왔다.

그러나 시선을 받았던 강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자의 눈에 초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강한의 뒤쪽을 향한 채 말을 이었다.

 

"가져 가세요."

 

"엄마."

 

아이가 다시 부르자 쪼그리고 앉은 여자가 두 팔로 안았다.

 

"오냐, 아가."

 

"우리, 그럼, 어디로 가는거야?"

 

아이가 또 묻자 여자는 머리만 끄덕였다.

그때 황택수가 말했다.

 

"아줌마, 우리가 신사적으로 하는거요.

 다른 놈들 같았으면 두 달 전에 끝냈다구. 아시겠져?"

 

강한은 벽에 등을 붙이고 아이를 보았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토요일이다.

아이는 학교 끝나고 일찍 돌아온 것 같다.

 

"엄마, 우리 어디로 가?"

 

하고 아이가 다시 물었을 때 현관문이 열리면서 30대쯤의 비대한 사내가 들어섰다.

 

"아이구, 먼저 와 계셨네."

 

사내가 황택수를 보더니 반색을 했다.

집주인이다.

보증금을 받고 월세 계약은 했지만 쫓아내고 싶어서 안달을 하던 중에

일이 잘 되느라고 그런지 황택수하고 말이 통한 것이다.

주인은 손에 돈가방을 쥐고 있었다.

물론 보증금이다.

 

 

 

4.

 

 

"자, 그럼 시작을 하실까요?"

 

서둘러 방바닥에 앉은 사내가 웃음띤 얼굴로 황택수를 보았다.

그리고는 힐끗 옆쪽에 앉은 강한에게 시선을 주었다.

가만히 앉아있는 강한의 분위기에 조금 질린 것 같았다.

그러나 강한이 외면했으므로 주인은 머리를 돌려 여자를 보았다.

 

"계약서 갖고 있지요? 여기 보증금 가져 왔으니까 받았다는 영수증 써 주시고…."

 

그때 강한이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요?"

 

주인이 멍해진 얼굴로 강한을, 다음에는 황택수를 보았다.

황택수도 눈만 크게 떴으므로 주인의 시선이 다시 강한에게도 옮겨졌다.

강한이 주인을 노려보았다.

 

"이 돼지가 아주 나쁜 새끼구만. 야! 이 개자식아.

월세 보증금만 돌려주면 바로 방 빼게 되는거냐?

이런 호로자식이 다 있네. 너 잠깐 이리로 와봐."

 

하면서 강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인의 멱살을 틀어 쥐었다.
멱살을 잡고 비틀어 올렸으므로 금방 숨이 막힌 주인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너, 이런 식으로 돈 없는 사람 몇이나 길거리에다 내팽개쳤어! 말해."

 

"아유, 숨."

 

하고 사내가 강한의 멱살을 쥔 손을 잡았지만 힘으로 당할 수는 없다.

얼굴이 검붉게 된 사내가 발버둥까지 쳤을 때 강한이 손을 풀면서 벽에다 밀었다.

 쿵, 소리와 함께 등과 머리를 벽에 부딪친 사내가 주저앉았다.

 

"아이를 방으로 데려가요."

 

강한이 온몸을 굳히고는 숨도 쉬는 것 같지 않은 여자에게 말했다.

그러자 3초쯤이 지나서야 말을 알아들은 여자가 아이를 안은 채 일어서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엎어졌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나 아이를 끌고 방으로 갔다.

강한이 다시 사내에게로 다가가 섰다.

 

"너, 이 새끼. 그따위 수작을 했다가는 내가 아주 회를 떠먹을거여."

 

하면서 가슴에 찬 가죽 칼집에서 길이 30센티짜리 회칼을 꺼내 사내의 볼에 붙였다.

찬 기운이 볼에 닿는 순간 사내는 몸서리를 쳤다.

 두 눈은 잔뜩 치켜뜨고 있었지만 초점이 없다.

 마치 죽은 동태 눈깔이다.

 

"먼저 한점 떠 줄까?"

 

하고 횟칼의 날을 귀에 붙였을 때 사내가 부들부들 떨었다.

 

"살려주십셔."

 

"이 새끼, 불알을 떼버릴까?"

 

하면서 강한이 한 손을 쑥 사내의 바지혁대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 순간 손에 사내의 오그라진 고환이 잡혔다.

 

"아그그그."

 

회칼은 귀에 붙었고 고환은 손에 잡힌 사내가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지만 꼼짝도 하지 못한다.

 

"으으악."

 

그순간 사내의 입에서 숨이 끊어지는 것 같은 신음이 터졌다.

강한이 고환을 꽉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사내가 온몸을 오그렸을 때 강한도 손을 빼냈다.

귀에 붙인 회칼도 떼낸 강한이 발길로 사내의 옆구리를 찍듯이 찼다.

 

"어억."

 

사내가 한 바퀴 뒹굴었을 때 강한이 잇사이로 말했다.

 

"각서를 써라. 월세 올리지 않고 세입자가 원하는 날까지 살게 한다고."

 

그리고는 생각난듯 덧붙였다.

 

"만일 각서 내용을 어겼을 때 1억 위자료를 지급한다고. 이건 확인서로 받아."

 

강한이 그때까지 얼어 붙은 것처럼 서있던 황택수에게 말했다.

 

"확인서를 말야. 알았어?"

 

"알았어. 형."

 

"빈틈없이."

 

"알았다니까."

 

심호흡을 한 황택수가 집주인 사내에게 다가갔다.

 황택수는 행정 담당이다.

사내가 폭행당한 사실이 없다는 각서까지 받아낼 것이었다.

 

"자, 우리 저 방으로 가실까?"

 

하고 황택수가 이번에는 목표를 바꾸고 말했다.

이제 강한의 의도를 안 것이다.

 

 

 

5.

 

 

윤명심의 창백한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방바닥에 앉은 윤명심이 시선을

강한의 가슴께에다 둔채로 꼼짝하지 않는다.

여자 아이는 제 엄마 옆에 딱 붙어 앉아 있었는데 역시 그대로 가만히 있다.

다만 시선이 강한의 얼굴에 똑바로 향해진것이 다르다.

 방바닥에는 집주인 돼지가 써놓고 간 각서와 확인서,

그 확인서를 강압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확인서까지 세장의 서류가 나란히 놓여졌다.

윤명심이 읽도록 그쪽을 향해서 펼쳐져있는 것이다.

집주인 돼지는 10분쯤 전에 황택수와 함께 나갔는데 지금 마무리 공사중일 것이다.

마무리 공사란 뒷탈이 없도록 어르고 겁주는 일인데 그것도 황택수 담당이다.

이윽고 강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시는거 압니다."

 

강한이 윤명심을 보았지만 시선은 올라오지 않았다.

강한이 입을 열었다.

 

"내가 좀 이상합니다. 나도 알아요."

 

"……."

 

"이 서류 다 읽어 보셨으면 내가 보관하고 있지요.

저 돼지는 아마 두번다시 방 빼라는 소리 못할겁니다."

 

"……."

 

"그리고 채무는 무기한 보류시키지요."

 

"……."

 

"무슨일 있으면 저한테 전화 하세요."

 

하면서 강한이 윤명심 앞에 명함을 놓았다.

 

"내가 담당으로 있는한 돈 안갚으셔도 됩니다. 찾지도 않을 테니까요."

 

그때 윤명심이 시선을 들어 강한을 보았다.

눈이 맑았다.

물기가 배어져 있어서 번들거렸다.


"왜 이러시죠?"

 

윤명심의 목소리가 떨렸고 아이가 엄마의 허리에 더 딱 붙었다.

그러나 시선은 강한한테서 떼어지지 않는다.

 

"이러시니까 더 겁나요."

 

눈을 크게 뜬 윤명심이 한마디 한마디를 또박또박 말했다.

 

"차라리 내 쫓기던지 행패를 당하는 것이 낫겠어요."

 

이번에는 강한이 가만 있었고 윤명심의 말이 이어졌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요. 미칠것 같아요."

 

"엄마."

 

하고 아이가 엄마를 불렀을때 강한이 말했다.

 

"내 아버지가 사흘전에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집을 나가 강릉 근처의 산에서 나무에 목을 매셨는데."

 

놀란 윤명심이 아이를 끌어 안았다.

그때 앞에 놓인 서류를 챙기면서 강한이 말을 이었다.

 

"어제 화장을 시켜드리고 오늘 출근한 길이지요.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시고 무기력하게 사시다가 마지막에 용기를 내신것 같습니다."

 

"……."

 

"저한테 유서를 남기셨는데 난 아직 읽지도 않았습니다."

 
서류를 한손에 움켜쥔 강한이 다른 손으로 제 가슴을 두드려 보였다.

 

"그냥 갖고만 있죠."

 

자리에서 일어선 강한이 윤명심을 내려다 보았다.

 

"읽지 않고 놔두니까 아버지가 아직 살아서 가슴 주머니에 계신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야, 한아. 어서 읽어라. 하시는것 같고."

 

그리고는 강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아마 뻔한 이야기겠죠. 미안하다고. 동생 잘 부탁한다고,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

 

"이유가 없어요. 나도 좀 미쳐서 아까 그랬다고 생각 하십쇼."

 

그리고 몸을 돌렸을때 윤명심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잠자코 등을 보인채 강한이 신발을 신자 윤명심이 말을 이었다.

 

"저, 열심히 살게요."

 

강한이 문의 손잡이를 잡았을때 윤명심이 서두르듯 말했다.

 

"제가 전화 드려도 되죠?"

 

강한이 앞에다 대고 머리를 끄덕였지만 윤명심은 보았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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