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등록문화재 제34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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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자유만세(自由萬世) |
분 류 | 등록문화재 / 기타/ 동산(영화)/ 동산(영화) |
수량/면적 | DN 35mm(사운드 이미지 각 6권) 상영시간 50분 |
지정(등록)일 | 2007.09.17 |
소 재 지 | 서울 마포구 상암동 DMC단지 1602 |
시 대 | 기타 |
소유자(소유단체) | 한국영상자료원 |
관리자(관리단체) | 한국영상자료원 |
일반설명
자유만세(自由万歲 , Hurrah for Freedom)는 1946년에 고려영화사에서 제작한 정예감독으로 알려진 최인규(崔寅奎) 감독의 영화작품으로 해방 후 1년의 상념을 다듬어 완성한 극영화, 고려영화사 제 1회 작품. 일제시대 한국영화계를 대표했던 전창근(全昌根)의 배우 데뷔작으로 전창근(全昌根)이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출연했으며 일본 동보영화사에서 촬영을 배우고 돌아온 한형모(韓瀅模), 한국영화 조명기사 1세대인 김성춘, 한국영화 최초의 편집기사인 양주남 등이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이때 ‘자유만세’ 스태프로 최인규 문하에서 연출 수업을 쌓은 홍성기, 정창화, 신상옥 등이 등장한다. 당시 신상옥은 고려영화협회 미술부에서 영화 포스터를 그리거나 세트를 만드는 일을 했다. 또한 영화 ‘국경’을 제작한 최병규에 이어 이 영화를 제작한 최완규 역시 최인규(崔寅奎)의 친형이자 영화배우 김신재의 남편이기도하다. 당시 평단은 이 한 편을 통해 우리 영화의 나아갈 길이 명시되고 있다고 평한다. 주제가 기술보다 앞선다는 명제는 조선영화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영화의 생명은 주제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으며 이런 의미에서 ‘자유만세’는 조선 최초로 혁명투사를 묘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제작비가 17만 원이었는데, 당시 평균 제작비가 10만 원 안팎이었던 데 비하면 대작에 속한다. 개봉 당시 해방의 감격에 들떠 있던 관객들의 호응으로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독립운동을 하던 혁명투사 한중(전창근)은 동창생이자 일제의 앞잡이인 남부(독은기)에게 체포된다. 그러나 한중은 감옥에서 탈출한 후 무장봉기를 일으키려다 다이너마이트를 옮기던 동료(김승호)가 잡히자 그를 구출하고 남부의 애인 미향(유계선)의 아파트로 피신한다. 한중에게 매료된 미향은 한중을 숨겨 주고 한중의 지하조직에 찾아가서 정보와 자금을 전달한다. 그 뒤를 밟던 남부와 현병들에게 미향은 총에 맞아 죽고 한중은 총상을 입고 대학병원으로 옮겨진다. 여기서 간호부 혜자(황려희)의 도움으로 병원을 탈출한 후 산으로 도망치지만 남부 일행은 한중을 사살한다. 남부도 결국 총에 맞아 쓰러진다. 그날 밤이 밝으면 광명 해방이 되는 줄 죽은 이들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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