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려

제17대 인종(仁宗,1122~1146 재위24년)

오늘의 쉼터 2009. 7. 30. 12:10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충열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

공민

우왕

창왕


 

 

제17대 인종(仁宗,1122~1146 재위24년)

 

  인종은 예종의 맏아들이자 순덕왕후 이씨 소생으로 1109년 10월 기해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해(楷), 초명은구(構). 자는 인표(仁表)이다.그는 1115년 2월 7세의 나이로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너그럽고 자비로웠다고 하며 또, 학문을 좋아하고 스승과 벗에 대한 예가 밝았다고 한다.

  1122년 4월 예종이 죽자 이자겸 등에 의해 14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인종은 역사가들에게 두가지 다른 평가를 듣기도 하는데 인(仁)을 갖춘 왕이라고 하는 평이나 아니면 유유부단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김부식은 앞의 평가를 내려 그에게 어질인(仁)자를 붙여 묘호를 인종이라 하였다.

 1123년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 학식(學式)을 만들게 하였는데, 국자학(國子學)은 3품 이상, 태학(太學)은 5품 이상, 사문학(四門學)은 7품 이상의 자손을 입학하게 하였다.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이면서 장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자겸은 막대한 권력을 휘둘렸으며 이에 만족하지 않고 왕위자리까지 넘보다가 난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이자겸의 난이라 할 수 있다. 1126년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최사전(崔思全)과 척준경(拓俊京)을 시켜 난을 진압하고, 이자겸을 잡아 영광으로 유배시켰다. 
  1127년 이자겸의 난을 진압한 척준경을 정지상이 탄핵하여 유배하고, 중외(中外)에 조서(詔書)를 발표하여 각 지방의 주현에 향학을 세워 지방자제들의 교육을 진작시켰다.

 1128년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정지상(鄭知常) 등이 주장한 서경길지설(西京吉地說)에 공감하여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 대화궐(大華闕)을 짓고 수시로 서경을 순행하였다. 
 1129년 서적소(書籍所)를 설치하여 정치하는 여가에 여러 학사들과 학문을 탐구하고 서적을 강독하게 하였다. 

 1131년 서경의 대화궁에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하여 여러 부처와 명산의 신(神)을 제사하게 함으로써 서경천도론이 크게 일어났다.
 1133년 무학재(武學齋)를 폐지함으로써 무예로 선비를 뽑는 일은 없어졌다.

 1135년 묘청·정지상·백수한 등이 서경천도론·금국정벌론·칭제건원론 등을 내세웠으나, 김부식(金富軾) 등에 의해 좌절됨에 따라 묘청의 난이 일어나니 김부식을 서경정토원수(西京征討元帥)로 삼아 난을 평정하게 하였다.

 1145년 김부식 등에게 관찬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이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史記》를 모방한 기전체(紀傳體)로 50권이나 되는 방대한 것이었다. 인종은 정국의 어려움으로 많은 고초를 겪다가 1146년 2월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3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장릉(長陵)이며, 시호는 효공(孝恭)이다. 


                                                                               출처:
미르나라


   인종 공효대왕의 휘는 해요 자는 인표며 고휘는 구니 예종의 장자이다. 모는 순덕왕후 이씨로서 예종 4년 10월 기해에 탄생하니 성품이 인효관자하였다. 10년 2월에 왕태자가 되었으며 17년 4월 병신에 예종이 훙하니 예종의 여러 동생들이 왕이 유소 하므로 자못 넘겨다 보는 마음(기유심)이 있는지라 평장사 이자겸이 왕을 받들어 중광전에서 즉위케 하니 왕이 조석으로 빈전에 존예하고 곡용하여 슬퍼함을 극진히 하니 좌우 시신들도 애통하여 마지않았다. 정유에 왕이 경영전에 나아가 즉위함을 고하고 사신을 보내어 대묘와 9릉234)에 고하였다. 갑인에 예종을 유릉에 장하였다. 5월 경오에 대묘에 향사하였다. 신미에 모후를 추존하여 문경왕태후라 하였다. 을해에 이자겸으로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를 삼고 김경용으로 락랑군개국공을 삼고 이위으로 계양공을 삼고 임유문과 김준으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삼고 한안인으로 중서시랑평장사를 삼고 최홍재 김약온으로 참지정사를 삼고 이자량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김고로 지추밀원사를 삼고 문공미로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병자에 윤유지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이영천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최탁으로 호부상서를 삼았다. 정축에 태후 봉숭시에 집사한 관리들에게 직 1급을 사하였다. 무인에 태후를 봉숭하였으므로 써 신봉루에 거동하여 사하였다. 6월 무자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기해에 승 덕연으로 국사를 삼고 학일로 왕사를 삼았다. 경자에 려수하였다. 신축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정미에 송의 지첩사 진무교위 요희 등 69인이 왔다. 추 7월 무오에 참지정사로  치사한 이궤가 졸하였다. 경오에 친히 금강경도장을 건덕전에서 3 7일간 설하였다. 신미에 숭복전에서 초제하였다.

   기묘에 친히 우제를 행하였다. 신사에 삼품이상의 관리들에게 명하여 도성에 모여 중형을 의론케 하였다.

   8월 경인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중형을 결재하였다. 기해에 라경순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임인에 친히 우제를 행하였다. 9월 갑자에 조하여 생진인 안정절을 고쳐 경룡절이라 하였다. 을해에 명하여 예종실록을 편수케 할새 보문각학사 박승중 한림학사 정극영 보문각대제 김부식을 편수관에 충용하였다. 기묘에 려수하였다. 동 10월 임진에 회경전에서 백고좌도장을 설하고 승 3만을 중외에서 재식케 하였다. 경자에 이자겸을 책하여 한양공을 삼았다. 계묘에 친히 우제를 행하였다. 11월 정묘에 팔관회를 설하고 장전에 거동하여 하례를 받고 법왕사애 행차하였다. 동녀진 추장인 실현이 와서 마를 바쳤다. 병자에 친히 궐정에서 년 80 이상된 남녀와 의부 절부 독폐질자들을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는데 특히 이자겸의 모 김씨에게는 금백과 약물을 가등하여 사하였다. 12월 병술 삭에 친히 우제를 행하였다. 병신에 대방공 보를 경산부에 추방하고 중서시랑평장사 한안인과 합문지후 이중약을 죽이고 추밀원부사 문공미 보문각학사 정극영 지어사대사 이영 상서우승 한안중 예부랑중 한충 승선 한주 시어사 임존 합문지후 문공유 우정언 최거린 원외랑 임원준을 외지에 류배하였다. 무술에 최홍재로 권판추밀원사를 삼았다. 기유에 여수하였다.

계묘 원년 춘 정월 갑자에 송의 지첩사 허립이 왔다. 기사에 친히 순복전에서 초제하였다. 경오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경진에 친히 건덕전에서 초제하였다. 임오에 중서시랑평장사 이자량이 졸하였다. 2월 갑오에 친히 궐정에서 초제하였다. 무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계묘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가 장원정으로 이어하였다. 3월 병자에 려수하였다. 하 4월 정해에 왕이 환궁하였다. 계사에 왕이 예종의 소상임으로 안화사에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계묘에 변순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기유에 친히 우제를 행하였다. 경술에 김연으로 판비서성사 감수국사를 삼았다. 임자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5월 정사에 한재로서 정전을 피하고 승을 내전에 모아 불경을 강하고 비를 빌었다. 기미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계해에 려수하였다. 갑자에 토룡을 만들고 무를 모아 비를 빌었다. 귀산사에 행차하였다. 기사에 회경전에서 초제하고 비를 빌었다. 6월 계미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유에 동남해도부서사 박경린이 착보하기를 「여진병선 30소가 변경을 래침한다」하므로 가발병마판관 양제보 등을 보내어 이를 막게 하였더니 경주에 이르렀으나 로를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갑오에 송의 국신사 예부시랑 로윤적과 중서사인 부묵경이 왔다. 경자에 조를 회남전에서 맞이하니 조하기를 「멀리들으매 나라를 이음에 있어 바야흐로 법도를 근수한다고 하도다 믿노니 선계의 처음에 있어 잘 통승의 기대에 (맞도록) 힘쓸 것이다. 벼란간 변고를 겪게 되니 근심하고 슬퍼함이 심극하리라. 드디어 사신을 급히 보내어(사지화) 가서 상현235)의 총영을 유시케 하며 사여함을 성하게하여 아울러 애영236)을 보이나니 마땅히 삼가 왕명(왕영)에 복사하여 써 길이 제후237)의 법도(후도)를 준수할지어다. 지금 경에게 예물을 별녹과 같이 갖추어 사하노라」고 하였다. 계묘에 왕이 혼당에 나아가 제전과 조위하는 조서를 받으니 조 하기를 「오직 경의 선왕은 명덕을 삼가히 하고 그 위를 편안히 하여 나 한사람(자일인=천자)을 보필하더니 천명은 믿기 어려운지라 갑자기 부음으로 써 고해 오도다 영모함을 생각할 때 진실로 애통함이 극하도다 찬사의 처음이니 (구유의) 천수238)를 부탁하노라 힘써 슬픔을 억제하여 써 (나의) 권회에 부응케 하라. 지금 제전과 조위하는 예물을 사하노니 이르거던 영납하라」고 하고 예종을 제하는 문에는 「오직 왕은 몸소 순일한 덕을 지니고 동토를 사유하니 효우숙공하여 신지를 순봉하고 능히 전대의 문인239)을 이으니 사국240)이 이를 본받아 충성이 일찍 들어났고 의는 근왕에 돈독하여 진렬한 공물이 뜰에 쌓여 복명함이 오직 성근하였도다. 짐이 생각컨대 왕은 창해의 일우에 개재하여 능히 봉헌(#;15-199)에 뜻을 쓸줄 아니 그 마음은 왕실에서 떠나지 않았도다 경의 큰 업적을 가상하여 권고함을 잊지 않고 바야흐로 장차 다시 사신을 신칙하여 가서 그 뜻을 유시하고 경의 나라에 진무를 보이려 하였더니 누가 한 늙은이를 하늘241)이 남겨주지 않아(천불?(#;15-200)유) 갑자기 흉보를 들을줄 알았으랴 방국이 진췌하매 나의 마음도 놀라 슬프도다 지금 경에게 애휼하는 예전을 사하여 써 그 현덕을 포창하며 경의 국도를 안정케 하노라 바라노니 영령은 와서 나의 총령함을 흠향하여 길이 유복을 경의 후대에 전수하여 휴명(천의 미명)에 복사하기를 싫어하지 말게 할지어다」고 하였다. 로윤적 등이 왕에게 고하기를 「황제께서 선국왕이 훙서하고 사왕이 대업을 전해 받음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전제를 거행케 한 바이며 적위의 조서의 제문은 다 어제의 친찰입니다. 원풍년간242)의 제적는 다만 상례에 그쳤으나 금차의 은례는 심이 특이한 것입니다 대관년간243)에 내리신 조서내에 특히 권자를 제거함은 써 진왕의 예를 명시함이러니 금차의 어찰에 있어서도 또한 특수한 은총을 명시한 것입니다 다만 선왕께서는 이미 료의 책명을 받은 고로 짐짓 말씀드리기를 피휘하였으나 지금은 료의 명이 이미 끊어졌으니 가히 써 우리 조정에 청명함직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답하기를 「폐방은 조종 이래로 화풍을 악모하였으며 하물며 우리 선고께서는 예로써 사대하였고 충으로써 술직하사 비록 해외에 있었으나 마음을 항상 왕실에 있은 고로 천자께서 밝고 자세히 아시와 자주 총택을 가하셨으며 이제 또 친제의 제문으로 특히 이은을 보이시고 신에게 주신 직함에도 또한 권자를 제거하셨으니 비록 선고께서는 일찌기 이런 예우를 입었사오나 소자가 어찌 족히 써 이에 당하리요 책명이라 함은 천자가 제후를 포상하는 대예전인지라 이제 상제(상중)를 마치지 못하였는데 벼란간 대전을 구함은 의리에 미안하며 실로 황공하고 부끄러움을 더할 뿐이니 바라건데 명년에 사신을 보내어 사은하고 아울러 미성을 달코자 하니 오직 공등은 잘 펴어 주달하라」고 하였다. 갑진에 려수하였다. 무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추 7월 신유에 송의 사신 로윤적 등이 돌아가니 왕이 표문을 부쳐 써 사례하였다. 임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을축에 중서시랑평장사 김고가 졸하였다. 계유에 친히 소재도장을 건덕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8월 신사 삭에 일식하였다. 경자에 이자겸으로 판서경류수사를 삼았다. 갑진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하칙보를 보내어 료에 가게 하니 용주에서 배를 탔으나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9월 을묘에 왕이 문경태후의 기진이므로 안화사에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정사에 내외의 중형을 결재하였다. 기미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병자에 려수하였다. 동 10월 을유에 친히 우제를 행하였다. 무자에 백고좌도장을 회경전에 설하고 승 3만인을 공양하였다. 11월 임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12월 임오에 사(완)사하고 산천에 질사하고 기노 및 독폐질자들을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병오에 김지화로 판병부사를 삼고 임유문 최홍재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삼고 김약온으로 중서시랑평장사를 삼고 척준경으로 리부상서참지정사를 삼고 박승중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김인규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이자덕으로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갑진 2년 춘 정월 병진에 낮이 어두웠다. 신유에 문하시랑평장사 김준이 졸하였다. 2월 을유에  동지추밀원사 최홍재를 승주 욕지도에 류배하였다. 3월 기사에 상서우복사 이덕우가 졸하였다 (그는) 문한으로 자부하여 일찍 숙종실록을 편수한 공로로서 호부시랑을 제배하였다. 윤월 갑신에 해가 붉고 빛이 없었다. 을유에 친히 궐정에서 초제하였다. 병술에 햇빛이 황적색이었다. 임진에 대풍이 불고 낮이 어두웠다. 하 4월 정사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임신에 예종의 수용(진영)을 경령전에 봉안하였다. 혜종의 신주를 천봉하고 갑술에 예종을 대묘에 부제하였다. 5월 정축 삭에 고효충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경자에 송의 상인 류성 등 49인이 왔다. 처음에 명주의 두도제와 축연조가 상선을 따라 본국에 와서 돌아가지 않으매 명주에서 두번이나 글을 보내어 찾았으나 국가가 상표하여 머물러 두기를 청하였더니 이 때에 성 등이 와서 명주가 성지를 받들어 이첩할 것을 전하니 그 첩에 이르기를 「두제 등은 편의에 맡겨 거주토록 할 것을 허한다」고 하였다. 6월 정미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무신에 령통사에 행차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숭복원을 수리케 하였다. 신유에 현릉에 배알하고 계해에 창릉에 배알하고 정묘에 유릉에 배알하고 계유에 수릉에 배알하였다. 추  7월 기묘에 친히 대묘에 체제하였다. 갑신에 이자겸을 책하여 조선국공을 삼았다. 무자에 추밀원부사 이자덕과 어사중승 김부철을 송에 보내어 사은하고 방물을 바쳤다. 8월 무오에 이자겸이 그 제3녀를 왕에게 바치니 경신에 백관이 납비함을 하하였다. 갑자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대사하고 교하기를 「짐이 욕되게 상사(태자)로서 외람되히 진궁244)에 있을 때로부터 능히 효행으로써 군친을 받들고 인덕이 일반 인민에게 들리(문)지 못한지라 천이 불조하사 화를 만나 달을 바꾸어245) 상을 마치니(역월종상) 궁검246)을 안고(포) 슬피 호읍하며 갱장247)을 보고 길이 추모하노라 외가의 장을 추존하여써 선후의 영을 위로코자 하노니 하물며 조선국공은 충성으로 협보하여 공업이 이미 높았으니 사신을 보내어 공 및 부인을 책명하고 겸하여 모든 자서들을 서용하리라 마땅히 여은으로써 내외에 미치게 하여 참 교 이죄 이하는 다 사하여 면제케 하고 산천에 망질하고 로인 밎 독폐질자와 환과 고독 의부 절부를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할 것이며 모든 유직자에게도 각각 차서대로 승직케 하라」고 하였다. 임신에 하교하여 왕매인 승덕궁주를 책명하여 장공주를 삼고 재추 시신들과 밤이 새도록 곡연(소연)하였다. 9월 경진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서 6일간 경천하였다. 병신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여 재추 사신들을 향연하였다. 동 10월 정미에 경룡절이므로 군신을 건덕전에서 향연하고 상참 이상의 관리들에게 각각 마 1필씩을 사하고 또 재추 시신들을 함원전에서 향연하였다. 임자에 왕매인 흥경궁주를 봉하여 공주로 삼았다. 갑진네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12월 갑자에 임유문으로 검교태보 수태위 판상서호부사 상주국을 삼고 김약온으로 검교사도 수사공 문하시랑평장사 상주국을 삼고 척준경으로 검교사도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를 삼고 이수로 검교사도 수사공 참지정사를 삼고 박승중으로 검교사공 정당문학 판한림원사를 삼고 김인규로 검교사공 리부상서 지문하성사를 삼고 이자덕으로 공부상서 지추밀원사를 삼고 허재로 동지추밀원사를 삼았다.

을사 3년 춘 정월 경인에 이자겸이 또 제4녀를 왕에게 바치니 임진에 백관이 납비함을 하하였다. 3월 기묘에 제하기를 「의주랑장 유청이 일찍 북료에 포노되었다가 이제 몸을 빼어 돌아왔으니 마땅히 서울에 오게 하여 본직을 주고 일행의 군인 충점에게도 또한 본주교위를 제수하라」고 하였다. 경진에 려수하였다. 기해에 숭복원에 행차하여 호를  흥성사라 사하고 재를 베풀고 음악을 벌려 써 낙성을 축하고 인하여 재추 시종관들을 향연하였다. 경자에 환궁하여 사하였다. 하 4월 경술에 이자겸의 제택에 행차하여 잔치하고 밤이되어 환궁하였다. 무진에 보제사에 행차하여 비를 빌었다. 5월 임신 삭에 사재소경 진숙과 상의봉어 최학란을 금에 보내었으나 금이 국서가 표문이 아니고 또 칭신하지 않았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축에 묘통사에 행차하여 비를 빌었다. 병신에 친히 궐정에서 초제하였다. 6월 임인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사에 재차 우제하였다. 정미에 비가 내렸다. 추 7월 경오 삭에 이양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8월 기미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9월 임오에 악랑백 김경용이 졸하였다. 동 10월 기유에 문하시랑평장사로 치사한 임유문이 졸하였다. 11월 정축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12월 임술에 척준경으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삼고 이수로 중서시랑평장사를 삼고 박승중 이자덕 김인규로 함께 참지정사를 삼고 허재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이지미로 지추밀원사를 삼고 지록연 김진 김부일로 함께 동지추밀원사를 삼았다. 이 해에 금이 료를 멸하였다.

병오 4년 춘 정월 갑오에 백홍이 관일하였다. 2월 정사에 회안백 기가 졸하였다. 무오에 순종의 연복궁주 김씨가 졸하였다. 경신에 왕비 이씨를 책하여 연덕궁주를 삼았다. 신유에 내시지후 김찬 내시록사 안보린이 동지추밀원사 지록연 상장군 최탁 오탁 대장군 권수 장군 고석 등으로 더불어 이자겸 척준경을 주살하려 꾀하다가 이루지 못한지라 자겸과 준경이 군사를 들어 궁궐에 침범하여 임술에 궁궐을 불사르고 계해에 왕을 겁박하여 남궁에 옮겨 모시고 안보린 최탁 권수 고석 및 숙위좌복사 홍관 등 17인을 살해하고 그 나머지 군사로 죽은 자도 가히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갑자에 자겸 등이 지록연 김찬을 위지에 류배시키다가 도중에서 록연은 살해하였다. 3월 정묘 삭에 자겸이 왕을 겁박하여 자기 집에 옮겨 모셨다. 신미에 국가가 다사하므로 과거를 정지하였다. 신묘에 백관을 불러 금을 섬김에 대한 가부를 의논하니 다 불가라 하는데 홀로 이자겸과 척준경이 말하기를 「금은 옛날 소국으로서 료와 우리나라를 섬겼으나 이제 이미 갑자기 흥융하여 료와 송을 멸하고 정사가 잘 행하고 군사가 강하여 날로 강대하여지며 또 아국과 경계가 상접하여 있으니 형세가 섬기지 아니할 수 없으며 또한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김은 선왕의 도리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어 빙문하여야 할 것이다」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계사에 누런 안개가 사방에 찼다. 갑오에 했빛이 피와 같았다. 을미에 이지미를 보내어 대묘에 고하고 금을 섬김이 가한가 불한가를 점치게 할제 그 문(점사)에 「저 여진은 존호를 자칭하고 남으로 황송을 침략하고 북으로 대료를 멸하여 사람을 얻음(취)이 이미 많고 경역을 개탁함이 또한 넓은지라 돌아보건대 소국은 저(금)와 강역을 련접하였으니 혹은 장차 사신을 보내어 강화할가 혹은 군사를 길러 변에 대비할가 의심을 대서에 묻(계)노니 신께서는 이것을 결정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참 교 이하의 죄를 사하고 이자겸과 척준경의 일당은 사직을 호위하였다 하여 직을 제수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하 4월 병오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니 이자겸이 호종하였는데 왕이 옛 궁전을 회망하고 현연히 눈물을 흘렸다. 정미에 정응문과 이후를 금에 보내어 신이라 칭하고 상표하기를 「대인께서 통업을 드리(수)우니 위엄(진)은 사방에 빛나 이국이 입조하매 사신이 만리의 산해를 넘어오거든 하물며 접경의 가까움에 오리까 진실로 정성을 바침이 특히 부지런하여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하늘이 내신 영명으로 덕업을 날로 새롭게 하사 환호248)가 일발하면 뭇사람이 기뻐 딸치 않는 자가 없고 위엄 있는 소리가 가하여지면 인적이 능히 저항(지오)249)치 못하니 실로 제왕의 높은 의태(치)로서 마땅히 천지의 가호라 하겠읍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신은 척토의 소국에서 미약한 몸에 박덕한 사람으로서 비상한 공적을 듣고 오래전에 이미 적건을 기울이기에 마음을 다하였나이다 오직 불전250)의 물품이오나 가히 충신의 뜻을 펴(신)게 된다면 비록 빈번251)의 천을 부끄러워 하오나 간절히 산수252)의 장을 기대하나이다」고 하니 금이 회조하기를 「상표한 바를 살펴 보매 칭신하고 아울러 진봉한 토물과 필단 등사를 자세히 알겠도다 짐이 생각컨대 망도253)를 취하는 자에 대하여는 밀어서 망케 하고 존도를 취하는 자에 대하여는 도와서 안국하게 함은 실로 제왕의 하는 일이요 소국으로 대국을 섬김은 곧 사직의 허책(도)이로다 아아 괴위한 큰 재질로 변통254)의 원대한 업을 온축하였도다 경은 가계가 왕작을 전수하여 대대로 조봉 향수하고 표장을 올려 존숭하는 성의를 다하고 토산255)의 공부(임토)로 위수의 례절을 다 하도다 인하여 비호(신)를 칭하니 족히 전능함을 알겠도다 무력(병혁)의 위협을 가함도 아니요 옥백의 은혜로 유혹함도 아니로되 자연적으로 래부하니 착한 일이라 하지 않겠는가 또한 군부의 마음은 내가 이미 견독히 하였으니 신자의 의는 그대가 쉽사리 잊지 말라 복세복년256)에 이것을 상훈으로 할 것이다 이 밖에 행하여야 할 조건 등이 있으면 곧 사신을 보낼 것이니 먼저 가서 선유케 하노라」고 하였다. 신해에 척준경으로 문하시랑 판병부사를 삼고 이수로 문하시랑평장사 판예부사를 삼고 이자덕 허재로 함께 참지정사를 삼고 김부일로 정당문학을 삼고 이지미로 판추밀원사를 삼고 김향 김의원으로 함께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김부식으로 어사대부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5월 병인 삭에 연경궁에 이어하였다. 을해에 큰 우박이 내렸다. 병술에 문무백관에 명하여 승을 재식하고 비를 빌게 하였다. 을유에 이자겸이 군사를 보내어 장차 침(#;15-210)전에 범입하려 할새 왕이 비밀히 척준경에게 유시하여 자겸을 잡아 가두게 하였다. 병술에 이자겸과 그 처자를 외방에 류배시키고 그 여당은 위지에 분산류배시켰다. 정해에 선지하기를 「짐이 유소한 몸으로 조업을 이어 받아 마음으로 외가에 의뢰코자 하여 일에 대소 없이 일절를 위임하였더니 마음대로 탐폭한 짓을 하여 백성을 잔상하고 국가를 해쳤도다 짐이 비록 이것을 알았으나 방어하지 못하였더니 금월 20일에 이르러 환난이 창졸간에 일어나매 판병부사 척준경이 창의하여 난을 평정하였도다 그 공은 가히 잊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소사로 하여금 논공행상을 할 것이며 군기소감 최사전도 동심으로 긴밀히 보좌하였으니 가히 아울러 공을 상하라」고 하였다. 신묘에 평장사 박승중을 울진에 류배시켰다. 6월 병신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진에 소재도장을 천복전에 설하였다. 을사에 척준경으로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이공수로 판이부사를 삼고 김향으로 호부상서 지문하성사를 삼고 최사전으로 병부상서를 삼았다. 을묘에 이자겸의 녀 2비를 폐출하고 전중내급사 임원애의 딸을 드려(납) 비로 삼았다. 경신에 이진복으로 우복사 응양군상장군을 삼고 고공현으로 병부상서 용호상장군을 삼고 림수로 전중감 좌우위상장군을 삼고 또 정유황 등 20인은 왕을 호종한 공과 및 적을 포획한 공이 있었으므로 직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추 7월 정미에 송(흠종)이 합문지후 후장과 귀중부 등 60여인을 보내왔다 왕이 조를 천복전에서 맞이하니 조에 「짐이 황태자로 있은지 10유여년에 감히 태일함이 없었음은 사방에 알려(문)진 바이다 도군태상황제(휘종)께서는 재위한지 날이 오래매 만기의 번잡함을 싫어하사 이에 내선257)을 의논하게 되었다 짐이 사양하여도 윤허의 명을 얻지 못하여 드디어 보위에 오르게 되었노라 깊이 조종의 기업의 숭귀함과 상황의 부탁의 소중함을 생각하여 서야로 마음이 조려 그 임무를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터이다 그런데 금인이 무도하여 곽약사258)의 배반함을 틈타 연산259)을 함몰하고 변경을 침요하기 시작하여 도기에 까지 달하게 되었도다 지금 짐이 즉위한 처음에 있어 이러한 놀랠일을 만난 고로 미처 왕에게 알리지 못하였노라 짐이 생각컨대 왕은 대대로 충효를 이루어(제) 빛나는 책명을 받았으며 옛 번병으로 오랫동안 국은을 받았도다 그리고 우리 열조260) 신종황제께서는 사신을 명하여 빙예를 닦을제 례의가 극진히 갖추어져 정은 골육(골육지친)과 같고 의는 곧 군신이었다. 우리 도군태상황제(휘종)에 이르러서는 사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져서 대우가 가등하였도다 짐이 생각컨대 중국과 왕은 멀리 료해를 격하여 있으되 은예가 이와 같음은 어찌 다른 뜻이 있으리오 어지러운 일에는 적개261)함이 있기를 바라는 것 뿐이다 왕의 나라는 금과 더불어 서로 바라보고 있어 수백리로 떨어져 있지도 아니한데 능히 그 소용을 소탕하여 써 중국에 보답치 아니하니 어찌 루대의 특별히 대우한 뜻이리오 금인이란 본래 일찌기 왕에게 신속되어 해변에 모여 살던 추로로서 천을 배반하고 신을 거역하여 계란을 멸절하고 드디어 중국을 능멸하며 ?(#;15-212)포이 더욱 심하니 그 뜻을 얻게 하면 왕에게 무슨 소득이 있으리요 고군으로 심입하면 이세에 마땅히 적을 초멸할 것이로되 짐은 그들이 숙왕262)을 겁질하여 갔으므로 다만 장사를 명하여 구축하여 출경케 하고 장차 천하의 군사를 일으켜 소추를 문죄코자 하니 왕은 그 군사를 솔려하여 서로 표리가 되어 써 천주를 행할지어다 대저 왕263)에게 죄악을 진 자(왕특)는 다스려 멀리 하여야 하는 것이니 본조에 부획을 바쳐 써 중국의 수세의 은을 갚는 것은 대충이요 난을 다스리고 우매한 것을 치며 ?(#;15-212)포한 자를 주토하여 써 위엄을 사막 밖에 펴는 것은 대의요 땅을 넓히고 국경을 열어 그 소용을 엎어(복) 갑자기 교만하여 신답지 못한 호로를 보복함은 대위라 할 것이다 일거하여 삼자를 다 얻을 것이니 왕은 무엇을 꺼려하여 그 것을 하지 않는가 고작과 후사도 짐은 왕에게 아껴할 것이 없으니 왕은 힘쓸지어다」라고 하였다 후장이 사관에 있으면서 또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장등이 올 때에 황제의 성지를 받자왔읍니다 조종께서는 요순의 도를 행하여 근본을 힘쓰며 교화를 돈독히 하여 본국(고려)과 더불어 강호한지 거의 2백여년에 례에 불비함이 없었고 우리 도군태상황제께서도 이를 계승하여 은숭이 더욱 후하였읍니다 근자에 간인들의 계의로 인하여 모든 변방의 일이 일어나게 되매 금인이 창궐하여 무명의 군사를 일으키고 오합264)의 무리를 섞어서 그 불비한 것을 엄습하여 우리 중원을 침요하고 겁탈을 자행하니 이 때에 근왕의 군사 수백만이 있었읍니다. 대신이 헌(#;15-214)의하기를 황하의 남에서 치지 아니할테면 가히 대하의 북에서 요격할 것인 바 정히 이에 심입하였으니 만약 대병 한번 들면 무찔러 남음이 없을 것이라 하였으나 이제 황제께서 등극하신 처음이라 효제 공검하사 늦게265) 식사하고 밤 늦게 취침(#;15-214)(우식안침(#))하매 인재를 등용하고 신의를 숭상하사 적을 진멸코자 아니하였더니 이에 금인도 모과하고 고화하고 통로를 청하여 사막(본국)에 돌아갈 것을 구하니 주상께서는 인하여 이를 받아들여 금백을 주어 호군266)의 미천을 삼게 하였던 것입니다 금은 다시 한없는 욕심을 가지고 하북의 관진을 엿보고 있으니 인신이 공노할 바이라 사세가 부득기하여 추량을 기다려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토벌할 것이니 이 때를 타(승) 본국(고려)은 어찌 가히 좌시하리까 만약 국경상에 군사를 거느리고 같이 소제하면 이로써 무궁한 호의가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공을 이룩하려 특별히 사인을 보내어 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답하기를 「본국은 조선 이래로 상조를 승사하여 공순한 정성을 일찌기 감히 게으름이 없었으며 신종황제께서도 비록 멀리 료해를 격하였으되 천일의 밝음은 비치지 않음이 없는 것처럼 사신을 보내어 수빙하니 은례가 더욱 후하였으며 도군태상황제께서 이를 계승하여 대우함이 가등하여 사여도 평시에 배나 되니 실로 백생(백대)에 갚기 어려운 은혜라 할 것이오 오직 천지는 그 보은을 색구(책)치 않는다 하더라도 구구한 감격의 마음은 만분지일이라도 갚으려 하는데 금자에 봉사 선찬267)이 와서 전한 조서를 복승하니 금인이 부도하여 ?(#;15-215)폭이 자심하므로써 장차 천하의 병을 일으켜 소추를 문죄코자 하는 바 소국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서로 표리가 되어 써 천주를 행하고자 하였으니 나(고)는 처음에 이를 봉독하고 눈물흘림을 깨닫지 못하였읍니다 생각컨대 금인의 시초는 진실로 일찍 아국에 신속하였으되 항상 침략으로 일삼는지라 아국은 변방이 겨우 편안하므로 일 생기는 것을 원치 아니하여 래침하면 응징하여 막고 퇴거하면 방비하고 지켜 요는 기미268)함에 있을 따름이었는데 아조 숙왕시대에 추장 영가269)가 힘으로 군흉을 제압하고 위엄으로 강복받아 백산(백두산)을 웅시하면서 자주 우리 국경응 침범하였으며 오달과 혜노가 서로 이어 흉폭한 형세다 더욱 떨치게 되었고 전일에 피로인들이 대금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상조의 사신이 번토에 도착하니 예우가 마치 강사인 북료의 례와 같더라」고 하였으며 또 변방인의 말을 들으면 금인이 계란을 함몰하고 드디어 상조의 지계를 범하였으나 황제께서는 등극하신 처음이라 진멸코자 하지 않고 그 화룰 청함에 따라 허낙하였다 하니 중국은 대국으로서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소국은 고립하여 있으니 그 장차 무엇을 의지하리요 금년 4월에 특히 사신을 보내어 수호하고 이미 루삭이 되었으나 아직 회보가 없으니 다시 생각컨대 본국은 천재가 류행하고 부고가 다 타버려 모든 적을 막는 기구가 남음이 없음으로 바야흐로 공인을 모아 써 복흥할 것을 도모하는 터이라 지금 조서에서 곡진의 로에 당하는 것은 힘써도 능히 미치지 못할가 두려워 하는 바이오 다만 바라는 바는 군사를 훈려하고 기기를 수리정비하였다가 왕사(중국군)가 저 경역에 림압하게 되면 폐국도 감히 진력하여 서로 표리가 되지 아니하리요 위령270)을 빌려 융추를 평정하는데 돕는 것이 나(고)의 소원이외다 하늘271)이 실로 조림하노니 오직 봉사 선찬하는 복명하는 날에 마땅히 이 뜻을 주달하여 주시오」라고 하였다. 계미에 후장이 돌아감에 왕이 표를 부쳐 전달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왕인(칙사)이 급히 이르러 천조가 내리니 명을 받자옴이 특수한지라 몸을272) 가누기에 황공스럽습니다(운월) 가만히 생가컨대 한 임금(고려왕)은 역중의 어른이오 제하(중국)는 천하의 존장인 바 하물며 구성(력대송제)은 명덕을 계승하여 서방을 통괄함에 내외(차별)가 없었으니 무릇 직분을 지닌 자는 마땅히 진실로 심복하여 귀부할 것이며 혹시 원수가 된것은 실로 두려움을 헤아리지273) 못할 것(비여)이외다 오직 금인의 난폭은 계란국이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함을(불천) 당하여 이미 신승의 예봉을 타고(승) 점점 횡행의 뜻을 품어 망녕되히 중국(하)을 어지럽게 하여 드디어 강역을 침범하기에 이르렀나이다 삼가 생각컨대 황제폐하께서는 새로 하늘의 부명(건부)을 잡으시고 성정을 쫗아 따르다가  경국에 계속적인 소란을 만나 근심과 분노가 마음 깊이 쌓여서 장차 천명에 따르고 인심에 순응하여 반역을 쳐 문죄코자 하실새 특히 사신을 보내어 간곡한 훈사를 보이시니 이르기를 한(중국)에 범한 자는 의에 있어 반드시 주를 가할 것이오 주(중국)를 존경하는 자는 예에 있어 당연히 적개하여야 할 것이라 하시고 드디어 군사를 함께 들어(거) 표리로 상공케 하셨나이다 생각컨대 소번(고려)은 대대로 후덕을 입고 항상 충성을 다하여 보상할 것을 원하는 터이니 어찌 근왕의 뜻이 없으리오 문득 조서를 봉독하오니 다만 눈물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곧 명에 따라 군사를 일으킴을 기다려야 할 것이오나 다만 폐국은 본시 승국274)이 아닐 뿐더러 근자에 재화를 겪어 축장한 것이 다 타졌으므로 그 자량을 저축하고 군기를 수선하여 반드시 정비된 후에야 동할 것이니 진실로 창졸히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또 하물며 적세가 흉강하므로 마땅히 경솔히 접촉치 못할 것이오로지도 험하고 섬애하니 어찌 쉽게 장구하여 나가오리까 그러나 제명이 문에 이르렀으니 도리에 회피할 수 없는 것이오 왕사각 적을 제압함을 기다려 조금이나마 위령을 도울가 하옵니다 다만 원컨대 성명하신 터에 이 정성스럽고 간곡함을 밝게 량지하소서」라고 하였다. 임진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8월 을사에 불정도장을 천복전에 설하였다. 9월 을축에 추밀원부사 김부식과 형부시랑 이주연을 송에 보내어 등극을 하하였다. 경오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신미에 금의 선유사 동첨서추밀원사 고백숙 홍려경 오지충 등이 왔다. 금주가 백숙 등에게  칙명하기를 「고려는 무릇 사신을 보내 왕래하는 데에 있어 마땅히 모두 료의 구제에 따라야 할 것이며 보주로(의주) 및 변지의 인구로서 저(고려)지계에 있는 자는 모름지기 모두 돌려 보내야 할 것이다 만약 일일히 청종하거던 곧 보주의 땅으로써 사여하라」고 하였다. 동 10월 병신에 경룡절이므로 천복전에서 군신을 향연하였다. 무술에 왕이 금사를 대명궁에서 전별할새 회표를 부하여 사예하였는데 일일히 료를 섬기던 구례에 의하였다. 임자에 김찬을 소환하여 전중내급사로 삼았다. 계축에 남경에 행차하였다. 기미에 장의사에 행차하였다. 11월 임술 삭에 군신들과 연흥전에서 향연하였다. 갑자에 인수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남경으로부터 와서 연경궁에 입어하였다. 정해에 수창궁으로 이어하였다. 윤월 임진 삭에 사하여 이죄를 범한 자는 형을 면하여 류배시키고 유형 이하를 범한 자는 죄를 면케 하고 나이 80이상자와 환과 효자 순손 절부 의부들에게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을미에 반야도장을 중화전에서 설하였다. 병진에 궁중에서 승을 공양하였다. 12월 병인에 이자겸이 유배지에서 죽었다. 계유에 위위경 김자류 형부랑중 유덕문을 금에 보내어 선유를 사하였는데 표문에 「고백숙이 와서 성지를 밀전하였는데 보주성지를 고려에 귀속시켜 다시는 수복하지 않겠다 하였읍니다 가만히 생각컨대 고구려의 본지는 주로 저 료산이요 평양의 구허는 압록강을 한계하였던 바 여러번 변천을 겪다가 우리 조종 때에 이르러 북국의 겸병을 당하여 삼한의 분야가 침범되어 비록 린교는 닦았으나 아직 고강은 돌아오지 못하였더니 천명이 유신하게 되어 성왕 때 대료의 변신 사을하가 와서 황제의 칙지를 전하니 그에 이르기를 보주는 본시 고려의 땅이니 고려에서 회수함이 가하다 하므로 선왕께서는 이에 그 성지를 수리하고 민호를 채웠던 것입니다 마음으로 훈사를 내려 구토를 사하셨읍니다 후사로서 계승함에 미쳐 성덕이 제위를 승사함을 만나 덕음을 자세히 듣잡고 공순히 신직을 닦았읍니다 이 동빈의 촌토는 본시 하국의 변경으로서 비록 일찍 계란에 빼앗겼다 하더라도 이미 선대에 배은하였던 것이며 특별안 은혜를 베푸시와 그대로 폐국에 례속케 하니 어찌 요행으로 이같이 되었으리까 대개 성덕을 만남이 매우 특수함이외다 심인과 대의는 가히 명언할 수 없으니 미약한 힘과 박한 재질로 만약 그 은혜를 갚고자(보효)할진대 오직 마땅히 대의명분(춘추)의 일을 갖추고 적정275)한 공납(예극)의 상규를 지켜 방국을 들어 즐겁게 공수할 것이오 자손에 전하여 길이 맹서할 것이외다 고명한 일월이 위에 있으니 성실(곤핍)하여 두 마음이 없겠나이다」라고 하였다. 기묘에 소재도장을 천복전에서 설하였다. 경진에 김인존으로 검교태사 문하시중을 삼고 김향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최유적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한주를 소환하여 형부랑중지제고를 삼았다.

정미 5년 춘 정월 정유에 금이 고수를 보내어 생진을 하하였다. 경자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병오에 금사가 돌아가매 왕이 중화전에서 전송하고 표문을 부쳐 써 사례하였다. 2월 기사에 연경궁에 이어하여 산정도감판관 김선의 딸을 들여(납) 차비로 삼았다. 을해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경진에 태조 진전에 배알하였다. 3월 계사에 김자류와 유덕문이 조를 가지고 금으로부터 돌아오니 조에 「상표한 바를 살펴보고 선유를 사하고 아울러 물품을 진봉한 것은 자세히 알았노라 경은 탐인276)이 설유하기도 전에 부속되기를 원하고 우회277)가 이미 통호한 후에는 더욱 근성함이 믿음(량)직하니 그러므로 뜻이 외상하여 당연히 곧 은무하여 땅을 사할 것이다 이번에 공비를 바침에 있어 사장을 올린데 그쳤도다 령열함이 비록 간절하니 오히려 호구에만 탁언하고 아직 서봉(표)은 별주치 않았도다 다만 일마다(사사) 완수할 것이며 대대의 충성을 믿을 것이다 유시한 말에 그 혹 (지계를) 정해 두지 아니하면 소득의 땅을 장차 무엇으로 써 빙고하리오」라고 하였다 간관이 주하기를 「김자류는 금에 들어가능히 그 부하들을 통어하지 못하여 그 종자가 금인과 싸워 상해를 내었으므로 금인이 꾸짖고(초양) 도부서에서 붙잡아 거듭 장형을 하였으니 청컨데 왕명을 욕되게 한 죄룰 다스리소서 」하니 이에 관직을 면케 하였다. 갑진에 서경의 요승 묘청과 일자(점후와 복서를 맏은 자)인 백수한이 왕을 설득하여 관정도장을 상안전에서 설하였다. 무신에 왕이 비 및 양 공주와 더불어 흥복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재추 근신들과 더불어 대동강 중류에서 루선을 타고 연락하였다. 기유에 려수하였다. 임자에 구제궁 천흥전에 이어하였다. 계축에 정당문학 김부일에게 명하여 서경의 홍범 편을 강의케 하였다 갑인에 기린각에 거동하여 승선 정항에게 명하여 서경의 설명편과 주관편을 강의케 하였다. 을묘에 척준경을 암타도(라주)에 최식을 초도(사천)에 상주목부사 이후진과 귀주사 소억과 랑장 정유황과 서재장판관 윤한 등을 위지에 류배하였다. 기린각에 거동하여 정지상에게 명하여 서경의 무일편을 강의케 하고 종신들과 및 서경유신 25인 을 불러 시를 짓게 하고 주식을 사하였다. 병진에 왕이 비와 양 공주로 더불어 대동강에서 용선을 타고 강류를 따라 연악할새 재추 시신을 불러 시연케 하였다. 정사에 관풍전에 이어하였다. 무오에 조하기를 「짐은 천지의 대명을 메(하)고 조종의 유기를 이어 삼한을 엄유한지 이에 6년이 되나 지혜는 주모에 능치 못하고 밝음은 감촉278)함이 없어 재변이 서로 연달아 거의 평안한 해가 없었으며 거년 2월에는 란신적자들이 틈을 타고 일어나서 음모가 발각되었으므로 짐은 부득이 모두 법으로 다스렸으나 이로부터 허물(구)을 들어 내 몸을 책하게 되니 덕279)에 부끄러움이 많아도 이제 일관의 론의로 서도에 행차하여 깊이 ?(#;15-223)왕의 허물을 반성하고 유신의 교가 있기를 바라 중외에 포고하노니 모두 들어 알도로 하라 일은 방택280)에서 지지에 제사하고 사교에서 기운(사시의 기운)을 맞이하게 하라 일은 거마와 의복제도는 힘써 검약을 쫓으라 일은 불필요한 관리와 불급한 사무를 제거하라 일은 농을 권장하고 밭일을 힘써 백성들의 식량을 넉넉하게 하라 일은 힘써 관곡을 저장하며 구민에 대비하라 일은 백성에게 취감하는 것은 상례가 있는 것이니 정상적인 조조281) 이외에는 함부로 걷우지 말라 일은 백성을 어루만지고 지방을 편안케 하여 도유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일은 제위포와 대비원에 축적을 후히 하여 질병을 구제하라 일은 관고의 묵은 곡식을 빈민에게 억지로 배급하여 강제로 그 이식을 취치 말 것이며 또 묵고 썩은 곡물을 백성에게 강제하여 방아찧게 하지 말라 일은 산택의 이원은 백성들과 같이 할 것이며 (그것을) 략취(침모)치 말라」고 하였다. 하 4월 병인에 크게 우박이 내렸다. 경오에 왕비 임씨가 원자를 탄생하니 백관이 표문을 올려 축하하였다. 을해에 반야도장을 장락전에서 설하였다.

을유에 문공미로 리부상서를 삼고 한안중으로 상서우승을 삼고 한충으로 예부시랑을 삼고 문공유로 합문지후를 삼고 이신의로 천우위상장군을 삼고 정극영으로 동경류수사를 삼고 임존으로 진주목부사를 삼고 최거린으로 상주목부사를 삼았는데 공미 등은 모두 자겸에게 류배당하였더니 이에 이르러 소환되어 복직된 것이다. 5월 임진에 동지추밀원사 최유적을 경주에 류배시키고 형부시랑 채석을 진도현에 류배시켰다. 을미에 령봉루에 거동하여 양경의 신기병에 명하여 격구케 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신축에 려수하였다. 김부식 등이 송의 명주에 이르니 그 때에 금병이 변경에 침입한지라 길이 막히어 들어가지 못하고 계묘에 돌아왔다. 6월 을축에 왕좌재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경오에 김인존으로 판리부사를 삼고 이공수로 판병부사를 삼고 김부일로 호부상서 판례부사를 삼고 김향으로 검교태위수사공을 삼고 김부식으로 지추밀원사를 삼고 최자성으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최사전으로 리부상서 지도성사를 삼고 문공미로 례부상서 지제고를 삼고 정극영으로 판위위사 한림학사를 삼았다. 을유에 려수하였다. 추 7월 신해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와서 연덕궁에 입어하여 하조하기를 「금년에 서경에 순행하여 머무르(주필)282)다가 가을에 이르러 이에 돌아온지라 장차 은혜를 넓혀 여러 사람들에게 미치게 하려 하니 여러 호종인으로서 죄를 범한 자라 하더라도 만약 고의로 범한 것이 아니면 논치 말 것이며 모든 왕가를 수행한 사람고 및 양경에서 왕가를 영접한 백사에게 각각 동류의 정직 1급을 가하고 모든 로역한 복예들에게도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그 나머지 다 지칭하여 하시치 못한 자는 유사로 하여금 류에 따라 문주하여 시행토록 하라」고 하였다. 병진에 송의 교련사 명주부사 장선이 왔다. 이 달에 서경과 서북도에 황재가 있었다. 8월 갑자에 연경궁에 이어하였다. 을해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정축에 이위로 중서령을 삼고 임원애로 례빈소경 어사잡단을 삼았다. 신사에 연경궁을 고쳐 인덕궁이라 하고 천복전을 천성전이라 하였다. 9월 기축에 국자사업 이중을 보내어 금에 가서 천청절을 하하였다. 갑오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정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계묘에 려수하였다. 정미에 묘통사에 행치하였다. 기유에 금의 선경사인 영주관내관찰사 야율거근과 진주단련사 장회 등이 왔다. 병진에 왕이 조를 천성전에서 맞이하니 조에 이르기를 「강적은 천의를 받들어 폐입되니 일은 대개 비상한 것이며 제후는 짐의 번선283)이니 도리상 마땅히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 처음에 변송284)이 유 연(유주 연주)의 회복을 청하고 비밀히 부해285)의 근성을 닦아 거듭 린호의 의를 맺고자 하므로 선황제께서는 그 간지한 마음을 긍련히 여겨 즉시 윤허를 보였는데 일찌기 맹약을 굳건히 할줄을 일지 못하고 도리어 다시 망명자를 받아들여 원한을 맺었도다 환(흠종)이 계위함에 이르러서도 길(휘종)이 복위한다고 운위함에도 그대로 오랫동안 함홍286)의 덕을 보였으나 마침내 회화287)하는 것이 들리지 아니하여 써 인신이 공노하고 천지가 용서치 않게 되었도다 다만 장수의 일정을 수고롭게 하여  뒤이어 과소288)가 전복되고 종조289)가 실수되며 부자가 사로 잡히게 되었도다 이는 오직 불화(흔)의 쌓임이 깊어 역성의 사태에 이르도록 되었으나 신기(제위)는 가히 주가 없지 못할 것이므로 신봉을 내리(강)기로 론의되었도다 더구나 민생은 오직 지인을 생각하며 함께 구재를 추대하려 하는 것이므로 이미 금년 3월 초7일에 원수부에 선유하고 사람을 차견하여 조주부자와 아울러 연왕 월왕 운왕 이하 종족 470여인을 압송하여 부궐케 하고 인하여 예를 갖추어 망송 대재인 장방창을 책명하여 대초황제를 삼아 금릉에 도읍하게 하였다 아아(어희) 이에 영관290)이 원흉을 얻으(획)니 이에서 화평이 다시291) 이루어졌고(수성) 조화(창조화육)의 전공을 필하였으나 마땅히 동경할 바이로다 지금 경에게 의대 ?(#;15-228) 금은 견 필단 등물을 사하니 이르거든 령납할지어다」라고 하였다. 동 10월 정묘에 유사에게 명하여 제이292)들이 탈취한 토전과 장획(노비)을 거두어 모두 본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하였다. 기사에 금의 사신 야율거근이 돌아가매 왕이 표문을 부쳐 사례하니 그 표문에 「비상한 승사와 대마다 없는 특이한 은혜는 실로 우고에 듣지 못한 바로서 한 방역을 들어 공순히 복사하는 바입니다 황제폐하께서는 삼영(천지인의 신)의 부참(부명)에 응하여 루세의 종조(종묘)를 이었으니 인에 젖은(점) 바가 깊으면 의에 제어되는 자가 많은 것이며 덕에 시화된 바가 넓으면 위에 굴복하는 자가 많은 고로 신병이 한번 떨치면 역내(솔토)가 크게 정해져 동서남북으로 땅을 개탁하고 강계를 넓혀 화하만이(중국과 이적)가 풍성을 앙망하고 꼼짝도 못하게(속수)됩니다 공업이 죽소(서책)에 빛나고 위영이 건곤에 솟구쳐 진동하도다 이제 사절을 신칙하여 선유케 하고 후방과 더불어 경사를 같이 하니 자주(편번)293) 권고를 입어 많은 의례는 우악하고 번변로서 후한 은혜가 멀리 미치매 진실로 수답을 논하여도 계책이 없사오며 마음을 사대에 두매 단지 충성을 다하기만 기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정축에 백좌도장을 천성전에 설하고 내외에 명하여 승 3만을 재식케 하였다. 11월 을미에 봉엄사에 행차하여 낙성(식)을 하였다. 석준을 금에 보내어 생진축하한 것을 사하고 이진은 하정케 하였다. 12월 경오에 문하시중 김인존이 졸하였다. 무인에 려수하였다. 임오에 이공수로 판리부사 감수국사를 삼고 김부일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김향 최자성으로 참지정사를 삼고 김부식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문공미로 동지추밀원사를 삼았다. 이달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무신 6년 정월 정해에 왕이 불예(병환)하매 재추와 백관이 묘사 산천 불사 도자에 신도하였다. 신묘에 려수하였다. 임진에 금이 소회옥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을사에 인덕궁에 불이 났다. 병오에 연덕궁에 이어하였다. 임자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이달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2월 을묘 삭에 왕이 금의 사신 소회옥을 인견하였는데 왕은 병환(불예)이므로 이날에 이르러 조서를 받았다. 계해에 남경의 궁궐에 불이 났다. 무진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정축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3월 정해에 송의 강수 채세장이 고종 즉위의 조를 가지고 왔다. 경인에 흥왕사 천복원에 이어하였다. 임진에 친히 화엄도장을 홍교원에서 5일간 설하고 무술에 홍원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임인에 이공수로 문하시중을 삼고 김부일로 수사도 판상서병부사를 삼고 김향으로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이숙로 검교사도 수사공 좌복사 판례부사를 삼고 최자성으로 검교사공 판공부사를 삼고 김부식으로 한림학사승지를 삼았다. 갑진에 려수하였다. 정미에 최사전으로 수사공 상서좌복사를 삼았다. 하 4월 을묘에 조하기를 「근래에 천문에 변화가 있고 시후(시령)가 고르지 못하므로 은을 미루어(추) 형을 관대히 하고 혹은 기운을 조화하여 재를 가시(소)도록 하고자 하니 마땅히 유사로 하여금 려수하여 이죄 이하는 사케 하고 국내산천에 망제하고 기노 및 독폐질자와 절부와 의부 효자 순손 환과 고독을 향연하며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도록 하라 또 원효 의상(상) 도선 등은 모두 옛 고승이니 마땅히 소사로 하여금 봉증케 하라」고 하였다. 정사에 남계에 해적이 많이 일어나매 어사중승 정응문으로 선무사를 삼아 가서 효유케 하였다. 계해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여 하루밤을 지내고 돌아왔다. 갑자에 대명궁에 이어하였다가 순천관에 나아갔다. 기사에 대방공 보가 경산부에서 졸하였다.

갑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기묘에 조하기를 「최유적은 그 아들의 죄에 련좌되었으나 실로 자작의 죄는 아니니 사리에 량이294)토록 허하여 주라」고 하였다. 경진에 이원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기해에 연덕궁에 이어하고 궐정에 초제하였다. 경자에 대명궁에 이어하고 을사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경술에 비를 묘사 산천에 빌었다. 6월 갑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기미에 보살계도장을 중화전에서 설하였다. 신유에 최홍재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최홍의로 호부상서 좌우위상장군을 삼았다. 정묘에 송의 국신사 형부상서 양응성과 제주방어사 한연 등이 왔다 처음에 응성이 강정에 이르러 접반소에 이첩하기를 「칙명에 의하여 지금 장차 벽란정에 이르고자 하는데 귀국은 례의가 근후하니 만약 미리 개진하지 않으면 반드시 헛되이 번노에 이를 것이다 이성(휘종 흠종)이 원지에 계심으로 신자로서 청락하고 연회함은 참아 못할 일이니 지금 구례를 참작하여 영조와 배표(표문을 올림)의 날에는 례에 의하여 용락하는 이외에 만약 연회가 있으면 좌석에는 나가되 락을 제거할 것이며 아울러 의대와 화주를 보내는 것도 제거하라」고 하였다 기사에 조를 수창궁에서 맞이하니 조에 「국운이 중간295)의 쇠미(중미)한 때를 만나 변이 외방에서 생기는지라 드디어 짐이 찬위하여 안무(미녕)함을 도모하노라 오직 삼한의 구방은 실로 루세의 여국(맹국)으로 전부터 신사가 빈번하게 와서 전정296)에 가득(충정)하도록 (공물을) 바치더니 이에 간우로 녹유하여 오랫동안 보빙이 늦어졌으나 생각컨대 또한 그 많은 사고를 헤아려 마땅히 본래의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 이에 대금의 척서(서한)를 받들어 특히 일개의 사자를 치송하여 바다를 건너고 국경을 넘게 함은 진실로 혼난하고 번잡함이 있을 것이로되 재를 구하고 백성을 애휼함에는 반드시 큰 도움(조)을 가할 것이다 애오라지 박물을 보내어 떳떳한 의례에는 미급하도다 이제 양응성과 한연 등을 보내어 국신사와 부사에 충임하고 겸하여 국신례물과 의대 김도은기 잡색 필단 산마 등물을 사하노라」고 하였다 응성 등이 관에 돌아가 다시 어록을 올려 말하기를 「옛날 주실이 다난한 때에 혹자가 진 문공297)에게 말하기를 제후에 구함은 근왕만 같은 것이 없으며 제후가 이를 믿는 것이 또한 대의라 하였읍니다 진 문공이 이미 왕실을 안정시켜 인하여 패업을 이룩한 바 이것이 서곡298)에 기재되어 빛이 무궁하게 빛나고 있읍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귀국은 해동에 있어 가장 크다고 일컬어지며 대대로 충순을 나타내어 통사한 이래로 본조(송)가 귀국을 대우함에 있어 은례를 더 후하게 하여 아직 조금도 감쇠되지 않았읍니다 요지음 때로 간난을 만나 국가가 다사하더니 적인(금)이 사계를 써 드디어 이성(휘종 흠종)을 괴롭혀 멀리299) 가시게 할줄이야 헤아리지 못하였읍니다 이에 상하가 우노하여 편안히 처할 겨를이 없읍니다 거듭 생각컨대 귀국은 례를 잡고 의를 중히 여기며 또한 본조의 은우도 여러해 쌓였음은 타국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바야흐로 이러한 위급을 당하여 의로서 마땅히 책할 것이오 정히 대의에 의하여 근왕할때라 하겠읍니다 금 황제가 처음 보위에 올라 사자를 보내어 국왕을 무문하고 인하여 바다로 떠나(진발) 이제(휘종 흠종)를 영청케 할 일을 수고롭힐(번)까 한 것은 선지를 전하고 조서를 배수하는 날에 이미 일일히 면진하였으며 이어 공첩으로 관반소에 이첩하고 다시 신복을 번거롭게 하여 정성과 간곡함이 갖추어 지극하였음을 례득하여 잘 아실줄로 믿습니다 귀국은 말하기를 금에 가는 도로가 험조하여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하나 조종시(전대)에 있어 금인이 일찍 귀국의 사신에 부쳐 입공하였으니 당시에는 도로가 자통한 것으로서 통행이 아니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읍니다 귀국은 또 금인이 또한 이 길을 경유하여 사신을 보낼가 두려워 한다 하나 금인은 계란을 파한 뒤로부터는 모두 하동과 산북을 경유하여 통사하므로 반드시 이 길을 경유하여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귀국에서 금인이 이로 인하여 일을 일으킬 것을 우려한다면 응성 등의 금차의 봉사는 단지 소대(비무장 인원) 110인으로 국서와 례폐를 가지고 나아가 강화하는 것이오 곧 쟁투하는 것이 아니니 귀국은 다만 사인 일행으로 하여금 바다로 떠나 국계상에 이르게 하고 먼저 금에 알려 써 가부를 들어(청)볼 것이며 혹 인수를 재감한다 하면 일절를 그대로 쫓을 것이니 이렇게 된면 일이 생길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귀국의 길을 경유하여 이제를 영청하게 된다면 200년간의 충순의 의가 이지러지지 않고 또한 써 렬성의 권우한 은혜를 갚게 될 것이며 국가(송)가 공에 보답하기를 전에 배가 될 것이요 사방제국이 더욱 미명을 우러러 높은 의리에 신복케 될 것입니다 실로 무궁한 경사를 누릴 것이며 귀국의 중신들도 모두 협찬봉대의 충이 있어 국가(송)의 상곡이 영구히 전할 것이니 이는 일시적인 사인의 사리가 아닌 것입니다 감히 심중의 소회를 털어 포진하였으니 오직 국왕께서는 중신들과 모의하여 이 일을 협제하여 폭기의 적인들로써 마침내 화하(중국)에 옛 약속(구요)300)을 저바리지 말게 하기를 바라며 조속히 결정지어 지체(계류)치 마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약속하였다 왕이 글로 써 답하기를 「본국은 조종 이래로 사대에 성으로써 하였음으로 신고(송 신종)로부터 태상도군황제(휘종)에 이르기까지 보기를 일가와 같이 하셨으니 그 이은과 후례는 어찌 쉽사리 명언할 수 있으리요 생각컨대 천지는 그 갚음(보)을 책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구구한 감격의 뜻은 만의 일이라도 갚으려 하였읍니다 엎드려 듣건대 이제가 원지에 가셨음으로 거국이 우분하고 있다 하니 비록 능히 때에 맞추어 빨리 가서 관수301)에게 묻지 못하였으나 신자의 마음에 어찌 편안히 처(거)할 겨를이 있으리요 또한 황제의 효제와 군공의 충의는 반드시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감동시킬 것이니 천지와 귀신이 서로 같이 협찬하면 어찌 이성으로 하여금 사막에서 오래 노고하시게 하리오 매양 빨리 경궐에 돌아오시사 써 천하의 소망에 부합되기를 축원하는 바입니다 황제께서 처음 보위에 올으시매 제일 먼저 시신을 보내어 조명을 전하고 소국으로 하여금 바다로 저 곳에 나아가 이제를 영청케 하려 하시었으며 사와 부사도 또한 전조하는 날에 일일히 면유하고 공첩으로 써 뒤를 이으니(계) 간절한 뜻이 갖추러 극진하나이다 감히 배명치 않으리요마는 녀진은 처음에 부낙으로 분거하여 정주가 있지 않았으므로 일찍 아국에 신속되었으며 혹은 우리 사신을 따라 상국에 입공하기도 하였으나 그 뒤에 점점 강성하게 되어 항상 변환이 되더니 근자에는 대료를 함몰시키고 상국을 범침하였읍니다 이로부터는 병위가 더욱 강대하여 소국(고려)을 눌러(억) 칭신케 하고 인하여 례수를 약정하여 한결같이 료를 섬기던 구례에 의케 하매 소국은 할 수 없이 이를 쫓았읍니다 그러나 그 풍속이 싸움을 좋아하며 항상 우리가 상국에 즐겨 따르는 것을 질시하고 요사이에는 강계에 성루를 수즙하며 병사를 둔집하고 있으니 그 뜻이 소국을 침릉코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절이 길을 빌려 입경한 것을 듣는다면 반드시 시기하고 의심하여 일을 일으킬 것이며 다만 이와같이 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보빙으로써 명목을 삼고 소방에 길을 빌려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장차 무슨 말로써 진절하리오 진실로 해도의 편함을 알게 된다면 소국의 보전이 어려울 것이며 회남 양절의 연해의 땅도 엿보게(규유) 될 것을 사려치 아니할 바이리오 진실로 그렇지만 않다면 소국이 어찌 감히 안연히 명령을 좇지 않으리오 이 일이 실로 중대한 것으로서 감히 말을 꾸민 것이 아니니 오직 정사와 부사는 곡진히 이 정충을 살피고 조금 아의를 돌려서 돌아가 궐하에 아뢰어 주시오」라고 하였다. 계유에 려수하고 경죄자는 출옥시켰다. 신사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추 7월 병술에 참지정사 이숙를 파면시켰다. 경인에 보제사에 해차하였다. 임자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8월 경오에 송사 양응성 등이 돌아가매 왕이 중화전에 거동하여 인견하고 사표를 부치니 이르기를 「황제가 바야흐로 오매 천휘302)가 멀리 미치나이다 용광을 우러러 배사하니 희구303)가 엇갈려(전빙?(#;15-236)) 가슴에 교착됩니다 공순히 생각컨대 황제폐하는 순을 받드는 정성에 응하시고 주를 중흥시킬 대업에 힘쓰시니 미공304)은 쇠하지 않읍니다 가모(도)는 비기305)를 병수하니 슬기로운 명(철명)306)이 스스로 끼쳐지게 되고 처음 정교를 행함에(초복)307) 있어 덕을 행하고 천명빌기를 부지런히 하시나이다 이에 동토를 권고하사 성실히 세신을 삼고 특히 시종(법종)308)의 반렬을 보내시와(번) 간곡히 훈사의 정중함을 보이시며 인하여 좋은 사물을 해주시고 특이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지척의 위명을 받들매 진실로 황공무지 하옵고 간측한 어구를 읽으니 한갓 스스로 눈물만 날 뿐입니다 대개 생각컨대 멀리 있는 번국(고려)은 본래 (천자의) 성위와 교화에 도치되어 멀리는 조선 때로부터 자주 은례의 가함을 욕되게(도) 하여 후사309)에까지 연급되니 더욱 궁금을 향봉할 것(내면)310)을 도모하였든 바 문득 변방의 막힌(경) 일이 들림으로 드디어 공직이 시기를 잃게(춘추지후륜)311) 되었읍니다 하물며 제실에 간고가 많아 란흥(천자의 수레)가 멀리 가셨으니 다만 놀라움이 더하여 단예312)를 헤아릴 수가 없읍니다 분비함에 길이 없음을 슬퍼하고 행재소(행궁)에 문안도 막혔읍니다 재화를 나누고 환난을 구하여 마땅히 적개의 충을 다할 것이오나 미력박재로서 근왕의 공효를 펴기 어려우니 근심과 부끄러움이 더욱 심함은 신명이 조감하는 바입니다 신이 잘못 손모를 이어받은 뒤로 마침 액운을 만나 재화와 흉년이 자주 생겨 인물이 조잔하며 안으로는 역신이 발호하는 흉사에 핍박되었으며 밖으로는 강국이 엿보는 흔단(쟁점)을 금심하였더니 이제야 난을 평정하고 겸하여 이웃과 화해케 되었으니 공이라 할 것은 없사오나 다행이 일은 생기지 않게 되었읍니다 폐읍(본국)을 들어 써 조정의 교명에 미노를 다하여 써 루대의 총영(총복)에 답하여야 할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나 형세의 미편함이 있어 일을 스스로 수행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예성으로 위곡히 침성을 량조하시사 신이 지금 간위에 처하여 있음을 동찰하시고 신이 실로 포만(법례를 불수하는 것)함이 아님을 사하시와 길이 용서하는 덕을 가하여 곡전313)을 이룩케 하여 주시면 예극314)이 존속되어 소방은 사대의 예를 잃(실)지 아니할 것이오 문위의 미치는 바에 감히 황복315)의 존왕을 잊으오리까 백일을 가리키며 써 마음에 맹세하오니 황천의 승소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에 응성 등의 왕복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또 답하기를 「상조가 이에 앞서 조를 내려 소국으로 하여금 여진의 래조를 왕유하라 하였으나 소국이 가만히 생각하니 여진으로 하여금 가이 중국의 부성을 엿보지 못하게 하여야 하겠으므로 감히 조를 받들지 않았는데 조정(송)에서는 그렇게 여기지 않고 드디어 다방으로 조유하며 금백을 후사하였읍니다 그들(여진)은 이미 중국의 허실을 알고 침규의 마음이 한번 근하매 장구심입하여 경사를 소요케 하였읍니다 소국은 금국과 강장이 상접하여 정위를 아는 것이 심숙한데 지금 사절이 이 길로 간다면 시의로 틈이 생겨 화가 발꿈치를 돌리기 전에 일어날 것입니다 가령 사신이 이길로 저곳에 간다면 저들은 반드시 이 길로 복례할 것이며 또한 더구나 그 나라는 동으로 대해에 빈하여 더욱 수전을 잘하므로 저들은 복례를 칭탁하고 회 절의 형세를 살펴 알아 만일에 전함을 갖추어 바다를 건너 불의에 내려치면 그윽히 두려워 하노니 북으로는 륙전에 괴로울 것이오 남으로는 수전에 괴로울 것으로서 수미에 적을 받아 환됨이 반드시 클 것이니 일일이 이에 이르면 비록 후회한들 가히 미치리오 소국이 조를 받들지 않는 까닭을 천지가 동찰할 바이오 감히 말을 꾸민 것이 아닙니다 비록 시일을 헛되이 보내며 오래 끌어도 다시 감히 다른 론의는 하지 않을 것이니 이에 택일하여 회표부칠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응성 등이 답하기를 「귀국 군신들은 반드시 유해할 것이라 하여 좇지 않고 다만 사인을 귀환케 하려 하니 이는 끝내 허치 않는 것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부표를 받지 않고 의례로 주는 연 폐 의대 예물도 또한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가버렸다. 갑술에 례부시랑 윤언희를 송에 보내어 상표하기를 「천지의 인덕은 만물로 하여금 소원을 이룩케 하는 것이오 제왕의 도는 중인의 어려운 바를 책(구)하지 않는 것이오니 감히 정성된 말을 토하여 우러러 총명을 청하는 바입니다 저윽이 생각컨대 본국은 동비에 위치하고 세세로 중화를 섬겨 천만리의 봉강을 지키되 아직 몸소 조청316)하지 못하였으며 200년의 은례를 회고하여 다만 충근할 것을 맹세하는 바입니다 전일에 양성(휘종 흠종)의 파천(천도)을 듣고 온 삼한은 비통하였읍니다 아직 능히 달려가 유가(관수)에게 물어 써 신자의 정성을 펴지 못하였고 또 의병을 수창하여 국가의 난에 나아가지 못하였읍니다 지금 황제폐하께서 원사부에서 일어나 선왕의 기업응 빛나게 이으심을 복우하여 신민과 더불어 함께 란로(임금이 탄 수레)을 맞이할 것을 바라시는지라 조서가 내리니 노유가 눈물을 흘리고 덕의가 나타나매 원근이 마음을 가라앉히게 되었읍니다 지성이면 신을 감동시키는 것이니 어찌 그에 응함이 없사오리까 신극317)을 반정함은 지금이 그 때입니다 신은 실가(궁궐)가 분탕된 나머지에 군국이 요란한 때를 당하였으므로 아직 경례를 닦음에 겨를이 없음을 부끄러워하며 황화(칙사)를 선유하심을 욕되게 하였읍니다 비록 명은 엄중히 내셨으나 그 일은 품(수명)에 따르기는 어렵습니다 대개 저 금국은 우리 압녹강빈에 접하여 있어 이미 중국을 소란(활하)케 하는 위세를 타고 또 인국을 해할 뜻을 품고 항상 밀첩으로 하여금 써 틈나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만약 장절318)의 가도를 들으면 반드시 때에 응하여 일을 일으켜 혹은 군사를 들어 두렵게 하여 책을 가할 것이며 혹은 복례의 명목으로 행로를 청하여 이러한 길목에 있어 장차 무슨 말로 거절하오리까 저들은 무리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벌써 가히 싸우기 어려운 것이며 진망치한이 될 것이니 또 어찌 그것이 화가 아닐 줄을 알겠읍니까 어찌 한갓 금일의 분노(거완)에 그치리요 반드시 타일의 후해막급(서제)이 있을 것이니 오직 이러한 다간한 일인지라 진실로 자만이 아니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황제폐하는 신이 안으로 향모의 마음가짐을 생각하시고 밖으로 침범에 핍박되어 있음을 민망히 여기시와 산수319)처럼 더러운 물건을 간직함을 보여 주시고(산수시장) 우뢰같은 진노를 거두워 주소서 소국에는 보전의 행이 있고 상조에는 번병의 위험이 없을 것입니다 제후를 거느리고 주왕을 높임은 감히 제 환공과 보 문공의 고사를 기함이 아니오나 궐토에 맡겨 우공을 지음(작)에 있어 청주와 서주의 구의를 잃지 않으려 함니다 란성이오 무망이 아님은 황천이 이를 증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갑술에 최사전으로 수사공 상서좌복사를 삼았다. 을해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9월 정해에 이유를 금에 보내어 천청절을 하하였다. 병오에 종행한 재추에게 명하여 묘청과 백수한으로 더불어 임원역지에 신궁을 상정케 하였다. 임경청으로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동 10월 임자 삭에 동남해 안무사 정응문이 주하기를 「명진 송변 아주의 삼현(모두 거제도)의 해적 좌성  등 820인이 투부하였으므로 이어 합주 삼기현에 귀원 취안 이장을 두고 진주 의녕현에 화순장을 두고 써 이에 거처케 하였다」하니 군신들이 진하하였다. 경술에 려수하였다. 갑인에 서경으로부터 와서 수창궁에 입어하였다. 계해일에 리부상서 최유와 위위소경 송관을 금에 보내어 선경320)을 사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갑자에 신중원에 행차하였다. 11월 무자에 인덕궁에 이어하였다. 기축에 공부원외랑 유원서를 금에 보내어 생진 하한 것을 사하고 합문통사 김택은 하정하였다. 을유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무신에 임원역에 옮기고 신궁을 지을제 내시랑중 김안에게 명하여 역사를 감독케 하니 때는 바야흐로 모진 추위에 물이 얼어 붙는지라 백성들이 심히 원망하였다. 12월 갑인에 윤언이가 송으로부터 돌아오니 조에 「짐이 근자에 사신을 보내어 급히 이성(고려)에 치송한 것은 부형의 원수를 생각하여 천륙의 상망이 아득하므로 길을 빌릴 도리가 없으니 문안하려는 마음 깊이 간절함에서이라 이에 번유의 구의를 얻어 강장(경성)의 통과를 의뢰할까 바랬는데 갑자기 주봉을 살펴보니 간절한 정성은 비진되었으나 여러날을 두고 보고 보매 개탄이 마음속에 우러나도다 다만 효우의 생각으로는 비록 나의 뜻을 펴고 싶으나 기미321)의 사려도 또한 마땅히 인정에 극진하여야 할 것이다. 이미 공근함을 량찰하였으니 병위322)를 잊음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을묘 려수하였다. 계해에 최사전으로 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를 삼고 한충으로 추밀원부사를 삼고 최자성으로 리부상서를 삼고 윤보로 형부상서를 삼고 최유 강후현으로 좌우산기상시를 삼았다. 임신에 금이 금주관내관찰사 사고덕과 위위소경한방 등을 보내왔다. 갑술에 왕이 중화전에서 조를 맞이하니 조에 「짐이 듣건대 하 상 이래로 불인하면 천하를 잃지 않음이 없고 한위 이강으로는 곧 제후를 삼는 고사가 있으니 이는 서적(재적)에 갖추어 쓰인 것이며 일시의 창견이 아니다 오직 송의 태상황 조길(휘종)과 소제 환(흠종)은 배은 선신하였음과 그를 쳐 써 부로로 한 것은 또한 이미 알린(문) 바이므로 거듭 서언치 않는다 이로부터 1년동안 멀리 별도에 있었는데 근자에 조하여 궐정에 나오게 하여 그 과실을 낱낱이 면책하니 부끄러움을 모를(안지후의)323) 정도이다 걱정을 스스로 끼친 것(이척지자이)324)을 살펴볼 때 사람이 다 아는 바이거늘 이에 무슨 말로 써 대답하리오 황공무지하여(운월)325) 모두 그 허물에 자복하였도다 그러나 죄는 가히 풀 수 있고 어리섬음은 가히 애처로운 것으로서 끝끝내 버리고 끊어버리기란(기절) 참아 못할 일이다 다만 명분326)이 바르지 못한면 말이 순치 못하는 것이므로 또한 작호를 이미 가하였도다 이미 금년 8월 26일에 조길을 항봉하여 혼덕공이라 하고 조환을 중혼후라 하여 일을 다 유신케 하였으니 사리를 마땅히 널리 고하여야 하는 것이다 지공의 거사를 생각하고 살펴 동경의 정성(성)에 협찬하라 오호라 천명327)은 무상한 것이며(명불우상) 나라328)는 반드시 스스로 주벌할만한 정치를 하여야 주벌되는 것이다(국필자벌) 거룩한 상제329)의 진노가 걸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며(유황상제지진노 불위걸망)나 일인이 능히 령을 하여 주에 복종케 하지(후우주복)330) 못하는 것이니 공경히 국군(유토=고려국왕)331)은 그 짐의 말을 들을지어다 이에 사고덕과 한방 등을 차견하여 보유의 정부사로 충당하고 인하여 경에게 의대 은기 등을 별록과 같이 같추어 사하노니 이르거던 령납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사고덕 등이 어녹을 올려 말하기를 「추밀원의 답자(공문)를 받으니 망지를 회봉컨대 그 나라(고려)에 도착하여 계의할 사건이 있으면 모름지기 정관(정첩)332)에까지 이르게 하고 회백(귀국일)에 갖추어 신복하여 주문에 빙거가 되게 하라고 하고 아래의 항을 들어 놓았읍니다 (즉) 보주(의주)의 땅은 처음에 조유가 있어 다시 수복치 아니하였는데 생각컨데 귀국이 꼭 잘이 구장(선왕의 례전)을 공경스러히 따라 왕실(금 황실)을 준봉하므로 써 조정(금)에서는 그 땅을 아끼지 않고 특히 할사하였는데 그 후 수년이 되어도 귀국은 아직까지 서표를 드리지 않음으로 회사선유조 안에서도 이르기를 오히려 호구에만 탁언하고 아직 유시한 말에 그 혹 (지계를) 정해 두지 아니하면 소득의 땅을 장차 무엇으로 써 빙고하리오 라고 하였읍니다 조서를 복도컨대 지의가 탄연히 명백하거늘 지금에 이르도록 귀국은 아직 이에 준의치 않고 다만 상항의 주성을 거수하는 것은 도리에 어찌 온편함이오리까 아지 못커라 진퇴의 사이(좌우간)에 마침내 어찌하고자 하나이까 위협에 복종한 자(협종)와 아울러 도망하여 이주한 호구에 미쳐서는 그 수가 자못 많은데 모두 물고333)라 칭하니 자못 가히 믿지 못하겠읍니다. 금년 8월 14일에 안북도호부가 래원성에 래첩하기를 인민이 강을 건너 창주와 삭주 지계에 이르러 경종한다 하였는데 공안을 감회(대조)컨대 전자에 선황(금 태조)제의 칙사를 입어(몽) 압강을 경계로 삼았고 승첨원의 고백숙이 망지를 선유함에 미쳐서는 다시 보주 일성의 경내를 수복치 않게 되었읍니다 지금까지 귀국 인민이 경종하고 있음은 사리에 불편하니 (이 공안이) 이르는대로 징계를 청하고 침(#;15-248)파케 하십시오 라고 하였고 또 지난 번 조정에서 고백숙을 차견하여 선유한 때의 언의어녹을 감회하건대 다만 칙지를 전하여 보주를 사함만 허하고 아울러 일성경내란 어구가 없으며 겸하여 계지(경계)를 화정치 아니하였음은 이 스스로 명백히 보이는 바입니다 관계내에 있는 지분은 마땅히 봉리들에게 약속하여 전과 같이 제마음대로 경첨하여 부질 없이 리회334)하기에 번잡스럽게 하지 말도록 하소서 천회335) 5년 2월 9일에 귀국의 사은사도 단견336)을 경(말)감하게 하였을 뿐더러 국조 전헌에 의하면 범인에게는 징상물을 다 내게 하여 피사자의 집에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이런 때(배상시)에 갖추어 반송할 우마두필과 은양은 자주 통첩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도록 오래 경과되었으며 모두 아직 그에 맞추어 송납치 아니하니 례에 있어 미안할 듯합니다 이상의 몇가지 일은 귀국이 과연 능히 정성것 받들어 곧 서표를 올려 교연히 스스로 밝힌다면 조정(금)에서도 또한 관대히 하여 장구한 계책을 이루게 할 것입니다 금년 3월 5일에 래원성에서 주인 없는 마 2필을 거두었으나 여러날이 되어도 아는 사람이 없었읍니다 궁구(문)의 좌우에서 수득한 것으로 헤아려 보면 반드시 이것이 계외에서 온 것이므로 곧 이미 교부를 마치게 하였다고 하며 금년 8월 14일에 동경병마도부서사가 동로군사의 신고와 순검사의 신고에 의하여 해안에서 귀국의 김철의 등 6인을 붙들었는데 그들은 바다에서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여기에 이르렀다고 진술하니 그 정장이 가련하므로 또한 이문토록 하여 교부했노라(분부)고 하였다 하며 금년8월 14일에 동경병마도부서사가 동로원군사의 신고와 순검사337)의 신고에 의하여 순변하다가 귀국의 최파희를 붙들어가지고 와서 곧 뒤이어 힐문하고 그 진술을 받았는데 그는 천제성 소관에 속한 자로서 본국의 우마를 도적질한바 붙들리면 적과 같은 극형을 받게 됨으로 이와 같이 죄를 피하여 처와 마 1필 을 거느리고 래도하였다 하므로 상건에 의거하여 적인과 지니고 온 물건을 또한 교부했노라 하였다 합니다 일일히 유사에게 지휘하여 곧 이문하여 송부케 하고 조금도 지체함이 없도록 하였으나 실은 변리들이 중간에서 막아 왕소에 달하지 않을까 두려워 하는 까닭으로 각각 갖추어 알려드리는 것이니 조정에서 귀국을 대접하는 뜻을 알 것입니다 또 어녹을 올려 말하기를 보주(의주)를 사하는 표문에서 방국을 들어 즐겁게 공경할 것이요 자손에 전하여 길이 맹서할 것이외다 고명한 일월이 위에 있거니와 어실(곤핍)하여 다른 마음이 없나이다 라고 한 말은 가볍고 평범한 것입니다 아울러 근대의 송인과 하국이 구료 및 조정(금)으로 더불어 세운 서서와 표같은 것은 모두 만약 이 맹을 어기면 사직이 경위케 되고 자손이 이으지 못하리라 하고 혹은 신명이 이를 죽일 것이오 능히 나라를 복되게 못할 것이다 라는 따위의 말이 였읍니다 헤아려보건대 이미 길이 맹세한 화호(서호)를 두터히 할진대 과연 식언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사의가 비록 존중타 하더라도 이치(이)에 가히 회피할 것이 없겠읍니까 예로부터 맹재338)의 말에 이르러서는 이같은 류가 하나 뿐이 아닌 것이며 겸하여 귀국이 료에 쫓을(여) 때의 서표에도 반드시 스스로 고사가 이었을 것이고 조정(금)이 수장한 도서에도 또한 가히 고거할 수가 있는 것이니 이 일은 잔실로 요료(작연)한지라 엎드려 바라건대 재량하여 빨리 단적인 수유를 사함으로써 돌아갔을 때에 조정에 신복하여 갖추어 주달하는 데에 빙거가 되게 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답하기를 「작자에 친히 주신 답녹(공문서)을 받고 이제 있는 사건을 따라 일일이 논보하여 삼가 아래와 같이 갖춥(구)니다 보주의 경성은 본래 고려의 지분으로 일찌기 구료에 병합되었더니 요지음 대조가 중외를 통일하는데 이르러 선황제(금 태조)는 소국을 애고하사 변신인 사하로 하여금 이를 사하였고 또 첨원의 고백숙이 봉사하는 날에 선유하여 다시 보주를 수복하지 않는다 하므로 소국은 경행함을 이기지 못하여 봉표하여 진사하기를 방국을 들어 즐겁게 공수할 것이요 자손에 전하여 길이 맹서할 것 이외다 고명한 일월이 위에 있거니와 성실하여 다른 마음이 없나이다 하고 이로써 마음에 맹세하여 다시 장표함이 없읍니다 생각하면 맹서란 것은 흔히 적국 사이에 서로 의기함으로 할 수 없이 하는 것으로 마치 춘추에 기록한 바 쇠주의 렬국의 일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은 망인이 천명을 받아 곽연히 통일하였으니 오직 하번(고려)는 중심으로 열복하여 직공을 공수하며 한결같이 고백숙의 래유한 조건에 의하여 건망함이 없었는데 또한 마땅히 서조를 회사하여 장원의 계책을 삼을 것이라 말씀하였으니 명령을 들은 뒤로 감구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읍니다 보유의 회사를 기다려 사신(행이)를 시키고 겸하여 표를 올려 알리겠나이다 그 인구의 도피 이주한 건은 이는 신의 부 선왕이 생전에 상국에 신사하지 않을 때의 일이며 당시에 신은 유소하여 일찌기 들어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더구나 고백숙이 왔던 때에 선유하여 소국으로 하여금 취편케 허하였으므로 드디어 겸하여 표로써 사례를 올렸는데 지금 다시 써 꾸짖으니 자못 가히 리해치 못하겠사오며 실로 깊이 놀래고 두려워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겠읍니다 천회 5년에 김자류가 입조하였을 때 능히 부하를 단속치 못하여 숭길로 하여금 인명을 자상케 함에 이르렀으므로 돌아오는 길로 즉시 김자류의 직과 전을 빼앗고 멀리 류배시켰으며 겸하여 숭길도 형에 처케 하였읍니다 자래로 소국의 구법은 범죄인을 처단하여 유형하는 외에 다시 징속하지 않는 터이므로 이 구습을 따라(인순) 금일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래유에 접하니 또한 두려움이 많은지라 다시 지휘 받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선황제(금 태조) 때에 변신인 사하가 선칙을 받들어 압록강을 사하여 경계로 삼게 할제 드디어 말하기를 이 뒤로는 그 경내에 있는 촌초 척목도 오인으로 하여금 채취하지 않도록 할 것이라 하였으며 더구나 금황제를 만나매 소국이 반드시 능히 구장을 공순히 따라 왕실을 준봉한다 하시고 그 땅을 아끼지 않고 특별히 갈라 주시었는데 다만 보주 일성만 허여하고 그 방측의 소토는 허여치 않음은 이 어찌 조정이 지인대덕으로써 소방을 무애하는 뜻이리요 이러므로 녹변의 관리들은 상국인민들이 강을 건너 창주 삭주 땅에 이르러 경종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글을 보내어 징계하고 정파할 것을 청하였던 것이온데 지금 래언을 받으니 그 관계내에 있는 지방은 마땅히 봉리들에게 약속하여 전과 같이 부질 없이 리회하기에 번잡스럽게 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니 이는 자래로 명을 받고 경뢰하는 마음에 어그러지는 것으로서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아지 못하겠읍니다 향자에 래원성에서 주인없는 마 2필을 수도한 것과 동로순검사가 해안에서 김철의 등 6인이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되어 온 것을 수착하고 또 수변하다가 최파희가 죄를 피하여 처와 마인을 거느리고 온 것을 수착하여 모두 교부한 것은 처음에 이를 듣고 비록 기뻐하였으나 상국 변관의 처분에서 나온 것이라고 알았더니 지금 듣건대 조정에서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일일히 유사에 심후한 것을 알겠기에 감하의 정성이 만만이외다 또한 마땅히 래차의 사행을 기다려 겸하여 표를 부쳐 써 사례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기유 7년 춘 정월 병술에 김이 영주관내관찰사 양공자를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기해에 추밀원부사 한충이 졸하였다. 기유에 정정숙으로 형부상서를 삼았다. 2월 신해에 인덕궁에 이어하였다. 기사에 예종비 왕씨를 봉하야 귀비로 삼고 최씨를 숙비로 삼았다. 서경 신궁이 낙성하였다. 임신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무인에 신궁에 입어하였다. 3월 기묘 삭에 신궁 건룡전에 거동하여 군신의 하례를 받고 상경유수와 서경 부근의 목 도호는 표하하였다. 계미에 군신을 향연하였다. 경인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와 사하고 조하기를「때에 따라 변을 타고 그 거처가 항구치 않음은 자고로 그러하였다 해동 선현의 말씀에 궁궐을 대화세339)에 창건하여 써 기업을 연장하라고 하였으니 이제 이미 땅을 상정하고 신궁을 창건하여 때를 따라 순유하게 되었으므로 은택을 중외에 널리 펴려고 생각하나니 그 사죄를 범한 자는 류배하고 류배 이하를 범한 자는 이를 놓아 주고 일찍 류배된 자로서 사하지 못할 중죄를 제외하고는 다 양이이함을 허하고 탁준경의 처자에게는 직전을 환급하고 이지미의 형제에게는 편리한대로 한 곳에 모여 살도록 허락하고 서경 및 소과 주 현의 산천 신지에 각각 존호를 가하고 신궐의 주산은 질품을 사전에 싣고 서경과 소과 주 현의 기노 효자 순손 절부 의부 환과 고독 독폐질자에게는 주식을 사하고 인하여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할 것이며 특종관 및 서경의 문무관과 신궐을 영조한 관사들에게는 모두 작 일급을 사하고 아래로 복예에 이르기까지 모두 은택을 입히라」고 하였다. 을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신축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계묘 왕이 국학을 시찰하여 선성(공자)에게 석전339)하고 은반 이사와 릉견 30필을 올리고 돈화당에 거동하여 대동성 김부철에게 명하여 서경의 무일편을 강하게하여 기거랑 윤언이 및 제생으로 하여금 그 대의를 강문케 하고 재추 시신 학관 제생들에게 주식을 사하니 학관 제생들이 표하하였다. 정미에 려수하였다. 무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하 4월 계축에 김강도장을 천성전에 설하였다. 무오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경신에 불골을 대안사로부터 모셔다(연) 인덕궁에 안치하였다. 5월 경신에 기거랑 윤언이 좌사간 정지상 우정언 권적이 상소하여 시정의 득실을 논하니 왕이 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정해에 연덕궁에 이어하여 임씨를 책봉하여 왕비로 삼았다. 경인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갑진에 조하기를「선왕의 법은 형과 명을 바르게 하고 분수를 상밀히 하여 큰 일에 갖추고 적은 일을 방비하였도다 관면의 식과 의복의 제를 상하가 유별하고 존비가 부동한 고로 귀하되 전천(박)치 않고 천하되 감히 (법도를) 넘지 않아서 인심이 안정되었던 것이다. 덕이 불쇠됨에 미쳐 법은 때로 더불어 폐퇴되어 의복에 등급이 없어 사람들이 절검할 줄을 알지 못하게 되었도다 아태조가 개국하매 잘 검덕을 삼가하여 오직 영도를 생각하며 화하의 법을 크게 행하고 간절히 단적(단계)의 풍속을 금하였는데 지금은 위로는 조연으로부터 아래는 민서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기풍을 다투고 단적의 풍속을 답습하여 가(왕)서는 돌이키지 않으니 깊이 가?(#~256쪽)할 일이다 이제 짐은 율선하여 써 말속을 고치려 하나니 그 승여와 복어같은 것은 모두 화려한 것을 버리고 질소한 것을 숭상할 것이다 아아 너희들 공경대부는 짐의 뜻을 체득하여 받들어 이를 행할 지어다」고 하였다. 6월 무신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경술에 중서문하가 주하기를 충주인 류연이 그 아비를 죽였는데 그 목수와 주이들이 능히 백성을 교화시키지 못함이니 청컨대 모두 치이340)에 하부하고(하이) 인하여 주를 강등시켜 군으로 삼으소서」하거늘 왕이 좌우에 물으니 대답히기를「예에 이르기를 주루(주의 국명)의 정공 때에 그 아비를 죽인 자가 있었으나 그 사람을 죽이고 그 실을 파괴하고 그 집을 파버렸을 뿐이고 그 살던 주 읍은 말하지 않았사온즉 주를 강등하여 군으로 삼는 것은 고법이 아님니다」라고 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무오에 려수하였다. 신유에 보보#(#~257쪽)계도장을 중화전에 설하였다. 추 7월 정축 삭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무릇 15일간 경천하였다. 무술에 왕윤사에 행차하였다. 8월 무신에 서적소에 거동하여 승선 정항에게 명하여 송조의 충의집을 강독케 하였다 왕이 청정의 여가에 여러 학사들로 더불어 강학코자 하여 수창궁에 곁에 있는 시중 소태보의 집으로써 서적소를 삼고 문서를 모으고 대사성 김부철과 예부원외랑 임완으로 하여금 여러 유신들로 더불어 번갈아 당직케 하였다. 계해에 인덕궁에 이어하였다. 병인에 오랫동안 비가 계속되므로 산천과 불사에 날 개이기를 빌었다. 신미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을해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윤월 기묘에 병부랑중 최관을 김에 보내어 천청절을 하하였다. 9월 병오 삭에 일식하였다. 임자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경신에 려수하였다. 계유에 백좌도장을 법왕사에 3일간 설하고 내외로 하여금 승 3만에게 재식케 하였다. 동 10월 임오에 동북 양계에 사신을 분견하여 제성의 관이들에게 선유하고 백성들의  질고를 존문하며 병장을 점검하였다. 11월 을묘에 호인영을 김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병진에 려령거와 홍약이를 김에 보내어 서표를 올리니 이를기를「사절이 분래하여 훈사로 밀유하니 엎드려 명령을 들으매 긍구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저윽히 생각컨대 주관(주예) 의 동맹은 그 맹약의 법을 관장하여 방국의 불협과 만민의 범령에 맹서케 하고 그 불신을 조#(#-259쪽)주341)할 뿐이었는데 쇠기인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렬국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능히 성신을 기필치 못하고 오직 맹서만을 앞세운 고로 시인은 그 빈번한 맹서를 기롱하였고 부자(공자)는 그 서명342)함을 찬성하였습니다 생각컨데 황제폐하의 지덕이 제선343)보다 높고 대신이 천하에 믿음을 주어 빛나게 일통을 열고 사방을 엄유하였으니 대방은 그 위엄에 떨고 소방은 그 은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이 소읍(여고)은 방우344)에 개재하여 진인345)의 작흥함을 듣고 제성에 앞서 조하한 고로 방풍346)의 죄를 면하고 의부347)의 포장을 욕되게 하여 모든 세고는 성략하고 수례로 특우하여 변지의 땅을 사하시고 공수의 식을 유시하여 조정에서 다시 타고가 없거늘 속국이 감히 이심이 있을 것이오며 엄명이 련하여 이르니 감히 삼가 받들지 않으리까 삼가 마땅히 군신의 의를 맹서하고 세세로 번병의 직책을 닦을지니 충신한 마음348)은 호일이 증명할 것입니다(유여교일) 만약에 혹시 변하는 일이 있으면 신이 이를 죽일 것입니다」고 하였다. 또 김철의와 최파희 및 임자 없는 마필을 돌려 보냄을 사한 표에「성덕이 바야흐로 더하여 가매 큰 나라는 외경하고 작은 나라는 회모하여 모두 이르렀고 용광349)이 널리 입혀지메 박물350)과 세고도 빠짐이 없읍니다. 신이 듣건대 서경의 비서편에 마우351)가 그 방일하고(마우기풍) 신첩이 포도하여도 감히 월축하지 말고 다만 돌아오게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제후의 일이나 그 말이 분전352)에 합치되고 그 가르침이 제왕에도 위배되지 않으므로 성인의 서에 편입되어 천자의 명에 다음가고 만세에 규법이 되어 육경353)이라 칭하였읍니다 엎드려 황제폐하의 신명이 발흥하고 위엄과 덕망이 겸비함을 만나니 통달354)한 무리가 복종하지 않음이 없고 이 하의 백성이 다 신첩이 되었나이다 하물며 오직 하읍은 동우에 부근하여 나라에 처하여 번직을 받들매 일찍 외천의 예를 다하였고 은혜를 미루어 소국을 사랑하매 이미 할지의 인덕을 입었나이다 더구나 황사의 이문을 받으니 다시금 인자함이 물에 래족함을 깨달았으며 변경의 말사에 있어서도 오히려 유망함이 없으니 조정이 지인을 보여서 힘써 관후하게 하셨나이다 돌아보건대 이 고과(왕후의 비칭)로 어찌 써 견디어 이기리오 지척의 위엄을 바라보매 다만 배명함을 알았으며 오직 춘추355)의 일은 거의 남에 뒤짐이 없으리이다」고 하였다. 경신에 크게 안개가 끼어 낮이 어둡기를 무릇 10여일동안이나 하였다. 병인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계유에 문공유을 김에 보내어 생신을 하함을 사하였다. 12월 정축에 동교에서 크게 열병하였다. 계미에 려수하였다. 경자에 대원공 사#(#~261쪽)로 검교태사 수태보 겸상서령을 삼고 최자성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문공인으로 이부상서 지문하성사를 삼고 임경청으로 형부상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이준양으로 전중감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경술 8년 춘 정월 기유에 신중원에 행차하였다. 경술에 김이 류변을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경오에 제석도장을 중화전에 설하였다. 2월 임오에 인덕궁에 이어하였다. 기축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3월 임자에 려수하였다. 기미에 려령거 등이 김으로부터 돌아오니 조에 이르기를「올린 바 칭사한 것과 진봉한 은기 차 포 등물과 아울러 서표를 부쳐 올린 것은 살펴 다 지실하였다 짐이 마지못하여 쳐서 두 죄인(송의 휘종 흠종)을 곧 사로잡았으니 비상한 경사를 드디어 사방에 널리 고하노라 경은 계속하여 왕번을 지키고 신절을 돈독하게 지키며 낭장356)을 들어내어 전사하고 비공을 베풀어 정성을 보내니 충가함을 생각하매 어찌 ?(#~262쪽)상함을 잊으리오 선유할 바 사건이 있어 별록과 같이 갖추었으니 이르거든 마땅히 깊히 살펴 써 후계를 잘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그 별록에 이르기를「전일에 백숙을 보내어 선유하러 갔을 때 다만 말하기를 보주(의주)는 빈(허) 성인 바 장래에 거기에 와서 만일 약속한 바 사건을 일일히 다 쫓으면서 다시 간절히 요구함이 있으면 곧 마땅히 할사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김자류가 입조할제 올린 바 표의 내용에 있어서는 망칭하기를 투입호구의 교부사는 이미 세년이 오래 되었고 다시 풍토가 수이하므로 안존함이 없이 모두 사망(물고)하였으니 소국으로 하여금 마땅히 편의를 취하도록 허락하소서」라고 하였다. 회조에서 특유한 바가 있었는데도 오히려 호구에만 탁언하고 서봉은 별주하지 않았으니 다만 일마다 완수할 것이며 세세의 충성을 믿음직스럽게 할 것입니다. 유시한 말에 그 혹 (지계를) 정해 두지 아니하면 소득의 땅을 장차 무엇으로써 빙고하오리까라고 하였고 또 사고덕 한방 등이 봉사하였을 때도 또한 위와 같은 조건의 논의를 아뢰었으며 회래의 주에 있어서도 교부(장도)한 어록이라 칭하여 의전히 식언하기를 신부 선왕이 생전에 (호운를) 얻지 못하여 전후 여러번 내린 조서에 일찍이 한번도 호구석방한다는 것을 기론한 것이 없고 오로지 장래 진상하는 서표를 기다려 반드시 의종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더니 이제 래표를 보면 문의는 정중한 것 같으나 마침내 호구를 귀납한다는 말은 없도다 (그대는) 반드시 생신 정조의 입하한 것과 횡사357)에 이르러서도 그 때를 잃지 아니하였으며 하물며 명령을 쫓아 서표를 올렸으니 족히 시이를 끊었음에랴고 생각하였으므로 교부의 일을 말하지 아니한 듯하다 만약 전후 신구의 호구를 계산하면 그 수가 불소하므로 다같이 죽었을 리가 없으니 당일 진몰한 자와 후에 병으로 죽은 자와 스스로 추삭할 수 없는 자를 제외하고는 만일 죽었다면 모름지기 유해가 있을 것이고 다시 혹 본신이 현재한 것과 아울러 그 모든 자손 파부 등 호는 모두 빨리 쓸어모아 현인수를 표를 갖추어 주문하면 곧 마땅히 양찰하려니와 만약에 과연 이에 의응하기 어렵다면 올리는 서장도 또한 약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노령거 등이 김에 있다가 객관을 떠나고자 하매 제가 절도사 반자성을 보내어 전지하기를「전자 조가 부자(송의 휘종 흠종)가 배신하였으므로 군사를 발하여 사로잡아 이곳에 두고 혼덕공과 중혼후로 강봉하였노라 차발한 보유사가 돌아와 말한 보유 회사사의 진표가 즉일에 준도되었는데 비록 표내의 서의는 더욱 정중하나 원근의 누차 협종 투입된 호구의 말은 기록치 않았으니 이미 정성을 바치고 맹세를 세운다면 전사로 상표함이 예에 합당할 것인데 도리어 부대적으로 행한 것은 예에 불가하다 표내의 것에 이르러서는 사리가 마땅하니 용서함직하도다 돌아가는 사신과 부사는 국왕께 신복하여 후차에는 원근 신구의 협종 투입한 호구수를 자세히 기록하여 표에 붙여 올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정묘에 영통사에 행차하였다. 하 4월 신술에 송이 진무교위 왕정충 보내왔다 왕이 조를 중화전에서 받으니 조에 이르기를 「오직 왕은 멀리 기도358)를 받어 일찍 문궤359)를 같이 하였고 이에 승부360)의 서문을 부쳐 공비의 공을 닦기 원하니 오직 충순하여 타심이 없음은 신명에 물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도다 관문에 소식을 둘려 주니 진실로 ?(#-246쪽)가하도다 생각하니 근년에는 실로 사고가 많았노라 중국의 백성들(생취)이 강적(김)의 진경(침구)을 만나 이미 땅361)을 거쳐(섭지) 더욱 깊이 들어와서 아직도 군사362)를 들어(칭병) 그치지 않으매 이에 장위363)을 옮겨 잠갈 강호(세간)에 머무니 만약 신사가 장차364) 오면(정래) 유사들이 방위(계)치 못할까 두려워하나니 변방의 경계가 휴지키를 기다려 마땅히 빙기를 묻게 하리라 진관365)을 헐어 납차하여 후회 없기를 바라며 한관366)을 닫아 질을 사절한 그 전규는 쓰지 않을 터이니 저 평소의 생각을 양찰하여 나의 성의를 분#(#-265쪽)득하라」고 하였다. 신사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정해에 대묘에 제#(#-265쪽)제하였다. 무자에 일관이 주하기를「지금 한재가 심하니 청컨대 비를 묘사와 산천에 비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지어 사대사 이주연 중승 임원준 잡단 황보양 시어사 고당유 전중시어사 문공원 등이 상소하여 시폐를 말하니 왕이 다만 23사만 청종하였다. 기축에 박동주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신축에 문하시중 이공수가 양부의 대신들과 회의하고 백요들로 하여금 차등 있게 출미케 하여 재를 현성영통 2사에 설하고 국가를 위하여 재를 가시고 복을 빌었다. 5월 정사에 불정도장을 중화전에서 7일간 설하였다. 6월 임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계미에 우박이 내렸다. 을유에 보보#(#-266쪽)계도장을 중화전에 설하였다. 정해에 려수하였다. 계사에 김부일로 수태위 판비서성사 주국을 삼고 김부식으로 판삼사사를 삼고 최자성으로 판상서예부사를 삼고 문공인으로 판상서형부사를 삼았다. 추 7월 갑진에 승화백 정이 졸하였다. 을묘에 불골을 중화전에서 공양하였다. 경신에 시어사 고당유를 좌천하여 공부원외랑을 삼았다. 기사에 송사 왕정충이 돌아가매 부표에 이르기를 「제서의 말씀이 단명하고 예의가 간측하오니 공손히 가르침을 받들매 눈믈이 떨어짐을 깨닫지 못하였나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황제폐하께서는 잘367) 황제의 파천을 이어받아(영승제천) 황통을 소무하였나이다 때가 다고하니 이에 간난중에 성덕을 계발할 시기이오 천명368)이 떳떳함이 없으매 역수가 몸에 있는 경사를 보존하였나이다 돌아보건대 오직 하국은 멀리 하추에 있어 다만 진경은 심하나 능히 분문하지 못하고 오직 춘추369)의 일이 있으매 가히 뜻을 조정에 달하오니 조석370)의 지를 넘어서 행재에 승문하기를 원하였는데 어찌 미간이 위로 청충에 간취되어 특히 왕인(사신)을 보내어 널리 황명을 가지고 올 것을 생각하였으리오 대개 변경으로 인하여 빙기를 늦추었는데 조서를 받든 이후로 옷깃을 어루만지며 어찌할 줄(문금자실)을 모르겠나이다 이미 산해를 발섭하여 명을 근왕에 이르게 하지 못하였으며 또 전장을 봉준하여 때를 따라 수공함에 미치지 못하옵고 한갓 마음 아픈 근심만 가지고 위에 봉헌(향상)하는 공행을 닦지 못하였으니 마음이 타에 있지 않음은 신도 무망함을 알 것이외다 하늘에 긴 복조를 빌면서 다만 선왕371)의 중흥을 원하오며 눈을 씻고 관광372)하려 가서 숙신의 래하에 참여하나이다 신극(천자의 존위)을 첨망하매 신혼(심신)이 비양하나이다」라고 하였다. 8월 갑술에 왕윤사에 행차하였다. 계사에 최자#(#-268쪽)를 김에 보내어 천청절을 하하였다. 을미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임자에 가타파구신도장을 홍경원에 반약도장을 선군청에 모두 27일간 설케 하니 다 묘청의 말을 쫓음이였다. 을묘에 려수하였다. 동 10월 임신에 서경으로부터 이르러 조하기를 「과인이 박덕한 몸으로 조업을 이어받어 능히 간난을 겪고 능히 근신하여 빙연을 건느는 것 같이 하는데 일자(점후 · 복서의 인)와 음양가류들이 고인의 말에 의거하여 서경에 행차하기를 주청하므로 짐은 쫓아 이를 행하고 지금 이미 환궐하였으니 장차 소은으로써 널리 중외에 미치게 하려 한다 그 사죄를 범한 자는 형을 감제하여 류배시키고 유형 이하는 이를 놓아 주고 일찍 류배된 자도 이를 유서하되 그 중에서도 면제하기 불가한 자는 양이를 허하여 주도록 하며 역로의 산천 신지에 호를 가하고 수행한 자와 서경의 문무원요 이인에게는 각각 동정직을 가하고 장고373) 입사잡류에게도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고 60된 자(기년)와 효자 순손 절부 의부 환과 고독 독폐질자에게도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라」하였다. 계유에 경용절이므로 려수하였다. 정축에 무능승도장을 선군청에서 37일간 설하였는데 묘청의 말을 쫓음이였다. 신묘에 재추들을 편전에서 향연하고 정사를 자문하여 밤이 늦어 파하였다. 11월 갑진에 합문부사 이저를 김에 보내어 생진 하함을 사하였다. 경술에 전중내급사 최윤숙을 김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을묘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임술에 간의 안직숭 등이 상소하여 시정을 논하였다. 12월 을유에 좌사랑중 김단을 김에 보내어 보주(의주지방)에 투입한 인구의 추삭을 면제할 것을 청하였는데 표에 이르기를 「명을 들은 뒤로부터 정신이 진공하여 초개와 같은 간정을 문득 다시 개진(부진)하오니 신성한 자애로 애련히 살펴 주실줄 바라오나 물러서 생각하건대 참월하여 더욱 송구한 마음 간절합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신은 하찮은 박재로서 이 소국을 다스리는데 진인374)이 명을 받아 대업을 일으켜 써 천375)에 통율(통천)됨을 만나 곧 의를 사모하여서 입조하고 드디어 칭번하여 수공하였나이다 황제폐하께서는 인은 해망376)에 깊고 덕을 포황377)에 후하나이다 그 상국에 향하는 근성을 양찰하도 적은 것을 사랑하는 은혜를 넓히소서 천회 4년 병오 9월 일에 선유사 고백숙을 보내와 조지를 전하고 또 구선이 있었는데 보주성은 다시 수복치 않을 것이니 그 투래한 인구도 또한 소국으로 하여금 취편케 하라 하기에 신은 그 때에 황공(국척)하여 뜰에 내려 명령을 배수하고 신민으로 더불어 아름답게 여겨 기쁜 마음으로 감대하고 구구한 마음은 이미 겸하여 표사하였나이다 또 천회 6년(고려 인종 6년) 무갑 12월 일에 보유사 사고덕과 한방이 와서 별록을 전하되 보주의 땅은 처음의 조유가 있는만큼 다시 수복하지 않는다 하였기에 마음에 생각하기를 반드시 능히 삼가 구장따라 왕실을 준봉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그 땅을 아끼지 않고 특히 할사를 행한 것이라 하였나이다 그 후 몇해가 되어도 아직 서표를 진납하지 못하였으니 도리에 어찌 편온하며 자래 협종한 자와 아울러 도이한 호구에 미쳐서는 그 수가 자못 많은데 모두 죽었다 하니 자못 가히 양찰치 못하겠다 하였으며 또 지난번에 온 칙지에는 보주를 허사하되 아울러 일성경내란 어구가 없고 겸하여 아직 계지를 획정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분명히 관계되는 지분은 마땅히 봉이와 약속할 것이다 우상의 수사에 있어 경의 나라가 과연 능히 정성을 밀어 위를 섬긴다면 곧 서표를 드림이 교연자명한 것이고 조정에서도 또한 마땅히 서조를 회사하고 겸하여 따로히 지휘를 내려 봉강을 신획하되 일도 힘써 관대함을 쫓아 장구의 계를 이루게 할 것이다 하였고 또 한방이 관인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조정에서 바야흐로 대신으로써 천하에 보일 것이니 어찌 그대의 나라를 속이리요 하므로 신은 언서의 명백함을 받고 덕의의 특수함에 감명히여 하늘을 가리키며 마음에 맹세하고 장표를 배헌하나이다 저윽히 생각컨대 황제께서 자애하사 굽혀 서조를 사하시고 새서가 자주 와 훈래이 가엄하오니 방황하고 우구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읍니다. 하물며 인물이 투래한 일을 생각하면 이는 신의 부 선왕이 아직 상국에 신사하지 않을 때의 경미한 사물이온데 이를 책함이 이와 같으면 특히 소국의 경뢰하는 마음에 어그러질 뿐 아니라 또한 조정이 지인과 대덕으로써 하번(소국)을 애무하는 뜻도 아닌가 하오니 이는 신이 간 혈378)을 피력(피간력혈)하여 천위(왕위)에 간범되나 능히 스스로 그칠  수가 없사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밝은 조#(#-271쪽)시를 부회하여 깊이 애련을 베푸시고 선왕의 원방을 편안케하는 상도를 법 받으시와 대한379)의 도망한 자를 놓아주는 제도를 써서 특히 지성의 청을 윤허하여 곡진히 전도의 은혜를 미루어 주시면 비록 소국은 무능하나 반드시 감격하여 논보할 것입니다 규곽380)의 뜻은 백일을 향하여 길게 기울어지고 강한의 흐름은 창해로 돌아가 쉬지 않을 것이오니 황천후토(천신지지)도 신의 이 말을 감찰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회조하기를 「상표한 바와 아울러 진봉한 어의 의대 은기 합물 등을 살폈노라 경은 뜻이 협보에 있고 벼슬이 정봉에 있도다 계수하여 칭번하니 외천의 의에 합하기를 힘쓰고 뜰에 차게 삼가 (공물을) 바치니 오직 향상의 의를 베풀었도다 충근을 생각하매 가?(#-272쪽)함을 잊지 못하겠도다 고주한 바 일은 다음에 마땅히 보유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갑오에 궐정에서 초제하였다. 병신에 문공인으로 참지정사를 삼고 김부식으로 정당문학 수국사를 삼고 임경청으로 지추밀원사를 삼고 이준양으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임원애로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신해 9년 춘 정월 을사에 김이 이거열을 보내와 생신을 하하거늘 정미에 중화전에서 향연하였다. 경술에 거열이 돌아가매 표문을 부쳐 사례하였다. 을묘에 어사잡단 정점 등이 상소하여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다. 2월 병자에 인덕궁에 이어하였다. 기묘에 원자의 이름을 창이라 사하고 사자를 보내 예물을 사할제 동궁의 위치를 중서문하청사에 권설하여 조서를 받게 하니 왕은 정사당 동편의 장전에 거동하여 예식을 관람하고 인하여 재추 대간을 향연하였다. 신사에 제안공 서#(#-273쪽)가 졸였다. 3월 신축에 불정도장을 천성전에 설하였다. 갑진에 제하기를 문관상참 이상 및 한림사관 국학 보문각 식목 도병마 영송도감 행영록사 군후원과 무관 사품 이상은 각각 봉사를 올려 군국의 리해룰 말하라 하였다. 무오에 려수하였다. 경신에 우산기상시 정준후와 지어사대사 이주연 등이 상소하여 국사를 논하였다. 계해에 제하기를 「벌목을 하지 말것이며 짐승의 갓난 새끼(미)와 새의 알을 없애지 말고 뼈와 썩은 살을 덮어 주고 동서대비원과 제위포를 수즙하여 써 민질을 구호하라」하였다. 갑자에 제생에게 노자와 장자의 학을 닦는 것을 금하였다. 하 4월 병자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무인에 원자(태자)의 이름을 철로 고치고 최유와 정준후로 좌우첨사를 삼았다. 임오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기축에 송의 도강 탁영이 내주하기를「소사 유광세가 장수 황야차를 보내어 대병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김인을 격파하니 너머진 시체가 들을 덮고 3000인이 강복하였는데 반절이 한인이였다 양절로부터 하북에 이르기까지 겨우 평안하므로 황제께서 월주에 주필(황제의 머무름)하여 건염 5년을 소흥 원년으로 고쳤다」하거늘 왕이 탁영 아뢴 바 글을 재추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전자에 후장과 귀중부가 와서 원병을 청하였으나 능히 쫓지 못하였고 또 양응성이 길을 빌려 김이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또 쫓지 않았는데 생각하면 조종 이래로 송과 더불어 결호하여 입은 은혜가 지후한데 재차 명을 쫓지 않았으니 그 신의에 어떠한가」 하니 최홍재 등이 모두 말하기를「일개(일인) 행이(사자)를 보내 고주하는 것이 편의하다」고 하였다. 신묘에 제하기를「상서호부는 곧 옛날의 대사도의 직이니 그 오전381)으로써 백성을 교화하라」하였다. 을미에 재차 우제였다. 5월 무술에 제하기를「매 4시의 맹월(초월) 초에 시조하고 관원에 명하여 시령382)을 읽게 하라」고 하였다. 신축에 큰 비가 내렸다. 갑진에 중서문하가 주하기를「지금 궁궐을 중수함에 있어 양부 추재들로 하여금 감독케 하니 이는 이른 바 10양383) 9목(민소관다)인지라 마땅히 원수를 감하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여 평장사 최홍재와 참지정사 문공인과 지추밀원사 임경청으로 그 역사를 감독케 하였다. 병오에 제하여 백관으로 하여금 각각 태조384)의 계백요서를 사초하여 집에 간직하여 두고 자손들에게 가르치게 하였다. 을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100여일이나 경천하였다. 6월 병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기묘에 려수하였다. 경진에 보보#(#-274쪽)계도장을 중화전에 설하였다. 제하기를「전에 이르되 나라가 장차 흥하려면 백성을 자식같이 보고 망하려면 백성을 초개와 같이 본다 하였다 그런 고로 선왕께서는 사람에게 참아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써 사람에게 참아 하지 못하는 정사를 행하였던 것이다 거년 겨울에 궁궐을 영조하매 삼도에서 벌목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역사에 죽은 자가 자못 많았으니 마땅히 관속을 내어 그 처자들에 부조하라」하였다. 정해에 참지정사 이숙가 졸하였다. 기축에 려수하였다. 추 7월 계묘에 려수하고 사죄 56인을 감형하여 유인도에 장배하였다. 정사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기미에 태백(성)이 경천하였다. 8월 정묘에 인덕궁에 이어하였다. 임신에 양부의 재신을 편전에 불러 군국의 일을 문의하였다. 병자에 일관이 주하기를「근래에 무당의 풍속이 크게 행하여 음탕한 제사가 날로 성하니 청컨대 유사들로 하여금 무당의 무리를 멀리 내쫓도록 하소서」하니 조하여 가타 하였다. 모든 무당들이 이것을 근심하여 재물을 거두어 은병 백여개를 사(무) 권귀한 사람들에게 재물로 바치니 권귀한 사람들이 주하기를「귀신은 형체가 없어서 허실은 가히 알 수 없는 것인 듯하니 일절 그것을 금함은 편의치 못한 일입니다」고 하니 왕이 그렇게 여겨 그 금하는 것을 늦추게 하였다. 을유에 서북면병마사가 주하기를「금주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동경에 이르렀는데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하거늘 왕이 대성 지제고에 명하여 각각 봉사를 올리게 하였다. 신묘에 지례사 각문지후 유퇴를 금의 동경에 보냈다. 계사에 병부랑중 왕수를 김에 보내어 천청절을 하하였다. 9월 병신에 이공수로 검교태사 수태전 문하시중 판이부사를 삼고 최사전으로 수태위 문하시랑평장사를 삼고 김향으로 검교태위 수사공 문하시랑 동중서시랑평장사를 삼아 모두 인하여 치사케 하고 최홍재에게 판이부사 최자성에게 검교사공 중서시랑 판병부사 문공인에게 검교사도 중서시랑평장사 서경유수사 김부식에게 검교사공 참지정사를 가하고 최유로 병부상서 한림학사승지를 임원애로 동지추밀원사를 삼았다. 정유에 직문하성 안직숭과 우간의 이신과 중서사인 임존과 좌사간 최함 등이 주하기를「동경지례사 서장관 최봉심은 본래 무거인이므로 서장은 그 적임이 아니며 또 그가 일찍 대언하기를 국가에서 나에게 장사 1000명만 주면 가히 김국에 들어가서 그 임금을 사로잡아다가 바칠 것이라 하였으니 그 광망함이 이와 같으므로 저윽이 일을 낼까 두려우니 이를 보내는 것이 마땅치 않음니다 」하며 3일간이나 합문에 엎드려 고쟁하였으나 윤락치 않았다. 무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경자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계축에 려수하였다. 임술에 유퇴는 금주가 동경에 행차하였으므로 달치 못하고 돌아왔다. 동 10월 갑자 삭에 불정도장을 천성전에 설하였다. 계유에 법왕사에 행차하여 백좌도장을 3일간 설하고 내외에 명하여 승 3만에게 재식하였다. 경진에 왕비 임씨가 아들 호를 #탄생하거늘 어사대부 임원예을 보내어 교서와 례물을 사하였다. 11월 기해에 예부랑중 고당유를 금에 보내어 생진을 하한 것을 사하였다. 경술에 상의봉어 이중연을 금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을묘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12월 신미에 다시 지례사 유퇴를 금의 동경에 보냈다. 임신에 려수하였다. 임오에 최홍재에게 검교태전를 최유에게 판한림원사를 가하고 임원애로 좌산기상시를 삼았다. 기축에 반약도장을 중화전에 설하였다.


임자 10년 춘 정월 기해에 금이 영주관찰사 고성산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임인에 비로소 궁궐을 수리하였다. 계묘에 금의 사신을 인명전에서 향연하였다. 기유에 고성산이 돌아가거늘 표(문)를 부쳐 써 사례하였다. 2월 계유에 인덕궁에 이어하였다. 을해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신사에 례부원외랑 최유청과 합문지지후 침기를 송에 보내어 상표하기를「양성이 원정 중에 있음에도 이미 능히 관수(직책의 뜻이나 여기서는 유사를 가리킨 것)에게 분문치 못하였고 대인
385)이 명조를 계승함에 미쳐 또 아직 궐정에 경하하지 못하였나이다 앞서 무신년에 국신사 양응성이 가도하여 김에 들어가고자 할 때에도 명은 비록 중엄한데서 나왔으나 일이 진실로 승품키 어려워서 뒤이어 단개(한사람의 사자)를 보내어 침성만 바쳤고 또 경술년에 왕정충이 와서 조지를 전하되 변경이 그칠 때를 기다려 빙기를 물음이 마땅하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신은 훈지의 정녕함을 체득하고 감히 조종386)의 례를 이루지 못하였으나 은영의 우악함을 느끼고 간절히 귀향하는 성근을 펴고자 하여 드디어 루의(미미)의 마음을 진술하여 운천의 조감하심에 공고하나이다 위로 주실을 높임은 진백387)의 전공에 쫓지못함을 부끄러워 하며 안으로 한정(송의 조정을 말함)에 내속함은 조선의 옛일을 잃지 않도록 기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임오에 서경에 행차할새 국학을 지내니 제생들이 전로에서 영알하였는데 양정재생388) 최광원이 상소하여 시사를 말하였다. 3월 계사에 인왕도장을 장락전에 설하였다. 갑오에 대화궁389)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군신을 건룡전에서 향연하였다. 경자에 구제궁390)에 이어하였다. 신축에 영명사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기린각에 거동하여 국자사업 윤언이에게 명하여 역경의 건괘를 강의케 하고 승선 정항과 례부랑중 이지저와 기거주 정지상 등으로 하여금 문난케 하였다. 계묘에 정항에게 명하여 례기의 중용편을 강의케 하고 또 명제하여 대학박사 곽동순 등 18인으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였다. 병오에 인왕도장을 관풍전에 설하였다. 경술에 장락문외의 장전에 거동하여 활쏘는 것을 사열하였다. 기미에 금의 동경지례사 오언정이 왔다. 하 4월 기사에 예종의 기진이므로 장경사에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신미에 수태보 판비서성사 김부일이 졸하였다. 임신에 장경도장을 천성전에 설하였다. 신수에 정항과 윤언이와 정지상을 다시 경연에 나와 경서를 강의케 하고 아울러 화서대 일요씩 사하였다. 병술에 대동강에서 용주를 탓는데 기월이므로 락기는 달아놓고 작락치 않으니 정지상이 주하기를 「례에 기일은 있으나 기월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읍니다 만약 기월이 있으면 기년도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작락케하여 써 도인 사녀의 소망에 부응케 하소서」하니 제하여 가타 하였다. 윤월 갑오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와 사하고 인덕궁에 입어하였다. 을미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정미에 최광원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병자에 어사대부 임원준 등이 공원391)의 시험제목이 착오된 것을 상주하고 금년의 급제 명패를 추탈하고 개시할 것을 청하였으나 회보치 않으매 원준 등은 물러나와 대죄하니 어사대가 비(공)기를 7일간이나 되었다 또 국학생 정언백 등 50인이 상서하여 개시할 것을 청하거늘 국자사업 이지저에게 명하여 제생에게 선유하기를 「조정을 비방하면 본시 떳떳한 형벌이 있는 것이나 지금은 아직 사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행과 예를 정수하여 써 후래의 선시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계미에 최유청 등이 송으로부터 돌아오니 조에 「짐이 남국을 순성(성방)392)하고 길이 동번(고려)에 통하였도다 이에 향상의 공을 아름답게 여겼는데 거듭 관광의 청이 있으니 치사(시사)를 재려393)에 돌려 장차 근성을 나타내고 제후를 도산394)에 모음은 다시 과덕함을 부끄러워 하노라 이에 승여(임금의 수레 또는 천자)의 가는 곳에 신사의 래정을 기다릴 것이나 돌아보건대  가을 변방에 말이 살찌매 혹 계엄을 겨를(가)치 못할지며 봄 조수(춘조)에 배가 평온할 적에 이섭(항해)하여서 탈 없기를 바라노라」고 하였다. 6월 경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평장사 최자성과 이부시랑 임존을 파면하였다. 갑진에 보보#(#-280쪽)계도장을 중화전에 설하였다. 추 7월 경오에 다시 최자성으로 중서시랑 동평장사를 삼았다. 경성이 기근하였다. 곡물이 귀하고 물건이 천하여 은병 일사(점)가 쌀 5석 소마 1필이 1석 암소 1두가 4두 포 1필이 6승에 가치가 매겨지므로 가항에는 아사한 자가 서로 바라보게 많았다. 8월 기유에 좌정언 박연수#(#-281쪽)가 합문에 엎드려 상소하여 3일간이나 시사를 말하였으나 회보하지 않았다. 임자에 혜성이 나타나니 길이가 3척이였다. 9월 갑자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신미에 려수하였다. 임신에 천수사에 출어하였다. 동 10월 갑오에 국청사에 이어하였다. 병신에 대명궁에 환어하였다. 신해에 숭문전에 거동하여 활 쏘는 것을 사열하고 맞추는 자에게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11월 갑자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기묘에 제하기를 「짐이 박덕한 몸으로 조업을 계승하여 때마침 쇠이를 당하매 여러번 변고를 겪었으므로 밤낮으로 면려하여 중흥을 바라노라 훈언에 이르기를 「수만년을 쌓으면 반드시 동지의 갑자(일)을 얻어 일 월 5성이 모두 자방에 모이므로 이를 상원이라 하여 역의 처음을 삼나니 개벽 이래로 성인의 도가 이를 쫓아 행하였는데 지금 11월 초 6일에 동지를 만나 그 야반이 갑자를 만났으니 삼원395)의 처음이 되어 가히 구를 고치고 신을 새롭게 할 것이다 이에 유사에 명하여 고현의 유훈을 받들어 서경에 대화궐을 창건케 하나니 아아 그대들 삼사(삼공)대부396)와 백관서사는 함께 유신의 정치를 도모하여 써 영세의 경휴를 더하게 하라」고 하였다. 경진에 명인전에 거동하여 제를 내려 이르기를 「짐이 어려서 즉위하였으므로 국가의 다난함을 감당치 못하였고 비록 정사에 임하여 선치를 원하여 편안할 겨를이 없었으나 진실로 덕으로 적의한 바를 처리하지 못하였으므로 무릇 시위하는 바가 천심에 잘 맞지 못하였도다 이런 고로 산이 무너지고 물이 속는 이변이 계속하여 일어나니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장차 깊은 못에 떨어지는 것 같으나 오히려 년노 충의한 신하들이 광구하는 힘에 의지하여 옛 과실을 고쳐버리고 정치를 일신하려 하였으나 돌아보건대 능히 처리치못함으로써 일은 대소가 없이 자칫하면 문득 국체를 해롭게 하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크게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직 병오년397)의 일사이다 오직 외가의 형세가 치심하고 참특이 도에 지나 가히 막지 못하였으므로 불궤한 일을 도모하여 가만히 신기(왕위)를 엿보니 조종의 기업이 거의 추실하는데 이르렀으므로 부득이한데서 나온 것이나 유사의 논의를 듣고 법에 따라 죄를 정한 것이다. 아아 대의398)로 인하여 친을 멸함은 옛날에도 또한 있었다. 그러므로 친을 친하는 은은 천성의 자연인 것이니 매양 한 번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뼈에 사무치도다. 그런데 소위 당여자란 비록 권세에 탁부하였으나 어찌 그 모두가 부궤(모반)에 참여하여 도모하였으리요 그런 고로 자주 너그럽게 용서하라는 령을 내렸으나 유사들은 짐의 마음을 체득치 못하고 상언하기를 마지않아 반드시 불신으로 죄를 주려 하여 인심을 선동케 하여 중외가 소란스러워 죄를 두려워하고 관례를 근심하여 화기를 상하기까지 이르렀으니 이미 류서자로서 정죄하여 이름을 사적에 기록된 것을 제외하고는 무릇 있는 바 형박문부(형벌과 봉박의 문서)로서 유사에게 간직하여 있는 것은 모두 다 이를 외정에서 태워버려 하구(결점치욕)를 씻어 없애고 크게 자친의 길을 열게 할 것이며 자금이후로는 문무의 신하들은 오직 시비선악으로써 포폄출척(공죄승강)할 것이오 전사로서 다시 더럽히지 말 것이다. 탁준경과 같은 자는 죄악이 극히 중하나 그 공도 또한 가록할 바 있으므로 법은 마땅히 공과 죄를 상제하여 가히 그 자손에게 직전을 돌려 줄 것이고 채석과 이후진을 제한 외에는 그 처자에게 다시 연좌하지 않게 할 것이니 이도 또한 죄인399)이라도 처자에게까지 (벌을)미치게 하지 않는(죄인불노) 뜻(의)인 것이다 서경에 말하기를「령을 내면 오직 행할 것이오 오직 돌이키지 말라」하였으니 병오년 이래로 교지를 수사회에 걸쳐 내렸으나 유사가 즐거히 봉행하지 않았도다 신이 군명을 행치 않음은 국분#(#-284쪽)가 점점 가볍게 된 소이인지라 짐은 심히 이를 근심하나니 자금 이후로는 만약 감히 이 일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제의 위반자로서 논죄할 것이다」고 하였다. 12월 경자에 려수하였다. 정미에 김부식으로 수사공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이준양으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이총린으로 참지정사를 삼고 최유로 이부상서 지추밀원사를 삼았다.

계축 11년 춘 정월 계해에 김이 고진가를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2월 경자에 인덕궁에 이어하였다. 계묘에 평대에 거동하여(임헌) 원자(태자)을 철에 책봉하여 왕태자를 삼고 책하기를 「역에는 일삭400)으로서 장남의 위를 삼고 기에는 삼선401)으로서 세자의 례를 삼았으니 옛날의 왕자도 어찌 일찍이 상사를 봉립하여 써 종묘와 사직의 근본을 굳게 하고 군신 부자의  분랑을 정치 않았으리요 아아 너 원자는 천부#(#-285쪽)의 영예한 성품으로 어려서부터 준수(기의#(#-285쪽))한 표상이 뛰어나 단아하여 농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학문에 향할 줄을 알아 독서에 숙습한 것과 같고 휘한(호)에는 신조한 것 같았도다 덕행은 원양402)에 합하고 천서는 저이(태자)에 당하였으니 반드시 능히 비?(#-284쪽)403)의 존엄함을 이어받아 중외의 첨망에 충족할 것이다 지금 사자를 보내어 너를 책봉하여 왕태자를 삼노라 어희라 오직 지인이라야 가히 써 중기를 주장할 것이요 오직 선을 지어야 가히 써 명명을 보존하나니 너는 때로 익힘을 삼가고 그 닦는 것을 민첩히 하며 사?(#-286쪽)한 사람을 소원히 하고 방정한 인사를 친근히 하여 오직 충효를 힘쓰고 례의가 아니면 천행하지 말아 조종의 경광(성덕)404)을 크게 계승하여 써 방가의 경업(대업)을 길게 할지어다」라고 하였다. 갑진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을사에 한유충과 이지저를 송에 보내어 사은하려 하였는데 가다가 홍주 해상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거의 엎어질번 하여 공비가 물에 젖었으므로 도달치 못하고 돌아왔다. 3월 경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병인에 려수하였다. 경오에 인덕전에 거동하여 왕태자를 책봉하였으므로 사하고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하 4월 기축에 문공인으로 판상서병부사 감수국사로 삼고 최유로 참지정사 판상서공부사 겸태자소보를 삼고 임원애로 참지정사 판한림원사를 삼고 임경청으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임원준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한유충으로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경인에 대명궁에 이어하엿다. 을미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갑진에 제하기를 「항양405)이 해를 이루고 항한406)이 재가 되니 저윽히 정령이 번가하고 형법이 참곡#(#-286쪽)하며 혹은 옥에 시달려 사람이 그 고를 견디지 못하여 그러한가 두려워 하노라 경관 및 양경유수와 양계병마사 제도안렴사는 친히 로옥을 감찰하여 중407)한 죄수만을 너그러히 하고(연중수) 경한 자는 출옥시켜라」고 하였다. 무신에 금강경도장을 숭문전에서 7일간 설하였다. 5월 을축에 조하기를 「짐이 박덕하므로 마침 액운을 만나 궁실이 소분되고 창름이 공궤하며 조정은 바르지 못하고 풍속이 효박하되 정치의 술이 적고 시설이 방법에 어그러져 상하의 인심이 날로 더욱 완비하고 원근의 민업이 날로 더욱 쇠잔하여지매 숙야로 두려워서 편안하게 있을 겨를 이 없도다 지금 간관이 주하기를 경기 산야에 황충이 송엽을 먹는다 하니 이는 대개 나라에 간사한 사람이 많고 조정에 충신이 없는지라 천의에 이르기를 위에 거하여 록을 먹고 공이 없으면 벌레와 같다 이를 빨리 구하지 않으면 병란이 일어날 것이오 유도한 자를 거용하여 고위에 두면 재앙이 가히 소멸될 것이 라고 하는 듯하나 고인이 말하기를 신이 록위에만 편히 하면 이를 탐이라 하는 것으로서 그 재앙은 충이 뿌리를 먹고 덕이 떳떳함이 없으면 이를 번이라 하는 것으로서 충이  잎을 먹고 무덕을 쫓아내지 않으면 충이 근본을 먹고 동작408)과 다투면 충이 줄기를  먹고 악을 덮고 얼(악인)을 내면 벌레가 심을 먹는다고 하였다 옛날 진 무제가 고충과 양준을 총임함에 황충이 있었으니 이는 무덕을 쫓아내지 않은 증험이요 량의 대동(무제의 년호) 초에 황충이 송백의 잎을 먹으니 경방409)이 말하기를 「록을 먹되 성화에 유익하지 않으면 하늘이 벌레로 본다 벌레는 사람에 무익하고 만물을 먹는 것이니 이는 공경이 록만 먹고 리익이 없는 부응이다 천재가 유로써 나타나니 청컨대 신을 아는 것은 임금만 같은 이가 없으니 현인을 나오게 하고 불초를 물리치어 강단하여 의심치 마소서」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유사들이 선은 임금의 일로 일컫고 허물은 자기의 일로 일컬어 허물을 인책하여 스스로 진술하는 것이다 짐은 다스림을 구함이 비록 간절하나 덕이 실로 같지 않아서 정사가 폐하고 백성이 쇠잔하는데 이미 능히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여서 가용자를 버리고 무용자를 등용하여 용인과 비부들이 외람되게 직위의 반열에 올라 사를 영위하고 공을 해롭게 하며 회로#(#-288쪽)가 크게 행하여 공도가 막히여 해가 된지 더욱 오랜지라 그 충절을 품고 가히 패익될 수 있는 사람이라도 해를 당할가 두려워하여 벙어리 같이 세속에 따라 진퇴하니 이것은 상천이 재이를 내리는 바이다 지금 재보군공으로 고례를 끌어 논열하는 자는 바야흐로 장차 선은 선하게 여기고 악을 악하게 여겨 격려하여 국사를 맑게 하려 하는 자이니 짐은 비록 불민하나 좋은 말과 바른 의논이면 어찌 즐거히 따르지 않으리요 모든 내외관요로서 그 탐오모리하는 자나 포악 잔인한 자나 혹 유#(#-289쪽)겁하고 불초하여 리익은 없고 손해만 주는 자를 알지 못하는 바 아니다 그러나 가르치지 않고 주함을 학이라 이르는 것이니 습속이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갑자기 죄책에 처치함은 짐이 참아 하지 못하는 바이니 유사들은 마땅히 정녕히 고유하여 자신케 할 것이며 만일 마음을 고치지 않고 악을 기르어 개전치 않는 자는 친소와 귀천을 막론하고 다 법으로 다스릴 것이며 그 청백하게 봉공함이 있거나 절의가 특수한 자는 마땅히 각각 표창하여 거용토록 하리라」고 하였다. 병인에 무 300여인으로 도성청에 모아 비를 빌었다. 임신에 시장을 옮겼다. 숭문전에 거동하여 평장사 김부식에 명하여 주역과 상서(서경)를 강케 하고 한림학사승지 김부의와 지주사 홍이 서와 승선 정항과 기거주 정지상과 사업 윤언이 등으로 하여금 론난케 하였다. 신술에 김부의 에 명하여 서경의 홍범을 강케 하였다. 무인에 윤언이에 명하여 중용을 강케 하였다.  6월 을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경인에 려수하였다. 무술에 보보#(#-289쪽)계도장을 숭문전에 설하였다. 기해에 또 무를 모아 비를 빌고 신축에 백요로 하여금 재를 설하여 빌게 하였다. 을사에 재차 우제하고 경인에 3차 우제하였다. 제하기를 「요지음 세도가 점점 내리고 풍속이 경박하여 불효하고 불우하며 혹은  고유아를 버리고 처첩을 버리고 혹은 상중에 유탕하여 부모의 해골을 림시로 사우에 초빈(장사 지내지 않고 관만 가려두는 것)해 놓고 루년에 이르도록 장례치 않는 자가 있으니 마땅히 유사로 하여금 검찰하여 치죄케 하되 만일 가난하여 그 일을 이루지 못한 자에게는 관에서 장비를 지급하라」고 하였다. 신해에 최홍재를 좌천시켜 수사공 우복사를 삼고 이준양으로 중서시랑평장사를 삼았다. 추 7월 갑자에 수락당에 거동하여 김부식에게 명하여 역의 건괘를 강케 하고 정묘에 또 태괘를 강케 하였다. 신미에 대우가 내렸다. 경진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8월 임진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신축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김우번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9월 갑인에 례빈소경 정택을 김에 보내어 천청절을 하하였다. 무오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병인에 려수하였다. 경진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이위가 졸하였다. 동 10월 신축에 백좌도장을 설하고 내외에 명하여 승 3만을 재식케 하였다. 병오에 친히 나이 80 이상된 로인과 및 효자 순손 절부 의부 환과 고독 독폐질자를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정미에 금의 동경회사사 전중시어사고안원이 왔다. 11월 무오에 랑중 김영석을 금에 보내어 생진을 하한 것을 사하였다. 갑자에 연경궁에 이어하였다. 신화지를 금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정묘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계유에 문공미로 판이부사를 삼았다. 갑술에 기거랑 정지상이 주하기를 「장공주가 나이 장년이 되었으므로 대내에 오래 머물게 할 수 없으니 출가시키기를 청합니다」하고 하였다. 무인에 두개의 해(일)가 함께 나타났다. 최윤의로 전중내급사를 삼고 이중부로 기거사인을 삼았다. 12월 기해에 김부식으로 판병부사를 삼고 최유로 판례부사를 삼고 임원애로 판공부사를 삼고 임경청으로 수사공을 삼고 임원준으로 례부상서 지추밀원사를 삼고 김부의로 이부상서를 삼고 강후현으로 어사대부를 삼았다.

갑인 12년 춘 정월 정사에 금이 간의대부 장호를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신유에 신중원에 행차하였다. 을해에 적전에 제하고 처음으로 대성락을 사용하였다. 무인에 백홍이 관일하였다. 기묘에 정심으로 삼중대통 지루각원사를 삼고 자가사410)를 사(사자)하였다. 2월 을유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인덕궁에 이어하였다. 정해에 군신들과 연강전에서 향연하니 고사에 왕태자를 봉하면 잔치를 베푸는 것이였으나 국가의 다사함을 만났으므로 이 때에 이르러서야 행한 것이다. 병신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계묘에 서경에 행차할새 마천정에 이르니 친종장군 김용의 말(마)이 놀라 무슨 물건이 이를 쫓는 것같이 급히 달려 어가 앞을 퉁겨져 지나가매 용이 땅에 떨어져 거의 죽을번하였다. 기유에 왕이 대동강에 이르러 용선을 타고 호종한 재추시신 및 서경유수관들과 잔치할 새 문득 북풍이 맹렬히 일어나니 배 위의 장막과 기명이 모두 진동하고 천기가 크게 추운지라 왕이 급히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어가를 재촉하여 입궁하였다. 3월 갑인에 대화궐에 이어하였는데 어가가 처음 출발할 때에 폭풍이 먼지를 일으킴으로 인마가 능히 나갈 수 없었으며 일산을 든 사람도 역시 갈 수가 없는지라 왕이 손수 복두를 잡고 입궐하니 바람이 좀 그쳤다. 갑자에 려수하였다. 정묘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와서 수창궁에 입어하였다. 임신에 효경과 론어를 려항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분사하였다. 하 4월 기축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정유에 임원애로 중서시랑 평장사를 삼았다. 무술에 서리가 내렸다. 정미에 려수하였다. 5월 경술 삭에 무를 도성에 모아 비를 빌었다. 신유에 허홍재 등에 급제를 사하였다. 병인에 조하기를 「근자에 천변이 이상하고 한재가 또한 심하니 숙야로 근심되어 할 바를 알지 못하노라 오직 너희 삼품 이상은 각각 봉사를 올려 잘못된 정치와 백성의 고환(막#(#-292쪽))을 진술하여 숨김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무진에 제릉과 묘사 산천에 비를 빌새 왕이 태조진전을 배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하기를 「신이 실로 부덕하와 선왕 이룩한 법도를 능히 따르지 못하고 정치가 족히 써 천지를 도우고 음양을 고르게 하지 못하였으므로 천이 재앙을 내려 3월에 눈이 내리고 4월에 서리가 오며 그 위에 인물을 벼락친 것이 40여소나 되고 달이 넘도록 비가 오지 않으니 1000리가 적지가 되어 백성이 의지하여 살지 못하고 아사하는 자가 서로 잇대었으니 죄는 실로 신에게 있음이오 창생에게 무슨 허물이 있사오리까 세심하고 회과하여 조상의 교훈을 본받고자 하나이다. 시에 이르기를 (백성의)411) 부모인 선조께서 어찌 차마 나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자롭게 돌아보시사 화기를 불러 모으시고 만영을 망 고무하사 패연히 비를 내리어 나 소자와 군신 백성으로 하여금 다같이 그 복을 받게 하시면 신도 또한 길이 의지할 바 있으리다」라고 하였고 또 대명궁에 이어하여 조를 내리기를 「한재가 바야흐로 깊어서 전야가 마르고 타서 풍년의 희망을 잃고 간식의 근심을 끼칠가 두려워 하나니 무고히 로옥에 잘못 갇힌 자가 있나 염려하노라 그 이죄(참교)를 범한 자는 형을 제하여 원류케 하고 유죄 이하는 다 너그러히 하여 면죄케 하라」고 하였다. 저자를 옮겼다. 기사에 다시 우제하였다. 무인에 지진하였다. 6월 기묘 삭에 무 250인을 도성에 모아 비를 빌었다. 동경에 지진하였다. 경진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신사에 대명궁 수락당에 거동하여 한림학사 김부의에 명하여 월령(예기)을 강케 하였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갑신에 서경의 대화궐 건룡전에 벼락쳤다 .경인에 려수하였다. 신묘에 영통사에 행차하여 비를 빌었다. 계사에 보보#(#-294쪽)계도장을 숭문전에 설하였다. 신오에 수락당에 거동하여 한림학사 정항에게 명하여 시경의 7월편을 강케 하였다. 기해에 친히 궐정에서 위#(#-294쪽)제하였다. 추 7월 갑자에 보문각직학사 윤언이에게 명하여 월령을 강케 하였다. 경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을해에 대우가 3일이나 계속하였다. 이 달에 내시 정습명을 보내어 홍주 소대현에 하를 파게 하였는데 안흥정하의 해도는 중류가 급격하고 또 험한 암석이 있어서 왕왕히 배가 전복하므로 혹자가 헌의하기를 소대현경으로부터 하를 파서 길을 트면 선행이 빠르고 편리할 것이라 하므로 습명을 파견하여 방군의 역졸수천인을 징발하여 이곳을 팠으나 마침내 성취치 못하였다. 8월 경진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경자에 명인전에 거동하여  한림학사 김부의에게 명하여 서경의 설명을 강케 하였다. 임인에 산승 계응을 불러 화엄경을 강케 하였다. 병오에 차례부시랑 박경산을 금에 보내어 천청절을 하하였다. 9월 정미 삭에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계축에 왕이 문경태후 기진이므로 경천사에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경신에 려수하였다. 동 10월 무자에 백홍이 관일하였다. 경인 국청사에 이어하였다. 갑오에 대명궁에 입어하였다. 정유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순이 말하되 아아 너희 22인아 (그 직책을) 공경할지어다 오직412) 이리하여야 이에 능히 천하의 공을 믿음직스럽게 이룩하리라 하였으니 대개 공경하지 않으면 태홀의 환이 있고 오직413) 때(유시)로 하지 않으면 후시의 뉘우침이 있을 것이니 숙야로 게으르지 않음은 공경함을 이름이오 때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오직 때(유시)로 하여야 함을 이름이니 능히 공경하고 오직 때를 맞추어 써 천하의 공을 믿음직스럽게 이룩하면 곧 공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 듣건대 백관들이 힘을 다하여 써 국가에 봉사하기를 생각지 아니하고 법식을 많이 어기고(포만) 직무를 비운다 하니 이러므로 조정이 비고 사무가 폐하는지라 이로 말미암아 원수가 총좌414)되는 고로 고굉415)이 게으리게 되고 서사가 타폐되는 것이 진실로 떳떳한 소치인 것이다 그러나 태갑416)은 이윤을 힘입어 써 흥하고 환공417)은 관중을 얻어 써 패업을 이루었으니 모든 군자는 각각 그 직책을 드날리고 같이 공경하고 협공하여 일을 흥케 하고 업을 조성하여 써 천하의 공을 믿음직스럽게 이룩하여 짐으로 하여금 무과의 지에 이르게 하면 나라에도 무강의 경휴가 있을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고 하였다. 11월 병오 삭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무신에 원외랑 김영관을 김에 보내어 생진을 하함을 사하였다. 임술에 호부원외랑 이식을 김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10월로부터 이달에 이르기까지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12월 무인에 좌정언 황주첨이 묘청과 정지상의 뜻을 따라서 칭제하고 건원(년호를 세우는것)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을묘 13년 춘 정월 을사 삭에 일식이 있었으나 짙은 구름으로 보이지 않았다. 무신에 묘청과 류담#(#-296쪽) 조광 등이 서경에서 반하였다. 신해에 김부식으로 원수를 삼아 이를 치게 하였다. 임자에 와언으로 서경병이 김교역에 이르렀다 하니 서교의 거민들이 놀래고 두려워하여 모두 가족을 끌고 성으로 들어왔다. 금이 계주관내관찰사 고춘 등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갑인에 김안 정지상 백수한을 베었다. 을묘에 서경장군 일맹이 도망하여 와서 적의 상황을 매우 자세히 고하니 왕이 벼슬을 주고 살 집도 사하였다. 을축에 조하기를 「짐이 보건대 자고로 국가를 가진 자가 누구가 나라 다스림을 장구한데 이르게 하고자 아니하리요마는 치난이 서로 찾아드는 것은 대개 그 때 임금의 명암과 정교의 득실에 록유하는 것이다 짐은 유충으로 정사에 나아가 본래 지인의 밝음이 없고 치우치게 친압한 사람(근습)의 설만 들어 서도의 난이 있게 되었으니 부앙하여 깊이 생각하매 통회함을 이기지 못하겠도다 오직 너희들 대성시종의 신과 조야유지의 인사는 서방을 평정할 방책과 시정의 실수(실)와 짐 자신의 허물을 논열하되 숨김이 없오록 하라」고 하였다. 서인이 묘청과 류담#(#-297쪽)을 참살하고 분사대부경 윤첨을 보내어 강복을 청하였다. 신미에 서경의 조광이 다시 반하였다. 2월 임오에 백홍이 관일하였다. 경인에 중서시랑평장사로 치사한 김향이 졸하였다. 정유에 문하시랑평장사로 치사한 최홍재가 졸하였다. 신축에 김의 보애사 검교우산기상시 왕정이 왔다. 계묘에 왕이 조를 받으니 조에 이르기를 「상천이 화를 내려 대행황제가 병을 만나 오래 신음하다가 문득 만국을 버리시니 반모하여 슬피 부르짓음을 견디어 이기지 못하겠도다 짐이 공경 이훈을 받들고 뒤이어 여논에 촉박되어 미세한 몸으로 큰 업을 이었도다 경은 멀리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할 줄로 믿노니 더욱 마음을 가다듬어 한가지로 다스림에 이르게 하라」고 하였다. 윤월 정미에 보애사가 돌아가는데 표를 부쳐 진위하였다. 을묘에 소경 금단과 시어사 이시민을 금에 보내어 조상하였다. 임술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백기418) 죄책함에 일어남이 성하다 함은 노사(노사의 사관) 대우의 덕을 가상함이요 허물419)을 고침에 린색하지 않다 함은 상서에 성탕의 명덕을 기재한 것이다 이제 전세420)의 현인을 따라 그 미덕을 이루리라 짐이 후동421)의 미약한 몸으로 선세의 풍성함을 이었도다 심궁에서 자라나 모든 경국의 일에 어두어 숙야로 우근하노라 비록 물을 건는 것과 같은 마음을 더 가졌으나 간웅을 제어함에는 아직 먼저 기미를 살피는 견식이 결핍하여 숭덕422)의 발호가 잇달았으며 다시 병오423)의 요난으로 란여(어가)가 파천하고 궁실이 분탕되어 위로는 조종의 위탁을 욕되게 하여 매양 기업의 연홍에 허물(고)이 되었더니 마침 술객(음양인)이 호읍(평양)으로부터 나오매 게다가 좌우의 천거도 있어 대현으로 우대하였도다 짐이 진실로 밝지 못하여 드디어 그 말에 그릇침이 되어 이에 대화의 친궐을 창건하여서 조업의 중흥을 기하여 일신의 영고를 생각지 않고 누차 서순의 가로 심방하였으나 길상의 응험은 대개 적고 재해의 생김이 점점 많아 마침내 명징은 없고 헛되히 뭇 비방만 불러 일으켜 성과가 없고 말았다 짐이 바야흐로 청종하기를 경계하였더니 저들이 미련하여 알지 못하고 날로 원망을 품고 마음대로 군마를 일으켜 관원을 수계항며 천개로 그 년원(년호)을 표하고 충의로 그 군액(호)을 부르며 공공연히 병졸을 징집하여 상도를 침범하려는 뜻을 품었도다 변이 생각지도 못한 데에 생겨 그 세가 장차 막지 못하리만큼 되었으니 자고로 대역의 죄가 뉘가 서도인과 같으리오 여형424)이 3천이로되 죄를 논함에 무상(군상을 업신여기는 것)보담 먼저함이 없고 순공425)이 20이로되 사람을 알아봄이 실로 흉인을 제거함에 근본하였도다 이러므로 먼저 내응의 간을 주하고 드디어 원융(대군)을 파유하였노라 그러나 또한 엄격을 하지 않고 귀강을 기다리기로 약속하였더니 어찌 역명이 지심한지 이에 성을 견수하여 굳게 항거하므로 밖에서 오랫동안 고로하여 사졸이 때를 지내도 돌아오지 못하고 행군(용병)을 마지않으매 병량이 길에 연하여 끊어지지 않았도다 뭇 사람들이 군사에 피로하여 원근이 소연하도다 더구나 이제 이미 풍사에 방해될까 염려하여 오랫동안426) 월첩이 오래 늦으니 말이 이에 미치매 그리된 바를 알지 못하겠도다 서리427)를 밟으면 굳은 어름이 이르는 것으로서 허물의 근본이 그렇게 순치한 것이니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괴로우니(분한의 뜻) 죄는 실로 나에게 있도다 바라건대 조정에 있는 신하나 근왕의 사졸들은 그 힘을 분발하여 그 군흉을 섬멸시켜 위로 과인의 마음을 위로하고 다음에 삼한의 분을 풀게 한 뒤에 함께 미치지 못함을 보충함은 장래에 소망을 두고 길이 길이 자신하여 두번 허물을 없기를 바라노라 이러한 회과 자책의 조는 중외에 포고하여 다 듣고 알도록 하라」고 하였다. 임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3월 을유에 호부상서 김인규와 예부랑중 왕창윤을 금에 보내어 등극을 하하였다. 임인에 현성사에 행차하였다가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하 4월 정미에 정정숙으로 상서좌복사 응양군을 삼았다. 계축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을묘에 대묘에 제#(#-301쪽)제하였다. 6월 계묘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기미에 송이 적공랑 오돈례를 보내와 말하기를 「근자에 들으니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 하니 만약 혹 사로잡기 어려우면 10만병을 발하여 서로 돕고자 한다」고 하였다. 추 7월 경인에 인덕궁에 이어하였다. 정유에 려수하였다. 8월 임자에 천성전에 거동하여 양부대신과 시종관을 불러 시좌케 하고 한림학사 정항을 명하여 당감428)을 강독케 하였다. 무오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9월 임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을해에 오돈례가 돌아가매 왕이 부주하여 이르기를 「서경의 적은 이미 거괴를 섬멸하였고 여당이 소취하여 험지에 의거하여 스스로 굳게 하고 있으니 속히 공파하고자 하면 살상이 많을까 우려하여 군사를 멈추고 성을 포위하여 그 항복을 기다리는 바 적세가 날로 군색하여져서 파멸이 조석에 있나이다 저윽히 생각컨대 해외 소방의 변비의 세고로 어찌 족히 위로 감영429)을 번거로히 하리까 그런고로 감히 공고치 않았는데 이제 특히 사신을 보내어 조병의 가부를 물으시니 비록 위로 대조에서 소국을 사랑하는 후의는 감사하오나 다만 사리가 불편함이 있어 승당키 어렵고 더구나 해양이 만리나 되어 험난함을 가히 예측치 못하오며 천병이 동하함은 편의치 못할까 두려우니 내리신 바 지휘는 추침#(#-302쪽)(추지)하심을 비나이다」라고 하였다. 정축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계사에 문승미와 노현용 등을 보내어 첩을 가지고 송에 가게 하였다. 동 10월 병오에 호부랑중 강복여를 금에 보내어 생진 하함을 사하였다. 기유에 인덕궁에 이어하였다. 법왕사에 행차하여 백고좌도장을 설하고 인하여 내외에 명하여 승 3만을 재식케 하였다. 계축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11월 계유에 한유충으로 예부상서 동수국사를 삼고 이중으로 공부상서 지제고를 삼고 또 임경청으로 수사공 상서좌복사 추밀원사 판삼사사를 삼아 인하여 치사케 하였다. 기묘에 임원준으로 이부상서를 삼고 김부의로 형부상서 보문각대학사를 삼았다. 갑신에 원외랑 곽동순을 김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정유에 랑중 문공원을 김에 보내어 만수절을 하하였다. 12월 갑진에 려수하였다. 경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병인에 최유로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를 삼고 임원애로 판형부사를 삼고 김극검으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임원준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김부의로 지추밀원사 지제고를 삼고 이중으로 동지추밀원사를 삼았다.  

병진 14년 춘 정월 을해에 김이 태주관내관찰사 소수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2월 임인에 천제석도장을 명인전에서 3월 설하였다. 병진에 금이 사신을 보내와 태황태후의 상을 고하니 온 나라가 3일간 소복하였다. 정사에 김부식이 제군을 모아 서경을 쳐 성이 함락되매 조광이 스스로 분사하니 무오에 부식이 표를 받들어 전첩을 올렸다. 병인에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정묘에 전중감 윤언식과 좌사간 최윤의를 금에 보내어 조제하였다. 3일간 기사에 좌승선 이지저와 전중소감 임의를 보내어 조서를 내려 정서장수를 장유하고 김부식에게 의복 안마 금대 금주기 향락을 사하고 김정순에게 금대를 사군병마사부판관 이하에게는 은 견 능라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서경 내외의 노질 유약으로 능히 자존하지 못하는 자에게도 쌀을 양급하여 규휼하고 또 성내외를 안행하여 사원과 사묘가 일찌기 파손 당한 것은 모두 수즙케 하였다. 계미에 김부식으로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상서부사를 삼았다. 을유에 진숙으로 예부상서 동지추밀원사 겸태자빈객을 삼았다. 하 4월 수창궁에 환어하였다. 경자에 김부식이 개선하여 돌아오니 왕이 경영전에 배알하고 서적을 평정한 것을 고하였다. 정미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5월 갑술에 중군병마사가 주하기를 추밀원부사 한유충이 국가의 안위를 불고하고 무릇 군사의 기무를 동하면 문득 방차하였다 하므로 충주목사로 폄출하였다. 기묘에 서경이 평정되었으므로 사하고 조하기를 「짐이 들으니 고전430)에 말하기를 사가 없는 나라는 형이 반드시 공평하다고 하였으나 이제 국가의 재액의 소치는 실로 짐의 부덕에 연유한 것이다 서도인이 무고히 범순하였으므로 부득이 군사를 내어 죄를 물었으나 노폐가 심히 중하였고 인명을 살상함도 또한 적지 않았다 이러므로 숙야로 공구하여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었도다 바라건대 너그러운 은택을 백성들에게 널리 입혀 모두 더불어 새롭게 하여 써 길상을 이루게 할까 하노니 대벽(사죄) 이하를 범한 자는 모두 사면시켜 주고 종군한 장졸로 유공한 자 및 진중에서 사망한 자는 정해년431)의 논상에 의하고 양경간의 역사들에게는 일년간 복(요역을 면제하는 것)을 사하고 시어사 김부와 내시 황문상가 교위 노자연은 명을 받들고 적중에 빠져 해를 당하였으니 그 자에게 작 일급을 사하고 무자한 자에게는 그 질이나 서 가운데 한 사람에게 사하고 윤첨 위근영은 성중에 있으면서 적과 동모하지 않았으므로 죽음을 당하였으니 그 아들에게 작 일급을 사하라」고 하였다. 6월 무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신해에 려수하였다. 기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8월 을묘에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9월 을해에 김치규와 유대거를 송의 명주에 보내어 첩하기를 「복심컨대 근자에 상객인 진서가 공문서를 가지고 왔는데 방금 하국(서하)이 사인을 보내와 우리 사신과 같이 고려에 나아가서 일을 의논코자 함으로 진서를 보내어 고려에 가서 본국(고려)의 사무를 ?(#-305쪽)관하는 관처에 이 뜻을 밀유하고 인하여 회보를 받아오라 하였다 한다 오직 삼한은 한당 이래로 대대로 중원을 섬겨 그 의상을 바꾸고 그 례의를 습득하였으며 더구나 우리 조종은 내부한지 지금까지 200년에 누성의 대우하는 은혜를 받음이 지극히 심후하였으니 어찌 일심으로 번신의 법도를 지키코자 하지 않으리요 그런데 금국과 강성이 서로 접하였으므로 부득이 화를 청하였는 바 혹시나 사신을 보내어 하인과 같이 와서 일을 의논하였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음모한다 하여 이로 인하여 시노하고 출병에 명목이 생기게 되면 소국의 성패는 가히 알 수 없을 것이오 만약 우리가 번병이 되지 않으면 회수와 절강의  유성은 금과 이웃이 될 것이니 진실로 상국이 이가 아닐 것이외다 또 상국이 이로 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우리에게 길을 취하면 저들이(금) 또한 이길로 써 쳐나갈 것이니 그렇게 되면 연해의 제현은 반드시 경비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요전에 양상서(응성)가 와 다만 그들(금)과 강호코자 함이오 병혁의 일(군사)이 아니였으나 오히려 사지에 맞추어 드리지 못하여 지금까지 온 나라가 대죄하고 있는 것은 어찌 지의가 있으리요 그 형세가 앞에 말한 바와 같을 뿐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집사는 이를 익숙히 헤아려 소국으로 하여금 김과 원한을 맺지 않게 하고 상국도 또한 순망치한의 근심이 없도록 하면 행심일까 하나이다」고 하였다 송 명주의 회첩에 대략 말하기를 「행재의 추밀원의 차자(공문서)를 받들어 안조(감회)하여 아뢰고 요전에 오돈례를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가게 하고 겸하여 상인 진서을 가게 한 것은 조정이 조종 이래로 제국을 ?(#-306쪽)대하여 은의가 심히 두터웠는데 정강년간432)의 병화 후로 사행이 점점 어렵게 되더니 근자에 하국의 밀사가 도독행부에 왔으므로 인하여 돈례를 보내어 구호를 강명함이오 또 그대들이 금과 잇닿은 이웃으로 되어 있다 함으로 사신이 왕래로 인하여 양궁(휘종흠종)의 안부나 들을까 하였을 뿐이였도다 흥병하여 응원하고 길을 빌려 가서 치는 것에 이르러서는 모두 돈례 등의 독단적인 말이고 조정이 지원한 것은 아니니 마땅히 깊이 양해하여 스스로 의심을 일으킴이 없도록 할 것이라」고 하였다. 동 10월 을미 삭에 대부소경 신지충을 금에 보내어 생진 하함을 사하였다. 신축에 도적이 원릉의 제기를 절취하고 수릉자 3인을 살하였다. 병오에 천수사에 행차하였다. 갑인에 환궁하였다. 병진에 지추밀원사 김부의가 졸하였다. 11월 병자에 인덕궁에 이어하였다. 소경 이유개를 금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기축에 예부시랑 이인실을 금에 보내어 만수절을 하하였다. 경인에 추밀원지주사 정항이 졸하였다. 12월 신축에 려수하였다. 경신에 최유로 태자태보를 삼고 김극검 이자덕 임원준으로 모두 참지정사를 삼고 진숙으로 병부상서 지추밀원사를 삼았다.

정사 15년 춘 정월 기사에 금이 중서사인 오격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2월 무신에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3월 정묘에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무진에 임원애로 검교태보 수사도 판비서성사를 삼았다. 을해에 서경에 지진하였다. 무자에 이신 등에 급제를 사하였다. 임원준으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형부사를 삼고 이자덕으로 판호부사를 삼고 강후현으로 이랑상서 지문하성사 판공부사를 삼았다. 하 4월 신축에 왕이 경천사에 행차하였다. 계묘에 천수사에 출어하였다가 신인에 환궁하였다. 금치규와 유대거가 송으로부터 돌아오매 조하기를 「간익가 진요하여 노유가 전이하고 있으나 구호의 부망함을 힘입어 오민의 오래 우거함을 민망히 여기 주즙의 편리를 빌려 이미 돌아옴을 얻었도다 려정의 안정으로 각각 그 곳을 얻었으나 오히려 유민이 많이 있음을 념려하고 다시 혜택으로 써 이를 애긍히 다루어 줄 것을 번청하노니 신조(바다)를 건너 모두 먼 것을 떠나게 할지어다 강역을 획정하여 지키니 비록 봉계의 한은 있으나 애인하는 마음은 진실로 남북의 분이 없을 것이다 가상한 성절은 깊이 짐회에 부응하노라」고 하였다. 을묘에 우박이 내렸다. 5월 을해에 거리433)에 저자를 보게 하였다(항시). 기묘에 비를 묘사에 빌고 기축에 또 제천하여 비를 빌었다. 경인에 대우가 내렸다. 6월 임진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경자에 려수하였다. 을사에 보보#(#-308쪽)계도장을 명인전에 설하였다. 추 7월 병자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이공수가 졸하았다. 9월 을축에 려수하였다. 병인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정묘에 장원정에 출어하였다가 동 10월 을묘에 환궁하였다. 윤월 무인에 백좌도장을 선경전에서 3일간 설하고 중외에 명하여 승 3만에게 재식케하였다. 11월 계사에 병부원외랑 유묘을 금에 보내어 생진을 하함을 사하였다. 경자에 공부원외랑 노수를 보내어 하정하였다. 무신에 예부랑중 이량을 금에 보내어 만수절을 하하였다. 정사에 청적색의 해무리(운)가 관일하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12월 갑자에 최유로 수사도 태자태전을 삼고 김극검으로 수사공 참지정사 태자소사를 삼고 이자덕 임원준으로 참지정사 태자소보를 삼고 진숙으로 병부상서 지추밀원사를 삼고 최주으로 좌산기상시 추밀원부사 태자빈객을 삼았다. 임신에 판국자감사 문공인이 졸하였다.

무오 16년 춘 정월 갑오에 금이 영주관내관찰사 두의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2월 계해에 특례사 각문지후 최면을 김의 동경에 보내었다. 갑자에 소재도장을 명인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을해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임오에 조하기를 「제왕이 덕은 겸손을 선으로 삼은 것이다 고로 노자가 말하기를 왕공은 스스로 고 과 불곡434)이라 자칭한다 하였고 한 광무는 조하여 상서에 성이라 말하지 못하게 하였고 중이#(#-309쪽)도 또한 인성에 거하지 않았거늘 이제 신하가 임금을 높이고 아름다움을 추앙하는데 칭위가 과당하니 심히 리치에 합당하지 않도다 지금으로부터는 무릇 올리는 장소 및 공행의 안독(서류)에 신성제왕을 칭하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3월 무술에 진숙으로 우복사를 삼고 이중으로 이부상서 판어사대사를 삼았다. 경자에 려수하였다. 송상인 오적 등 63인이 송 명주의 첩을 가지고 와서 휘종황제와 및 영덕황후 정씨가 금에서 붕함을 보하였다. 임자에 이대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4월 계해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정묘에 우박이 내렸다. 5월 갑오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경자에 유사에게 명하여 녹수(려수)케 하고 조를 「짐이 과독하고 우매한 몸으로 존위에 있어 덕은 하늘에 향함이 없고 은은 만물에 미침이 없어 기강이 날로 폐하고 인민이 쇠잔하고 병든지라 숙야로 두려워 감히 편한 때가 없도다 지성을 천지의 화기를 이루고자 원하나니 마땅히 유사로 하여금 제물을 준비하여 국내 명산 대천에 제를 올리고 5월 16일 새벽 이전의 내외의 사형(대벽) 이하의 죄는 다 용사하고 이전에 배류된 자는 양이하고 제색군인과 잡류에게도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할 것이며 중외관사와 및 안찰사 등으로 하여금 맑은 것을 들추고 더러운 것을 씻어버려 백성의 질고를 구휼하도록 하라」하였다. 경술에 모든 전각과 궁문명을 고쳐 어필로 액호를 쓰니 회경전을 선경(전)이라 고치고 건덕(전)을 대관전으로 고치고 문덕(전)을 수문(전)이라 고치고 연영(전)을 집현(전)이라 고치고 선정(전)을 훈인(전)이라 고치고 응건(전)을 건시(전)이라 고치고 장령(전)을 봉원(전)이라 고치고 선명(전)을 목청(전)이라 고치고 함원(전)을 정덕(전)이라 고치고 만수(전)을 영수(전)이라 고치고 중광(전)을 강안(전)이라 고치고 건명(전)을 저상(전)이라 고치고 연친(전)을 목친(전)이라 고치고 현덕(전)을 만보(전)이라 고치고 명경(전)을 금명(전)이라 고치고 자화(전)을 집희(전)이라 고치고 오성(전)을 영헌(전)이라 고치고 정양(전)을 #(#-311쪽)화(전)이라 고치고 수춘궁을 여정(궁)이라 고치고 망운루를 관상(루)라 고치고 의춘루를 소휘(루)라 고치고 창합문을 운룡(문)이라 고치고 신봉(문)을 의봉(문)이라 고치고 춘덕(문)을 체통(문)이라 고치고 대초(문)을 태정(문)이라 고치고 회동(문)을 이빈(문)이라 고치고 창덕(문)을 흥례(문)이라 고치고 좌우 승천(문)을 통가(문)이라 고치고 연수(문)을 돈화(문)이라 고치고 장영(문)을 조인(문)이라 고치고 선화(문)을 통선(문)이라 고치고 개경(문)을 황극(문)이라 고치고 경양(문)을 양화(문)이라 고치고 금마(문)을 연명(문)이라 고치고 천우(문)을 자신(문)이라 고치고 통천(문)을 영통(문)이라 고치고 안우(문)을 순우(문)이라 고치고 흥태(문)을 분방(문)이라 고치고 양춘(문)을 광양(문)이라 고치고 대평(문)을 중명(문)이라 고치고 백복(문)을 보화(문)이라 고치고 통경(문)을 성덕(문)이라 고치고 동화(문)을 려경(문)이라 고치고 서화(문)을 향성(문)이라 고치고 영안(문)을 흥안(문)이라 고치고 대청(문)을 청영(문)이라 고치고 좌우선경(문)을 부우(문)이라 고치고 좌우연우(문)을 봉명(문)이라 고쳤는데 오직 경영전과 비서각만은 고치지 않았다. 6월 을묘에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자에 려수하였다. 

기사에 예종의 귀비 왕씨가 굉하였다. 추 팔월 을묘에 김부식으로 판예부사를 삼고 이중으로 참지정사 판삼사사를 삼고 최주으로 병부상서 지추밀원사를 삼고 김정순 이지저로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임술에 흥왕사 천부원에 출어하였다. 중서시랑평장사 이자덕이 졸하였다. 무진에 현종과 문종의 경전에 배알하였다. 동 십월 임술에 국청사에 이?하였다가 갑자에 신궐로 돌아왔다. 이에 앞서 궁궐이 화재를 겪었으므로 유사에게 명하여 이를 수어케 하였던 것인데 이 날에 백궁이 하례를 드리니 편전에서 주연을 설하고 제왕과 재추와 종궁들이 다 시연하다가 밤늦게 파하였다.

정묘 에 반고도장을 대관전에서 삼일간 설하였다. 십일월 을유에 김의 동경지예빈사사 하목이 와서 보병하였다. 기축에 형부원외랑 김신련을 김에 보내어 생진 하함을 사하였다. 갑오에 고공원외랑 류방우를 보내 만수절을 하하였다. 계묘에 집현전에 행차하여 김부식에게 명하여 역경의 대축과 복 이괘를 강케하고 제학사로 하여금 난해한 것을 묻게 하고 왕도 경을 가지고 청강하더니 이어 주연을 석하여 밤 늦게 파하였다. 십이월 기말에 김부식으로 검교태사 집현전대학사 태자태사를 삼고 최유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삼고 임원애로 검교태전를 삼고 이중으로 검교사도 수사공 상서좌복사 판호부사 태자소사를 삼고 김정순으로 동지추밀원사를 삼았다. 계축에 소재도장을 명인전에서 오일간 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