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려

제14대 헌종(獻宗 1094~1095 재위1년)

오늘의 쉼터 2009. 7. 30.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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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헌종(獻宗 1094~1095 재위1년)

 

 헌종은 선종의 장남이자 제2비 사숙왕후 소생으로 1084년 6월 을미일에 태어났으며,이름은 욱(昱)이다. 1094년 5월 선종이 서거하자 그 유언에 따라 중관전에서 11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제14대왕에 올랐다. 선종의 사망시 나이가 11세였던 헌종은 유아시절부터 당뇨병에 시달려 매우 병약했으며,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처지였다. 이때문에 대부분의 대신들은 왕권이 선종의 동생들 중에 한명에게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다.즉위초에는 어리고 병약하였으므로 태후가 청정(聽政)하여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모두 처결하였다.

 1095년(헌종 1) 정월 초하루에 해 옆에 혜성(慧星)이 나타났는데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해의 곁에 혜성이 있음은 근신(近臣)의 난이 있을 징조이니, 제후 중에 반(反)하려는 자가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타고난 천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지만 나이가 어려 수성(修省)할 줄 모르고, 다만 내의(內醫) 3, 4명을 불러들여 방서(方書)를 토론하고, 혹은 서화를 익힐 뿐이었다.
같은해 7월에 과연 이자의(李資義)가 반란을 꾀하였으나, 오히려 주살되고 난은 진압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선종은 총명한 아우가 5명이나 있었는데도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였으므로 이런 반란이 일어났다.”고 애석해하였다. 난적(亂賊)을 토벌한 공으로 소태보(邵台輔)는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 왕국모(王國#모42)는 권판병부사(權判兵部事)가 되었다.
같은해 8월에 계림공 희(鷄林公 熙:뒤의 숙종)가 중서령으로 임명되더니 그해 10월에 어린 조카를 폐하고 왕위에 올랐다. 헌종이 제서(制書)를 내려 선위(禪位)할 때 근신 김덕균(金德均)을 보내어 계림공 희를 종저(宗邸)에서 맞이하고, 자신은 후궁으로 물러났다. 왕위를 물러난 헌종은 1097년 2월 흥성궁에서 14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병명은 당뇨병이었지만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왕위를 찬탈한 숙종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시호는 회상(懷觴), 예종 때 공상(恭觴)으로 바꾸었다. 능은 개성에 있는 온릉(穩陵)이다.
                                                                   출처:
미르나라

 

헌종 공상대왕의 휘는 욱이니 선종의 원자요 어머니는 숙태후 이씨로 선종 원년 6월 을미에 탄생하였다.

천성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9세에 서화를 좋아하여 무릇 견문한 바는 일찍이 잊어버리지 않았다.

11년 5월 임인에 선종이 붕어하매 유명을 받들어 중광전에서 즉위하였다. 갑인에 선종을 인릉에 장사지냈다.

 6월 경오 삭에 모후를 높여서 태후라 하였다.

갑신에 소태보 이자위로 모두 문하시랑 평장사 상주국을 삼고 유석으로 상서좌복사 주국을 삼고 임개로 참지정사를 삼고 이자의로 지중추원사를 삼고 최사추로 동지중추원사 좌산기상시를 삼았다. 을유에 문종의 비 숭화궁주 김씨가 별세하였다.

무자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대사하였다.

송의 도강 서우 등 69인과 탁라 고적 등 194인이 와서 즉위를 축하하고 토물을 바쳤다.

기해에 조선공 도와 계림공 희로 수태사를 삼고 상안공 수와 부여공 수로 수태보를 삼았으며 진한후 유와 한산후 윤과 낙랑백 영으로 수사도를 삼았다.

 추 7월 정묘에 송의 도강 서의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8월 경오 삭에 조하기를「정주 선덕진경내에 황충의 재해가 있다하니 군신으로 하여금 각기 봉사를 올리게 하라」고 하였다.

갑술에 송의 도강 구보 유급 양보 등 64인이 왔다.

동 11월 임자에 나이 80 이상 되는 자들을 구정에서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12월에 요의 내제사 숙준열 부사 양조술 위문사 숙치 기복사 곽인문 등이 왔다. 을유에 내제사가 반혼당에 나아가 선종을 제하니 왕이 조서를 맞이하여 조제하였다.

조서에「짐이 생각건대 선신은 양절을 보전하여 장차 편번의 총을 입히려 하였더니 갑자기 기약없는 먼 길(죽음)을 떠나(오만지유) 영혼이 요요하게 되었구나 마땅이 우악한 은총을 미치게 할 것이므로 제뢰를 유진하여 권고의 정을 표하노라 이제 영주관내 관찰사 소준열과 위위소경 양조술을 보내어 칙제사와 부사로 삼고 제소의 여러 가지 제물은 별록과 같이 갖추노라」고 하고 제문에는 오직 영은 기범은 깊고 영특하며 자신이 수매하매 다행하게도 풍운의 기회를 만나 공순하게 일월의 정화에 의지하고 조업의 여경을 받아 왕번의 다스림을 이어 맡게 되니 표해의 구토를 쫓아 다스리고 천조에 조공함이 근성을 다하였도다.

진실로 부훈(의방)을 받아 충절을 다하여 왔음으로 장차 총상을 가하고자 하였더니 홀연히 세상을 떠나니 부음이 주달된 이래로 은포의 미치지 못함을 슬퍼하노라 특히 사신을 달려 보내어 가서 전상을 진설케 하나니 생각건대 정혼은 진실로 깊은 뜻을 양찰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가 끝나고 왕이 환궁하매 위문사가 조서를 건덕전에서 전하니 조에「아뢴 바를 살펴 보니 고려국왕이 훙서한 일을 자세히 알겠다.

짐이 생각건대 선신은 동해의 사표로써 바야흐로 광부의 업적을 힘입으려 하였더니 갑자기 훙거하였다.(운월지재)는 비보를 듣게 되었도다.

살펴보건대 그대는 어린 나이에 이와 같은 흉변을 당하였으니 마땅히 길이 뒤를 이어나갈 일을 생각하고 조금 애최에 절제를 하여 예문에 따라 여의 멀리서 염려하는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이제 광주방어사 숙치를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그곳에 가서 위문하게 하고 아울러 부증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노라」고 하였다. 병술에 기복사가 건덕전에서 조서를 전달하니 조에「왕은 마침 가간을 만나서 이에 세사를 이어 받았다.

괴(괴#)점은 예제로 되어 있으나 그러나 유모로써 정을 모으고(유모이종정) 금혁의 권변을 따라 굳이 견복하여 정사에 나아가게 하노라 애영의 지극함을 양지하고 힘써 권고위명의 깊은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이제 숭록경 곽인문을 보내어 그곳에 가서 경에게 기복 고칙 각 일통씩을 사하노라」고 하였고 관고에는「효를 이룸은 오직 어버이 때문인 것이니 저마에 있어서는 예를 마땅히 슬픔으로 마칠 것이요 충을 나라로 옮겨 금혁에 순응할진대 의는 권에 따름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발명에 의하여 싸움(융사)에 나아갔고 백금은 유위함을 인하여 섭사를 하였던 것이다 짐이 고전을 상고하여 크게 여러 나라를 위무하는데 청사(동토)의 명봉을 돌아보면 이는 황가의 큰 번병이로다. 상제가 어여삐 여기지 않아(상제불은) 국왕(열후)이 붕어하니 영사에 부탁하여 이룸이 있게 할 것이므로 마땅히 구토를 계승하게 하노라 좋은 강일(강길지단)을 가려서 곧 견복의 문을 상고하니 첨의가 다 좋다 하는지라 총장을 내리는 바이다.

 고려국왕의 사자 왕욱은 경운이 융성한 세적으로서 재질이 아름답고 인품이 영준하여 용성에 칠숙의 정기가 올라서 일찌기 그 슬기로움이 모였고 목신(동방신)은 오행(금목수화토)의 수기의 으뜸이 되니 나(생)면서 인에 부하도다 이에 묘령에 있음에도 일찍 준수한 그릇으로 추중되어 바야흐로 가업을 계승하는 일을 맡았더니 갑자기 부상(척점지간)을 당하게 되었도다 부음이 주달되어 옴에 상심됨이 지극하도다 그러나 비통함이 점괴에 얽혀서 3연이라도 참아 그 정을 빼았을 수 있으리오마는 책임이 번탄(번병)에 무거우니 하루인들 그 지킴을 비우지 못할 것이다. 이러므로 특히 윤지를 내려보내어 하여금 시묵의 경을 쫓게 하고 타뉴의 숭권을 부여하며 봉지의 준질에 올려서 검계를 우사하고 훈읍을 겸신하여 국봉을 승습케 함으로써 인망을 위무하고자 하노라 아아 처음 그대의 열조가 우리 조정에 신사 하였을 때 태산을 두고 맹세를 하고 동해의 의표가 되어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비호하여 여유가 있었고 손에 남기(이)고 자를 길러(익)써 휴경을 이었도다 돌이켜 생각건대 팔세의 막대한 번영(팔세지막경)은 일유의 소사에서 얻었던 것이라 그대는 오직 선대의 유훈을 답습하여 길이 좋은 계책을 생각하라 근검으로 가히 백성을 보전할 것이요 신의로 가히 정사를 행할 것이니 이 밝은 훈계를 쫓아 지금부터 흠봉 할 것이며 가히 기복할 지어다. 표기대장군 검교태위 겸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7000호 식실봉 700호로 하고 인하여 소사로 하여금 택일하여 예를 갖추어 책명토록 하나니 주관자는 시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을해 원년 춘 정월 무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해(일)곁에 혜성이 있었다. 왕이 어려서 수성할 줄 모르매 다만 내의 3·4인을 데리고 방술서를 토문(토론)하며 혹은 서화를 익혔다. 경술에 왕국모로 권상서 병부사를 삼았다. 2월 경진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소라 등 28인이와서 마를 바쳤다. 정해에 동여진의 봉국장군 두문 등 48인이 와서 마를 바치니 왕이 선정전에 거동하여 알현을 사하고 근신 최홍사에게 명하여 변방의 형편을 묻게 하고 주식 의대 포백을 사하였다. 신묘에 송의 상인 황충 등 31인이 자은종 승 혜진과 같이 오니 왕은 근신 문익에게 명하여 헌개를 갖추어 혜진을 맞이하여 보제사에 안치 하였다. 진은 항상 말하기를 보타락산의 성굴을 보려고 왔다 하며 가 보기를 청하였으나 조의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3월 신축에 상안공 수가 졸하였다. 하 4월 기묘에 유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병신에 태후가 현화사에 행차하여 선종의 소상재를 설하였다. 기유에 유석으로 판삼사사를 삼고 이예로 정당문학 형부상서를 삼고 이자의로 중추원사를 삼고 손관으로 지중추원사 한림학사 승지를 삼았다. 계축에 요의 동경회례사 고수가 와서 드디어 사적으로 능라채단을 심히 많이 바치거늘 왕이 건덕전에 거동하여 인견하고 근신에게 명하여 (동경)유수의 안부를 묻고 주식과 의대를 사하였다. 6월 기묘에 왕이 목차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추 7월 무술에 요의 수창연호를 행하였다. 병오에 대묘에 향제하였다. 왕이 양음중(상중)에 있으면서도 원구 방택 종묘 사직 및 무릇 기전에 실린 것은 거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계축에 탁라 (탐라)의 고물 등 8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신에 이자의가 반란을 꾀하다가 복주하였다.

계해에 소태보로 권판이부사를 삼고 왕국모로 권판병부사를 삼았다.

8월 갑자 삭에 황중보로 상서우복사를 삼았다. 을축에 대숙 계림공 희로 중서령을 삼으매 백관이 저택에 나아가서 축하하였다. 갑술에 송의 상인 진의와 황의 등 6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계미에 손관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최사추로 이부상서 지추밀원사를 삼았다. 갑신에 명하여 동경 황룡사탑을 수리케 하였다.

 9월 을미에 소태보로 특진수사도 판이부사를 삼고 김상기와 유석으로 모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임개로 수사공 상서좌복사 판호부사를 삼고 왕국모으로 우복사 참지정사 판병부사 주국을 삼고 황종각으로 동지추밀원사를 삼았다.

 병신에 이자의의 도당인 병부원외랑 김덕충을 원지에 추방하였다.

무술에 조하기를「지난 번에 권세 있는 간신이 난을 꾀하다가 복주하였으니 이는 실로 장상들이 진력한 효과라고 하겠다.

비록 이미 화란은 뽑았으나 더욱 부지런히 수성하여야 할 것이니 무릇 모든 원옥은 모두 관대하게 용서할 것이며 내외에 동으로 속할 수 있는 소죄는 다 면제를 허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경자에 김선석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왕국모로 판도병마사를 삼았다.

동 10월 기사에 제하기를「짐이 선고의 유업을 계승하여 잘못 대위에 나아가니 나이 어리고 몸도 또한 병약하여 능히 국권을 진무하고 사민의 바람을 채워(새) 주지 못하여 음모와 횡의가 번갈아 권문에서 일어나고 역적과 난신이 여러번 내침에 범간하였다 이는 모두 박덕의 소치이니 항상 임금됨의 어려움을 생각하노라 가만히 보니 대숙 계림공은 역수가 몸에 있고 신인이 손을 빌리니 아아 너희들 유중은 받들어 비도를 잇게 하라 짐은 마땅히 후궁에 퇴거하여 잔명의 보전을 얻으리라」고 하니 이에 근신 김덕균 등에게 명하여 계림공 희를 종저에 맞이하여 선위하고 드디어 후궁에 퇴거하였다. 숙종 2년 윤 2월 갑진에 흥성궁에서 붕어하니 수는 14요 재위 1년이다 시호를 회상이라 하고 성동에 장사지내니 능은 은릉이라고 하였다. 예종이 즉위하자 시호를 고쳐서 공상이라 하고 묘호를 헌종이라 하였으며 고종 40년 정비라고 가익하였다.

이제현이 찬하기를「우임금이 아들에게 전위함은 후세를 걱정함에서이다 유복을 세우려(식) 구군의 구(위구)에 조회하여도 천하가 움직이지 않음은 분한이 본래 정해졌기 때문이다. 현종의 세 아들이 형에서 제로 상전하여 순종에 이르고 순종이 거상에 지나친 슬픔으로써 요절하고 사자가 없음으로 선종에게 전위케 되었는데 선종이 별세함에 태자가 사위하니 이가 헌종이다 나라사람들이 견문에 숙습하여서 이에 말하기를 선종에게 다섯 동생이 있었는데 어린 아들을 세웠다고 하여 이로써 그른 것으로 돌리니 생각하지 못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리오 오직 왕친 중에서 주공과 같은 이를 얻고 신하 중에서 박육과 같은 이를 얻어서 맡겨 정사를 보필케 하지 못하면 그 위난함은 가히 발꿈치를 고이고 기다릴 것이다.

후세에 불행하게도 강보중의 후사에게 중대한 일을 물려 주고 간난한 소임을 맡기는 사람이 있다면 가히 이것으로 써 경계를 삼을 것이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