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려

제15대 숙종(肅宗,1095~1105 재위10년)

오늘의 쉼터 2009. 7. 30.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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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대 숙종(肅宗,1095~1105 재위10년)


숙종은 문종의 셋째아들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순종, 선종의 동복아우다. 105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희(熙), 이름은 옹, 자는 천상(天常)이다.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과단성이 있고, 오경(五經)·제자서(諸子書)·사서(史 書)등에 해박하였다. 문종의 큰 기대를받아 [뒷날에 왕실을 부흥시킬 자는 너다.]라고 하여 문종 때 계림공에 봉하여졌으며, 선종3년(1086)에는 수태보 벼슬을 받았다. 1094년 조카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태사 겸 상서령에 올랐다.

   숙종은 1094년 10월 측근세력이 전혀 없는 어린 헌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함으로서 고려 제15대왕에 올랐다. 이때의 그의 나이42세였다. 숙종은 왕권을 장악하자 곧 반대세력을 완전히 숙청하고, 왕위에 오른던 날에도 이자의의 누이동생 원신궁주 이씨와 그녀의 아들 한산후 그리고 나머지 두 아들까지 모두 경원군으로 귀양을 보냈다.

 1096년 6촌 이내의 혼인을 금하였으나 백성들이나 귀족들에게 별로 지켜지지 못했다. 1097년에는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화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1101년에는 본국의 지형을 본떠서 은병[闊口]을 주조하고 이듬해에는 고주법(鼓鑄法:돈 만드는 법)을 제정하여 해동통보(海東通寶) 1만5000관을 만들어 문무양반과 군인들에게분배하였다. 1099년 김위제의 주장에 따라 남경을 중시하고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 을 두어 궁궐을 조영하게 하였다. 1102년에 예부에서 (우리나라가 예의로 교화하기는 기자(箕子)로부터 비롯 되었으니, 원컨대 그 분묘를 찾고, 사당을 세워 제사하십시오.)라고 아뢰니 이에 따라 서경에 기자사(箕子祠)를 세웠다.

 1103년 동여진의 추장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였으나, 추장이 되면서 고려에 침입하였다. 같은해 2월에 임간(林幹)이 정주에서 패하였고, 3월에는 윤관(尹瓘)이 여진정벌을 꾀하였으나, 역시 이기지 못하고 화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따라 윤관의 주장으로 별무반(別武班)을 처음 설치하였다. 윤관은 "신이 여진에게 패한 것은 저들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므로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아뢰니 드디어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神騎 軍),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神步軍), 승도(僧徒)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 軍)을 두어 별무반이라 칭하고, 여진정벌을 준비하게 하였다.

 1105년 서경에 순행하여 동명왕묘(東明王廟)에 제사하고, 병이 들어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10월에 수레 안에서 죽으니 태자[우]가 유조를 받들어 즉위하였다. 능은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판문리에 있는 영릉(英陵)이며, 시호는 명효(明孝)이다.
                                                                 출처:
미르나라

  

 

 숙종 명효대왕의 휘는 옹 이요 자는 천상이며 고휘는 희이다. 문종의 제 삼자로 순종의 동복형제이며 문종 팔년 갑오 칠월 기축에 탄생하였다. 어려서 총혜하더니 장성하매 미쳐 효경 근검하고 웅의 과단하며 오경과 자(제자) 사를 보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므로 문종이 그를 사랑하여 일찍 말하기를「후일 왕실을 부흥할 자는 너일까 하노라」고 하였다. 십구년(문종) 이월에 계림후로 책봉하고 삼십일년 삼월에 진봉(進封: 왕세자·세손·후·비·빈의 봉작을 더하는 것) 하여 공을 삼고 선종 삼년 이월에 수태보를 가하고 구년에 서경으로 왕의 어가를 수종(隨從) 할새 자운이 공의 장막 위에 어리니 이 기운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왕자될 징조라고 하였다. 헌종이 즉위하매 수태사 겸상서령에 올리고  명년 팔월에 중서령을 삼고 십월 기사에 헌종이 제(영)를 내려 선위(禪位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 하니 왕이 재삼 겸양하다가 경오에 중광전에서 즉위하였다  이 날 원신궁주 이씨와 및 그 아들 한산후 형제 이인을 경원군에 유배하였다.

신미에 좌사랑중 윤 관 형부시랑 임의를 요(遼)에 보내니 전왕(헌종)의 표문에「엎드려 생각컨대 임금을 위하는 도리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진술하여야 하므로 감히 봉장을 갖추어 부의에 올리나이다 엎드려 생각컨대 신이 연령이 어리고 성질이 어리석습니다  부왕의 견언을 어기지 못하여  가업을 망녕되히  계승하매 웅번의 극무에 힘써 길이 충근함을 다하려 하였더니 일찍 소갈증에 걸리게 되어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심하게 되었습니다  의는 십전의 묘술이 없으니 진찰을 다할 수가 없고 약은 백품의 영종이 핍하였으니 역시 제병의 효(명현)가 없음에 어찌하오리까 운명이 조석으로 다가와 더할 뿐이오 나음이 없습니다. 폐담이 타고 형해가 말라빠져 두 무릎이 이에 힘이 없고 두 눈이 이에 어둡습니다. 행보조차 어려우니 어찌 대경의 장리를 잡고 나서며 보아도 보이지 않으니 어찌 사면의 석계를 분별하리오 다만 금상에 엎드려 누었기만 하니 군국의 감임에 막혀져 있읍니다.  미구를 헤아려보니 이 때가 더욱 심히 위태로우며 받은 소임이 가벼웁지 않으니  관수함을 잠시라도 비우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금월 팔일에 신부 선신의 제 희로써  번무를 권수케하고 특히 배신을 보내어  애오라지 황정에 상달하나이다.」고 하였으며  왕의 표문에는「가만히 생각건대 고명의 간절한 바에 천이도 통할 수 있을 것이므로 감히 신자의 정성을 베풀어  우러러 군친의 조감하심을 번거롭게 하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은 후번의 끝 아들이오  성역의 빈신으로 나서 유도의 성대를 만나 않아서 무위의 덕화를 즐기고 있었더니 전자에 국왕 신 욱이 일찍이 가벼운 병에 걸려 근자에는 심중함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다방으로 복약하여 보았으나 아직 조금도 낳는(전추) 효과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금월 팔일에 신에게 번무를 권수케 하였습니다  신이 이 부탁함을 보고 승문하려고 생각하였으나 한스럽게도 궐정이 멀어서 곧 간독한 정성을 상신하지 못하였음에 어찌하오리까 문득 졸렬한 자로서 종사를 가수하자니 이에 계처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전경)이 쌓이어 더욱 심하매 이에 봉진을 달려 보내어 신엄(황위)에 상고하나이다.」고  하였다.  무인에 소태보로 수태위 문하시중을 삼고  김상기로 수사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유석으로 수사공을 삼고 임개로 중서시랑평장사 판형부사를 삼고 왕국모로 수사도를 삼고 손관으로 상서우복사 참지정사 판호부사를 삼고 최사추로 수사공 추밀원사 한림학사 승지를 삼고 김선석으로 지추밀원사를 삼았다. 경진에 제하여  조선국공 도에게 식읍 오천호 식실봉 오백호를 부여공 수(? 4쪽)에게 수태전를 가하고 진한후 유로 상서령을 삼고 낙랑백 영으로 낙랑후를 삼고 황중보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윤신걸로 용호군상장군 병부상서를 삼고 황유현을 공부상서를 삼고 최적으로 김오위상장군 섭형부상서를 삼고  그 외 등급을 뛰어 천관한 자가 수백인이요  공 상 조예(천역)에도 현직을 초수한 자가 있으되  유사가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병술에 참지정사 왕국모가 졸하였다.  십일월 계묘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참죄교죄 이하의 죄를 사하고 명산 대천에 모두 덕호를 가하고 민 년 팔십 이상 및 독폐질자와 의부 절부 효자 순손 환과 고독에게 찬을 사하고 물을 분여하기를 차등 있게 하고 각종 군인에게도 또한 미와 포를 사하되 차등 있게 사하였다. 병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신봉루에 거동하여 중외의 하례를 받고 드디어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계축에 최유거를 요에 보내어 (공물)을 진봉하였다. 갑인에 최용규를 보내어 신정을 하하고 동팽재로 천안절(거란제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기미에 요가 유직을 보내와서 전왕의 생신을 하하거늘 왕이 건덕전에서 대신 맞이하였다  그 칙서에 이르기를 「경은 일역(동토)에 봉작을 이어받아 천조에 술직하였다  마침 수월의 처음에 당하여 때맞춰 현호의 아침이 되었으니 마땅히 경석(경하의 선물)을 펴(신) 써 권회함을 보일 것이다 이제 태주관내관찰사 유직을 보내어 그 곳에 가서 경에게 의대 필단 안마 궁전 제물 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노니 이르거든 영수하라」고 하였다. 십이월 기사에 유직이 돌아가는데 표문을 부쳐 보내니 전왕의 표문에「권고하심이 엄신에서 나오매 성은이 잔명에까지 미치나이다  총영이 분에 넘쳐 기쁨과 두려움이 아울러 사귀옵니다 신은 원래 병약한 체질로서 중한 기탁을 망녕되히 받았습니다 비복의 부름(속―소)으로 그 병이 점점 깊이 들어가게 되어 보고 듣기가 어렵고 거동이 마음대로 되지 못하여 골친에게 미루어 번무를 권수케 하고 가신을 달려 보내어 천총에 앙고하였더니 의외에도 이번에 외람히 예자하심을 입어 특히 사절을 보내시니 조지의 위회하심이 돈독하고 보폐의 나누어 주심이 더욱 두텁습니다 몸이 약하고 기운이 허하여 일어나지 못함에 어찌하오리까 대신 수령케 하와 더욱 송구합니다 맹서코 백번이나 살아서 조금이라도 큰 뇌사에 보답하오리다」고 하였다  왕의 표문에는「국왕 신 욱이 오래 고질에 처해 있어 시립할 수가 없사온데 갑자기 총애하신 혜택을 입게 되오니 몸소 맞이할 도리가 없는데 어찌하오리까 신이 번국을 권수하여 대신 큰 은사를 받았나이다 그 받은 바 조서와 별록과 제물은 모두 이미 (국왕에게) 전부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병술에 최사추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김선석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황종각으로 지추밀원사를 삼고 황옥으로 예부상서 동지추밀원사를 삼았다 이날에 황주목부사 이위로 상서우사원외랑을 삼으니 왕이 위의 청근 휼민함을 가상하게 여겨 아직 품질이 차지 아니하였는데 소환하여 이 직을 제수한 것이다.  경인에 임의가 요에서 돌아오니 회조에 이르기를「청사(동번)를 돌아보매 자총(황실)을 정성껏 받들어서 대대로 충성된 뜻을 다하고 때때로 공품을 닦았다 전일에 욱이 이미 표장에서 부진하였거니와 오랜 병에 신음한다더니 경이 다시 궐정에 신주하여 중무를 권지한다 하니 힘써 근순함을 생각하라 우선 써 윤종하노라」고 하였다.

병자 원년 춘 정월 무술에 동여진의 아부한 고란곤 두문 등 일백칠십구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유에 공부상서 삼사사 유석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상서좌승 최#(7쪽)로 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갑인에 교하기를「짐이 선왕을 우러러 본받아 검덕을 행하고자 음식을 절감하고 기욕을 마음대로 하지 않았는데 근일 듣건대 내(경)외의 시속이 사치를 좋아하여 그침이 없고 음식할 즈음에 배반이 너무 많아서 풍교를 상우고 습속을 패케 한다 하니  심히 통심할 일이로다  자금이후로는 마땅히 (음식에 있어서) 등급을 정하라」하고 이어 어사대로 하여금 규찰케 하였다. 정사에 황유현으로 응양군상장군 호부상서를 삼고 최적으로 신호위상장군 형부상서를 삼고  왕유열로 김오위상장군 공부상서를 삼고 오맹으로 전중감을 삼았다.  무오에 (왕의) 생신으로써 대원절을 삼았다. 이월 갑자에 사은 겸고주사 우원령을 요에 보내니 표에 이르기를「거년 십일월에 태주관내관찰사 유직이 이르러 조서와 별록 각 일도식을 받들어 전해 왔는데 전왕의 생일이므로 의대 은기 필단 궁전 안마 등을 특사하시고 전왕의 병으로 인하여 신으로 하여금 대수하라는 것이었읍니다 권고하심이 제의 충정에서 나와 혜택이 하역에 미치니 받아 전함에 있어  송구함이 병증하였나이다  엎드려 생각컨대 황제폐하께서는 도가 발라(정) 중총을 지키고 덕화가 천하를 덮으사 번신의 생일을 기억하시고 사신을 보내어 은혜를 베푸셨나이다  총명이 이미 닿았으니 의리상 마땅해 몸소 배수할 것이오나 병신이 더욱 쇠약하여 마침내 친영함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일방을 권수하는지라 대신 큰 뇌사를 받았으며 받은 바 조서와 별록은 이미 일찍 전부하였나이다」하고 하였고 전왕의 표에는 이르기를「호천의 도는 비자의 소리를 들음에 막힘이 없나니 군박한 정성은 반드시 모름지기 위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므로 이에 삭독(표문)을 빌려 곧 엄 혼(제정)을 두드립니다 신이 일찍이 중병에 걸려 치료를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번선(번병)의 소임의 극무는 진실로 잠시라도 비우지 못할 것이오 공헌의 상규는 혹시라도 궐하지 못할 것이므로 감히 숙부에게 미루어 이에 국권을 부속하였습니다 신은 세록을 포기하고 별제에 퇴거하여 병약한 몸은 스스로 장빈에 장와하여  황홀한 혼은 단지 대악에 여유하나이다 이미 위태함이 깊으니 어찌 낫기를 헤아리오리까 근자에 공첩이 갑자기 왔음을 듣고 제언이 내렸음을 알았습니다 낙기복의 특예와 봉책의 성의를 행함을 아울러 모두 견제하여 주심은 원망에 맞게 되었사오며 또 생일의 명과 별사의 은을 베풀고자  미리 먼저 유시하시오나 잔천(장차 죽는것)를 헤아리매 별로히 편효도 없는데 이 때에 이르러 어찌 (후한) 사은을 받으리오 엎드려 비옵건대 간곡해 인련하심은 베푸사 (신의) 간고를 굽어 살피시고 유지를 돌리어 사신 보냄을 그치시고 마침내 병든 신으로 하여금 길이 중한 직책에 거함을 면케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을축에 전왕이 흥성궁에 출거하기를 청하거늘 왕이 이를 청종하니 이 궁은 선종의 잠구이다. 을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경진에 서여진의 아나화 등 사십팔인이 내조하였다. 삼월 신축에 서여진의 하부환 등이 내조하였다. 기유에 지예사 고민시호를 요의 동경에 보내었다. 무오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김보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사월 임술 삭에 서리가 내리고 계해에 또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계유에 선덕전에 거동하여 해가 기울어지기까지 청조(조정을 들음)하였다.  중서성이 주하기를「만물의 성장할 때를 당하였는데 삼월 이래로 시령(절후)이 어기어져서 물이 응결하여 어름이 되고 서리가 내려 물을 상해하고 밤에 우박이 쏟아졌습니다 홍범오행전에 이르기를 우박은 음이 양을 협박하는 상이라고 하였고 경방역전에 이르기를 주벌함이 이에 벗어나면 그 재로 서리가 내린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위에 있는 이가 어느 한쪽 말만 듣게 되면 하정이 막히는 것이니 능히 이해를 생각하지 못하고 실수(실)가 엄급한데 있으면 그 벌로 향상 추워(한)진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병사를 일으켜 주륙을 망녕되게 하면 이를 망법이라 하는 것으로서 그 재로 서리가 내려 여름에 오곡을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근자에 유군이 병환으로 누어 청단함이 불명하고 모후가 섭정하여 심혹함이 도를 잃어 흉악한 사람으로 하여금 틈을 타서 난을 괴하게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크게 주륙을 행하여 당류를 남기지 않고 일에 정상을 밝히지 아니하였으니 수계된 자 중에는 반드시 무죄한 자가 있어서 원기가 천지에 가득하매 화기가 변하여 재앙이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성상께서 천명에 응하여 대통을 이으셨으니 만기를 싸잡아 바르게 하소서 비옵건대 어사대와 상서형부로 하여금 무릇 의옥에 시비가 미정한 것은 독촉하여 공정히 판결케하여 원왕함이 없게 하고 그 고발한 바가 사실이 아닌 것은 모두 반좌(고발한 자가 도리어 죄받는 것)케하여 써 천계에 답하신다면 곧 인정이 서로 기뻐하여 재가 변하여 복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청납(聽納)하였다. 기묘에 현릉에 배알하였다. 을유에 경릉에 배알하였다.

 오월 병신에 회경전에서 초제하였다. 기해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계묘에 또 낮에 나타났다. 갑진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해가 기울어지기까지 청정하였다. 정미에 경한 죄수를 석방하였다. 무신에 금강경도장을 건덕전에 설하고 도우하였다. 무오에 요 동경지예사 예빈부사 고량정이 왔다. 유월 신유에 경종의 신주를 영능에 옮기고 선종을 대묘에 부(조선에 합제함)하고 경성왕후 김씨의 (신)주를 질릉에 맞이하여 덕종묘실에 부 하였다. 갑술에 진명도부서사 문주방어판관 이순혜 등이 해적과 싸워 이를 부수이 십칠급을 베었다. 정축에 동여진의 영손 등 십칠인이 내조하였다. 계미에 왕이 연덕궁주 유씨 및 원자로 더불어 동지에 배를 띄우고 술을 베풀어 시중 소태보 복사 황중보 지추밀원사황영 형부상서 최적 지주사 전중감 최홍사 직문하성 이오 우승선 급사중 유신을 불러 시연케 하고 서로 더불어 시를 지어 야반에 이르렀느데 뇌우로 파하고 말았다. 추 칠월 경인 삭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역대에 비장한 문서를 열람하고 그 중에 부질이 완전한 것을 택하여 문덕전과 장령전의 어서방 비서각에 분장하고 남은 것은 양부의 재신 및 고원사한과 내시문신에게 차등있게 사하였다. 정미에 문종의 기진도장으로 흥왕사에 거동하여 행향하였다. 소재도장을 회경전에서 칠일간 설하였다. 팔월 경신 삭에 국노(대신급으로서 치사한 자)를 동합에서 서노(서민의 연노자)를 좌우동락정에서 향연할새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권주하고 인하여 의복 폐백 사선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병자에 동여진의 와돌을 고마요 등이 오거늘 중광전에서 인견하여 번사를 묻고 주식과 금견을 사하였다. 임오에 지추밀원사 호부상서 황종각이 졸하니 조위의 교서 및 뇌서를 사하고 시호를 개숙이라 하였다. 구월 기축 삭에 우복사 참지정사 박인량이 졸하였다. 경인에 왕이 인예태후의 기진도장으로 국청사에 거동하여 행향하고 겸하여 진전(영전)에 제하고 이것을 항식으로 삼았다.  경자에 탁(탐)나성주가 사람을 보내와 즉위를 가하였다.  정미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송의 승 혜진을 인견하고 한림원에서 사식하였다.  무신에 송의 승 성총과 혜진으로 각각 명오삼중대사를 삼았다. 계축에 인왕선약경을 회경전에서 삼일간 강하고 친히 승 일만을 공양하였다. 동 십월 정축에 도장을 건덕전에서 삼일간 설하고 인예태후의 원성한 화엄경을 전독하였다. 무인에 송의 상인 홍보 등 삼십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을유에 오연총을 요에 보내어 천안절을 축하하였다. 십일월 신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정미에 소충을 요에 보내어 공물을 진봉하고 무신에 백가신을 보내어 하정하였다. 십이월 정사에 요가 이유신을 보내와 전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축정 이년 춘 정월 임인에 요가 횡선사 해주방어사 야율괄을 보내와 전왕에게 칙서를 사하니 이르기를「경은 일찍이 번봉을 진무하고 직공(조공)을 공수하였다  마침 질병에 걸리어 조이(섭양)하기를 청하므로 유사가 이에 전이를 참고하여 간세에 은사를 나누어 존념함을 보여 주노니 마땅해 (나의) 권고하는 생각을 알지어다. 이제 경에게 의대 필단 안마 궁전 등물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고 하였다. 이월 기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거동하였다. 임신에 동여진의 와돌 등이 내조하였다. 국청사가 낙성하여 무인에 친히 경찬도장을 설하고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이정공과 양부의 재신을 불러 잔치하여 면대하여 상주고 어제한 경찬시를 선시하여 유신으로 하여금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윤월 갑진에 전왕이 붕어하였다. 기사에 동여진의 와영 등 칠인이 내조하였다. 삼월 경신에 전왕을 은능에 장하고 요의 동경병마도부서에게 이첩하기를「전왕이 별저에 퇴거한 이래 병세가 일증하여 윤월 십구일에 훙서했으므로 이제 이미 장례를 마쳤습니다. 전왕의 유명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기무에서 해면하여 주시기를 빌었더니 다행히 조서로서 허낙함을 입어 물러가 잔체를 요양하던 바 근래에 병이 심하여 도저히 소생할 도리가 없다 식종(상장의 일)에 관한 모든 일은 마땅히 검약을 따를 것이며 고주해서 대조를 번독하는 일은 모름지기 하지 말지어다고 하였으므로 이에 전왕의 유명에 따라 구태어 사신을 보내어 고애하지 아니합니다」라고 하였다. 계해에 최사추로 중서시랑 평장사 판형부사 겸서경유수사를 삼고 김선석으로 좌복사 판호부사를 삼고 황영으로 참지정사를 삼고 임간으로 지#추밀원사 판삼사사를 삼고 위계정으로 예부상서 한림학사 승지를 사고 이오로 예빈경추밀원부사를 삼았다. 하 사월 병술에 상춘정에 거동하여 어제한 금정상화시를 선시하고 관각근시의 문신으로 하여금 화답해 올리게하여 친히 고하를 매겨 견을 차등 있게 상사하였다. 갑진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임원통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오월 정묘에 회경전에서 초제하였다. 육월 갑신에 왕이 봉은사에 거동하였다. 무자에 문하시중 이정공이 선지를 받들어 흥왕사의 비문을 지어 올리니 왕이 조를 내리어 장유하고 겸하여 필단 은기 차포 안마 등물을 사하였다. 송상 신환 등 삼십육인이 왔다. 갑오에 송이 우리의 표풍인 자신 등 삼인을 돌려 보냈다 처음 탐라민 이십인이 배를 타고 표풍을 만나 나국에 들어가 다 피살되고 오직 이 삼인만이 탈출함을 얻어 송에 투입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돌아온 것이다. 추 칠월 신미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임신에 동여진의 적선 십 소가 진명현에 침구하매 동북면병마사 금한충이 판관 강증을 보내어 그들과 싸워 이겨 배 삼소를 얻고 사십팔급을 베었다. 팔월 정해에 김선석으로 중서시랑 평장사를 삼고 임간으로 추밀원사 상서좌복사를 삼았다. 경인에 동여진의 미응 등 이십사인이 내조하였다. 무술에 홍호사에 행차하였다. 정미에 혜성이 저성과 방성 사이에 나타나니 그 광망이 천시원에 뻗쳤다. 구월 갑인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을묘에 동여진의 사호나 등 이십삼인이 내조하였다. 을해에 백고좌를 회경전에 설하여 인왕경을 강하고 승일만을 공양하였다. 추 십월 신사 삭에 동여진의 영파 등 이십오인이 내조하였다. 임인에 동여진의 아부 등 이십오인이 내조하였다. 갑진에 안인감을 요에 보내어 천안절을 축하하였다. 정미에 유택을 보내어 횡선을 사하였다. 십일월 기미에 유유우를 요에 보내어 전왕의 생신축하를 사하고 무진에 필공찬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또 임유문을 보내어 하정하였다. 갑자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십이월 계사에 요가 야율사제와 이상을 보내와 옥책 규인 관면 차로 장복 안마 필단 등물을 사하고 책문에 이르기를 일짐(요 도종)이 호창(하늘)의 권우와 조종의 남긴 규범으로 천하를 통치한지 사십삼년인지라 (그동안) 밖으로 백성을 평강케 하고 안으로 제후를 회무하여 모두 도에 이르게 하였도다  해우에 사를 세우게 하니 북은 용천에 닿고 서는 압록강에 이르렀도다 삼가 정삭을 받들고 침신(조공)을 바쳐오더니 지난번에 선신(선종)이 서거하매 적사(헌종)가 슬픔을 머금고 고괴에 나아간채 모토(봉토)를 계승케 하였더니 거듭 장주를 올려 간절히 병임을 일컫고 제부(숙부 즉 숙종)에게 돌려 숭구(국정 또는 왕위)를 담당케 함을 원하므로 곧 그 간청에 의해 권리를 맡겼던 바 능히 충절을 다하여 대국을 섬기고 정성을 피력하여 상에게 공순하였오다 더욱이 일방의 지위를 생각하여 이미 천승의 이름으로 높였도다 마땅히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하여야 할 터이므로 이에 전례를 행하여 특히 책명을 하노라 아아 그대 권지고려국왕사 희는 이의(음양)의 간기를 닮았고 오행의 순열한 기운을 머금었도다 구류의 예와 술을 묵식으로 통하였고 칠웅의 세수(대세와 운수)를 정론으로 판단하였도다 정치의 권병을 잡음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시무를 재결하였도다 정간이 서매 종실이 평안하고 유악이 깊으매 백도가 정하였도다 비록 형제가 지란과 같이 변포에 총생하고 자손이 기기와 같이 진야에 경치할지라도 그 조상의 제사를 맡을 자는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랴 이에 귀협(복서)에 따르고 헌물을 강구하여 금실(질)권단서로 대려의 맹약을 굳게 하고 금인자수로 차복의 은영을 베푸노라 이로써 정사 임해군절도사 검교태전 겸어사중승 야율사제와 부사 대복경 소문관직학사 이상을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특진검교태위 겸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일천호 식실봉 칠백호로 하노라 아아 우리 태조로부터 나에게 이에 미치기까지 공을 쌓고 덕을 거듭하며 부절을 나누고 강토를 사하였도다 번(번병)과 선(선창)에는 가세에 유법이 있고 조와 회(조공과 내조)에는 세시에 상제가 있나니 (그대는) 길이 동하(동방)(주십)의 의표가 되어 (우리) 요와 더불어 무궁하리라 오직 경건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왕이 남교에서 책명을 받았다.

무인 삼년 춘 정월 병인에 조하기를「과인이 조업을 이어 바야흐로 대위에 거하게 되매 대요가 사신을 보내어 특히 봉숭함을 보이니 마땅해 경사를 반포하여 위로 천자의 명에 보답할 것이니 그 수책하던 날에 조서를 접수한 이하로 승단집예한 내외 모든 부서의 원요 및 객사 접반한 관리에게 작 일급을 사하고 위범함이 있어 죄에 처할 자는 면하여 주고 지휘군인에게는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갑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나한재를 설하였다. 이월 갑신에 친히 구정에서 초찰하였다. 기축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동여진의 창곤 등이 내조하였다. 정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삼월 갑인에 창릉에 배알하고 신유에 대릉에 배알하였다. 계해에 교하기를 「과인이 망녕되이 양덕으로써 원량(원자)을 두었으니 마땅히 진위에 올릴 것이라」고 하고 유사에게 특명하여 태자를 세우고 첨사부 좌춘방 연경궁사 등의 관을 갖추고 조예(신복) 변읍(식읍)을 다 이에 예속케 하였으며 소태보로 태사를 삼고 김상기로 태전를 삼고 최사추로 태보를 삼고 김선석으로 소사를 삼고 임간으로 소보를 삼고 위계정 이#(20쪽) 조린충 곽상으로 모두 빈객을 삼고 김한충 홍기로 좌우서자를 삼고 유신 김경용으로 좌우유덕을 삼고 윤관으로 동궁시강학사를 삼고 최공후으로 가령을 삼고 문익고령신으로 좌우찬선대부를 삼고 우원령으로 중사인을 삼고 이위로 전내를 삼고 장령으로 세마를 삼고 유재로 시독을 삼고 강증으로 중윤을 삼고 유인무로 동의랑을 삼고 장경으로 약장랑을 삼고 최인필로 궁문랑을 삼고 이후로 솔경을 삼고 황유현으로 시위를 삼고 오손경 최유정으로 좌우청도 솔부솔을 삼고 나준 궁제로 좌우감문을 삼고 최정으로 우위를 삼고 최현으로 여분중랑장을 삼았다. 을축에 백관이 표를 올려 태자부 세움을 축하하였다. 병인에 동여진의 요진 등이 내조하였다. 하 사월에 동여진의 고두 등이 내조하였다. 기축에 이덕윤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정유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여 승 삼천에게 공양하였다. 기해에 오(사의 오?)해의 신에게 비를 빌었다. 오월 임자에 우박이 내렸다. 신유에 회경전에서 초제하였다. 육월 무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추 칠월 무신에 송악신사에서 비 개이기를 빌었다. 기미에 윤관과 조규를 송에 보내어 사위함을 고하고 방물을 올리니 그 표에 이르기를「군부의 인자하심이 유황에까지 흡족하니 이미 박애하심이 나타났도다  신자된 마음은 충효에 있으니 어찌 망년되히 진술하리까 감히 정성을 피로하여 문득 황제 전에 청하나이다 신이 가만이 생각하옵건대 본국은 조고와 자손이 다 대를 이어 봉작을 승습하고 멀리 인풍을 향하여 술직해 왔나이다 지난번에 신의 형 운(선종)이 후복을 이어 받아 황조를 섬기매 누대의 이모를 준수하여 더욱 지절을 굳게 하고 원방의 분기를 관리하여 힘껏 경륜(공납)를 행하였습니다 더욱이 선후께서 홀연히 모의를 사함으로부터 망형(선종)은 바야흐로 해모하는 마음이 깊어 곧 사자를 보내어 위장을 받들려 하였으나 수를 누리지 못하고 문득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음을 어찌하오리까 신의 형 자인 선신 욱(헌종)이 폐읍(폐방)을 이어 권수하였다니 뒤이어 중병에 걸려 마침내 구요하여도 낫지 않고 점점 파리함이 심하여지매 이에 을해년 십월 팔일에 간독하게 번무를 미루어 신으로 하여금 주지케 하였습니다 그 부탁의 근간함을 돌아 볼 때에 감히 사양해 피하지 못하고 망녕되히 고치(고막)한 몸으로서 종팽을 가수하게 되었나이다 따라서 기구가 새로워지고 찬승의 시초인만큼 일방에 일이 많음으로 인하여 이제 수년이 되도록 일찍이 배신을 보내어 봉주를 앙신한 겨를을 얻지 못하였나이다 비록 성청이 널리 사무쳐 먼 곳의 사정을 자세히 살피신다 하여도 가난이 거듭 이르므로 드디어 인순한 허물을 저지르게 되었나이다 예가 실로 궐함이 있으니 죄를 어찌 감히 도피하리요 이제야 고함이 늦어진 사유를 갖추어 (황제의) 지명하신 감조를 더럽히나이다 정위가 멀지 않으니 어름을 밟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더욱 깊나이다」라고 하였다. 병인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팔월 병신에 유사에게 명하여 형옥(형벌)을 감케 하였다.  구월 기유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임자에 인왕도장을 회경전에서 칠일간 설하였다. 추 십월 갑신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묘에 협향하고 돌아와 신봉문에 거동하여 참교 이죄 이하를 사하여 참죄와 교죄에 해당한 자는 섬에 유배하고 앞서 섬에 유배되었던 자는 출륙케 하고 출륙자는 귀향케 하고 귀향자는 상경케 하고 상경자는 조견을 허통하고 이미 조견한 자는 서용케 하고 각산 대천의 모든 신지에게 호를 가하고 또 (대묘의) 배향 공신에게도 (호를) 가증하고 제향을 도운 모든 집사와 대묘 구릉의 시위원장 등에게 작 일급씩을 사하고 묘정락부의 공인에게는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고 진사과 명경과를 치룬 자로서 군대에 떨어져 있는 자는 면제케 하였다. 무자에 지중추원사 김용과 예부시랑 조양휴를 요에 보내어 봉책함을 사하였다. 신축에 상서형부가 옥에 죄수가 비었다는 것을 상주하니 재상 소태보 등이 표로서 하예하매 왕이 하교하여 답유하기를「짐이 망녕되히 선대의 유업을 이어 받아 하민을 다스리고자 날로 만기를 살피니 다만 근노하는 생각만이 쌓여졌는데 지금 모든 옥이 비어 있음은 실로 협찬을 잘하였음에 녹유한 것이다 어찌 나에게 미를 돌리므로써 마음을 다하여 갑지기 표장을 올려 전하함인고 정성됨을 생각할 때에 진실로 가탄함이 간절하도다」라고 하니 재(신) 보(신)들이 또 표사하였다. 임인에 김약충을 요에 보내어 천안절을 축하하였다. 십일월 경술에 송상 홍보 등 이십인이 왔다. 무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왕하와 윤계형을 요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장영은 신정을 축하하였다. 십이월 병술에 요가 좌간의대부 내고부를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신묘에 아들 필을 봉하여 검교태보 수태위 겸상서령을 삼았다. 계사에 내고부가 돌아갈새 왕이 표를 부쳐 사예하였다. 경자에 김경용으로 상서리부시랑 지어사대사를 삼고 이계용으로 상서형부시랑 우간의대부를 삼고 문익으로 급사중을 삼고 고령신으로 이부랑중 추밀원우승선을 삼고 오연총으로 기거랑을 삼고 왕하로 병부원외랑 추밀원우승선을 삼았다. 병신에 예부에게 송조의 개보정예 일부를 사하였다.

묘기 사년 춘 정월 병진에 천제석도장을 문덕전에서 칠일간 설하였다. 신중원에 행차하여 나한재를 설하였다. 을축에 조선공 도가 졸하였다. 이월 정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기해에 김상기로 수태전를 삼고  황옥으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조린충으로 수사공 상서좌복사를 삼고 위계정으로 이부상서를 삼고 이오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송제가 조하여 (고려의) 거자의 빈공과(응시)를 허하였다. 삼월 을사에 연덕궁주 유씨를 책하여 비를 삼았다. 임자에 왕륜사에 행차하여 나한재를 설하였다. 하 사월 신사에 사루에 거동하여 사신들을 소집하여 중광전의 옥치괴화시를 짓게 하고 품제를 나누어 견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정해에 요가 횡선사영주관내관찰사 소랑을 보내오고 겸하여 장경을 사하였다. 경인에 보제사에 행차하여 오백라한재를 설하였다. 임진에 연영전에 거동하여 어장한 문서를 검열하였다. 무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임성개로 공부상서를 삼고 동팽재로 지상서병부사를 삼았다. 경자에 임의로 좌간의대부를 삼고 윤관으로 우간의대부 한림시강학사를 삼았다 중서성이 주하기를 「윤관과 임의는 인척간이므로 간원에 같이 있음이 마땅치 못하오니 청컨대 윤관의 직을 해면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오월 을사에 여러 신사에서 비를 빌었다. 을축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퇴관)한 이정공이 졸하니 조위의 뇌서를 사하였다. 육월 계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신사에 큰 우박이 내렸다. 계미에 윤관 등이 송에서 돌아올새 송제가 칙서를 부치니 이르기를「올린바 표문을 살펴 잘 알겠도다 경은 대대로 삼한을 진무하고 땅은 오부의 번이로다 능히 선대의 모유를 계승할 것을 생각하고 신절의 수행을 경건히 하여 해로로 사신을 보내어 만정의 공물을 받들었으니 진실로 이 수방의 시초에 있어 공극의 충성을 이루었도다 봉주를 상세히 읽고 사의를 음미하니 왕위전수를 늦게 알리게 됨을 서하고 봉위함이 때가 늦었음을 술하였다 근성함을 권념할 때 이에 이미 자세히 알았노라 바야흐로 새로이 (조업을) 계승하였으매 마땅히 (백성을) 후하게 무휼하고 잘 너그러은 수령을 펴어 아속(주이)을 편안케 하고 우리 중국을 보필하여 길이 동번이 될지어다」라고 하였다. 무술에 여러 신사와 박연천상에서 비를 빌었다. 추 칠월 신해에 연친전에서 소연을 베풀었다. 신유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송이 우리 탐나의 실반석인 조섬 등 육인을 돌려 보냈다 팔월 병자에 기청하였다. 구월에 재신 일관 등으로 하여금 양주에 남경을 건설할 것을 의론케 하였다. 계묘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을사에 지예사소사석이 요의 동경에 갔다. 임자에 보제사에 행차하여 삼백라한재를 설하였다. 정묘에 왕이 왕비 원자 양부의 군요 및 우세 승통을 거느리고 삼각산에 행차하여 윤월 임신에 상자사에 들리고 갑술에 승가굴에 행차하여 재를 설하고 인하여 은향완 수료 각 일좌 금강자 수정념주 각 일관 금대 일요 병 금화과수번 차향 의대 금기를 시사하고 을해에 양주에 들려 도성 세을 땅을 상보고 경진에 인수사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왕자 상당후 필이 졸하였다. 신묘에 문관을 요에 보내어 천안절을 축하하였다. 임진에 신혈사에 행차하였다. 추 십월 경자에 이수를 요에 보내어 생신 하한 것을 사하였다. 계묘에 삼각산에서 돌아와 약사원에 들려 사를 베풀었다. 신해에 고주겸밀진사 문익이 요에 가 원자에게 책명을 사하도록 청하였다. 회경전에서 초제하였다. 병진에 동여진의 아노화 등 이십육인이 내조하였다. 한이가 요에 가 방물을 바치고 조신준은 신정을 축하하였다. 십이월 신미에 왕제 부여공 #(27쪽)가 죄로서 경산부 약목군에 유배되었다. 임신에 진한후 유가 졸하였다. 계미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십이월 임인에 요가 대숙을 보내어 생신을 축하하였다 신해에 요 동경지예회사사 대의가 왔다. 계해에 유석으로 상서우복사 겸태자빈객을 삼고 오수증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한영으로 병형상서를 삼고 조공선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김원유와 녹숭으로 좌우산기상시를 삼았다.

경진 오년 춘 정월 경진에 요의 사신 소랑이 돌아갈새 왕이 표문을 부쳐 사예하였다. 갑신에 동여진의 장군 표어내 등 육십인이 내조하였다. 계사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하였다. 을미에 장자 우를 책하여 왕태자를 삼았다. 이월 을사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이죄(참죄 교죄)이하를 사하고 각산대천에 신호를 가하고 양경의 문무백관에게 작 일급씩을 가하고 첨사부 춘방원에겐 이급씩을 가하고 산관(상임이 없는 한직) 칠품과 승조(정부 재직) 이십년인 자에게는 의복을 사하고 동서의 번장에겐 무관의 산계(산질의 직계)를 가하고 환과 노병 효자 순손에겐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신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무오에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삼월 을유에 중서성이 주하기를「현행력서가 착오된 점이 있으니 청컨대 역서찬자의 직을 삭제하소서」라고 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계사에 최사추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삼았다. 하 사월 정유 삭에 일식하였다. 기해에 (장원정에서) 환궁하였다. 임자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한숙단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오월 신사에 송의 명주에서 철종황제가 붕하고 황제 단왕 길이 즉위하였음을 첩보하거늘 왕이 철종을 위해 대안사에서 명복을 빌고자 하다가 간관이 불가하다 하매 이에 중지하였다. 임오에 요가 장신언을 보내와 원자를 책명할 것을 유시하거늘 왕이 의장을 갖추어 태초문 안에서 맞이 하였다. 그 칙서에 이르기를 「경은 후방에 노력을 다하고 왕실에 충성을 바쳤도다 비장(비#(28쪽)에게 부쳐 보낸 서장)으로 상주하여 연상하여 은전을 추급하여 주기를 원하였도다 이에 (경의) 성의를 살펴 소청에 따름이 마땅하도다 인하여 엄상을 그려(도) 더욱 공의를 신칙(칙)하며 특히 총사함을 표시하여 써 우권함을 밝히리라 이미 소사로 하여금 날을 가리고 예를 갖추어 책명하려고 지금 비서소감 장신언을 보내어 그 곳에 가서 보유케 하고 따로이 경에게 의착 필단 은 견 등물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며 또 불경 이함을 사하노라」고 하였다. 경인에 장신언이 돌아갈새 왕이 표문을 부쳐 회사하였다. 육월 정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묘에 대묘 팔능 및 송악의 동신사에 비를 빌었다. 을축에 상서 임의와 시랑 백가신을 송에 보내어 (철종상을) 조위하였다 추 칠월 정축에 상서 왕하와 시랑 오연총을 송에 보내어 (휘종의) 등극을 축하하였다. 을유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무자에 인왕도장을 회경전에서 오일간 설하였다. 팔월 정유에 복령사에 행차하였다. 경자에 홍호사에 행차하였다. 기미에 궁남루와 교동랑 및 사점관과 장생사의 이서에서 화재가 일어나 민호 수백이 연소되었다. 구월 정묘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병술에 이재를 요에 보내어 조유를 사하였다. 무자에 송의 도강 이기 등 삼십인이 왔다. 추 십월 병신에 중서문하성에 현덕창의 미 일백#(30쪽)을 사하였다. 임자에 요가 소호고와 고사영을 보내와 왕태자를 책봉하니 칙에 이르기를「경은 조업을 이어 받아 멀리 해표의 구역을 다스리니 장차 후계의 원자를 세우려고 경건하게 천조의 명령을 기다렸도다 마침 그대의 소청에 따라 이미 짐의 말씀을 유시하고 특히 사신을 파견하여 공작을 총가케하여 진실로 우우함을 밝혀 써 권회를 표시하노라 이제 고주관내관찰사 소호고 등을 보내어 예를 갖추고 그 곳에 가서 경의 장자 우를 책명하여 삼한국공을 삼고 그 인수 간책 차로과 아울러 별사하는 의대 필단 안마 궁전 제물을 별록과 같이 갖추노라」고 하였고 책에는 이르기를「짐이 칠성의 큰 경륜(비도)을 부하하고 백왕의 정통을 소승하였도다 일역(동번)을 권고하매 천조를 협보하였도다 비록 그대의 세봉을 이어 이미 구강을 다스린다 할지라도 이 나라의 계승자를 총애함에 있어서는 아직 상예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유사에게 신칙하여 고사를 따라 닦아 좋은 때에 (장〈장〉진) 복봉에 순응하여 특예를 이에 펴노라 아아 너 고려국왕 희의 장자 우는 나면서 천지의 정기를 타고나고 어려서 훌륭한 재기를 이루었도다 학에 나아감에 능히 민첩하여 시서와 예악의 근원을 연구하였고 덕에 따라 어긋남이 없으매 부자와 군신의 대의에 합치하였도다 조선 이래로 충렬을 상승하여 길이 (황실을) 존장한 공노가 있으니 진실로 사속의 경사가 있을 것이어늘 하물며 (우는) 적자에다 아름다은 성문조차 성하고 사리(사방)의 사이에는 (너에게) 일심이 매어 있는 바이랴(일심소계) 그러므로 정사 고주관내 관찰사 소호고와 부사 수위위경 고사영 등을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너를 책명하여 순의군절도 삭 무 등 주 관찰처치등사 숭록대부 검교태전 동중서문하평장사사 지절삭주제군사 행삭주자사 상주국 삼한국공 식읍 삼천호 식실봉 오백호를 삼노라 아아 태산과 황하를 두고 맹서하여 신을 전하노니 너는 이미 그 휴명을 함께 보유하였도다 동궁과 노월을 주어 써 진무하고 정토하게 하노니 너는 또한 함께 그 힘을 다할 것이다 오직 효하고 경하여야 가히 써 천성에 협화할 것이오 오직 겸하고 화하여야 가히 써 물정에 순응할 것이니 경계하고 삼가하여 짐의 가명을 저바림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을묘에 왕이 태자와 더불어 남교에 나아가 책명을 받았다. 기미에 태자가 요의 사신을 문하성에서 향연하였다. 신유에 박호를 요에 보내어 천안절을 축하하였다. 십일월 을축에 요사 소호고 등이 돌아갈새 왕이 표문을 부쳐 써 회사하였다. 김후선을 요에 보내어 생신 하함을 사하였다. 병자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무인에 송의 상인과 탐라 여진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신사에 금귀년을 요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병술에 혁운정을 요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최선위는 신정을 축하하였다. 십이월 계사 삭에 요가 대복경 왕집중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갑진에 왕집중이 돌아갈세 왕이 표문을 부쳐 써 회사하였다. 병진에 이위로서 급사중을 삼고 이제로 시어사를 삼고 소태간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유의 이덕우로 좌우습유를 삼았다.

신사 육년 춘 정월 정묘에 제하여 구경 자(제자) 사 각 일본씩을 대성과 추밀원에 분치케 하였다. 태자의 생신으로 창영절을 삼았다. 기사에 천제석도장을 문덕전에서 설하였다. 경오에 신중원에 행차하였다. 계유에 동여진의 여라불 사온 등 칠십오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병자에 예부상서 최홍사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상서좌승 김덕진으로 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요 동경지예사 예빈부사 고극소가 왔다. 경진에 송인 소규 육정준 유급이 내투하거늘 왕이 문덕전에 불러 시험하여 모두 팔품관을 사하고 정준에게 이름을 정걸이라 사하였다. 신사에 병부상서 한영과 대장군 장홍점을 보내어 중서시랑 김선석에게 관고(사령서)와 예물을 사하였다. 계미에 주부 이경택의 처 김씨가 부의 계모를 죽이려고 가만히 여비로 하여금 독을 식물에 넣어서 드리게 하였더니 계모가 이것을 알고 어사대에 고하니 김씨가 불복하므로 어사대가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매 왕이 이르기를 범상이 이미 명백하니 마땅히 곧 논죄하여 결정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씨가 선조의 외척이므로 사형을 감하여 안산현에 유배하고 경택은 옥중에서 죽었다. 을유에 형부가 주하기를 「주부동정 조준명이 부의 사망한지 사년동안에 그 모를 봉양하지 않고 그 제를 우애하지 아니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두 의지할 바를 잃게 하였으니 청컨대 법과 같이 논죄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이르기를「짐이 정사를 하배 효와 제를 앞세우거늘 이러한 사람이 있느냐」라 하고 그 주함을 가타 하였다. 신묘에 소재도장을 건덕전에서 사일간 설하였다. 이월 임진 삭에 조유회사사 공목관 이복을 폄관하고 아울러 회사사 이재를 면직시켰다. 계사에 녹수(#(33쪽)수)하였다. 갑오에 사자를 보내어 산천에 망질하였다. 계묘에 동여진 내파지촌 귀덕장군 보마궁한이홀촌 도령 마포 광탄촌 장군 골부 등 오십오인이 입조하기를 청하거늘 이를 허하였다. 을사에 동여진 이위촌 도령 괴부 등 삼십인이 내조하였다. 병오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참지정사로 치사한 신수가 졸하니 사자를 보내어 조제 하고 익호를 공헌이라 하였다. 수는 송인인데 자못 학식이 있고 더욱이 의술에 정통하였다. 기유에 검교태사 수사공 자가 졸하였다. 임자에 조하기를「역신 이자의에 따라 좌죄된 자는 다 양이하라」고 하였다. 을묘에 또 조하기를「역당의 죄가 의심스러운 자는 이미 사하였으니 그 시어사 왕태소 주부 전총 판관 이자 위위소경 김의영의 처 이씨 등은 허해 환경케 하라」고 하였다. 병진에 홍원사에 행차하여 대장당 및 구조당을 낙성하였다. 무오에 중광전에 거동하여 서적을 열람하였다. 삼월 무진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홍호사에 행차하여 시를 어제하고 내시 유신에게 명하여 화답해 올리게 하였다. 임신에 제하여 비서성에 문적의 판본이 쌓이고 쌓이여 훼손되므로 포를 국자감에 두어 이것을 옮겨 장치케 하고 써 넓리 모인케 하였다. 병자에 장경도장을 회경전에 설하고 경찬시를 어제하였다. 기묘에 왕이 요제의 혐명을 기피하여 이름을 옹이라 고치고 대묘와 팔릉에 고하니 군신이 표하하였다. 경진에 반약도장을 건덕전에서 설하였다. 요가 검교우산기상시 야율곡을 보내와 도종이 붕거하고 황태손 연국공 연희(천조제)가 사위함을 고하였다. 광명사의 승 광기 주부 손필 진사 이진광이 음양서를 사조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그들을 장유하였다. 병술에 오역신을 제하였다. 경인에 조하기를「기묘년 삼각산에 행차하였을 때 지나간 곳의 명산대천의 신호에 각각 인성 이자를 가하고 그 산천의 소재 주현으로 하여금 제고케 하라」고 하였다. 하 사월 신묘 삭에 일식하였다. 계사에 육십일자와 이십일현을 문선왕(공자)묘에 종사(배정)케 하였다. 어사대가 주하기를「요의 고애사가 전명한 후에 검은 적삼과 검은 사모로 연회에 나아감은 예가 아니니 청컨대 영송이원을 죄하소서」라고 하거늘 왕이 가로되 「이는 사자의 과실이니 영송이원이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라 하고 듣지 아니하였다 또 주하기를 「사천복정 유록춘이 일식의 시각을 오주하였으니 청컨대 법과 같이 논죄하소서」라고 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한재로 천지 종묘 산천에 기우하였다. 을미에 추밀원사 오수증으로 서북면병마사 지중군병마사사를 삼았다. 병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무술에 묘통사에 행차하여 마리지천도장을 설하였다. 경자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신축에 평주의 요승 각진이 음양을 허망되게 말하여 중인을 현혹케 하거늘 조하여 곡주에 유배시켰다. 임인에 홍기로 공부상서를 삼아 사관의 수찬관에 충당시켰다. 계묘에 녹수하였다. 대부소경 왕공윤과 합문사 노작공을 요에 보내어 조위하고 회장케 하였다. 동로주진에 눈이 일촌(?)이나 깊이 내렸다. 갑진에 태일(천신)을 초제하고 기우하였다.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한림원이 주하기를「어명과 동운인 자는 청컨대 비서성으로 하여금 판에 새겨 영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피휘할 바를 알게 하소서」한대 제하여 가타 하고 옹(숙종의 휘옹과 동운)화전을 고쳐 상화전이라 하였다. 을사에 폭무하여 기우하였다. 군신이 상언하기를 「송충이 번식하여 압양하여도 효험이 없습니다 신 등이 삼가 살피옵건대 경방이의 비후조에 이르기를「식록하는 자가 임금의 치화를 보익하지 못하면 하늘이 이에 충재를 나타낸다 」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무상하여 써 성상께 근심을 끼쳤사오니 원컨대 현자를 등용하고 불초자를 물리쳐 천견에 답하시옵소서」라고 한대 회보하지 아니하였다. 용왕도장을 임해원에 설하여 기우하였다. 무신에 기묘년 행차하였을 때 지나간 곳의 명산 대천의 신지를 개성부와 양주에서 합제하였다. 일월사에 행차하여 금자로 쓴 묘법연화경이 이룩됨을 경축하고 그것이 끝나매 후비와 태자로 더물어 절 뒷 언덕에 올라 주연을 베풀어 즐기고자 하니 어사대가 주하기를「때는 바야흐로 성농절에 한발의 재앙이 있거늘 만약 여기에서 연락을 한다면 백성이 누가 전하께서 백성의 근심을 근심한다 하오리까」라고 하니 왕이 이에 중지하고 환궁함에 미쳐 느낌이 있어 시를 지으니 말구에 이르기를「연궁(불사)를 찾아 전원을 이루었고 겸하여 시우를 빌어 지극한 마음을 표하였도다」라고 하였다. 기유에 천지와 종묘에 기우하였다. 신해에 경미한 죄수를 석방하였다. 갑인에 조하기를「바야흐로 이제 농절인데 하늘이 오래 비를 내리지 않으니 주군의 관리가 나의 뜻을 본받지 않고 덕음의 본 뜻을 어겨 조세를 감면케 해 준 혜택을 백성으로 하여금 입지 못하게 하였거나 혹은 원왕한 옥사로 체수되어 오래도록 판결되지 않았거나 아사한 사람의 들어난 해골을 버려 두고 매장하지 않았거나 또 공사의 수세가 심히 무거워 민원을 일으켜 화기를 상케하여 그러한 것인가 유사는 덕혜를 펴고 비법을 금하고 신문을 공평히하여 구옥하고 뼈를 가리우고 살을 묻어 빨리 천견에 답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병진에 크게 우제(기우제)하였다. 인왕도장을 문덕전에 설하고 기우하였다. 주전도감이 주하기를「국인이 비로소 용전의 이를 알아 편하다 하오니 청컨대 종묘에 고하옵소서」라고 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무오에 여진 전공 고사모 등 육인이 내투하거늘 밭과 짐을 주어 편호에 채워 넣었다. 경신에 평로진 관내의 추자전을 분할하여 농민에게 주어 경작케 하였다. 오월 임오에 비를 빌새 부채를 금하고 저자를 옮겼다. 갑신에 임의와 백가신이 송에서 돌아옴에 송제가「신의보구방」을 사하였다. 왕이 선정전에서 수조하였다. 제히기를「금추에 역부 육천오백인으로 홍호사를 수영하라」고 하였다. 육월 신묘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왕하 오연총이 송에서 돌아오는데 송제가 왕에게 대평어현 일천권을 사하였다. 기해에 임의로 어사대부를 삼고 윤관으로 추밀원지주사를 삼았다. 경자에 임간으로 판상서형부사를 삼고 위계정으로 판한임원사를 삼고 오수증으로 판삼사사를 삼고 왕하로 추밀원좌승선을 삼고 조규로 우부승선을 삼았다. 신축에 정주장 금남이 관고의 질(#:38쪽)갑 필부를 도적하여 동여진에게 팔아먹었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복주하였다. 갑진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조하여 양경 군졸이 불급한 역사를 면제케 하였다. 내부(궁중의 부고)의 문서를 나누어 추밀원에 장치하였다. 무오에 대부경 금한충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어사중승 고령신으로 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추 칠월 신유에 제하여 역부 일천구백인으로 국청사를 수영케 하였다. 기묘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팔월 계사에 조하기를「원효와 의상은 동방의 성인인데 비기와 익호가 없어 그 덕이 들어나지 않는지라 짐이 이를 심히 애석하게 여기노니 원효에게는 대성화정국사를 의상에게는 대성원교국사를 증하고 유사는 그 거주하던 것에 나아가 비석을 세워 덕을 기록하여 영원히 전케 하라」고 하였다. 을사에 조하기를 「짐이 신기를 통어함으로부터 항상 조심하여 북으로 대요와 사귀며 남으로 대송을 섬기는데 또 여진이 있어 동에서 강성하니 군국의 급무는 백성을 편안케 하는데 있나니 마땅해 불급의 역사를 파하여 이 백성을 평안케 하라」고 하였다. 도병마사가 주하기를「지금 요의 동경병마도부서가 글을 보내어 정주관내의 군영을 파하도록 청합니다 앞서 대안(요 도종의 연호)연간에 있어 요가 압록강에 정자와 교(#:39쪽)장(무역장소)을 두고자 하므로 아조가 사자를 보내어 파하기를 청하였던 바 요제가 이를 청허하였으니 금반에는 (우리가) 또한 마땅히 그 청을 청종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구월 임술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무인에 동지추밀원사 곽상과 상서좌승 허경을 요에 보내어 즉위를 축하하였다. 서여진 고시모가 내투하거늘 밭과 집을 주었다. 갑신에 총지사에 행차하여 동복형제인 승 후의 병을 위문하였다. 인왕경도장을 회경전과 구정 및 외산의 제사에 설하고 승 삼만을 공양(반)하였다. 이달에 남경개창도감을 두고 문하시랑평장사 최사추와 어사대부 임의와 지주사 윤관과 소부감으로 치사한 문상과 춘관정 음덕전과 추관정 최자호에게 명하여 (남경지세를) 상보게 하였다. 추 십월 임진에 어사대가 주하기를 「경기의 포적군사가 임의로 민호에 노략질하여 해됨이 (도적보다) 도리어 심하오니 청컨대 이를 파하소서 라고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을미에 모나(탐나)의 신성주 배융부위 구대로 유계장군을 삼았다. 최사추 등이 돌아와 주하기를「신 등이 노원역 해촌 용산 등처에 나아가 산수를 살펴보매 건도에 불합하되 오직 삼각산면옥의 남쪽은 산형과 수세가 고문(구지리설)에 부합하오니 청컨대 주간의 중심되는 대맥에 임좌병향으로 형세를 따라 건도하옵소서」라고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병신에 비로소 남경을 창건하므로써 종묘 사직 산천에 고하였다. 십이월 무진에 나준으로 좌우위상장군 섭형부상서를 삼고 최정으로 김오위상장군 공부상서를 삼았다. 신미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송상 탐나 동북번추장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십이월 병오에 요가 고주관내관찰사 고덕신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위계정으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주국을 삼고 이오로 참지정사주국을 삼고 오수증으로 상서좌복사 겸태자빈객을 삼고 유신으로 예부상서 동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를 삼고 김경용으로 병부상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한영으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최홍사로 이부상서를 삼고 백가신으로 병부시랑좌간의대부를 삼고 고령신으로 형부시랑우간의대부를 삼고 강증으로 고공랑중 어사잡단을 삼고 노충근으로 시어사를 삼고 김지화로 우보궐을 삼고 김준과 장기로 좌우습유를 삼았다. 기유에 요가 숭록경 오전을 보내와 도종이 남긴 의대 필단 등물을 전치하였다.
임오 칠년 춘 정월 신미에 좌산기상시 유록숭으로 지서북면병마사를 삼고 소부감 이계응으로 지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이월 병진에 태자에게 명하여 삼계의 백신을 구정에서 초제케 하였다. 정유에 서여진 고사 등 십팔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정미에 서여진 아호라 등 십오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술에 동여진 안단분 나노 등 십팔인이 내조하였다. 을묘에 평장사 김선석이 삼차에 걸쳐 표문을 올려 노퇴함을 청하거늘 이를 청허하였다. 삼월 정사에 신중원에 행차하여 재를 설하였다. 경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신유에 이오로 판상서호부사를 삼고 곽상으로 좌복사 참지정사 겸서경유수사를 삼았다. 을해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려 할새 때마침 비가 오는지라 간관이 간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다. 정축에 경미한 죄수를 석방하였다. 윤관과 이굉에게 명하여 진사를 순천관에서 시험하고 전전부승지 양신영을 보내어 송조의 세필 일천이백관을 진사에게 사하였다. 기묘에 어사대가 주하기를「사문진사 이제노는 맹승 법종의 자이니 과거에 응함이 합당치 못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르기를「공자가 중궁에게 일러 말하되 이오의 새끼라도 모색이 붉고 또 뿔이 바르면 비록 제물로 쓰지 않으랴한들 산천의 신이야 어찌 이를 버리리오」라고 하였다 과목은 그것으로써 현자를 구하는 것이니 제노가 진실로 재학이 있을진대 어찌 부의 녹고로써 폐기하리요 하여금 과거에 응케 하여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경진에 불정도장을 문덕전에서 설하였다. 중서문하가 주하기를「새로이 남경을 건조하매 땅을 잼(도)이 반드시 넓어져 많이 민전을 빼앗게 될 것이오니 청컨대 경위령의 소설에 의거하여 산을 의하여 세를 취하고 혹은 물을 따라 형을 표하되 먼저 안에서 산수의 형세를 따라 동으로 대봉에 이르고 남으로 사리에 이르며 서로 기봉에 이르고 북으로 면악에 이르기까지 경계를 삼으소서」라고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정종비 연흥궁주 김씨가 졸하였다. 하 사월 정유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진사를 복시하고 태자 및 재신 추신 양제의 사신을 불러 주연을 베풀고「춘풍선미화」라고 시제를 선포하여 태자 및 사신으로 하여금 각각 육운시를 지어 올리게 하고 강척 등에게 급제를 사함과 아울러 투화한 송진사 장침을 불러 시험하고 별두급제를 사하였다. 갑진에 동여진추장 영가가 사자를 보내어 내조하였다. 영가는 즉 금의 목종이다. 오월 병인에 현화사에 행차하여 은으로 쓴 유가현양론을 경찬하였다. 정묘에 유록숭으로 추밀원사 겸태자빈객을 삼았다. 무진에 수사공 상서우복사 황중보가 졸하였다. 육월 을유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정해에 조하기를「송충이 태안 이년 병인에 비로소 서산에서 발생하여 백주와 토산에 연급하고 근래에 더욱 성하니 이는 반드시 형정이 잘못된 까닭이라 자나 깨나 근신하고 송구하여 군신과 더불어 허물을 끌어 자신을 꾸짖고 오월 계유로부터 을해에 이르기까지 하늘에 초제하여 고사하고 형을 너그럽게 하며 죄를 용서하므로써 천견에 상답코자 하노라 금일 이전의 내외의 공도사장 이하의 잡죄를 방면하노니 추밀원으로 하여금 시행케 하라」고 하였다. 무술에 송상 황주 등 오십이인이 왔다. 갑진에 직문하성 문익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대복경 김덕진으로 동북면병마사를 삼고 최저로 형부상서를 삼고 이계응으로 좌산기상시를 삼고 유재로 우간의대부를 삼았다. 병오에 선사일의 시연임으로 평장사임간 위계정과 참지정사 곽상에게 마 각 일필씩을 사하고 신급제 장침에게 장사랑 예빈주부동정을 제수하였다. 윤월 갑인 삭에 송상 서수 등 삼인이 왔다. 병자에 송상 주보 등 사십여인이 왔다. 추 칠월 신묘에 소재도장을 회경전에서 삼일간 설하였다. 경자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계묘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경술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임자에 예부가 주하기를「삼가 상서(서경)의 소를 상고하건대 왕자가 순수를 행하는 바는 제후들이 각기 자국을 스스로 전제하여 위복이 자신에 있으매 그가 왕명을 옹폐하여 혜택이 하민에 미치지 아니할까 두려워 하는 것임으로 왕이 친히 순수함은 백성을 위하여 폐해를 제거하려 함이오니 마땅히 서경유수 및 선배한 안찰사에게 명하여 먼저 민간의 질고를 찾아 (공과부담을)면제하여 무휼하고 또 전에 내린 사은이 아직 다 봉행되지 아니한 것은 유사에게 부쳐 시행케 하옵소서」라고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팔월 계축 삭에 행재의 신요들이 표문을 받들어 삭일을 축하하였다. 정사에 대동강에 이르러 용선에 타고 태자와 호종신요 및 서경의 문무량반을 향연하며 수희와 잡지를 관람하고 저녁 때에 이르러 파하여 장락전에 입어하였다. 무오에 태조의 영전에 배알하였다. 경신에 미화정에서 소연을 베풀고 정액을 고쳐「유미」라 하고 친히 시 일절을 지어 양경의 유신에게 명하여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계해에 집상전에 이어하여 직사 관 홍관에게 명하여 전문의 액을 쓰게 하였다. 갑자에 흥복 영명 양사에 행차하여 분향을 행하고 드디어 구제궁에 거동하여 영명사 부벽루 구제궁의 시를 각 일수씩 유제하고 양경의 유신에게 명하여 화답하여 올리게 하고 드디어 용선에 거동하여 군신을 향연하였다. 경신에 왕이 제연의 언덕에 이르러 헤엄 잘 치는 금군 오인에게 명하여 옛 사다리(제) 터의 돌(구제궁기)를 찾게 하니 오인이 주하기를「땅과의 거이 십척되는 곳에 옛 사다리 터의 돌(석)이 있읍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홍복사에 행차하여 금향을 행하고 절 남쪽 강안에 거동하여 사예를 사열하고 인하여 명하여 술을 베푸니 태자 및 신요들이 시연하였다 친히 추일유호경남하개연시 사운을 지어 선시하니 양경 유신이 화답해 올리었다. 저녁 때(포)에 이르러 환궁하였다. 을해에 중흥사에 행차하였다. 정축에 새로히 신호사를 수리하였다. 무인에 서경유수관 참지정사 곽상 등이 왕을 장락전에서 향연할새 양경군신이 시연하였다. 구월 병술에 왕이 인예태후의 기진도장으로 장경사에 행차하여 분향을 행하였다. 무자에 관풍전에 행차하였다가 회복루에 환어하여 견#(46쪽)관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하였다. 갑오에 제하기를「짐이 오랫동안 지방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이번 서경에 왔으니 형을 너그럽게 하고 죄를 용코자 하는 바 어하가 출동한 이래로부터 수행한 선배사 및 당지 서경유수의 상주한 바 경죄를 범한 자는 모두 방면케 하라」고 하였다. 정유에 흥복사의 십왕당이 낙성되었거늘 태자에게 명하여 분향을 행하게 하고 무술에 왕이 후비 태자 제왕으로 더불어 이 절에 행차하여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신축에 금강사에 행차하여 중들을 공양(반)하고 드디어 구복루에 거동하여 사예를 사열하였다. 송상 임백순 등 이십인이 왔다. 을사에 사예를 사열하였다. 병오에 장경사에 행차하여 기사를 사열하였다. 부유수 최공후 등에게 명하여 유수의 창고내에 있는 서적을 검토하여 올리게 하였다. 기유에 신호사에 행차하여 대장회를 베풀어 낙성식을 행할새 대궐의 뜰에서 절에 이르기까지 도로의 양측에 점등한 것이 수만이었다. 경술에 또 이 절에 행차하여 분향을 행하였다. 추 십월 정사에 흥복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영풍문에 거동하여 백관의 하예를 받고 드디어 흥국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장락전에 거동하여 양경의 문무현관과 신료들을 향연하고 폐물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임신에 안자공을 요에 보내어 천흥절(요제생신)을 축하하였다. 갑술에 어하가 서경을 출발하였다. 경진에 왕이 북숭산 신호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설하였다. 십(일의 자가 탈락)월 임오 삭에 왕이 우타천에 이르렀을 때 들에 범이 있어 갑자기 뛰어 나오는지라 시봉하는 군사에게 명하여 이를 쫓게하니 견#(47쪽)교위 송종소가 이를 쳐 죽이거늘 종소에게 의 일습을 사하였다. 정해에 임패역에 이르러 덕음(임금의 말씀)을 내려 지난 바 명산 대천의 신지에게 덕호를 가하고 연도 주 현의 관리에게 경죄를 용서하고 (무죄한 관리에게는)직 일급씩을 가하고 제사의 장고와 제위의 기두에게는 초직을 사하였다. 왕이 경도에 돌아왔다. 계사에 동여진 상곤 등 삼십인이 와서 말(마)을 바쳤다. 갑오에 양신부를 요에 보내어 생신 하하였음을 사하였다. 을미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곽준목을 요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갑진에 윤관으로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김택선을 요에 보내어 신정을 축하하였다. 정미에 동여진 영가가 사자를 보내어 은기 만드는 공장을 청하거늘 이를 허하였다. 십이월 임자에 요가 횡선사 귀주관내관찰사 소가를 보내오고 계축에 또 중서사인 맹초를 보내와서 생신을 축하하였다. 무진에 대묘에서 기설하였다. 신미에 유신으로 이부상서를 삼고 윤관으로 어사대부를 삼고 최홍사로 상서우복사 겸삼사사를 삼고 임의로 예부상서 겸사관수찬을 삼았다. 임신에 동여진추장 고나골 등 삼십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을해에 적홍이 관일하였다. 경진에 임간으로 판서북면병마사 겸중군병마사를 삼고 오수증으로 판동북면 병마사 겸행영병마사를 삼고 유신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았다.

계미 8년 춘 정월 계미에 왕원으로 검교사도 수사공 상주국을 삼았다.  기축에 동여진 고라골 등 30인이 내조하였다.  신묘에 서여진 망간 등 24인이 내조하였다.  2월 병진에 동여진 장군 두문소 등 30인이 토물을 바쳤다.  동여진 장군 고대노 등 30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기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신유에 소태보로 수태전 판호부 서경류수사를 삼고 최사추로 수태위 판리부사를 삼고 임간으로 수사도 판병부사를 삼고 위계정으로 수사도 판례부사를 삼고 이오로 검교사도 수사공 판형부사를 삼고 오수증으로 참지정사를 삼고 김경용으로 지추밀원사 삼았다.  임술에 곽상으로 수사공을 삼아 인해 치사케 하였다.  기사에 송 명주 교련사 장종민 허종 등이 강수 양소 등 38인으로 더불어 내조하였다.  동여진 두문회팔 등 90인이 내조하였다.  을해에 오수증으로 수사공을 삼고 유신으로 검교사공을 삼고 경록숭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윤관으로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왕하로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3월 기축에 직사관 홍관에게 명하여 무일편을 회경전의 병풍에 쓰게 하였다.  하 4월 정사에 적홍이 해를 범하였다.  경신에 우박이 내렸다.  5월 신사에 김한충으로 예부상서를 삼고 임의로 병부상서를 삼고 김경용으로 호부상서를 삼았다.  6월 을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임자에 송이 국신사 호부시랑 유규와 급사중 오식을 보내와서 왕에게 의대 필단 금옥기 궁시 안마 등물을 사하거늘 갑인에 왕이 조서를 회경전에 맞이하니 조에 이르기를 [경은 대대로 왕봉을 소승하고 땅은 동방의 강역을 나누어 받았도다.  상주하는 서함이 자주 도달하니 항상 제궐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었고 공비가 거듭 풍성하매 멀리 제정에 진열하는 공물을 올렸도다(여정지실).  이에 그 양절을 가상히 여겨 특히 융숭한 은혜를 베풀고자 시종의 근신을 가려서 특별한 반사를 가져가게 하노라.  일은 비록 구례를 인용하였으나 예는 이 상례에 배됨이니 마땅히 권우하는 사정을 받아 더욱 충근의 보답에 힘 쓸 지어다.]고 하였고 아울러 의관 모개의 여병 진이유 범지재 등 4인을 다 보내오니 표청했던 바를 청종한 것이다.  병인에 요가 보책사 변당영을 보내오니 조에 이르기를 [짐이 팔성의 큰 경사와 천년의 큰 조명을 이어받아 길이 통어할 것을 생각하매 감히 편안할 수가 없노라.  그런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하늘이 주 이 땅(요)은 모두 태평을 이루었도다.  돌아보건대 여러 왕후들이 소장을 받들어 (짐의) 공열을 잇달아 진술하고 아름다운 칭호로써 덕이 적은 나를 추숭하기를 청원함으로 굳이 사양할 겨를이 없어 그 근실한 성의에 마지못해 따르기로 하고 이미 금년 겨울에 책예를 행하기로 결정하였노라.  경은 경사스러히 후번을 누려 충성으로 왕실을 도왔으니 이 성예 닦음을 들으면 진실로 많은 기쁨을 가지리라.]고 하였다.  정묘에 이오로 서경유수사를 삼고 오수증으로 판상서호부사를 삼고 유신으로 좌복사 정당문학을 삼고 최홍사로 추밀원사 겸태자빈객을 삼고 윤관으로 지추밀원사 겸한림학사승지를 삼고 최저로 호부상서를 삼고 이계응으로 좌산기상시를 삼고 문익으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추 7월 신묘에 송 국신사 유규 등이 돌아가는데 왕이 표문을 부쳐 회사하고 겸하여 개명하였음을 고하였다.  송 의관 모개 등이 흥성궁에 거처하면서 의생들을 교훈하였다.  을미에 동여진추장 곤두가 사람을 보내어 황모 1만조를 바쳤다.  정유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갑진에 동여진 태사 영가가 사자를 보내어 내조하였다.  본국(고려)의 의자로 (동여진의) 완안부에 거주하는 자가 있어 병을 자 치료하는지라 그 때 영가의 척속이 병이 있으매 영가가 의자에게 말하기를 [너가 능히 이 사람의 병을 고치면 내가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너를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리라.]고 하였더니 그 사람이 과연 나았는지라 영가가 약동과 같이 사람을 시켜 국경위에까지 보내어 이르렀다.  의자가 와서 왕에게 아뢰기를 [흑수에 살고 있는 여진은 부족이 날로 강성하고 병사가 더욱 정용합니다.]라고 하거늘 왕이 이에 비로소 사자를 통하여 이로 부터 왕래가 막히지 아니하였다.  영가가 이미 소해리를 격파하고 전승을 우리에게 보고하거늘 우리도 또한 사람을 보내어 이를 축하하였다.  영가가 그 족제 사갈을 보내어 보빙하매 왕이 이를 심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8월 경술에 헌관이 형서(형법의 조문)를 주평하였다.  대장군 고문개 장홍점 이궁제와 장군 이자진 등이 가만히 역모를 품거늘 경신에 어사대에 명하여 이들을 잡아 남방변지에 유배하였다.  9월 경진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을미에 내시 및 시종문신을 중광전에 불러 시제를 명하여 시를 짓게 하고 술을 주었다.  임인에 이계응과 박경작을 요에 보내어 존호를 가상한 것을 축하하였다.  을사에 최사추로 문하시중을 삼고 임간으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이오로 중서시랑평장사를 삼았다.  병오에 승 1만을 공양하였다.  동 10월 정미 삭에 제하여 벽상공신의 직호를 고쳐 기록하게 하였다.  갑인에 최홍사로 서북면병마사 겸랑중군병마사를 삼았다.  병진에 송제의 천녕절이므로 태자에게 명하여 제를 봉은사에 설하였는데 의관 모개(송인) 등이 와서 참관하거늘 모개 등에게 주와 폐백를 사하였다.  경신에 요의 동경회예사 예빈부사 고유옥 등이 왔다.  송림을 요에 보내어 천흥절을 축하하였다.  경오에 조하여 무등산의 처사 은원충을 징소하였다.  임신에 동지에 행차하여 궁사를 사열하고 정곡을 마친 자에게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갑술에 김국진을 요에 보내어 횡선을 사하였다.  11월 을유에 최계방을 요에 보내어 생신 하함을 사하였다.  기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경성에 지진하였다.  병신에 동여진 대사 영가가 고주 율부 아노 등을 보내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유에 조경을 요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침후는 신정을 축하하였다.  12월무신에 요가 오흥경을 보내와서 생신을 축하하였다.  무오에 경성에 지진하였다.  임신에 북향장군 종곤 아노 등 4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신 9년 춘 정월 신사에 동여진 남녀 1천7백53인이 내투하였다.  동여진추장 조아속이 별부 부내노와 틈이 생겨 공형 지조를 보내어 군사를 발하여 이를 칠제 기병이 와서 정주관외에 주둔하는지라 계미에 왕이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으로 판동북면행영병마사를 삼아 선정전에 거동하여 부월을 주어 가서 이에 대비케 하였으며 또 직문하생 이위로 서북면행영병마사를 삼고 위위경 김덕진으로 동북면행영병마사를 삼았다.  무자에 서여진 종곤 등 3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2월 무신에 송 의관 모개 등이 돌아갔다.  임자에 임간이 여진으로 더불어 정주성밖에서 싸워 패북하니 유사가 임간 및 병마사 좌복사 황유현과 부사 대장군 송충과 호부시랑 왕공윤과 좌승선 조규의 패북한 죄를 탄핵하여 아뢰니 파면시켰다.  을묘에 서여진 거라불 마포 등 4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추밀원사 윤관으로 동북면행영병마부통을 삼고 중광전에 거동하여 부월을 주어 보내었다.  3월 병자에 이오로 수사공 상서우복사를삼았다.  정축에 윤관이 여진과 싸워 30여 수급을 베니 아군의 사상 함몰된 자도 반이 넘었다.  기묘에 인왕도장을 회경전에 설하고 승 1만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경진에 전주목사 오연총을 불러 추밀원좌승선 지어사대사를 삼았다.  태자에게 명하여 진사를 건덕전에서 복시하고 갑신에 송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병술에 유 와 문관으로 좌우간의대부를 삼았다.  기축에 불정도장을 문덕전에서 설하였다.  하 4월 갑자에 요가 야율가모와 하자목을 보내와서 왕을 책하니 조에 이르기를 [짐이 존호를 추천받고 유제도 이룩되었으므로 제후를 조근하여 의례를 베풀고 많은 나라들이 경사를 같이 하였도다.  경은 백모로 사를 쌓고 현토에 강토를 열어 여산에 수국의 공을 새기고 항해에 내정의 관을 바쳤도다.  마침 풍성한 은택을 균첨시키매 이에 (경을) 증봉키로 의정하였으니 마땅히 지극한 은혜를 체득하여 길이 (짐의) 깊은 권고에 부합토록 할지어다.  이제 안원군절도사 야율가모 등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 그곳에 가서 책명하노니 그 간책 차로와 아울러 의대 필단 안마 궁전 제물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주노라.]고 하였고 책문에 이르기를 [헌원(황제)이 제후를 세워 비로소 만국을 나누고 한(고조)이 손성공신을 봉하여 비로소 팔왕을 세웠도다.  짐이 조선의 유모에 정성껏 따라 왕통을 이어 높였더니 근자에 중망을 따라 하는 수 없이 큰 이름을 받았도다.  정삭을 같이 하는 곳에 있어서는 혜택을 넓히어 이미 미치게 하였다.  일역(동방 즉 고려)을 권고할 때 천조를 경건하게 받들어  봉강은 칠웅보다 넓고 공열은 오패보다 높았도다.  마땅히 경사를 같이하고자 특히 봉책 나누기를 의논하고 거듭 양진을 택하여 크게 휴명(미명)을 펴노라.  아아 그대 특진검교태위 겸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색 7천호 왕옹은 일찌기 간기를 받아 나면서부터  지의 정기를 품수하였고 문무의 장재를 갖추어 군신의 대체를 알았도다.  십지의 약목은 삼삼하여 해를 받드는 표적이 높이 솟았고 구곡의 홍하는 호호하여 조종의 세를 여기에 (우리) 도종조 이래로 경사롭게 왕번을 승습하여 더욱 표해의 충근을 공손히하여 여산의 맹서를 상실함이 없었도다.  일국이 치평한지 간금 7연이라 마침 모절 의례를 이룩하매 마땅히 요소의 은택을 입히리다.  이러므로 정사 안원군절도사 야율가모와 부사 이주관내관찰사 하자목 등을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충근봉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겸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7천호 식실봉 7백호를 삼노라.  아아 (짐이 베푸는) 은혜가 구석에 융숭하니 그대에게는 이미 영봉이 넓었고 공업은 일광 성하니 마땅히 그대는 더욱 협보에 근실할 것이다.  이 큰 훈계를 힘써 복응하여 길이 복을 누릴지어다.]라고 하였다.  왕이 교단에서 책을 받으니 군신이 표로서 축하하였다.  경오에 야율사전 장직이 와서 태자를 책봉하거늘 왕이 태자로 더불어 남교에 행차하여 왕이 먼저 조서를 받았다.  조에 이르기를 [짐이 왕통을 이어 열어 널리 다방(만국)을 어거하매 굽혀 군정에 순응하여 마지못해 현호를 응수하였으니 안으로는 백관의 대소가 모두 넉넉한 은혜를 입었고 밖으로는 구복의 공후에게 다 후한 명위를 가하였다.  경은 조선의 터전을 이어받고 황조를 높여 도왔으니 이 누대의 충근을 가상히 여겨 그 대의 가계를 이을 적자를 총애하여 특히 초어(사신)을 보내어 가서 책봉의 의례를 행케 하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유시하여 써 특별한 권애를 밝히노라.  이제 야율사전 등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 그곳에 가 경의 장자를 삼한국공으로 책명하노라.]고 하였다.  태자가 단에 올라 책을 받으니 조에 이르기를 [짐이 크게 준명을 받고 경건히 큰 유모를 이었도다.  보책을 받음으로서 의례를 베풀어 번방과 더불어 경사를 나누노라.  경은 가문의 적덕을 이룩하고 나라의 분봉을 체득하여 도와서 (황조를) 존장하는 노고를 이룩하고 깊이 (제실에) 충근하는 힘을 다 하였도다.  마침 우악한 은혜를 넓히매 거듭 이장을 밝히노라.  마땅히 나의 지극한 정회에 맞추어 써 특수한 권총을 밝히노라.  이제 태주관내관찰사 야율사전 등을 보내 예를 갖추어 그곳에 가 책명하노니 그 간책과 차로와 아울어 따로히 주는 의대 필단 안마 궁전 제물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주노라.]고 하였고 책에 이르기를 [짐이 천지의 영복을 부하하고 조종의 큰 터전에 앉아 마지못해 군청을 받아들여 바야흐로 존호를 듣고자 하매 서방으로 더불어 이 큰 경사를 두루 같이 하려고 생각하노라.  그런데 동방의 해표를 돌아보건대 황조를 협보하였도다.  누대의 선노한데 대해서는 영예로움을 왕작으로 나누었고 (그대) 일방의 술직에 황제의 유모를 정성껏 복응하였도다.  이에 (그대) 적자의 현량함을 생각하매 일찍 상공의 귀에 거함직하도다.  (그러므로) 전성의 교훈을 상고하여 정상의 의례를 펴서 밝히노라 아아 너 순의군절도 삭무등 주관찰처치등사 숭록대부 검교태전 동중서문하평장사 사지절삭주제군사 행삭주자사 상주국 삼한국공 식읍 3천호 식실봉 5백호 왕 우는 도량이 깊고 넓으며 풍도와 유모가 화하고 순수하도다.  어려서 정덕에 밝았으매 효경을 근본삼아 군친을 받들었고 일찌기 좋은 뜻을 품었으매 문무의 권을 잡아 군국을 도왔도다.  가범을 잘 계승하므로 말미암아 경사롭게 국봉을 승습케 하리라.  모단의 절제권을 잡고 괴부의 평장의 임을 같이 하였도다.  마침 조회의 위차(속절)로서 예의를 높이매 마따히 은택을 펴(급소) 은혜를 입히리라.  그러므로 정사 태주관내관찰사 야율사전와 부사 홍려경 장직 등을 보내어 절부를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순의군절도 삭무등주관찰처치등사 특진검교태위 겸시중 사지절삭주제군사 행삭주자사 상주국 삼한국공 식읍 3천호 식실봉 5백호를 삼노라.  아아 누죽니금(죽간에 새기고 금가루로 쓴 서첩)은 권고를 우흡하게 더함을 표함이오 약대여려(황하가 띠와같이 되고 태산이 숫돌과 같이 되로록 변함이 없는 맹서)는 마땅히 함께 안영을 보재할 것이니 그대는 그 충순함으로써 몸을 가시고 자화함으로써 대중을 무안하여 짐의 가명에 부응하도록하라.  오직 힘쓸지어다.]라고 하였다.  5월 을유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소태보로 수태사를 삼았다.  갑오에 우박이 내렸다.  남경의 궁궐이 이룩되었다.  6월 계묘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진에 오연총으로 상서좌승 한림시강학사를 삼고 허경으로 급사중 추밀원우부승선을 삼았다.  갑인에 동북면병마도통이 주하기를 [여진이 스스로 장 (국경의 성책)를 헐고 공형 지조 등 68인이 관문을 뚜드리며 화친하기를 비나이다.]고 하였다.  추 7월 신사에 좌복사 정당문학 유신이 졸하였다.  신묘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이오로 중서시랑평장사 판삼사사 태자소보를 삼고 윤관으로 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 겸태자빈객을 삼았다.  추밀원사 최홍사와 비서감 정문을 송에 보내어 사은하고 방물을 바쳤다.  무술에 남경에 행차할새 평장사 이오 참지정사 오수증 권지추밀원부사 오연총 판어사대사 임의 등이 호종하였다.  신축에 왕가가 봉성현(파주)에 머물을제 관전를 내어 군신들과 군사들에게 차등있게 주었다.  8월 을사에 촌부들과 야노들이 과과를 길에서 다투어 올리거늘 각각 포백을 사하고 또 내부(내고)의 다향과 의친을 내어 노방의 불사에 시주하였다.  병오에 왕가가 상자원에 머물을제 시어사 최위를 보내어 어의와 다향을 가지고 삼각산 승가굴에서 비를 빌게 하였다.  신해에 왕가가 남경에 이르니 모든 일이 일관(점후, 복서를 맡은자)의 아뢴 바에 의함이라 예제에 부합되지 아니하였으나 유사가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임자에 왕이 내중으로 더불어 누대 정자와 원유에 유람하였다.  갑인에 연흥전에 거동하여 중외백관의 조하를 받았다.  을묘에 반약도장을 연흥전에서 3일간 설하였다.  정사에 송 도강 주송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미에 군신을 연흥전에서 향연하고 폐물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신유에 최홍사로 참지정사를 삼고 임의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오연총으로 추밀원부사 한림학사를 삼고 육조로 상서우복사를 삼았다.  계해에 차가가 남경을 출발하여 내중으로 더불어 승가굴에 행차하여 재를 설하고 친의를 시납하였다.  9월 신미 삭에 산예역에 머물렀다가 갑술에 드디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을해에 덕음(임금의 말씀)을 반포하고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기묘에 왕이 중구(음력 9월 9일 즉 중양)시를 지어 유신에게 명하여 화답해 올리게 하였다.  동 10월 신해에 왕이 환궁하였다.  경오에 요의 동경대왕 야율순이 사자를 보내와 빙문하였다.  지총연을 요에 보내어 천흥절(요제의 탄일)을 하하고 문관은 봉책을 하한 것을 사하고 최선은 생신을 하한 것을 사하고 김한공은 (공물을) 진봉하고 최덕개는 신정을 축하하였다.  11월 계유에 종묘와 사직에 눈 오기를 빌었다.  갑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중서시랑평장사로 치사한 김선석이 졸하니 왕이 조제하고 시호를 충간이라 사하였다.  선석은 청렴하고 강의하며 사재가 있어 산업을 일삼지 아니하였으나 그러나 나이 바야흐로 사직할 때가 되었는데도 오히려 미련을 품고 용퇴하지 아니하니 그때 사람들이 이를 기롱(기)하였다.  이 달에 밀진사 김고를 요에 보냈다.  12월 임인에 위계정으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삼고 최사추로 수태보를 삼고 이오로 태자소보를 삼고 왕 로 삼사사를 삼고 이계응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최공익으로 섭공부상서를 삼았다.  병진에 요가 마직온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을유 10년 춘 정월 계축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태자에게 명하여 삼계의 영기를 구정에서 초제케 하였다.  윤월 정축에 중서시랑평장사 오수증이 치사하였다.  이위로 비서감 지상서리부사를 삼고 문관으로 소부감 지어사대사 겸태자좌서자를 삼고 허경으로 이부시랑 추밀원좌승선을 삼았다.  3월 계묘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여 인예태후가 발원하여 이룩한 금탑을 안치하였다.  갑진에 조린충으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한영으로 형부상서를 삼았다.  하 4월 기사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임오에 대내 법운사에 행차하여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6월 정묘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술에 위계정으로 태자태전을 삼고 최홍사로 검교태위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겸태자태보 판상서예부사 수국사를 삼고 윤관으로 태자소보 판상서병부 한림원사를 삼고 이오로 수사도 태자소사 겸서경류수사를 삼고 정문으로 형부상서 정당문학 겸태자빈객을 삼고 임의로 추밀원사 이부상서를 삼고 왕 로 지추밀원사 병부상서를 삼고 오연총으로 동지추밀원사 비서감 한림학사승지를 삼고 김경용으로 판상서공부사를 삼고 이위로 어사대부를 삼았다.  추 7월 을묘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8월 정묘에 구산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불정도장을 문덕전에서 설하였다.  을해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임오에 태조의 진영을 감진전에서 배알하고 드디어 오성전에 배알하고 인하여 장악전에 거동하여 백관의 조하를 받았다.  을유에 제하여 합주수 고민익이 백성을 침탈하므로 옥에 내려 신문토록하였다.  무자에 홍복사에 행차하여 재를 설하고 드디어 남안의 장전에 거동하여 술을 갖추고 태자 및 재신 추신과 양경 문무대신이 시연할새 왕이 시 4운를 지어 선시하였다.  기축에 사를 창화문에서 사열하고 경인에 또한 이와같이 하였는데 태자가 과녁(적)을 맞히니 군신들이 다 하례하였다.  계사에 경계(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9월 무술에 인예태후의 휘진도장으로 장경사에 행차하였다.  계묘에 요의 상구가 내투하였다.  임자에 영작원문에 거동하여 무사의 사어를 사열하였다.  병진에 왕이 불예(병환)하여 정사에 서경을 출발하였다.  동 10월 을축에 왕의 병이 위독하여 김교역에 모무르고 병인 야반에 김교를 출발하여 장평문밖에 이르러 연중에서 붕어하니 밤이 밝을 무렵 서화문에 도착하여 발상할새 태자와 군신들이 울고 몸부림치며 (영구를) 받들어 영영전에 들갔다가 즉일에 선덕전으로 옮겨 빈소를 정하였다.  유조에 이르기를 [짐이 박덕으로써 대업 사수하여 길이 만사의 통리를 생각하고 1일도 평안할 겨를이 없이 몸소 서정을 총람하여 소간에 이른지 10여년이 되었도다.  중외의 신민들과 함께 인수의 경성에 오르기를 원하였더니 우로로 병을 이루어 드디어 중태에 이르렀음을 어찌하리오.  천명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수명) 장단의 분한에 맡기려니와 방기는 지극히 중한 것이니 감히 고속하는 말을 잊을 수 없을쏘냐.  왕태자의 인의하고 효우함은 생지(생이지지)에 근원하고 온자하고 혜화함은 민망에 부합함이니 마땅히 구전에서 곧 즉위토록 하고 무릇 군국의 대사는 일절 사군의 처분을 품수할 것이며 방진(지방의 진수) 주목은 다만 임지에서 거애하여 함부로 치소를 떠나지 말게 하고 상복의 제도는 일수로써 월수에 대신케 하고 산릉의 제도는 힘써 검약에 따르게 하라.  아아 시종의 시기를 깨닳으면 가는 자는 이로써 유감이 없을 것이요.  장구의 계책을 강구 하면 남아 있는 자는 가히 생을 해하지 아니하리니 더욱 믿노니 고굉대신(수족과 같은 보좌의 대신)과 백벽(백관) 경사(경대부사)들은 함께 충력을 바쳐 왕실을 도와서 우리 국조로 하여금 무궁하게 이어 나가도록 한다면 짐은 비록 눈을 감을지라도 마음은 만족할 것이니 국내에 포고하여 짐의 소회를 밝게 알릴지어다.]라고 하였다.  왕의 수는 52요 재위하기 10년이며 시호를 명효라 하고 묘호를 숙종이라 하며 송림현에 장사지내니 능을 영릉이라 하였다.  인종 18년에 시호를 문혜라 가하고 고종 40년에 강정이라 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