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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선종(宣宗,1083~1094 재위11년)
선종은 문종의 둘째아들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1049년 9월 경자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운(運), 자는계천(繼天)이다.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밝고 제술(製述)에 뛰어나 1056년 3월 국원후에 책봉된 이래 여러관직을 거쳐 상서령으로 있다가 1083년 7월 순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태사겸 중서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순종이 재위 3개월만에 죽자 고려 제 13대 왕에 올랐다. 선종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자라서는 효도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나 놀이에 절도가 없고, 사탑(寺塔)을 많이 세워 백성들이 과중한 노역에 대하여 원망이 많았다고 한다. 선종시대의 정치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매우 안정되었으며, 외교에서도 거란을 포함한 송, 일본, 여진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며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1084년(선종 1)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변경을 지키는 사졸들에게 저고리와 바지를 하사하였다. 1085년 왕의 아우 의천(義天)이 몰래 송나라에 들어가 2년 동안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오니 그 환영의식이 성대하였다. 의천은 불경과 경서 1,000권을 바쳤고,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으며, 송·요·일본 등지에서 서적을 사들이니 거의 4, 000여권에 달하였는데 모두 간행하게 하였다. 1089년 회경전(會慶殿)에 13층 금탑(金塔)을 세우고, 인예왕후(仁睿王后)의 청에 따라 천태종(天台宗)의 중심사찰인 국청사(國淸寺)를 짓게 하였다. |
선종 안성사효대왕의 휘는 운이요 자는 계천이며 고휘는 증 또는 기라고 하였다 문종의 제2자요 순종의 동복형제로 문종 3 년 9 월 경자에 탄생하였다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롭더니 자라매 효경하고 공검하며 지견과 도량이 홍원하고 경사를 박람하였으며 더욱이 제술에 능하였다 10년 3월에 책하여 국원후가 되고 누봉하여 상서령이 되었으며 작위가 올라 공이 되었다 37년 7월에 순종이 즉위하매 수태사 겸중서령을 가하고 10월 을미에 순종이 붕어하매 병신에 유조를 받들어 곤룡포와 면류관을 착복하고 선정전에서 즉위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정유에 금강명경도장을 건덕전에서 설하였다. 무술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상복을 입고 선정전에 나아가 제례를 행하였다. 예가 끝나자 백관이 서쪽으로 나아가(예서) 합문에 올라 봉위하고 또 자수전에 진위 하였다. 11월 경신에 친히 임하여 빈전을 열고(계빈) 곡하되 애를 다하고 성릉에 장사지냈다. 정유에 한림원이 주하기를「무릇 내외의 주 부 군 현 사원과 공사문관의 (명)호 및 신료이하의 이름이 어휘를 범하였거니 음이 같은 것은 청컨대 이를 고치게 하옵소서」하니 제하여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무진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사하고 문무관에게 일급씩을 가하였다. 이 달에 시어사 이자인을 요에 보내어 상을 고하였다. 12월 임신에 화엄경도장을 건덕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정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신봉루 앞 장전에 거동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고 드디어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전월에는 국휼(국상)을 만났으므로 이에 이르러서야 이를 행하였다. 정축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시조하고 선덕전에 퇴어하였는데 문하시랑 평장사 이정공과 중서시랑 평장사 김량감과 참지정사 왕석 유홍이 시정의 득실을 진하였다.
갑자 원년 춘 정월 신축 삭에 조하를 쉬었다. 기사에 보제사의 승 정쌍 등이 주하기를「구산문 참학하는 승도를 청컨대 진사의 예에 의하여 3년 한번씩 뽑도록 하옵소서」한대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3월 경자 삭에 동여진장군 분나노 등 20인이 와서 말을바쳤다. 하 4월에 요가 칙제사 익주관내관찰사 야율신과 위문사 광주관내관찰사 야율언 등을 보내 와 갑술에 문종을 제하여 가로되「오직 영은 천성이 예의의 단을 극하고 체는 중화의 정수를 함양하였다. 왕작의 귀한 자리에 올라 일찍이 청사의 봉을 이어받으니 목신(동방신)은 인자한지라 온전히 동방의 기를 받았도다 몸소 충성을 품어 힘써 행하고 직은 공의를 술하여 해마다 오도다 일광에 주를 이루니(일광치주) 조정은 그 공훈을 힘입었고 천리(방천리의 영토)의 번병이 되니 생민이 그 혜택을 받았다. 바야흐로 공수하고 공을 이루기를 바랐더니 어찌 상천이 남겨 주지 아니할 줄(불유)을 알았으랴 부음을 듣고 슬피 여겨 조회를 거두고 더욱 흐느껴 울었노라. 오호라 세음(세월)은 머물지 않고 인생은 길손(객)과 같도다 일천년의 시운을 만나 오십년간의 군신의 의를 맺아 오더니 벼란간 야학에 배를 감추매(거장야학지주) 동원의 그릇을 숨기(비)기 어렵도다 마땅히 빨리 초차로 윤음(초음)을 보내어 가서 전례를 펴는 것이니 영혼이여 앎이 있거던 이 지극한 뜻을 흠할지어다」고 하였다. 정축에 순종을 제하여 가로되「오직 영은 진상(성진)의 순정이요 악독의 수기로서 경사는 세국에 피었고(발) 재질은 왕신으로 되었도다 겨우 연소한 때로부터 이에 총가의 은명을 입고 일역을 무봉하여 천조에 술직하였도다 왕실을 익대하매 근왕의 정성을 다하였으며 바야흐로 비호를 벌려(개장) 치평을 이루었도다 번국 다운 공적이 성하였는데 벼란간에 부친의 상(척호지우)에 엉키게 되었도다 정을 어겨서라도 습작하게 할 것을 의론하고 사행에 명하여(초비)이미 떠나도록 하였는데 역부가 이에 왔음을 듣게 되었도다 다시 어진이의 죽음을 차탄하게 되니 더욱 놀라고 슬퍼하노라 어찌하여 주학이 그대로 있지 못하고 이에 사람과 거문고가 함께 망하였단(인금구망) 말인가 충도를 생각하고 풍구(풍변)를 상상하며 울면서 사행을 보내며 가서 전상을 베풀게 하노니 명신이여 앎이 있거던 나의 하의를 양찰하라」고 하였다. 5월 임술에 고민익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 임오에 동여진이 흥해군 모산진 농장을 침구하거늘 술졸이 이를 격패하고 5인을 사로잡았다. 무자에 일본국 축전주의 상객 신통 등이 수은 250근을 바쳤다. 을미에 왕자가 연화궁에서 탄생하였다. 추 8월 임신에 제하기「현종이 남쪽으로 행차하였을 때 문하시중 박성걸이 호종하여 공이 있었으니 삼한후벽상공신 양규 등의 녹권에 같이 등록하여 시행토록 하라」고 하였다. 갑신에 송이 제전사 좌간의대부 양경략과 부사인 예빈사 왕순봉과 조위사 우간의대부 전협과 부사 서상합문부사 송구 등을 보내 왔다 신묘에 제전사가 승도를 모아 도장을 문종혼전에서 삼주야간 설하고 임진에 또 순종혼당에 설하였다 계사에 문종을 제하니 축문에「오직 왕은 경릉을 이어 받아 후봉을 무유하니 민과 속을 교도하매 예의를 종으로 하였도다 조정에 뜻을 오로지하니 충성이 권권(권권)하고 백자의 책서(백명)로 공수를 닦으니 오래갈수록 더욱 공손하도다 중명(창해)만리에 일엽편주로 써 통하니 정성이 나타난(조) 곳에 풍도(풍파)도 순종하도다 이 중국은 사해가 다 회동하나니 공을 비교하고 덕을 추도함에 누가 왕보다 으뜸이 되리요 마땅히 오래 살아 동방에서 번병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더니 갑자기 이에 세상을 떠나매 슬픔이 어찌 다하리요 사신을 보내어 제전을 진설하여 써 나의 애충을 표하노라」고 하고 조하기를「부형의 상은 인륜의 큰 슬픔이요 부의를 증하는 예는 조정의 지극한 은전이라 공순하던 번국임을 상기할 제 마땅히 애영의 은전을 입게 할 것이다 특히 사신을 보내어 가서 전의를 이루어 써 권존함을 보이고 호모함을 위로 하노라」고 하였고 그 조위서에는「불의의 민흉으로 문득 부상을 당하고 다시 동기 마저 잇달아 윤망함을 들었도다 통독이 거듭 잇달으니 어떻게 견디고 있는가 내가 들으니 진실로 측은하고 슬프다 경은 부형의 뒤를 이어 본래부터 효우를 지녔도다 바라건대 잘 슬픔을 억제하여 짐의 권존에 잘 맞도록 하라 이제 사신을 보내어 조위하고 겸하여 경에게 조위물품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나니 이르거던 영납하라」고 하였다 갑오에 순종을 제하여 가로되「오직 왕은 자질이 무미하고 효우가 숙성하며 신의를 행하고 공순함을 생각하여 갸륵하게도 덕망과 성예를 누렸도다 분주히 상에 복하니 예의 떳떳함을 얻었고 일국을 무수하니 진실로 민정에 맞았도다 큰 복을 받아서 이러한 안영을 보전하고 병풍(병)이 되고 울정(정간)이 되어(위병위한) 조정을 익대하리라 하였더니 무엇이 불선하여서 벼란간 고질병에 걸렸단 말인가 오직 하늘의 보시는 만물에 맞추어 불형한 것이어늘 누구가 선을 쌓고도 요절하리라고 하였으리요 나의 사신을 신칙하여 행정을 서두르게 하고 변변치 않은 제물을 진설하여서 이 정성을 표하고자 하노라」고 하였다. 왕의 생일을 천원절이라 하였다. 9월 기해에 송사를 회경전에서 향연하고 임인에 또 향연하고 갑진에 송별연을 베풀고 표문을 부하여 사예하였다
을축 2년 춘 2월 정묘에 천제석도장을 문덕전에 설하였다. 신미에 김강경도장을 건덕전 7일간 설하였다. 계유에 요가 대안이라 개원하였음을 알려 왔으므로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대묘와 6 능에 고하게 하였다. 을해에 처음으로 가행할 때는 인왕반약경을 받들고 전도하게 하니 송제를 따름이다. 정축에 대마도 구당관이 사자를 보내어 감귤을 받쳤다. 정해에 귀법사에 행차하여 승려를 공양하였다. 3월 병신에 왕이 문고(문종)의 반혼당에 나아가 한식겸 상사제를 행하고자 하니 유사가 곡위가 없다하여 어렵게 여기거늘 왕이 말씀하기를「예는 마땅히 편의함을 따라야 할 것이다」하고 드디어 법가의 호종을 감하고 갔다. 무술에 송의 밀주에서 제가 붕하고 황태자가 즉위하였음을 알려왔다. 무신에 불정도장을 문덕전에 설하였다. 갑인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하 4 월 경오에 왕제 석후가 도망하여 송에 들어갔다. 김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무인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를 지냈다. 경인에 조재로 말미암아 유사에게 명하여 운우경을 임해원에서 7일간 강하게 하고 또 산악에 기도하고 임진에 근신에게 명하여 녹수하고 경계(경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5월 갑인에 금강명경도장을 건덕전에서 7일간 설하고 비를 빌었다. 6월 정축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추 7월 임인에 년 80 이상의 남녀를 구정에서 향연하고 의대와 예물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임자에 문종의 대상임으로 흥왕사에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8월 신미에 호부상서 김상기와 예부시랑 최사문을 송에 보내어 조위하고 공부상서 임개와 병부시랑 이자인을 보내어 등극을 축하하였다. 정축에 문종의 신어를 경영전에 봉안하고 친히 존례를 행하였다. 무인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형부가 아뢰는 사수를 청단하는데 음락을 정지하고 소선을 올리게 하였다. 9월 기유에 경계을 석방하였다. 임자에 순종의 혼전에 친히 존하였다. 요가 어사중승 이가급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는데 기일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여 말하기를「사신의 이름은 가급인데 어찌하여 불급하였는가」라고 하였다. 동 10월 계유에 문종을 대묘에 부제하였다, 을해에 백고좌도장을 회경전에서 3일간 설하여 인왕경을 강하고 승 삼만을 공양하였다. 11월 정유에 순종을 대묘에 부제하였다. 병오에 요가 낙기부사 고주관내관찰사 야율성을 보내 왔다. 계축에 요가 보정군 절도사 소장과 숭록경 온교 등을 보내 와 왕을 책하여 특진검교태사 겸중서령 상주국 식읍일만호 식실봉일천호로 삼고 겸하여 관면 차마 규인 의대 채단 등의 예물을 사하였다. 을미에 왕이 남교에서 책명을 받았다.
병인 3년 춘 정월 을미에 외척인 예부시랑 이예의 처 왕씨 등에게 상궁 이하의 내직을 주어서 왕태후의 궁관을 삼고 녹봉을 차등있게 사하였다. 2월 경신 삭에 수태사 겸중서령 최충과 수태위 문하시중 김원충을 정종묘에 배향하고 수태위 문하시중 최제안과 수태사 겸중서령 이자연과 검교태사 문하시중 왕총지와 수태위 중서령 최유선을 문종묘에 배향하였다. 병인에 왕이 왕태후에게 상책하고 건덕전에 거동하여 중외의 하를 받고 군신에게 향연을 사하였다. 택라 유격장군 가어내 등이 와서 하례하고 방물을 바쳤다. 정묘에 적경궁주가 부여후 수에게 시집 갔다. 무진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크게 사하였다. 경인에 조선공 도와 계림공 희로 수태보를 삼고 상안후 수와 부여후 수와 금관후 (#;10-435)와 변한후 음으로 수사도를 삼고 진한후 유로 수사공을 삼았다. 윤월 갑인에 위위소경 최사설을 요에 보내어 천안절을 하하고 전중소감 곽상은 방물을 바치고 호부시랑 김사진은 생신 하함을 사하였다. 3월 신유에 선왕의 시호를 피하여 시중 최숙의 시호 인효를 고쳐 충의라고 하였다. 기묘에 대마도의 구당관이 사인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을유에 산천에 비를 빌었다. 하 4월 계사에 또 빌었다. 갑오에 노신열로 호부상서를 삼고 문간으로 섭병부상서를 삼고 왕국모로 위위경을 삼았다. 신축에 유사가 오랫동안 날이 가물므로 저자를 옮겼다. 경술에 친히 대묘에 체하고 태조 이하의 선왕과 선후에게 존호를 가상하였다. 계축에 이정공으로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를 삼고 최석과 김량감으로 모두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유홍과 왕석으로 중서시랑 평장사를 삼고 노단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최사량으로 중추원사를 삼고 문황으로 지중추원사를 삼았다. 갑인에 체향으로 곡사하였다. 5월 무오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박경백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병자에 상서예부시랑 최홍사를 요에 보내어 낙기복을 사하고 예빈경 이자지는 하정하고 지중추원사 이자위와 상서좌승 황종각 책명을 사하고 또 고주사로 상서우승 한영을 보냈는데 그때 요가 압록강에서 장차 각장을 일으키려 하므로 이를 파하기를 청하였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정해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계묘에 조하기를「짐이 유명을 받들어 외람히 대위(왕위)에 거하였더니 근래에 변괴가 자주 일어나고 한발이 재앙이 되는지라 불신의 음호와 군신의 광보하는 힘을 입어 음양이 순서롭고 상하가 다 화합하여지기를 바라고 내몸을 반성하고 자기를 책망하며 자주 은유를 보였으나 아직껏 비를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대게 (짐의) 양덕(박덕)의 소치라 하겠다 그러나 아마도 군하의 소행이 혹은 의에 맞지 않거나 명세의 현재 (일세에 뛰어난 현량한 인재)가 등용되지 않아서가 아닌가 한다 오직 너희들 문무 상참관과 치정구덕(관직에서 물러난 연로한 덕망가)과 산임 삼품 이상원(품작만 있고 직책은 없는 삼품이상의 관원)은 금월 26일을 기한하여 각각 봉사를 올려 짐의 과실과 형정의 득실과 민서의 폐막(병폐)을 직언하여 숨기지 말 것이며 또 충직청렴하고 재덕이 있는 자 각 1인과 남녀 승도로서 효순을 독행하였거나 효제치 못한 자와 관직에 있으면서 공도를 지키지 않고 법도를 요란하여 소민을 침해한 자들을 들어서 자세하게 기록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추 7월 병인에 조하기를「짐이 군신이 올린 봉사를 보니 세속이 사치를 숭상하여도 금제(금령)가 없다고 많이 말들을 하고 있으니 소사로 하여금 재신과 제학사와 풍헌장관과 더불어 선왕의 전례에 의거하여 무릇 의복 차마의 품제를 짐작하여 상세히 제정하여 아뢰게 하라」고 하였다. 무인에 덕종후 김씨가 별세하였다. 8월 병술 삭에 형부상서 소태보로 서북면 병마사로 삼고 공부상서 유석으로 동북면 병마사를 삼았다. 계묘에 국노를 선위하여 합문에서 주연을 사하고 구정에 가행하여 친히 서노 남녀를 향연하고 물품을 차등있게 사하였으며 독질 폐질자에게는 따로 주식을 급하였다. 9월 무오에 양경의 무관을 소집하여 동정에서 활쏘는 것을 사열하였는데 수개월이 되어서 파하였다. 갑자에 요가 수전중감 사순직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정묘에 변한후 음이 졸하였다. 동 10월 갑진에 내외관에 명하여 태후의 생신을 표하하게 하고 또 설날과 지일(동지와 하지를 말함)과 팔관회 때에도 이와 같이 하게 하여 길이 정제를 삼았다. 기유에 기설하였다. 11월 임술에 친히 초제를 지내고 기설하였다. 무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신중원에 행차하였다. 기사의 대회에 눈이 내려 연회에 배석하였던 군신이 다 옷을 적시고 저녁에 돌아오려고 할 제 하늘이 개이고 달이 밝아지므로 왕이 창덕문 밖에 연을 멈추고 제왕에게 명하여 술잔을 받들어 헌수하게 하니 간의 김상기 이자인 보궐 위계정 등이 간하매 이에 중지하였다. 12월 무술에 양경의 문관을 소집하여 동정에서 활쏘는 것을 사열하였다.
정묘 4년 춘 정월 갑인 삭에 조하를 쉬었다. 을축에 고주사 비서감 임창개를 요에 보냈다. 기사에 유사에게 명하여 산천 묘사에 제하여 신병이 싸움을 도와주기를 빌었다. 갑술에 회경전에서 친히 초제를 지냈다. 무인에 동녀진 장군 아노한 등 1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묘에 소태보로 이부상서를 삼았다. 경진에 밀진사 합문인진사 김한충을 요에 보냈다. 2월 경인에 임개로 어사대부를 삼고 고경으로 어사잡단을 삼고 최사설로 시어사를 삼았다. 갑오에 개국사에 행차하여 대장경이 이룩되었음을 경찬하였다. 정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동여진 장군 괴팔 등 19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계묘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3월 병진에 구산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기미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여 대장경이 이룩되었음을 경축하였다. 신유에 서여진 추장 소은두 등 13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거늘 작을 사하였다. 계해에 최석으로 권판상서이부사를 삼았다. 임신에 일본의 상인 중원 친종 등 32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갑술에 송의 상인 서전 등 20인이 와서 신주 화엄경판을 바쳤다. 병자에 태일 (천신)을 문덕전에서 친히 초제하고 풍우가 조순하기를 빌었다. 무인에 경계를 석방하였다. 경진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정사를 보살폈는데 문하시랑 평장사 최석 김량감과 중서시랑 평장사 유홍이 시정의 득실을 진주하였다. 하 4월 병술에 송의 상인 부고 등 2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자에 중서시랑 평장사 왕석이 졸하매 3일간 철조하였다. 경자에 귀법사에 행차하여 대장경이 이룩되었음을 경찬하였다. 을사에 금강경 도장을 건덕전에서 7일간 설하고 비를 빌었으며 무신에 또 보제사에서 빌었다. 5월 정사에 두번 우제를 지냈다. 정묘에 왕이 흰 난삼을 입고 현릉에 배알하여 죽책을 올렸다. 무인에 인왕도장을 문덕전에서 설하였다. 경오에 경릉에 배알하고 임신에 창릉에 배알하여 모두 죽책을 올렸는데 책문에「선조를 제향하는 엄숙한 의식은 희역에 풍성한 천제(은천)을 숭상하였으며 신을 감동하게 하는 도리는 우서에 지성을 귀히 여겼읍니다 효의 생각이 일어날제 마땅히 비사(신사)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그릇 유충우매한 몸으로 선왕의 가유(연이)를 계승하게 되었사오니 시서에 느껴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와 날을 택하여 배건의 예를 거행하나이다. 백관에게 집사 할 것을 명하여 성대한 의례를 협찬하게 하였사오며 구주의 토산물을 다하여 써 향기로운 제전을 갖추옵고 우러러 영명하신 조감을 바라오니 극경한 마음을 굽혀 받아 들이옵소서 하늘에 계셔서는 영위를 다투어 빛내사 굽혀 대복(순하)을 내리시고 역세에 있어서는 경화(대화)를 침(유의 뜻) 선하사 창기를 보전토록 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갑술에 최석으로 수국사를 삼고 김량감으로 판상서호부사를 삼고 최사량으로 참지정사 겸서경유수사를 삼았다. 을해에 김행경으로 문하시랑 동중서평장사를 삼았다. 을묘에 회경전에 친히 초제하고 비를 빌었다. 6월 임오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유에 소재도장을 회경전에서 7일간 설하였다. 병신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신축에 경계(경죄수)를 석방하였다. 추 7월 계축에 문황으로 서북로 병마사 겸지중군병마사를 삼고 이자위로 동북면 병마사 겸지행영병마사를 삼았다. 병진에 내정에서 초제하였다. 기사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동남도도부서가 주하기를「일본국 대마도의 원평 등 40인이 와서 진주 수은 보도 우마를 바쳤읍니다」고 하였다. 임신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시사하였는데 최석 김량감 유홍 최사량이 시정의 득실을 진주 하였다. 8월 계미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사형을 청단하였다. 을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기해에 숭경궁을 고쳐 보령이라 하고 경흥원을 원희궁이라 하였다. 병오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정미에 어사대부 임개로 서북로 병마사를 삼고 사재경 윤익상으로 지동북로 병마사를 삼았다. 9월 경술 삭에 왕이 회교역에 머물었는데 밤에 호위의 군영에서 불이났다. 신해에 시신을 대동강 누선에서 향연하였다. 계축에 장락전에 거동하여 시사하였다. 무오에 요가 고주관내관찰사 고혜를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갑자에 최석으로 검교태보를 삼고 최사량으로 검교 태자태사를 삼고 문황으로 검교 태자태부를 삼고 이자위로 검교사공을 삼았다. 계유에 흥복사에 행차하였다. 병자에 경계(경죄수)를 석방하였다. 무인에 연등도장을 흥국사에 설하고 또 궁성내외의 거리에 점등하였다. 동 10월 기묘 삭에 흥국사에 거동하였다. 계미에 중흥사에 행차하였다. 을유에 내전에서 친히 초제 하였다. 정해에 왕이 관풍정과 구제궁을 유람하고 드디어 영명사에 행차하여 행향하고 용선을 타고 대동강에 이르렀다가 밤이 되어서 이에 돌아왔다. 임진에 팔관회를 설하고 영봉루 부계에 거동하여 관락하고 드디어 흥국사에 행차하였다. 고주사 예빈소경 유신을 요에 보냈다. 계사에 친왕과 시신을 부계에서 향연하였다. 을미에 흥복 금강의 두 절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홍복 인왕의 두 절에 행차하고 드디어 제년 행차하여 누선을 타고 주연을 베풀고 물 흐름을 따라 대동강에 이르러 활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백좌도장을 상경 회경전에 설하고 승 삼만을 구정에서 공양 하였다. 무술에 군신을 장락전에서 향연하였다. 11월 을묘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병진에 위위소경 유석을 요에 보내어 생신 하함을 사하였다. 임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기사에 전중소감 김덕균을 요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신미에 유단으로 분사병부상서 지서경유수사를 삼고 황종각으로 위위경 서경부유수를 삼았다. 정축에 상서우복사 임희열이 졸하매 하루동안 철조하였다. 12월 기묘 삭에 출추사 시어사 최사설을 전 진 나주도에 보내고 상서병부원외랑 이위를 경 상주도에 보내고 합문기후 윤관을 광 충 청주도에 보냈다. 기축에 형부시랑 최저를 요에 보내어 천안절을 축하하였다. 경인에 최석으로 수태위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를 삼고 김량감으로 수태위를 삼고 유홍으로 수사공을 삼고 최사량으로 수국사를 삼고 문황으로 지중추원사를 삼고 이자위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김충의로 호부상서를 삼고 박인량으로 한림학사 승지를 삼고 이예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갑오에 경계를 석방하였다.
무진 5년 춘 정월 기유 삭에 조하를 쉬었다. 무오에 요가 횡선사 어사대부 야율연수를 보내왔다. 2 월 갑오에 요가 각장을 압록강안에 설치할 것을 의논하므로 중추원 부사 이안을 보내어 장경소향사로 가탁하고 구주에 가서 가만히 변사에 대비하게 하였다. 3월 기유에 중서시랑 평장사 유홍과 우승선 고경에게 명하여 전성에 초제를 베푸니 구례를 수한 것이다. 갑자에 금부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무진에 최사제로 중추원사를 삼았다. 하 4월 병신에 한재가 심하므로 왕이 백요(백관)를 거느리고 남교에 거동하여 다시 우제를 지내고 육사(육개사항)로써 스스로를 책하니 가로되「정사가 한결 같지 않았는가 백성이 직을 잃었는가 궁실이 높아서인가 여알이 성행하였는가. 포저(회뢰)가 행하였는가 참부가 횡행하였는가」라 하고 동남 동녀 각 8인을 시켜 춤추면서 우를 부르게 하며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며 음악을 거두고 노천에 나와 앉아 정사를 듣고 임인에 또 종묘 사직과 산천에 기도하였다. 5월 신해에 송 명주가 우리 나라 나주의 표풍인 양복 등 남녀 23인을 돌려 보냈다. 기미에 요의 동경회례사 검교우산기상시 고덕신이 왔다. 계유에 조기를「짐이 덕에 밝지 못하므로 황천이 견책을 나타내어 석달이나 비가 내리지 않으니 두렵고 송구스럽도다 아마도 중외의 영어(옥)에 잘못이 있는가 보다 그 경수와 박죄는 모두 용서하여 주라」고 하였다. 추 7월에 송 명주가 우리 나라 탐라의 표풍인 용협 등 10인을 돌려 보냈다. 9월에 태복소경 김선석을 요에 보내어 각장을 파하기를 빌었는데 표문에「세 번 앙청하여도 들어주지 않으시니 비록 번거롭게 함이 비례임을 두려워 하나 우리의 원하는 바를 어찌 입을 봉하고 침묵을 지켜 말씀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옛적에는 공물을 드리고(투궤) 글을 올리면 만성이 다 곤난한 호소를 통하게 되고 궁문에 부르짖으며 북을 치면 사총에 등문함을 막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신감의 지공하심을 만나니 어찌 백성의 실정을 다시 주달하지 않으리요 신이 엎드려 살피건대 승천황태후께서 조정에 임하여 칭제하실 때 경계(이)를 사하시고 봉토를 획정하여 주시니 무간은 순문에 이르게 되었고(무간비격어순문) 집옥은 비로소 우회에 참여케 되었나이다(집옥보참어우회) 신절을 장련히 여기시고 예은을 점피하게 하시어서 천황학주의 성으로부터 서으로 피안을 수복하고 일자별교의 수를 한하여서 동쪽은 우리 나라 강토로 분할하여 주셨습니다. 통화 12 갑오년에 입조한 정위 고량이 천보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는데 고려국왕 왕치에게 칙하기를 동경유수 손령이 아뢴 것을 살펴보니 경이 9월 초부터 정부를 발하여 성채를 수축하여 10월 상순에 이르러 공사를 이미 마쳤다고 하니 경은 하늘이 준 재질로써 지략은 시기에 통달하였도다. 즐거이 사대의 정성을 바치고 멀리 내정의 예를 받들었다 때마침 농한기를 이용하여 멀리 정부를 모아서 광야의 도둑을 막으려 먼저 요진에 성루를 쌓으니 보다 조지에 부합하고 깊이 시정에 알맞도다 하물며 저 여진은 일찍 황화에 돌아와 우리 위신에 복종하고 있으니 감히 비위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지만 속히 완수함을 힘써서 진실로 길이 통태함을 기할 것이다. 그 권애함에 있어서 어찌 자나 깨나(매흥) 저버리겠는가고 하시었습니다. 그때 배신 서희가 경계를 맡아 관임하고 유수 손령이 선지를 받들고 상의 하여 각각 양쪽 경계에다 제성을 분축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하공진을 안문에 보내어 압록의 구당사를 삼아 낮에는 나가서 동사(동쪽 물가)를 감독하고 밤에는 들어와서 내성에서 숙직하면서 드디어 천위에 의지하여 점차로 좀도둑을 제거하였으므로 이후로는 방비가 없어도 변후가 더욱 한정하여졌습니다. 성종의 칙묵이 아직 마르지 않았고 태후의 인자하신 말씀이 어제와 같사온데 갑인년에 강에 다리를 놓고 배를 만들어 길을 통하여 을묘세에 우리 주성 경내에 들어와 군을 두고 을미에는 궁구를 설하여 역정을 세우더니 병신에는 비답(수두)으로 윤허하여 옥사를 철훼하고 조하기를 자여의 세소한 일은 항규를 지키도록 하라고 하였고 또 임인년에는 매매원을 의선군 남쪽에 설치하려고 하시므로 논신하였던 바 즙수하는 것을 파하더니 갑인세에 비로소 탐수암을 정융성의 북쪽에 배설하고 회보하시기를(탐수암을) 기공한지 여러 해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당국은 대대로 충근하고 연년이 공근하여 왔습니다. 몇차례나 사행의 장주를 보냈사오나 암수의 성교를 제거하시지 않고 더욱이 이제와서 신시를 경영하려고 하시니 선조의 유지를 어기고 소국이 충성을 다하고 있음을 어여삐 여기시지 않는듯 하옵니다. 수천리에 차마의 왕래가 게으름을 잊었는데 90년 동안 공물을 바쳐옴이 공로가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구설이 탄식을 하고 뭇사람의 마음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신이 비로소 선대를 이어받아 삼가 외번을 지키게 되매 얼마간의 즐거움이 다시 격앙(격분)으로 쏠리게 되니 어찌 조그마한 이익을 가지고 서로 원망을 맺을(체구) 것이 있겠습니까 경계가 대초에 연하였으니 환화하여 관과를 본받기를 맹세하였으나 땅이 장사처럼 협소하매 기쁘게 춤추려고 해도 오히려 소매자락을 돌리기 어렵습니다(지협장사 변무상난어회수) 자주 겸주(비단에 쓴 표주문)을 올렸으나 윤허(윤유)를 받지 못하였으니 위로는 하늘을 두려워 하며 아래로는 백성에게 부끄럽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제폐하께서는 곤신의 횡의를 물리치고 변부의 큰 근심을 생각하시와 전원에 경착함을 그대로 맡기시와 다시 구업을 편안케 하시고 각고의 장옥을 금하여 새로 이룩함이 없도록 하소서 다행이 경소함을 면케하여 주시면 길이 보효하기를 도모하겠나이다」고 하였다. 동 10월 정축에 요가 대상소경 정석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11월 계해에 연화궁의 원자(세자)의 이름을 욱이라 사하고 은기 필단 포곡 안비 노비를 사하였으며 왕이 태후를 모시고 수춘궁에서 향연하였는데 조선 계림 상안 삼공과 부여 금관 이후도 시연하여서 밤이 다하여 파하였다.임신에 금선석이 요에서 돌아오니 회조하기를「여러번 봉장을 올려 각장을 그만둘 것을 청하고 있는데 진실로 사소한 일이어늘 어찌 번다한 말을 빌리리요 근일중에 편의하도록 의처할 것이다 하물며 아직 설치할 것을 기하는 바도 아니니 힘써 마음을 편안히 하여 써 성심을 지극히 할 것이며 깊은 의심을 풀고 나의 지의를 체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12월 경자에 이안으로 형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이자인으로 전중감 중추원부사를 삼았다. 이 해에 요가 사신을 보내 와 양 이천구차 이십삼양 마 삼필을 사하였다.
기사 6년 춘 정월 임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을해에 신흥창의 곡식을 풀어 경성의 제불사에 포시하여 재를 설하고 복을 빌었다. 무술에 소재도장을 회경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2월 신유에 친히 천지 산천을 구정에서 제사하여 써 복을 빌었다. 3월 경인에 능엄경도장을 건덕전에서 7일간 설하였다. 하 4월 신축 삭에 서리가 내렸다. 6월 신축에 종묘와 칠능에 비를 빌었다. 경신에 최사제로 참지정사를 삼고 박인량으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서정으로 삼사사를 삼고 김상기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추 8월 갑진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서해 등 14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경술에 송의 명주에서 우리 표풍인 이근보 등 24인을 돌려보냈다. 계축에 국학을 수리함으로 의장을 갖추어 문선왕(공자)을 순천관에 이안하였다. 병진에 사형을 청단하였다. 일본국 대재부의 상객이 와서 수은과 진주 궁전 도검을 바쳤다. 9월 을해에 요가 영주관내관찰사 양린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정축에 천원절임으로 요사를 건덕전에서 향연하였는데 왕이 하성조사(성조를 하하는 사)를 지으니 가론「이슬은 차고 바람은 높아 가을 밤은 맑은데 달빛은 향전 속을 밝게도 비춰 준다 삼경이 되려는데도 노래소리 드높으니 요요한 우리 인생 모두다 환같고나 영화를 탐하지 말고 좋은 술 가져와서 금잔에 가득 부어 즐거운 정 펴어보세」라고 하였다. 동 10월 기해에 송의 상인 양주 등 4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유에 송의 상인 서성 등 5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신해에 인왕경을 회경전에서 3일간 강하고 승 삼만에게 공양하였다. 무오에 새로 주조한 13층의 황금탑을 회경전에 봉안하고 경찬회를 설하였다. 송의 상인 이주 양보 양준 등 12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신유에 왕태후가 국청사 창건을 시작하였다. 11월 정묘 삭에 일식하였다. 동여진의 추장 고사 등 21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12월에 수사공 유홍의 신제가 낙성되었으므로 왕이 대복경 이자의에게 명하여 조서를 가지고 가서 은기 필단 안마를 사하였다.
경오 7월 춘 정월 정묘 삭에 조하를 쉬었다. 기축에 예빈성이 탁라 구당사의 상신장에 의거하여 주하기를「성주 유격장군 가량잉이 죽었으므로 동복형제인 배융부위 고복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고 부의물은 마땅히 구례에 준하여서 지송하도록 하소서」한대 제하여 가타 하였다. 임진에 보제사의 수륙당에 불이 났다. 이에 앞서 폐인(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 섭호부랑중 지태사국사 최사겸이 송에 가서 수륙의문을 구득하고 왕에게 청하여 이 당을 짓다가 공역을 채 마치기 전에 불이 난 것이다. 2월 갑인에 동여진의 도령 야사 등 17인이 와서 마를 바치거늘 물품을 사하되 차등이 있게 하였다. 병진에 유홍으로 문하시랑 평장사 판병부사를 삼고 최사제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이자위로 상서우복사 참지정사 수국사를 삼았다. 기미에 동여진의 도령 요어내 등 22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임술에 동여진의 독달 등 34인이 내조하였다. 3월 기사에 송의 상인 서성 등 15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자 야에 크게 벼락과 번개가 쳐서 신흥창에 화재가 일어나매 홍원 국청 양사의 공역을 파하였다. 하 5월 병인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이시하고 이경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그때 경필의 정문(응시문자의 정식)이 격에 맞지 않았으므로 주사를 비방하였다. 6월 경자에 어사대가 주하기를「영원병마록사 우여유가 변민을 침요하여 재물을 취감하니 청컨대 정위에 회부하여 논단하소서」한대 제하여 가타 하였다. 갑진에 제하기를 재변이 자주 일어나고 시우가 시기를 어기니 내외의 공도사장 이하의 죄를 석방하고 관리사로서 법을 범하여 직에서 파면된 자는 다스려서 사곡이 없거던 고려하여 본품에 서용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추 7월 계미에 호부상서 이자의와 예부시랑 위계정을 송에 보내어 사은하고 겸하여 공물을 바쳤다. 9월 신미에 요가 이주관내관찰사 장사설 등 31인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경진에 2차로 요사를 건덕전에서 향연하고 삼절인으로 하여금 전내에 앉게 하니 좌우의 유사가 주하기를「두 번씩이나 사자를 향연한다는 것은 옛적에 이런 예가 없었사오며 삼절이 전내에 앉는 일도 또한 들어보지 못하였읍니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사자가 어제의 천경사 비문을 가지고 왔으니 마땅히 특별한 예우를 가할 것이라」고 하여 청종하지 않았다. 무자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아어대 등 15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동 10월 병오에 왕이 태후를 모시고 삼각산에 행차하여 경술에는 승가굴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장의사에 행차하고 계축에 인수사에 행차하여 행향하고 갑인에 대가가 산길에 머물러 있는데 백성의 나이 백세 된 자 한 사람과 팔십된 자 세 사람이 길에서 알현 하거늘 각각 물을 사하고 존문하였다. 무오에 신혈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설하였다. 12월 신유 삭에 삼각산으로부터 돌아와 사하였다. 12월 임진에 눈(설)오기를 빌고 경자에 다시 제신묘에 빌고 임인에 또 빌었다. 요가 횡선사 익주관내관찰사 야율이칭을 보내왔다. 송이 문원영화집을 사하였다.
신미 8월 춘 정월 정묘에 군신을 건덕전에서 향연하고 각각 구마를 사하였다. 2월 계축에 요의 동경지례회사사 예빈부사 오야여가 왔다. 3월 병자에 동여진 영새장군 개다한 등 40인이 와서 탁타(낙타) 및 마를 바쳤다. 하 4월 정미에 중추원부사 이자인이 졸하였다. 계축에 문하시랑 평장사 정유산이 졸하매 정순이라 익하였다. 5월 기미 삭에 일식하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서 70일간 경천하였다. 을축에 사직에 비를 빌었다.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정묘에 비를 대묘와 칠릉에 빌었다. 6월 갑오에 재차 사직에 빌고 정유에 또 대묘와 칠릉에 빌었다. 갑진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왕년에 번적이 창주를 침구하였을 때에 병마록사 안선준 등이 병졸을 거느리고 나와 덕령술에 주둔하고 낭장 고맹 등을 보내어 추포하며 분격하니 적군이 크게 무너지는지라 교위 숭검과 대정 변학 등이 적중에 돌입하니 사졸들이 사기를 높혀 사로잡고 참살한 공이 있사오니 직상을 가하여 써 장래를 권장하시기를 비나이다.」고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병오에 이자의 등이 송의로부터 돌아와 주하기를「(송)제가 우리 나라 서적에 호본이 많음을 듣고 관반(접빈사)에게 명하여 구서목록을 써서 주면서 이에 말하기를 비록 권질이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또한 모름지기 전사하여 부쳐 오라고 하였읍니다」고 하였다. (구서목록) 백편상서 순상주역 10권 경방역 10권 정강성주역 9권 육적주주역 14권 우번주주역 9권 동관한기 127권 사승후한서 130권 한시 22권 업준모시 20권 여열자림 7권 고옥편 30권 괄지지 500권 여지지 30권 신서 3권 설원 20권 유향칠록 20권 유흠칠비 7권 왕방경원정초목소 27권 고금록험방 50권 장중경방 15권 원백창화시 1권 심사방황제침경 9권 구허경 9권 소품방 12권 도은거효험방 6권 시자 20권 회남자 21권 공손나문선수경 40권 양우노자 2권 나십노자 2권 종회노자 2권 완효서 7녹 손성진양추 33권 손성위씨춘추 20권 간보진기 22권 십육국춘추 102권 위담후위서 100권 어환위략 유번양전 30권 오균제춘추 30권 원행충위전 60권 심손제기 20권 양웅집 5권 반고집 14권 최인집 10권 급총기년 14권 사영운집 20권 안연년집 41권 삼교주영 1000권 공환문원 100권 유문 370권 문관사림 1000권 중장통창언 사서체론 제갈량집 24권 왕희지소학편 1권 주처풍토기 1권 장읍광아 4권 관현지 4권 왕상찬음악지 채옹월령장구 12권 신도방찬락서 9권 고금악록 13권 공양묵수 15권 곡양폐질 3권 효경유소주 1권 효경위소주 1권 정지 9권 이아도찬 2권 삼창 삼권 비창 3권 위굉궁서 1권 통속문 2권 범장편 1권 재석편 1권 비룡편 1권 성황장 1권 권학편 1권 진중흥서 80권 고사고 25권 복후고금주 8권 삼보황도 1권 한관해고 3권 삼보결록 7권 익부기구전 14권 양양기구전 5권 계강고사전 3권 현안춘추 3권 간보수신기 30권 위명신주 31권 한명신주 29권 금서칠지 10권 세본 4권 신자 2권 수소자 1권 호비자 1권 하승천성원 고사렴씨여지 100권 십삼주지 14권 고려풍속기 1권 고려지 7권 자사자 8권 공손니자 1권 신자 10권 조씨신서 3권 풍속통의 30권 사승지서 3권 영헌도 1권 대연역 병서접요 7권 사마법한도 1권 동군약록 2권 황제대소 30권 명의별록 3권 조식집 30권 사마상여집 2권 환담신론 10권 유곤집 15권 노심집 21권 산공계사 3권 서집 80권 응거 백일시 8권 고금시원영화집 20권 집림 20권 계연자 15권 추 7월 임술에 상서좌복사로 치사한 노단이 졸하니 시호를 광헌이라 하였다. 정축에 김상기로 호부상서 정당문학을 삼고 유석으로 동지중추원사를 삼았다. 8월 정묘에 중서시랑 평장사 최사제가 졸하였다. 제하기를「송인 전성은 서찰을 잘하고 동양은 무예가 있으니 머물러 있기를 간곡히 청하고 또 직질을 가하여 내자를 권장하라」고 하였다. 윤월 기미에 왕이 정전을 피하여 소선하고 책필로 정죄하였다. 갑자에 장경도장을 회경전에 설하여 행향하고 또 시를 지어 써 (불법에) 귀숭의 뜻을 보였다. 9월 경인에 상춘정에 거동하여 계림공 희 부여공 수 문하시랑 평장사 유홍 좌복사 소태보 병부상서 서정 상장군 왕국모 직문하성 고경 한림학사 손관 등을 불러 주연을 베풀고 조용히 변사를 물었다. 계사에 요가 영주관내관찰사 고숭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동 11월 병오에 문하시랑 평장사 유홍이 졸하였다. 경술에 사직에 눈(설)오기를 빌었다. 12월 계해에 문하시랑 평장사 이안이 졸하니 양신이라 익하였다.
임신 9년 춘 정월 갑신 삭에 우설로 조하를 쉬었다. 기축에 중추원사 형부상서로 치사한 박양단이 졸하니 3일간 철조하였다. 정유에 김상기로 이부상서를 삼고 임개로 동지중추원사를 삼았다. 경자에 동여진의 아노한 등 2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2월 기묘의 동여진의 회화장군 삼빈 등이 와서 마를 바쳤다. 탐라성주 의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거늘 정원장군을 가하고 의대를 사하였다. 임오에 선마하여 소태보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3월 병진에 시항(시정)의 민가 640호가 불탔다. 이 달에 왕이 만기의 우노로 자못 몸이 편치 못함을 느껴 문덕전에 이어하고 내의에게 명하여 양성방약을 올리게 하더니 문득 느낀 바 있어 고풍장편을 지으니 그 끝에 일으기를「약효를 얻고 못얻고를 어찌 구태어 염려하랴 부생이 처음이 있으니 어찌 끝이 없으리오 오직 뻑뻑히 삼가 정성껏 모든 선을 닦아서 정역(서방정토)에 뛰어올라 범웅(석가여래)께 예하리라」고 하였다. 왕의 춘추가 한참(정성)인데 이런 시를 지었으므로 보는 이들이 놀라고 괴이 하게 여겼다. 하 4월 을묘에 참지정사 소태보로 권판서북면 병마사 겸중군병마사를 삼고 중추원사 서정으로 서북면 병마사 겸중군병마사를 삼고 정당문학 김상기로 권판동북면 병마사 겸행영병마사를 삼고 동지중추원사 임개로 동북면 병마사 겸행영병마사를 삼았다. 무오에 궁인 이씨를 책하여 왕비를 삼았다. 제하여 금관후 #에게 수태위 겸중서령을 가하였다. 병인에 금관후 (#10-457)가 졸하였다. 무진에 요의 동경지례사 고량경이 왔다. 신사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금성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 기미에 유석으로 지중추원사를 삼고 이예로 동지중추원사를 삼았다. 경신에 조하기를「짐이 일찍이 일자 최사겸이 아뢰는 것을 듣고 경릉의 허결한 곳을 수보하였더니 요즈음 사천소감 황충현 등의 봉사를 보건대 사겸의 수보는 도리어 지기를 압양하여 장차 선령으로 하여금 현침에 안타하시지 못하게 된다 하니 형부로 하여금 사겸을 가두고 국문하라」고 하였다. 을축에 정당문학 김상기로 수국사를 삼았다. 병인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임신에 왕태후가 백주 견불사에서 천태종예참법을 장기간(약일만일) 동안 설하였다. 을해에 서정으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추 7월 을유에 참지정사 최사량이 졸하였다. 8월 을축에 이자위로 상서우복사 권지문하성사 겸서경유수사를 삼았다. 처음에 자위가 재상감교로서 송에 가서 표주할 때 그릇 요의 연호를 냵으므로 송묘에서 그 표문을 각축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문책을 당하여 파면되었는데 수월이 못되어 내폐에 간알하여 이 직에 배명되었으므로 시인이 그를 기롱하였다. 무진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기사에 최사겸을 선산도에 추방하였다. 9월 임오에 왕태후가 서경에서 별세하였다. 을유에 요가 왕정을 보 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동 10월 병자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11월 경자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서 경천하였다. 12월 계해에 동여진의 여라불 등 2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임신에 지진하였다.
계유 10년 춘 정월 기묘 삭에 조하를 쉬었다. 2월 갑인에 송의 명주보신사 황중이 왔다. 3월 무인에 원자 욱에게 명하여 수춘궁에 입거하게 하고 동지중추원사 유석과 좌간의대부 손관으로 태자좌우첨사를 삼았다. 임오에 서북로 병마사가「북번인 삼인이 모화하여 내투하였다」고 아뢰매 의복 및 전택을 사하였다. 하 4월 기유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문정이 졸하였다. 계축에 장경도장을 회경전에서 6일간 설하고 왕이 친히 삼보(불 법 승)를 찬하는 시를 지었다. 을묘에 요가 고주관내관찰사 풍행종을 보내 와 왕에게 명하여 기복케 하였다. 5월 무술에 소태보로 중서시랑 평장사 판형병부사를 삼고 서정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김상기로 이부상서 참지정사 수국사를 삼고 유석으로 예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임개로 중추원사 형부상서를 삼고 이예로 지중추원사 한림학사 승지를 삼았다. 경자에 홍호사를 성동에 창건하였다. 6월 갑자에 내전에서 친히 초제 하여 써 농사를 빌었다. 추 7월 계미에 서해도 안찰사가 주하기를「안서도호부관할하에 있는 연평도의 순검군이 해선 일소를 나포하였는데 선중에는 송인이 12명 왜인이 19명이었고 궁전 도검 갑주와 수은 진주 유황 법라 등의 물건이 있었으니 반드시 양국의 해적이 함께 우리 나라의 변지를 침범하려던 자들입니다 그 병장 등물은 관가에 수납하고 생포한 해적은 다 영외에 유배하고 그 순포군사에게 상을 내리시기를 청하옵니다.」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임진에 병부상서 황종각과 공부시랑 유신을 송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8월 임신에 내외의 사형죄수를 감면하여 해도에 유배하였다. 9월 정축에 왕이 인예태후 반혼전에 나아가서 소상제를 행하였다. 임오에 요가 영주관내관찰사 대귀인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12월 갑자에 요가 횡선사 안주관내관찰사 야율괄 보내왔다.
갑술 11년 춘 정월 계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임진에 해곁에 혜성이 있었다. 2월 병오에 자주 천변이 있으므로 사하였다. 무신에 왕이 장차 열병할새 어사대가 주하기를「병은 금이라 목을 이기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봄이 짙어 덕이 목에 있으니 열병함은 생기를 거슬림입니다.」고 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았다. 3월 갑술에 왕이 인예왕후를 반혼전에서 제하였다. 갑신에 국자제주 한검이 세차례나 표문을 올려 청로함으로 이를 허락하였다. 병술에 동여진 장군 잉우 등이 와서 말 9필을 바쳤다. 정해에 구정에서 초제 하였다. 갑오에 정극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윤 4월 임진에 왕이 병이 났으므로 갑오에 재신 추밀 및 종실이 연영전 북문에 나아가서 기거하였다. 5월 임인에 왕이 연영전 내침에서 붕어하니 곧 그날로 빈을 선덕전에 옮겼다.수는 46이요 재위는 11년이라 시호를 사효라 하고 묘호를 선종이라 하였으며 성의 동쪽에 장사지내고 능을 인릉이라 하였다. 인종 18년 관인이라 가시하고 고종 40년 현순을 가하였다.
이제현의 찬에「시라는 것은 뜻의 향하는 바이니 마음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발하면 시가 된다 선종의 문덕전 이약시를 보면 조맹의 시음척일이란 시와 비슷하니 어찌하여서 인가 조맹은 열국의 경임에도 그 말이 구차하므로 군자가 오히려 비방하였거늘 하물며 왕자임에랴 선종의 총명호학으로써 성현의 서가 아니면 읽지 않고 구차한 뜻만 없었더라면 명량갱재의 노래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대풍강개의 작품쯤이야 어찌 거연히 미치지 못하랴 3년이 다 못되어 드디어 군신을 버리고 갔으니 슬프도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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