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高麗史)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만든 고려시대의 역사책.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총 139권으로 되어 있다. 1392년(태조 1) 10월 태조로부터 이전 왕조의 역사책을 만들라는 명을 받은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은 96년 37권의 《고려국사》를 만들어 바쳤다. 정도전과 정총(鄭摠)이 책임을 지고 예문춘추관의 신하들이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우선 통사인 이제현(李齊賢)의 《사략》, 이인복(李仁復)·이색(李穡)의 《금경록》,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 등의 체재를 참고하면서, 역대 고려실록과 고려 말의 사초(史草)를 기본자료로 삼았다. 이것은 그 내용과 서술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1414년 하륜(河崙)·남재(南在)·이숙번(李叔蕃)·변계량(卞季良)에게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바로잡고, 특히 태조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16년 대표자인 하륜이 죽자 중단되었다. 이를 잇고자 하는 논의는 세종의 즉위 후 왕 자신에 의해서 제기되고, 마침내 19년(세종 1) 9월 유관(柳觀)과 변계량 등에게 일을 맡기니, 이들은 21년 정월에 다 만들어 올렸다. 이리하여 본래의 사초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던 곳이 바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국제관계가 고려된 부분에서는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관점이 오히려 강화되어 제칙(制勅)·태자(太子) 등을 교(敎)·세자(世子) 등으로 고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책도 반포되지 못하다가 23년 12월에 다시 유관과 윤회(尹淮)로 하여금 이 부분을 실록에 따라 바로 쓰도록 하고 있다. 24년 8월 이 일은 끝났지만, 이번에도 변계량의 반대로 발간되지 못하였다. 세종은 31년에 《태종실록》이 편찬된 것을 계기로 《고려사》를 다시 쓰는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42년 8월에 신개(申>)·권제(權)가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바쳤다. 이 책은 48년에 양성지(梁誠之)의 교감을 거쳐 일단 인쇄되었으나 편찬자 개인과 관련된 곳이나 청탁받은 곳을 제멋대로 썼기 때문에 배포가 곧 중지되었다. 세종은 다시 49년에 김종서·정인지·이선제(李先齊)·정창손(鄭昌孫)에게 명령을 내려 내용을 더 충실하게 하면서 이런 잘못을 고치게 하였다. 김종서는 드디어 51년(문종 1) 8월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번의 작업에서는 늘어난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기 위하여 체재를 바꾸는 일도 아울러 이루어져, 최항(崔恒) 등이 열전, 노숙동(盧叔仝) 등이 기(紀)·지(志)·연표, 김종서·정인지 등이 교감을 맡았다. 열전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어서 비판이 거셀 것을 우려하여, 52년(단종 즉위)에 조금만 인쇄하여 내부에 보관하다가, 54년 10월에 이르러 비로소 널리 인쇄, 반포되었다.
《고려사》에 실려 있는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에는, 본기(本紀)라 하지 않고 세가(世家)라 함으로써 명분이 중요함을 보이고, 거짓 왕인 신우(申禑) 부자를 열전에 내림으로써 분수 넘치는 것을 엄하게 처벌하고 충직하고 간사함을 명확히 구분한다 하였으며, 제도를 나누고 문물을 헤아려서 비슷한 것끼리 모음으로써 계통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연대를 헤아릴 수 있게 하며, 사적을 상세하게 하는 데 힘을 다하고, 빠지고 잘못된 것을 메우고 바르게 하려 하였다는 편찬의 방침이 제시되고 있다. 이 방침은 다시 범례에서 각 항목별로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다. 먼저 세가에 관한 것을 보면, 왕기는 세가라 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분수를 넘는 칭호도 그대로 써서 사실을 보존하며, 일상적인 일은 처음과 왕이 직접 참여할 때만 쓰고 나머지는 생략하며, 고려세계는 실록에 있는 3대추증 사실을 기본으로 삼는다 하였다. 또한 우왕·창왕을 거짓 왕조로 규정하여 열전에 강등시켰으며, 이전부터 내려오던 이제현 등의 평론을 그대로 실을 뿐, 따로 작성하지 않도록 하였다. 세가에서는 32왕의 왕기가 46권에 수록되어 전체 분량의 약 3분의 1에 해당된다. 서술의 방식은 《원사(元史)》를 모방하여 첫머리에 왕의 출생, 즉위에 관한 것을 쓰고 끝부분에 사망, 장례 및 성품에 관한 것을 썼다. 왕의 연대는 실제로는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었으나, 이 책에서는 즉위한 다음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다. 세가 다음에는 지(志)를 두었는데, 천문·역지·오행·지리·예·악·여복·선거·백관·식화·병·형법 등 총 12지 39권으로 되어 있다. 이 지(志)도 《원사》에 준하여 분류하였으며, 실록 등이 없어져서 빠진 곳은 《고금상정례》 《식목편수록》 및 여러 사람의 문집 등으로 보충하였다 한다. 그런데 실제 고려의 제도는 당나라 것을 기본으로 삼고 송나라 것이 덧붙여지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고유의 전통이 깔려 있었다. 예를 들면, 원구(丘)·사직 등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토속적인 연등회·팔관회 의식이 중요시되었고, 중국의 아악(雅樂)과 당악(唐樂)을 사용하면서도 예로부터의 속악이 성행하였으며, 중국의 관제와 산관계(散官階)를 이용하였으나 또한 도병마사·식목도감 및 향직 등 독자적인 제도를 아울러 썼고, 당률을 채용하면서도 실제 고유의 관습법이 적용되고 있었다. 지의 맨 첫머리에는 편찬자의 서문이 놓여 있는데, 대개 일반론과 실제 사실에 대한 개설적인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설명의 큰 줄기는 태조 이후 문종 때까지의 고려 전기를 제도가 정비되고 국세가 번창한 시기로 보고, 무신란 이후 몽골 간섭기에 들어서는 제도가 문란하여 나라가 쇠망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어 본문에서는 먼저 연월일이 없는 일반 기사를 쓰고 그 뒤에 연대가 있는 구체적 사실을 열거하였다. 세가·지 다음으로 표가 들어 있는데, 실제 본문에서는 연표라 하여 하나의 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를 따랐다. 제일 위에 간지를 쓰고 그 아래 중국과 고려의 연호를 썼으며, 고려 난에는 왕의 사망과 즉위 및 중국과의 관계 등 중요한 일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표에 이어 마지막으로 열전을 두었는데, 후비전(后妃傳)·종실전(宗室傳)·제신전(諸臣傳)·양리전(良吏傳)·충의전·효우전·열녀전·방기전(方技傳)·환자전(宦者傳)·혹리전(酷吏傳)·폐행전(嬖幸傳)·간신전·반역전(叛逆傳) 등 총 50권, 1,009명으로 되어 있다. 열전의 구성은 역시 《원사》를 모방하였지만, 그 서문은 이제현이 쓴 제비전(諸妃傳)이나 종실전의 서문처럼 이미 있던 자료를 이용하였다. 그 내용 중 반역전에 우왕 부자를 넣어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고 있고, 문신 위주, 과거 위주로 인물을 선정하여 조선 유학자의 입장이 나타나고 있으며, 흥망사관에 입각하여 개국공신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개별인물에 대한 평가는 이전부터 있던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비교적 공정하게 쓰려고 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러 차례의 개찬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종래의 편년체의 역사서술에서 기전체로 편찬된 《고려사》는 첫째, 동양의 전통적인 왕조사 편찬방식과 같이 기본적으로 이전부터 있던 사료를 선정 채록하여 그 나름으로 재구성하였으므로 역사성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둘째, 이렇게 사실을 있는 대로 쓰려고 애썼기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주체성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셋째, 그러면서도 한편 편찬자인 유학자의 사대적인 명분론이 반영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역사관을 큰 원칙으로 하여 고려시대를 이해하고 있는데, 첫째, 흥망사관에 의해 고려 전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후기를 부정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을 긍정적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둘째, 무인(武人)을 천하게 보는 관념과 왕실의 권리를 도둑질하여 나라를 마음대로 한 데 대한 정통론의 입장에서 무신정권을 부정적으로 쓰고 있다. 셋째, 원나라를 섬긴 부분에 대하여 대명관계가 확립된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사 편찬자는 부정적으로 쓰고 있고, 그 이전 시기에 기록된 고려사 속 사신(史臣)의 견해에서는 긍정적으로 쓰여 있다. 넷째, 고려 말 개혁론자의 견해를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부분에서 고려 당시의 사실과 다른 점이 생기게 되었다.
(高麗史全文)
조선시대 세종의 명으로 찬진(撰進)된 편년체 고려시대사. 권초(權草)·홍의초(紅衣草)라고도 한다. 1438년(세종 20) 신개(申槪)·권제(權)·안지(安止) 등 춘추관의 사관에 의해 편찬작업이 이루어져, 42년 완성되고 48년 일단 인출되었으나, 일부의 인물평가가 공정하지 못하다 하여 반포가 중지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편찬과 개찬을 거듭한 《고려국사》, 개찬 《고려국사》, 《수교(校)고려사》에 이어 네번째로 시도된 고려시대사이며, 직서주의(直書主義) 원칙에 입각하여 고려시대 당시 사용한 용어를 원래의 기록대로 직서하는 등 이 앞의 사서가 범한 오류를 시정하였다. 또 고려실록을 통해서 소략한 기사를 상세히 보충하여, 역시 앞서의 사서보다 충실을 기하였다. 그러나 편찬에 참가한 권제가 남의 청탁을 받고 내용을 고치고 자신의 조상에 대한 기술을 사실과 다르게 쓰는 등 불공정의 문제가 제기되어 반포가 중지되고, 편찬에 참여한 권제·안지·남수문(南秀文) 등은 처벌되었다. 결국 조선시대의 고려시대사 편찬은 《고려사전문》이 반포 중단된 이듬해인 1449년(세종 31)에 착수되어 51년(문종 1)에야 마무리되었다.
(高麗史節要)
조선 전기에 편찬된 고려시대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책. 활자본. 35권 35책. 김종서(金宗瑞) 등이 왕명을 받고 찬수(纂修)하여 1452년(문종 2) 춘추관(春秋館)의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현재 인멸된 《수교고려사(校高麗史)》를 바탕으로 하여 쓰여진 것인데, 《고려사》만큼 내용이 풍부하지 못하나 거기에 없는 사실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고, 또 《고려사》에 누락된 연대가 밝혀져 있는 것이 많다. 기전체(紀傳體)인 《고려사》와 함께 고려에 관한 기본사료로 쌍벽을 이룬다. 초판본의 완질(完帙)은 일본 나고야[名古屋]의 호사문고[蓬左文庫]에 있으며, 서울대학교의 규장각도서는 11책이 낙질(落帙)된 것이다. 1932년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규장각본을 영인하였는데, 이어 일본에 완질이 있음을 알자 1차 영인에 빠진 권1·권6·권18과 전(箋)·범례·수사관(修史官)·목록·발(跋) 등을 따로 영인하여 《고려사절요보간(高麗史節要補刊)》이라는 이름으로 38년에 간행하였다. 또한, 59년 동국문화사(東國文化社)에서 규장각본을 위주로 영인 간행하였고, 68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국역 출판하였다.
* 이곳에 실은 자료는 한국사료연구소 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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