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 밭에 쓸쓸히…초라한 ‘고려 왕릉’ 분단 후 첫 북쪽 왕릉 12기 최근 모습 공개
일제·한국전 거치며 도굴·파괴 흔적 그대로
북한 개성 교외 만수산 기슭 언덕에 있는 고려 8대 임금 현종의 선릉. 병풍석이 묻힌 채 민묘처럼 퇴락한 무덤을 훼손된 석물들이 쓸쓸히 지키고 서 있다. 무덤 바로 앞에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다. 장경희 교수 제공
현종을 비롯해 정종(3대), 예종(16대) 등 개성 부근에 있는 고려시대 주요 임금 12명의 왕릉 모습이 8일 공개됐다. 고려 왕릉의 최근 모습이 확인된 것은 분단 이후 처음이다.
북한 개성 도심에서 서북쪽으로 4㎞가량 떨어진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이곳 만수산 자락 언덕의 옥수수밭 안쪽에 부서진 석물 몇 개와 함께 자리한 무덤이 눈에 들어온다.
고려 8대 임금 현종(재위 1010~1031)의 무덤이다. 강감찬 장군을 시켜 거란 침입을 물리치고 왕조의 기틀을 다졌지만, 현종은 지금 너무도 초라해진 무덤에 잠들어 있다.
병풍석들은 흙에 묻히거나 부서졌고, 난간 기둥돌도 대부분 없어졌다.
이날 <한겨레>에 사진을 공개한 장경희 한서대 교수(문화재보존학)는 “2005년부터 북한 당국과 교섭해 현지에서 직접 찍은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들을 보면, 고려 왕릉 대부분의 능역이 일제 때의 도굴과 한국전쟁 때의 파괴 등을 거치며 심하게 훼손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교수는 “남북 당국간 협력을 통한 체계적인 복구·보존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천년의 눈물’…모습 드러낸 개성의 고려 왕릉 석축 파묻히고 난간석 나뒹굴고
농지개간·남벌로 민묘처럼 초라
개성시 판문군에 있는 고려 5대 임금 경종(재위 975~981)의 영릉. ‘여걸’ 천추태후는 원래 그의 다른 왕비였다. 뒷산의 숲이 모두 베어진데다, 석물들도 거의 사라져 황량한 분위기다.
장경희 한서대 교수는 북한 당국과 교섭해 2005년부터 직접 현지에서 실측조사를 하며 왕릉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개성의 남북 언저리인 옛 경기도 개풍군 일대로 협동농장 근방이거나 휴전선에 가까운 군사지역이어서 자유로이 접근할 수 없는 유적들이다.
개성시 룡흥리에 자리한 2대 혜종(재위 943~945)의 순릉. 석물이 대부분 사라지고 봉분도 깎여 고려 왕릉 중 가장 규모가 작은 편이다.
북한 개성 부근 고려 왕릉들의 모습이 분단 60여년 만에 확인됐다.
도굴과 관리 소홀 등으로 황량한 모습이지만, 10~14세기 우리 역사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적들이다.
장 교수가 공개한 사진들 가운데 왕릉은 모두 12기다. 2대 혜종에서 시작해 정종(3대), 경종(5대), 성종(6대), 현종(8대), 문종(11대), 순종(12대), 예종(16대), 신종(20대), 원종(24대), 충목왕(29대), 충정왕(30대) 등이다.
태조 왕건의 비 신성왕후, 경종의 비 헌정왕후, 신원 미상의 왕족 무덤떼인 칠릉떼 등도 소개됐다.
고려 왕릉 가운데 현재의 모습이 확인된 것은 첫 임금인 태조의 현릉과 31대 임금인 공민왕의 현·정릉 2곳뿐이다.
고려 왕릉은 통일신라 능묘의 전통을 계승해 산기슭에 3~4층 단을 쌓고 맨 윗단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봉분을 쌓고 아래로 석등, 문·무인석, 제향각 등을 배치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집중적인 도굴 피해를 입었고, 한국전쟁 때도 막대한 석물들이 파괴·분실돼 대다수는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북한 쪽은 주요 왕릉들을 보존급 유적으로 지정했으나, 야산 곳곳을 남벌하고 농지를 개간하면서 능역이 크게 축소됐다.
혜종·성종릉의 경우 병풍석과 석축이 파묻혔고, 경종릉은 장명등·석상·망주석이 사라졌다.
신종릉은 잘못된 복원으로 깨진 난간석이 굴러다니고, 민묘처럼 왜소한 몰골로 변했다.
장 교수는 “서울 근교 조선 왕릉들이 석물·수목·건축물까지 보존된 것과 대조된다”며 “산에 나무가 없어 큰비가 오면 봉토가 계속 유실될 수밖에 없는 만큼 종합방재대책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립고궁박물관은 장 교수의 답사 성과를 토대로 개성 왕릉 등에 대한 종합조사와 자료집 발간을 추진 중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장경희 교수 제공
6대 임금 성종(재위 981~997)의 강릉. 판문군 진봉리에 있다.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거란에게서 강동 6주를 얻어낸 왕이다.
개간된 논밭에 둘러싸여 민묘처럼 초라한 모양새다.
판문군 선적리에 있는 11대 문종(재위 1046~1083)의 경릉.
12도의 사학을 진흥시켰고 송나라와 국교를 열었던 왕이다. 능역이던 무덤 앞은 논밭으로 변했다.
즉위 석달 만에 숨진 12대 임금 순종(재위 1083)의 성릉. 판문군 진봉리에 자리하고 있다.
봉분 높이가 1.6m에 불과하며 병풍석도 사라진 상태다.
개성 부근 조선초기 왕릉도 주목해야 신의왕후릉, 태조릉에 영향 정종-왕후 쌍릉, 후대 ‘본보기’
조선 태조의 첫 왕비로 조선 건국(1392) 1년 전에 숨진 신의왕후의 제릉. 둘째 아들 방과가 2대 정종이며,
다섯째 아들 방원이 3대 태종이다. 정자각과 재실은 남았으나, 능역 앞까지 다랑논이 들어왔다.
두 무덤은 고려 왕릉처럼 산 중턱에 3, 4층 단을 축조한 뒤 병풍석, 난간석을 봉분에 두르고 망주석, 문석인, 정자각을 세웠다. 하지만 병풍석 등 조각의 정교성이나 장엄한 품격 등이 훨씬 돋보인다. 무덤을 지키는 수호 동물로 말(석마)을 추가했다는 점도 색다르다. 후릉의 경우 고려 공민왕 무덤인 현정릉에서 기본 얼개가 유래됐으나 조선 초 제릉과 건원릉의 새 형식을 반영했으며, 후대 숙종의 명릉, 경종의 의릉 등 17~18세기 왕릉의 양식적 전범이 되었다. 노형석 기자
조선 2대 임금 정종(재위 1398~1400)과 정안왕후가 나란히 묻힌 후릉의 전경. 정자각이 아래 있었으나 1970년대에 해체됐다고 전해진다. 현재 보수중이다.
개성 부근의 왕릉들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조선 태조의 첫째 왕비인 신의왕후의 ‘제릉’과 2대 정종 임금과 왕비 정안왕후의 쌍릉인 ‘후릉’이다. 제릉은 태조의 능인 건원릉에 영향을 주었고, 후릉은 조선 후기 왕릉의 주된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