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義天)]
생몰 : 1055-1101
시대 : 고려
별칭 : 왕후(王煦)
분야 : 종교 > 불교인 > 천태종 고승
의천(義天)
1055(문종 9)∼1101(숙종 6). 고려의 천태종(天台宗)을 창종한 고승. 성은 왕씨(王氏). 이름은 후(煦),
호는 우세(祐世),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송악출신.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 이씨(仁睿王后李氏)이다.
1. 출가와 수업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출가를 자원하였다.
1065년(문종 19) 5월 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그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때부터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율·논 삼장(三藏)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이처럼 학문에 정진하였기 때문에, 스승인 경덕국사가 죽자 그의 강의를 대신 맡게 되었고, 훌륭한 강의로
인하여 명성을 온 나라에 드날리게 되었다.
1067년(문종 21) 7월에는 왕으로부터 우세라는 호와 함께 승통(僧統)의 직책을 수여받았다.
2. 정원법사와 교유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불교를 더욱 깊게 연구하기 위하여 송나라에 유학을 계획하였고,
당시 송나라의 정원법사(淨源法師)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통하여 서로 교유하였다.
그에 따라 송나라 불교계의 동향도 알게 되어 유학의 뜻을 굳히고 부왕에게 알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일단 유학의 결심은 중단되었지만, 정원법사와의 교유만은 계속되어 그의 초상을 얻어 보기도 하고,
《화엄보현행원참의 華嚴普賢行願懺儀》 등 그의 저서를 모두 탐독할 정도로 두 사람 사이는 가까워졌다.
3. 송나라 유학
문종이 죽은 뒤인 1085년(선종 2) 4월에 그는 왕과 어머니에게 편지를 남기고 송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수개(壽介) 등 2명의 제자를 데리고, 정주(貞州)에서 배를 타고 5월에 송나라 판교진(板橋鎭)에 도착하여
송나라 왕에게 입국하게 된 이유와 동기를 알렸다.
송나라의 철종은 7월에 수도 변경(汴京)의 계성사(啓聖寺)에 머물게 하고 그에게 유성법사(有誠法師)를
천거하여 교유하도록 하였다.
유성법사는 원래 화엄의 대가였으므로 서로가 걸맞은 상대였다.
두 사람은 화엄의 깊은 사상과 현수(賢首)의 천태교판(天台敎判)에 대하여 다르고 같은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뒤 상국사(相國寺)에서 운문종(雲門宗)의 종본(宗本)을 방문하였고, 또 흥국사(興國寺)에서 인도 승려
천길상(天吉祥)을 만나 인도에 대한 여러가지 사정과 학문을 배웠다.
변경에서 여러 달을 보낸 뒤 항주(杭州)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의 정원법사에게로 가서 《화엄경》·
《능엄경》·《원각경》·《기신론》 등의 사상과 천태와 현수의 교학에 대하여 토론을 하고,
또 여러 종파의 학승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변대사(慈辨大師)와 영지사 원소율사(元炤律師)와의 교유가 깊어 천태교관과 계율과
정토교학에 관하여 폭넓은 담론을 나누기도 하였다.
특히, 의천이 출국할 때 많은 불교관계 전적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이곳 항주에 많은 학승들이 모여들었고,
그 전적을 중심으로 뜻깊은 토론도 전개되었다. 그 당시 송나라 학계는 무종(武宗)의 불교탄압과 9대에 걸친
전쟁으로 인하여 불교관계 서적들이 거의 없어진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고려에서 지엄(智儼)의 《공목장 孔目章》·《화엄수현기 華嚴授玄記》·《무성섭론소 無性攝論疏》·《기신론의기 起信論義記》와 현수의 《화엄탐현기 華嚴探玄記》·《기신론별기 起信論別記》·《법계무차별론소 法界無差別論疏》·《십이문론소 十二門論疏》·《삼보제장문 三寶諸章門》 등과 청량(淸凉)의 《정원신역화엄경소 貞元新譯華嚴經疏》, 규봉(圭峯)의 《화엄론관 華嚴論貫》 등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그를 찾아온 여러 학승들을 만나 담론할 기회를 많이 가지게 된 것이다.
4. 귀국과 불경간행
그때 본국에서는 선종이 모후의 간절한 뜻을 받들어 송나라 왕실에다 의천의 귀국을 청하는 글을 보냈다.
이에 1086년 2월 13일 항주에서 배편으로 변경에 오게 되었는데, 정원법사도 함께 배를 타고 전송하였다.
송나라의 서울에서 얼마 동안을 지낸 다음 수주의 진여사(眞如寺)에 가서 자예(子睿)의 사리탑을 참배하였고,
다시 천태산으로 가서 지의(智顗)의 탑을 참배하고 발원문을 지어 바쳤다.
이 발원문은 본국인 고려에 돌아가면 천태교학을 널리 선양하겠다는 서원이 중심내용이었다.
또, 명주(明州) 육왕광리사(育王廣利寺)에 가서 운문종의 회련(懷璉)을 만난 뒤, 1086년 5월 20일 출발하여
6월에 불교전적 3천여권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선종은 태후와 함께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하여 귀국을 환영하였다.
귀국한 뒤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의 고승들과 서적·편지 등을 교환하면서 학문에 더욱 몰두하였다.
특히, 정원에게는 《화엄경》의 세 가지 번역본과 이 경을 봉안할 장경각 건립비로 금 2천냥을 보냈다.
정원은 장경각을 건립하고 그 경을 봉안하였는데, 이 때문에 혜인원(惠因院)을 고려사(高麗寺)라 하였으며,
여기에는 의천의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흥왕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그는 요나라·송나라·일본 등에서 불교서적 4천여권을 수집하고
국내의 고서도 모았으며,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이들 경서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간행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 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편집하였다.
이 교장총록의 안제목은 ‘해동유본현행록(海東有本現行錄)’이라 하였으며, 줄여서‘의천목록(義天目錄)’
·‘의천록(義天錄)’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삼장(三藏)의 정본 외에 그 주석서인 장소(章疏)만을 수집하여 목록을 작성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일이다.
이 《신편제종교장총록》의 상권에는 경의 장소 561부 2, 586권, 중권에는 율의 장소 142부 467권, 하권에는
논의 장소 307부 1, 687권이 각각 수록되었는데, 모두 합쳐 1, 010부 4, 740권이 된다. 흥왕사 교장도감에서는
이 목록에 의하여 간행하였으며, 이를 《고려속장경 高麗續藏經》이라고 한다.
5. 천태종 개창
그뒤 선암사(仙巖寺)와 홍원사(洪圓寺)를 거쳐 해인사에서 심신을 정양하고 있었는데,
숙종이 왕위에 올라 초청하였으므로 다시 흥왕사에 돌아와 강의를 계속하였다.
1097년(숙종 2) 2월에 국청사(國淸寺)가 완성되자,
같은해 5월에 제1대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의하였다.
이때에 전국에서 모여든 고승들이 무려 1천명을 넘었다.
이때 처음으로 천태종의 개립을 보게 되었으며,
그뒤 1099년에는 제1회천태종의 승선(僧選)을 행하고,
2년 후에는 국가에서 천태종 대선(大選)을 행하였다.
이로써 천태종은 세상에서 공인된 한 종파가 된 것이다.
숙종의 열렬한 외호를 받아 국청사를 천태종의 근본도량으로 하여 천태교학을 강의하니,
당대의 신진학승들이 거의 다 천태종으로 모여들었다.
그 중에서도 구산선문의 선종과 화엄종의 유능한 승려들이 대부분 천태종으로 오게 되었다.
6. 사상과 저술
의천은 원래 화엄종계통의 승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태교학을 열심히 연구하고 천태종을 개립하게 된 까닭은 천태의 근본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의로써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선(禪)과 교(敎)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신라 중엽 이후부터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직접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되려는(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成佛)’
입장을 표방한 선이 전래되어 점차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것은 자연히 교종과의 대립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말기에는 교단이 선과 교로 양립되어 일대 파란을 겪게 되었다.
특히, 고려에 들어와서는 태조 때부터 목종 때까지는 선종이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종 이후부터
화엄종을 비롯한 교종이 세력을 얻어 선종에 정면으로 맞서게 되어, 선과 교의 대립은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의천은 이러한 고려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아 교단을 정리하고, 정도를 밝혀 올바른 국민사상을 확립시키려고
하였는데, 그러한 근본이념을 천태사상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의천은 불교전적을 정비하고, 《고려속장경》을 간행하였으며, 송나라에 유학하여 새로운 문화를
수입하였고,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발전을 도모하는 등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업적 외에 의천은 폭넓은 견문과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을 비롯하여, 화엄관계 전적에서 그 핵심사상만을 뽑아 모은 《신집원종문류 新集圓宗文類》 22권,
불교학에 도움이 되는 문장을 모은 《석원사림 釋苑詞林》 250권, 의천의 제자들이 그의 행적과 시 등을 모은
《대각국사문집 大覺國師文集》 23권과 《대각국사외집 大覺國師外集》 13권, 《간정성유식론단과 刊定成唯識論單科》 3권, 《천태사교의주 天台四敎儀註》 3권, 《계악권선면학 誡惡勸善勉學》 1권, 권수를 알 수 없는
《팔사경직석 八師經直釋》, 《소재경직석 消災經直釋》 등이 있다. 이러한 저술 외에도 의천은 《화엄경》
180권을 비롯, 국어로 번역하여 강의한 것이 300여권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 저술들이 거의 없어지고 현재는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과《대각국사문집》,《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원종문류》,《석원사림》의 일부,《간정성유식론단과》의 서문만이 전하여오고 있다.
그의 문하에서 교웅(敎雄)·징엄(澄儼)·수개 등 160여 고승이 배출되어 고려불교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비는 영통사와 선봉사(僊鳳寺)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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